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

“마산이 무너졌으면, 대한민국 없었을 것”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km, 國道 50km… 美 25사단이 방어”
⊙ 高地 주인이 19번 바뀐 서북산전투
⊙ 서북산에서 전사한 로버트 티몬스 대위… 아들은 8군 사령관, 손자는 2사단 대위로 3代에 걸쳐 한국 방위
⊙ 전적지 발굴 작업…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시신, 인식표 찾아서 돌려보내고 싶어”
사진=배진영
  “배 기자, 서북산전투라고 들어봤어요? 6·25 때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라는데…”
 
  지난 9월 어느 날 저녁,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어온 조전혁 전 국회의원이 한 말이다. 서북산전투? 생소했다. 조전혁 전 의원이 설명했다. 6·25 당시 낙동강 교두보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마산 일대는 미(美) 25사단이 담당했는데, 그때 마산이 뚫렸으면 부산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고, 대한민국도 보전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산방어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가 서북산전투였다는 것, 그 중요성에 비해 마산방어전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마산 지역 인사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배대균(86) 박사. 마산에서 53년째 배신경정신과의원을 하고 있는 의사이다. 군의관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예비역 해군 소령이기도 하다. 배 대표는 《마산방어전투;미 25보병사단 마산방어전투실화 번역집》 《마산방어전투 루트를 찾아서》(배대균·손담 공저) 등의 책을 내는 등 마산방어전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오다가 지난 9월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상임대표를 맡았다. 10월 2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배신경정신과의원에서 배 대표를 만났다.
 
 
  6·25의 기억
 
미 25사단 전투일지를 번역한 배대균 대표의 《마산방어전투》.
  ― 어떻게 해서 마산방어전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6·25가 일어났을 때 진해공립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마산 쪽에서 들려오던 포성(砲聲), 마산전투에 대한 뉴스에 귀 기울이던 기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집이 진해비행장 바로 옆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미(美) 18전투비행단이 들어왔어요. 적 게릴라가 비행장을 기습하러 와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어요. 비행기들이 밤낮없이 출격하던 모습, 비행기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던 모습, 비행기가 비행장에 동체(胴體) 착륙하던 모습들이 기억납니다. 불과 1시간 전에 출격했던 비행기가 거의 부서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도 보았고….
 
  그런 기억 때문에 군(軍) 복무하면서 마산전투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았더니, 의외로 자료가 없더군요. 전사(戰史)편찬위원회 자료도 찾아보았는데 별로 없었고…. 몇 년 전 한미친선 모임에서 진해에 와 있는 미 해군고문단 관계자들과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 국가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에 제25사단 관련 자료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6개월 후에 미 25사단 전투일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A4 용지 500여 장 분량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그렇게 세세한 기록을 남기다니 미국 사람들은 참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걸 번역해서 작년에 《마산방어전투;미 25보병사단 마산방어전투실화 번역집》(청미디어 펴냄)을 내놓았습니다.”
 
  ― 마산방어전투는 어떤 전투였습니까.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마산시(현재는 마산합포구) 진동·진북·진전면과 함안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합니다. 미 25사단(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한국 육군의 민(閔)부대(민기식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림),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해병대, 최천 총경이 이끄는 전투경찰대 등이 함께 싸웠습니다.”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
 
북한군 6사단장 방호산(왼쪽)과 미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 마산방어전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km, 국도(國道)로 50km밖에 안 됩니다. 부산까지 1시간 거리였죠. 당시 마산을 방어하던 부대는 미 25사단뿐으로 별도의 예비대가 없었습니다. 만약 마산이 무너졌다면, 부산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낙동강 방어선. 방어선의 서남부는 미 25사단이 담당했다.
  당시 마산으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6사단(사단장 방호산)이었습니다. 북한군 6사단은 원래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군 166사단으로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북한군 6사단은 7월 31일 진주를 점령하고 다음 날인 8월 1일에는 마산과 함안의 고지대를 이미 점령했습니다. 부산 공략은 시간문제였죠. 반면에 마산 방어 병력은 7월 31일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 19연대와 29연대, 미 25사단 27연대로 전력(戰力)이 심하게는 절반 수준으로 격감한 상태였습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대구 북방 상주에 있는 미 25사단을 8월 1일 새벽 240km 떨어진 마산으로 급히 이동시켰습니다. 이 ‘기적의 대이동’ 이후 미 25사단은 마산방어전투의 주역이 됩니다.”
 
