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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일 대한해협 海戰 승리한 백두산함 秘話 - 57년 만에 유가족에게 돌아온 을지무공훈장

“국가가 끝까지 내 오빠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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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당시의 백두산함 갑판사관 崔英燮씨, 戰死한 全炳翼 일등병조(중사)의 가족 59년 만에 찾아내
⊙ 백두산함 포요원이었던 全炳翼 일등병조, 6·25 발발 직후 부산 상륙 기도하던 북한 무장선박과
    대한해협에서 교전하다 흉부관통상으로 戰死
대한해협 전투에서 전사한 전병익 일등병조.
  2009년 11월 11일, 서울 관훈동 ‘海防兵團(해방병단) 결단식터’ 기념석 앞에서 64주년 해군창설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59년 전에 戰死(전사)한 병사에 대한 훈장이 수여됐다. 유가족이 울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분위기가 숙연했다.
 
  이날 훈장의 주인공은 1950년 6월 26일 대한해협 海戰(해전)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에 전사한 백두산함 승조원 全炳翼(전병익) 일등병조(현재 중사 계급)였다. 전 일등병조는 1952년 12월에 6·25 전투 참전유공으로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는데, 57년 만에 유족이 훈장을 대신 받은 것이다.
 
  이날 기념식에는 전병익 일등병조의 두 여동생을 비롯한 여섯 명의 가족이 참석했다. 훈장을 대신 받은 여동생 全光月(전광월·72)씨와 全月先(전월선·64)씨는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 12세였던 전광월씨는 오빠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거의 잊고 살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난리통에 아들을 잃고 남은 세 아이까지 잃을까 봐 너무 신경을 써서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셨어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어머니가 계속 앓으셔서 가족들이 오빠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 누구도 오빠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요.”
 
  전월선씨는 경찰이었던 큰오빠도 1949년에 공비를 토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전쟁이 나고 얼마 안되어 공산당이 마을을 점령해서 경찰과 군인 가족들은 다 처단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어머니가 셋째 오빠와 저와 여동생을 산속의 상여집이나 집 뒤 방공호에 숨겨 두면서 노심초사하셨어요. 인민군에 부역하고 있던 큰오빠의 친구가 우리를 보호해 주어서 겨우 화를 면했지요.”
 
  전월선씨의 아버지는 일제 때 남양군도에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환했다. 그래서 자매의 나이가 8년 차이가 난다.
 
  “어머니가 2002년 98세로 돌아가셨어요. 두 아들이 못 다한 삶까지 사시느라 장수하신 것 같아요. 어머니 앞에서 일절 오빠들 얘기를 안 하려고 온 가족이 노력하다 보니 50년 동안 집안에서 오빠에 대해 함구했고 자연히 잊고 살았죠.”
 
 
  가족도 잊고 있었던 戰死者
 
2009년 11월 11일 전광월씨는 59년 전 戰死한 오빠 전병익 일등병조를 대신해 무공훈장을 받았다.
  가족도 잊고 있던 전병익 일등병조를 늘 기억하고, 그 가족을 찾고자 애쓴 사람이 있었다.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 승조원 생존인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崔英燮(최영섭·82·한국해양소년단 서울연맹 고문) 예비역 대령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부하 직원의 가족을 찾은 것이다.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65명의 동지가 매년 세상을 떠나 지금 20여 명밖에 안 남았어요. 20년 전부터 전병익 일등병조의 가족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전 일등병조 생전에 고향이 충청도 어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 얘기를 바탕으로 충청도 일대를 여러 차례 헤맸습니다.”
 
  전병익 일등병조는 충북 음성군 소이면에서 출생하여 소이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최영섭씨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2009년 9월 해군본부 역사기록관리단이 생겼다. 최영섭씨는 해군 관계자를 만나 전 일등병조의 인적사항을 넘기며 꼭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해군 관계자들이 옛 자료를 뒤진 끝에 전 일등병조의 호적등본을 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가족이 본적지를 떠난 지 오래되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검사인 아들의 도움으로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전병익 일등병조의 남동생은 2005년에 세상을 떠났고 두 여동생만 생존해 있었다.
 
  2009년 9월 18일 전광월씨는 최영섭씨의 전화를 받고 너무 놀랐다고 한다.
 
  “오빠 이름을 대면서 아느냐고 할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우리 가족은 잊고 있는 오빠를 다른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최 선생님이 오빠의 사진을 건네주었을 때 너무 놀랐죠. 21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오빠의 모습을 보고 통곡했습니다.”
 
 
  군인이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
 
6·25 당시 부산 상륙을 기도하던 북한무장선박을 격침한 백두산함.
  전광월씨는 제복 입은 오빠의 사진을 보니 옛일이 많이 떠올랐다고 했다.
 
