⊙ “가장 중요한 건 자유, 선택, 협력”
⊙ “탈북민은 특수 집단 아냐… 우리 사회 한 구성원일 뿐”
⊙ 2012년 탈북민 강제 북송 사건 이후 북한 인권에 관심
⊙ 상처뿐이었던 첫 한국 방문… ‘하버드 간판’ 떼고 다시 찾은 이유
⊙ “탈북민은 특수 집단 아냐… 우리 사회 한 구성원일 뿐”
⊙ 2012년 탈북민 강제 북송 사건 이후 북한 인권에 관심
⊙ 상처뿐이었던 첫 한국 방문… ‘하버드 간판’ 떼고 다시 찾은 이유
- 사진=월간조선
겉으로 보기에는 흔한 원어민 교사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Freedom Speakers International·FSI)’의 공동 대표인 케이시 라티그 주니어(Casey Lartigue Jr.) 씨 얘기다. 지난 9년간 탈북민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모두 ‘일대일’ 수업이다. 지난 2월 28일 서울 마포구 FSI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500여 명 탈북민에 일대일 무료 영어 수업
지난 2020년 설립한 비영리단체인 FSI는 단순한 영어 교육 기관이 아니다. 탈북민이 겪은 참혹한 경험을 국제사회에 영어로 알리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영문 자서전 출판과 연설을 통해서다. 라티그 대표는 “FSI의 가장 큰 목표는 탈북민 개개인의 자신감 고취 및 역량 강화”라면서 “탈북민들의 영어 능력 향상은 그 과정일 뿐”이라고 했다.
FSI의 전신(前身)은 2013년 설립한 TNKR(Teach North Korean Refugees)이다. ‘탈북민을 가르친다’는 뜻처럼 한때는 알파벳부터 가르치던 영어 교육 기관이었다.
북한에는 외래어가 없다. 한국에서 일상처럼 쓰는 바나나, 컵, 버스, 커피 등의 단어가 탈북민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실제로 2014년 통일부가 탈북민 1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은 국내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41.4%)’를 꼽았다. 미국에서 ‘교육 자유권’을 연구한 라티그 대표는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2014년부터 2020년까지 500명 이상의 탈북민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모두 일대일 수업이었다. 물론 라티그 대표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자원봉사자들의 힘도 빌렸다. 다만 원칙은 분명히 지켰다. ‘철저히 탈북민 주도의 수업이 되도록 할 것.’ 탈북민 스스로 강사는 물론, 수업 장소를 선택하도록 했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목적을 먼저 듣고, 맞춤형 내용을 준비했다.
그러다 위기가 왔다. 코로나19로 대면 수업이 어려워지면서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이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탈북민 교육 인원 수를 줄이고 ‘출판’ 영역을 포함시켜 FSI가 탄생했다. 위기가 TNKR을 FSI로 ‘진화’시킨 셈이다.
영문 자서전으로 탈북민 실태 알려
“탈북민들 스스로 입을 열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를 가지기까지는 서로 간 신뢰 구축이 우선돼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도, 얼굴도 숨겼던 탈북민들이 대중 앞에 서고, 한국말로도 하기 어려운 ‘인권’ 이야기를 영어로 하려면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하죠. 이 시간 끝에 자신의 이야기를 비로소 털어놓다 보면, 탈북민들은 스스로 치유를 받기도 하고, 자신감과 정체성을 찾는 데에서 나아가 자긍심까지 갖게 돼요.”
탈북민 중에서는 일반 사설 기관에서 영어를 배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자신감 고취, 치유, 인권에 초점을 둔 기관은 FSI가 유일하다.
현재 FSI에서 공부하는 탈북민은 25명 정도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 TNKR 시절부터 오랫동안 FSI와 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중 이날 막 수업을 마친 한송미(31)씨를 만날 수 있었다. 2011년 탈북한 그는 2019년부터 케이시 대표에게 수업을 받았다. 한씨는 “처음에는 탈북민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영문 서적까지 출판했다”고 했다.
