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까지는 당 허락 받고 결혼, 1970년대 이후에는 중매결혼, ‘토대’ 중시
⊙ ‘고난의 행군’ 이후 남한 드라마 유입되면서 드라마 속 대사 유행
⊙ 사랑하는 여자 있었지만 탈북으로 갑작스럽게 이별… 얼마 전 결혼했다는 소식 들어
⊙ ‘고난의 행군’ 이후 남한 드라마 유입되면서 드라마 속 대사 유행
⊙ 사랑하는 여자 있었지만 탈북으로 갑작스럽게 이별… 얼마 전 결혼했다는 소식 들어
- 연인으로 보이는 북한 남녀가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다. 남한에서 살면서 친구들에게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북한 연애다. “북한에서도 연애를 하니?” “데이트는 하니?” “소개로 만나니, 아니면 자연스럽게 만나니?” 등의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북한에서는 연애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하니?”
질문을 하는 친구들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북한은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다.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없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에게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막지 못했다.
북한은 1990년대 식량 문제로 경제가 거의 파탄 났다. 이로 인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중 하나가 연애다. 20~30대 청년들은 기존 기성세대와 달리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연애를 통한 결혼보다 중매결혼을 했다. 정권에서도 ‘연애는 자본주의의 썩어빠진 퇴폐문화’라며 중매결혼을 종용했다.
북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은 남한 드라마와 영화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중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해 밀수가 성행했고, 그 속을 통해 외부 정보들이 북한 내부로 들어왔다.
어렵게 한 약속
나에게도 10대 시절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있다. 탈북을 몇 개월 앞두고 연애를 시작했다. 물론 당시 나도 탈북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과 사는 곳은 개인의 신상 문제가 있어 밝히지 않겠다. 나보다 2세 어린 연하였다.
탈북 전 시골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처음 본 순간 나의 이상형이었다. 주변 친구들을 통해 그가 어디에 살고 누구인지를 파악했다. 이후 그녀를 찾아가 고백을 하려 했지만 정작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그의 집 앞까지 가긴 했지만 한마디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쪽지로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정성스럽게 한 장 정도 내용의 편지를 썼지만 그 역시 전해주지 못했다.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해 보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됐고,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나: “저기… 잠깐 말 좀 할 수 있겠니?”
그녀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계속해서 그의 집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 “나 지금 바쁨다. 나중에 합시다.”
나: “그럼 저녁 7시까지 운동장 앞으로 나와라. 내 기다린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고 급하게 돌아서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그날 저녁 약속 장소에 나갔다. 북한의 경우 가로등이 없어 밤이면 손전등을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넘어지거나 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하니 앞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물론 어두워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손전등을 사람에게 비추면 큰 실례가 된다. 나는 속으로 그녀가 나왔길 바라며 긴장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녀였다. 순간 나는 너무 좋아 소리치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임을 확인하고 나서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그녀: “왜 보자고 했슴까?”
나: “지금 친한 사람 있니?”
북한에선 ‘사귄다’는 표현을 ‘친한다’라고 말한다.
그녀: “그건 왜 물어봄까?”
나: “있니 없니 그것만 말해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친구 데이트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정작 내가 하자고 하니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15세부터 연애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남한에선 이 나이면 어린 편이다. 그러나 북한에선 17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시작하기 때문에 결코 어리지 않다.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
고등중학교 4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이성(異姓)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도 친한 친구가 6명 있었는데 그중 2명이 연애를 했다. 공교롭게도 2명의 여자친구 모두 같은 반 친구였다.
당시 우리는 휴대폰이 없는 상태였다. 순수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북한스러운 방식으로 연락했다. 암호였다. 쪽지를 써서 연락을 취해도 됐지만 그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데이트를 하자’라고 할 경우 “어…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네. 오늘 저녁 8시 잉크 사러 가야겠다” 등의 방식이다. 첩보영화에서 간첩들에게 보내는 암호 같았다. 무슨 의미로 이 같은 암호를 만들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종종 친구의 부탁으로 암호를 날렸다. 교실에서 친구의 여자친구가 들리게 큰 소리로 말하거나, 길을 가다 마주치면 조용히 “어…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네. 오늘 저녁 8시 잉크 사러 가야겠다”라고 암호를 전달했다.
