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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인사이트

30년 만에 공개된 외교문서, KAL858 폭파사건 막후 외교 血戰 비화

韓美日 철석 共助, 유엔 安保理에서 북한 정권 단죄!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글 : 김영남  조갑제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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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한 발 빼는 사이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사국 설득, 안보리 회의 개최토록 돕다
⊙ 《레이건 일기》에 등장하는 김현희
⊙ 결의안 채택 대신에 폭로 전략으로 전환
⊙ 중국과 소련도 북한 편들지 않아
‌⊙ 朴槿 유엔대사의 감동적 연설, ‘대한민국은 괴물(北)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았다’
⊙ 미국, 北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 일본에선 납치자 문제 등장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KAL)858기 폭파사건(115명 사망, 대부분 귀국행의 중동 근로자)은, 북한 정권이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저지른 것이었다. 그 파급효과 면에서 세계적인 사건이다. 범인 김현희(金賢姬)가 생포됨으로써 북한 정권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미국과 일본 등 자유 진영이 북한 정권을 테러집단으로 규탄, 고립시키면서 서울올림픽은 공산국가들까지 참가하여 세계의 축복 속에서 열렸다.
 
  ‘벽을 넘어서’라는 모토를 내건 서울올림픽 성공의 여파가 이듬해(1989년) 동유럽 공산권 붕괴의 한 촉진제가 되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확대시킨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한소(韓蘇), 한중(韓中) 수교로 이어져 북한의 배후를 차단하는 한편, 한국인의 활동반경을 범(汎)지구적으로 넓혔다. 김현희의 증언으로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불거졌다. 아직도 일북(日北) 수교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일본의 북한노동당 공작기지인 조총련이 결정타를 맞았다. 이러한 긍정적 효과는 김현희를 생포하고 범행을 자백받아 유엔을 통하여 북한 정권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한미일(韓美日) 세 나라가 철석같이 공조(共助)한 덕분이다. 특히 한일(韓日) 공조가 인상적이다.
 
  지금 북핵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공조하였더라면 벌써 북한을 비핵화(非核化)시켰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본 기자들은, 한국 외교부가 지난 3월 31일 공개한 약 1만 쪽 분량의 KAL858기 폭파사건 관련 외교문서를 분석하여 김현희 체포에 일본 정부, 특히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김현희를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조사하는 데도 일본 정부가 협조적이었음을 밝혀내어 지난 호에서 소개하였다. 이번엔 한미일 세 나라가 KAL858기 폭파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긴급회의에서 다루어 세계 앞에서 만행을 규탄할 수 있도록 협력한 막후 비화(祕話)를 소개한다.
 
 
  레이건 대통령 일기에 등장한 김현희
 
최광수 전 외무부 장관.
  한국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1988년 1월 15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이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 국가로 규정해 각종 제재를 가했다. 일본도 독자 대북(對北)제재를 단행했다. 이에 추가로 안보리 회의에서 대다수 국가가 북한의 테러행위를 규탄, 북한을 더욱 고립시키는 계기가 됐다. 64개국이 공식 규탄성명을 발표했고, 세인트 빈센트와 피지 두 나라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미국과 일본 등 8개국이 제재를 가했다.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세력은 지금도 당시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지 않았으며, 한국의 주장을 지지한 국가는 미국밖에 없었다는 식의 거짓말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부 문서는 이들에게 매우 불리한 자료이다.
 
  1988년 1월 14일 최광수(崔侊洙) 외무부 장관은 김경원(金瓊元) 주미(駐美)한국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제임스 릴리 주한(駐韓)미국대사와의 면담 내용을 설명했다. 한국은 미국에 강력한 대북(對北) 조치를 요구했고, 미국은 수사 내용이 충격적이라며 협조를 약속했다. 관련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1. 14일 본직(本職)은 릴리 대사를 외무부로 초치, KAL기 사건의 조사 결과를 15일 10시에 공표할 것이라고 통고하고 아래 사항을 알려주면서 미국 측의 적극 협조를 요청하였음.
 
  가. 소위 자칭 마유미와 신이치는 고도로 훈련된 북한특공대이며 이들이 KAL858기를 폭파한 진범임을 마유미는 자백함.
 