한송미씨는 FSI 첫 공식 저자다. 지난해 10월 라티그 대표와 공동으로 《Greenlight to Freedom(자유를 향한 청신호)》을 펴냈다. 한씨와 그의 어머니가 북한에서 겪었던 고난과 역경, 그리고 탈북을 결심한 이유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한씨는 이 내용을 토대로 지난 3월 16일 미국 뉴욕 UN에서 스피치까지 했다.
박은희(31)씨는 TNKR에서 ABC부터 배웠다고 한다. 자신감을 얻은 뒤 호주 연수와 미국 인턴십까지 한 그는 이제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한다. 박씨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내가 왜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하지’ ‘북한에서 온 건 결코 창피한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2014년 영국 BBC 선정 ‘세계 100대 여성’에 뽑힌 북한 인권 활동가 박연미씨도 TNKR 출신이다. 박연미씨는 2014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북한 장마당 세대의 희망”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인물이다. 이후 이곳 탈북민들은 박씨를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탈북민 개개인 역량 강화에 집중”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라티그 대표는 워싱턴 DC 카토연구소(CATO Institute)에서 경제적 약자, 흑인들의 교육권을 위한 교육정책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또한 미국 비영리단체(Fight for Children)에서 경제적 약자(弱者)를 위한 장학금 지원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근무하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외국어대학교대학원 겸임교수, 《코리아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 특히 기억에 남는 탈북민 사례가 있나요.
“너무 많아요. 그간 거쳐 간 약 500명의 수강생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는, 특별한 개인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특정할 수가 없네요.”
— 수많은 탈북민을 만나며 느낀 그들만의 공통된 특성, 혹은 정서가 있다면요.
“탈북민을 ‘특수한 집단’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그들만의 공통된 사연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뭉뚱그려 한 집단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탈북민 또한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개인이니까요.”
— 책 출판과 연설 등 이들의 목소리를 영어로 세상에 알림으로써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북한 인권의 인식 개선과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보다는, 넓은 차원에서 상호 간 소통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탈북민 개개인의 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외국인들은 탈북민의 결정을 ‘개인의 삶이자, 자유를 찾기 위한 선택’으로 보지만, 외려 일부 한국인은 아직까지 이들에게 선입견을 갖는 것 같아요. 때문에 선을 넘는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죠. ‘너희 엄마는 어떻게 너를 남겨두고 먼저 탈북을 할 수가 있어?’와 같은 거죠. 이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영어로 더 넓은 세계에 알리면 포용적인 반응을 경험할 기회가 더 많을 거라고 봤습니다. 자연히 개개인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가능성이 더 커지는 거죠. 나도 인정받을 수 있구나, 내 삶도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여길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확장되는 셈입니다.”
자유·선택·협력
그는 지난 2004년 《교육적 자유(Educational Freedom)》라는 책을 공저(共著)하기도 했다. 12세 때는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자유의 예언가(Prophet of Freedom)》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 올바른 교육이란 뭘까요. 본인의 교육 철학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면.
“‘자유’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유고, 선택, 그리고 협력이에요. 예를 들어 공부보다 농구를 하고 싶은 학생이 있다고 쳐요. 그건 그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죠. 그에게는 공이 필요할 수도, 농구 골대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개개인의 필요에 맞춰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고, 이게 교육자와의 협력인 거죠. 사제 간이라는 상하 구조가 아니라, 파트너 관계로서의 협력. 앞서 TNKR 당시 학생 스스로 교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런 차원입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줘야 책임감이 뒤따르니까요.”
— 그 차원에서 한국 사회의 교육 방식은 어떻게 보는지.
“자유와 선택권이 거의 없죠. 정해진 커리큘럼 안에서 움직이고, 그 틀을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는 구조입니다. 한때 이를 탈피하고자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게 유행한 적이 있잖아요. 한데 이마저도 또 다른 시스템으로 정착해버리더라고요. 한국인들은 이미 정량적 학습에 길든 것 같아요.”
