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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16〉 정보기관 불법 도청 ‘뿌리 뽑기’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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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기관의 ‘도청’과 ‘감청’ 개념 새롭게 설정
⊙ 통신으로 전해진 5·18 당시 전두환의 당황하고 다급한 모습
⊙ 선거 개입했다고 지목받은 정보기관 요원의 토로
⊙ 안기부에서 출세해 국회의원까지 된 요원의 말로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노태우 정권이 등장하면서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야당에서 도감청(盜監聽)을 포함한 국가안전기획부법 개정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 의미는 더 이상 정보기관을 통한 정치를 하지 말라는 메시지인 것 같았다. 박정희나 전두환같이 군사력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의회(議會)보다는 정보기관을 앞세워 통치했다.
 
  그러나 시대가 그런 정치는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법률팀에 도감청 문제와 안전기획부법 개정안에 대한 검토 지시가 떨어졌다. 문제의 핵심은 정보기관이 정치와의 관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도감청 요원들의 폐쇄성
 
  어느 날 직속상관이 방으로 나를 불렀다. 법무부 검찰국 출신의 엘리트 검사였다. 전(全) 검찰의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실력자였다. 그는 나를 그 부서로 끌어준 친근한 형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책상 위에 놓인 논문 한 권을 내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 논문은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도감청에 관련해 쓴 논문이야. 이걸 참고로 도감청에 관한 법률안을 한번 구상해봐. 일반인이나 공직자들이나 가장 찜찜한 게 정보기관의 도감청이었어. 내가 서울지검에 있을 때 보면 검사인데도 도청이 될까 봐 전화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곤 했어. 얼마나 불편해? 그런 불법 도청이 오랫동안 누적돼 있어 전 국민이 공포를 느끼는 거야. 이제 민주화 시대에 도청이 법의 통제를 받을 때가 온 것 같아. 법률 초안을 한번 만들어봐.”
 

  도감청이라는 어둠에 법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가 덧붙였다.
 
  “정보기관에 와서 보니까 도감청 담당 부서 요원들이 나같이 외부에서 온 검사에게는 단단히 벽을 쌓고 방어한단 말이야. 아주 폐쇄적인 본능이 있어. 그러니 법률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제로 도감청이 어떻게 되어왔는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봐. 북한이나 해외 공관에 대한 도감청은 정보기관의 특성상 납득할 수 있어. 어느 나라나 정보기관에서 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일반 국민을 상대로 도감청하는 건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해. 마음대로 하면 공포정치가 되니까 말이야. 논문은 내가 유학한 독일의 입법례(立法例)야. 그 외에 우리 법률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법도 검토해야 해. 시대가 달라졌어. 스스로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외부에 의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할 거야. 근본적인 문제가 뭔지 한번 법률 검토를 하면서 살펴봐.”
 
  고교 선배인 상관에게서 받은 도청 관련 법학 논문을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도청을 통제하는 법을 만든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굉장한 역할이었다. 조지 오엘의 소설 《1984》를 보면 국민 모두가 독재자인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손바닥 안에서 공포에 떨며 살고 있다. 국민 개인에 대한 도청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덤벼보기로 했다. 이따금씩 일을 하면서 나의 소명을 생각했다. 정보기관 변호사로 고용되어 정보활동의 법적 근거와 논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불법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위법(違法) 여부를 판단해주는 감시인으로서의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부 각 부처의 입법안에 대해서도 백혈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겼다.
 
  정부 각 부처에서 법률안을 입안(立案)하면 반드시 국가안전기획부에 의견 검토를 요청했다. 대통령 직속인 우리 법률팀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게 해결되지 않는 한 그 입법안은 차관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만큼 외부 입김이 거센 것 같았다.
 
