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내리막길로 빠지자 중국으로 건너가 越北 결심
⊙ ‘남한의 불공정에 대한 글 써보라’고 해 썼더니 ‘불평’ 쏟아내
⊙ 마취제 없어 생이빨 그냥 뽑아… “그것도 못 참냐”고 되려 화내
⊙ “南과 北은 정신적·문화적 동일성 이미 상실”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변호사 역임 /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 ‘남한의 불공정에 대한 글 써보라’고 해 썼더니 ‘불평’ 쏟아내
⊙ 마취제 없어 생이빨 그냥 뽑아… “그것도 못 참냐”고 되려 화내
⊙ “南과 北은 정신적·문화적 동일성 이미 상실”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변호사 역임 /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오른쪽)과 그의 아들 김정은.
필자의 지인 중 ‘윤 선생’(72)이라는 사람이 있다. 자진해서 월북(越北)했다가, 북한에서 김정일-김정은 시대 4년을 살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온 이다. 법원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그를 징역 몇 달을 살게 한 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대한민국 법이 그를 관대하게 용서하는 처분을 내린 것이다.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윤 선생’이란 익명을 썼음을 밝힌다.
‘특이한’ 국보법 위반자
개인법률사무소를 하는 나는 20여 년 전부터 변두리에 있는 노숙자 합숙소를 이따금씩 찾아갔다. 무료 변호 봉사 차원이었다. 그 합숙소의 골방에서 윤 선생을 만났다. 그는 생김새가 특이했다. 당나귀 같은 커다란 귀가 날개같이 앞으로 펼쳐져 있고, 검고 짙은 눈썹 아래서 작은 눈이 반짝였다.
윤 선생은 남한에서 가난을 피해 북으로 갔다 쫓겨온 사람이었다. 북에서도 남쪽의 가난한 노숙자는 받지 않는 것 같다. 전과자 노숙자 합숙소에서 만나 알게 된 그는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주는 노령연금으로 쪽방을 얻어 혼자 산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 가서도 크게 대접받지 못하고 고생한 것 같았다.
그는 남과 북의 바닥층 생활을 몸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가 체험한 남북의 복지 상태를 들으면 객관적인 남북의 하층 삶 형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몇 번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밥을 사고 싶다고 제의했다. 개결(介潔)한 자존심의 표현 같았다.
늦가을의 스산한 느낌이 드는 2019년 11월 13일 수요일이었다. 점심시간 무렵 그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내가 인사로 근황을 물었다.
“노령연금으로 작은 방 하나를 얻어서 살아요. 옆방에는 노숙자 시설에 함께 있던 80대 영감이 살고 있어요. 젊어서 소매치기를 했대요.”
“그래, 연금으로 살아갈 만하세요?”
“정부 혜택이 많아요. 가스비도 할인 받아서 싸요. 지하철도 공짜고 보건소에서 치료도 그냥 해줘요. 쌀도 그냥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고 말이죠. 두 노인이 한 달에 20만~30만원만 있으면 살아요. 밥은 공짜 쌀로 해 먹고, 반찬은 동네 시장에 가서 사다가 먹으면 돼요.”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얼마 전 계단에서 넘어져 갈비뼈를 다쳐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어요.”
“독거노인들을 위한 도우미들이 있던데 어떤가요?”
“제가 구청(區廳)에 신청했는데 예산은 있는데 사람이 없대요. 혼자 이틀을 누워 있어 보니까 어찌나 배가 고픈지…. 그래서 기어가지고 일어나 전기밥솥에 일주일 치 밥을 해두고 먹죠. 반찬은 시장에서 사다 둔 김치하고 참치 캔이 있어서 그걸 먹었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머리에 가난한 한 남자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임대 아파트에서 폐암으로 혼자 누워 있는 강태기 시인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 시인이 정말 세상에 감사한다고 하더라고요.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배식하고 남은 밥을 누룽지로 만들어주고, 성당에서 나물 반찬을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준다고 그랬어요. 이따금씩 복지사가 찾아와서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도 깎아준다고 했어요.”
“맞아요. 그래요. 저도 임대 아파트를 신청했는데 워낙 신청자가 많아서 기다리고 있어요. 임대 아파트 순번이 돌아오면 정부에서 융자도 해준대요.”
나는 직접 눈으로 복지 실태를 확인하는 셈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을 보장받는 시대가 왔다. 얼핏 어린 시절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시멘트로 찍어 만든 쓰레기통 가운데 구멍 앞에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다 해진 낡은 옷을 걸쳤다. 그 남자는 쓰레기통 속의 연탄재 위에 버려진 김치 줄거리를 집어 들고 입속에 넣고 있었다. 그 시절 처참했던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가 온 김에 북쪽에서 직접 체험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두만강 건너 北으로…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나고 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 1시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근처에 맛있는 국밥집이 있어요.”
“아니에요, 오늘은 좀 더 좋은 집으로 가요. 내가 변호사님께 특별히 점심 대접을 하러 왔다니까요.”
그가 고집을 피웠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변호사님 말고 사모님도 꼭 같이 갔으면 해요.”
그가 합숙시설에 있을 때 아내도 그곳에 가서 봉사하면서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면 제가 연락해볼게요.”
