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金日成이 죽자 윤이상 부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이 마음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 弔電. 金日成은 윤이상을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자 재간둥이”라고 극찬
⊙ 통전부 산하 ‘조선무역총회사’와 류경호텔 인근에서 여성용 고급 양품점 ‘평양상점’ 운영
⊙ 정부 지원으로 외국 국적의 한국인 私邸를 매입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
⊙ 집 매각 후에도 ‘윤이상 기념관’에 윤이상 가족의 체류와 행사 이용 가능토록
독일 그라운드 북(한국의 부동산 등기부 등본)에 기재
⊙ 북한에는 김일성이 하사한 집, 남한 통영에는 딸 윤정씨 소유 별장, 뉴욕에는 아파트,
독일에는 ‘윤이상 하우스’
⊙ 통전부 산하 ‘조선무역총회사’와 류경호텔 인근에서 여성용 고급 양품점 ‘평양상점’ 운영
⊙ 정부 지원으로 외국 국적의 한국인 私邸를 매입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
⊙ 집 매각 후에도 ‘윤이상 기념관’에 윤이상 가족의 체류와 행사 이용 가능토록
독일 그라운드 북(한국의 부동산 등기부 등본)에 기재
⊙ 북한에는 김일성이 하사한 집, 남한 통영에는 딸 윤정씨 소유 별장, 뉴욕에는 아파트,
독일에는 ‘윤이상 하우스’
- 김일성과 기념촬영을 한 윤이상·이수자씨 부부.
2012년 1월 10일. 작곡가 고(故) 윤이상(尹伊桑·1995년 사망)씨의 딸 윤정씨가 소유주로 돼 있는 경남 통영시 용남면 소재 한 별장. 시민단체 회원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별장 소유주인 윤정씨는 어머니 이수자씨와 함께 김정일(金正日) 사망 후 방북(訪北)했다가 같은 달 1일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한 터였다. 100여 명의 회원들은 윤이상씨의 아내와 딸 등 모녀(母女)가 기거하고 있는 별장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정부의 민간인 조문 불허(不許)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조문을 위해 방북한 이수자씨 모녀의 북한과 한국을 넘나드는 행위는 민족애(民族愛)를 가장한 범법행위다.”
“정부는 이수자씨와 윤정씨의 입국을 불허하고 두 사람은 ‘통영의 딸’ 신숙자씨 구출에 적극 협조하라.”
두 딸과 함께 북한에 억류 중인 신숙자씨는 오길남씨의 아내다. 오길남씨는 독일 유학 중 1985년에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가 1986년 11월에 단신 탈출했다. 오씨는 윤이상씨가 자신의 가족의 월북을 권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을 탈출해 5년 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윤이상씨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들 송환을 수차례 부탁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4월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한 오씨는 1992년에 입국했다. 그는 유엔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등에 호소문을 보내는 등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송환을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그의 가족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최근 그의 그런 노력이 언론을 통해 사회에 알려지면서 ‘통영의 딸 신숙자씨 구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통영은 윤이상씨가 자란 곳인 동시에 신숙자씨의 고향이다.
윤이상씨의 딸 윤정씨는 지난해 12월 9일 오길남씨를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오씨에게 월북을 권유한 증거가 없는데도 권유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씨는 ‘통영의 딸’ 송환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목사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고소했다.
같은 달 30일 실향민중앙협의회 채병률 회장과 지만원씨는 이수자·윤정씨 모녀를 국가보안법 위반과 무고(誣告)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 모녀가 독일 국적이지만 헌법상 우리 영토인 평양에서 범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국내법에 의해 처벌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또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무고 행위라고 주장했다.
독일국적 포기 않고 있는 母女
윤이상씨의 가족인 이수자·윤정 모녀가 한국 국적이었다면 김정일 조문 후 입국할 때 당장 체포돼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인의 피를 고스란히 갖고 있고 ‘민족’을 말하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독일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과 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며 지내고 있다. 통영 현지주민에 따르면 남한에는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개최되는 ‘윤이상 음악제’ 참석을 위해 입국해 늦가을에서 초봄까지 통영 별장에서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별장은 2010년 5월경 ‘통영옻칠미술관’ 인근에 지어졌다. 북한 체류 시에는 김일성(金日成)이 윤이상씨가 방북 시 기거할 수 있도록 내준 평양 대성산 주변 백화원 초대소 인근 소재 철봉초대소 단지에 머문다고 한다. 건평 300평에 2층인 건물이다.