 
  통신으로 전해진 ‘당황하는 전두환’
 
  마구하던 도감청에 대해 법으로 고삐를 죌 필요가 있었다. 우선 도감청 관련 실무 책임자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힘들 것 같았다. 도감청을 담당하는 부서는 폐쇄적이었다. 심지어 부장이 명령해도 그들은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기획단에서 함께 일하면서 친했던 과학기술국의 간부가 떠올랐다. 안경을 쓰고 뚱뚱한 그는 명문대 공대(工大) 출신의 수재(秀才)였다. 그를 따로 조용히 만나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기술자 특유의 쑥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보기관 입장에서 도감청은 업무상으로는 필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법에 저촉되는 것으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도감청에 관여하는 많은 직원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 시중의 일반 전화국 직원도 업무에 협조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비밀을 지키도록 입을 막고 있지만 언제 누가 양심선언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예전에는 힘으로 누르고 겁을 주면 됐지만 앞으로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도청법을 만들어 기준을 제시해주시면 그 일을 하는 우리가 좀 더 당당해질 것 같습니다.”
 
  도감청을 담당하는 그도 어떤 막연한 불안이 있었던 것 같았다.
 
  “도감청이라는 게 정말 필요한 겁니까?”
 
  내가 근본적인 것부터 물었다.
 
  “나는 공대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 기술국에 들어와 20년이 넘었습니다. 기술 분야에만 있어서 정보나 첩보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사회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다만 제 분야에 대해 아는 만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신을 장악하는 사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보부 기술국에서 군대 지휘관들이 하는 통신을 체크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지휘관들의 통신 속에서는 반란의 징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체험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2·12사태가 벌어졌을 때 보안사령부와 각 부대의 교신(交信)이 심각했습니다. 또 5·18이 일어났을 때 우리 기술국은 자체적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도청 코드를 걸었습니다. 전두환은 당황하고 망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출근하지도 않았습니다. 심복이던 이학봉씨가 전화를 걸어 사령관 소재지를 확인하는 과정도 나오더라고요. 세상은 전두환이 배짱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정권을 잡은 것같이 말하는데, 기술국의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北 주민 감청 ‘(남한) 스타킹 써보니 좋더라’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뭔가 주저하다가 이윽고 결심이 선 듯 계속했다.
 
  “우리가 북한도 감청합니다. 평양의 당(黨) 간부나 그 부인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낸 위문품 중에 여성용 스타킹 같은 게 있었어요. 감청해보면 당 간부 부인들이 어느 회사에서 나오는 무슨 스타킹을 써보니 좋더라 하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또 남한의 경제발전이 무섭다고 하는데 이러다 통일되면 ‘우리는 남조선에 가서 모두 파출부나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소리도 나오죠. 북한을 손아귀에 넣으려면 도청이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국내 도청은 어떻게 해왔는지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국내 도청 방법을 대략적으로 설명해드리면 지금 서울 시내에 몇 개의 전화국이 있는데 우리 안전기획부의 기술국을 그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전화국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반 전화국의 회로를 끌어들여 우리 기술국과 회로를 연결시켰습니다. 그게 유선전화 도감청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그다음은 비밀 녹음장치를 통한 도감청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정치인들이 자주 가는 요정이나 카페에 장치를 설치하기도 합니다. 이제 그런 방법은 너무 원시적입니다. 너무 알려져서 사람들이 도감청을 걱정하고 그걸 막기 위해 방 안에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수반(水盤)을 놓거나 얘기할 때 종이 구기는 소리를 내 도감청을 막기도 합니다. 그런 도감청은 불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첩이나 해외전화의 감청은 명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닌 일반인에 대해 무작위로 하는 건 문제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청와대를 상대로도 도감청을 합니까?”
 