상처뿐이었던 한국 첫 방문
한국에 처음 방문한 건 1992년 5월이었다. 대만을 여행하던 중 비자 연장을 위해 잠깐 들렀다. LA폭동(1992년 4월 29일~5월 4일) 직후여서인지, 한국인들의 ‘눈총’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첫 이미지가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인연의 끈이라는 게 희한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DC 카토연구소에서 일하는데, 한국의 자유기업원(CFE)에서 이 연구소로 견학을 왔고, 그에게 방문 연구원(비지팅 펠로)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고심 끝에 받아들였고 2010년부터 한국에 아예 둥지를 틀게 됐다. 2년간 CFE에서 일한 이후 시민단체 프리덤 팩토리의 국제협력실장과 탈북자학교인 물망초학교에서 국제협력자문위원도 맡았다.
— 탈북민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요.
“2012년 중국에서 30명의 탈북민이 강제 북송 당했다는 뉴스를 본 게 결정적 계기였어요. 그 문제로 박선영 전 국회의원(물망초 이사장)이 중국 대사관 앞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투쟁에 참가했다가 박 전 의원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를 통해 여러 탈북민을 만나게 됐고,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을 보고 내가 외치던 자유는 그저 ‘샴페인 파티(배부른 소리)’였구나, 하고 느꼈죠. ‘누군가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텐데’에서 나아가 ‘그 누군가가 내가 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고,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님 등과 함께 세미나를 열고, 북한 이슈를 알리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이시 덕분에 삶이 바뀌었다”
그는 탈북민들의 자신감 고취를 위해 영어 말하기 대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다.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이 이 대회를 후원한다. 지난 2월 25일에는 올 들어 첫 대회를 성황리에 치렀다.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과 연계한 탈북 청소년 영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미래 인재를 키우고 한미(韓美) 양국의 가교 역할도 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9일에는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라티그 대표는 “탈북민을 돕는다는 걸 인정받아 명예시민이 된 것이므로 이 일을 지속하는 게 내 역할일 것”이라고 했다.
FSI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단체다. 후원금으로만 운영한다. 때로는 자비를 들여야 할 만큼 사정이 넉넉지 않다. 지금도 서울 마포구 한 작은 빌라의 1층을 사무실로 쓴다.
— 계속 미국에 있었으면 교육 정책 분석관으로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미국 저명 일간지에 칼럼을 내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죠. 한국에 온 이후에도 다양한 회사에서 고연봉의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FSI는 제가 선택한 숙명입니다. 재정적으로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돈이나 유명세를 좇는 삶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어요.”
기사에 기재할 나이를 묻는 질문에 “내가 몇 살인지보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답한 그는 앞으로의 계획 또한 거창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라티그 대표는 “규모를 더 키우겠다는 욕심은 없고, 지금처럼 즐겁게 현상 유지를 하는 게 내 본분”이라고 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도 여러 탈북민은 “케이시 덕분에 삶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500여 명 탈북민에 일대일 무료 영어 수업
지난 2020년 설립한 비영리단체인 FSI는 단순한 영어 교육 기관이 아니다. 탈북민이 겪은 참혹한 경험을 국제사회에 영어로 알리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영문 자서전 출판과 연설을 통해서다. 라티그 대표는 “FSI의 가장 큰 목표는 탈북민 개개인의 자신감 고취 및 역량 강화”라면서 “탈북민들의 영어 능력 향상은 그 과정일 뿐”이라고 했다.
FSI의 전신(前身)은 2013년 설립한 TNKR(Teach North Korean Refugees)이다. ‘탈북민을 가르친다’는 뜻처럼 한때는 알파벳부터 가르치던 영어 교육 기관이었다.
북한에는 외래어가 없다. 한국에서 일상처럼 쓰는 바나나, 컵, 버스, 커피 등의 단어가 탈북민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실제로 2014년 통일부가 탈북민 1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은 국내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41.4%)’를 꼽았다. 미국에서 ‘교육 자유권’을 연구한 라티그 대표는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2014년부터 2020년까지 500명 이상의 탈북민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모두 일대일 수업이었다. 물론 라티그 대표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자원봉사자들의 힘도 빌렸다. 다만 원칙은 분명히 지켰다. ‘철저히 탈북민 주도의 수업이 되도록 할 것.’ 탈북민 스스로 강사는 물론, 수업 장소를 선택하도록 했다.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목적을 먼저 듣고, 맞춤형 내용을 준비했다.