  나. 명일 발표 시에는 마유미도 동석할 것이며 아측으로서는 미국 등 우방국의 요청이 있을 시 미국 외교관 또는 수사기관과의 면회를 주선하겠음.
 
  다. 국내 일각에서는 군사적 보복 주장도 없지 않으나 정부로서는 올림픽 행사, 남북관계의 장래 등을 고려하여 직접적인 실력 조치를 피하는 등 자제키로 함.
 
  (중략)
 
  마. 미국은 우방국으로서 국제테러리즘 방지라는 대의(大義)에서 아측의 외교적 제반 조치를 적극 지원해주기 바라며, 특히 15일 아측의 발표와 때를 맞추어 미 정부의 강력한 대북(對北) 규탄성명을 발표해주기 바람.
 
  (중략)
 
  2. 이상 본직의 설명에 대하여 릴리 대사는 충격과 이해를 표시하고 미국 측의 적극적인 협조를 다짐하였음. 다만 그는 발표 시기가 임박함에 비추어 그동안 국무성이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후 논평을 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인지는 자신이 없으나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하였음. (하략)〉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바쁜 중에도 일기를 꼬박꼬박 썼다. 한때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레이건 일기》 567페이지에는 안기부가 김현희를 세상에 드러낸 1988년 1월 14일 목요일에 쓴 일기가 소개돼 있다.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레이건은 1988년 6월 28일에 쓴 일기에서도 서울올림픽을 언급하는 등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최광수 외무장관이 안보리 수사 결과 발표 하루 전인 1988년 1월 14일,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에게 사전 통보한 내용을 김경원 주미한국대사에게 전달하는 문서.
 
  美,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
 
김경원 전 주미대사.
  1월 19일, 김경원 대사는 최광수 장관에게 미 국무부 한국 담당관들과 만나 들은 내용을 보고했다. 미국이 다음 날인 20일 북한을 테러국가로 공식 규정하는 등 제재에 나서겠다는 내용이었다.
 
  〈1. 당관(當館) 정 참사관과 송 서기관은 국무부 던롭 한국과장 및 무소멜리 북한 담당관 및 대(對)테러국 관계관과 각각 접촉, 대북(對北)응징 조치를 협의하고 미측이 조속 단호하고 강력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재차 요청함.
 
  2. 이에 대해 던롭 과장은 금일 오전에 개최된 국무부 간부회의에서 슐츠 장관이 동건(同件)을 우선 과제로 취급, 신속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하며, 이에 따라 관계 부서 간 협의를 긴급 진행하고 있으며, 명 1.20 국무부 정오 브리핑 시 강력한 대북규탄과 함께 아래와 같은 대북제재 등 포괄적 조치를 발표토록 준비 중이라고 설명함.
 
  가. 87.3 미측이 개정한 미-북한 외교관 접촉 지침을 1.20자로 철회함.
 
  나. 1.20부터 미국 개최 학술대회 참가를 위한 북한인 입국을 금지하고 기타 북한인의 미국 입국을 엄격히 제한함.
 
  다. 북한을 1.20자로 테러국가로 공식 규정함. (리비아, 시리아, 쿠바, 이란, 남예멘에 이어 6번째)
 
  라. 북한의 테러행위를 강력히 규탄하며 세계 모든 반(反)테러 국가들이 이러한 규탄여론 조성에 동참하고 국제기구 등에서의 테러 응징에 협력할 것을 요청함.〉
 
  미국 측은 1월 2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뒤 유엔 안보리에서의 대북규탄 결의안을 추진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미국은 “소련은 과거 포클랜드(Falkland) 전쟁 시 영국이 제안한 유엔 안보리 ‘알젠틴(아르헨티나)’ 규탄 결의안에 예상과는 달리 기권하는 등 거부권(veto) 사용을 자제한 사례도 있으므로 결의안 추진 시 내용을 국가 테러리즘 규탄에 역점을 둬 소련의 기권을 유도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美, 韓에 안보리 제기 권유
 
  최광수 장관은 이때부터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고민 중 하나는 안보리 의제 채택을 위해서는 15개의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주미(駐美)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미국이 의제(議題) 채택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지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은 한국에 도움이 될 조언은 계속하지만 미국이 너무 앞장서서 안보리 의제 채택을 도우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뉘앙스의 의사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1월 28일 김경원 대사가 최 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1. 안보리 제기에 관한 본부 방침 결정을 2.5(금)까지 연기하였음을 금 1.28(목) 정 참사관이 국무부 고스넬 한국과장 대리에게 통보한바, 미측은 안보리 제기 여부 및 방식을 하루속히 결정해야 할 사항이며, 미국이 의장국이 되는 2월로 넘어가게 되면 동건이 한미 간 문제로 축소될 우려가 있음을 재차 강조하였음.
 