사무실이 자리한 빌딩의 2층에 있는 보리굴비 전문 한식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음식점은 한산했다. 우리는 구석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연락을 받은 아내가 잠시 후 방으로 들어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우리 앞에 내놓고 나갔다.
“드실 음식을 고르세요. 이거 특제 보리굴비로 할까?”
그가 일부러 우리 부부를 위해 제일 비싼 음식을 골랐다.
“아니에요, 저는 점심을 먹었으니까 두 분만 하세요. 그리고 제일 아래 있는 일반 정식으로 하죠.”
아내가 종업원을 보면서 말했다. 기초연금으로 살아가는 그의 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내에게 탁자 밑으로 살짝 신용카드를 전해 주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계산을 해두라는 취지였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나가자 그가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저도 법대를 나왔습니다. 법대를 나온 사람으로 고시도 쳤죠. 제가 사법시험 11회에 응시했었습니다. 그때 2차까지 합격했더라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건데 말입니다.”
그는 고시 낭인(浪人)이었나 보다. 그 시절엔 늙도록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털어놓은 과거 얘기다.
“작은 신문사에 취직을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위아래도 없고 형편없는 건방진 놈이었죠. 편집국장을 보고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어쩔래’ 하는 식으로 막 나갔죠. 그러니 거기서도 잘될 수가 있었겠어요? 점점 인생의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진 거죠. 사업을 한다고 하다가 갈 데까지 갔습니다. 빚을 잔뜩 지고 중국으로 도피했죠. 처음에는 일류 호텔에 있다가 돈이 떨어지면서 이류 호텔로 그리고 삼류를 거쳐서 민박집까지 갔어요.”
윤 선생은 자신이 월북하게 된 결정적 계기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다 마지막 탈출구로 북한으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은 거죠. 민박집에 묵을 때 옆방에 북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가슴에 김정일 사진이 든 배지를 달고 있었어요. 자기는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이라고 명함을 주더라고요. 같이 술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친해졌죠. 사람이 괜찮았어요. 내가 북한으로 가려고 먼저 마음먹고 있었는데도 그쪽에는 관심이 전혀 없더라고요.
그 무렵 두만강 쪽에 여러 번 나가 봤죠. 강폭도 좁고 건너편에 북한군 초소가 보이더라고요. 경비 서는 북한군들이 중국 쪽에다 대고 위안화(貨) 1~2원이라도 달라고 소리치는 걸 봤어요. 거지같이 돈을 구걸하는 걸 보고 군인이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北 대사관 직원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가신 거예요?”
아내가 물었다.
“아니에요,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었어요. 거기 근무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내가 독립투사의 동생이라고 하니까 흥분까지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들이 나를 친절하게 북으로 안내했어요. 그렇게 해서 북한에서 4년을 살게 됐죠. 넘어갈 때는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었는데 죽으니까 다음은 김정은이 나타났죠.”
“거기서 본 김정은의 모습이 어땠어요?”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북한 텔레비전을 통해 봤죠. 처음에는 어린 친구가 얼떨떨해하는 모습이었어요. 군대 사열을 가서도 머뭇거리면서 병사나 장교들의 손을 잡아주는 겸손한 태도였죠.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금세 오만한 왕같이 행동하더라고요.”
“김정은이 바로 정권을 잡고 안정을 시켰나요?”
내가 물었다. 김정은은 북한의 경제정책을 잡고 있던 고모부인 장성택과 형을 죽였다. 일부 북한 주민의 반발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저야 잘 모르죠. 내가 초대소에 있을 때 거기서 근무하던 보위부 요원들끼리 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기는 했죠.
북한 TV에는 은하수악단이 자주 나오는데 김정은의 여자가 그 멤버이기 때문에 저도 본 적이 있어요. 어느 날 그 악단의 색소폰 주자가 숙청(肅淸)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정은 여자의 동영상을 몰래 찍다가 걸렸다고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죠.
그리고 내가 북한 텔레비전 뉴스를 봤는데 여성 교통원이 영웅이 됐더라고요. 네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김정은이 지나가는 자리에 폭발물이 설치된 걸 발견하고 신고를 한 거예요. 그 여성 교통원이 단번에 인민 영웅이 됐어요. 누군가 김정은을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번은 김정은이 평양에서 원산을 가는데 도로에서 공격을 당할 뻔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건 군부(軍部)에서 누가 그런 모의를 했대요.”
“개털이라고 판단했는지 점점 천대”
“직접 보신 북한의 모습은 어땠어요?”
아내가 물었다.
“처음에 회령 쪽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함경도 쪽이라 날씨가 추운 곳인데도 조사실이 후끈후끈했어요. 방에서 보위부 요원과 같이 잤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더라고요. 내가 일어나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하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곤 하더라고요.
그다음은 회령에 있는 한 초대소로 갔죠. 모텔 같은 4층 건물의 한 방을 주는데 독방(獨房)을 줬어요. 한쪽은 침실이고, 다른 한쪽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거실이었어요. 식사 때가 되면 처음에는 반찬이 10가지는 나오더라고요. 간장종지 같은 조그만 그릇에 소고기 몇 점, 돼지고기 몇 점, 닭고기 몇 점이 나왔어요. 그리고 김치나 나물 이런 것들이었죠. 끼니 때마다 술도 나오고 담배도 북에서 최고급 제품으로 나왔어요. 나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나보고 ‘이제 북에 편하게 머물면서 남한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했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회령의 모습이 궁금했다. 회령은 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다. 스무 살 때 결혼을 하고 서울로 내려온 어머니는 아흔 살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친정 부모나 동생들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따금씩 회령의 살던 동네와 교회, 학교의 모습을 그리워했다.