가끔 교실에서 큰 소리로 말하게 되면 이를 모르는 친구들은 한마디씩 했다.
“머저리 아니야? 저녁에 잉크 어디서 파니?”
그것을 아는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날 저녁은 어김없이 둘이 데이트를 한다. 가끔 전달이 안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친구들이 여자친구 집으로 찾아가 불러낸다. 이도 위험이 따른다. 만약 집에 부모님이 계시면 우리의 행동이 그대로 선생님 귀에 들어가 큰일을 치르게 된다.
한번은 A친구의 여자친구 집으로 갔는데 그녀의 어머니에게 걸렸다. 우리는 당황했고, 선생님이 지금 학교로 부른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화(禍)는 쌍으로 온다고 담임선생님이 그 집에 있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우리는 호되게 혼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김정숙 동상 앞에서 애정 행각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우리는 몰래 친구의 데이트를 훔쳐보기도 했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의 동상 근처 조용한 곳이었다. 모든 데이트는 해가 떨어진 밤에 했다. 만약 고등학생이 낮에 데이트를 하다 어른들 눈에 띄게 되면 아마도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들이…’ 사람 이마에 피가 마르면 죽는데 말이다.
우리는 저녁 8시 전에 미리 김정숙 동상 앞에 가서 전망 좋은 자리를 잡고 숨어 있었다. 물론 데이트하는 친구는 다 알고 있었다. 시각이 되면 서로 만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대화를 들어보면 솔직히 의미 있는 대화는 아니다. 손을 잡고 얘기하다가 가끔 서로 뽀뽀를 하는 정도가 데이트의 끝이다. 정말 순수했다.
하지만 장소는 순수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김정숙 동상 앞에서 10대들이 이러한 애정 행각을 한다는 것이 만약 걸리게 되면 남녀 모두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이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2가지다. 첫째는 매일 3번 정도의 청소가 진행되니 우선 깨끗하다. 둘째는 보안원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대신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드라마 〈가을동화〉 원빈, 북한 여성들 마음 사로잡다
북한은 2000년 초반을 기점으로 남한 드라마와 영화가 물밀 듯이 흘러들어왔다. 물론 김정일 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당시 〈올인〉 〈천국의 계단〉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이 북한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몰래 유통됐다. 특히 2000년 9월 KBS2 드라마 〈가을동화〉가 북한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12회에서 태석(원빈)이 은서(송혜교)에게 한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는 대사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녹여버렸다.
북한 젊은 남녀 중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다. 이성 간에 프러포즈와 말투, 행동까지도 변화했다.
2년 전에 탈북한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방영하는 드라마의 경우 남한에서 방송된 후로 7일 만에 북한 전역에 뿌려진다. 20~30대 젊은 청년들은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함께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유행이 불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연인들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키스신’에 열광을 한다. 북한에서는 그동안 연애문화를 퇴폐로 규정했기 때문에 영화나 연속극에서 키스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남한 드라마에서는 키스신 등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연애 감정을 공감할 수 있어 남한 드라마에 더욱 열광한다는 전언이다.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 보려 탈북하기도…
요즘 북한의 젊은 연인들은 말투도 남한화되어 간다. 외부 영상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애를 하게 되면 서로의 호칭은 동무나 동지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동무라고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동지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드라마를 통해 ‘○○○씨’와 ‘자기야’라는 호칭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의 20~30 대는 변화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는 SBS에서 방영한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다. 극 중 도민준(김수현)은 북한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이 드라마를 보고 탈북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북한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20대 중반인 탈북민 A씨는 〈별에서 온 그대〉를 보고 남한에 가면 김수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남한 드라마가 북한의 20~30대를 변화로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당 허락 받고 결혼
6·25전쟁 이후 김일성은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며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당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북한 노동당의 권력은 무소불위(無所不爲)다.
