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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중 신냉전 시대의 동맹과 안보

한·미·일 동맹 가로막는 정치 세력들의 실체

‘민주당의 통진당화’… 中·北과 더불어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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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사파 운동권, DJ의 ‘젊은 피 수혈’ 틈타 제도권 진출… 현 민주당 성향은 그 귀결
⊙ “한미군사훈련 중단”(민노총 위원장), “간첩단 수사는 철 지난 공안 정국 소환”(민주당)
⊙ “용공조작은 없었다. 통혁당 사건 등은 남한변혁운동의 피어린 발자취”(1980년대 운동권 교육)
⊙ 노무현-문재인 정권 거치면서 자기 확신, 대결의식 격화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더불어민주당은 3월 7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 규탄,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을 개최했다. 사진=조선DB
  4월 5일 전북 전주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진보당 강성희 후보가 당선됐다. 2위는 무소속의 임정엽 후보였다. 그런데 임 후보는 사실상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다. 전주을 재선거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이상직 전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진 선거였다. 때문에 민주당은 후보를 공천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러자 민주당 소속이었던 임정엽 후보가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었다.
 
  국민의힘 후보는 8% 득표로 후보 6명 중 5위에 그쳤다.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 득표율의 절반 정도였다. 하지만 낙선은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지역’의 재확인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민주당 후보인 임정엽의 낙선과 진보당 후보의 당선은 간단찮은 문제다. 진보당은 2013년 8월 28일 내란음모 사건으로 이석기 등이 체포되고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통진당)의 후신이기 때문이다.
 
  전주을에서 당선된 진보당 강성희 후보는 2014년 전북 완주군 군의원 선거에 바로 그 통진당 후보로 출마했던 인물이었다. 통진당의 이석기 등이 내란음모로 체포되고 그 혐의로 위헌정당 해산 심판이 진행 중이던 때였다. 게다가 강성희는 이석기의 대학 직속 후배이기도 하다.
 
 
  민노총 후보의 승리
 
  전주을 선거전이 진행될 당시 임정엽 후보는 3월 28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 점을 문제 삼아 진보당과 강성희 후보를 공격한 바 있었다. 임 후보는 “많은 시민이 운동권 정당이, 주사파(主思派) 정당이 전주를 점령했다고 불안해한다”며 “타지(他地)에서 몰려든 운동권 1200여 명이 전주 거리와 골목까지 장악했다”고 했다. 아울러 “지금 전주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진보당 당원들로 점령당했다”며 “전주 발전을 이끌 인물을 뽑는 재선거에 왜 전국의 운동권 당원들이 전주를 점령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덧붙여 임 후보는 “전주를 반미(反美)투쟁기지로 만들 수 없다.… 우리 자식들을 반미운동권 자녀로 키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때늦은 우려요 탄식이었다. 위험은 예전부터 이미 현재진행형이었다. 임 후보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소속된 민주당의 전통적 세력 스스로가 이런 위험을 자초했다. 민주당의 전통 세력들이 이념적 경각심 없이 지역 기반에만 편승한 정치를 해오는 동안 그 지역의 성향 자체가 통진당 출신을 당선시킬 만큼이 돼버린 것이다.
 

  한편 강성희 후보의 당선은 민노총 후보의 당선이기도 하다. 그는 현대차 전주공장 비정규직 지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현재는 민노총 산하 서비스산업노조연맹 택배노조 전북지부 사무국장이다. 민노총은 강성희를 민노총 후보로 공식 지지했다.
 
  4월 5일 함께 치러진 울산의 교육감 보궐 선거도 그랬다. 민노총은 전교조 출신의 천창수 후보를 공식 지지했다. 그리고 천 후보가 당선됐다. 그런데 그의 이력은 교사만이 아니었다. 그는 민노총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천창수 교육감은 현대차 울산공장 노조를 지휘하는 민노총 금속노련 울산본부 본부장을 지냈다.
 
  민노총과 그 동조 매체들은 “4·5 재보궐 선거에 출마한 민주노총 조합원이자 지지 후보가 전원 당선됐다”고 자축했다. 이러며 “노동자 정치 세력화로 한걸음 더 나아가자”고 했다. ‘어떤 정치’로 ‘어떤 세력화’를 하겠다는 것일까? 반미투쟁을 앞세우고 통진당처럼 하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실제로 민노총은 반미종북의 행태에 거리낌이 없다.
 