“회령의 모습이 어땠어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고향인데.”
내가 물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는 못하게 하더라고요. 가끔 외출 허가를 얻어서 나가 보기는 했어요. 제가 본 거는 우리 1950~60년대의 광경 그대로인 느낌이 들었어요. 엄(嚴) 변호사가 지금이라도 회령을 간다면 부모님들 살던 집 근처가 예전의 모습과 비슷할걸요. 듣기에 평양은 현대 도시처럼 변했지만 지방은 그렇지 않아요.
회령의 길거리를 다녀보면 사람들이 궁기(窮氣)가 들어 있어요. 떨어진 옷을 입고 옷소매가 때로 반질거렸어요.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비듬이 온통 어깨에 달라붙어 있더라고요.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담배 한 갑을 주면 그게 고마워서 그런지 넙죽 절까지 하더라고요. 저를 담당하는 보위부 요원들도 가만히 보면 맨날 같은 옷만 입고 있었어요.
회령은 국경 쪽이라 기차가 매일 여러 차례 오가더라고요. 중국에서 물건들을 싣고 들어오고, 또 북한의 석탄이나 광물(鑛物)들이 중국 쪽으로 가는 것 같더라고요.”
“아귀같이 달려들어 먹어 치우더라”
“회령 초대소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거기서 쫓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좋았죠. 한번은 매일 조금씩만 주는 고기가 감질나서 불평을 했어요. 서울에서는 고깃집에 가면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왜 간장종지에 몇 점만 주느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점심에 고기가 나오는데 몇 센티미터는 될 넓적한 구운 돼지고기가 나오는 거예요. 한 사람이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죠. 내가 좀 먹다가 못 먹겠다고 하니까 초대소에 있는 사람들 잔치가 벌어졌어요. 아귀같이 달려들어 그 고기를 먹어 치우더라고요.
미국의 경제제재로 북한의 의식주가 다 형편없어요. 내가 남긴 밥과 반찬은 보위부원 차지였어요. 한번은 창에서 내려다보니까 그 밥과 반찬을 보위부원이 초대소 정원의 물이 빠진 배수로 안으로 들어가서 먹더라고요. 그나마 보위부 끗발로 내가 남긴 밥을 먹는 거지 경비병이나 일꾼들은 밀리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개털이라고 판단했는지 점점 천대했어요. 반찬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술도 주지 않고 배급해주던 담배도 저질로 바뀌더라고요.”
“왜 대접이 변했죠?”
옆에 있던 아내가 물었다.
“남한 사회의 불공정에 대해 쓰라고 했는데 제가 쓴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책임자가 ‘겨우 이 정도밖에 쓰지 못하느냐’고 타박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쓸 수가 없었어요. 북한 텔레비전에서 남한의 모습이라고 내보내는 것을 보면, 1950~60년대 거지들과 상이(傷痍)군인이 들끓는 모습이라든가, 아니면 격렬한 운동권의 시위하는 장면만 나와요. 그러니 내가 글을 써도 맞지가 않는 거죠.”
“윤 선생같이 남한에서 북한으로 자진해서 월북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어떤 사람들인가요?”
“남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온 사람도 있고 더러 호기심에 온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나도 사실은 부도가 나고 먹고살 수 없으니까 간 거죠. 그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고부터는 천대하기 시작했어요. 회령 초대소에서 함경도의 다른 도시로 보내더라고요.”
“거기서는 어땠는데요?”
내가 물었다.
“무지무지하게 추운 곳이더군요. 그곳의 초대소라는 곳으로 옮겼는데 방이 여러 개 있는 싸구려 여관같이 지은 2층 건물이었어요. 그중 방 하나에 묵었는데 어찌나 추운지 이가 딱딱딱 부딪칠 정도였어요. 처음 조사받을 때 후끈거리던 방이 생각나더라고요. 화장실의 변기들도 전부 얼어붙어 버리고 건물 전체에서 한 곳만 공동으로 썼어요. 어찌나 춥고 떨리는지 거기는 지옥이에요. ‘북으로 잘못 갔다’고 속으로 후회했죠.”
“내가 듣기로는 북한도 이제는 우리의 1970년대 정도까지 발전했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이상해서 물었다.
“그건 도시의 경우죠. 내가 있던 지방은 안 그랬어요.”
‘도로 南으로 보내라’는 명령
한국은 얼마 전 NLL을 넘어온 북한의 어부 두 명을 강제로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북한 역시 윤 선생을 판문각을 통해 돌려보냈다. 그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죠?”
“나를 도로 남한으로 보내라는 당의 명령이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아파트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더니 이 친구들 전부 나한테 사기 친 거죠.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이 냉정하고 무뚝뚝해지더라고요. 남쪽으로 쫓겨 오기 한 달 전쯤이었죠.”
윤 선생은 자신의 치아(齒牙) 얘기를 들려줬다.
