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증언

탈북 → 북송위기 → 탈북, 한 탈북자의 30여 년에 걸친 탈북기

“나는 한국 정부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기도 했지만…”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北 영변 원자력발전소 관련 정보 들고 탈북
⊙ “1987년에 벌써 북한 핵무기 완성단계 들어섰다”
⊙ 고용희의 김정일 만나기 전 애인은 만수대예술단 정석범
⊙ “북한 외무상 리용호는 젊은 시절 바람둥이였다”
  “1992년 당시 한국 정부는 나를 남한으로 데려가 준다고 해놓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영변 원자력연구소 자료만 받고 북한에 통지해 북송시켰다.”
 
  탈북자 강윤구씨의 주장이다. 강씨는 북한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1988년 처음으로 탈북했다. 그러나1992년 한국 정부에 의해 북송될 위기에 처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최근 문재인 정부가 북한 선원 두 명을 강제로 북송시키는 것을 보고, 과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귀순 의사를 밝힌 북한 주민 두 명을 2019년 11월 7일 판문점(JSA)을 통해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이들이 흉악 범죄를 저지른 중대 범죄자라는 이유에서다. 먼저 사실관계를 보자. 정부 설명에 따르면, 17t 오징어잡이 북한 목선에서 선장의 가혹 행위에 불만을 품은 선원 3명이 선장을 포함한 16명의 동료를 살해하고 배를 몰아 도주했고, 이 중 2명이 11월 2일 대한민국 영해에서 해군에 ‘나포’됐다.
 
  이들이 ‘자의로 귀순의향서에 직접 서명’을 하는 등 귀순 의사를 명백히 밝혔으나 정부는 귀순 의사에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5일 뒤 재갈을 준비하고 안대를 씌워 판문점에서 북송했다. 북으로 돌려보낼 때는 경찰특공대가 호송을 맡았다. 북송 사실을 끝까지 몰랐는지 한 선원은 북한군이 보이자 털썩 주저앉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 언론사가 11월 7일, JSA 경비대대장이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보낸 문자메시지가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밝혀졌다.
 
 
  90년대 北 ‘핵무기 완성단계’, 한 탈북자의 증언으로 알려져
 
201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주한 중국대사관 인근에서 북한인권단체 회원들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 강제북송 위기에 놓인 탈북민 7명의 강제 북송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강씨를 만난 것은 2019년 11월 27일이다. 그는 2017년 8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북한을 떠난 지 30여 년 만이다. 그는 1992년 미얀마(당시 버마)를 통해 탈북을 시도했다가 북송당할 위기에 처했었다. 강씨가 남한 정부가 자신을 이용하고 버렸다고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강윤구씨는 1954년 북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는 반일투쟁의 공을 인정받아 북한 초대 내각에서 고위직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는 당시 북한 내무성 대외정보국 부국장 겸 책임지도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사촌 형들은 대부분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다. 한 명은 김정일과 같은 반이었고, 다른 한 명은 핵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변 원자력발전소 책임지도원까지 하던 엘리트였다. 강씨는 사촌 형들처럼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
 
  1959년 아버지가 돌연 위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강씨는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전원(경찰)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신체검사 조건에서 미달돼 떨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신용식 평양안전국장을 찾아가 아들을 부탁했다. 신 국장의 도움으로 강씨는 평양안전국 교통안전원으로 입사했다. 교통경찰이 된 것이다. 이런 그가 1988년 4월 탈북을 하게 된다.
 
  강씨는 사촌 형이 일하는 영변 원자력발전소를 세 번 방문했다. 사촌 형이집에 놀러 오면 핵 얘기를 많이 해줬다고 한다. 강씨가 탈북하기 전인 1987년, 소련에 다녀온 형이 집에 들러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 우리나라 핵무기가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섰다.”
 
  강씨는 이런 정보를 취합해 문서로 만들었다. 이 문서를 가지고 남한으로 가면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 영변 원자력발전소 모습.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그는 1988년에 탈북했지만, 4년 뒤인 1992년에야 미얀마 주재 한국공관원 등을 만났다. 강씨는 그들에게 영변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들은 한 달 뒤 남한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 돌아온 소식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으로 보낸다는 소식이었다. 강씨의 말이다.
 