 
  민노총의 反美 선동
 
2022년 8월 13일 열린 ‘8·15 전국노동자대회 및 자주평화통일대회’에는 ‘한미연합 군사연습 중단’ ‘한미일 군사협력 반대’ 등의 구호가 등장했다. 사진=뉴시스
  2022년 6월 11일 민노총은 시청역 앞을 점령하고선 ‘효순 미선 20주기 반미자주 노동자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종속적 한미관계 끊어내자” “주한미군 몰아내자”는 등 반미구호가 난무했다. 같은 해 8월 13일에는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한미동맹 해체” 등을 주장했다. 북한 노동당의 통제를 받는 조선직업총동맹(조선직맹)이 보내온 연대사(連帶辭)도 읽었다. 전교조 소속인 오은정 통일위원장이 대독(代讀)했다. “미국과 남조선의 윤석열 보수 집권 세력은… 침략 전쟁 연습을 광란적으로 벌려 놓고 있으며,… 북침을 겨냥한 대규모 합동 군사 연습을 강행하려 한다.… 온 겨레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내는 내외 반통일 세력의 대결망동을 단호히 짓뭉개버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무분별한 망동과 북침 전쟁의 하수인이 돼 날뛰는 (남한) 보수 집권 세력의 추악한 친미 사대와 북남 대결 책동에 준엄한 철추(철퇴)를 내려야 한다”고도 했다.
 
  당시 양경수 민노총 위원장은 북한의 이 주장 그대로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이쯤 되면 ‘종북 앵무새’다. 이런 민노총이 이번 4·5 재보궐 선거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노총과 관련한 간첩 사건도 있었다. 지난 1월 18일 국정원과 경찰은 서울의 민노총 본부와 보건의료노조본부 그리고 광주의 기아자동차 노조 등 10여 곳을 동시에 압수수색했다. 혐의는 민노총 전·현직 간부 등 4명이 2017년 캄보디아 프놈펜,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것이었다.
 
 
  간첩 수사 방치한 문재인 정권
 
  ‘민노총 관련 간첩 사건’은 최근 연이어 적발된 청주·창원·제주 등의 간첩단 사건과는 또 다른 별개의 사건이었다. 이 외에도 간첩단은 계속 적발되고 있다. 어지러울 정도의 간첩단 창궐이다. 북한은 이제 남파간첩을 직파할 필요도 없다. 기회만 닿으면 직접적으로 포섭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발적인 종북 세력이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종북좌경화 경향이 심화되고 나라 전역 온갖 영역에 만연해간 결과다.
 
  더불어민주당은 연이은 간첩단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삼갔다. 하지만 공식 논평은 없었지만 일부 의원과 문재인 정권 인사들은 간첩단 수사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 저항”이라고 했다. “철 지난 공안 정국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고도 했다. 적반하장이다.
 
  2011~17년 간첩 적발 건수는 26건으로 연간 4건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당시에는 전 기간 동안 청주 간첩단 3명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박근혜 정부 시절 인지해 수사 중이던 사건이었다. ‘방치’라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재인 정권은 이른바 국정원 개혁을 내세우며 2020년 12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은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답은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 스스로 이미 다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권 시절 보여준 행태 자체가 통진당 못지않았다. 이런 가운데 나라 전역의 온갖 영역에서 위태로운 일들이 빈발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반공 정체성 지켰던 정통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공간 당시의 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뿌리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간단찮게 갈등을 빚기는 했다. 하지만 공산좌익 세력에 맞서며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의 위업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한민당을 이은 민주당 세력은 박정희 시대 내내 박 정권에 맞섰다. 그러나 그럼에도 민주당 세력은 우파로서의 기본 정체성(正體性)은 지켰다.
 
  그런데 우익 정당인 한민당을 뿌리로 하고 그 맥을 이은 당이 이제는 좌익 정당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적 경과와 굴곡을 거치는 동안 이렇게 되어 갔다. 그 양상을 1971년 대통령 선거전의 모습에서부터 따라가 보겠다. 더 이전부터도 있지만 당시 대선(大選)에서부터 좀 두드러져 보이는 대목이 이어진다.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4대국 안전보장론과 대중경제론을 들고나왔다. 4대국 안전보장론은 한미동맹을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대중경제론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종속이론이라는 좌파 이론의 아류(亞流)였다. 그럴 만했다. 김대중 후보 명의의 《대중경제론》의 실제 저자는 소년 빨치산 출신으로 좌파 성향이 여전했던 박현채였기 때문이다.
 
