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시절부터 스물네 살까지 여자들이 평생 바라는 것들, 사랑·보석·상류생활·연예계 경험까지 두루 해봤다”
⊙ 14건의 국내 대형 무기사업 로비스트로 나서 成功…무기계약 실패율 ‘제로’
⊙ 이탈리아 M-346이 T-50을 이긴 비결은…로비스트를 제대로 기용했기 때문
⊙ 보잉社, 1999년 F-15 생산라인이 폐쇄될 운명에 처하자 한국 측에 생산라인과 기술이전을 위한
기술자 파견까지 약속
⊙ 李養鎬 전 국방장관의 순수함에 놀라…琴震鎬 전 상공장관의 紳士다움에 감명받아
⊙ 무기상 카쇼기 밑에서 무기 중개 배워…朴鐘圭 전 경호실장을 카쇼기에게 연결
⊙ 14건의 국내 대형 무기사업 로비스트로 나서 成功…무기계약 실패율 ‘제로’
⊙ 이탈리아 M-346이 T-50을 이긴 비결은…로비스트를 제대로 기용했기 때문
⊙ 보잉社, 1999년 F-15 생산라인이 폐쇄될 운명에 처하자 한국 측에 생산라인과 기술이전을 위한
기술자 파견까지 약속
⊙ 李養鎬 전 국방장관의 순수함에 놀라…琴震鎬 전 상공장관의 紳士다움에 감명받아
⊙ 무기상 카쇼기 밑에서 무기 중개 배워…朴鐘圭 전 경호실장을 카쇼기에게 연결
휴대전화가 연방 울린다. 연분홍 매니큐어 곱게 바른 손으로 전화기를 잡고 속삭인다. 햇살에 영롱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귀걸이는 로비스트 여왕(女王)의 오브제(objet)다.
몽블랑 볼펜이 꽂혀 있는 테이블 위 루이뷔통 다이어리에는 수많은 사람의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다. 전성기 때 찍은 파티복 차림의 사진 두 장이 액자에 담겨 그의 화려했던 시절을 전한다.
“나, 린다 김인데요….” 허스키한 목소리의 그가 느릿한 말투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는 올해 한국 나이로 쉰여덟이다. 내일모레면 환갑인 나이에도 그의 피부는 팽팽했고, 잡티 하나 눈에 띄질 않았다. “여전히 피부가 곱다”고 기자가 말하자, “이젠 할머니인데…곱긴…”이라며 눈을 흘겼다.
린다 김, 본명은 김귀옥(金貴玉). 국방장관에게 “사랑한다”는 연서(戀書)를 받은 여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대한민국을 ‘부적절하게’ 뒤흔들어 놓은 미모(美貌)의 무기 로비스트다.
지난 4월 2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건넨 명함을 보니 그는 미국에 본사를 둔 컨설팅사 ‘엠앤에스파트너스’의 회장이다. 167cm의 키에 군살 없는 그는 예상 외로 “몸무게가 5kg이나 불어 다이어트 중”이라고 했다. 살이 붙은 건 2000년 ‘린다 김 스캔들’ 이후 찾아온 우울증 때문이다. “10년간 항우울제 세 알씩을 장복(長服)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현재 싱글이다. 두 딸은 보스턴대로 진학시켰다. 큰딸 지선(30)씨는 보석디자이너, 둘째딸 지영(28)씨는 로스쿨에서 형사법을 공부하고 있다. 린다 김을 빼닮았다는 지선씨는 2001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남가주(南加州)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미스 한국일보’로 뽑혔다.
무기계약 실패율 ‘제로’, 전(全) 세계에서 열리는 에어쇼에 가면 그의 지정석(指定席)이 있고, 원하기만 하면 최신형 항공기에 탈 수 있다는 그는 몸값이 가장 비싼 로비스트 중 하나다. 그는 사무실 벽면을 온통 T-50 고등훈련기 사진으로 장식했다. “혹시 T-50 로비스트로 나섰느냐”고 묻자 “한국이 처음 만든 초(超)음속 훈련기인데다, 해외 수출시장에서 가능성이 많아 보여 애착이 간다”고 했다.
로비스트가 브로커라고?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9월, “무기구매 리베이트만 안 받아도 국방예산 20% 감축이 가능하다”고 했다. 김태영(金泰榮) 국방장관은 지난해 12월 31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무기중개상 개입을 막기 위해 앞으로 무기 도입은 정부 대 정부 거래인 FMS(Foreign Military Sale) 방식으로 가겠다”고 했다.
린다 김은 무기 로비스트를 정부가 ‘브로커’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거꾸로 가는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무기중개상은 과연 대통령이나 장관의 말대로 사회악(社會惡)인가요?
“도대체 ‘20% 리베이트’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온 건지 아무리 짜봐도 모르겠네요. 정부 차원의 대규모 무기도입 사업에 손을 대는 로비스트들은 한국에서는 멸종됐다고 봐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 명씩 죽이는데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요즘 말하는 무기중개상이나 로비스트라고 부르는 건 고작 부품(part)을 파는 에이전트입니다. 그들은 자기 돈 들여 해외출장 다니고, 접대하다 계약이 불발되면 망하는 겁니다.”
‘로비스트’는 무기회사와 대등하게 계약을 맺고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이고, ‘에이전트’는 협상이 시작된 후 회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공식적인 심부름꾼이다.
“에이전트가 끼지 않는 무기거래는 없습니다. 갖고 있는 정보와 협상력이 달라요. 에이전트들은 무기업체와 수시로 접촉하면서 ‘경쟁사가 이윤을 얼마나 붙이는가’ ‘경쟁사가 첨단기술을 무기체계에 얼마나 넣고 빼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미국 무기업체들은 거의 정확한 정보를 에이전트들에게 주죠. 그러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바로 보복을 당할 테니까요.”
무기중개는 ‘꾼들의 세계’
―정부의 말대로 에이전트 없이 FMS 방식으로 무기도입을 하면 안 됩니까.
“FMS 방식으로 무기를 도입하면 커미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국 정부가 전투기 몇 대를 미 국방성 산하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을 통해 도입한다고 칩시다. 어차피 한국이 요구하는 무기를 미(美) 국방성에 납품하는 기업은 자기 이윤을 붙일 것이고,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도 마진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붙여 공급할 겁니다.
이 수수료를 6~7% 또는 10%까지 매긴다고 해도 한국 정부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FMS 방식을 통한 거래가 미국 무기업체를 통해 들여오는 ‘상용거래’와 비교해 수수료가 싸다고 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답답한지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며 양해를 구하고 한 대를 피워물었다.
“게다가 정부가 정부 대 정부 거래, 즉 FMS로 무기도입을 한다고 치면, FMS 방식으로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는 현재 미국밖에 없습니다. 결국, 정부가 FMS를 하겠다는 말은 미국 무기만 앞으로 사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략적 차원으로 놓고 보면, 우리가 미국 무기만 도입하겠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고, 그렇게 되면 무기도입 협상력은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겁니다.”
―방위사업청을 비롯한 무기 구매 담당 공무원들이 전문성을 쌓아 협상에 임하면 되잖습니까.
“32년 동안 무기중개상을 했지만, 심지어 FMS 거래도 무기중개인을 끼고 합니다. FMS도 중개상이 역할을 잘하면 수수료가 3%까지 떨어지고, 어정쩡하면 7%까지 올라갑니다.”
그는 “무기중개상은 방대한 정보를 수집·분석해야 하고, 그 세계의 언어로 협상을 해야 하는 ‘꾼들’”이라며 “공무원은 어디까지나 공무원이지 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통이 왜 있나요? 제조업자는 마케팅 능력을, 소비자에게는 물건 평가 능력을 갖도록 하면서 적정 수수료(이익)를 받으면서 제공하는 겁니다. 무기도 마찬가지예요.”
M-346이 T-50을 꺾은 비결
―에이전트들이 정보력과 협상능력을 갖췄다고 해도 무기도입 비리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국의 무기도입 과정은 상당히 복잡해요. 1982년경 조달본부가 생기면서 무기도입에 필요한 단계가 30개 이상 생겼습니다. 비리를 저지르려면 책임자인 장성급에서 실무자인 소령급까지 공모해야 가능합니다. 보는 눈이 30개가 넘는데요.”
그는 “백두·금강처럼 최첨단 무기체계를 도입하는 큰 사업일수록 오히려 로비스트가 필요하다”면서 “정부 대신 누군가 나서 싸워줘야 ‘바가지’를 쓸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고등훈련기 T-50, 자주포 K-9, 흑표 전차 등 이른바 ‘명품’ 무기수출을 시작하면서 로비스트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면서 “무기를 수출할 때 필요한 능력은 IQ나 성실성이 아니라 ‘경험’인데, 무기를 팔아본 경험이 한국정부는 없지만 로비스트들에게는 있다”고 했다.
―한국이 좋은 에이전트를 고용했다면 고등훈련기 T-50의 UAE 수출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뜻인가요.
“T-50이 경쟁기종인 이탈리아 M-346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나요? 우리 것이 성능이 좋은데 왜 떨어졌을까요? 이탈리아는 제대로 로비스트를 기용했습니다. UAE의 고등훈련기 도입결정권을 쥔 무함마드 왕자와 영국 왕립공군대학 동기인 헨리 매커리를 내세웠어요. 한국이 당해낼 재간이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로비스트를 합법화하면 어떨까요.
“한국도 로비스트 합법화 법안을 국회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나, 율사(律士) 출신 국회의원들이 ‘밥그릇’을 걱정하는 통에 무산됐습니다.”
한국에서 비즈니스 성공 비결은 情
그는 백두(신호정보수집 정찰기), 금강(영상정보수집 정찰기), 동부전선 전자전장비, 하피(레이더 공격용 순항미사일), 포파이(공대지 미사일), 한국형 경량헬기(KLH·BO-105) 등 국내에서 14건의 무기중개를 성사시켰다.
사업비 규모를 보면 린다 김이 상당한 수익을 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사업 2400억원, 금강사업 3600억원,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사업 500억원, 하피사업 600억원, 포파이사업 2000억원 등 알려진 것만 계산해도 9100억원이다. 평균 커미션을 10%씩만 잡아도 900억원이다. 여기에 해외에서 올린 대형 프로젝트까지 더하면 그가 받은 커미션은 천문학적 금액일 것이다.
―여성으로서 무기 로비스트를 하는 데 유리한 점이 있습니까.
“여성들은 섬세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남성들은 늘 샴페인을 일찍 터트려 막판에 일을 망칩니다. 1%의 변수로 승패(勝敗)가 갈리는 게 무기중개업이니까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수험생처럼 스터디를 합니다. 시작 단계부터 ‘난 졌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요. 그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돼요. 무기중개업은 정말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은 일이에요.”
―한국에서 비즈니스해 성공하는 비결이 있다면.
“특별할 게 있나요(웃음). 직관(直觀)을 중시하는 태도, 재빠른 감정포착, 치고 빠질 줄 아는 능수능란한 화술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情)입니다.