  “정말 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때 불법체류자로 미얀마 감옥에 있었어요. 거기서 내가 북한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당시 거기서 북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아웅산 테러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라고 속였는데, 내가 한국공관원을 만났을 때 나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적어서 자료와 함께 줬습니다. 그런데 나의 인적사항이 그대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외무성에서 내가 북한 사람이기 때문에 북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문건이 왔어요. 저는 남한 정부가 나를 북한에다 신고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남한 정부가 자료만 받고 선생의 존재를 북한에 알려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강윤구: 나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국정원에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말해줬습니다. 국정원에 박○○이라는 대북담당 부장(기자 註: 국정원에는 부장이라는 직책이 없으나 강씨는 부장으로 기억)이 나에게 말해줬습니다. ‘당신 억울하다. 우리가 당신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북한에서 무엇을 받았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내가 넘긴 자료를 통해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핵 개발이 완성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 생모 고용희 옛 애인 ‘정석범’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는 재일교포다. 1962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때 가족을 따라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는 1971년 북한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다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이후 김정일의 부인이 됐다.
 
  고용희는 김정일의 부인이 되기 전에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 정석범이라는 인물이다. 강윤구씨의 증언에 따르면, 정석범씨는 만수대예술단에서 사당춤을 췄다고 한다. 고용희와 오랜 기간 교제를 했으나 고용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후 그는 만수대예술단에서 축출됐다고 한다. 이후 정씨 소식은 그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고용희는 이후 김정일이 가장 아끼는 부인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고용희한테는 남동생이 있었다. 강윤구씨는 어려서 그와 자주 놀았다고 한다. 고용희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경무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이후 누나가 북한 최고권력자의 아들인 김정일의 부인이 되자 그 권력을 이용해 특수부대로 보직을 옮겼다. 그가 누나에게 특수부대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자, 다음날 고용희는 경무부대를 찾아갔다. 경무부대는 고용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문에서부터 도열해 맞이했다고 한다. 고용희 남동생은 이후 특수부대 저격수로 차출됐다고 한다.
 
 
  친구 리용호 등 최고위층 자제들… 탈북 결심
 
북한 외무상 리용호.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난 강씨는 주변 친구들도 모두 북한의 최고위층 자제들이었다. 우리가 종종 뉴스에서 보는 북한 외무상 리용호도 강씨의 친구다. 리용호는 강씨보다 두 살 위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다. 리용호는 한국에 1956년생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강씨는 “아마도 잘못 기재됐을 거다. 리용호는 나보다 학교도 먼저 졸업하고 군에도 일찍 갔다”며 “그리고 우리는 친구처럼 함께 놀긴 했지만, 형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강씨가 기억하는 리용호는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리용호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리용호는 평양 내 명문 고등학교로 알려진 남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평양 경비연대 중위로 복무했어요. 그런데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아 거의 매일 다른 여성과 어울려 다녔어요. 리용호는 당시 경비연대 중위였지만 출근은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항상 몰려다니면서 대동문 영화관 쪽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면 서문 맥줏집에서 맥주도 마셨어요. 우리는 보통 대동강 공급소에서 담배나 맥주를 받았는데 리영호는 여자들을 꾀어 옥류관이랑 대동강 호텔에서 술을 받아 마셨어요.
 
  한번은 리용호랑 어울리다 패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싸움이 난 장소가 김일성 저택 근처였어요. 그때 마침 김일성이 퇴근하면서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고, 우리를 혼내라고 지시했대요. 그 일로 저는 노동단련대 6개월을 선고받았고, 리용호랑 친구들은 한 달 만에 나왔어요. 그땐 아버지가 안 계셔서 우리 집이 제일 힘이 없었으니까. 고생 좀 했어요.”
 
  이후 강씨는 군에 갔다 휴가 나온 친구를 위해 평양 대동강공급소에서 술 두 병을 훔쳤다. 이 사건으로 강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가족은 함흥으로 추방되었다. 중앙당 고위 간부 잔치에 쓸 술을 훔친 것이었다.
 
  화(禍)는 홀로 안 온다는 말이 있다. 과거 반일(反日)운동을 하던 큰아버지를 일제에 고발한 사람이 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사촌 형이 보위부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보위부는 오히려 강씨의 가족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려 했다. 이에 강씨는 집을 나와 탈북 길에 오른 것이다. 강씨는 처음부터 남한으로 내려갈 목표를 세웠다.
 
  기자: 당시는 남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고 귀순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어떻게 남한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셨습니까?
 