  2. 국무부 측은 또한 만약 한국 측이 동건을 안보리에 제기하지 않고 조용히(LOW-PROFILE) 넘어가게 되면 한국 측의 조사발표에 대한 자신감에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음.〉
 
  1월 29일 최 장관에게 보고된 전보에 따르면, 고스넬 국무부 한국과장 대리는 중국과 소련을 너무 압박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 고스넬 과장은 “한국이 결의안 채택을 시도할 경우 중국과 소련은 올림픽 참석 발표로 북한 입장을 실추시킨 데 이어 결의안에 대해 지지(支持) 내지 기권할 경우 북한에 또 다른 일격을 가하게 된다는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두 나라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중국과 소련이 원하는 북한의 테러행위 방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 어려움이 있다는 취지의 설명도 했다.
 
  미국은 얼마 후 유엔 안보리 회의 소집 등의 문제에 있어 한국을 적극적으로 돕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생각을 더욱 확실히 했다. 소련과는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과 중동 문제 등 복잡한 현안들이 있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고려해야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 발 빼는 미국
 
  아래는 이번에 공개된, 1988년 2월 12일 김경원 대사가 최광수 장관에게 보낸 전보다.
 
  〈2.21-22간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미소(美蘇) 외상(外相)회담 관련 금 2.12 송 서기관이 국무부 소련과 버튼 부(副)과장 및 영 담당관으로부터 일정, 의제 등에 관해 파악한 바를 아래 보고함. (중략)
 
  금번 회담을 포함해서 앞으로 수차 개최될 외상회담은 모스크바 정상회담의 준비 성격이므로 최대의제는 START 부분이 될 것임. 소련의 아프간 철군 문제, 중동평화안 등 주요 지역 문제가 다루어질 것이며 물론 최근 KAL기 사건 관련 올림픽 안전에 초점을 맞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임.
 
  2. 미소 외상회담 시 한반도 문제에 관해 상기 국무부 실무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함.
 
  가. 미측은 기본적으로 금번 외상회담 및 차관회담에서 북한의 테러 억제를 위한 소련의 적극적 노력을 요청하면서, 한반도 안정은 미국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바로 소련의 과제이기도 함을 공조코자 함.
 
  나. 한편 모스크바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국의 대소(對蘇) 접근방식은 KAL 사건의 유엔 안보리 처리 결과와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아직 TALKING POINT를 확정하지 않고 있음.
 
  다. 즉 유엔 안보리가 북한의 테러행위에 대해 분명한 규탄을 가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있지만, 만약 동 규탄에 이르는 과정에서 소련(중공 포함)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외상회담에서 조용한 방법으로 소련의 대(對)북한 역할을 요청하기에는 다소 거북한 분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임.
 
  라. 미국은 또한 이-이전(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보임-기자 註)에 관한 유엔 안보리 2차 결의안에 대해 소련과 중공의 동의를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대소관계에 있어 이-이전, 아프간 철군, 한반도 문제 등 주요 지역 문제를 상호 연관시켜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고려해야 할 사정을 갖고 있음.(하략)〉
 
