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미리 보는 2012] 북한 - some accident : 월간조선

한자어 ‘변고(變故)’ 또는 ‘유고(有故)’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평시(平時)보다 사태가 긴박해졌을 때 쓰인다. 할머니, 어머니들이 ‘집에 무슨 변고가 있나?’고 하면, ‘집에 안 좋은 일 생겼나?’라는 물음이다. ‘유고’는 ‘변고’보다 좀 더 포괄적이고 판단 중립적이며 신중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유고’ ‘변고’를 한영(韓英)사전에서 찾아보면 accident, incident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이는 ‘사고(事故)’라는 뜻이다. accident는 가시적인 사고, 예컨대 교통사고 같은 것을 지칭할 때 딱 떨어지는 단어이다. 따라서 ‘accident’는 한자어의 ‘유고’ 또는 ‘변고’가 내포하는 속뜻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필자는 2012년 북한 전망과 관련하여 우리말·한자어·영어를 다 포함하여 짧게 압축하라면 ‘some accident’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말로는 ‘모종(某種)의 사건’ 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유고’를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반론(反論)도 있을 듯싶다. 하지만 2012년 북한 전망과 관련하여 ‘유고’ ‘변고’는 너무 나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필자 개인적으로 ‘유고’라는 단어에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다.

‘有故’와 ‘變故’ 사이

대학 3학년 때 데모와 개강-휴강-종강으로 이어지던 1979년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유고(朴正熙大統領有故)’라는 신문 1면 시커먼 컷 제목의 잔영이 아직 필자의 뇌세포에 남아 있다. 10월 26일 저녁 김재규(金載圭) 중앙정보부장은 박 대통령을 암살했는데, 사건 초기에는 언론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신문의 ‘유고’라는 표현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어떤 사고로 인해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를 포괄적으로 의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필자가 글자를 깨치기 이전부터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성인(成人)이 된 대학 3학년 때 ‘박 대통령 유고’라는 제목으로부터 받은 첫 느낌은 불안감과 해방감이 이질적으로 혼재된 충격적인 감정이었다. 따라서 필자와 비슷한 세대에게 ‘유고’는 일반적인 추상명사가 아니라 충격적이고 물질적인 명사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2012년에 김정일(金正日)이 갑자기 사망하고 중동(中東)·북(北)아프리카 사태와 같은 대규모 사건이 북한에 발생하지 않는 한 ‘유고’ ‘변고’를 사용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change)’는 평이한 표현이다. 또 ‘변화’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까지 연상케 할 경우, 그것은 좀 과장일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궁여지책이지만 ‘some accident’를 키워드로 선택했다.

‘some accident’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잘 모르지만, 크든 작든 2012년 북한에 무슨 일이 있긴 있을 거야’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예컨대 용천 폭발사고라든가, 자강도나 평성 군수공장 폭발사고, 서해 5도에 대한 신종 도발, 핵·미사일 실험 같은 사건적 의미뿐 아니라, 군(軍) 내부 또는 김정일·김정은(金正恩) 정권 내부에서 발생하여 중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로 추동(推動)할 수 있는 ‘모종의 정치적 사건’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나이 어린 김정은이 ‘우리도 개혁개방 못할 게 있냐?’며 아버지의 판단영역을 ‘침범’하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상학의 ‘나비 효과’처럼 그런 ‘모종의 사건’이 나비의 날개짓에 그칠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태풍으로 이어질지, 누구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 북한 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

통제적 무계획 시장경제

최근 몇 년간 북한 사회도 꽤 변했다. 북한 주민들은 평양을 제외하면 거의 시장경제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이 ‘북한식 시장경제’가 도대체 앞날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이다. 중국·베트남은 국가가 계획적으로 시장을 받아들이고 계획적으로 관리해 온 편이다.

