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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越北했다 추방당한 윤봉길 의사 조카 윤홍

“생활고 때문에 월북했지만, 북한은 지옥이었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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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박정희 대통령 배려로 큰 사업체 운영
⊙ “1990년대 케이블 TV 사업으로 400억원을 사기당하고 빚쟁이로 전락”
⊙ “인생이 부끄러워 북한 가기로 결심”
⊙ “김정일 사망 당시 남한 대표로 분향소 참배”
⊙ 북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월북한 청년도 있어
⊙ “틀니 해준다며 강제로 생이빨 다 뽑아…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
윤봉길 의사 조카 윤홍. 사진=《일요신문》 제공
  2010년 1월 10일에 자진 월북(越北)했다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쫓겨난 사람이 있다. 윤홍(72)씨다. 윤씨는 한때 남한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그러던 중 지인에게 속아 한순간에 빚쟁이로 전락했다. 빚쟁이가 된 윤씨의 선택은 월북이었다.
 
  이런 윤씨에게 특별한 삼촌이 있다. 윤봉길 의사다. 윤씨는 윤 의사의 넷째 동생 윤영의 아들이다.
 
  윤씨가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것은 2013년 10월 25일이다. 이후 2014년 1월 밀입북해 북측 관계자들과 접촉한 혐의(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찬양 등)로 구속기소 되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현재 윤씨는 서울에 살고 있다. 지난 3월 윤씨를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을 수 있었다.
 
  윤씨의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이다. 윤씨는 초등학교까지 예산에서 윤봉길 의사의 부인인 배용순씨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후 서울에서 명문고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는 대학교에서 법을 전공했어요. 11회 사법시험도 봤죠. 1차에 합격하고 곧바로 2차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데 안 했어요.”
 
  ― 왜 2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야 정신을 못 차렸죠. 놀음에 정신 팔려서 친구들하고 놀러만 다녔어요. 아마 그때 2차 시험을 보고 했으면 인생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거예요.”
 
  윤씨는 속상한 듯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릴 땐 그래도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초·중·고등학교 땐 시험 보기 전날에 교과서를 한번 보면 90점 이상은 나왔어요. 그렇다 보니 자만을 한 거죠. 그리고 당시엔 집안이 잘살다 보니 사법시험을 보지 않아도 먹고살 걱정 안 했어요.”
 
 
  전국 전봇대 광고 독점
 
  1968년 국가에선 윤봉길 의사의 유족을 배려해 전봇대 광고 독점권을 줬다. 이로써 윤씨 가족은 전국의 전봇대에 붙는 대기업부터 학원, 병원, 호텔 등의 광고를 독점관리 했다. 윤씨 말에 따르면 한 집안에 이처럼 특혜를 주는 건 쉽게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사업하면서 초반에는 세금도 내지 않았어요. 나중에 우리가 미안한 마음에 어느 정도 세금을 냈어요. 정말 큰 특혜죠. 그렇게 하다가 돈이 모이고 하니까 형제끼리 알력다툼이 생기고, 서로 싸웠어요.”
 
  결국 1990년대 말 2세들의 사업권 다툼으로 전봇대 광고 독점권을 다시 국가에 반납했다.
 
  ― 전봇대 광고 사업으로 돈을 엄청나게 버셨겠네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사업을 맡아서 했어요. 정말 상상 그 이상으로 돈을 벌었죠. 작은 광고는 하나에 6000원 정도 했고, 큰 광고는 개당 1만원 정도 했으니 생각해보세요. 엄청나죠. 전국의 전봇대를 다 관리했으니까요. 그 시절 집에 돈이 많은 걸 알고 정말 사치스럽게 살았어요. 당시 직원들의 월급이 몇십만 원 정도 할 때 저는 몇백만 원을 들고 호텔에 들락거리며 살았어요. 돈이 없으면 어머니께 책을 산다고 거짓말하면서까지 돈을 물 쓰듯 썼어요.”
 
  윤씨는 그렇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의 한 중견 언론사에 기자로 취직했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자신은 월급을 거의 써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자신의 월급을 생활형편이 어려운 동료 기자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기자도 오래 못 했어요. 나랑 잘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편집장이랑도 싸우고 하다 보니 일찍 그만뒀어요. 그러고 나서 집안 사업을 한 거죠. 경인 지역을 내가 맡아서 했어요. 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하죠.”
 