  강윤구: 남한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사촌 형이 대남연락소 논설고문을 했어요. 형네 집에 놀러 가면 남한에 대한 자료들이 엄청 많았어요.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관련된 자료들이 많았어요. 그걸 보고 남한으로 갈 계획을 세워서 탈북한 거예요.
 
 
  중국서 안기부 요원 만나… 도움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강씨는 1988년 4월 13일에 두만강을 건넜다.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갔지만, 앞날이 캄캄했다. 돈도 없고, 중국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러다 시장에서 우연히 북한에서 살다 온 화교를 만났다. 그 화교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김일성 명함시계를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중국돈 300위안에 시계를 팔았다. 이때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였다. 강씨는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에 가면 남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남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홍콩에 남한 대사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홍콩과 국경을 마주하는 중국 광둥성(廣東省) 남단에 위치한 선전시(深圳市)로 갔다. 그곳에서 남한 천일부역상사 ‘김 사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전화번호를 강씨에게 건네면서 전화를 해서 꼭 ‘WJ 이영무씨를 찾는다’고 말하라고 했다. 여러 차례 통화 끝에 WJ 이영무가 강씨를 만나기 위해 선전으로 왔다. WJ 이영무라는 사람은 안기부 요원이었다. 강씨의 말이다.
 
  “WJ 이영무라는 사람과 선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믿지 않았어요. 이씨가 ‘당신은 북한의 과학자도 아니고 당 간부도 아닌데 남한이나 미국이 모르는 정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해서 제가 설명을 했어요. ‘사촌 형이 영변 원자력발전소에서 핵무기를 연구한다. 형을 만나러 영변에도 갔었고,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어요.
 
  그래도 그 사람은 믿지 않았어요. 그가 떠나면서 ‘홍콩에는 한국총영사관밖에 없다. 정말 한국으로 가고 싶으면 대사관이 있는 버마(미얀마)나 태국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혼자 힘으로 홍콩으로 넘어가려고 조그마한 강을 건넜는데, 그곳에는 홍콩 경찰이 숨어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거기서 잡혔어요. 나는 그동안 잡히면 벙어리 흉내를 냈어요. 내가 벙어리 흉내를 내니까 그들이 나를 중국으로 송환했어요.”
 
  강씨는 상하이에 있는 공안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는 40위안을 내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갈 곳이 없어 상하이 기차역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때 중국 공안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강씨는 다시 상하이 부두 인근 공안서로 잡혀갔다. 그는 자신을 남한 사람이라고 속였다. 그러자 그들은 조선족 통역을 데려왔다.
 
  통역: 집이 어디입니까?
 
  강윤구: 서울입니다.
 
  통역: 서울 한강에 다리가 몇 개입니까?
 
  (강씨는 6·25전쟁 당시 한강철교와 사촌 형네 집 자료에서 본 한남대교가 생각났다.)
 
  강윤구: 2개요. 한강철교와 한남대교가 있소.
 
  (통역은 미소를 띠면서 다시 질문을 했다.)
 
  통역: 그럼 한국에서는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강윤구: 사장이라고 하오.
 
  통역: 그리고 다른 말은 없습니까?
 
  강윤구: 다른 말은 없소.
 
  통역: 한국에서는 사장을 대표이사 또는 회장이라고도 합니다. 당신은 남한 사람이 아니라 북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강씨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통역은 88서울올림픽에 중국 대표단 통역으로 다녀오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통역은 공안에게 강씨가 남한이 아니라 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안은 강씨를 북송시키기 위해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 제2감옥으로 이송시켰다.
 
 
  “남한 정부에 배신감 느껴…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강씨는 감옥에 수감되기 전 공안의 눈을 피해 도망쳤다. 그는 곧바로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상하이 감옥에서 만난 상하이교통대학 학장을 찾아갔다. 강씨는 학장의 도움을 받아 미얀마로 갔다. 이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당시 미얀마는 내전 중이었고, 강씨는 미얀마 정부군에게 붙잡혔다. 정부군은 강씨를 반군으로 착각하고 온갖 고문을 했다. 나중에 강씨는 자신은 한국 사람이며 대사관에 연락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연락하지 않았고, 감옥에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적십자와 연결이 됐다. 다행히 적십자 변호사가 한국대사관으로 연락을 해줬다. 대사관의 요구로 강씨는 미얀마 수도로 옮겨졌다.
 