  그렇게 중요한 마산방어전투가 왜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것일까? 이는 당시 낙동강 방어를 담당했던 부대 배치도를 보면 이해가 간다. 오늘날 대구·경북에 해당하는 낙동강방어선의 동북부를 담당한 부대들은 국군 1사단, 3사단, 수도사단, 6사단, 8사단 등이었다. 반면에 달성에서 진해를 잇는 방어선의 서남부는 미 기병1사단, 24사단, 25사단 등 미군 부대가 담당했다. 때문에 1사단(사단장 백선엽)의 다부동전투 같은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마산방어전투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떨어진 것이리라. 같은 마산방어전투 가운데서도 해병대가 치른 진동리전투나 이후의 통영상륙작전 같은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8월 6~7일 제1차 진동리전투에서의 승리로 해병대는 미 25사단장 킨 소장으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격찬을 받았고, 이후 ‘귀신 잡는 해병’은 해병대의 구호가 되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마산방어전투는 미 25사단의 전투나 국군 부대들의 전투 모두 전사(戰史)연구 차원에서는 충분히 연구되어 있다”면서 “다만 미 25사단이 주역이었고, 국군 부대들도 미 25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홍보가 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서북산전투와 티몬스 대위 3代
 
창원 학동저수지에서 바라본 서북산. 사진=배진영
  ― 마산방어전투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전투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북산전투입니다. 서북산은 경남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과 진전면을 경계 지우는 740m의 준봉(峻峯)입니다. 정상에 오르면 북동쪽은 함안군, 남서쪽은 진동면·진북면, 서쪽은 진주가 훤히 바라보이는 요충(要衝)이죠. 미 25사단과 북한군 6사단은 8월 3일부터 9월 20일까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 바뀌는 격전(激戰)을 벌였습니다.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서북산 정상은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고 높이가 몇 미터 낮아지기까지 했는데, 그래서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이라고 했습니다. 미 공군기가 쉴새 없이 네이팜탄을 퍼부었다고 해서 ‘네이팜산 언덕’이라고도 했고,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벌일 때마다 미군이 ‘갓 뎀 잇(God damned it)’을 연발했다고 해서 ‘갓뎀산’,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고 해서 ‘전투산’, 아군과 적군의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고 해서 ‘피의 고지’라고도 했습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의 흉상.
  배대균 대표는 “서북산전투와 관련, 꼭 기억해야 하는 이름이 있다”고 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미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으로 8월 23일 서북산전투에서 100여 명의 중대원들과 함께 고지를 지키다가 전사(戰死)했습니다.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군인이 되어 1995~1997년 주한 미 제8군 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서 근무했습니다. 티몬스 중장은 재직 중 아버지가 전사한 서북산을 찾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의 손자(리처드 티몬스의 아들)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1997년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는데, 몇 년 전에 준장으로 진급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이후에 진급한다면 언젠가는 8군 사령관으로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3대(代)에 걸쳐 대한민국에 자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기억되고 있다. 육군 39사단은 1995년 12월 서북산에 그를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경남 함안군도 2016년 함안면에 호국공원을 조성하면서 티몬스 대위의 흉상을 건립했다. 국가보훈처는 작년 11월 ‘11월의 전쟁영웅’으로 로버트 티몬스 대위를 선정했다.
 
 
 
전투 흔적들 발굴

 
직접 발굴한 6·25전쟁 당시의 실탄과 파열된 총열 등을 들어 보이는 배대균 상임대표. 사진=배진영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부터 준비 모임을 갖기 시작, 지난 9월 6일 정식 출범했다. 배대균 원장이 상임대표를, 김경환 (사)ROTC 경남지구 부회장이 사무총장을 맡았다. 기업인, 대학교수 등 지역 내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 앞으로 기념사업회는 어떤 활동을 할 계획입니까.
 