북한은 계획적으로 시장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시장경제의 안정적 발전을 목표로 계획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북한의 경제는 일면 통제-일면 방기(放棄) 형태의 ‘무(無)계획 시장경제’로 그냥 굴러가고 있다. 다시 말해, 1990년대부터의 ‘통제적 사회주의 무계획 경제’에서 지금은 ‘통제적 무계획 시장경제’ 쪽으로 중심추가 이동해 있다. 2009년 12월의 화폐개혁 실패로 요즘은 무계획 시장경제가 더 탄력(?)을 받은 듯하다.

김정일 정권이 시장을 일면 방임하는 이유는 주요 간부들과 돈 가진 자(돈주)들에게 중소 규모의 외화벌이 이권을 주고 상납받는 통치자금과 시장에서 주민들의 세금을 받아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중국에 광산물을 판매하는 등의 대규모 이권(利權)은 당연히 김정일 패밀리의 몫일 것이다.

근년 들어 평양에 자동차와 물자가 전에 비해 늘어난 현상도 2012년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의 지원을 받아 낸 측면이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돈 가진 자(돈주)들의 경제활동이 좀 더 활발해진 탓이 큰 것 같다. 돈주들은 2009년 화폐개혁 때도 달러·위안화를 ‘결사옹위’하여 거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

이들 돈주에는 간부 가족들도 있고,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시장에서 성장한 신흥부자(경제계급)들도 있다. 또 군 간부 중에서는 김정일·김정은의 측근 또는 그의 가족들이 일부 있을 것이다. 이들이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김정일 패밀리에게 통치자금을 상납하는 한편, 이권을 더 챙겨서 경제활동 영역을 계속 넓히려 할 것임은 당연하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이들 당·군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면에서 이미 갈등이 내연(內燃)하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최근 방한한 러시아의 정부 연구소인 국제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미헤예프 부소장은 “북한이 시장화하는 과정에서 김정은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구(舊)소련 체제전환의 전후(前後) 상황과 그 과정을 고려해볼 때 아마도 북한은 김정은의 정치력 미숙과 간부들의 갈등이 붕괴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포착한 것 같다.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이권을 챙기기 쉬운 조건인 당 엘리트들과 그렇지 못한 군 엘리트 사이에 시장화에 따른 특권 분배에 왜곡이 심화될 경우, 특히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 과정에서 ‘열 받는’ 군인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남은 것은 공안 분야뿐

더욱이 화폐개혁 후 북한의 서민층 시장물가는 계속 살인적이다. 쌀 1kg값이 2010년 12월 기준 3000~4000원이다. 노동자 월급이 평균 3000원인데-물론 화폐개혁 얼마 후부터 월급은 무의미해졌다-쌀 1kg이 3000원이다. 한달 월급을 털었는데 쌀 1kg 사고 남는 게 없다면, 국가의 사회관리 능력 중에서 남은 것은 공안 분야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시장에서 무엇이든 팔아야 생존한다. 장사 밑천이 없는 여성들은 푼돈에 몸을 팔 수밖에 없는데-이는 도덕적 비난의 영역을 이미 떠난 문제이다. 체제전환 후 구(舊)소련·동유럽의 대졸(大卒) 여성들도 그렇게 생존했다-그런 시장은 또 사회주의적으로 통제된다.

그렇다면,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북한 밖으로 나가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데, 군과 공안 분야부터 권력을 이양받고 있는 김정은은 김정일로부터 후계자로서 ‘관리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탈북자(脫北者)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 탈북 비용이 한국돈 1000만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래서 소집단을 이룬 해상 탈출이 다소 늘고 있는데, 북한은 또 해상 탈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사일 훈련을 하는 등 서해에 군사긴장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현재 동북아시아를 통틀어 북한주민들만큼 이른바 ‘생존 자체가 모순과 질곡(桎梏)’인 계층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2012년 북한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키워드가 ‘some accident’이다. 그 ‘모종의 사건’이 과연 무엇이 될 것이며 또 어떻게 표출하게 될까?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정보로는 ‘some accident’ 이상의 얘기를 하기 어렵다는 것도 이 말을 키워드로 선택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