  신민당은 1972년 이후 유신 시대에 박정희 정권에 강하게 맞섰다. 반유신 민주화투쟁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서 좌경(左傾) 세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싹의 발호는 이미 그 이전부터였다. 1964년 인혁당 사건, 1968년 통혁당 사건은 명백한 친북좌익공산 세력의 사건이 있었다. 1974년의 2차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었다. 용공(容共)조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이른바 민주 인사들의 상당수는 이 점을 헤아리지 못했다. 민청학련 사건 당사자들 상당수도 그 배후의 인혁당을 모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은 좌익 정당이 되지는 않았다. 신민당의 이철승은 해방공간 당시부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만큼 ‘안보와 반공’에 있어선 박정희 정권에 확실히 협조했다. 김영삼도 박정희 정권에 강경하게 맞섰지만, 좌익은 아니었다.
 
 
  “용공조작은 없었다”는 고백
 
  그러나 이른바 재야 민주 세력 속에선 좌경화가 만만찮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학생운동도 그랬다. 공단의 야학운동, 농민회운동도 그랬다. 교회에서는 민중신학이라는 게 등장했다. 해방신학을 베낀 것이었다. 리영희 등의 책도 나왔다. 1979년 남민전 사건은 이런 좌경적 흐름의 연장선에 있던 공안 사건이었다.
 
  남민전 관련자들은 2006년 노무현 정권 당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남민전의 주도 인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獄死)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 모두가 친북좌익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으로서도 주동자인 이재문과 신향식은 민주화운동가로 인정할 수 없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서울의 봄’이 있었다. 민주화의 열망이 들끓었다. 그러나 돌연 찾아온 봄은 전두환 정권의 수립으로 좌절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진영의 좌경화 흐름이 격화돼갔다.
 
  전두환 정권 시대 학생운동권은 특히 완연하게 좌익운동이 되었다. 1970년대 반유신 시대만 해도 좌익 이론 학습은 나름 은밀했다. 그러나 전두환 시대 386세대 학생운동권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은 공공연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지하서클’만이 아니라 공개된 학과별 과학회(科學會)와 ‘오픈서클’에서도 공공연히 좌익 이론 학습이 이루어졌다.
 
  서울대의 경우 ‘5대 패밀리’ ‘10대 서클’로 불리는 학생운동 핵심 지하서클들은 이렇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으로 각종 좌익 이론을 학습함과 아울러 선배로부터 ‘한국의 변혁운동사’를 배웠다. 선배는 이렇게 가르쳤다.
 
  “용공조작은 없었다. 박정희 시대의 4대 공안 사건인 인혁당·통혁당·해방전략당·남민전 등은 모두 남한변혁운동의 피어린 발자취이다.”
 
 
 
운동권 주류, 본래 親北

 
  이렇게 배운 이들은 이다음의 후배들에게 또 이렇게 똑같이 가르쳤다. 그리고 ‘5대 패밀리’로 일컬어진 핵심 서클들은 각각의 서클의 역사 또한 자랑스럽게 학습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 전후 시기의 좌익운동에 맥이 닿는다는 것, 그리고 인혁당이나 통혁당 관련 인사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빨치산 출신 박현채와 통혁당의 신영복 등이 떠받들어진 데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학생운동권은 그러면서 내부적으로 노선투쟁을 벌이고 이론투쟁도 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덧 노선투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확장되고 MT(민투), CA(제헌의회파) 등 급진적인 흐름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주류(主流) 세력을 자부한 MC(Main Current)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민주화운동을 앞세우는 노선을 일단은 고수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MC가 온건파인 것은 아니었다. MC는 본질적으로는 오랜 뿌리를 갖는 민족해방, 즉 NL 노선을 내면화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MC의 노선은 말하자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선행(先行)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민주화를 앞세워 정권을 타도하고 이어서 북한과 손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분단체제를 무너뜨린다는 것이었다. 이게 민족해방이었다. 이것은 사실 북한이 일찍이 제시한 노선과 동일했다. 386운동권의 종북 노선은 1980년대 중반 ‘강철서신’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대두된 게 아니다. 운동권 주류 세력은 본래가 친북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단지 조심스럽게 삼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PD(민중민주)는 MC 계열 가운데 한 세력의 재정립이었다. PD는 노동운동에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던 세력의 연장선에 있기도 했다.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했다. 직접적인 친북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민주화운동의 중요성도 인정했지만 그것을 넘어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역량 강화를 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운동권 투쟁은 민주화운동 아니었다
 