출국 비행기에서 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인사 챙길 분들 리스트를 작성하는 거죠. 1순위로 지난 정권의 실세(實勢)였다가 외로운 처지가 된 분들이고요. 맨 마지막으로 정권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고요. 50%는 비즈니스적 고려, 나머지는 소중한 분들을 위한 인사죠. 그렇게 하는 게 비즈니스하는 처세로서 옳고, 또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번의 後悔
린다 김은 올해로 로비스트 인생 32년째를 맞고 있다. 그는 “딱 한 번 로비스트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양호(李養鎬) 전 국방장관과의 스캔들로 회자(膾炙)되는 백두·금강 사업 때문이다. 백두사업은 노태우 정부 후반인 1991년 6월부터 추진한 통신감청용 정찰기(백두 정찰기) 도입사업으로,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국방부가 2439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사업자를 선정했다. ‘백두’라는 명칭은 휴전선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북한 전역의 통신정보를 정찰기로 감청한다는 의미다.
일명 ‘린다 김 스캔들’은 백두사업 등 방위력 증강사업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그가 고위 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넸는지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은 그가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 주고받은 연서들이 공개되면서, 고위인사들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느냐에 집중됐다.
이 전 장관과 그와의 스캔들 의혹은 이 전 장관이 한 신문을 통해 “두 차례나 관계를 가졌다”고 시인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린다 김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한마디로 자신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린다 김은 1995~97년 공군 중령 등으로부터 2급 군사기밀을 빼내고, 백두사업 총괄팀장에게 1000만원을 준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2000년 10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린다 김은 “이양호 전 장관은 백두사업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분인데…”라며 “가장 안된 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양호 장관이 이 사업에 뛰어들 때 내게 한 말이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업만큼은 커미션을 생각하지 말고 국가관을 갖고 임해 달라고. 난 정말 그랬어요.” 그는 ‘국가관’이란 말에 힘주어 말했다.
린다 김은 이양호 장관과 합심해 몇천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장관의 간곡한 요청에 그는 미국 감청장비 제조업체인 E시스템사(社) 소속이었지만, 업체의 정보를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한국 정부와 협상건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한국 쪽으로 마음이 쏠려요. 제가 회사 중역회의에 참석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흘려주면 협상에 큰 도움이 되지요.” 계속해서 그의 말이다.
“지금 와서 얘기하면 다 변명이지요, 뭐. 당시 백두사업 경합업체만 12군데였어요. 막말로 12군데 모두 국방부에 ‘끈’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때까지 계속하던 콧대 높은 팰콘사(Falcon社)를 밀어냈는데…. 사흘간 미친 듯이 나를 찾아 하루에 1000만 달러(120억원)씩 성공보수를 올려가며 로비스트로 채용하려 했죠. 신용을 택할까, 돈을 챙길까 괴로웠죠. 그러니 내 스스로 사방에 적(敵)을 만든 셈이지.”
“우린 솔메이트”
린다 김은 ‘사랑하는 린다’로 시작하는 국방장관의 쪽지, 이어지는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놨다.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이 한창이던 1996년 3월, 이양호 장관은 황명수(黃明秀) 국회 국방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식사자리에 나갔다가 린다 김을 소개받았다.
그 자리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자 실세로 통하던 김윤도(金允燾) 변호사도 있었다고 한다. 황명수 의원은 금진호(琴震鎬) 전 의원을 통해 린다 김을 알게 됐다.
그는 벌떼처럼 달려드는 언론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절망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완성되지 않은 백두정찰기를 보고 “고철(古鐵)을 들여왔다”고 해 로비스트로서의 자존심을 꺾었다고 했다. 백두정찰기는 2001년부터 실전투입됐고, 2002년 6월 제2 연평해전에서 평가를 받았다.
백두사업으로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이양호 전 장관의 언론 노출이다.
“지금도 폐가 될까 연락을 안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 전 장관을) 참 좋아해요. 한국 최고의 비행기록을 가진 파일럿 출신 장관인데…. 공군 출신 장관이라 (국방부 내) 견제가 워낙 심했어요.” 그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목소리도 좀 떨렸다.
그는 “내 두 딸의 이름을 걸고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다”며 “이것만은 확실하다. 기독교 신자인 장관이 날 전도하려고 늘 기도를 해 줬고, 나는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우린 부적절한 관계라기보다 더 친한 솔메이트(soul mate)였다”고 했다.
―기무사령부가 둘의 관계를 추적할 때 이 장관이 부적절한 관계를 털어놓았잖습니까.
“제가 그분과 자려고 맘먹었다면 왜 두 번만 잤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대부분의 남자는 관계 후엔 관심이 없어지지 않나요? 직업상 수많은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 어느 특정인과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어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이양호 장관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요?
“그 신문과 인터뷰한 직후 내게 ‘미안하다’며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건 참, 도대체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 신문이 ‘그것(성관계)만 인정하면 언론이 잠잠해질 것이다.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말을 믿고 두 번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답니다. 집에 가 생각하니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내게 ‘내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진실을 밝혀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당당했던 琴震鎬 전 장관
―이양호 장관의 편지를 보면 연애감정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사랑하는 린다’로 시작해 ‘당신을 사랑하는 L’로 끝납니다.(린다 김도 이양호 장관에게 ‘경솔했던 제 행동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과 신앙심으로 우러나는 약간의 죄의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직한 감정의 표현이란 결코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복잡한 모순에 싸여 조금은 심란함을 느낍니다’라고 답장을 썼다.)
“연서로 보면 연서지만, 달리 보면 일을 추진하는 암호(暗號)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흐려서 마음이 흐리다’라고 하면 뭔가 일이 안 되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아마 제가 그때 왜 이런 편지를 보내느냐고 타박했다면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황혼(黃昏)이 질 무렵, 물든 가슴을 파고드는 애틋한 감정이었어요. 젊은이들보다 더 순수한 감정이었는지 몰라요. 흔히 말하는 불륜(不倫)과는 달랐어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순수함을 가진 건 평생을 군인(軍人)으로 살아왔기 때문인가 봅니다.”
―편지 내용에 ‘경솔했던 제 행동’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사기 딱인데요.
“사실 이분이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딱 잘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비즈니스는 어떻게 됩니까. 하지만 이씨의 편지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어요. 너무 순수한 감정으로 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빙빙 돌려쓰다 보니 그런 표현이 나온 겁니다. 이양호씨는 업무가 끝난 후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오곤 했습니다. 식사도 같이 했고요. 아마 수십 번은 드나들었을 겁니다. 관계를 가졌다면 두 번만 했겠습니까.”
―정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나요?
“없어요. 식사할 때 새우를 까드린 적은 있지만….”
―금진호 장관도 편지를 주고받은 명단에 올랐는데,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그분은 저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왔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그분은 편지에서 ‘때로 남자보다 여자와의 우정이 더 강하다’고까지 말했어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사귀면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금 장관에게 ‘린다 김을 사랑하십니까?’ 하니까, ‘Why not? I love her, she is a very nice lady more than you think’라고 하는 걸 보고 정말 신사(紳士)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만나 점심을 먹곤 하죠.
금 장관은 외교부장관을 하고 싶어 했어요. 동서인 노 대통령이 그걸 막은 거야. ‘내 살아온 인생이 허전하다’는 편지를 자꾸 보내요. 믿었던 YS는 도움이 안 되니까 배신감을 느꼈죠. 그래서 샌타바버라에서 며칠 묵다 가시라고 했고, 롤스로이스를 보내드렸고, 아침식사도 같이했죠. 그것을 편지에 쓴 것을 갖고….”
YS, “네가 웬만한 남자보다 낫다”
린다 김은 김현철(金賢哲)씨와는 악연이다. 어느 날 그가 이스라엘 출장을 위해 김포공항에 갔는데,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사유를 알아보니 안기부 지시였다. 직감적으로 김현철씨가 개입했다고 판단한 그는 곧바로 김윤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권영해(權寧海) 안기부장이 김현철에게 엉뚱한 보고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김현철이 린다 김과 함께 백두·금강사업에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 전혀 사실이 아니죠. 김현철씨는 그 이야길 듣고 화가 났을 것이고요. 세 사람이 하얏트 호텔 일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먹으며 따졌죠.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김기섭(金己燮) 안기부 운영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군요. ‘아니, 누가 린다 김을 출국금지시키라고 했어. 소문이 있으니까, 한번 알아보라고 한 거지. 그것 좀 빨리 풀어주시오.’ 그는 ‘안기부에서 오버한 것 같다,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5분 만에 출국금지가 풀려 공항으로 가는데, 경찰 사이드카까지 붙여줘요. 공항에 지시해 비행기 10분 대기시켜 놓고….”
―백두사업 선정 과정에서 기무사가 뒷조사하는 것을 알았습니까.
“그럼요. 임재문(林載文) 기무사령관을 보고 눈치로 때려잡았지요. 우린 인맥으로 로비합니다. 하루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인맥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뇌물이나 쓰는 건 어설픈 에이전트나 하는 짓이에요.”
린다 김은 김영삼 대통령과 박철언(朴哲彦) 장관과의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노태우 정부 시절, 박 장관이 대권(大權)에 도전하려고 YS와 경합했을 때의 일이다.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박 장관 편을 들고, 노 대통령과 금진호 장관은 YS편을 들었어요. YS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금 장관을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었어요. 금 장관은 나중에 뒤통수를 맞았지요. 박철언 장관이 YS 때문에 스페인 외유(外遊)에 나섰을 때, 내가 도와준 적이 있어요.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그분이 ‘가시나, 모하노? 이 기분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더럽다’고 전화를 했기에, 사장에게 시켜 샌타바버라에 3주 정도 묵게 해 드렸어요. 그걸 YS가 알았어요. 난 미운털이 박힌 거죠. 이제 장사 다 해먹었구나 싶었죠. 그때 김윤도 변호사(2000년 사망)가 오해를 풀어줬어요.”
린다 김은 YS를 재임 중 몇 차례 만났다고 말했다. 장소는 서울 논현동 김윤도 변호사의 집이다.
“한번은 김 변호사가 내게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요. YS가 저녁을 드시러 온다는 거야. 한정식집 사장에게 음식을 준비하게 하고 그 음식점 여종업원들을 서빙하게 했어요. 그날 김 변호사 집 주변은 경호원들로 깔렸고, 골목골목을 전부 차단했죠. 나도 그쪽에서 보내준 차를 이용해 집안으로 들어갔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밸런타인 30년산을 반 병 정도 마시면서 말이 많아지셨어요. 당시 김 변호사 부인이 아이들 때문에 하와이에 계셨어요. 혼자 지내는 김 변호사를 YS가 찾아갔던 거지요. YS가 취임 후 안가(安家)를 모두 없앴잖아요.
말하자면 김 변호사 집이 안가 구실을 한 거지. 박철언 장관 외유 때 편의를 제공했던 일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네가 웬만한 남자들보다 낫다’고 하세요. 그래서 풀린 거죠.”