  “오빠가 항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했는데, 당시에 엘리트만 해군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행동이 빨라 오빠 별명이 ‘비호’였어요. 우리 동네는 물론 인근 동네까지 오빠가 뛰어난 인재라는 소문이 났었고, 어머니는 그런 오빠를 많이 자랑스러워했죠. 오빠가 군복을 입고 휴가 나왔을 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전광월씨는 오빠의 사진을 받았을 때 어머니가 떠올랐다고 전했다.
 
  “한동안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지내셨던 어머니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안정을 찾으셨어요. 매년 현충일 때면 어머니 혼자 국립묘지에 다녀오셨어요. 나라에서 두 오빠의 연금을 주셔서 어머니가 편하게 사시다가 가셨으니 그래도 돌아가신 오빠들이 효도를 한 거죠.”
 
  전광월씨와 전월선씨는 아예 최영섭씨를 오빠라고 부르며 집으로 초대를 하는 등 자주 만나고 있다.
 
  최영섭씨는 백두산함 승조원들의 단체사진 가운데 전병익 일등병조의 사진을 확대해 늘 수첩에 끼워 다니면서 반드시 가족을 찾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최영섭씨는 뒤늦게라도 전 일등병조의 가족을 찾은 것이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나와 내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 내가 싸우다가 다치거나 죽어도 군과 나라가 내 가족을 돌봐준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영섭씨는 미군이 전쟁터에서 강한 이유는 60년 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심산유곡을 뒤지며 유골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이 새벽 4시에 공항에 나가 아프간에서 전사한 병사의 유해를 직접 맞았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예멘 아덴항에서 알 카에다의 테러로 美(미) 해군 구축함에 타고 있던 해군 17명이 전사하자 장례식 때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 추모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2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 6명이 전사했을 때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축구 구경하러 일본으로 갔고, 전사자의 유해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한 명 없는 가운데 쓸쓸히 대전 현충원으로 떠났습니다. 그날 금강산 유람선은 변함없이 달러를 싣고 북한으로 갔죠.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군복무 기간을 ‘썩는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정권하에서는 군인은 戰意(전의)를 상실하고 사기는 땅에 떨어집니다.”
 
  최영섭씨는 지난 정권 때 군인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더욱 전병익 일등병조의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부하를 지켜주지 못한 상관의 책임을 다하고 유족들에게 전병익 일등병조가 언제 어떻게 싸우다 전사했는지, 그 전쟁과 戰果(전과)가 국가보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장병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눈물의 전투함
 
  대한해협 전투와 백두산함에 대해 아는 국민이 많지 않지만, 해군에서는 대한해협 전투를 대단히 중요한 전승기록으로 인정하고, 백두산함을 이지스구축함 세종대왕함의 원조로 꼽는다.
 
  대한민국 해군은 1945년 8월 21일 조직된 準(준)군사단체 海事隊(해사대)에서 비롯됐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될 때 해군 병력은 3000여 명으로 늘었고 보유 함정 수는 105척(총 1만3000t)이었지만 대부분 장비가 노후해 작전 가능한 배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무장을 갖춘 전투용 함정은 단 한 척도 없었다.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孫元一(손원일) 제독은 참모총장으로부터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월급을 10%씩 공제하여 적립한 돈으로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최영섭씨는 “당시 장교 월급이 쌀 한 말 값도 안됐지만 ‘대포 달린 군함’을 사자며 월급의 10%를 공제했을 때 불만을 표시한 군인이 없었다”고 전했다. 해군 장병들은 성금을 더 내기 위해 고철을 수집하여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해군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이 바느질과 빨래를 하고 양복을 고쳐 번 돈도 보탰다.
 
  해군은 모금한 돈 1만5000달러를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전투함 한 척을 구입해 달라고 청원했다. 당시 外換(외환)사정이 극히 어려웠으나 이 대통령은 國庫(국고)에서 4만5000달러를 내주었다. 총 6만 달러로 함정과 포탄, 포, 연료, 수리비, 인건비를 다 충당해야 했다.
 
  1949년 10월 7일, 미국 뉴욕州(주)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 소위號(호)’라는 실습선을 1만8000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정원 73명, 만재 배수량 450t, 길이 52.9m, 폭 7.06m, 속력은 최고 18노트인 이 배는 몹시 낡아 녹이 많이 슬었을 뿐만 아니라 기관을 움직여 본 지가 2∼3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15명의 해군 인수요원은 배에서 숙식을 하며 미국인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낮에는 페인트칠, 기관수리 등 잡일을 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인 노무자들에게 맡기면 경비 지출이 너무 커서 한국 해군 인수요원들이 직접 잡일을 한 것이다.
 