“(북측) 담당자가 제 이가 안 좋으니까 북에서 틀니를 해줄 테니까 하고 가래요. 의료복지가 그래도 북이 남쪽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곳 치과를 갔죠. 틀니를 하려면 남은 이를 전부 뽑아야 한다는 거예요. 의자에 앉아 막 이를 뽑으려고 할 때였어요. 치과의사가 ‘죄송하다’고 하면서 마취제가 없어 ‘그냥 뽑아야겠다’고 하면서 참으라고 하더라고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어요. 내가 아프다고 소리치니까 치과의사가 그것도 참지 못하냐고 되레 화를 내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북한 사람들 뒤끝 있네. 마취제 없이 이를 뽑는 건 그동안 대접해준 데 대한 복수 아니야? 심통이 나서 그만큼 아파보라는 거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말했다.
“아니야, 마취제가 없다는 건 거짓말일 거야. 어디 다른 데 가서라도 구해올 수 있었을 거 아니야? 앞으로 북한을 이해하려면 그런 뒤끝 있는 사람들로 봐야겠네.”
아내의 결론이었다. 내가 그의 이를 보면서 물었다.
“지금 하고 계신 틀니가 거기서 만들어준 겁니까?”
“아니에요, 여기서 다시 했어요. 하여튼 내 얘기 좀 더 들어보세요. 이를 빼고 잇몸으로 얼마 동안 죽만 먹고 지냈어요. 틀니 본이 잘못 떠졌다고 또다시 하자고 해서 시간이 걸렸어요.
아프고 죽을 먹으니까 나도 화가 났죠. 한번은 나를 감시하는 여자에게 ×년이라고 욕을 했어요. 그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더라고요. ‘북조선이 ×년들과 종놈들이 세운 나라인지 몰라서 왔느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들의 의식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해방 후 북한의 인민위원회에는 머슴과 건달 출신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장성택, 인민의 배고픔에 눈물 흘렸다더라”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어떻게 됐어요?”
내가 물었다.
“바로 서울구치소로 갔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그래요. 서울구치소 안이 따뜻하고 괜찮더라고요. 구치소 안에서도 독방을 주더라고요. 재판에서 판사가 그동안 얘기를 듣더니 집행유예를 선고해서 내보내더라고요. 그래서 석방이 된 후 합숙소에 갔다가 변호사님을 거기서 만난 거죠.”
그는 지금 대한민국 안에서 최하위 빈곤층이다. 복지 혜택으로 쪽방을 얻어 혼자 산다. 남과 북에서 모두 살아본 그는 관념적인 나보다는 체험으로 더 정확히 알 것 같아 물었다.
“북의 주민을 할래, 남한에서 최하위 빈곤 생활을 할래,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어요?”
“당연히 남쪽이죠.”
“윤 선생의 시각에서 북한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사회주의라고 하는 이상한 나라였어요. 김일성이라는 신(神)을 믿는 광신적인 종교집단이었어요.
중세 유럽의 싸움같이 미국의 봉쇄 속에서 군사독재를 하면서 농성(籠城) 체제를 유지하는 비참한 사회죠. 옛날에 성(城)이 포위돼 그 안에서 사람들이 굶다가 자식까지 잡아먹었잖아요? 북도 ‘고난의 행군’ 시절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죠. 북의 함경도 산자락에 있는 고아원에 가보세요. 어린아이들이 토굴 같은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어요. 그걸 남한의 대형 교회 목사들이 도와주고 있어요.”
“북한이 보는 남한에 대한 시각은 어땠습니까?”
“북쪽 사람들은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남한은 그 앞잡이 괴뢰정권으로 보고 있죠.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긍지도 있었어요. 6·25전쟁 시 미군 폭격기들이 북을 완전히 초토화했습니다. 철도, 항만, 공장뿐 아니라 저수지나 물을 보관하는 보(洑)까지 파괴했죠. 전후(戰後) 러시아나 중국도 도움을 주지 않았죠. 북한은 그런 속에서 오직 인민의 힘으로 그나마 이 정도까지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경제 면에서는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했다고 자랑합니다. 사회주의 동원 체제가 그 실효(實效)를 거둔 거죠.”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북의 주민들은 가난과 굶주림의 원인은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문을 열기는 열어야 할 텐데’ 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너무 문을 열면 자본주의 사회의 날파리와 해충 같은 저질문화가 들어올까 봐 걱정하죠.
북한 경제통이었던 장성택은 인민의 배고픔에 더러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중국식 개방을 추구하다가 숙청이 됐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어떤 식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개방을 하느냐’인 것 같아요.”
“쪽방 얻어 살아도 자유로운 여기가 좋다”
“북한과 남한은 아직도 같은 민족이라는 유대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저는 의문입니다. 오래전에 국토가 나뉘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단절로 인해 이제 민족이나 문화까지 다른 존재로 바뀐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보는 대한민국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남과 북은 정신적·문화적 동일성도 이미 없다고 봐요. 공허한 이념이나 역사에 가위눌려 있다고나 할까요.”
북한에서 4년을 살다가 온 윤 선생은 남과 북의 복지 혜택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에 관한 내용도 궁금해 내가 물어봤다.
“노년의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제가 북한으로 가서 4년을 살다 온 기억들을 글로 써놓고 싶은데 방에 엎드려 쓰자니 허리가 아파서 못 쓰고 있어요. 마음만 있는 거죠.”