  “말로는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하고 있습니다. 핵심 당직자나 대통령의 최측근이 대통령과 통화하는 경우가 있죠. 그러면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우리 기술국에 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통령이 막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도감청이 안 되는 걸로 알고 마음놓고 말을 하니까요. 그때 대통령의 진면목을 보기도 합니다. 기술자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미국은 어떻게 도감청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머리 위에 있는 미국의 위성이 우리가 회의하고 있는 걸 바로 녹음해서 바로 워싱턴에 있는 CIA본부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또 한국에 파견된 미국의 정보요원이 청와대나 안기부 유리창에 전파를 쏴 우리가 하는 소리를 전부 캐치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방법이 궁금해 어떤 방식으로 도감청이 이뤄지는지 물었다.
 
  “우리가 말을 하면 그 음파(音波)가 창문 유리에 부딪혀 미세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걸 기술적으로 잡는 겁니다. 우리 기술국은 그렇게 도감청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마다 전파(電波)를 흐르게 해 도청을 막고 있습니다. 도감청 기술과 함께 그걸 막는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경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게 국제 정보기관들의 현실입니다. 앞으로는 남산타워나 63빌딩 옥상에 과학 기자재를 설치해 전파를 잡아야 합니다. 기술발전의 입장에서는 도감청뿐 아니라 도감청을 막는 기술도 함께 개발해야 하는데, 이미 비밀을 지키는 시스템도 무너졌습니다. 외국 기자들이 국내 상황을 본 자리에서 기사를 쓰고 바로 송신하는데 그게 검열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도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필요 시 그런 송신이나 컴퓨터 시스템을 무력하게 만드는 장치를 개발해야 합니다.”
 
 
  안심하고 주고받는 내용에 ‘진짜 정보’가…
 
  그가 말한 ‘통신이 모든 것을 장악한다’는 말의 의미가 손에 잡히듯 다가왔다. 세계 각지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외교관들이 전문(電文)을 외교부에 보내도 정보기관이 중간에서 그걸 감청하면 외교 비밀을 먼저 알게 되는 것이다. 기자가 취재해 데스크에 전화로 송고해도 도청을 통해 그 내막을 먼저 알게 되어 있었다. 도감청을 통해 검찰과 경찰의 배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기술국 간부인 그가 덧붙였다.
 
  “검찰과 경찰, 보안사령부 등 모든 수사 조직의 통신을 우리 조직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경찰이 자기들끼리 보안장치가 설치된 팩스를 설치했죠. 그런 경찰 팩스의 교신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경찰의 새로운 설비는 도청이 불가능하니 마음 놓고 얘기해도 된다’는 말도 뜨더라고요. 안심하고 주고받는 내용에 진짜 정보들이 많더군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물었다.
 
  “그렇지만 국민에 대한 도감청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을 상대로 왜 도청했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솔직히 우리 사회는 좌익(左翼)의 뿌리가 깊습니다. 6·25 때 빨치산 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나 자손들이 지금도 이 땅에 넓게 존재합니다. 그들의 한은 깊습니다. 우리 사회의 내부에는 골수 공산주의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죠.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출판사 직원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노조(勞組) 속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밤이면 단파(短波) 방송을 통해 북한의 사상교육을 받고, 또 더러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 가서 교육을 받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절대 노출되지 않습니다. 어떤 공식적인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지하의 위해(危害) 분자들의 흐름이 있습니다. 북한이 남침(南侵)할 경우 우리가 파악한 그런 위해 분자들이 앞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집단의 지휘부가 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그런 위해 분자를 사전에 파악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는 거죠. 정보조직은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이면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스포츠같이 룰에 의해서만 지배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도감청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남용을 막기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도청과 감청 구분
 
  일리가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독일법과 논문을 참조해서 도감청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어보았다. 불법적으로 하면 ‘도청’이고, 법적 절차에 따라 하면 ‘감청’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대상도 국가의 안보를 위한 것과 범죄수사에 관한 것으로 나누었다. 안보에 관한 것은 그 책임자인 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일반적인 범죄 수사에 필요한 감청은 판사의 통제를 받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불법 도청의 경우에는 형벌이 부과되도록 했다. 무소불위의 기관으로 군림하던 정보기관에 대해 그동안 대부분의 요원들이 법 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도 법 지배 아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과거같이 누군가 실력자가 막아줄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였다.
 