  “우선 내년 6·25전쟁 72주년에 즈음해서 미 25사단 생존자 5명과 그분들을 에스코트할 분 10명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또 39사단과 함께 마산방어전투에 대한 학술 세미나를 열고자 합니다. 그리고 티몬스 대위 3대의 이야기를 비롯해 마산방어전투와 관련된 스토리들을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만들어 널리 알리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하와이에 있는 미 25사단을 방문해 감사패를 전달하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대균 대표는 5년여 전부터 틈나는 대로 뜻있는 이들과 함께 마산방어전투 전적지를 찾아서 전사자들의 유품 발굴 작업을 해왔다. 배 대표의 말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시신, 그게 어려우면 인식표라도 찾아서 돌려보내고 싶어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아군이나 적군의 총알 탄피, 실탄, 수류탄 파편, 철모, 군복 단추, 버클, 이런 것들은 많이 나오는데, (한숨을 내쉬며) 유골은커녕 인식표도 아직 못 찾았어요.”
 
  배 대표는 그동안 발굴한 물품들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건 인민군 장교의 어깨띠 버클, 이건 파열(破裂)된 따발총 총열, 이건 미군 군복 단추, 이건 인민군 모젤 소총탄 탄피, 이건 M-1 소총 탄환…”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는 협조가 있습니까.
 
  “유해발굴감식단에도 알아보았는데, 그동안 마산방어전투와 관련해서 유해를 발굴한 것은 아직 없다고 합니다. ‘같이하자’는 말은 하면서도 아직 구체적인 진전은 없어서 아쉽습니다.”
 
  배대균 대표는 “무엇보다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두 달여 동안 그렇게 피를 흘려가면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전투임에도 이렇게 기록이 없고, 관심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의 아들딸들이 외국에 나가서 그렇게 죽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시민들이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하자고 나서는데,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美 25사단 전투일지로 본 마산방어전투
 
  마산교도소 수감자들 폭동 기도
 
  ⊙ 적군, 부랑자로 변장하고 통신소 파괴
  ⊙ 방첩대, 적군에게 미군 이동·집결 정보 제공하던 12세, 14세 아이들 체포
  ⊙ 한국 학생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깊게 침투되어 있어
  ⊙ 일부 한국군, 변절해서 인민위원회에 협조
 
미 5연대 전투단이 마산 진전면 인근의 전선에서 적진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사진=《마산방어전투》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대표가 작년에 펴낸 《마산방어전투;미 25보병사단 마산방어전투실화 번역집》은 마산방어전투 당시 미군의 전투일지를 번역한 것이다. 기록자는 사단 군사기록관 잭 펜케이크 소령으로 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예하 연대의 전투상황, 해·공군의 지원내용, 한국군(카투사) 배속, 한국 관공서나 경찰과의 업무 협조 등에 대한 것들이어서 무척 무미건조하다.
 
  다만 남한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되거나 자원입대한 의용군,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선에 출몰하는 부랑자나 게릴라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롭다. 북한군이 12세, 14세짜리 소년들이나 미군 부대 노무자들을 첩자(諜者)로 활용했다거나, 전 마산교도소 교도관들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수감된 자들이 무기를 입수해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든지, 일부 한국군 부대가 변절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조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한 내용들을 소개한다.
 
마산방어전투의 주역 美 제25보병사단은 어떤 부대인가?
  -하와이 주둔 부대로 과달카날 전투 치른 ‘熱帶의 戰士’

 
  마산방어전투의 주역이었던 미(美) 제25보병사단은 하와이에 뿌리를 둔 사단이다. 1921년 하와이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하와이사단’이 1941년 제24사단과 제25사단으로 분리되면서 탄생했다. 6·25전쟁 당시 제24사단은 창녕전투, 제25사단은 마산전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25사단은 과달카날 전투 등을 치르면서 ‘열대(熱帶)의 전사(戰士)’라는 호칭을 얻었다. 이후 필리핀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일본 오사카에 주둔했다. 6·25전쟁 발발 뒤 한국으로 파병되자 당시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대’의 핵심으로 마산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 철의 삼각지 전투, 펀치볼 전투 등을 치렀다. 1954년 한국에서 철수, 하와이로 복귀했다. 월남전쟁, 걸프전쟁(1991년), 아이티 민주화지원작전(1995년), 보스니아 평화유지작전(2002년), 이라크전쟁(2004년), 아프가니스탄전쟁(2004년)에도 참전했다.
 