“도로 쫓겨 오지 않았으면 그곳에 계속 살았을 것 같아요?”
내가 본질을 물었다.
“겨울에 함경도에서 너무 추웠어요. 거리를 돌아다니는 등 자유도 없고요.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처절한 삶을 보니까 오만정이 떨어졌죠. 노령연금으로 쪽방을 얻어 살아도 자유로운 여기가 좋아요. 지금 임대 아파트를 신청해놓고 있어요. 아직 순서가 돌아오지는 않았어요.”⊙
‘특이한’ 국보법 위반자
![]() |
국보법 위반자인 ‘윤 선생’은 독거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가 없음) |
윤 선생은 남한에서 가난을 피해 북으로 갔다 쫓겨온 사람이었다. 북에서도 남쪽의 가난한 노숙자는 받지 않는 것 같다. 전과자 노숙자 합숙소에서 만나 알게 된 그는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주는 노령연금으로 쪽방을 얻어 혼자 산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 가서도 크게 대접받지 못하고 고생한 것 같았다.
그는 남과 북의 바닥층 생활을 몸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가 체험한 남북의 복지 상태를 들으면 객관적인 남북의 하층 삶 형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몇 번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밥을 사고 싶다고 제의했다. 개결(介潔)한 자존심의 표현 같았다.
늦가을의 스산한 느낌이 드는 2019년 11월 13일 수요일이었다. 점심시간 무렵 그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내가 인사로 근황을 물었다.
“노령연금으로 작은 방 하나를 얻어서 살아요. 옆방에는 노숙자 시설에 함께 있던 80대 영감이 살고 있어요. 젊어서 소매치기를 했대요.”
“그래, 연금으로 살아갈 만하세요?”
“정부 혜택이 많아요. 가스비도 할인 받아서 싸요. 지하철도 공짜고 보건소에서 치료도 그냥 해줘요. 쌀도 그냥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고 말이죠. 두 노인이 한 달에 20만~30만원만 있으면 살아요. 밥은 공짜 쌀로 해 먹고, 반찬은 동네 시장에 가서 사다가 먹으면 돼요.”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얼마 전 계단에서 넘어져 갈비뼈를 다쳐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어요.”
“독거노인들을 위한 도우미들이 있던데 어떤가요?”
“제가 구청(區廳)에 신청했는데 예산은 있는데 사람이 없대요. 혼자 이틀을 누워 있어 보니까 어찌나 배가 고픈지…. 그래서 기어가지고 일어나 전기밥솥에 일주일 치 밥을 해두고 먹죠. 반찬은 시장에서 사다 둔 김치하고 참치 캔이 있어서 그걸 먹었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머리에 가난한 한 남자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임대 아파트에서 폐암으로 혼자 누워 있는 강태기 시인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 시인이 정말 세상에 감사한다고 하더라고요.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배식하고 남은 밥을 누룽지로 만들어주고, 성당에서 나물 반찬을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준다고 그랬어요. 이따금씩 복지사가 찾아와서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도 깎아준다고 했어요.”
“맞아요. 그래요. 저도 임대 아파트를 신청했는데 워낙 신청자가 많아서 기다리고 있어요. 임대 아파트 순번이 돌아오면 정부에서 융자도 해준대요.”
나는 직접 눈으로 복지 실태를 확인하는 셈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을 보장받는 시대가 왔다. 얼핏 어린 시절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시멘트로 찍어 만든 쓰레기통 가운데 구멍 앞에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다 해진 낡은 옷을 걸쳤다. 그 남자는 쓰레기통 속의 연탄재 위에 버려진 김치 줄거리를 집어 들고 입속에 넣고 있었다. 그 시절 처참했던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가 온 김에 북쪽에서 직접 체험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두만강 건너 北으로…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나고 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 1시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근처에 맛있는 국밥집이 있어요.”
“아니에요, 오늘은 좀 더 좋은 집으로 가요. 내가 변호사님께 특별히 점심 대접을 하러 왔다니까요.”
그가 고집을 피웠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변호사님 말고 사모님도 꼭 같이 갔으면 해요.”
그가 합숙시설에 있을 때 아내도 그곳에 가서 봉사하면서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면 제가 연락해볼게요.”
사무실이 자리한 빌딩의 2층에 있는 보리굴비 전문 한식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음식점은 한산했다. 우리는 구석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연락을 받은 아내가 잠시 후 방으로 들어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우리 앞에 내놓고 나갔다.
“드실 음식을 고르세요. 이거 특제 보리굴비로 할까?”
그가 일부러 우리 부부를 위해 제일 비싼 음식을 골랐다.
“아니에요, 저는 점심을 먹었으니까 두 분만 하세요. 그리고 제일 아래 있는 일반 정식으로 하죠.”
아내가 종업원을 보면서 말했다. 기초연금으로 살아가는 그의 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내에게 탁자 밑으로 살짝 신용카드를 전해 주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계산을 해두라는 취지였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나가자 그가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저도 법대를 나왔습니다. 법대를 나온 사람으로 고시도 쳤죠. 제가 사법시험 11회에 응시했었습니다. 그때 2차까지 합격했더라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건데 말입니다.”
그는 고시 낭인(浪人)이었나 보다. 그 시절엔 늙도록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털어놓은 과거 얘기다.