  윤씨는 1990년 초 집안 사업을 접고 다른 쪽에 눈을 돌렸다. 케이블 방송 사업이다. 1991년 한국에 케이블 방송이 시작되면서 사업가들이 케이블 방송 사업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가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했다. 윤씨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6개월은 잘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동업하던 지인에게 속아 사업은 망하고, 몇백억 원의 빚까지 지게 됐다. 이후 윤씨는 빚쟁이들을 피해 숨어다니는 신세가 됐다. 윤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놓은 아파트 2채를 팔아 목돈을 마련한 뒤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중국서 떠돌이 생활하다 北에 갈 결심해
 
  “당시 아파트 한 채는 쉽게 팔렸어요. 그런데 한 채가 팔리지 않았죠. 그래서 기다렸는데 그동안 집 판 돈을 다 써버렸어요. 나중에 돈이 없어서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요. 정말 부끄럽고 처참했어요. 돈이 많을 땐 옆에서 떠나지 않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해외 나가서 집 판 돈을 다 쓰고 죽으려고 했어요.”
 
  윤씨가 중국으로 출국한 건 2009년이었다. 그는 남한에서의 사업 실패와 지인의 배신 등으로 인한 충격으로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도착해 몇 달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행 중에 윤씨는 북한 사람을 만났다. 이때 처음으로 북한으로 갈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작 북한으로 가려고 하니 많이 망설여졌어요. 만약 내가 북한으로 가게 되면 삼촌과 집안에 먹칠하고, 나라를 배신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고민했어요. 하지만 다시 남한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어요. 결국 베이징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찾아갔죠. 그곳에서 대사관 간부를 만나 월북 의사를 밝혔어요. 그 사람이 ‘자기들도 절차가 있으니 베이징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당시 여비도 거의 떨어져가고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그는 베이징에서 더는 대기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까지 이동한 윤씨는 밤에 몰래 두만강 연안까지 나갔다. 두만강 앞에 선 그는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정말 캄캄한 두만강 기슭까지 가서도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 길이 맞는지를. 그런데 뭐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삼촌과 집안에 피해가 안 가게 하려고 신분을 숨기자고 결심하고 건넜죠.”
 
 
  “나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어”
 
윤홍씨가 두만강을 건너 도착한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의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윤씨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간 것은 2010년 1월 10일이다.
 
  ― 두만강을 건너니 어디였습니까.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함경북도 온성군은 한반도 북쪽 끝이다. 이곳은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국경을 마주하는 국경마을이다.
 
  ― 강을 건넌 다음 어떻게 됐습니까.
 
  “군인들이 바로 와서 저를 끌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서 이틀 동안 있으면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 윤봉길 의사가 삼촌이라고 말했습니까.
 
  “처음엔 안 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왔다는 사람이 저를 조사하는데 그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남한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윤 의사의 조카인 것까지 모두 알고 있더군요.”
 
  ― 그럼 온성에서 계속 조사를 받았습니까.
 
  “아니요. 온성에서 한 4일 정도 있다가 회령이라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함경북도 회령시는 온성군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마을이다. 김일성의 본처인 김정숙의 고향이기도 하다. 북한 당국은 2010년 1월 14일 윤씨를 온성군에서 회령시로 옮겼다. 그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다.
 
  윤씨의 증언으로는 회령시 보위부(북한 국가정보원 격)에서 자신의 조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이들은 윤씨를 회령 호텔에서 기거하게 했다. 회령시에는 호텔이 하나 있다. 남한의 여관과 비슷한 시설이다. 그래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중국 사람들이나 회령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다. 물론 북한 사람들도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들이다.
 
 
  회령 구경 후 후회 시작
 
2019년 7월 6일 자진 월북한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의 차남 최인국씨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최씨에게 꽃다발을 주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회령에서 한 4개월 정도 있었어요. 그곳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어요. 밖에는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나를 지키고 있었고, 보위지도원 한 명이 나와 함께 숙식하면서 조사를 했죠. 조사가 끝나고 그다음부터 종이와 펜을 주면서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해서 다 쓰라고 시켰어요.”
 
  처음에 윤씨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남한에 대해 성실히 적었다. 북한 보위지도원들은 윤씨의 글을 보고 그냥 넘어가는 날도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마음에 들 때까지 밤을 새워가면서 다시 쓰게 했다.
 