 
  미국 CIA의 별도 확인 조사
 
  이런 사정으로 미국은 한국의 안보리 회의 소집을 위하여 전면에 나서 돕지는 못했다. 김현희에 대한 독자적 수사를 진행,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 힘을 실어주는 등 정보 측면에서는 많은 도움을 줬다. 1958년 9월 미 502군사정보단에서 심문관으로 활동하다 1976년부터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일하였던 마이클 리는 김현희 사건 등을 직접 조사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체험 수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안기부 조사가 끝나고 이 사건의 내용이 보도됐을 때에도 북한은 악랄하게 남한의 조작이라고 우겨댔다. 국내 친북세력이 이에 동조했고 심지어 일본의 교도통신을 포함한 해외 언론에서도 이 엄청난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놓고 약간의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 국제테러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또 방대한 자료와 수사능력을 갖추고 있는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 한국 정부의 승인과 협조를 받고 미국은 이 사건의 독자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내용은 한국 정부가 발표한 내용이 100%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추가적으로 확고부동한 단서와 근거를 제시했다. 김현희가 안기부 조사관들에게 진술한 그 방대한 분량의 진술 내용과 미국 측에 진술한 내용에서 추호도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중략)
 
  1988년 2월 4일, 미국 국무성은 하원 외무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위원장 스티브 솔라즈)가 주재한 KAL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청문회에서 미국 정부의 독자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클레이턴 맥나마웨이 국무성 테러담당 대사는 김현희 자백의 진실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미국의 독자적인 보강증거를 추가로 제시했다.〉
 
  마이클 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올림픽의 안전을 위해 미국 정부를 위시한 여러 나라가 염려하고 협조했다”며 “서울올림픽의 안전을 위해 미국 정부가 제공한 숨은 협조를 아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몇이나 될까”라고 했다.
 
 
  일본에 “독자제재 해달라”
 
이규호 전 주일대사.
  최광수 장관은 안기부 수사 결과 발표 하루 전날인 1988년 1월 14일 오전 야나이 신이치 주한(駐韓)일본대사를 장관실로 불러 수사 결과를 사전 통보했다. 야나이 대사는 “미리 알려줘 감사하다”며 “내용을 바로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일본 외무성은 안기부의 수사 발표가 있던 1월 15일 테러에 대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최 장관은 일본의 성명을 환영하지만 전체적으로 약하고 ‘북괴’를 직접 지칭하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최 장관은 1월 16일 이규호(李奎浩) 주(駐)일본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일본 정부에 대북제재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관련 전보 내용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對)북한 제재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함.
 
  1) 일-북한 인사교류 억제
  - 북한인사의 일본입국 금지
  - 일본인사의 방북 억제
  - 제3국에서 일본 외교관의 북한 외교관 접촉 동결
 
  2) 금번 수사 결과 나타난 북한의 조총련 등 이용 사례와 최근의 적군파에 의한 한국 침투 및 서울올림픽 방해 책동 기도 등을 감안, 앞으로도 북한이 일본을 기지로 하거나 일본을 경유한 대(對)아국 테러 기도 가능성을 봉쇄키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함.
  - 조총련 등의 대아국 파괴활동에 대해 실효적 규제 조치 강구
  - 북한 선박, 특히 만경봉호 및 삼지연호 등 수시 내항 선박의 일본 기항 금지
 
  3) 일-북한 경제교류의 제한〉
 
  소병용 외무부 아주국장은 1월 21일 오타 주한일본공사를 만나 일본의 대북제재를 거듭 요청했다. 그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국(我國) 정부, 외무부(특히 최 장관)는 일본의 빠른 제재 조치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타 공사가 “국제기구를 통한 제재 조치는 취하고 있느냐”고 묻자 소 국장은, “우리는 개별국가의 반응에 더 기대를 걸고 있다. 이것이 효과가 더 클 것이다”라며 일본을 계속 압박했다. 이규호 일본대사는 1월 21일 오후 최 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대북제재 조치를 위한 일본의 요구사항을 보고했다. 관련 전보이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장
 
  〈후지타 외무성 아주국장이 21일 박 공사를 초치해 대북제재 조치를 결정하기에 앞서 아래 사항에 대해 아국의 신속한 협조를 요청해왔음.
 
  가. 일측에 의한 김현희 면회 실시
 
  - 후지타 국장은 아주 지역 공관장 회의 참석 중 일 정부의 대북제재 조치 검토와 관련, 예정을 앞당겨 금일 아침 귀국하였는바, 귀국 직후 우노 외상으로부터, 미국 측은 김현희를 지난 1.19. 면회하였으나 일측 관계자가 면회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적이 있었다고 말하고, 현재 방한 중인 다나카 북동아과장 및 주한대사관원이 김현희를 조속 면회할 수 있도록 아측이 적극 협조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음.
 