“작은 신문사에 취직을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위아래도 없고 형편없는 건방진 놈이었죠. 편집국장을 보고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어쩔래’ 하는 식으로 막 나갔죠. 그러니 거기서도 잘될 수가 있었겠어요? 점점 인생의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진 거죠. 사업을 한다고 하다가 갈 데까지 갔습니다. 빚을 잔뜩 지고 중국으로 도피했죠. 처음에는 일류 호텔에 있다가 돈이 떨어지면서 이류 호텔로 그리고 삼류를 거쳐서 민박집까지 갔어요.”
윤 선생은 자신이 월북하게 된 결정적 계기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다 마지막 탈출구로 북한으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은 거죠. 민박집에 묵을 때 옆방에 북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가슴에 김정일 사진이 든 배지를 달고 있었어요. 자기는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이라고 명함을 주더라고요. 같이 술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친해졌죠. 사람이 괜찮았어요. 내가 북한으로 가려고 먼저 마음먹고 있었는데도 그쪽에는 관심이 전혀 없더라고요.
그 무렵 두만강 쪽에 여러 번 나가 봤죠. 강폭도 좁고 건너편에 북한군 초소가 보이더라고요. 경비 서는 북한군들이 중국 쪽에다 대고 위안화(貨) 1~2원이라도 달라고 소리치는 걸 봤어요. 거지같이 돈을 구걸하는 걸 보고 군인이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北 대사관 직원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 |
‘윤 선생’은 중국으로 가 두만강을 넘어 월북했다. 월북하자 북한 관리들이 엄청난 환대를 했다고 한다. 사진은 북중(北中) 두만강 국경 일대. |
아내가 물었다.
“아니에요,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었어요. 거기 근무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내가 독립투사의 동생이라고 하니까 흥분까지 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들이 나를 친절하게 북으로 안내했어요. 그렇게 해서 북한에서 4년을 살게 됐죠. 넘어갈 때는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었는데 죽으니까 다음은 김정은이 나타났죠.”
“거기서 본 김정은의 모습이 어땠어요?”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북한 텔레비전을 통해 봤죠. 처음에는 어린 친구가 얼떨떨해하는 모습이었어요. 군대 사열을 가서도 머뭇거리면서 병사나 장교들의 손을 잡아주는 겸손한 태도였죠.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금세 오만한 왕같이 행동하더라고요.”
“김정은이 바로 정권을 잡고 안정을 시켰나요?”
내가 물었다. 김정은은 북한의 경제정책을 잡고 있던 고모부인 장성택과 형을 죽였다. 일부 북한 주민의 반발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저야 잘 모르죠. 내가 초대소에 있을 때 거기서 근무하던 보위부 요원들끼리 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기는 했죠.
북한 TV에는 은하수악단이 자주 나오는데 김정은의 여자가 그 멤버이기 때문에 저도 본 적이 있어요. 어느 날 그 악단의 색소폰 주자가 숙청(肅淸)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정은 여자의 동영상을 몰래 찍다가 걸렸다고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죠.
그리고 내가 북한 텔레비전 뉴스를 봤는데 여성 교통원이 영웅이 됐더라고요. 네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김정은이 지나가는 자리에 폭발물이 설치된 걸 발견하고 신고를 한 거예요. 그 여성 교통원이 단번에 인민 영웅이 됐어요. 누군가 김정은을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 번은 김정은이 평양에서 원산을 가는데 도로에서 공격을 당할 뻔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건 군부(軍部)에서 누가 그런 모의를 했대요.”
![]() |
‘윤 선생’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본 북한의 실상에 대해 “우리 1950~60년대의 광경 그대로”라고 말했다. 그만큼 낙후했다는 의미다. 사진은 2016년 9월 16일 홍수가 난 회령 지역에서 복구작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이다. |
아내가 물었다.
“처음에 회령 쪽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함경도 쪽이라 날씨가 추운 곳인데도 조사실이 후끈후끈했어요. 방에서 보위부 요원과 같이 잤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더라고요. 내가 일어나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하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곤 하더라고요.
그다음은 회령에 있는 한 초대소로 갔죠. 모텔 같은 4층 건물의 한 방을 주는데 독방(獨房)을 줬어요. 한쪽은 침실이고, 다른 한쪽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거실이었어요. 식사 때가 되면 처음에는 반찬이 10가지는 나오더라고요. 간장종지 같은 조그만 그릇에 소고기 몇 점, 돼지고기 몇 점, 닭고기 몇 점이 나왔어요. 그리고 김치나 나물 이런 것들이었죠. 끼니 때마다 술도 나오고 담배도 북에서 최고급 제품으로 나왔어요. 나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나보고 ‘이제 북에 편하게 머물면서 남한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했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회령의 모습이 궁금했다. 회령은 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다. 스무 살 때 결혼을 하고 서울로 내려온 어머니는 아흔 살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친정 부모나 동생들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따금씩 회령의 살던 동네와 교회, 학교의 모습을 그리워했다.
“회령의 모습이 어땠어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고향인데.”
내가 물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는 못하게 하더라고요. 가끔 외출 허가를 얻어서 나가 보기는 했어요. 제가 본 거는 우리 1950~60년대의 광경 그대로인 느낌이 들었어요. 엄(嚴) 변호사가 지금이라도 회령을 간다면 부모님들 살던 집 근처가 예전의 모습과 비슷할걸요. 듣기에 평양은 현대 도시처럼 변했지만 지방은 그렇지 않아요.