  “나중에는 살을 붙여서 쓰니까 잘 썼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신문에 내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대략 20번 정도 썼는데, 잘 썼다는 얘기는 딱 한 번 들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글을 썼죠.”
 
  ― 그럼 계속 호텔에만 계셨습니까.
 
  “회령에 있을 땐 두 번 정도 외출을 했어요. 내가 하도 답답하다고 하니까 데리고 나갔는데, 정말 충격이었어요. 사람들 옷차림도 그렇고 집들도 한심했어요. 상점에 갔는데 전부 중국산 상품밖에 없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회령은 그래도 국경지역이라 다른 지역보단 생활 수준이 나은 곳임에도 정말 어려워 보였어요.”
 
  윤씨는 회령 시내를 구경하고 나서 북한에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외출하고 온 날 밤엔 잠이 안 왔어요. 바로 잘못 왔구나 하고 후회하기 시작했죠. 내가 있는 호텔도 환경이 말이 아니었어요. 일단 전기가 안 들어와서 초를 켜놓고 있고, 더운물도 나오지 않아 엄청 고생을 했죠.”
 
 
  “아직도 월북자들 많아… 호남 출신 청년과 동행”
 
  윤씨는 회령에서 90일 정도를 머물렀다. 그곳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한 보위원들이 시키는 대로 남한에 대한 정보를 글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2010년 3월 어느 날 윤씨는 승합차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갔다.
 
  “어느 날인가 다른 보위원이 들어와서 짐을 챙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그가 묻지 말고 짐이나 챙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짐을 챙겨서 내려가니 정문에 승합차가 있었어요. 차에 오르니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한 명 있었어요. 그렇게 우리 두 명과 보위원 3명이 함께 떠난 거죠.”
 
  ― 그 청년은 누굽니까.
 
  “나처럼 월북한 청년이었어요. 고향은 호남인데 서울에서 살다가 호기심에 왔대요. 근데 이 친구도 북한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어요.”
 
  윤씨와 청년을 인솔하는 보위원들은 이들이 대화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보위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청년에게 말을 걸면 그는 질문에 대한 답만 했다고 한다. 윤씨 일행은 20시간 정도를 달려 강원도 원산에 있는 한 초대소에 도착했다.
 
  북한의 초대소란 북한 전역에 있는 당과 특권층의 전속 별장을 말한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별장으로 사용되는 시설을 ‘초대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엔 다양한 성격과 용도의 초대소가 있다. 해외 요인들을 맞이하는 장소로도 역할을 한다. 각급 기관마다 딸린 전용 초대소도 있다.
 
  강원도 원산의 경우 대표적인 초대소는 ‘원산 초대소’다. 원산 초대소는 북한의 초대소 중 최상급 시설을 갖춘 곳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갈마 초대소’ 등 여러 초대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강원도 원산의 여러 초대소 중 하나다. 윤씨 말에 따르면 이곳은 월북자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북한 미녀와의 결혼을 위해 월북한 청년도 있어”
 
  윤씨와 청년은 초대소에 도착해 서로 다른 방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이 자신의 옆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윤씨는 말했다.
 
  윤씨는 “강원도 초대소에 도착해서 며칠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고성이 오가고 뭔가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며 “그때 나와 같이 온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서 옆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대 후반처럼 보였어요. 덩치도 좋고 인물도 괜찮은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옆방에서 소란이 있고 하루는 베란다에 나갔는데 그 청년이 쩔뚝이면서 정문 쪽으로 뛰어나가는 거예요. 그 뒤로는 북한 군인들이 막 따라가고 아마 도망치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디로 도망치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혀 왔어요. 이후에 군인들이 이 친구를 때렸나 봐요. 구급차가 오더니 이 친구를 태우고 밖으로 나갔어요. 3일 정도 후에 이 친구가 군인들과 함께 들어왔어요. 이런 일이 한 차례 더 반복이 됐어요. 그런데 두 번째는 이 친구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다른 군인에게 들었는데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밖에도 윤씨가 머무는 곳엔 월북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북한 군인들이 윤씨의 말동무로 한 20대 청년을 방에 자주 들여보냈다고 한다. 이 청년은 울산이 고향이었다. 2003년 8월 21일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당시 북한 응원단으로 내려온 여성에게 반해 무작정 월북을 했다. 하지만 그 여성은 만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6년을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또 윤씨 앞방엔 서울에서 온 부부가 살았다. 이 부부는 돈을 내고 북한으로 들어왔다. 윤씨의 말이다.
 