그러다 위기가 왔다. 코로나19로 대면 수업이 어려워지면서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이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탈북민 교육 인원 수를 줄이고 ‘출판’ 영역을 포함시켜 FSI가 탄생했다. 위기가 TNKR을 FSI로 ‘진화’시킨 셈이다.
영문 자서전으로 탈북민 실태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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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I 사무실 벽면에 붙은 사진들. 이곳에서 영어를 배운 탈북민들이다. 가장 오른쪽 사진은 2014년 BBC 선정 세계 100대 여성으로 선정된 박연미씨. 사진=월간조선 |
탈북민 중에서는 일반 사설 기관에서 영어를 배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자신감 고취, 치유, 인권에 초점을 둔 기관은 FSI가 유일하다.
현재 FSI에서 공부하는 탈북민은 25명 정도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 TNKR 시절부터 오랫동안 FSI와 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중 이날 막 수업을 마친 한송미(31)씨를 만날 수 있었다. 2011년 탈북한 그는 2019년부터 케이시 대표에게 수업을 받았다. 한씨는 “처음에는 탈북민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영문 서적까지 출판했다”고 했다.
한송미씨는 FSI 첫 공식 저자다. 지난해 10월 라티그 대표와 공동으로 《Greenlight to Freedom(자유를 향한 청신호)》을 펴냈다. 한씨와 그의 어머니가 북한에서 겪었던 고난과 역경, 그리고 탈북을 결심한 이유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한씨는 이 내용을 토대로 지난 3월 16일 미국 뉴욕 UN에서 스피치까지 했다.
박은희(31)씨는 TNKR에서 ABC부터 배웠다고 한다. 자신감을 얻은 뒤 호주 연수와 미국 인턴십까지 한 그는 이제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한다. 박씨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내가 왜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하지’ ‘북한에서 온 건 결코 창피한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2014년 영국 BBC 선정 ‘세계 100대 여성’에 뽑힌 북한 인권 활동가 박연미씨도 TNKR 출신이다. 박연미씨는 2014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북한 장마당 세대의 희망”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인물이다. 이후 이곳 탈북민들은 박씨를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탈북민 개개인 역량 강화에 집중”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라티그 대표는 워싱턴 DC 카토연구소(CATO Institute)에서 경제적 약자, 흑인들의 교육권을 위한 교육정책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또한 미국 비영리단체(Fight for Children)에서 경제적 약자(弱者)를 위한 장학금 지원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근무하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외국어대학교대학원 겸임교수, 《코리아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 특히 기억에 남는 탈북민 사례가 있나요.
“너무 많아요. 그간 거쳐 간 약 500명의 수강생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는, 특별한 개인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특정할 수가 없네요.”
— 수많은 탈북민을 만나며 느낀 그들만의 공통된 특성, 혹은 정서가 있다면요.
“탈북민을 ‘특수한 집단’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그들만의 공통된 사연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뭉뚱그려 한 집단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탈북민 또한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개인이니까요.”
— 책 출판과 연설 등 이들의 목소리를 영어로 세상에 알림으로써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북한 인권의 인식 개선과 같은 거창한 목표라기보다는, 넓은 차원에서 상호 간 소통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탈북민 개개인의 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외국인들은 탈북민의 결정을 ‘개인의 삶이자, 자유를 찾기 위한 선택’으로 보지만, 외려 일부 한국인은 아직까지 이들에게 선입견을 갖는 것 같아요. 때문에 선을 넘는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죠. ‘너희 엄마는 어떻게 너를 남겨두고 먼저 탈북을 할 수가 있어?’와 같은 거죠. 이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영어로 더 넓은 세계에 알리면 포용적인 반응을 경험할 기회가 더 많을 거라고 봤습니다. 자연히 개개인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을 가능성이 더 커지는 거죠. 나도 인정받을 수 있구나, 내 삶도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여길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확장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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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 라티그 FSI 공동대표는 지난 9년간 탈북민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궁극적인 목적은 탈북민들의 자긍심 고취다. 사진은 FSI의 전신 TNKR 시절, 탈북민들과 함께. 사진=조선DB |
— 올바른 교육이란 뭘까요. 본인의 교육 철학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면.