韓仁玉 여사의 의상코디네이터 역할도
1996년 10월 이양호 장관이 구속되자, 그가 무기도입 사업을 둘러싼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린다 김은 그 무렵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 선정 경쟁을 할 당시, 영향력을 행사한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군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A씨는 프랑스제, 국방장관을 역임한 B씨는 독일제를 각각 후원했다. 이양호 국장장관은 린다 김이 로비스트로 나선 이스라엘 장비를 선호했다.
그 때문인지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는 처음엔 이스라엘 장비로 결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양호 장관이 구속되자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재선정을 위한 심사과정에 이스라엘 장비는 아예 후보에서 제외됐다.
그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자전 장비 사업에서 빠지고 프랑스제로 채워졌다”며 “‘국제거래에서 이런 예의가 어디 있느냐’며 하이힐을 신고 계룡대에 가서 최모 장군과 대판 싸웠다. 누가 보면 술값 받으러 온 마담이 행패를 부리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정치권에서는 린다 김이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후보에게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부인 한인옥(韓仁玉)씨에게 옷을 선물했다고도 한다. 린다 김은 “이회창씨보다 한인옥 여사와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정계에 있는 분들이 연결을 해 줬어요. 한 여사가 집에서 한복만 입던 분이잖아요. 대선후보 부인이 되니까 외부행사를 해야 하는데, 내 옷 입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한 여사 의상 코디를 도와줬어요. 그걸 안기부와 기무사에서 부풀려 소문을 낸 겁니다.”
―정치자금을 건네진 않았나요?
“그런 이야기는 노코멘트죠.(웃음)”
―이회창씨가 당선됐다면 로비스트로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겠군요?
“물론이죠. 대선 개표날 자다 전화를 받았는데, ‘DJ가 됐다’는 거예요. 순간 머리가 띵하더라고요. 조풍언 생각도 떠오르고요.”
‘FX 사업’에 생산라인까지 떼주겠다던 보잉社
린다 김은 한국정부가 2001년 추진한 차기전투기(F-X) 사업에도 간여했다. F-X사업은 120대의 차기전투기를 도입하려는 사업이었으나, 40대로 축소됐고, 기종은 미국 보잉사의 F-15K로 선정됐다.
린다 김이 F-X사업에 간여할 때는 1998년 10월, 그 무렵 맥도넬더글러스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1997년 8월 보잉사는 군용기 생산업체인 맥도넬더글러스를 합병했다. 그러나 1998년만 해도 이름만 보잉사로 통합했을 뿐 맥도넬더글러스사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F-15 생산공장은 원래 맥도넬더글러스사 소유였다. 그런 까닭에 린다 김은 F-X사업 로비스트 계약을 맥도넬더글러스사와 진행했다고 한다.
“제가 F-X사업에 관심을 가진 건 1996년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이 끝난 직후입니다. 1998년부터 하워드 와이즈번스 마케팅 부회장 등 맥도넬더글러스사 관계자들을 접촉했죠. 12명이 회사에 로비스트 지원서를 넣었어요. 회사는 이력서와 실적을 보고 후보를 순차적으로 압축했는데, 최종적으로 제가 선택된 겁니다. 맥도넬더글러스는 성공률 100%인 나를 F-X사업에 끌어들인 겁니다.”
―무기중개상 조풍언(曺豊彦)씨도 당시 12명에 포함됐습니까.
“물론이죠.”
그는 “F-X사업은 백두·금강 사업처럼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이해해야 하는 복잡한 사업이 아니었다”면서 “F-15, 유로파이터, 라팔, 수호이-35 등 4개 후보기종의 성능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단순하고 편한 사업이었다”고 했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F-X) 기종으로 F-15K가 선정된 데 대해 말이 많습니다. 차세대 전투기로 보기엔 한물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생산라인은 1999년 폐쇄될 운명이었습니다. 정보력이 강한 로비스트들은 이것을 간파했죠. 한국의 F-X사업 덕분에 F-15는 다시 살아난 거죠. 로비스트 계약 얘기가 오갈 때 제가 보잉 측에 ‘솔직히 인건비와 조립비용만 드는 것 아니냐’며 생산라인을 넘길 것을 제안했습니다.”
―보잉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어요. 오죽하면 생산라인에 운반비용까지 부담한다고 했을까요.”
F-15 전투기, 8500만 달러짜리를 1억 달러에 구입
그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F-X사업이 내 손에 들어올 뻔하다 빠져나간 일은 지금도 아쉽다”면서 “누군가 나를 경쟁에서 밀어내기 위해 기무사 수사를 배후조종했다”고 주장했다.
린다 김은 자신의 F-X사업 참여가 1998년 기무사 수사의 한 배경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 10월경, 일요일 저녁 비행기편으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넬더글러스 본사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인 토요일, 한국에 있는 그의 무기중개업체 IMCL 사무실에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쳐 직원들을 체포해 갔다.
“사고가 나자 맥도넬더글러스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걸로 끝났습니다. 나 대신 장성 출신들을 로비스트로 고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일이 다 틀어졌죠. 예정대로라면 세인트루이스에 가서 맥도넬더글러스와 로비스트 계약을 맺었을 겁니다.
제가 손을 떼고 난 후, 보잉은 손익분기점이 훨씬 지나 대당 가격 8500만 달러에 팔던 전투기를 1억 달러에 한국공군에 팔았고, 기술이전도 10% 정도만 하고 말았습니다. 2차 협상에서 추락한 1대분을 더 주었죠. 마치 무르고 상한 귤이 나오면 한두 개 공짜로 생색내면서 더 주는 식이지요.”
전두환 대통령 때 시작한 공군의 차기전투기 사업은 노태우 정부 들어 공군의 희망에 따라 보잉의 F-18을 우선협상대상 기종으로 선정했다가 1990년대 초반 록히드마틴의 F-16으로 바꾸었다. 린다 김은 이때 록히드마틴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F-18을 생산하는 보잉(맥도넬더글러스)이 가격을 2억 달러나 올리는 등 한국을 얕잡아 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한국 정부가 기종(機種)을 바꿨겠습니까? 대처가 옳았다고 봐요. 이때 ‘무서운 여자다’라고 판단한 보잉은 F-X사업에서 F-15의 로비스트로 날 기용하고, 생산라인을 한국에 주려고까지 했던 겁니다.”
盧武鉉 대통령 시절, 자주국방 관련 브리핑
―1999년 기무사 수사와 2000년 구속된 사건이 조풍언씨의 ‘음모’라고 보십니까.
“조풍언의 행적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풍언은 저를 코너로 몰아넣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조풍언이 1998년 백두사업에 대한 기무사 수사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젊은 시절, 조풍언씨 부친이 운영하던 선박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두 집안은 한때 목포에서 아래윗집에 살 정도로 가까웠다.
린다 김은 군검찰 관계자에게 처음으로 조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金弘傑) 전 의원에게 집을 사줬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한다. 조씨는 1973년 ‘기흥물산’이라는 회사를 세워 무기중개업에 손을 댔다. 그는 미국의 레이더업체 ITT사와 거래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조풍언씨는 무기중개상으로서 어느 정도입니까.
“김대중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 그다지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기흥물산은 큰 건은커녕 자질구레한 것들만 맡아왔어요.”
―조풍언씨 뒤에 누가 있다고 보십니까.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아요? 김홍일(金弘一) 의원의 후원을 받았죠.”
린다 김에 따르면, 조씨는 한때 그의 밑에서 에이전트 일을 보며 그의 덕을 톡톡히 봤다. 김씨는 조씨에게 ‘포파이사업’(공대지 미사일)을 연결시켜 주는 등 도움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씨가 정권이 바뀐 뒤 자신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1994년 이스라엘 정부는 내게 7년간 우산계약(umbrella contract) 권한을 주었죠. 일종의 독점을 준 겁니다. 모든 에이전트가 이스라엘 무기 계약을 하려면 나를 통하게 한 겁니다. 그 덕분에 제가 이스라엘 무기들을 많이 팔았던 겁니다.”
김대중 정부 때 구속당한 린다 김은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직후 새로운 기대감으로 재기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 인맥을 동원, 청와대 접촉을 시도했다. 그는 “명예회복 차원”이라고 했다.
그는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의 스캔들 탓에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백두사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매도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 스캔들과 사업을 구분해 평가해 달라고 주문했다.
2003년 봄, 린다 김은 문희상(文喜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 실장 쪽에서 자신에게 자주국방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는 것이다.
“무기사업을 한 사람으로 자주국방 인프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달라고 누군가를 통해 제안해 왔더군요. A4용지 6장 분량의 편지는 인편(人便)으로 전달했어요.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자주국방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썼어요. 중간에서 심부름한 사람의 전언이, 문 실장이 내 편지를 읽고 ‘이게 정답인데…아까운 여자 하나 죽였다’고 말했다고 들었어요.”
무기 로비스트 얘기만 하면 신나
2000년 9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린다 김은 2001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서전 <코코펠리는 쓸쓸하다>를 펴냈다. ‘코코펠리’는 북미(北美) 설화에 나오는 곱사등이 봇짐장수로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객이다. “이 책은 미완(未完)의 책이에요. 뒷부분은 남은 인생 이야기를 채워넣기 위해 비워놓았죠.”
1953년 11월, 린다 김은 경북 청도에서 군인이었던 아버지 김무준(79)과 어머니 정재임(77)의 1남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강원도 영월로 전학했고, 상동중학교를 다녔다. 한양여고를 거쳐 숙명여고 2학년을 마치고 1976년 도미(渡美)했다.
그는 “여고생 시절부터 스물네 살까지 겪은 삶의 질곡(桎梏)은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이미 그때 나는 여자들이 평생 바라는 것들, 사랑·보석·자동차·집·상류생활·연예계 경험까지 두루 해봤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시시콜콜한 세상 이야기를 하면 지루하고 짜증이 나지만, 무기 로비스트로서의 인생을 이야기하면 신명이 난나”며, 화장실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이야기는 야망을 가진 한 시골소녀가 서울·일본·미국을 거쳐 마침내 세계를 주름잡는 무기중개상이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소재의 대하소설 <대망(大望)>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영월에서 중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주말 극장에서 신성일(申星一)이 주연한 영화 <초연>을 보다 수학선생님께 들켰어요. 학교 가는 게 두려워 가방을 메고 뒷산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뒷산으로 그 수학선생님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내 도망치고 난 뒤) 정말 학교를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울에 유학 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 상동중학으로 전학했습니다. 아버지는 펄펄 뛰셨지만, 나중에 학비를 부쳐주셨죠.”
―이미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온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군요. 여고시절부터 삶의 질곡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숙명여고로 진학했습니다. 숙명여고 2학년 때 운명의 ‘보이프렌드’를 만났습니다.”