  “군인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이 부부는 돈을 내고 북한으로 왔다고 해요. 그런데 남편이 의처증이 심해서 계속 부인을 의심했대요. 거기 군인들하고 바람을 피웠다고 하면서 부인을 계속 때렸나 봐요. 결국 남편은 부인을 죽이고 방에 불을 질러 자살하려고 했대요.”
 
  윤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현재도 북한에는 다수의 월북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월북자가 북한에서 몇 명 정도 살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통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로 월북자들의 현황은 파악하기 어렵다. 북한에서 알려주거나 우리 정보기관이 파악하지 못하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월북했는지 추정조차 못 한다. 월북했다가 다시 남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 수는 2013년 6명, 2014년 2명, 2015년 5명, 2018년 2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동국대 북한학과 김혜인씨의 석사학위 논문 〈노동신문의 월북기사 연구〉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2015년 말까지 《로동신문》에 소개된 월북 관련 기사는 총 668건이다. 물론 전쟁 이후 1960~1980년대가 가장 많았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에서 최고의 대접 받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윤씨는 회령에서 원산으로 옮기고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먼저 음식은 한 끼 반찬이 10가지 이상 나왔다. 한마디로 진수성찬(珍羞盛饌)이었다. 전기도 끊기지 않았고, 따뜻한 물도 계속 나왔다.
 
  “회령에 있을 땐 반찬이 3가지 정도였어요. 근데 원산으로 오니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해산물 등 반찬만 10가지 나오더군요. 그리고 러시아, 중국 등 남한에서 먹어보지 못한 요리들도 나왔어요. 하루는 울산에서 왔다는 청년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은 그렇게 안 나온다고 하더군요. 나만 특별히 배려해준 것 같아요.”
 
  그가 쓰던 방은 회령 호텔보다 2배 넓은 크기였고, TV를 비롯해 모든 제품이 남한에서 생산된 것들이라고 했다. 북한 당국이 윤씨에게 특별대접을 해준 것은 북한에 남게 하려 함이었다. 이들은 윤씨에 대해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조사와 회유를 번갈아 가면서 진행했다.
 
  “조사관들이 유혹을 많이 했어요. 북한에 남을 경우 예쁜 처자와 결혼도 시켜주고 평양에 아파트도 마련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땐 이미 난 남한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계속 돌려보내 달라고 한 상태였어요.”
 
  윤씨는 계속해서 남한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조사관들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그는 밤이 되면 그리운 가족과 고향이 떠올라 남한 노래를 불렀다. 북한 군인들은 윤씨에게 노래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잘해준다고 해도 너무 답답해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북한 당국은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싸웠습니다. 처음엔 나에게 선생님이라며 존칭어를 써주더니 나중엔 욕을 하면서 총구까지 들이대더라고요.”
 
 
  “김정일 사망 때 남한을 대표해 참배도 시켜”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 주민들이 분향소에서 참배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 구타도 당했습니까.
 
  “아니요. 구타는 안 했지만 위협은 했어요. 그래도 김정일 시대보단 김정은 시대가 더 나았습니다. 김정은 시대는 사람들이 조금 느슨해졌다고 할까?”
 
  ― 김정일 사망 당시 북에 있었죠.
 
  “네, 있었습니다.”
 
  ― 당시 북한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처음엔 몰랐습니다. TV를 보고 알았죠. 근데 한참 있더니 보위부 사람이 들어와선 나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거예요. 어리둥절했죠. 옷을 입고 그들을 따라나섰어요.”
 
  그들이 윤씨를 데려간 곳은 김정일의 분향소였다. 윤씨는 당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무서웠어요. 2층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까 군인들이 총을 들고 늘어서 있고, 화환들이 놓여 있었어요. 2층으로 올라가니까 김정일 사진이 있었어요. 보위부 사람들이 꽃을 가져다주면서 참배하라고 시켰어요.”
 
  윤씨는 초대소에 있는 월북자들을 대표해 초대소 인근 2층 건물에 마련된 김정일 분향소에 참배했다.
 