  안전통행증, 적군 수중에 들어가
 
미 25사단 부상병들이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마산방어전투》
  - 한국인 근로자들이 분실한 안전통행증이 적군들 수중에 들어가고 그들은 아군 전선 앞에서 어른거린다. 미군들은 그것을 가려내기 위하여 검문한다. 짐꾼들은 안전통행증을 가지고 전선은 물론 포로수용소까지 넘나들 수 있다. (1950년 8월 9일)
 
  - 8군 사령부는 민간인 흰옷을 입고 전선으로 달려오는 적군을 붙들어 조사하고 절차상 본부로 보냈다. (1950년 8월 14일)
 
  - 적군 83기계화연대의 포로 약 3분의 1은 중공군 제8보병(팔로군을 말하는 듯-기자 주)이다. 그들은 전부 이북 사람들이라고 우겼다. (1950년 8월 16일)
 
  - 적은 5연대와 24연대 경계선을 따라 계속적으로 공격해왔다. 한 포로는 서울에서 강제 모병 되고, 알 수 없는 공장에서 시키는 일을 했으며, 민간인 10명에 2명의 무장군인의 비율로 2000명이 서울에서 10일간 밤에 행군하면서 수류탄을 운반했으며, 그 후 군인이 되어 이곳으로 왔다. (1950년 8월 23일)
 
  - 전투가 한창일 때 적군은 투항하는 듯 백기를 들어 올렸다. 트릭이었다. 한순간에 해치우고 강력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백기의 진실을 어긴 자들에게 벌을 준 것이다. 정찰대는 20명을 사살하고 2명의 포로와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또 다른 적은 강을 건너면서 투항하는 속임수를 썼다. E중대 정찰대는 자동화기로 끝장내버렸다. (1950년 8월 25일)
 
  - 전투 지역과 후방의 피란민 통제와 후송 문제가 심각하다. 후방에서 작고 큰 문제들이 거침없이 일어나고, 작전 수행에 큰 장애물이다.… 전선 전반을 정찰한 결과 적들은 포격이 불가능하게 마을 주민들 속에 침투해 있었다. 마을 입구에 지뢰를 매설하고 보급품을 마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놓았다. (1950년 8월 26일)
 
 
  12세짜리 첩자
 
미 35연대 병사들이 노획한 인공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마산방어전투》
  - 대대 정보연락장교는 2명의 한국군 연락장교를 대동한 후 중리 근방의 부랑자들을 걸러내는 일을 시작했다. 부랑자들은 경찰과 군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군 주둔지 부근을 배회하고 있으며, 전투가 있기 전에 연대는 지정한 장소로 보내도록 했다. (1950년 9월 2일)
 
  - 25수색중대와 한국 해병은 사단 존 주위의 게릴라와 부랑자들을 탐색하고 분쇄했다. 적군들이 부랑자로 변장해 있었다. 그들은 통신소를 파괴하고 전투장을 흔들어놓았다. (1950년 9월 9일)
 
  - 적은 규모는 작지만 정찰을 밤새 이어 하고, 3개 연대 모두가 소규모의 공격을 받았다. 차를 탄 힘센 정찰병 3명이 아침 일찍 각각 한 사람씩 64야전포병 3명을 납치해갔다. 아무도 이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대원들은 1148-1365.8 지대에서 교환부서 장비를 다루는 요원들이며 포대 주변에 흙이 뿌려져 있었다. (1950년 9월 10일)
 

  - 방첩대는 2명의 아이를 붙들었는데 군 이동과 집결 장소를 적에게 제공했다. 12세, 14세 아이들이었으며 정보를 마산으로 가지고 온 후 전선을 가로질러 인접한 적군에게 전달했다. 정보는 군 시설에 고용된 주민 노동자들이 타고 다니는 미군 차에 승차하여 수집한 것들이며, 그 더럽혀진 손가락으로 적에게 전달했다.
 