주변에 10여 개의 초대소가 있지만 이 건물은 초대소라기보다는 주택의 성격에 가까운 건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건물에는 통전부가 별도로 관리하는 발전기를 통해 24시간 전기와 온수(溫水)가 공급되는 등 부총리급 이상의 윤택한 생활여건이 구비돼 있다고 한 고위 정보소식통은 말했다. 북한은 부총리급 인사들에게도 온수 공급 없이 하루 3차례 2시간씩 제한급수를 하고 있다.
주택관리를 위해 요리사, 접대원, 안내원 및 청소부 등의 인력을 지원하고 호위사령부 소속 승용차(일명 별표 차량)를 별도로 제공한다는 것이 북한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수자씨는 평소 독일 교포 등 지인들에게 “북한에 가면 나를 위한 저택이 제공되고 가정부, 요리사, 관리인, 비서 등이 있어 베를린보다 가족스러운 분위기에서 생활할 수 있어 편안하다”고 말해왔다고 한다.
이수자씨는 2001년 펴낸 《나의 독백》 곳곳에서 김일성으로부터 평양 집을 받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다.
<남편은 95년 11월 나를 혼자 두고 눈을 감았다. 그 소식을 접한 북의 최고 책임자께서는 나를 간곡히 초대하였다. 그때 남편의 생애를 내 손으로 쓸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일념에서 김 주석이 선물로 내주신 비워두었던 북의 집으로 떠났다.>(책 5쪽)
<나의 또 다른 집이 평양에 있다. 내가 그곳에 갈 때는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가족이 모인다. 그곳 또한 내 나라다.>(28쪽)
<김 주석이 선물한 평양 근교 산 속에 있는 집은 내가 없을 때는 비어 있고 내가 살 때에는 나의 만들어진 식구들이 모인다. 그 식구 속에 집을 관리하는 스무 살 난 고운 처녀가 있다. 내 일을 이것저것 돌봐주는 안내도 있다. 그때 나이 스무 살 총각이던 접대원도 서른이 되었다.>(36~37쪽)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수자씨는 방북 시 주로 주거지 인근 룡학산에 있는 사찰 덕수암을 찾아가 소일을 하고 평양 문수동에 있는 평양친선병원에서 건강진단과 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최근에 김정일을 조문하기 위해 방북했을 때도 이수자·윤정 모녀는 장례식, 추도대회, 해외동포 대상 위로연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해 헤드 테이블에 앉는 등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아들 우경씨는 LA 거주
미국 및 독일 지역 교포들에 따르면 윤정씨는 뉴욕과 베를린, 평양, 통영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 임대로 월 3000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면서 아파트 관리차 뉴욕을 수시로 방문했다고 한다. 김정일 사망 직전인 지난해 12월 초에도 뉴욕행 비행기에서 윤정씨가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 아파트는 최근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정씨가 미국에 갈 때 간혹 들르는 곳이 LA라고 한다.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 윤우경씨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
윤우경씨는 1984년 5월에 평양 무용수 김선옥씨와 결혼했다. 평양에 체류하며 윤이상 음악연구소 등에서 일하던 우경씨는 결혼 후 독일로 돌아갔다. 아내가 독일 국적을 취득한 후인 1993년 7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미국 LA로 이주했다.
김선옥씨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부동산 중개 면허를 취득해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다가 지금은 그만둔 상태라고 한다. 남편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 하던 컴퓨터 수리점이 잘 되지 않자 부인이 생활 전선에 나섰던 것이다. LA 거주 교포들에 따르면 우경씨는 우리 교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오길남씨는 윤우경씨가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오씨는 “독일어로 된 우경이 결혼식 문건을 내가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다”면서 “윤이상·이수자 부부는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우경이가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을 적극 막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윤이상씨 부부가 마약에 중독돼 있던 우경이를 치료 목적으로 북한에 보냈던 것 같다”면서 “치료를 위해 우경이를 가죽으로 묶어놓고 두들겨 팼다는 소리를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함께 있던 지도원들한테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윤우경씨가 북한 여성과 결혼 후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윤이상씨와 막역한 사이였던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 덕분이었다고 한다. 김일성과도 절친했던 루이제 린저가 김일성에게 “윤이상씨의 아들을 독일로 다시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게 오길남씨의 증언이다.