  나. 일본 위조여권 및 납치된 일본인 여성 공작원 관련 자료 제공 (중략)
 
  5. 관찰
 
  일측은 아측이 미국에 대하여는 신속히 면회를 허용하면서 일본에 대하여는 면회 실시 및 자료 제공을 늦추고 있는 것으로 보고 상당히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감지되었으며, 후지타 국장이 강력한 어조로 요청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일측의 신속한 제재 조치를 유도하기 위하여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측의 요청에 협조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되며, 우선 체한(滯韓) 중인 다나카 과장 또는 주한일본대사관 직원의 김현희 면회를 허용해줄 것을 건의함.〉
 
  이 전보에 나오는 ‘납치된 일본인 여성 공작원 관련 자료 제공 요청’은 중요하다. 김현희는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리은혜’라는 가명(假名)의 납치되어온 일본인 여성에 대하여 증언하였던 것이다. 안기부의 자료를 받은 일본 경찰은 조사에 착수, 리은혜가 실종된 다구치 야에코임을 밝혀냈다. 김현희씨의 진술이 일본인 납치 문제가 공론화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2002년 김정일은 북한공작기구가 다구치를 납치하였음을, 방북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 앞에서 인정하였다. 사망하였다는 설명과 함께).
 
 
  일본의 독자적 對北제재에 한국은 아쉬움
 
  한국 정부는 주일대사의 건의에 따라 다음 날인 1월 22일 일본 정부 인사가 김현희를 면회하도록 했다. 1월 25일 일본은 대북제재 조치에 나설 계획을 한국에 알렸다. 주일대사가 최 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본직은 1.25. 14:00 무라타 사무차관의 초치에 따라 동 차관을 방문,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관련 일 정부의 제재 조치 결정내용을 통보받고 면담하였는바, 요지 아래 보고함.
 
  1. 무라타 차관 발언 요지
 
  가. 제재 조치 사전통보
 
  - 일 정부는 지난번 한국 정부로부터 대북한 제재 조치 요청을 받고 신중히 대응책을 검토한 결과, 일련의 대북제재 조치를 결정하였으며, 명 1.26. 오전 10시 개최 예정인 각의에서 외상이 동 제재 방침을 보고한 후, 각의 종료 후 관방장관의 담화를 통해 발표할 예정인바, 일 정부의 결정사항을 사전에 한국 측에 통보하는 것임. (중략)
 
  2. 일측 대북제재 조치 요지
 
  가. 일본 외교관과 북한 외교관과의 제3국에 있어서의 접촉을 엄격히 제한함.
 
  나. 국가공무원의 북한 방문을 원칙적으로 보류함.
 
  다. 북한 공무원의 입국은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기타 북한으로부터의 입국에 관하여는 심사를 보다 엄격히 시행함. 또한 북한 선박 기항 시 승무원의 상륙심사를 보다 엄격히 함.
 
  라. 일본과 북한 간의 특별기는 제3국의 비행기라 하더라도 입국을 인정 안 함.〉
 
  이규호 주일대사는 이날 무라타 차관에게 “북한의 테러행위를 비난하고 제재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일단 평가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일측 조치 내용에는 아국 정부가 요청한 일-북 경제교류 제한 및 조총련을 기지로 한 대(對)아국 파괴 활동에 대한 규제 조치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에 무라타 차관은 “일본 정부는 밝힌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국제기구에서 한국 정부 및 미국을 비롯한 우방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한국 측 입장에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보리 회의 소집을 위한 韓美日 공조
 
  한국 정부는 일본이 조총련 등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유엔 안보리 회의 소집을 위해 일본이 적극 협조해주기를 요청했다. 한국은 일본 측의 김현희 면담일에 일 측에 안보리 회의를 소집할 계획임을 전달했다. 최광수 장관은 이규호 주일대사에게 보낸 전보에서, “일본 외무성 고위관계관과 접촉하여 83년 9월 대한항공 격추 시와 마찬가지로 일본 명의로도 안보리 소집 요청 공한을 보내줄 것(시기는 추후 협의)과 안보리에서 토의가 있을 경우 아국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줄 것을 교섭하고 결과 보고 바람”이라고 지시했다.
 