그러나 1950~1960년대는 더 심했다. 자식의 결혼을 당 비서나 세포비서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에야 혼인을 승낙하는 시대였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연속극에도 이런 장면을 넣어 사람들을 세뇌했다. 2000년대 초반 방영한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 편에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세포비서를 찾아가 사위가 될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세포비서가 적극 추천하자 그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딸의 결혼을 승낙한다.
이후 1970~1980년대는 중매를 통해 결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당에 대한 의존도는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당의 추천보다 서로의 집안의 토대(출신)를 중요시했다. 토대가 좋은 집에 시집이나 장가를 가게 되면 간부가 되는 데 걸림돌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토대가 좋은 집안과의 결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졌다. 토대가 좋은 집에서도 상대방 집안에 문제가 있으면 결혼 당사자가 마음에 들어도 결혼을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계층이 나뉘었다. 자식들도 토대가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당연히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승진도 빠르다.
리설주가 가져온 변화
1990년대 말을 기점으로 북한 결혼 문화도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토대보다 돈이 많은 집과 혼사가 성사되길 원했다. 이때부터 중매보다는 당사자들의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의 식량 기근이 북한 사회를 바꾼 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통해 외부 사회에 대해 알게 됐고, 1980년대까지 상상도 못했던 탈북이 이뤄지고 남한과 서구 사회의 정보와 문화가 조금씩 유입됐다. 외부 영상 등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해 왔던 서방 세계를 보게 됐고, 이로 인해 북한의 젊은 세대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젊은 세대들은 더욱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있다. 김정은이 TV에 나올 때면 리설주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마다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남녀가 함께 낮에 팔짱을 끼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이별 그리고 결혼
나는 그날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지만 남자친구가 없는 것만 확인한 채 헤어졌다. 여러 차례 구애 끝에 우리는 연인이 됐다. 이후 우리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만나지 못하고 해가 지면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는 없었지만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아무 소식도 남기지 못한 채 탈북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그녀와 결혼까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녀와 이별을 했다.
처음 남한에 와서 그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12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됐다. 2~3년 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이었다. 탈북을 하는 것도 모르고 두만강을 넘었지만, 만약 미리 그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데리러 오겠다”고 했더라면…. 그녀는 아마 혼자의 힘으로라도 남한으로 왔을 것이다. 미안함과 북한 정권에 대한 야속함이 남지만 그래도 10대의 나의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선택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죄로 사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루빨리 북한의 20~30대들도 자유롭게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계속)⊙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북한에서는 연애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하니?”
질문을 하는 친구들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북한은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다.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없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에게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막지 못했다.
북한은 1990년대 식량 문제로 경제가 거의 파탄 났다. 이로 인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중 하나가 연애다. 20~30대 청년들은 기존 기성세대와 달리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연애를 통한 결혼보다 중매결혼을 했다. 정권에서도 ‘연애는 자본주의의 썩어빠진 퇴폐문화’라며 중매결혼을 종용했다.
북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은 남한 드라마와 영화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중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해 밀수가 성행했고, 그 속을 통해 외부 정보들이 북한 내부로 들어왔다.
어렵게 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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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주체사상탑 밑에서 남녀가 나무 뒤에 숨어 몰래 키스를 하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
탈북 전 시골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처음 본 순간 나의 이상형이었다. 주변 친구들을 통해 그가 어디에 살고 누구인지를 파악했다. 이후 그녀를 찾아가 고백을 하려 했지만 정작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그의 집 앞까지 가긴 했지만 한마디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쪽지로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정성스럽게 한 장 정도 내용의 편지를 썼지만 그 역시 전해주지 못했다.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해 보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됐고,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나: “저기… 잠깐 말 좀 할 수 있겠니?”
그녀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 계속해서 그의 집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 “나 지금 바쁨다. 나중에 합시다.”