윤이상씨의 인세 외에도 뉴욕 아파트 임대로 수입을 올렸던 윤정씨는 통전부가 운영하는 평양상점 운영 참여를 통해서도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사업차 수시로 북한을 드나드는 교포 사업가들에 따르면 윤정씨는 2004년경부터 통전부 산하 ‘조선 56무역총회사’와 공동으로 류경호텔 인근에 여성용 고급 양품점인 평양상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상점은 통전부 소속 지배인과 관리인이 영업을 담당하고 있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조선56총무역회사와 윤정씨가 일정 비율로 나눈다는 것이다. 평양상점은 한국 동대문시장 및 중국 등지에서 여성 의류 및 액세서리를 구입해 외화를 보유하고 있는 당 고위간부, 무역일꾼, 재일교포 재북(在北) 가족 등을 고객으로 월 약 5000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윤정씨의 몫은 연간 3만 달러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UN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2009년 개인 소득은 평균 499달러다. 평양상점 운영 참여로 윤정씨는 북한 1인당 평균 소득의 60배에 달하는 소득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윤이상·이수자씨 부부의 親北 발언
남과 북, 미국을 자유롭게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윤정씨의 부친 윤이상씨.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친북(親北)’도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주요 수식어다.
윤이상씨는 독일에 유학 중이던 1963년부터 78세로 세상을 떠난 1995년 11월까지 21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부인 이수자씨를 대동한 방북도 많았다. 1967년 6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서울로 압송,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69년 3월에 석방돼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그는 1971년에 독일로 귀화했다.
1992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윤이상은 1963년 아내와 함께 입북, 간첩 교육을 받고 독일로 귀환, 월북한 친구 최상한의 장남 최성길을 독일로 유인해 북한 공작원에게 인계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문화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윤이상씨 측은 국가안전기획부의 이런 발표를 부인했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다음은 윤이상·이수자 부부가 책자나 연설을 통해서 행한 북한 관련 주요 발언 모음이다.
<북쪽이야말로 자주권과 민족의 영도자가 있다.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겨서야 민족의 따뜻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1992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75회 생일축하 음악회’에서 행한 윤이상의 연설 중에서)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영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1994년 7월 9일 파리에서 윤이상·이수자 부부)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 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영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만사의 원리라고 하지만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연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1995년 7월 8일 이수자)
<아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나라 다스림을 보고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영전에 큰절을 올립니다.>(1999년 7월 8일 이수자)
그렇다면 북한은 윤이상씨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1987년 김일성은 윤이상씨가 자신의 75회 생일을 맞아 반미(反美)·통일 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작곡한 데 대해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자 재간둥이”라고 극찬했다. 2000년 조선로동당 출판사가 펴낸 《김일성 교시집》에는 “윤이상은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 올렸고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애국지사”라고 기록돼 있다. 김정일은 윤이상씨가 사망하자 자신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평양에서 국가적 추모회도 열었다.
북한의 윤이상씨 가족에 대한 배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수자·윤정 모녀는 다른 친북 인사들과 달리 입국비자를 신청할 때 독일 주재 북한공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통전부에 연락해 베이징, 선양 등에 있는 중국 주재 북한공관에서 입국비자를 받고 있다고 한다.
李明博 대통령도 ‘윤이상평화재단’ 발기인 참여
김일성이 ‘우리 민족의 재산이자 재간둥이’라고 극찬하고 평양의 집까지 선물로 준 윤이상 일가를 돕는 것은 북한뿐만이 아니다. 남한 정부도 마찬가지다. 경남 통영의 ‘윤이상 음악당’ 건립 지원은 차치하고라도 노무현(盧武鉉) 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문화관광부는 윤이상씨의 베를린 자택에 기념관을 짓는 데 8억원을 지원했다.