  법에 따라 감옥에 가야 하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법률팀에는 법제처에서 온 법조문을 만드는 기술자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법전에 나오는 법조문들의 구조와 문장을 꿰뚫고 있었다. 법의 초안이 탄생했다. 법률안은 통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도청을 방지하자는 데 야당도 반대할 리 없었다. 위원회 의원들도 시비를 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혁명 대신 법으로 세상을 바꾸어가는 한 톱니바퀴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선거 개입한 안기부 요원의 토로

 
  그다음은 안전기획부법 개정에 대한 검토였다. 대통령이나 안전기획부장에게 과연 그런 마음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건 ‘친위대’를 해체하라는 뜻과 같았다.
 
  나는 정치 권력의 깊은 이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권력의 본질은 간단했다. 권력을 잡으면 그걸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 후의 안전도 중요한 것 같았다. 한마디로 백담사로 유배 간 전두환같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14대 총선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안전기획부를 이용해 선거를 치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때 사건이 터졌다. 한밤중에 상대방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삐라를 뿌리던 안전기획부 요원이 상대방 후보 진영의 청년들에게 잡혀 두들겨 맞고 경찰에 넘겨졌다. 매일같이 신문에는 얻어맞아 멍이 든 그 요원의 확대된 얼굴과 함께 안전기획부의 선거 관여가 보도됐다. 결국은 기관을 부리는 대통령의 의사로 볼 수밖에 없었다.
 
  권력과 출세욕에 날뛰는 인물들과 대통령의 야심이 더해져 발생한 일이란 게 정보요원들의 평가였다. 그렇게 해야 출세를 하는 것 같았다. 여론이 계속 들끓고 공개적인 수사망이 압축되어 오고 있었다. 나는 선거 개입의 실무 책임자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안전기획부 내에서 우연히 만난 그가 이렇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요즈음 난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녀. 언제라도 자살할 결심을 했어. 상황을 보면 내가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아. 어제는 남산터널 근처를 가다가 뻥튀기 장사를 봤어. 그 사람의 한없이 편안한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내 일평생 그런 사람이 부러워본 건 아마 처음일 거야.”
 
  권력에 부나방같이 접근하던 그가 자칫 타버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현장에서 잡힌 일선 요원을 보았다. 조직은 일단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제가 그런 짓을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여기 분위기를 아시겠지만 위에서 시키는데 그걸 거부할 요원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잡히고 싶어서 잡혔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이 조직 안에서도 저를 모두 경원하고 있어요. 나는 이 조직에서 앞날의 희망도 없어지고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권력의 일회용 소모품으로 사용되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모습이었다. 어떤 걸 시켜도 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공(功)을 세워야 출세를 하는 것 같았다.
 
 
  같은 조직 안에 쳐진 이중삼중의 감시망
 
  그 안에서 출세한 또 다른 요원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밤늦게 그의 부탁을 받고 일해준 적도 있었다. 안전기획부장의 연설문을 쓰고 있는데 문장(文章)을 손봐달라고 했다.
 
  젊은 시절 중앙정보부에 들어왔다는 그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 같았다. 조직에서는 충성심 강한 그를 국회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가 선거에서 낙선하려고 해도 떨어질 수가 없다는 평가였다. 조직에서 넘칠 정도로 자금을 지원했다. 또 요원들이 그의 선거구에 상주하면서 조직을 관리해주었다.
 
  국회의원이 된 그를 업무 관계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국가안전기획부법을 지키는 방파제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를 만나던 날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느껴졌다. 그는 상임위원장을 목표로 달린다고 했다. 얼마 후 그가 상임위원장이 됐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을까. 죽은 그가 다시 살아나면 ‘뭐라고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는 찬밥인 것 같았다.
 