  25사단에 드나드는 한국 민간인은 미군 방첩대가 사전에 거른 사람들이며 걸렀다 하더라도 많은 고용인이 적군 전선과 맞붙어 기거하고 있으므로 유념해야 한다. 정보 요원들이 아무리 엄격하게 걸러낸다 해도 단편일 뿐이다. (1950년 9월 11일)
 
  - 의회, 종교단체, 병사 부모, 사회단체로부터 좋지 않은 일 하나가 전달되어 왔다. 군인들에게 맥주는 추천할 만한 물건이 아니며, 많은 양의 맥주는 허용될 수 없다는 여론들이었다. 맥주를 구하기 위하여 적절한 돈을 내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차후로는 개인이 돈을 지불하고 맥주를 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며 PX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1950년 9월 11일)
 
 
  의용군이 된 서울 학생들
 
북한은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점령지에서 징발한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몰았다. 사진=조선DB
  - 104안전연대는 1950년 7월 24일 서울에서 창군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장교들과 준사관들이 지휘하고 요원들은 별도로 모병했다. 간단한 신체검사 후 무기 없이 서울을 출발했다. 이들은 별도로 훈련하거나 강력한 군대일 필요가 없다. 4개 대대의 연대와 본부요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개 대대원은 약 500명, 총 병력 2000명이며, 철저한 공산주의자들이다. 도망 나온 적군 장교는 말한다. 그가 포로로 잡은 한국군 신병들은 참신하고 전투의지가 강하고 도덕적이었다. 한국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깊게 침투되어 있었으며 북쪽 군인이 되면 곧장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학생도, 전쟁을 싫어하는 학생도, 북쪽 군인에게 매료된다. 이런 사실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원병이 되게 한다. 군인이 되면 윤리·도덕 관념은 없어진다. (1950년 9월 12일)
 
  - 마산교도소 수형자가 35연대 진지로부터 카빈총을 취득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교도소의 한 감방에 7명이 있는데, 모두가 교도소 경비과 직원들이며 공산주의자들이다. 감방의 두목은 교도소 경비과장이며 일주일마다 면회 오는 가족을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고자 했으며, 공산주의 수형자들을 무장시키고 봉기하려 했다. 구입비는 수형자들의 쌀을 내다 판 돈이었다. 이들 감방 수감자들은 같은 수형자, 외부 인사들, 공직자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넓히려 했고, 마산 근방에 우글거리는 적군들과 봉기하려 했다. (1950년 9월 15일)
 
  - 서울 학생들은 적군이 서울을 점령해도 피란길에 오르지 않고, 공산당 ‘인민위원회’는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학교(공부를 말하는 듯-기자 주)를 계속하라고 했다. 그러나 학교에 모이게 하고는 군중집회를 통해서 정치 강의를 듣게 한 후 군에 가라고 부추기고 어느 정도 응하면 그때부터 감시하에 군훈련소로 행진해갔다. (1950년 9월 17일)
 
  - 최근 팔에 문신을 한 피란민 속의 젊은이들이 추적되었다. 그들은 제곡마을에서 온 젊은이들이며 북조선 공산주의 ‘인민공화국 청년연맹’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이다. 그들은 마산지부를 결성하고 오른쪽 팔에 ‘단결’이라는 한자를 문신하고 적군들의 수족이 되었다. (1950년 9월 21일)
 
  - 적군들이 진전면 둔덕, 요장리, 함안 등지에 차고 넘칠 때, 이 지역에 주둔한 일부 한국군은 변절하였다. 중대한 사건이었다. 군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인민위원회’를 보호하고 안내해주었으며 그 사실을 뒤늦게 고백해왔다. ‘인민위원회’는 적군이 되거나 노동 제공자가 되고 게릴라가 되어 유엔군을 괴롭혔다. (1950년 9월 24일)
 

  [증언] 마산방어전투 참전 학도병 유승석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는 국가관이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
 
  ⊙ 학도병으로 남원전투 투입, 인민군에게 붙잡혀 노역하다가 탈출
  ⊙ 특무대에서 사흘간 특수훈련 받은 후 진동의 敵情 살피러 침투
 
유승석 옹. 사진=배진영
  6·25전쟁이 일어날 당시 합포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승석(90·이하 유승석) 옹은 19세의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는 학도병으로 나섰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서 노역(勞役)을 했고, 탈출해서 돌아온 후에는 ‘특수요원’이라는 이름으로 적진에 투입됐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2년간 일했다. 그의 증언은 마산방어전투 당시의 긴박했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박격포 탄환을 메고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유승석은 마산 합포중학교 학도호국단 감찰부장이었다. 배속장교는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반공정신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난 후 목총을 가지고 훈련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배속장교는 “나라가 위기에 처한 때에 자원입대해서 학교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면서 학도호국단 간부들에게 자원입대를 권유했다. 이에 응한 학도호국단 간부 10명은 7월 10일 부산의 제5연대에 가서 부산, 마산, 진주 등에서 지원한 학도병들과 함께 신고했다. 이후 마산으로 돌아와 월영동의 옛 일본군 연대 병영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7월 14일경 진주로 출동 명령을 받았다.
 