문화관광부가 ‘윤이상평화재단’이 윤이상씨의 자택을 구입해 개보수(改補修)를 하는 데 지원을 해준 형국이다. ‘윤이상 하우스’로 명명된 윤이상 기념관은 현재 대지 300평에 건평 1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완성돼 있다.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는 “베를린 윤이상 하우스는 완공된 상태”라면서 “다만 개관 기념식 등은 내부사정 등의 이유로 아직 예정돼 있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2005년 2월에 출범한 ‘윤이상평화재단’ 대표 발기인에는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손학규(孫鶴圭) 전 민주당 대표 등의 이름도 들어가 있다. 현재 이사장은 신계륜(申溪輪) 전 의원이고 최근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이 된 정태근(鄭泰根) 의원도 이사로 등재돼 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윤이상씨의 베를린 자택을 2008년 5월 30일 40만 유로(약 6억원)에 구입했다. 이 집은 윤이상씨가 독일로 귀화한 1971년에 구입한 후 사망할 때까지 25년 동안 거주한 곳이다. 윤이상씨는 유럽 진출 후 작곡한 150여 곡 중 130여 곡을 이곳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집 매입 시기가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복역한 후 1969년 3월 독일로 돌아간 시점에서 얼마 안 되고, 경력상 별다른 수입이 없었다는 점에서 자금 출처에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독일 교민들에 따르면 이수자씨는 남편 사망 후 남편의 명예회복을 한다며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다가 차츰 윤이상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떨어지자 우울해했다고 한다. 간호사 출신 교민들을 자택에 거주케 하는 등 우울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자 1년 중 상당 기간을 평양에서 소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수자씨가 평양 체류 등으로 집을 비우면 독일인 제자가 별채에 거주하면서 관리를 했다고 한다.
정부의 지원금 8억원 중 2억5000만원은 주택 매입에 나머지 5억5000만원은 리모델링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지원금 중 일부가 북한에 있는 윤이상음악단 운영비로 지출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윤이상평화재단이 제출한 사용 내역을 검토 중인데 서류상 지원금을 전용한 흔적은 없다”면서 “현재 매매계약서 등 윤이상평화재단에서 제출한 자료 등을 통해 적절하게 지원금 집행이 됐는지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윤이상 하우스에 가족 거주는 적절치 않은 일”
문제는 특정 개인의, 그것도 외국 국적의 인물이 소유했던 해외 소재 건물을 개보수하는 데 국고(國庫)를 지원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이다. 윤이상평화재단 출범 후 요청했던 정부지원이 노무현 정부 말기에서야 서둘러 지원된 것만 보더라도 정부 역시 사저 구입비 지원을 놓고 상당히 곤혹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이상 기념관 건립 국고 지원 경위를 조사하고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 국정원 국내 담당 차장 김은성(金銀星)씨는 자신이 국정원 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01년 초였는데 당시 광복회 회장은 윤광빈씨였다. 하루는 윤 회장이 꼭 만나자고 했다. 윤 회장은 김 전 차장에게 “1920년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대첩이 80년이나 흘렀는데도 기념비가 없으니 건립비용을 조성할 방법이 없겠느냐”며 도움을 요청했다.
정부에서 책정한 예산은 건립비를 세우기에는 너무 적었다. 다행히 한 기업이 수억원에 달하는 건립비용을 지원해 2001년 8월 31일 중국 지린성 화룡면 청산촌 청산리 전투 현장 입구에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청산리 대첩이 있고 81년 만의 일이다.
그 일화를 소개하면서 김 전 차장은 “청산리 대첩비 건립에는 81년이나 걸렸는데도 윤이상 개인 기념관을 짓는 데는 그의 사후 불과 12년 만에 8억원이라는 나랏돈을 지원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 하나는 사저를 매각한 후에도 윤이상씨 가족은 독일 체류 시 거주 등 ‘윤이상 하우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윤이상씨 가족이 독일에 갔을 때 ‘윤이상 하우스’에 거주하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정부는 윤이상평화재단에 공익 목적으로 지원금을 준 것이기 때문에 가족이 그곳에 거주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지원금을 환수할 생각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아직 사업 목적과 관련해서 지원금이 적절하게 집행됐는지를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는 “윤이상 하우스에 상주하는 거주자는 없고 국제윤이상협회 회원들이 들러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거주 교민들의 주장은 다르다. 윤정씨가 독일에 오면 윤이상 하우스 내에 따로 마련된 별채에 묵는다는 것이다. 2010년에만 해도 윤정씨는 3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독일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이상평화재단과 윤이상씨 가족의 주택 매매계약 체결 당시 우리의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해당하는 독일 ‘그라운드 북’에는 이수자씨와 윤정씨가 윤이상 하우스 개관 후에도 그곳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명시돼 있다고 한다.