나: “그럼 저녁 7시까지 운동장 앞으로 나와라. 내 기다린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하고 급하게 돌아서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그날 저녁 약속 장소에 나갔다. 북한의 경우 가로등이 없어 밤이면 손전등을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넘어지거나 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하니 앞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물론 어두워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손전등을 사람에게 비추면 큰 실례가 된다. 나는 속으로 그녀가 나왔길 바라며 긴장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녀였다. 순간 나는 너무 좋아 소리치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임을 확인하고 나서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그녀: “왜 보자고 했슴까?”
나: “지금 친한 사람 있니?”
북한에선 ‘사귄다’는 표현을 ‘친한다’라고 말한다.
그녀: “그건 왜 물어봄까?”
나: “있니 없니 그것만 말해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막무가내였다. 친구 데이트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정작 내가 하자고 하니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15세부터 연애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남한에선 이 나이면 어린 편이다. 그러나 북한에선 17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시작하기 때문에 결코 어리지 않다.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다”
고등중학교 4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이성(異姓)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도 친한 친구가 6명 있었는데 그중 2명이 연애를 했다. 공교롭게도 2명의 여자친구 모두 같은 반 친구였다.
당시 우리는 휴대폰이 없는 상태였다. 순수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북한스러운 방식으로 연락했다. 암호였다. 쪽지를 써서 연락을 취해도 됐지만 그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 데이트를 하자’라고 할 경우 “어…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네. 오늘 저녁 8시 잉크 사러 가야겠다” 등의 방식이다. 첩보영화에서 간첩들에게 보내는 암호 같았다. 무슨 의미로 이 같은 암호를 만들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종종 친구의 부탁으로 암호를 날렸다. 교실에서 친구의 여자친구가 들리게 큰 소리로 말하거나, 길을 가다 마주치면 조용히 “어… 만년필 잉크가 떨어졌네. 오늘 저녁 8시 잉크 사러 가야겠다”라고 암호를 전달했다.
가끔 교실에서 큰 소리로 말하게 되면 이를 모르는 친구들은 한마디씩 했다.
“머저리 아니야? 저녁에 잉크 어디서 파니?”
그것을 아는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날 저녁은 어김없이 둘이 데이트를 한다. 가끔 전달이 안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친구들이 여자친구 집으로 찾아가 불러낸다. 이도 위험이 따른다. 만약 집에 부모님이 계시면 우리의 행동이 그대로 선생님 귀에 들어가 큰일을 치르게 된다.
한번은 A친구의 여자친구 집으로 갔는데 그녀의 어머니에게 걸렸다. 우리는 당황했고, 선생님이 지금 학교로 부른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화(禍)는 쌍으로 온다고 담임선생님이 그 집에 있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우리는 호되게 혼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김정숙 동상 앞에서 애정 행각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우리는 몰래 친구의 데이트를 훔쳐보기도 했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의 동상 근처 조용한 곳이었다. 모든 데이트는 해가 떨어진 밤에 했다. 만약 고등학생이 낮에 데이트를 하다 어른들 눈에 띄게 되면 아마도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들이…’ 사람 이마에 피가 마르면 죽는데 말이다.
우리는 저녁 8시 전에 미리 김정숙 동상 앞에 가서 전망 좋은 자리를 잡고 숨어 있었다. 물론 데이트하는 친구는 다 알고 있었다. 시각이 되면 서로 만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대화를 들어보면 솔직히 의미 있는 대화는 아니다. 손을 잡고 얘기하다가 가끔 서로 뽀뽀를 하는 정도가 데이트의 끝이다. 정말 순수했다.
하지만 장소는 순수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김정숙 동상 앞에서 10대들이 이러한 애정 행각을 한다는 것이 만약 걸리게 되면 남녀 모두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이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2가지다. 첫째는 매일 3번 정도의 청소가 진행되니 우선 깨끗하다. 둘째는 보안원들이 24시간 지키고 있어 안전하다. 대신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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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
당시 〈올인〉 〈천국의 계단〉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이 북한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몰래 유통됐다. 특히 2000년 9월 KBS2 드라마 〈가을동화〉가 북한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12회에서 태석(원빈)이 은서(송혜교)에게 한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는 대사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녹여버렸다.