  “미얀마 수도 감옥에서 체격이 좋은 중년 남성과 젊은 남성이 나를 찾아왔어요. 그들은 자신을 미얀마 주재 한국 공관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소개했어요.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종이를 주면서 인적사항을 자세히 쓰라고 했어요. 나는 사실대로 빠짐없이 썼어요. 그리고 다른 종이를 주면서 영변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쓰라고 했어요. 저는 영변 발전소의 위치, 경도, 구조, 핵 관련 연구, 소련과 어떻게 공조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자세히 썼어요. 그들은 그 종이를 가지고 돌아갔어요. 이때 내가 글을 쓰면서 물어봤어요. ‘전 언제쯤 남한에 갈 수 있나요?’ 그러자 그들은 ‘확인 절차를 통해 한 달 정도 걸린다’고 말했어요.
 
  전 너무 행복했죠. 집을 떠나 4년 만에 남한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은 아무렇지 않았어요. 진짜 매일매일이 행복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안 갔어요.
 
  그 감옥에는 나 말고도 북한 사람이 또 있었어요. 강민철이라고 북한인민군 정찰총국 소속 상위(上尉)였어요. 강 상위는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 미얀마군에게 잡혀 그곳에 수감됐어요. 그런데 북한에선 데려가지 않았어요. 나중에 국정원에서 들은 얘긴데 남북 어느 쪽도 그 사람을 데려가지 않아 강 상위는 그 안에서 간암으로 죽었다고 들었어요.”
 
  강씨는 한 달 뒤엔 남한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감 생활을 버텼다. 그런데 소식이 없었다. 그 후로 두 달이 지나서야 간수가 종이를 들고 강씨를 찾아왔다. 그 간수는 “당신은 남한 사람이 아니라 북한 사람”이라며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이때 강씨는 깜짝 놀랐다. 간수 손에 들린 종이가 자신이 한국공관원에게 써준 인적사항이 담긴 종이였기 때문이다. 그때 강씨는 배신당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3개월 뒤 이번엔 북한 외무성에서 강씨에 대한 자료가 날아왔다. 강씨는 북한 사람이니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강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악몽을 꾼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미얀마 정부는 강씨를 중국 공안으로 넘겼다. 당시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북한과 미얀마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중국 공안에게 넘겨진 강씨는 또다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가족의 공개처형… 또다시 남한행 결심
 
  탈출에 성공한 강씨는 1993년에 다시 광둥성 선전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조폭들 싸움에 휘말리게 됐다. 북한에서 유도를 배운 강씨는 조폭 두목 눈에 들어 그날로 조폭 생활을 시작했다. 1년 정도 열심히 돈을 벌었다.
 
  목돈이 생긴 강씨는 홍콩 사람과 함께 청바지 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중국 공안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장을 접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 반찬 장사부터 돈이 되는 일을 다 했다.
 
  그러다 2005년 중국의 한 대학교 통역으로 남한으로 왔다. 물론 호적(戶籍)을 돈으로 산 강씨는 중국인 신분이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그때 미얀마에서 만난 한국공관원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강씨는 당시 경찰서라도 찾아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털어놓으면 탈북민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강씨는 그러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강씨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기자: 그때 왜 경찰서를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
 
  강윤구: 찾아가서 뭐 합니까. 나를 이용만 하고 버린 나라인데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국 이곳저곳을 돌며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가족 생각이 났다. 강씨는 2016년 9월 15일 몰래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기차를 타고 함흥까지 간 그는 자신의 집에서 나오는 군인을 보고 가족이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강씨는 그 길로 평양 사촌 형을 찾아갔다. 하지만 사촌 형도 평양에 없었다.
 
  나중에 국정원에서 그의 가족 소식을 듣게 됐다. 강씨 마을에서 함께 살던 지인이 탈북해 강씨 가족 얘기를 국정원 조사에서 진술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 명령으로 그의 가족과 일가친척 모두 공개처형당했다고 한다. 죄목은 ‘조국과 인민, 당과 수령을 배반하고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가의 중요한 비밀을 넘긴 반역자 강윤구의 가족’이기 때문이란다.
 
  북한을 다시 탈출한 강씨는 2016년 12월 한국대사관을 찾아 몽골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탈북 루트가 폐쇄된 곳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17년 4월,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아 길을 떠났다. 한 달이 걸려 하노이 한국대사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8월쯤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강씨 얘기를 듣다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북한 출신인 기자는 물론 탈북민들의 탈출기는 구구절절 사연이 많지만, 강윤구씨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조회 : 5163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003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도서출간 배너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