그라운드 북에는 또 윤정씨가 원할 경우 음악회 등 윤이상씨 관련 행사를 그곳에서 할 수 있도록 기재돼 있다고 한다. 사저 매각 후에도 윤이상씨 가족은 윤이상 하우스를 이전처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윤이상씨는 그의 사후 남아 있는 가족에게 남과 북을 통틀어 가장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유산으로 물려준 셈이다.
법무부장관은 출입국관리법 제11조에 따라 사회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람, 일제 전범과 같은 외국인에 대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 구체적인 입국금지 대상은 다음과 같다.
▲전염병환자ㆍ마약류중독자 기타 공중위생상 위해를 미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 ▲총포ㆍ도검ㆍ화약류 등 단속법에서 정하는 총포ㆍ도검ㆍ화약류 등을 위법하게 가지고 입국하려는 자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경제질서 또는 사회질서를 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등이다. 이 가운데 이수자씨 모녀가 해당하는 조항은 없는 것일까.⊙
별장 소유주인 윤정씨는 어머니 이수자씨와 함께 김정일(金正日) 사망 후 방북(訪北)했다가 같은 달 1일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한 터였다. 100여 명의 회원들은 윤이상씨의 아내와 딸 등 모녀(母女)가 기거하고 있는 별장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정부의 민간인 조문 불허(不許)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조문을 위해 방북한 이수자씨 모녀의 북한과 한국을 넘나드는 행위는 민족애(民族愛)를 가장한 범법행위다.”
“정부는 이수자씨와 윤정씨의 입국을 불허하고 두 사람은 ‘통영의 딸’ 신숙자씨 구출에 적극 협조하라.”
두 딸과 함께 북한에 억류 중인 신숙자씨는 오길남씨의 아내다. 오길남씨는 독일 유학 중 1985년에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가 1986년 11월에 단신 탈출했다. 오씨는 윤이상씨가 자신의 가족의 월북을 권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을 탈출해 5년 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윤이상씨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들 송환을 수차례 부탁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4월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한 오씨는 1992년에 입국했다. 그는 유엔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등에 호소문을 보내는 등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송환을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그의 가족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최근 그의 그런 노력이 언론을 통해 사회에 알려지면서 ‘통영의 딸 신숙자씨 구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통영은 윤이상씨가 자란 곳인 동시에 신숙자씨의 고향이다.
윤이상씨의 딸 윤정씨는 지난해 12월 9일 오길남씨를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오씨에게 월북을 권유한 증거가 없는데도 권유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씨는 ‘통영의 딸’ 송환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목사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고소했다.
같은 달 30일 실향민중앙협의회 채병률 회장과 지만원씨는 이수자·윤정씨 모녀를 국가보안법 위반과 무고(誣告)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 모녀가 독일 국적이지만 헌법상 우리 영토인 평양에서 범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국내법에 의해 처벌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또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무고 행위라고 주장했다.
독일국적 포기 않고 있는 母女
윤이상씨의 가족인 이수자·윤정 모녀가 한국 국적이었다면 김정일 조문 후 입국할 때 당장 체포돼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인의 피를 고스란히 갖고 있고 ‘민족’을 말하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독일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과 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며 지내고 있다. 통영 현지주민에 따르면 남한에는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개최되는 ‘윤이상 음악제’ 참석을 위해 입국해 늦가을에서 초봄까지 통영 별장에서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별장은 2010년 5월경 ‘통영옻칠미술관’ 인근에 지어졌다. 북한 체류 시에는 김일성(金日成)이 윤이상씨가 방북 시 기거할 수 있도록 내준 평양 대성산 주변 백화원 초대소 인근 소재 철봉초대소 단지에 머문다고 한다. 건평 300평에 2층인 건물이다.
주변에 10여 개의 초대소가 있지만 이 건물은 초대소라기보다는 주택의 성격에 가까운 건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건물에는 통전부가 별도로 관리하는 발전기를 통해 24시간 전기와 온수(溫水)가 공급되는 등 부총리급 이상의 윤택한 생활여건이 구비돼 있다고 한 고위 정보소식통은 말했다. 북한은 부총리급 인사들에게도 온수 공급 없이 하루 3차례 2시간씩 제한급수를 하고 있다.