  3인치 대포를 장착한 이 배를 백두산함으로 명명하고 포탄 100발과 기름을 구입하여 1950년 4월 10일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3인치(76mm)포 1문만 장착했던 백두산함에 50mm 중기관총 2정을 더 설치하여 초계정급인 백두산함을 초계함급으로 승급시키고 승조원들은 해군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로 발탁했다.
 
 
  6월 25일 밤 괴선박과 조우
 
  최영섭씨는 백두산함 승조원들이 우수인력인 데다 한국 최초의 전투함에 승선한다는 자부심이 강했다고 전했다. 그런만큼 전우애도 남달랐다고 한다.
 
  “전병익 일등병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10월에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해군은 나라를 지킨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자원입대한 사람들이었죠.”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초 첫 출항을 하여 부산, 제주, 묵호, 여수, 목포, 군산, 인천항을 방문했다. 성금을 낸 해군들에게 대포 달린 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입항할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백두산함은 항구 순례를 마치고 토요일인 6월 24일 밤 11시30분 진해 기지로 귀항했다.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한 시간 전에 이미 북한 제766 특수부대와 제549 육전대(우리나라 해병대에 해당) 병력이 동해안 옥계 지역에 상륙했다. 해군본부에서 급히 백두산함에 출동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오후 3시에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식량과 기름, 물 등을 싣고 진해항을 출발했다.
 
  백두산함에 기관총탄은 충분히 있었으나 포탄은 100발뿐이었다. 백두산함은 몇 차례 해상훈련을 실시했으나, 포탄이 아까워 실제 사격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백두산함은 동해 쪽으로 항진하여 오후 6시38분,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 등대 우측 3.4km 떨어진 해상을 지났다. 오른쪽 해상을 유심히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의 눈에 갑자기 검은 연기가 보였다. 이때 시각이 6월 25일 오후 8시12분이었다. 연기를 내며 다가오고 있는 선박은 부산 북동방 약 50km에서 침로 190도, 속력 10노트로 南下(남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20여 분 달린 끝에 백두산함은 수상한 선박의 선체를 완전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졌고, 배의 명칭도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함에서 라이트를 이용하여 국제신호 규정에 의거해 30분 동안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되풀이하여 물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발포하라”
 
  밤 11시40분, 장교들은 괴선박을 북한 선박으로 결론 내렸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평화로운 시기에 일본이나 중국의 괴선박이 우리 영해에 들어올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3인치 포탄을 채우고 전투준비를 완료한 백두산함은 최고 속력인 18노트로 괴선박의 오른쪽 90m까지 접근했다. 발광신호의 조명을 이용하여 확인했을 때 뱃머리 쪽 갑판에 85mm포로 추정되는 포 1문과 함교 뒤에 중기관총 2정이 설치되어 있는 게 확인됐다. 당시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북한 선박 갑판에 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꽉 차 있었다고 전한다.
 
  “완전무장한 북한 해군과 상륙특공대 600여 명 정도가 타고 있더군요. 서치라이트로 여러 차례 살펴보면서 확인한 겁니다.”
 
  북한 선박은 소련 해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1000t급의 수송선으로 속력은 10∼12노트, 길이 70m, 폭 10m였으며 배의 앞부분과 가운데에 마스트 2개가 있었다.
 
  북한 수송선은 백두산함이 근접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영섭씨는 당시 북한군의 목적은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용히 지나치기 위해 먼저 사격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25일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은 “백두산함이 접촉 중인 선박이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발포하라”고 명령했다.
 
  최영섭씨는 당시 6·25 전쟁이 발발한 사실을 몰랐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에 대한 신념, 3인치 포를 장착했다는 무장에 대한 신념, 국가에 대한 신념 등으로 자신감이 넘쳤죠. 한마디로 무서운 게 없는 상황이었죠. 분대원들에게 모두 속옷을 갈아입으라고 명령했어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깨끗한 옷을 입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모두 내의를 갈아입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는데 두려운 표정을 짓는 전우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6월 26일 0시30분, 백두산함은 남하하는 적선의 왼편 5km쯤을 항해하며 적선이 外海(외해)로 도망갈 길을 막았다. 백두산함이 다가가자 적선이 급히 소등했으나 舷燈(현등) 하나가 꺼지지 않았다. 이 조그만 현등을 사격목표로 삼았다. 당시 위치는 한쪽으로는 오륙도 등대가, 다른 한쪽으로는 대마도 등대가 보이는 곳이었다.
 
  사격개시 명령에 포술요원들은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당겼고, 동시에 敵船(적선)은 기관총과 85mm 주포로 백두산함을 향해 불을 뿜었다. 백두산함은 적의 조준사격을 피하기 위해 최고속력을 내면서 함교 바로 뒤에 장착한 구경 50mm 기관총으로 적선을 쏘아댔다.
 