  안전기획부 내의 북한국에서 《로동신문》을 분석하는 고교 동기가 있었다. 고시(高試)에 실패하고 정보기관에 들어간 친구였다. 그 친구는 순수 정보 분야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승진이 되지 않는다고 내게 호소했다.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또 다른 부류 조직원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봐야 할 자료가 있어서 조직 내부에 있는 도서실로 갔다. 나는 자료를 대출받아 구석의 칸막이에서 보고 있었다. 우연히 그 뒤에서 두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 조직 종교팀에서 일하는 건 하나님을 위해서예요. 종교계가 썩지 않고 권력에 야합하지 못하게 하는 게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죠.”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말이죠 학원 담당인데 착한 아이들을 꼬셔서 시위 날짜나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고 돌아와 보고서를 쓸 때면 내가 배신자라는 느낌이 들어요. 앞에서는 친한 척하고 비밀을 지켜줄 듯이 말하다가 돌아와서 보고서를 쓴다는 건 매일 배신하면서 사는 성경의 가롯 유다 같은 인생이죠.”
 
  그들이 속삭이는 뒤의 칸막이에서 또 다른 한 남자가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감찰실 직원 같았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그렇게 이중삼중 철저한 감시망이 쳐져 있었다.
 
 
 
“(안기부 요원들은)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 같아”

 
  그 무렵 나는 빈 시간이면 책상 위에 성경을 올려놓고 읽고 있었다. 어느 날 같은 부서에서 중국을 담당한다는 요원이 내 방으로 왔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중국어에 능통해서 정보부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평소 그는 거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급 양복을 입고 승용차를 몰고 외부 인사를 만나러 다닐 때도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군(軍) 장교용 낡은 점퍼를 입고 묵묵히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점심식사 때가 되면 지하식당으로 내려가 혼자 창가에서 식판의 밥을 먹곤 하는 모습이었다. 인사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가 내 책상 위에 놓인 성경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성경을 읽으시는 걸 보고 제가 다가왔습니다. 나도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옆에서 관찰을 했는데 한마디 충고해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해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시죠.”
 
  “나도 정보기관 요원인데 이런 말을 하는 걸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정보기관의 일이라는 게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게 많습니다. 특히 정보나 수사 업무 중에 그런 게 많습니다. 하나하나 행동할 때 그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살피고 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연히 권력의 실세라는 박철언의 그룹에 끼어 들어오게 됐습니다.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전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박철언과 이 조직의 대부분은 하나님과 진리(眞理)를 섬기지 않고 권력을 우상(偶像)으로 섬기고 있는 것 같아요.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겨야만 직급도 올라가고 보수도 많이 받고 출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박철언 장관이 여기서 떠나 이 조직을 원격조종하기 때문에 괜찮지, 아마 그가 여기 있을 때 성경 보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주 싫어했을 겁니다. 보좌관 중에 그런 사람이 전에 한명 있었습니다. 성경을 책상 위에 놓고 있다가 눈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YS에 대해 고개 흔들던 요원
 
  그의 말은 내 가슴속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국가안전기획부법을 검토하고 있던 나는 그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법으로 ‘정치적 중립(中立)’을 선언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친위대가 아니라 국회의 통제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법뿐만 아니라 시행령이나 기본지침 각종 내부 규정들을 만들어 그들의 행동을 통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정치가 아니라 경제와 산업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치 흐름은 대통령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거대 여당이던 민자당은 14대 총선에서 다시 쪼그라들었다. 국민은 야합(野合)으로 탄생한 여당에 다수 의석을 주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제2 야당으로 급부상했다. 국민당의 부상은 김영삼의 강력한 라이벌 정주영을 탄생시켰다. 또 다른 재벌인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집권당 후보로 부상한 김영삼에 관한 자질론도 흘러나왔다. 김영삼에게 브리핑하고 나온 북한전문가는 그를 이해시키기 정말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급해진 건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정권 재창출을 해야 퇴임 후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국가안전기획부에 여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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