주택관리를 위해 요리사, 접대원, 안내원 및 청소부 등의 인력을 지원하고 호위사령부 소속 승용차(일명 별표 차량)를 별도로 제공한다는 것이 북한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수자씨는 평소 독일 교포 등 지인들에게 “북한에 가면 나를 위한 저택이 제공되고 가정부, 요리사, 관리인, 비서 등이 있어 베를린보다 가족스러운 분위기에서 생활할 수 있어 편안하다”고 말해왔다고 한다.
이수자씨는 2001년 펴낸 《나의 독백》 곳곳에서 김일성으로부터 평양 집을 받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밝히고 있다.
<남편은 95년 11월 나를 혼자 두고 눈을 감았다. 그 소식을 접한 북의 최고 책임자께서는 나를 간곡히 초대하였다. 그때 남편의 생애를 내 손으로 쓸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일념에서 김 주석이 선물로 내주신 비워두었던 북의 집으로 떠났다.>(책 5쪽)
<나의 또 다른 집이 평양에 있다. 내가 그곳에 갈 때는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가족이 모인다. 그곳 또한 내 나라다.>(28쪽)
<김 주석이 선물한 평양 근교 산 속에 있는 집은 내가 없을 때는 비어 있고 내가 살 때에는 나의 만들어진 식구들이 모인다. 그 식구 속에 집을 관리하는 스무 살 난 고운 처녀가 있다. 내 일을 이것저것 돌봐주는 안내도 있다. 그때 나이 스무 살 총각이던 접대원도 서른이 되었다.>(36~37쪽)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수자씨는 방북 시 주로 주거지 인근 룡학산에 있는 사찰 덕수암을 찾아가 소일을 하고 평양 문수동에 있는 평양친선병원에서 건강진단과 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최근에 김정일을 조문하기 위해 방북했을 때도 이수자·윤정 모녀는 장례식, 추도대회, 해외동포 대상 위로연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해 헤드 테이블에 앉는 등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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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3일 경남 통영에서 보수단체 회원과 통영시민 등 300여 명이 통영의 딸 신숙자씨 모녀를 북한으로 보낸 ‘윤이상’을 통영에서 추방하자는 집회를 갖고 있다. |
아들 우경씨는 L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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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자씨의 자서전 《나의 독백》에 실린 평양 교외 주택. 사진 속 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이수자씨다. 김일성이 윤이상 부부에게 내준 이 집은 평양 중심지에서 자동차로 25분 거리에 있으며, 잔디가 깔린 넓은 뜰에 온갖 꽃과 나무가 심어져 있다. |
윤정씨가 미국에 갈 때 간혹 들르는 곳이 LA라고 한다.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 윤우경씨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
윤우경씨는 1984년 5월에 평양 무용수 김선옥씨와 결혼했다. 평양에 체류하며 윤이상 음악연구소 등에서 일하던 우경씨는 결혼 후 독일로 돌아갔다. 아내가 독일 국적을 취득한 후인 1993년 7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미국 LA로 이주했다.
김선옥씨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부동산 중개 면허를 취득해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다가 지금은 그만둔 상태라고 한다. 남편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 하던 컴퓨터 수리점이 잘 되지 않자 부인이 생활 전선에 나섰던 것이다. LA 거주 교포들에 따르면 우경씨는 우리 교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오길남씨는 윤우경씨가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오씨는 “독일어로 된 우경이 결혼식 문건을 내가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다”면서 “윤이상·이수자 부부는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우경이가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을 적극 막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윤이상씨 부부가 마약에 중독돼 있던 우경이를 치료 목적으로 북한에 보냈던 것 같다”면서 “치료를 위해 우경이를 가죽으로 묶어놓고 두들겨 팼다는 소리를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함께 있던 지도원들한테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윤우경씨가 북한 여성과 결혼 후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윤이상씨와 막역한 사이였던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 덕분이었다고 한다. 김일성과도 절친했던 루이제 린저가 김일성에게 “윤이상씨의 아들을 독일로 다시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게 오길남씨의 증언이다.