 
  “끝까지 함께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최영섭 예비역 해군대령(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전병익 일등병조의 유족. 앞줄 왼쪽이 전광월씨, 그 옆이 동생 전월선씨.
  한 번도 실제 사격을 못해 본 백두산함의 포술요원들이 쏜 포는 계속 빗나갔다. 드디어 한 발이 적선의 앞갑판 아래에 불꽃을 튀기며 명중했다. 20발 가운데 다섯 발이 적선에 명중하자 적선의 옆구리 밑에 큰 구멍이 생겼고 바닷물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적선은 이상이 없다는 듯 계속 항해하며 응전했다.
 
  계속 포탄이 빗나가 근접 사격을 하기로 하고 적선 왼편 900m까지 접근하자 명중률이 높아졌다. 새벽 1시10분경에 적선이 약 20도 정도로 기울어지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포탄이 발사되지 않아 50mm 중기관총으로 마지막 공격을 하려고 함체를 적선에 더욱 가까이 댔을 때 사고가 발생했다. 적의 85mm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의 조타실을 관통하면서 터져 우리 승조원 4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조타수 김창학 이등병조는 배가 터져 내장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조타실의 조타키를 끝까지 잡고 있다가 피를 너무 흘려 의식을 잃었다. 교전 중에 포탄 장전수인 전병익 일등병조는 흉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다. 갑판부의 주포 전화수 김춘배 삼등병조와 기관실의 김종식 소위(해사 3기)도 중상을 입었다.
 
  피를 많이 흘려 갈증이 심했던 김창학 이등병조와 전병익 일등병조는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물을 달라고 간청했다. 최영섭씨는 두 사람이 물을 마신 뒤 눈을 간신히 뜨며 “갑판사관님 적함은 어찌됐습니까?”라고 묻던 일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아직 격침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격침됐다’고 말했죠. 죽어 가면서도 적함이 격침됐다니까 두 사람이 만족한 표정을 짓더군요. 김창학 이등병조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끝까지 함께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모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가슴에 적탄이 박혀 말도 제대로 못하고 힘들게 거친 숨을 내쉬던 전병익 일등병조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더니 눈을 뜬 상태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빠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때 시각이 1950년 6월 26일 새벽 1시30분경이었다. 전월선씨는 오빠의 운명 장면에 대해 자세히 들었을 때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오빠가 그 와중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는 말을 듣고 오빠 대신 훈장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것입니다. 오빠가 자랑스럽습니다. 국가가 끝까지 내 오빠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한해협에서 전사한 두 명의 해군은 진해에 묻혔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전사한 김창학 이등병조는 2003년 ‘5월의 호국인물’에 선정됐다.
 
  해군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을 대단히 중요한 승전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기념행사를 하지 않다가, 1988년에서야 부산에 위치한 해군 제3함대 사령부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구봉산 중앙공원에 대한해협 전승비를 세웠다.
 
  그해 12월 23일,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백두산함 승조원들이 중앙공원에 모였다.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대한해협 해전에서 전사한 전우를 추모하고자 1951년에 한 번 모였다가 37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전승비를 세운 이후 매년 6월 25일이면 해군 3함대는 생존한 백두산함 승조원들을 초청해 기념식을 연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연평해전에서 젊은 병사들이 산화했을 때 백두산함에서 전사한 두 부하가 떠올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스물한 살 생일을 이틀 지나 전사한 전병익 일등병조는 늘 약혼자 사진을 갖고 다니면서 우리한테 보여주었어요. 3개월 후에 제대해 결혼할 거라고 했죠. 온순하고 차분하면서 붙임성이 있는 성격이었어요. 해맑은 그 얼굴이 평생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족을 더욱 찾고 싶었고, 이번에 훈장을 전달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대한해협 해전의 의의를 이렇게 밝혔다.
 
  “백두산함이 북한 괴선박을 침몰시켰기 때문에 유엔군이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무기 화물 장비 군수물자 등 5500만t을 무사히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6월 29일 두 척의 탄약수송선이 약 300만 발의 총포탄을 부산에 보낼 수 있었으며 미 육군 제2사단 21연대 스미스대대 406명이 7월 1일 부산에 들어오고, 이어서 7월 3일 미 21포병대대, 7월 7일 미 24사단이 부산항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산항은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게 한 救國(구국)의 항구요, 대한해협 해전은 부산항을 지켜낸 구국의 전투였습니다. 북한은 6·25전쟁 때 38선과 부산을 동시에 공격하려 했으나 백두산함이 이를 막은 것입니다. <6·25 秘史(비사)>를 쓴 노만 존슨 박사는 대한해협 해전을 ‘6·25 한국전쟁의 분수령’으로 평했습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전병익 일등병조도 호국인물로 추천하여 전쟁기념관에 봉안하는 일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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