동구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전대협 등 운동권은 ‘민족’을 내세웠다. 1991년 8월 12일 경희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개막식. 사진=조선DB
  그런데 주사파가 대두되고 운동권 내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돼가면서 운동권 내부에서 격변이 있었다. MC 계열은 주사파에 주도권을 넘겨줬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지만 그럴 만한 귀결이었다. NL이며 친북이라는 본질에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운동권 내 노선 대립은 NL 주사파 대(對) PD로 정리돼갔다. PD 계열은 노동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반면 NL 주사파는 김일성주의 추종을 노골화하면서도 ‘민주화’를 당면과제로 하여 대중 노선을 내걸고 학생운동을 장악해나갔다.
 
  이렇게 하여 학생운동권에서 NL 주사파의 주도권이 확립돼가는 가운데 1987년이 왔다. ‘6월 항쟁’이 있었다. 이어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이 있었다. 그런데 6·29선언이 있은 뒤인 1987년 8월 전국적 학생운동 조직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결성됐다. 전대협의 발족 선언문은 ▲ 외세 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에 기여 등을 내걸었다. ‘외세 배격’과 ‘자주’는 북한이 늘 앞세우는 상투적 구호였다. 전대협의 노선은 NL 주사파 노선이었다.
 
  당시 운동권의 투쟁은 결코 단순한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PD와 NL 등 노선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분명한 좌익혁명운동 세력이었다. 하지만 87체제가 수립되어 ‘민주화운동’이라는 프레임이 시대를 지배하는 ‘정치적 훈장’이 되면서 더 이상 그 점을 문제 삼을 수 없게 돼갔다. 때로는 또 다른 훈장의 행세를 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87체제 시대는 민주화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운동의 흐름이 사회 도처로 공공연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좌경화의 창궐(猖獗)이 만연하기도 했다. 1987년 대선은 야권 분열로 인해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어떻든 운동권의 핵심 분자들은 이념적 확신을 그대로 가진 채 도처의 각 영역으로 퍼져갔다.
 
 
  주사파의 운동권 장악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된 소련 동구 사회주의권의 와해가 이 같은 흐름에 동요를 가져오기는 했다. 당시를 계기로 운동권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수는 그대로 ‘운동’을 이어나갔다. 굳어진 습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아이러니한 양상이 있었다. 주사파 계열의 경우 운동을 떠나거나 전향(轉向)을 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한 PD 계열의 입장에선 소련을 필두로 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이념적 직격이었다. 하지만 주사파는 이념적·심리적인 탈출구가 있었다.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였다.
 
  김일성주의는 단지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을 내걸고 있었다. 이것을 상징화한 기치가 ‘우리민족끼리’다. 주사파는 애초에 사회주의를 이론적으로 심도 깊게 학습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다. 때문에 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이론적 고민 자체가 별로 없었다. 민족이 중요했고 감성이 중요했다. 주사파의 입장에선 북한이 존재하는 한 자신이 그간 고수해왔던 것들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더욱더 북한에 집착하게 되기까지 했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운동권 전체적으로 주사파는 더욱더 다수가 돼버렸다.
 
 
  김대중의 ‘젊은 피 수혈’
 
2003년 8월 10일 남북경협 지속 발전을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전대협 출신 새천년민주당 정치인들. 이들 대부분은 제16대 총선 당시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됐다. 사진=조선DB
  그런데 이 같은 양상은 운동권 출신의 정치권 진입과 관련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갖게 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은 이른바 ‘젊은 피 수혈’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시 30대였던 386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다. 물론 그전부터도 운동권 출신들의 정치권 진입은 계속 있었다.
 