 
  “북에서 생니를 뽑는 고문도 당해”
 
2013년 10월 25일 자진 월북했다 다시 남한으로 내려온 월북자들이 판문점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윤씨는 현재 틀니를 끼고 생활한다. 틀니가 잘 맞지 않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월북 전 그나마 있던 이도 북한 당국이 모조리 뽑아버렸다. 북한 당국은 윤씨가 남한으로 내려오기 1년 전 틀니를 해준다는 이유로 그의 이를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뽑아버렸다.
 
  “정말 인간들도 아닙니다. 틀니 생각만 하면 아직도 화가 납니다. 이들은 남한으로 내려가기 전 틀니를 해준다고 하면서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처음엔 감사했죠. 보통 우리가 치과에 가면 마취를 하고 이를 뽑잖아요. 그런데 의사가 ‘여긴 마취약이 없어서 그냥 이를 뽑아야 한다’ 하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죠. 더 놀란 것은 남한에서 쓰는 치과용 기구가 아니라 옛날 집에서 쓰던 작은 펜치로 이를 뽑는 거예요.”
 
  “태어나서 느껴보지 못한 고통을 그때 처음 느껴봤어요. 너무 아파서 발버둥을 치니 남자 5명이 양다리와 팔을 잡고, 한 명은 머리를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근데 생니가 쉽게 빠집니까? 잘 안 빠져요. 그러니까 의사는 우리가 흔히 쓰는 일자 드라이버로 잇몸을 마구 후벼 파더니 펜치로 이를 뽑더라고요.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어요. 그날 그렇게 4대를 빼냈어요.”
 
  윤씨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4일 뒤 다시 윤씨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윤씨가 강하게 거부하자 마취제가 있다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극소량의 마취제가 투약되다 보니 고통은 여전했다. 이렇게 네 번에 걸쳐 뽑다 보니 남아 있는 이가 없었다. 특히 드라이버로 후벼 파다 보니 잇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윤씨는 이로 인해 6개월간 밥을 먹지 못하고 물과 죽으로 배를 채웠다.
 
  ― 이가 없는 상태로 거의 1년을 버티신 거네요.
 
  “네, 처음엔 물도 잘 못 마셨어요. 잇몸을 하도 후벼 파서 다 너덜너덜해졌죠. 얼마 지나서부터 미음을 주더라고요. 처음엔 씹지도 못하고 그냥 넘겼어요.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먹었죠.”
 
  ― 그럼 틀니는 안 해 준 겁니까.
 
  “해줬어요. 내가 남한으로 내려오는 날 새벽에 의사가 찾아왔더라고요. 새벽 1시쯤 와서 모양을 본떠 갔어요. 그러고 나서 새벽 4시에 틀니를 해서 왔더라고요. 그때 뭔가 이상했죠. 보통 낮에 병원에 가서 할 텐데 갑자기 새벽에 와서 틀니를 맞추고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의사가 나가고 나서 바로 짐을 싸라고 하더라고요. 밑에 내려가 보니 차가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 길로 바로 판문점으로 갔죠.”
 
  윤씨는 2013년 10월 25일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인도됐다. 남한으로 돌아온 윤씨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윤씨의 어머니는 윤씨가 돌아오기 25일 전인 9월 30일에 운명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소식을 듣고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불효자가 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내가 죄인입니다.”
 
  어머니 얘기를 하는 윤씨의 눈가에는 눈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남한으로 무사히 돌아온 윤씨는 국가정보원 조사를 마친 뒤 재판에 넘겨졌다. 윤씨는 서울구치소에 90일간 수감됐다 재판이 끝나고 바로 출소했다. 석방된 뒤 윤씨는 서울구치소 직원의 소개로 서울 중랑구 소재 담안선교회에서 3년간을 지냈다. 현재는 국가에서 주는 노령연금으로 쪽방을 얻어 살고 있다.
 
  ― 출소하고 왜 가족들을 안 찾았습니까.
 
  “제가 무슨 염치로 가족을 찾아가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동생도 살고 있는데, 저는 못 찾아갑니다.”
 
  ― 선생님이 본 북한은 어떤 곳입니까.
 
  “이상한 나라입니다. 먼저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사회주의 나라인 척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을 신으로 믿는 광신적인 종교집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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