회령의 길거리를 다녀보면 사람들이 궁기(窮氣)가 들어 있어요. 떨어진 옷을 입고 옷소매가 때로 반질거렸어요.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비듬이 온통 어깨에 달라붙어 있더라고요.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담배 한 갑을 주면 그게 고마워서 그런지 넙죽 절까지 하더라고요. 저를 담당하는 보위부 요원들도 가만히 보면 맨날 같은 옷만 입고 있었어요.
회령은 국경 쪽이라 기차가 매일 여러 차례 오가더라고요. 중국에서 물건들을 싣고 들어오고, 또 북한의 석탄이나 광물(鑛物)들이 중국 쪽으로 가는 것 같더라고요.”
“아귀같이 달려들어 먹어 치우더라”
“회령 초대소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거기서 쫓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좋았죠. 한번은 매일 조금씩만 주는 고기가 감질나서 불평을 했어요. 서울에서는 고깃집에 가면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왜 간장종지에 몇 점만 주느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점심에 고기가 나오는데 몇 센티미터는 될 넓적한 구운 돼지고기가 나오는 거예요. 한 사람이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죠. 내가 좀 먹다가 못 먹겠다고 하니까 초대소에 있는 사람들 잔치가 벌어졌어요. 아귀같이 달려들어 그 고기를 먹어 치우더라고요.
미국의 경제제재로 북한의 의식주가 다 형편없어요. 내가 남긴 밥과 반찬은 보위부원 차지였어요. 한번은 창에서 내려다보니까 그 밥과 반찬을 보위부원이 초대소 정원의 물이 빠진 배수로 안으로 들어가서 먹더라고요. 그나마 보위부 끗발로 내가 남긴 밥을 먹는 거지 경비병이나 일꾼들은 밀리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개털이라고 판단했는지 점점 천대했어요. 반찬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술도 주지 않고 배급해주던 담배도 저질로 바뀌더라고요.”
“왜 대접이 변했죠?”
옆에 있던 아내가 물었다.
“남한 사회의 불공정에 대해 쓰라고 했는데 제가 쓴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책임자가 ‘겨우 이 정도밖에 쓰지 못하느냐’고 타박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쓸 수가 없었어요. 북한 텔레비전에서 남한의 모습이라고 내보내는 것을 보면, 1950~60년대 거지들과 상이(傷痍)군인이 들끓는 모습이라든가, 아니면 격렬한 운동권의 시위하는 장면만 나와요. 그러니 내가 글을 써도 맞지가 않는 거죠.”
“윤 선생같이 남한에서 북한으로 자진해서 월북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어떤 사람들인가요?”
“남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온 사람도 있고 더러 호기심에 온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나도 사실은 부도가 나고 먹고살 수 없으니까 간 거죠. 그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고부터는 천대하기 시작했어요. 회령 초대소에서 함경도의 다른 도시로 보내더라고요.”
“거기서는 어땠는데요?”
내가 물었다.
“무지무지하게 추운 곳이더군요. 그곳의 초대소라는 곳으로 옮겼는데 방이 여러 개 있는 싸구려 여관같이 지은 2층 건물이었어요. 그중 방 하나에 묵었는데 어찌나 추운지 이가 딱딱딱 부딪칠 정도였어요. 처음 조사받을 때 후끈거리던 방이 생각나더라고요. 화장실의 변기들도 전부 얼어붙어 버리고 건물 전체에서 한 곳만 공동으로 썼어요. 어찌나 춥고 떨리는지 거기는 지옥이에요. ‘북으로 잘못 갔다’고 속으로 후회했죠.”
“내가 듣기로는 북한도 이제는 우리의 1970년대 정도까지 발전했다고 들었는데요?”
내가 이상해서 물었다.
“그건 도시의 경우죠. 내가 있던 지방은 안 그랬어요.”
한국은 얼마 전 NLL을 넘어온 북한의 어부 두 명을 강제로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북한 역시 윤 선생을 판문각을 통해 돌려보냈다. 그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죠?”
“나를 도로 남한으로 보내라는 당의 명령이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아파트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더니 이 친구들 전부 나한테 사기 친 거죠.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이 냉정하고 무뚝뚝해지더라고요. 남쪽으로 쫓겨 오기 한 달 전쯤이었죠.”
윤 선생은 자신의 치아(齒牙) 얘기를 들려줬다.
“(북측) 담당자가 제 이가 안 좋으니까 북에서 틀니를 해줄 테니까 하고 가래요. 의료복지가 그래도 북이 남쪽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곳 치과를 갔죠. 틀니를 하려면 남은 이를 전부 뽑아야 한다는 거예요. 의자에 앉아 막 이를 뽑으려고 할 때였어요. 치과의사가 ‘죄송하다’고 하면서 마취제가 없어 ‘그냥 뽑아야겠다’고 하면서 참으라고 하더라고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어요. 내가 아프다고 소리치니까 치과의사가 그것도 참지 못하냐고 되레 화를 내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북한 사람들 뒤끝 있네. 마취제 없이 이를 뽑는 건 그동안 대접해준 데 대한 복수 아니야? 심통이 나서 그만큼 아파보라는 거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말했다.