  운동권 출신들이 결국에는 통속적 출세 지향을 택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권 주류 세력의 오래된 전략적 선택이었다. 제도권 정당에 거점을 만들라는 지침이 있었다. 그래서 김영삼 쪽으로 향하는 것도 굳이 터부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김대중 쪽으로 간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 상당 정도가 학생운동권의 본래 주류인 MC 계열에서 NL 주사파 성향의 전대협 출신으로 이어지는 부류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이미 운동권 내부는 NL 주사파가 다수였다. 그리고 PD 계열들은 본래 노동 현장 진입을 기본으로 했다. 그리고 정치권 진출도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위한 노동당 건설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래서 기존 정당 특히 김대중의 민주당으로 진입한 것은 결국 NL 주사파 성향의 세력이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성향은 그 귀결이다.
 
  운동권 시절 가졌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PD든 NL이든 마찬가지다. 변화하고 발전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개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운동권 당시의 사고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NL 주사파 출신들은 그런 경향이 더했다. 물론 그들도 동요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위축 정도였다.
 
 
  中·北과 더불어
 
  그런데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까지 연이어 집권에 성공하게 되자 그나마의 조심스러움도 사라지고 자신들이 결국 근본적으로는 옳았다는 확신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이런 경향은 정치권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별달리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들이 새삼스레 들뜨고 과격해지는 양상도 나타났다.
 
  그러다가 정권을 잃고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시절을 거치게 되자 대결의식이 격화됐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의 민주당을 이은 새정치민주연합은 2015년 12월 28일 문재인 당시 당대표의 주도로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왜 하필이면 ‘더불어’민주당일까?
 
  어떻든 그 ‘더불어’의 대상에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골수 세력 외의 대한민국의 최소한 절반 남짓에 달하는 자유민주 지향의 국민들은 배제돼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선동으로 기회를 잡아 정권을 탈취한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정권 시절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더불어’의 대상에는 일본은 물론 미국도 빠져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더불어당은 그러면서도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능멸하는 중공(中共)과 핵과 미사일로 끊임없이 우리를 도발해대는 북한과는 더불어 가고자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문재인 시절 통진당을 닮아가더니 이재명 때에 이르러서는 ‘좌경화’와 ‘범죄적 행태’가 한 덩어리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좌익 세력은 이런 행태가 드물지 않다. 원리주의적인 좌경적 확신이 양심을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좌익은 그래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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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ong0918    (2023-05-01) 찬성 : 3   반대 : 0
주사파들의 민주화운동 운운은 명확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었나? 아니면 사회주의 민주화 운동이었나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무조건 민주화운동 이라고 얼렁 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다.
  김철수1917    (2023-04-30) 찬성 : 3   반대 : 0
친중 좌파의 반일 반미투쟁은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친중 반역으로 또한번 의자왕과 백제를 중국에 갖다바치겠다는 1500년전 친중 좌파세력과 다르지 않은 듯. 좌파 공산당이 일으킨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침공이 성공했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중국의 일부가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던 듯. 좌파 사회주의는 단순히 정치 이념이 아닌, 가장 위험한 국가와 민족 반역세력으로 보아야 할 듯.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잘 드러나 있으며 조선족을 중화족의 일부로 보고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보고 있다. 러시아판 동북공정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 국민주권과 정체성을 부정한데서 출발한 것으로 국내 러시아 전문가들조차 이 전쟁을 푸틴 일파에 의해 벌어진 전쟁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 역대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중국에 대해 대한민국의 생존전략은 1500년전 신라가 그러하였듯이 대내적으로 친중 좌파 세력을 청산하고 첨단 산업기술과 군사기술로 중국을 압도하는 것일 듯. 신라는 당시 첨단 산업기술 나침판을 당나라에 수출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무역도시를 운영하였고 당나라 최정예 기마 10만마리, 기마병 20만 대군을 최신 군사기술로 격파 섬멸하고 적군이 버리고 도망간 기마 5만마리를 노획하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정도 1500년과 다르지 않은 듯.
  임도순    (2023-04-30) 찬성 : 16   반대 : 0
종북좌파들아 너희들이 그렇게 칭찬하고 존경해 마지않던 정은가 우리나라애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느냐? 미사일 이니 핵실험이니 끊이질 않고 있지 않느냐? 믿음놈이 없어서 이놈을 믿는다고 한미일 훈련을 그만 두자고 하는 거냐? 모두들 적군을 이롭게하는 이적죄로 처벌하고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 그리고 꿈에도 기리는 북으로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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