린다 김은 어릴 적부터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고향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저씨는 날 무척 귀여워해 간혹 불러다 간식도 사주고 고민도 들어주었다”며 “그 아저씨의 소개로 그의 친구였던 ‘보이프렌드’를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얼마 후 그 사람이 유부남인 것을 알게 됐다.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던 그는 여고를 중퇴했다. “아무리 해도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 고통스러웠죠. 저도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아모레 화장품 1호 모델
―가수로 데뷔해 미8군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건 잘못 알려진 것이고요. 제 연예계 데뷔는 굳이 따지자면 가수가 아닌 모델로 출발했어요. 명동 거리를 걷는데 누가 다가와 대뜸 ‘화장품 모델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겁니다. 얼떨결에 태평양 아모레 화장품 1호 모델이 됐던 겁니다. 여고를 중퇴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니까 1973년 무렵일 겁니다.”
그는 영화도 찍을 뻔했다. “고향 아저씨의 소개로 고(故) 신상옥(申相玉) 감독을 알게 됐는데, 그분 제의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절반쯤 찍는데 고향 아저씨가 말려 포기하고 말았어요. 사실 그분도 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수가 된 계기는 뭡니까.
“원래 노래를 좋아해요. 답십리 살던 때 집 앞에 유니버설레코드사가 있었어요. 처음엔 가정집인 줄 알았다가 유명 가수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죠. 어느 날 우연히 레코드사 사장 차를 얻어타게 됐고, ‘내일 와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서 기타 반주에 맞춰 팝송을 불렀어요. 그분은 마음에 들었는지 ‘넌 가수를 해야 돼!’라고 했어요. 바로 전속계약을 했습니다.
<빗물> <그땐 몰랐네>란 노래를 판으로 냈습니다. 그 시절 친하게 지냈던 가수는 <하얀나비>를 부른 김정호였죠. 그는 광화문 근처 집에서 악보도 없이 악상(樂想)이 떠오르면 기타를 쳤고, 내게 악보를 적어달라고 했어요.”
린다 김의 가수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KBS 가요전문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진필홍(秦必洪)씨에게 발탁돼 전속가수로 활동할 기회까지 잡았다. 그러나 그의 ‘보이프렌드’가 화장품 모델과 가수 활동을 만류했다.
그는 “그 시절, 상류층 인사들의 파티며 모임에 자주 참석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 자리에서 박정희(朴正熙) 정부 이후 국내 정계를 주름잡던 이후락(李厚洛)씨 등과 안면을 텄다고 한다. 그때 쌓은 몇몇 인사들과의 친분은 린다 김이 로비스트 생활을 시작하고, 현재의 명성을 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무렵, 린다 김은 교통사고를 당해 눈 위, 입술 안쪽부터 귀까지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나요.
“아니요, 일본으로 1975년 떠났어요. 신상옥 감독님께 여권을 부탁했더니 비자와 여권을 건네주시더군요. 그때 받은 게 연예인 취업비자였던가 봐요. 그 때문에 내가 미8군 보컬이었다느니, 무용수 출신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났겠지요. 일본을 택한 건 제가 어머니처럼 모시던 분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에요.”
“종규 박을 아느냐”
그는 1976년 미국 서북부의 워싱턴주로 간다. 그의 모친은 “그곳에 한국인이 가장 적다”며 추천했다고 한다. 시애틀의 워싱턴대에 입학한 그는 영어 때문에 고역을 치른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켈리라는 아랍계 여성, 엘이라는 필리핀 고관의 딸이었습니다. 엘한테 처음 담배를 배웠죠. 셋 중 영국 유학경험이 있는 켈리가 영어실력이 가장 나았는데, 얼마 안 있어 샌프란시스코 버클리로 전학을 간다는 겁니다. 너무 따라가고 싶었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시애틀은 정말 싫었어요. 패스트푸드점에서 밀크를 ‘미역’이라고 해야 직원이 우유를 주더군요. 아무튼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의, 매일 먹는 맛없는 햄버거도….”
그는 이후 켈리를 따라 UC버클리대로 전학했다.
―자서전을 보면 ‘23세 때, 세계적인 무기중개상 아드난 카쇼기와 첫만남을 가졌다’고 했는데,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됐습니까.
“카쇼기와 인연을 맺어준 건,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서도 한 방을 쓴 켈리였죠. 카쇼기가 켈리의 삼촌뻘이더군요. 어느 날 켈리가 ‘뷰티풀 영 우먼(beautiful young woman)’ 12명을 모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카쇼기가 영국 런던에서 성대한 파티를 여는데, 거기서 일할 미국 여대생들을 찾는다는 겁니다. 저도 그 12명에 끼여 비행기 1등석에 앉아 영국땅을 밟게 됐습니다.”
파티는 영국 돌체스터 호텔을 통째로 빌려 사흘 밤낮으로 진행됐다. 애인을 따라 한국의 상류사회를 보았지만, 유럽의 상류사회 문화를 처음 접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찍 한국 상류사회 매너를 익혔고, 좋은 의상도 여러 벌 갖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어셔(usher) 역할을 맡았죠. 미모가 처지는 친구들은 접시를 날랐고요(웃음). 헨리 키신저 같은 유명인사들, 아랍 왕족들이 바글바글했어요. 유명인사들을 그렇게 많이, 가까이서 본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식사 시간에 테이블에 12명이 빙 둘러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자꾸 시선이 느껴졌어요. 돌아봤죠. 대머리에 동그랗고 빛나는 눈, 바로 카쇼기였어요.”
카쇼기는 그에게 “파트타임으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영어는 늘었지만 공부가 약간 지겨웠던 그는 “오케이”라고 했다. “나중에 카쇼기에게 왜 나를 불렀느냐고 했더니, ‘네가 동양인이라 눈에 띄는 데다 당신 눈동자가 가장 반짝거렸다’고 하더군요. 세련된 옷차림도 한몫했던 것 같아요.”
―첫 임무는 어떤 것이었나요.
“1976년 6월 그가 첫 연락을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 두 달 동안 심부름을 했죠. 타자를 쳐 서류가 완성되면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 전달하는 게 일이었죠. 밤새 타자를 치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단어를 치는지도 몰랐어요. 두 달이 지나면서 미사일 종류, 비행 속도 등 군사용어를 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일 끝나면 미국에 돌아가 학교를 다니다 다시 유럽으로 오고, 그런 생활을 하다 버클리를 3학년 때 중퇴하고 카쇼기의 회사로 자리를 옮겼어요. 이때부터 어깨너머로 무기중개 관련 지식을 얻어듣기 시작했죠.”
린다 김이 본격적으로 무기중개에 뛰어든 건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부터다.
“카쇼기가 절 부르더니 ‘종규 박(朴鐘圭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아느냐’고 물어요. 저야 당연히 ‘안다’고 했죠. 카쇼기가 씩 웃으며 ‘그래, 모든 한국인이 다 안다’고 해요. 카쇼기는 유명인사 박종규를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이름자 정도나 알고 있는 걸로 알았었나 봐요. 그런데 박씨는 한국에 있을 때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사람입니다. 카쇼기는 ‘비행기 티켓만 주겠다. 지금 당장 한국에 가서 미스터 박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당시 카쇼기는 한국의 차기전투기 사업에 노드롭그루먼의 F-20 ‘타이거샤크’를 팔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그는 당시 정권 실세인 박종규 전 실장을 접촉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뻗고 있던 중이었다.
기회가 온 걸 직감한 린다 김은 짐을 꾸려 한국으로 갔다. 박종규씨를 만나 “아저씨, 나 좀 한 번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박씨는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는 “지금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나, 빨리 가자, 빨리 가지 않으면 나는 바보가 된다”며 졸랐다. 다음 날 아침, 박씨는 “좋다, 가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막상 박씨를 스위스로 대령하니 카쇼기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설마 20대 여자 아이가 자기들이 1년 가까이 매달려도 대면할 수 없었던 박씨를 데려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저도 카쇼기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인 로비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첫 작품’이 대통령 눈앞에서 추락하고…
―그 사업은 성공했습니까.
“카쇼기 밑에서 일했지만, 본격적으로 뛰어드니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비행기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미친 듯이 매달렸죠. 그러나 무기 제작사의 실수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전두환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한국공군의 마크를 새겨넣은 F-20은 도입 축하 비행을 위해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뒷날개를 부딪치며 곤두박질해 추락하고 말았죠. 그때의 좌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1년 동안 몸바쳤던 프로젝트가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다니…. 열흘 동안 바하마에서 상사병 난 여자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카쇼기는 “이번 실패는 네 잘못이 아니라 제조사의 잘못”이라며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카쇼기는 그에게 아랍 쪽 전투기 도입 프로젝트를 밀어줬고, 2년6개월 동안 매달린 끝에 거래를 성사시켰다. 최초의 단독 프로젝트였다.
―박종규 전 실장이 도움을 많이 줬나요.
“현직에선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을 통하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만나지 못할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예스, 노가 분명하고 저와 성격도 맞았습니다. 제가 인맥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겉보기엔 차갑지만 인정이 많았던 분이에요. 위자료를 안 받고 당차게 헤어지는 저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줏대가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다이애나 빈(嬪)과의 추억도 이야기했다. 1986년 여름, 영국 왕세자빈 다이애나를 만날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 드레스, 파티는 국제 군사업계의 필수적인 액세서리죠. 영국 판보로 에어쇼에 참가하고 있을 때, 미국 회사 회장이 파리에서 열리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아 주었습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파티가 아니었죠. 문제는 시간이었어요. 비즈니스 정장밖에 없었던 난 다음 날 저녁 열리는 파티를 위해 파리의 단골미용사 ‘아이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죠.”
우여곡절 끝에 아이비를 찾았고, 아이비는 린다 김의 헤어스타일에 맞춰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홀한 광채의 실크 드레스를 준비해 놓고, “트레 비엥(아주 멋져!)”을 외쳤다. ‘프라이비트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였다. 옷값은 12만 달러(약 1억5000만원)였다.
“동양인으로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처럼 치장했죠. 리무진 번호를 확인하고 정문을 통과해 숲길을 5분 이상 달렸어요.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 같은 저택이 나타났죠. 파티는 계속됐고,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키가 훤칠한 여인, 다이애나가 나타났어요. 다이애나는 ‘그 드레스를 누가 디자인했느냐, 아주 잘 어울린다, 어디서 왔나요?’라고 물었죠.
다이애나의 행복한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다이애나는 파티가 끝날 무렵 ‘내일모레 우리 친구 20여 명이 시실리에서 모이는 파티에 린다를 초대하고 싶어요. 린다, 다시 만나요. 친구들이 당신을 무척 좋아할 거예요’라고 했어요.
파리에서 자가용 비행기로 시실리 섬까지 갈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난 ‘영광입니다, 꼭 가겠습니다’라고 답했지요. 1997년 서울에서 만난 지 8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그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피 미사일로 미사일기지 공격했으면…
린다 김이 뜬금없이 기자에게 물었다. “오 기자, 날 어떻게 생각해요?” 기자가 “성격이 쿨(cool)한 편”이라고 했더니 “쿨하다는 것은 좋은 의미네…”라고 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과거 전성기의 파티복 사진들이 담긴 액자를 기자앞에 내놓았다. “젊었을 때 찍은 사진들을 <월간조선>에 실어줄 수 있어요?”라고 했다.