  이규호 주일대사는 1월 25일 대사관의 박련 공사가 이날 일본 외무성 엔도 유엔국장과 만나 일본에 협조를 요청했다며 일본의 입장을 보고했다.
 
  〈엔도 국장은 북한의 칼기 폭파사건과 관련한 아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밝힌 후 안보리 소집과 관련한 요청은 동 문제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감안하면서 금후 절차상 및 실질적 문제를 검토하여 미측과 긴밀히 협의해나가면서 기본적으로 아국 입장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대응하겠다고 밝히고, 금후 실제 소집 요구 공한 발송 시기에 관해서는 아측 입장대로 금후 협의해나가자고 하였음. (하략)〉
 
  같은 날 박쌍용(朴雙龍) 외무차관은 오타 히로시 주한일본대사대리를 만나 앞서 일본이 대북제재 관련 성명문에 포함하기로 한 ‘국제기구에서 협력할 것’이라는 문구의 뜻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오타 대사대리는 “국제기구, 특히 유엔 안보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에서 관련 국가와의 긴밀한 협의하에 한국 측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은 일본이 유엔 안보리 회의 소집에 협조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히자 용기를 얻었다. 일본도 안보리 회의 소집에 적극적이었는데 1월 29일에는 한국 측에 먼저 연락을 해왔다.
 
  “현재 외무성 내에서 안보리 제기 문제에 따른 여러 가지 검토 및 준비를 하고 있음에 따라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떠한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는지 가급적 조속히 알려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한국은 일본에 유엔 안보리 회의 소집에 필요한 9개국의 동의를 얻는 데 도움을 달라는 부탁을 했다. 1월 30일 박쌍용 차관과 야나이 신이치 주한일본대사의 면담 내용 일부.
 
  〈박 차관: 우리 정부는 KAL기 사건과 관련 안보리 제기 문제를 위해 우방국과 협조 중에 있으며 현재로서는 일본을 포함,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으나, 일부 비동맹국과의 접촉에 어려움이 있음. 이와 관련, 안보리 이사국 중 브라질의 지지 확보를 위해 일본이 측면 지원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음. 우리는 안보리 이사국 지지 확보 추이를 보아가면서 안보리 제기 가능성을 검토하려고 함.
 
  야나이 대사: 본인이 알기로는 한국 측이 2월 중 안보리에 제기한다고 하는데?
 
  차관: 그러함. 현재 안보리 상정에 필요한 9개국의 지지를 확보코자 노력 중에 있음. 일본이 브라질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협조해주기 바람.〉
 
 
  중립 이사국들 설득에 나서는 韓日
 
  당시 유엔 안보리는 상임이사국 5개국과 비상임이사국 10개국 등 총 15개 국가로 구성돼 있었다. 이 중 미국과 영국·프랑스·서독·일본·이탈리아 등 6개국은 한국에 우호적이었다. 반면 소련과 중국, 그리고 친(親)북한 성향의 비동맹이사국인 유고슬라비아(유고)·알제리·잠비아 등 5개국은 입장을 보류하거나 의제 채택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한국과 일본은 애매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던 아르헨티나·브라질·네팔, 그리고 세네갈 등 4개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총력을 쏟기로 했다.
 
  소련은 “북한 소행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으며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국제테러에는 반대하나 북한을 지칭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안보리 제기는 남북한 간 긴장을 조성할 것이며 중국이 바라는 한반도 긴장 완화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도 했다.
 
  김현희가 테러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경유했던 유고는 수사 결과 발표 직후 미국에 설명을 요청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유고는 “한국이 이미 홍보 측면에서 성과를 기록했다”며 “안보리에서 잘못되면 기존 성과도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우방국으로 분류됐던 영국도 “동서(東西)대결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한국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브라질의 경우는 “중국과 소련의 거부권을 생각할 때 안보리 제기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네팔은 “북한을 직접 비난하는 내용일 경우 자신 있게 동의할 수 없고, 적극 지지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세네갈은 계속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잠비아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수사 결과가 없어 안보리 토의의 기초가 없다”고 주장했다. 알제리는 “안보리를 통해 얻는 바가 없을 것이며 남북한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이사국들의 입장이 대부분 신중하거나 애매한 가운데 한국은 일본과 함께 9개국의 동의를 받기 위해 외교전을 펼친다. 1988년 2월 초, 안보리 회의 소집을 위한 한국과 일본의 노력 과정은 다음과 같다.
 