윤이상씨의 인세 외에도 뉴욕 아파트 임대로 수입을 올렸던 윤정씨는 통전부가 운영하는 평양상점 운영 참여를 통해서도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사업차 수시로 북한을 드나드는 교포 사업가들에 따르면 윤정씨는 2004년경부터 통전부 산하 ‘조선 56무역총회사’와 공동으로 류경호텔 인근에 여성용 고급 양품점인 평양상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상점은 통전부 소속 지배인과 관리인이 영업을 담당하고 있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을 조선56총무역회사와 윤정씨가 일정 비율로 나눈다는 것이다. 평양상점은 한국 동대문시장 및 중국 등지에서 여성 의류 및 액세서리를 구입해 외화를 보유하고 있는 당 고위간부, 무역일꾼, 재일교포 재북(在北) 가족 등을 고객으로 월 약 5000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윤정씨의 몫은 연간 3만 달러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UN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2009년 개인 소득은 평균 499달러다. 평양상점 운영 참여로 윤정씨는 북한 1인당 평균 소득의 60배에 달하는 소득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윤이상·이수자씨 부부의 親北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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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자씨가 1999년 7월 8일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방문록에 남긴 친필 글. 2003년 북한 문학예술출판사가 펴낸 《금수산기념궁전방문록실화집(2)-영원한 추억》에 수록돼 있다. |
윤이상씨는 독일에 유학 중이던 1963년부터 78세로 세상을 떠난 1995년 11월까지 21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부인 이수자씨를 대동한 방북도 많았다. 1967년 6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서울로 압송,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69년 3월에 석방돼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그는 1971년에 독일로 귀화했다.
1992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윤이상은 1963년 아내와 함께 입북, 간첩 교육을 받고 독일로 귀환, 월북한 친구 최상한의 장남 최성길을 독일로 유인해 북한 공작원에게 인계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문화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윤이상씨 측은 국가안전기획부의 이런 발표를 부인했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다음은 윤이상·이수자 부부가 책자나 연설을 통해서 행한 북한 관련 주요 발언 모음이다.
<북쪽이야말로 자주권과 민족의 영도자가 있다.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겨서야 민족의 따뜻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1992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75회 생일축하 음악회’에서 행한 윤이상의 연설 중에서)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영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1994년 7월 9일 파리에서 윤이상·이수자 부부)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 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영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만사의 원리라고 하지만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연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1995년 7월 8일 이수자)
<아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나라 다스림을 보고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영전에 큰절을 올립니다.>(1999년 7월 8일 이수자)
그렇다면 북한은 윤이상씨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1987년 김일성은 윤이상씨가 자신의 75회 생일을 맞아 반미(反美)·통일 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작곡한 데 대해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자 재간둥이”라고 극찬했다. 2000년 조선로동당 출판사가 펴낸 《김일성 교시집》에는 “윤이상은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 올렸고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애국지사”라고 기록돼 있다. 김정일은 윤이상씨가 사망하자 자신 명의로 조화를 보냈고 평양에서 국가적 추모회도 열었다.
북한의 윤이상씨 가족에 대한 배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수자·윤정 모녀는 다른 친북 인사들과 달리 입국비자를 신청할 때 독일 주재 북한공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통전부에 연락해 베이징, 선양 등에 있는 중국 주재 북한공관에서 입국비자를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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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시 용남면에 있는 윤정씨의 별장. |
문화관광부가 ‘윤이상평화재단’이 윤이상씨의 자택을 구입해 개보수(改補修)를 하는 데 지원을 해준 형국이다. ‘윤이상 하우스’로 명명된 윤이상 기념관은 현재 대지 300평에 건평 1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완성돼 있다.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는 “베를린 윤이상 하우스는 완공된 상태”라면서 “다만 개관 기념식 등은 내부사정 등의 이유로 아직 예정돼 있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2005년 2월에 출범한 ‘윤이상평화재단’ 대표 발기인에는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손학규(孫鶴圭) 전 민주당 대표 등의 이름도 들어가 있다. 현재 이사장은 신계륜(申溪輪) 전 의원이고 최근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이 된 정태근(鄭泰根) 의원도 이사로 등재돼 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윤이상씨의 베를린 자택을 2008년 5월 30일 40만 유로(약 6억원)에 구입했다. 이 집은 윤이상씨가 독일로 귀화한 1971년에 구입한 후 사망할 때까지 25년 동안 거주한 곳이다. 윤이상씨는 유럽 진출 후 작곡한 150여 곡 중 130여 곡을 이곳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집 매입 시기가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복역한 후 1969년 3월 독일로 돌아간 시점에서 얼마 안 되고, 경력상 별다른 수입이 없었다는 점에서 자금 출처에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독일 교민들에 따르면 이수자씨는 남편 사망 후 남편의 명예회복을 한다며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다가 차츰 윤이상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떨어지자 우울해했다고 한다. 간호사 출신 교민들을 자택에 거주케 하는 등 우울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자 1년 중 상당 기간을 평양에서 소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수자씨가 평양 체류 등으로 집을 비우면 독일인 제자가 별채에 거주하면서 관리를 했다고 한다.