“아니야, 마취제가 없다는 건 거짓말일 거야. 어디 다른 데 가서라도 구해올 수 있었을 거 아니야? 앞으로 북한을 이해하려면 그런 뒤끝 있는 사람들로 봐야겠네.”
아내의 결론이었다. 내가 그의 이를 보면서 물었다.
“지금 하고 계신 틀니가 거기서 만들어준 겁니까?”
“아니에요, 여기서 다시 했어요. 하여튼 내 얘기 좀 더 들어보세요. 이를 빼고 잇몸으로 얼마 동안 죽만 먹고 지냈어요. 틀니 본이 잘못 떠졌다고 또다시 하자고 해서 시간이 걸렸어요.
아프고 죽을 먹으니까 나도 화가 났죠. 한번은 나를 감시하는 여자에게 ×년이라고 욕을 했어요. 그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더라고요. ‘북조선이 ×년들과 종놈들이 세운 나라인지 몰라서 왔느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들의 의식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해방 후 북한의 인민위원회에는 머슴과 건달 출신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장성택, 인민의 배고픔에 눈물 흘렸다더라”
![]() |
처조카 김정은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장성택. ‘윤 선생’에 따르면, 장성택(맨 오른쪽)은 생전 북한 인민의 배고픔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내가 물었다.
“바로 서울구치소로 갔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그래요. 서울구치소 안이 따뜻하고 괜찮더라고요. 구치소 안에서도 독방을 주더라고요. 재판에서 판사가 그동안 얘기를 듣더니 집행유예를 선고해서 내보내더라고요. 그래서 석방이 된 후 합숙소에 갔다가 변호사님을 거기서 만난 거죠.”
그는 지금 대한민국 안에서 최하위 빈곤층이다. 복지 혜택으로 쪽방을 얻어 혼자 산다. 남과 북에서 모두 살아본 그는 관념적인 나보다는 체험으로 더 정확히 알 것 같아 물었다.
“북의 주민을 할래, 남한에서 최하위 빈곤 생활을 할래,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어요?”
“당연히 남쪽이죠.”
“윤 선생의 시각에서 북한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사회주의라고 하는 이상한 나라였어요. 김일성이라는 신(神)을 믿는 광신적인 종교집단이었어요.
중세 유럽의 싸움같이 미국의 봉쇄 속에서 군사독재를 하면서 농성(籠城) 체제를 유지하는 비참한 사회죠. 옛날에 성(城)이 포위돼 그 안에서 사람들이 굶다가 자식까지 잡아먹었잖아요? 북도 ‘고난의 행군’ 시절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죠. 북의 함경도 산자락에 있는 고아원에 가보세요. 어린아이들이 토굴 같은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어요. 그걸 남한의 대형 교회 목사들이 도와주고 있어요.”
“북한이 보는 남한에 대한 시각은 어땠습니까?”
“북쪽 사람들은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남한은 그 앞잡이 괴뢰정권으로 보고 있죠.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긍지도 있었어요. 6·25전쟁 시 미군 폭격기들이 북을 완전히 초토화했습니다. 철도, 항만, 공장뿐 아니라 저수지나 물을 보관하는 보(洑)까지 파괴했죠. 전후(戰後) 러시아나 중국도 도움을 주지 않았죠. 북한은 그런 속에서 오직 인민의 힘으로 그나마 이 정도까지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경제 면에서는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했다고 자랑합니다. 사회주의 동원 체제가 그 실효(實效)를 거둔 거죠.”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북의 주민들은 가난과 굶주림의 원인은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문을 열기는 열어야 할 텐데’ 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너무 문을 열면 자본주의 사회의 날파리와 해충 같은 저질문화가 들어올까 봐 걱정하죠.
북한 경제통이었던 장성택은 인민의 배고픔에 더러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중국식 개방을 추구하다가 숙청이 됐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어떤 식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개방을 하느냐’인 것 같아요.”
“쪽방 얻어 살아도 자유로운 여기가 좋다”
“북한과 남한은 아직도 같은 민족이라는 유대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저는 의문입니다. 오래전에 국토가 나뉘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단절로 인해 이제 민족이나 문화까지 다른 존재로 바뀐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보는 대한민국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남과 북은 정신적·문화적 동일성도 이미 없다고 봐요. 공허한 이념이나 역사에 가위눌려 있다고나 할까요.”
북한에서 4년을 살다가 온 윤 선생은 남과 북의 복지 혜택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에 관한 내용도 궁금해 내가 물어봤다.
“노년의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제가 북한으로 가서 4년을 살다 온 기억들을 글로 써놓고 싶은데 방에 엎드려 쓰자니 허리가 아파서 못 쓰고 있어요. 마음만 있는 거죠.”
“도로 쫓겨 오지 않았으면 그곳에 계속 살았을 것 같아요?”
내가 본질을 물었다.
“겨울에 함경도에서 너무 추웠어요. 거리를 돌아다니는 등 자유도 없고요.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처절한 삶을 보니까 오만정이 떨어졌죠. 노령연금으로 쪽방을 얻어 살아도 자유로운 여기가 좋아요. 지금 임대 아파트를 신청해놓고 있어요. 아직 순서가 돌아오지는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