  출동 전에 군복을 지급받았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낡은 군복을 세탁한 것인 듯했다. 덩치 큰 미군의 군복이 어린 학생들의 몸에 맞을 리 없었지만, 그나마도 동작 빠른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윤활유가 칠해진 손도 안 댄 M-1 소총이 보급되었지만 10자루에 불과했다. 유승석은 무기도 못 가지고 나섰다. 다음 날 진주극장에서 카빈 소총과 M-1 소총을 지급했다. 유승석에게는 박격포탄을 주면서 그걸 짊어지고 오라고 했다. 아침에 민간인 트럭에 40명씩 분승해서 남원으로 갔다. 새벽에 전투가 벌어졌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승석에게 박격포탄은 있었지만 박격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솔직히 유승석은 자기가 갖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그때는 몰랐다.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군인이 유승석에게 “그건 이제 버려라”고 했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담양, 하나는 순천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유승석은 순천 쪽 길을 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담양 쪽으로 향했던 이들은 지역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냈다.
 
  순천의 위수(衛戍)사령부에서 일본군이 쓰던 38식 소총을 지급받았다. 실탄은 받지 못했다. 여수에서 순천으로 오는 국도변 야산에서 보초를 서라고 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에 잠이 밀려왔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총을 내려놓고 웃옷을 벗고 드러누웠다. 그렇게 잠에 빠질 때쯤, 갑자기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사이드카 소리, 트럭 소리도 들렸다. 적이었다. 모두가 도망가기에 바빴다.
 
 
  인민군에게 붙잡히다
 
  유승석은 산 옆에 있는 민가로 뛰어 들어갔다. 주인과 마주쳤다. “전라도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말이 떠올랐다. 주인은 “네가 총을 메고 보초 서고 있는 것을 봤다”면서 “빨리 저기 웅덩이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주인은 유승석이 입고 있던 옷을 거름통에 던져버리고, 옷을 가져다주었다. 우익 인사였던 것이다. 주인은 음식을 내오면서 “이럴 때 학도병이라고 마음대로 뛰어다니면 큰일 난다” “마산 고향 집으로 가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10시경 그 집을 나섰다. 이미 ‘지방 빨갱이’들이 죽창을 들고 쫙 깔려 있었다. ‘이들이 갑자기 이렇게 나선 것은 아닐 것이다. 사전에 지하에 조직망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유승석이 어려 보이는 데다가 빡빡머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통과시켜주었다.
 
  마산으로 가는 길에 소련제 장총을 멘 의용군들을 만났다. 붉은 줄이 들어간 바지를 입은 장교가 그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장교가 유승석을 불러세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유승석은 “마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인민군이 마산을 ‘해방’시켰다는 말을 듣고 고향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부러 좌익들이 사용하는 ‘해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장교는 유승석의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총을 다룬 군인이라면 손에 못이 박여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유승석을 학생이라고 인정하고 그냥 놓아주었다. “전쟁 초기에 내려온 인민군 장교들 중에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유승석은 말한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몰래 보리쌀을 훔치거나 고추를 따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7월 20일경 하동에 이르렀을 때 또 인민군을 만났다. 그들은 폭격으로 섬진강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불러세우기에 또 “인민군이 마산을 ‘해방’시켰다는 말을 듣고 고향 마산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인민군이 말했다. “잘됐소. 우리도 지금 이 다리를 복구하는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동무도 좀 도와주시오. 다리를 고치고 나면 같이 마산으로 갑시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노역을 하고 있는데 미군 F-80 ‘쌕쌕이’가 나타나 폭격을 했다. 폭격이 멈춘 후 다시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어느 사이엔가 ‘쌕쌕이’가 또 나타나 폭격을 했다. 모두 흩어지고 엎드리는 와중에 도망을 쳤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하동에는 인민군 선무대(宣撫隊)가 들어와 있었는데, 서울의 대학생들인 듯했다. 모두 미인들이었다.
 