“‘자유’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유고, 선택, 그리고 협력이에요. 예를 들어 공부보다 농구를 하고 싶은 학생이 있다고 쳐요. 그건 그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죠. 그에게는 공이 필요할 수도, 농구 골대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개개인의 필요에 맞춰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고, 이게 교육자와의 협력인 거죠. 사제 간이라는 상하 구조가 아니라, 파트너 관계로서의 협력. 앞서 TNKR 당시 학생 스스로 교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런 차원입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줘야 책임감이 뒤따르니까요.”
— 그 차원에서 한국 사회의 교육 방식은 어떻게 보는지.
“자유와 선택권이 거의 없죠. 정해진 커리큘럼 안에서 움직이고, 그 틀을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는 구조입니다. 한때 이를 탈피하고자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게 유행한 적이 있잖아요. 한데 이마저도 또 다른 시스템으로 정착해버리더라고요. 한국인들은 이미 정량적 학습에 길든 것 같아요.”
상처뿐이었던 한국 첫 방문
한국에 처음 방문한 건 1992년 5월이었다. 대만을 여행하던 중 비자 연장을 위해 잠깐 들렀다. LA폭동(1992년 4월 29일~5월 4일) 직후여서인지, 한국인들의 ‘눈총’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첫 이미지가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인연의 끈이라는 게 희한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DC 카토연구소에서 일하는데, 한국의 자유기업원(CFE)에서 이 연구소로 견학을 왔고, 그에게 방문 연구원(비지팅 펠로)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고심 끝에 받아들였고 2010년부터 한국에 아예 둥지를 틀게 됐다. 2년간 CFE에서 일한 이후 시민단체 프리덤 팩토리의 국제협력실장과 탈북자학교인 물망초학교에서 국제협력자문위원도 맡았다.
— 탈북민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요.
“2012년 중국에서 30명의 탈북민이 강제 북송 당했다는 뉴스를 본 게 결정적 계기였어요. 그 문제로 박선영 전 국회의원(물망초 이사장)이 중국 대사관 앞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투쟁에 참가했다가 박 전 의원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를 통해 여러 탈북민을 만나게 됐고,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을 보고 내가 외치던 자유는 그저 ‘샴페인 파티(배부른 소리)’였구나, 하고 느꼈죠. ‘누군가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텐데’에서 나아가 ‘그 누군가가 내가 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고,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님 등과 함께 세미나를 열고, 북한 이슈를 알리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케이시 덕분에 삶이 바뀌었다”
그는 탈북민들의 자신감 고취를 위해 영어 말하기 대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다.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이 이 대회를 후원한다. 지난 2월 25일에는 올 들어 첫 대회를 성황리에 치렀다.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과 연계한 탈북 청소년 영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미래 인재를 키우고 한미(韓美) 양국의 가교 역할도 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9일에는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라티그 대표는 “탈북민을 돕는다는 걸 인정받아 명예시민이 된 것이므로 이 일을 지속하는 게 내 역할일 것”이라고 했다.
FSI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단체다. 후원금으로만 운영한다. 때로는 자비를 들여야 할 만큼 사정이 넉넉지 않다. 지금도 서울 마포구 한 작은 빌라의 1층을 사무실로 쓴다.
— 계속 미국에 있었으면 교육 정책 분석관으로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미국 저명 일간지에 칼럼을 내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죠. 한국에 온 이후에도 다양한 회사에서 고연봉의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FSI는 제가 선택한 숙명입니다. 재정적으로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돈이나 유명세를 좇는 삶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어요.”
기사에 기재할 나이를 묻는 질문에 “내가 몇 살인지보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답한 그는 앞으로의 계획 또한 거창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라티그 대표는 “규모를 더 키우겠다는 욕심은 없고, 지금처럼 즐겁게 현상 유지를 하는 게 내 본분”이라고 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도 여러 탈북민은 “케이시 덕분에 삶이 바뀌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