지난 3월 24일 3시간 인터뷰에 이어 이날 장장 9시간의 인터뷰 동안 린다 김은 담배 한 갑을 다 피웠다. 지독한 체인스모커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빼고,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사무실로 배달시켜 먹은 것을 빼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 근성을 가진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녹음기의 배터리도 바닥이 나 꺼진 지 오래다. “저녁식사나 하자”며 기자가 그를 문 닫기 직전의 인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천안함 침몰 소식을 보더니 “북한이 천안함 공격을 했다면 어떻게 할거냐”며, “내가 도입한 무인기형 순항미사일 하피(Harpy)로 북한 잠수함 기지를 작살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밥을 시켜놓고 린다 김이 기자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 부음(訃音) 기사, 기자들이 어떻게 쓸까? 스캔들이나 일으킨 여자로 기록하지는 않을까? 돌이켜보면 난 사랑이든 뭐든 남자복이 없어서 더럽게 애절해요. 이 나이에도 다시 사랑이 불같이 타오를 수 있을까요?”⊙
몽블랑 볼펜이 꽂혀 있는 테이블 위 루이뷔통 다이어리에는 수많은 사람의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다. 전성기 때 찍은 파티복 차림의 사진 두 장이 액자에 담겨 그의 화려했던 시절을 전한다.
“나, 린다 김인데요….” 허스키한 목소리의 그가 느릿한 말투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는 올해 한국 나이로 쉰여덟이다. 내일모레면 환갑인 나이에도 그의 피부는 팽팽했고, 잡티 하나 눈에 띄질 않았다. “여전히 피부가 곱다”고 기자가 말하자, “이젠 할머니인데…곱긴…”이라며 눈을 흘겼다.
린다 김, 본명은 김귀옥(金貴玉). 국방장관에게 “사랑한다”는 연서(戀書)를 받은 여인,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대한민국을 ‘부적절하게’ 뒤흔들어 놓은 미모(美貌)의 무기 로비스트다.
지난 4월 2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건넨 명함을 보니 그는 미국에 본사를 둔 컨설팅사 ‘엠앤에스파트너스’의 회장이다. 167cm의 키에 군살 없는 그는 예상 외로 “몸무게가 5kg이나 불어 다이어트 중”이라고 했다. 살이 붙은 건 2000년 ‘린다 김 스캔들’ 이후 찾아온 우울증 때문이다. “10년간 항우울제 세 알씩을 장복(長服)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현재 싱글이다. 두 딸은 보스턴대로 진학시켰다. 큰딸 지선(30)씨는 보석디자이너, 둘째딸 지영(28)씨는 로스쿨에서 형사법을 공부하고 있다. 린다 김을 빼닮았다는 지선씨는 2001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남가주(南加州)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미스 한국일보’로 뽑혔다.
무기계약 실패율 ‘제로’, 전(全) 세계에서 열리는 에어쇼에 가면 그의 지정석(指定席)이 있고, 원하기만 하면 최신형 항공기에 탈 수 있다는 그는 몸값이 가장 비싼 로비스트 중 하나다. 그는 사무실 벽면을 온통 T-50 고등훈련기 사진으로 장식했다. “혹시 T-50 로비스트로 나섰느냐”고 묻자 “한국이 처음 만든 초(超)음속 훈련기인데다, 해외 수출시장에서 가능성이 많아 보여 애착이 간다”고 했다.
로비스트가 브로커라고?
![]() |
2001년 4월 13일, 린다 김의 딸 지선(당시 20세)양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30회 남가주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미스 한국일보’로 뽑혔다. |
린다 김은 무기 로비스트를 정부가 ‘브로커’ 정도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거꾸로 가는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무기중개상은 과연 대통령이나 장관의 말대로 사회악(社會惡)인가요?
“도대체 ‘20% 리베이트’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온 건지 아무리 짜봐도 모르겠네요. 정부 차원의 대규모 무기도입 사업에 손을 대는 로비스트들은 한국에서는 멸종됐다고 봐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 명씩 죽이는데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요즘 말하는 무기중개상이나 로비스트라고 부르는 건 고작 부품(part)을 파는 에이전트입니다. 그들은 자기 돈 들여 해외출장 다니고, 접대하다 계약이 불발되면 망하는 겁니다.”
‘로비스트’는 무기회사와 대등하게 계약을 맺고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이고, ‘에이전트’는 협상이 시작된 후 회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공식적인 심부름꾼이다.
“에이전트가 끼지 않는 무기거래는 없습니다. 갖고 있는 정보와 협상력이 달라요. 에이전트들은 무기업체와 수시로 접촉하면서 ‘경쟁사가 이윤을 얼마나 붙이는가’ ‘경쟁사가 첨단기술을 무기체계에 얼마나 넣고 빼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미국 무기업체들은 거의 정확한 정보를 에이전트들에게 주죠. 그러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바로 보복을 당할 테니까요.”
무기중개는 ‘꾼들의 세계’
![]() |
린다 김은 1977년부터 2년 동안 ‘김아영’이란 예명으로 음반을 내고 가수활동을 했다. 사진은 대표곡 <그땐 몰랐네>, <빗물>이 수록된 음반. |
“FMS 방식으로 무기를 도입하면 커미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국 정부가 전투기 몇 대를 미 국방성 산하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을 통해 도입한다고 칩시다. 어차피 한국이 요구하는 무기를 미(美) 국방성에 납품하는 기업은 자기 이윤을 붙일 것이고,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도 마진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붙여 공급할 겁니다.
이 수수료를 6~7% 또는 10%까지 매긴다고 해도 한국 정부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FMS 방식을 통한 거래가 미국 무기업체를 통해 들여오는 ‘상용거래’와 비교해 수수료가 싸다고 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답답한지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며 양해를 구하고 한 대를 피워물었다.
“게다가 정부가 정부 대 정부 거래, 즉 FMS로 무기도입을 한다고 치면, FMS 방식으로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는 현재 미국밖에 없습니다. 결국, 정부가 FMS를 하겠다는 말은 미국 무기만 앞으로 사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략적 차원으로 놓고 보면, 우리가 미국 무기만 도입하겠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고, 그렇게 되면 무기도입 협상력은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겁니다.”
―방위사업청을 비롯한 무기 구매 담당 공무원들이 전문성을 쌓아 협상에 임하면 되잖습니까.
“32년 동안 무기중개상을 했지만, 심지어 FMS 거래도 무기중개인을 끼고 합니다. FMS도 중개상이 역할을 잘하면 수수료가 3%까지 떨어지고, 어정쩡하면 7%까지 올라갑니다.”
그는 “무기중개상은 방대한 정보를 수집·분석해야 하고, 그 세계의 언어로 협상을 해야 하는 ‘꾼들’”이라며 “공무원은 어디까지나 공무원이지 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통이 왜 있나요? 제조업자는 마케팅 능력을, 소비자에게는 물건 평가 능력을 갖도록 하면서 적정 수수료(이익)를 받으면서 제공하는 겁니다. 무기도 마찬가지예요.”
M-346이 T-50을 꺾은 비결
![]() |
2000년 5월 7일, 백두사업이 스캔들로 비화돼 기자들이 몰려들자, 외부로 전화를 걸고 있는 린다 김. |
“한국의 무기도입 과정은 상당히 복잡해요. 1982년경 조달본부가 생기면서 무기도입에 필요한 단계가 30개 이상 생겼습니다. 비리를 저지르려면 책임자인 장성급에서 실무자인 소령급까지 공모해야 가능합니다. 보는 눈이 30개가 넘는데요.”
그는 “백두·금강처럼 최첨단 무기체계를 도입하는 큰 사업일수록 오히려 로비스트가 필요하다”면서 “정부 대신 누군가 나서 싸워줘야 ‘바가지’를 쓸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고등훈련기 T-50, 자주포 K-9, 흑표 전차 등 이른바 ‘명품’ 무기수출을 시작하면서 로비스트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면서 “무기를 수출할 때 필요한 능력은 IQ나 성실성이 아니라 ‘경험’인데, 무기를 팔아본 경험이 한국정부는 없지만 로비스트들에게는 있다”고 했다.
―한국이 좋은 에이전트를 고용했다면 고등훈련기 T-50의 UAE 수출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뜻인가요.
“T-50이 경쟁기종인 이탈리아 M-346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나요? 우리 것이 성능이 좋은데 왜 떨어졌을까요? 이탈리아는 제대로 로비스트를 기용했습니다. UAE의 고등훈련기 도입결정권을 쥔 무함마드 왕자와 영국 왕립공군대학 동기인 헨리 매커리를 내세웠어요. 한국이 당해낼 재간이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로비스트를 합법화하면 어떨까요.
“한국도 로비스트 합법화 법안을 국회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나, 율사(律士) 출신 국회의원들이 ‘밥그릇’을 걱정하는 통에 무산됐습니다.”
![]() |
1996년 10월 24일 밤, 경전투헬기사업 등과 관련, 대우중공업 측으로부터 1억5000만원을 건네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이양호 전 국방장관이 검찰에 출두하고 있다. |
사업비 규모를 보면 린다 김이 상당한 수익을 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사업 2400억원, 금강사업 3600억원,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사업 500억원, 하피사업 600억원, 포파이사업 2000억원 등 알려진 것만 계산해도 9100억원이다. 평균 커미션을 10%씩만 잡아도 900억원이다. 여기에 해외에서 올린 대형 프로젝트까지 더하면 그가 받은 커미션은 천문학적 금액일 것이다.
―여성으로서 무기 로비스트를 하는 데 유리한 점이 있습니까.
“여성들은 섬세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남성들은 늘 샴페인을 일찍 터트려 막판에 일을 망칩니다. 1%의 변수로 승패(勝敗)가 갈리는 게 무기중개업이니까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수험생처럼 스터디를 합니다. 시작 단계부터 ‘난 졌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요. 그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돼요. 무기중개업은 정말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은 일이에요.”
―한국에서 비즈니스해 성공하는 비결이 있다면.
“특별할 게 있나요(웃음). 직관(直觀)을 중시하는 태도, 재빠른 감정포착, 치고 빠질 줄 아는 능수능란한 화술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情)입니다.
출국 비행기에서 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인사 챙길 분들 리스트를 작성하는 거죠. 1순위로 지난 정권의 실세(實勢)였다가 외로운 처지가 된 분들이고요. 맨 마지막으로 정권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고요. 50%는 비즈니스적 고려, 나머지는 소중한 분들을 위한 인사죠. 그렇게 하는 게 비즈니스하는 처세로서 옳고, 또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번의 後悔
![]() |
1996년 10월 1일 저녁, 김영삼 대통령(왼쪽 셋째)이 육군회관에서 열린 국군의 날 경축연에 참석, 이양호 국방장관(왼쪽 둘째), 김동진 합참의장(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경축떡을 자르고 있다. |
일명 ‘린다 김 스캔들’은 백두사업 등 방위력 증강사업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그가 고위 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넸는지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은 그가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 주고받은 연서들이 공개되면서, 고위인사들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느냐에 집중됐다.