북한 젊은 남녀 중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다. 이성 간에 프러포즈와 말투, 행동까지도 변화했다.
2년 전에 탈북한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방영하는 드라마의 경우 남한에서 방송된 후로 7일 만에 북한 전역에 뿌려진다. 20~30대 젊은 청년들은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함께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유행이 불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연인들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키스신’에 열광을 한다. 북한에서는 그동안 연애문화를 퇴폐로 규정했기 때문에 영화나 연속극에서 키스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남한 드라마에서는 키스신 등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연애 감정을 공감할 수 있어 남한 드라마에 더욱 열광한다는 전언이다.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 보려 탈북하기도…
요즘 북한의 젊은 연인들은 말투도 남한화되어 간다. 외부 영상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애를 하게 되면 서로의 호칭은 동무나 동지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동무라고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동지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드라마를 통해 ‘○○○씨’와 ‘자기야’라는 호칭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의 20~30 대는 변화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는 SBS에서 방영한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다. 극 중 도민준(김수현)은 북한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이 드라마를 보고 탈북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북한에서는 인기가 많았다. 20대 중반인 탈북민 A씨는 〈별에서 온 그대〉를 보고 남한에 가면 김수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남한 드라마가 북한의 20~30대를 변화로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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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바닷가 모래 위에 ‘행복’이라고 쓰고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
그러나 1950~1960년대는 더 심했다. 자식의 결혼을 당 비서나 세포비서에게 허락을 받은 다음에야 혼인을 승낙하는 시대였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연속극에도 이런 장면을 넣어 사람들을 세뇌했다. 2000년대 초반 방영한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 편에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세포비서를 찾아가 사위가 될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세포비서가 적극 추천하자 그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딸의 결혼을 승낙한다.
이후 1970~1980년대는 중매를 통해 결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당에 대한 의존도는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당의 추천보다 서로의 집안의 토대(출신)를 중요시했다. 토대가 좋은 집에 시집이나 장가를 가게 되면 간부가 되는 데 걸림돌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토대가 좋은 집안과의 결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졌다. 토대가 좋은 집에서도 상대방 집안에 문제가 있으면 결혼 당사자가 마음에 들어도 결혼을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계층이 나뉘었다. 자식들도 토대가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당연히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승진도 빠르다.
리설주가 가져온 변화
1990년대 말을 기점으로 북한 결혼 문화도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토대보다 돈이 많은 집과 혼사가 성사되길 원했다. 이때부터 중매보다는 당사자들의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의 식량 기근이 북한 사회를 바꾼 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통해 외부 사회에 대해 알게 됐고, 1980년대까지 상상도 못했던 탈북이 이뤄지고 남한과 서구 사회의 정보와 문화가 조금씩 유입됐다. 외부 영상 등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해 왔던 서방 세계를 보게 됐고, 이로 인해 북한의 젊은 세대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젊은 세대들은 더욱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있다. 김정은이 TV에 나올 때면 리설주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마다 리설주가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남녀가 함께 낮에 팔짱을 끼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이별 그리고 결혼
나는 그날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지만 남자친구가 없는 것만 확인한 채 헤어졌다. 여러 차례 구애 끝에 우리는 연인이 됐다. 이후 우리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만나지 못하고 해가 지면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는 없었지만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아무 소식도 남기지 못한 채 탈북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그녀와 결혼까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녀와 이별을 했다.
처음 남한에 와서 그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12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됐다. 2~3년 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는 소식이었다. 탈북을 하는 것도 모르고 두만강을 넘었지만, 만약 미리 그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데리러 오겠다”고 했더라면…. 그녀는 아마 혼자의 힘으로라도 남한으로 왔을 것이다. 미안함과 북한 정권에 대한 야속함이 남지만 그래도 10대의 나의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선택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죄로 사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루빨리 북한의 20~30대들도 자유롭게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소망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