정부의 지원금 8억원 중 2억5000만원은 주택 매입에 나머지 5억5000만원은 리모델링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지원금 중 일부가 북한에 있는 윤이상음악단 운영비로 지출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윤이상평화재단이 제출한 사용 내역을 검토 중인데 서류상 지원금을 전용한 흔적은 없다”면서 “현재 매매계약서 등 윤이상평화재단에서 제출한 자료 등을 통해 적절하게 지원금 집행이 됐는지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윤이상 하우스에 가족 거주는 적절치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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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3일 이수자씨가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접견한 자리에서 큰절을 하고 있다. |
“윤이상 기념관 건립 국고 지원 경위를 조사하고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 국정원 국내 담당 차장 김은성(金銀星)씨는 자신이 국정원 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01년 초였는데 당시 광복회 회장은 윤광빈씨였다. 하루는 윤 회장이 꼭 만나자고 했다. 윤 회장은 김 전 차장에게 “1920년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대첩이 80년이나 흘렀는데도 기념비가 없으니 건립비용을 조성할 방법이 없겠느냐”며 도움을 요청했다.
정부에서 책정한 예산은 건립비를 세우기에는 너무 적었다. 다행히 한 기업이 수억원에 달하는 건립비용을 지원해 2001년 8월 31일 중국 지린성 화룡면 청산촌 청산리 전투 현장 입구에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청산리 대첩이 있고 81년 만의 일이다.
그 일화를 소개하면서 김 전 차장은 “청산리 대첩비 건립에는 81년이나 걸렸는데도 윤이상 개인 기념관을 짓는 데는 그의 사후 불과 12년 만에 8억원이라는 나랏돈을 지원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 하나는 사저를 매각한 후에도 윤이상씨 가족은 독일 체류 시 거주 등 ‘윤이상 하우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윤이상씨 가족이 독일에 갔을 때 ‘윤이상 하우스’에 거주하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정부는 윤이상평화재단에 공익 목적으로 지원금을 준 것이기 때문에 가족이 그곳에 거주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지원금을 환수할 생각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아직 사업 목적과 관련해서 지원금이 적절하게 집행됐는지를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는 “윤이상 하우스에 상주하는 거주자는 없고 국제윤이상협회 회원들이 들러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거주 교민들의 주장은 다르다. 윤정씨가 독일에 오면 윤이상 하우스 내에 따로 마련된 별채에 묵는다는 것이다. 2010년에만 해도 윤정씨는 3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독일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이상평화재단과 윤이상씨 가족의 주택 매매계약 체결 당시 우리의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해당하는 독일 ‘그라운드 북’에는 이수자씨와 윤정씨가 윤이상 하우스 개관 후에도 그곳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명시돼 있다고 한다.
그라운드 북에는 또 윤정씨가 원할 경우 음악회 등 윤이상씨 관련 행사를 그곳에서 할 수 있도록 기재돼 있다고 한다. 사저 매각 후에도 윤이상씨 가족은 윤이상 하우스를 이전처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윤이상씨는 그의 사후 남아 있는 가족에게 남과 북을 통틀어 가장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유산으로 물려준 셈이다.
법무부장관은 출입국관리법 제11조에 따라 사회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사람, 일제 전범과 같은 외국인에 대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 구체적인 입국금지 대상은 다음과 같다.
▲전염병환자ㆍ마약류중독자 기타 공중위생상 위해를 미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 ▲총포ㆍ도검ㆍ화약류 등 단속법에서 정하는 총포ㆍ도검ㆍ화약류 등을 위법하게 가지고 입국하려는 자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경제질서 또는 사회질서를 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등이다. 이 가운데 이수자씨 모녀가 해당하는 조항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