이 전 장관과 그와의 스캔들 의혹은 이 전 장관이 한 신문을 통해 “두 차례나 관계를 가졌다”고 시인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린다 김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한마디로 자신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린다 김은 1995~97년 공군 중령 등으로부터 2급 군사기밀을 빼내고, 백두사업 총괄팀장에게 1000만원을 준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2000년 10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린다 김은 “이양호 전 장관은 백두사업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분인데…”라며 “가장 안된 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양호 장관이 이 사업에 뛰어들 때 내게 한 말이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업만큼은 커미션을 생각하지 말고 국가관을 갖고 임해 달라고. 난 정말 그랬어요.” 그는 ‘국가관’이란 말에 힘주어 말했다.
린다 김은 이양호 장관과 합심해 몇천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장관의 간곡한 요청에 그는 미국 감청장비 제조업체인 E시스템사(社) 소속이었지만, 업체의 정보를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한국 정부와 협상건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한국 쪽으로 마음이 쏠려요. 제가 회사 중역회의에 참석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한국 정부에 흘려주면 협상에 큰 도움이 되지요.” 계속해서 그의 말이다.
“지금 와서 얘기하면 다 변명이지요, 뭐. 당시 백두사업 경합업체만 12군데였어요. 막말로 12군데 모두 국방부에 ‘끈’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때까지 계속하던 콧대 높은 팰콘사(Falcon社)를 밀어냈는데…. 사흘간 미친 듯이 나를 찾아 하루에 1000만 달러(120억원)씩 성공보수를 올려가며 로비스트로 채용하려 했죠. 신용을 택할까, 돈을 챙길까 괴로웠죠. 그러니 내 스스로 사방에 적(敵)을 만든 셈이지.”
![]() |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관련, 1995년 11월 13일 검찰에 재소환되고 있는 금진호 당시 민자당 의원. |
그 자리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자 실세로 통하던 김윤도(金允燾) 변호사도 있었다고 한다. 황명수 의원은 금진호(琴震鎬) 전 의원을 통해 린다 김을 알게 됐다.
그는 벌떼처럼 달려드는 언론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절망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완성되지 않은 백두정찰기를 보고 “고철(古鐵)을 들여왔다”고 해 로비스트로서의 자존심을 꺾었다고 했다. 백두정찰기는 2001년부터 실전투입됐고, 2002년 6월 제2 연평해전에서 평가를 받았다.
백두사업으로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이양호 전 장관의 언론 노출이다.
“지금도 폐가 될까 연락을 안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 전 장관을) 참 좋아해요. 한국 최고의 비행기록을 가진 파일럿 출신 장관인데…. 공군 출신 장관이라 (국방부 내) 견제가 워낙 심했어요.” 그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목소리도 좀 떨렸다.
그는 “내 두 딸의 이름을 걸고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다”며 “이것만은 확실하다. 기독교 신자인 장관이 날 전도하려고 늘 기도를 해 줬고, 나는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우린 부적절한 관계라기보다 더 친한 솔메이트(soul mate)였다”고 했다.
―기무사령부가 둘의 관계를 추적할 때 이 장관이 부적절한 관계를 털어놓았잖습니까.
“제가 그분과 자려고 맘먹었다면 왜 두 번만 잤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대부분의 남자는 관계 후엔 관심이 없어지지 않나요? 직업상 수많은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 어느 특정인과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어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이양호 장관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요?
“그 신문과 인터뷰한 직후 내게 ‘미안하다’며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건 참, 도대체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 신문이 ‘그것(성관계)만 인정하면 언론이 잠잠해질 것이다.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말을 믿고 두 번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답니다. 집에 가 생각하니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내게 ‘내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진실을 밝혀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당당했던 琴震鎬 전 장관
![]() |
김영삼 대통령(맨오른쪽)이 1995년 1월 20일 청와대에서 권영해 안기부장(오른쪽에서 둘째)으로부터 안기부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권영해 안기부장은 무기 도입사업과 관련, 이양호 국방장관과 영역다툼을 치열하게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
“연서로 보면 연서지만, 달리 보면 일을 추진하는 암호(暗號)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흐려서 마음이 흐리다’라고 하면 뭔가 일이 안 되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아마 제가 그때 왜 이런 편지를 보내느냐고 타박했다면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황혼(黃昏)이 질 무렵, 물든 가슴을 파고드는 애틋한 감정이었어요. 젊은이들보다 더 순수한 감정이었는지 몰라요. 흔히 말하는 불륜(不倫)과는 달랐어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순수함을 가진 건 평생을 군인(軍人)으로 살아왔기 때문인가 봅니다.”
―편지 내용에 ‘경솔했던 제 행동’이라는 표현은 오해를 사기 딱인데요.
“사실 이분이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딱 잘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비즈니스는 어떻게 됩니까. 하지만 이씨의 편지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어요. 너무 순수한 감정으로 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빙빙 돌려쓰다 보니 그런 표현이 나온 겁니다. 이양호씨는 업무가 끝난 후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오곤 했습니다. 식사도 같이 했고요. 아마 수십 번은 드나들었을 겁니다. 관계를 가졌다면 두 번만 했겠습니까.”
―정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나요?
“없어요. 식사할 때 새우를 까드린 적은 있지만….”
―금진호 장관도 편지를 주고받은 명단에 올랐는데,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그분은 저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왔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그분은 편지에서 ‘때로 남자보다 여자와의 우정이 더 강하다’고까지 말했어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사귀면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금 장관에게 ‘린다 김을 사랑하십니까?’ 하니까, ‘Why not? I love her, she is a very nice lady more than you think’라고 하는 걸 보고 정말 신사(紳士)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만나 점심을 먹곤 하죠.
금 장관은 외교부장관을 하고 싶어 했어요. 동서인 노 대통령이 그걸 막은 거야. ‘내 살아온 인생이 허전하다’는 편지를 자꾸 보내요. 믿었던 YS는 도움이 안 되니까 배신감을 느꼈죠. 그래서 샌타바버라에서 며칠 묵다 가시라고 했고, 롤스로이스를 보내드렸고, 아침식사도 같이했죠. 그것을 편지에 쓴 것을 갖고….”
YS, “네가 웬만한 남자보다 낫다”
린다 김은 김현철(金賢哲)씨와는 악연이다. 어느 날 그가 이스라엘 출장을 위해 김포공항에 갔는데,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사유를 알아보니 안기부 지시였다. 직감적으로 김현철씨가 개입했다고 판단한 그는 곧바로 김윤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권영해(權寧海) 안기부장이 김현철에게 엉뚱한 보고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김현철이 린다 김과 함께 백두·금강사업에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 전혀 사실이 아니죠. 김현철씨는 그 이야길 듣고 화가 났을 것이고요. 세 사람이 하얏트 호텔 일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먹으며 따졌죠.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김기섭(金己燮) 안기부 운영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군요. ‘아니, 누가 린다 김을 출국금지시키라고 했어. 소문이 있으니까, 한번 알아보라고 한 거지. 그것 좀 빨리 풀어주시오.’ 그는 ‘안기부에서 오버한 것 같다,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5분 만에 출국금지가 풀려 공항으로 가는데, 경찰 사이드카까지 붙여줘요. 공항에 지시해 비행기 10분 대기시켜 놓고….”
―백두사업 선정 과정에서 기무사가 뒷조사하는 것을 알았습니까.
“그럼요. 임재문(林載文) 기무사령관을 보고 눈치로 때려잡았지요. 우린 인맥으로 로비합니다. 하루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인맥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뇌물이나 쓰는 건 어설픈 에이전트나 하는 짓이에요.”
린다 김은 김영삼 대통령과 박철언(朴哲彦) 장관과의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노태우 정부 시절, 박 장관이 대권(大權)에 도전하려고 YS와 경합했을 때의 일이다.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박 장관 편을 들고, 노 대통령과 금진호 장관은 YS편을 들었어요. YS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금 장관을 낙동강 오리알로 만들었어요. 금 장관은 나중에 뒤통수를 맞았지요. 박철언 장관이 YS 때문에 스페인 외유(外遊)에 나섰을 때, 내가 도와준 적이 있어요.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그분이 ‘가시나, 모하노? 이 기분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더럽다’고 전화를 했기에, 사장에게 시켜 샌타바버라에 3주 정도 묵게 해 드렸어요. 그걸 YS가 알았어요. 난 미운털이 박힌 거죠. 이제 장사 다 해먹었구나 싶었죠. 그때 김윤도 변호사(2000년 사망)가 오해를 풀어줬어요.”
린다 김은 YS를 재임 중 몇 차례 만났다고 말했다. 장소는 서울 논현동 김윤도 변호사의 집이다.
“한번은 김 변호사가 내게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요. YS가 저녁을 드시러 온다는 거야. 한정식집 사장에게 음식을 준비하게 하고 그 음식점 여종업원들을 서빙하게 했어요. 그날 김 변호사 집 주변은 경호원들로 깔렸고, 골목골목을 전부 차단했죠. 나도 그쪽에서 보내준 차를 이용해 집안으로 들어갔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밸런타인 30년산을 반 병 정도 마시면서 말이 많아지셨어요. 당시 김 변호사 부인이 아이들 때문에 하와이에 계셨어요. 혼자 지내는 김 변호사를 YS가 찾아갔던 거지요. YS가 취임 후 안가(安家)를 모두 없앴잖아요.
말하자면 김 변호사 집이 안가 구실을 한 거지. 박철언 장관 외유 때 편의를 제공했던 일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네가 웬만한 남자들보다 낫다’고 하세요. 그래서 풀린 거죠.”
韓仁玉 여사의 의상코디네이터 역할도
1996년 10월 이양호 장관이 구속되자, 그가 무기도입 사업을 둘러싼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린다 김은 그 무렵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 선정 경쟁을 할 당시, 영향력을 행사한 전·현직 군 고위관계자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군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A씨는 프랑스제, 국방장관을 역임한 B씨는 독일제를 각각 후원했다. 이양호 국장장관은 린다 김이 로비스트로 나선 이스라엘 장비를 선호했다.
그 때문인지 동부전선 전자전 장비는 처음엔 이스라엘 장비로 결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양호 장관이 구속되자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재선정을 위한 심사과정에 이스라엘 장비는 아예 후보에서 제외됐다.