  유승석은 고생고생해서 마산에 도착했다. 남성동 파출소 자리에 학도의용군 본부가 있었다. 일단의 학도의용군들과 함께 마산위수사령부로 신고를 하러 갔다. 한 육군 소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종원 중령이 들어왔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나중에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학도의용군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은 뭐야?”
 
  “학도의용군입니다!”
 
  “니들 군번 있어?”
 
  “없습니다!”
 
  “군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더니, 학도병과 지역 내 전투 경험자들 30명을 모아 부대로 편성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헌병대가 있던 월남동 특무대(현재의 국군안보지원사령부)로 갔다. 특무대에서는 “지금 국군과 미군이 진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현지 적정(敵情)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면서 “적진에 침투해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와라. 너희의 임무가 아주 막중하다”고 했다. 사흘간 특수교육이라는 것을 받은 후 따발총을 지급받았다. 면바지를 입고 어깨에는 미숫가루 주머니를 둘러 의용군인 것처럼 꾸몄다. 30명 가운데 15명은 진동, 15명은 함안 쪽으로 침투했다. 유승석은 진동 쪽으로 가는 일행에 속했다.
 
 
  ‘1회용 특수요원’
 
마산방어전선의 일부였던 함안 전선으로 이동하는 미 24연대 병사들. 사진=《마산방어전투》
  적은 현재의 진동 해병대전적비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의용군인 것처럼 꾸몄다고는 하지만 적군이 거기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할 리가 없었다. 특수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고작 사흘간의 훈련으로 제대로 된 ‘특수요원’이 된 것도 아니었다. 적군과 아군의 경계 사이를 며칠간 정찰하고 다녔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당초에는 일주일 동안 활동하라고 지시받았지만 5일 만에 돌아가기로 했다. 특무대에서는 원래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각에 특정 지점에서 웃통을 벗고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나타나면 이들인 줄 알고 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문제는 앞서서 나타났을 때였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8월이어서 시퍼런 벼들이 자라나고 있을 때였다. 유승석 일행은 논에 누웠다. 미군 정찰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미군기가 공격해올 것만 같았다. “움직이면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웃통을 벗고 손을 머리 뒤로 얹고 강을 건너서 미군들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총을 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이들이 옷을 벗어놓고 온 논 위로 미군 ‘쌕쌕이’가 날면서 기관총을 쏘아댔다. 위장한 적병으로 숨겨둔 병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당초 15명이었던 ‘특수요원’들은 어느 사이엔가 7명으로 줄어 있었다. 지휘자를 비롯한 8명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특무대 진동파견대와 접촉했지만 아무도 유승석 일행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출동하기 전에는 일제시대에 독립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까지 찍었지만, 그들은 ‘1회용’일 뿐이었다. 미 25사단 소속 특수부대라고는 했지만, 함께 돌아온 동료들도 슬금슬금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유승석 한 사람뿐이었다. 유승석은 가네코라는 이름의 일본계 미군 중사 아래서 ‘하우스 보이’ 노릇을 하며, 미 25사단이 북진할 때 함께 올라가 금화, 의정부 토성, 동두천에 주둔했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생활을 견딜 수 없어 1952년 6월 미군 부대를 나왔다. 2년 동안 이런저런 고생을 했지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52년 10월 유승석은 시험을 쳐서 공군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고향인 마산에 있는 항공수리창에 배치되었으며, 1964년 10월 공군 중사로 제대했다. 이후 경남 마산시 재향군인회 공군부회장, 6·25참전유공자회 경남마산지회장, 참전기념사업회 고문 등으로 봉사해왔다.
 
 
  “안보교육도 없어져”
 
  유승석 옹은 “전쟁 중에 큰일을 한 것도 없고, 인정도 못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원해서 전쟁터로 나갔다”면서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는 국가관이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전쟁이 나면 지금 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라고 걱정했다.
 
  “전에는 교육청에서 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안보교육도 하고 그랬는데, 근래에는 그런 것도 없어졌어요. 학생들에게 6·25 때 얘기를 해주면 ‘할아버지도 정말 전쟁을 했어요?’라고 물어보고는 같이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