그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자전 장비 사업에서 빠지고 프랑스제로 채워졌다”며 “‘국제거래에서 이런 예의가 어디 있느냐’며 하이힐을 신고 계룡대에 가서 최모 장군과 대판 싸웠다. 누가 보면 술값 받으러 온 마담이 행패를 부리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정치권에서는 린다 김이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후보에게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부인 한인옥(韓仁玉)씨에게 옷을 선물했다고도 한다. 린다 김은 “이회창씨보다 한인옥 여사와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정계에 있는 분들이 연결을 해 줬어요. 한 여사가 집에서 한복만 입던 분이잖아요. 대선후보 부인이 되니까 외부행사를 해야 하는데, 내 옷 입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한 여사 의상 코디를 도와줬어요. 그걸 안기부와 기무사에서 부풀려 소문을 낸 겁니다.”
―정치자금을 건네진 않았나요?
“그런 이야기는 노코멘트죠.(웃음)”
―이회창씨가 당선됐다면 로비스트로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겠군요?
“물론이죠. 대선 개표날 자다 전화를 받았는데, ‘DJ가 됐다’는 거예요. 순간 머리가 띵하더라고요. 조풍언 생각도 떠오르고요.”
‘FX 사업’에 생산라인까지 떼주겠다던 보잉社
![]() |
2005년 10월 7일, F-15 3, 4호기가 미국 본토를 출발, 하와이 - 괌 - 제주도를 거쳐 성남 공군비행장에 착륙하는 장면. |
린다 김이 F-X사업에 간여할 때는 1998년 10월, 그 무렵 맥도넬더글러스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1997년 8월 보잉사는 군용기 생산업체인 맥도넬더글러스를 합병했다. 그러나 1998년만 해도 이름만 보잉사로 통합했을 뿐 맥도넬더글러스사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F-15 생산공장은 원래 맥도넬더글러스사 소유였다. 그런 까닭에 린다 김은 F-X사업 로비스트 계약을 맥도넬더글러스사와 진행했다고 한다.
“제가 F-X사업에 관심을 가진 건 1996년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이 끝난 직후입니다. 1998년부터 하워드 와이즈번스 마케팅 부회장 등 맥도넬더글러스사 관계자들을 접촉했죠. 12명이 회사에 로비스트 지원서를 넣었어요. 회사는 이력서와 실적을 보고 후보를 순차적으로 압축했는데, 최종적으로 제가 선택된 겁니다. 맥도넬더글러스는 성공률 100%인 나를 F-X사업에 끌어들인 겁니다.”
―무기중개상 조풍언(曺豊彦)씨도 당시 12명에 포함됐습니까.
“물론이죠.”
그는 “F-X사업은 백두·금강 사업처럼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이해해야 하는 복잡한 사업이 아니었다”면서 “F-15, 유로파이터, 라팔, 수호이-35 등 4개 후보기종의 성능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단순하고 편한 사업이었다”고 했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F-X) 기종으로 F-15K가 선정된 데 대해 말이 많습니다. 차세대 전투기로 보기엔 한물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생산라인은 1999년 폐쇄될 운명이었습니다. 정보력이 강한 로비스트들은 이것을 간파했죠. 한국의 F-X사업 덕분에 F-15는 다시 살아난 거죠. 로비스트 계약 얘기가 오갈 때 제가 보잉 측에 ‘솔직히 인건비와 조립비용만 드는 것 아니냐’며 생산라인을 넘길 것을 제안했습니다.”
―보잉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어요. 오죽하면 생산라인에 운반비용까지 부담한다고 했을까요.”
F-15 전투기, 8500만 달러짜리를 1억 달러에 구입
![]() |
1999년 대우그룹 퇴출 저지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재미교포 무기 거래상 조풍언씨가 2008년 5월 15일 서울 대검찰청에서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
린다 김은 자신의 F-X사업 참여가 1998년 기무사 수사의 한 배경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 10월경, 일요일 저녁 비행기편으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맥도넬더글러스 본사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인 토요일, 한국에 있는 그의 무기중개업체 IMCL 사무실에 수사요원들이 들이닥쳐 직원들을 체포해 갔다.
“사고가 나자 맥도넬더글러스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걸로 끝났습니다. 나 대신 장성 출신들을 로비스트로 고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일이 다 틀어졌죠. 예정대로라면 세인트루이스에 가서 맥도넬더글러스와 로비스트 계약을 맺었을 겁니다.
제가 손을 떼고 난 후, 보잉은 손익분기점이 훨씬 지나 대당 가격 8500만 달러에 팔던 전투기를 1억 달러에 한국공군에 팔았고, 기술이전도 10% 정도만 하고 말았습니다. 2차 협상에서 추락한 1대분을 더 주었죠. 마치 무르고 상한 귤이 나오면 한두 개 공짜로 생색내면서 더 주는 식이지요.”
전두환 대통령 때 시작한 공군의 차기전투기 사업은 노태우 정부 들어 공군의 희망에 따라 보잉의 F-18을 우선협상대상 기종으로 선정했다가 1990년대 초반 록히드마틴의 F-16으로 바꾸었다. 린다 김은 이때 록히드마틴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F-18을 생산하는 보잉(맥도넬더글러스)이 가격을 2억 달러나 올리는 등 한국을 얕잡아 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한국 정부가 기종(機種)을 바꿨겠습니까? 대처가 옳았다고 봐요. 이때 ‘무서운 여자다’라고 판단한 보잉은 F-X사업에서 F-15의 로비스트로 날 기용하고, 생산라인을 한국에 주려고까지 했던 겁니다.”
盧武鉉 대통령 시절, 자주국방 관련 브리핑
![]() |
2009년 11월 25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0일을 맞이해 서울국립현충원 고인의 묘역에서 열린 추모 기도회에 김홍업씨(왼쪽)와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오른쪽)가 참석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조풍언의 행적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풍언은 저를 코너로 몰아넣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조풍언이 1998년 백두사업에 대한 기무사 수사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젊은 시절, 조풍언씨 부친이 운영하던 선박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두 집안은 한때 목포에서 아래윗집에 살 정도로 가까웠다.
린다 김은 군검찰 관계자에게 처음으로 조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金弘傑) 전 의원에게 집을 사줬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한다. 조씨는 1973년 ‘기흥물산’이라는 회사를 세워 무기중개업에 손을 댔다. 그는 미국의 레이더업체 ITT사와 거래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조풍언씨는 무기중개상으로서 어느 정도입니까.
“김대중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 그다지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기흥물산은 큰 건은커녕 자질구레한 것들만 맡아왔어요.”
―조풍언씨 뒤에 누가 있다고 보십니까.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아요? 김홍일(金弘一) 의원의 후원을 받았죠.”
![]() |
1990년 8월 IOC 위원 시절의 박종규 전 경호실장. |
“1994년 이스라엘 정부는 내게 7년간 우산계약(umbrella contract) 권한을 주었죠. 일종의 독점을 준 겁니다. 모든 에이전트가 이스라엘 무기 계약을 하려면 나를 통하게 한 겁니다. 그 덕분에 제가 이스라엘 무기들을 많이 팔았던 겁니다.”
김대중 정부 때 구속당한 린다 김은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직후 새로운 기대감으로 재기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 인맥을 동원, 청와대 접촉을 시도했다. 그는 “명예회복 차원”이라고 했다.
그는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의 스캔들 탓에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백두사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매도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 스캔들과 사업을 구분해 평가해 달라고 주문했다.
2003년 봄, 린다 김은 문희상(文喜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 실장 쪽에서 자신에게 자주국방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는 것이다.
“무기사업을 한 사람으로 자주국방 인프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달라고 누군가를 통해 제안해 왔더군요. A4용지 6장 분량의 편지는 인편(人便)으로 전달했어요.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자주국방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썼어요. 중간에서 심부름한 사람의 전언이, 문 실장이 내 편지를 읽고 ‘이게 정답인데…아까운 여자 하나 죽였다’고 말했다고 들었어요.”
무기 로비스트 얘기만 하면 신나
![]() |
1995년 12월 19일 자민련 박철언 부총재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는 서울구치소를 찾아가고 있다 |
1953년 11월, 린다 김은 경북 청도에서 군인이었던 아버지 김무준(79)과 어머니 정재임(77)의 1남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강원도 영월로 전학했고, 상동중학교를 다녔다. 한양여고를 거쳐 숙명여고 2학년을 마치고 1976년 도미(渡美)했다.
그는 “여고생 시절부터 스물네 살까지 겪은 삶의 질곡(桎梏)은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이미 그때 나는 여자들이 평생 바라는 것들, 사랑·보석·자동차·집·상류생활·연예계 경험까지 두루 해봤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시시콜콜한 세상 이야기를 하면 지루하고 짜증이 나지만, 무기 로비스트로서의 인생을 이야기하면 신명이 난나”며, 화장실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의 이야기는 야망을 가진 한 시골소녀가 서울·일본·미국을 거쳐 마침내 세계를 주름잡는 무기중개상이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소재의 대하소설 <대망(大望)>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영월에서 중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주말 극장에서 신성일(申星一)이 주연한 영화 <초연>을 보다 수학선생님께 들켰어요. 학교 가는 게 두려워 가방을 메고 뒷산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뒷산으로 그 수학선생님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내 도망치고 난 뒤) 정말 학교를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울에 유학 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 상동중학으로 전학했습니다. 아버지는 펄펄 뛰셨지만, 나중에 학비를 부쳐주셨죠.”
―이미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온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군요. 여고시절부터 삶의 질곡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숙명여고로 진학했습니다. 숙명여고 2학년 때 운명의 ‘보이프렌드’를 만났습니다.”
린다 김은 어릴 적부터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고향사람이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저씨는 날 무척 귀여워해 간혹 불러다 간식도 사주고 고민도 들어주었다”며 “그 아저씨의 소개로 그의 친구였던 ‘보이프렌드’를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얼마 후 그 사람이 유부남인 것을 알게 됐다.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던 그는 여고를 중퇴했다. “아무리 해도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 고통스러웠죠. 저도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아모레 화장품 1호 모델
![]() |
2001년 무렵의 신상옥 감독. 신 감독은 린다 김이 일본으로 갈 수 있도록 여권을 만들어 주었다. |
“그건 잘못 알려진 것이고요. 제 연예계 데뷔는 굳이 따지자면 가수가 아닌 모델로 출발했어요. 명동 거리를 걷는데 누가 다가와 대뜸 ‘화장품 모델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겁니다. 얼떨결에 태평양 아모레 화장품 1호 모델이 됐던 겁니다. 여고를 중퇴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니까 1973년 무렵일 겁니다.”
그는 영화도 찍을 뻔했다. “고향 아저씨의 소개로 고(故) 신상옥(申相玉) 감독을 알게 됐는데, 그분 제의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절반쯤 찍는데 고향 아저씨가 말려 포기하고 말았어요. 사실 그분도 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수가 된 계기는 뭡니까.
“원래 노래를 좋아해요. 답십리 살던 때 집 앞에 유니버설레코드사가 있었어요. 처음엔 가정집인 줄 알았다가 유명 가수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죠. 어느 날 우연히 레코드사 사장 차를 얻어타게 됐고, ‘내일 와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서 기타 반주에 맞춰 팝송을 불렀어요. 그분은 마음에 들었는지 ‘넌 가수를 해야 돼!’라고 했어요. 바로 전속계약을 했습니다.
<빗물> <그땐 몰랐네>란 노래를 판으로 냈습니다. 그 시절 친하게 지냈던 가수는 <하얀나비>를 부른 김정호였죠. 그는 광화문 근처 집에서 악보도 없이 악상(樂想)이 떠오르면 기타를 쳤고, 내게 악보를 적어달라고 했어요.”
린다 김의 가수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KBS 가요전문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진필홍(秦必洪)씨에게 발탁돼 전속가수로 활동할 기회까지 잡았다. 그러나 그의 ‘보이프렌드’가 화장품 모델과 가수 활동을 만류했다.
그는 “그 시절, 상류층 인사들의 파티며 모임에 자주 참석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 자리에서 박정희(朴正熙) 정부 이후 국내 정계를 주름잡던 이후락(李厚洛)씨 등과 안면을 텄다고 한다. 그때 쌓은 몇몇 인사들과의 친분은 린다 김이 로비스트 생활을 시작하고, 현재의 명성을 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무렵, 린다 김은 교통사고를 당해 눈 위, 입술 안쪽부터 귀까지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나요.
“아니요, 일본으로 1975년 떠났어요. 신상옥 감독님께 여권을 부탁했더니 비자와 여권을 건네주시더군요. 그때 받은 게 연예인 취업비자였던가 봐요. 그 때문에 내가 미8군 보컬이었다느니, 무용수 출신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났겠지요. 일본을 택한 건 제가 어머니처럼 모시던 분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에요.”
“종규 박을 아느냐”
![]() |
2000년 4월 모나코의 한 파티장에 참석한 무기중개업자 아드난 카쇼기와 그의 부인. |
“기숙사 룸메이트가 켈리라는 아랍계 여성, 엘이라는 필리핀 고관의 딸이었습니다. 엘한테 처음 담배를 배웠죠. 셋 중 영국 유학경험이 있는 켈리가 영어실력이 가장 나았는데, 얼마 안 있어 샌프란시스코 버클리로 전학을 간다는 겁니다. 너무 따라가고 싶었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시애틀은 정말 싫었어요. 패스트푸드점에서 밀크를 ‘미역’이라고 해야 직원이 우유를 주더군요. 아무튼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의, 매일 먹는 맛없는 햄버거도….”
그는 이후 켈리를 따라 UC버클리대로 전학했다.
―자서전을 보면 ‘23세 때, 세계적인 무기중개상 아드난 카쇼기와 첫만남을 가졌다’고 했는데,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됐습니까.
“카쇼기와 인연을 맺어준 건,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에서도 한 방을 쓴 켈리였죠. 카쇼기가 켈리의 삼촌뻘이더군요. 어느 날 켈리가 ‘뷰티풀 영 우먼(beautiful young woman)’ 12명을 모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카쇼기가 영국 런던에서 성대한 파티를 여는데, 거기서 일할 미국 여대생들을 찾는다는 겁니다. 저도 그 12명에 끼여 비행기 1등석에 앉아 영국땅을 밟게 됐습니다.”
파티는 영국 돌체스터 호텔을 통째로 빌려 사흘 밤낮으로 진행됐다. 애인을 따라 한국의 상류사회를 보았지만, 유럽의 상류사회 문화를 처음 접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찍 한국 상류사회 매너를 익혔고, 좋은 의상도 여러 벌 갖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어셔(usher) 역할을 맡았죠. 미모가 처지는 친구들은 접시를 날랐고요(웃음). 헨리 키신저 같은 유명인사들, 아랍 왕족들이 바글바글했어요. 유명인사들을 그렇게 많이, 가까이서 본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식사 시간에 테이블에 12명이 빙 둘러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자꾸 시선이 느껴졌어요. 돌아봤죠. 대머리에 동그랗고 빛나는 눈, 바로 카쇼기였어요.”
카쇼기는 그에게 “파트타임으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영어는 늘었지만 공부가 약간 지겨웠던 그는 “오케이”라고 했다. “나중에 카쇼기에게 왜 나를 불렀느냐고 했더니, ‘네가 동양인이라 눈에 띄는 데다 당신 눈동자가 가장 반짝거렸다’고 하더군요. 세련된 옷차림도 한몫했던 것 같아요.”
―첫 임무는 어떤 것이었나요.
“1976년 6월 그가 첫 연락을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 두 달 동안 심부름을 했죠. 타자를 쳐 서류가 완성되면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 전달하는 게 일이었죠. 밤새 타자를 치긴 했지만 도대체 무슨 단어를 치는지도 몰랐어요. 두 달이 지나면서 미사일 종류, 비행 속도 등 군사용어를 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일 끝나면 미국에 돌아가 학교를 다니다 다시 유럽으로 오고, 그런 생활을 하다 버클리를 3학년 때 중퇴하고 카쇼기의 회사로 자리를 옮겼어요. 이때부터 어깨너머로 무기중개 관련 지식을 얻어듣기 시작했죠.”
![]() |
린다 김이 30대 로비스트로 활동할 무렵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카쇼기가 절 부르더니 ‘종규 박(朴鐘圭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아느냐’고 물어요. 저야 당연히 ‘안다’고 했죠. 카쇼기가 씩 웃으며 ‘그래, 모든 한국인이 다 안다’고 해요. 카쇼기는 유명인사 박종규를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이름자 정도나 알고 있는 걸로 알았었나 봐요. 그런데 박씨는 한국에 있을 때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사람입니다. 카쇼기는 ‘비행기 티켓만 주겠다. 지금 당장 한국에 가서 미스터 박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당시 카쇼기는 한국의 차기전투기 사업에 노드롭그루먼의 F-20 ‘타이거샤크’를 팔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그는 당시 정권 실세인 박종규 전 실장을 접촉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뻗고 있던 중이었다.
기회가 온 걸 직감한 린다 김은 짐을 꾸려 한국으로 갔다. 박종규씨를 만나 “아저씨, 나 좀 한 번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박씨는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는 “지금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나, 빨리 가자, 빨리 가지 않으면 나는 바보가 된다”며 졸랐다. 다음 날 아침, 박씨는 “좋다, 가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막상 박씨를 스위스로 대령하니 카쇼기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설마 20대 여자 아이가 자기들이 1년 가까이 매달려도 대면할 수 없었던 박씨를 데려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저도 카쇼기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인 로비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첫 작품’이 대통령 눈앞에서 추락하고…
![]() |
1996년 9월, 워싱턴에서 열린 암센터 개관행사에 참석한 다이애나. |
“카쇼기 밑에서 일했지만, 본격적으로 뛰어드니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비행기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미친 듯이 매달렸죠. 그러나 무기 제작사의 실수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전두환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한국공군의 마크를 새겨넣은 F-20은 도입 축하 비행을 위해 힘차게 날아올랐다가 뒷날개를 부딪치며 곤두박질해 추락하고 말았죠. 그때의 좌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1년 동안 몸바쳤던 프로젝트가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다니…. 열흘 동안 바하마에서 상사병 난 여자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카쇼기는 “이번 실패는 네 잘못이 아니라 제조사의 잘못”이라며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카쇼기는 그에게 아랍 쪽 전투기 도입 프로젝트를 밀어줬고, 2년6개월 동안 매달린 끝에 거래를 성사시켰다. 최초의 단독 프로젝트였다.
―박종규 전 실장이 도움을 많이 줬나요.
“현직에선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을 통하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만나지 못할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예스, 노가 분명하고 저와 성격도 맞았습니다. 제가 인맥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겉보기엔 차갑지만 인정이 많았던 분이에요. 위자료를 안 받고 당차게 헤어지는 저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줏대가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다이애나 빈(嬪)과의 추억도 이야기했다. 1986년 여름, 영국 왕세자빈 다이애나를 만날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 드레스, 파티는 국제 군사업계의 필수적인 액세서리죠. 영국 판보로 에어쇼에 참가하고 있을 때, 미국 회사 회장이 파리에서 열리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아 주었습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파티가 아니었죠. 문제는 시간이었어요. 비즈니스 정장밖에 없었던 난 다음 날 저녁 열리는 파티를 위해 파리의 단골미용사 ‘아이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죠.”
우여곡절 끝에 아이비를 찾았고, 아이비는 린다 김의 헤어스타일에 맞춰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홀한 광채의 실크 드레스를 준비해 놓고, “트레 비엥(아주 멋져!)”을 외쳤다. ‘프라이비트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였다. 옷값은 12만 달러(약 1억5000만원)였다.
“동양인으로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처럼 치장했죠. 리무진 번호를 확인하고 정문을 통과해 숲길을 5분 이상 달렸어요.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 같은 저택이 나타났죠. 파티는 계속됐고,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키가 훤칠한 여인, 다이애나가 나타났어요. 다이애나는 ‘그 드레스를 누가 디자인했느냐, 아주 잘 어울린다, 어디서 왔나요?’라고 물었죠.
다이애나의 행복한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다이애나는 파티가 끝날 무렵 ‘내일모레 우리 친구 20여 명이 시실리에서 모이는 파티에 린다를 초대하고 싶어요. 린다, 다시 만나요. 친구들이 당신을 무척 좋아할 거예요’라고 했어요.
파리에서 자가용 비행기로 시실리 섬까지 갈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난 ‘영광입니다, 꼭 가겠습니다’라고 답했지요. 1997년 서울에서 만난 지 8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그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피 미사일로 미사일기지 공격했으면…
린다 김이 뜬금없이 기자에게 물었다. “오 기자, 날 어떻게 생각해요?” 기자가 “성격이 쿨(cool)한 편”이라고 했더니 “쿨하다는 것은 좋은 의미네…”라고 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과거 전성기의 파티복 사진들이 담긴 액자를 기자앞에 내놓았다. “젊었을 때 찍은 사진들을 <월간조선>에 실어줄 수 있어요?”라고 했다.
지난 3월 24일 3시간 인터뷰에 이어 이날 장장 9시간의 인터뷰 동안 린다 김은 담배 한 갑을 다 피웠다. 지독한 체인스모커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빼고,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사무실로 배달시켜 먹은 것을 빼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 근성을 가진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녹음기의 배터리도 바닥이 나 꺼진 지 오래다. “저녁식사나 하자”며 기자가 그를 문 닫기 직전의 인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천안함 침몰 소식을 보더니 “북한이 천안함 공격을 했다면 어떻게 할거냐”며, “내가 도입한 무인기형 순항미사일 하피(Harpy)로 북한 잠수함 기지를 작살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밥을 시켜놓고 린다 김이 기자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 부음(訃音) 기사, 기자들이 어떻게 쓸까? 스캔들이나 일으킨 여자로 기록하지는 않을까? 돌이켜보면 난 사랑이든 뭐든 남자복이 없어서 더럽게 애절해요. 이 나이에도 다시 사랑이 불같이 타오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