 
  ‘北이 무관하다면, 회의 불참할 이유 없다’
 
  최광수 장관은 2월 5일 이규호 주일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공식 입장을 보류하고 있는 국가들을 외교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상황을 일본에도 전달해달라고 지시한다.
 
  〈1. 본부는 안보리 이사국 중 서방 6개국 및 네팔, 알젠틴(아르헨티나)으로부터 안보리 의제 채택에 관한 지지를 획득하고 브라질·세네갈의 지지 확보를 위해 현재 유엔 및 각국 수도를 통해 최대한 외교 교섭 중임.
 
  2. 상기 브라질 및 세네갈 중 1개국의 지지만 얻으면 안보리 소집은 가능하게 되나 현재까지의 교섭 결과 양국 공히 중립적 입장으로 안보리 내의 친북한 비동맹이사국인 유고·알제리·잠비아의 태도를 보고 있음.
 
  3. 따라서 본부는 브라질 및 세네갈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는 상기 3개 비동맹이사국으로 하여금 안보리 토의 자체에는 반대치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고, 미국을 통해 이들 국가에 대해 설득 교섭 중인바, 미측은 알제리, 잠비아에 대한 협조 요청은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통해서 병행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음.
 
  4. 본부는 안보리에서의 토의 자체(중·소의 거부권과 관련하여 결의안 채택 여부는 신축적으로 대응할 것이므로 이 점 교섭에 참고 바람)만으로도 북한의 유사한 테러행위 재발을 억제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음.
 
  5. 귀관은 일본 외무성 측과 긴급 접촉하여 상기(上記) 진전사항을 설명하고 알제리 및 잠비아 주재 일본대사관에 대해 주재국 정부가 안보리 의제 채택에 반대하지 않도록 교섭 훈령하여줄 것을 협조 요청하고 결과 보고 바람.
 
  6. 상기 요청 시 북한이 그들 주장처럼 KAL기 사건이 한국의 조작극으로 자신들이 무관하다면 안보리 토의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점도 일본 측이 알제리·잠비아 정부와의 교섭 시 거론시킴이 좋을 것으로 사료됨.〉
 
  이 전보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국 정부의 목적이 대북 결의안 채택이 아니라 회의를 소집해 이런 테러 사건의 재발을 억제하는 것이었다는 점과, ‘한국의 자작극이라면 안보리 토의에 불참할 이유가 없다’는 압박을 가하는 등 수사 결과에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준 점이다.
 
  최 장관은 같은 날 이규호 대사에게 또 한 차례 전보를 보내 “2월 9일까지 이사국의 입장을 최종 점검해 9개국 이상 지지 확보가 확인될 시에는 안보리 소집을 정식으로 요청할 것”이라며 “한국의 안보리 소집 요청 시 일본도 별도 소집 요청 공한을 발송해줄 것을 재확인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韓日 설득에 찬성으로 돌아서는 중립국들
 
  일본은 중립적인 국가들과 계속 접촉해 입장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계속해서 정보를 공유했는데, 2월 9일 의제 채택 찬성국이 9개국이 됐다는 분석을 한국에 전달했다. 일본은 소련과 중국·잠비아는 반대입장을, 브라질은 반대 혹은 기권 가능성이 높은 국가, 알제리는 반대 가능성이 큰 국가로 분석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우호적인 6개국에 아르헨티나와 네팔, 세네갈이 포함돼 9개국이 동의할 수 있고 유고 역시 찬성표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한국에 전했다. 2월 10일 일본 정부는 브라질과 유고의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며 10개국의 찬성을 확보한 것 같다는 내용을 한국에 전한다. 이규호 주일대사는 최광수 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1. 2.10. 11:00 외무성 모찌쯔기 과장이 이규형 서기관에게 연락해온바 보고함.
 
  가. 브라질(2.9. 브라질 외무성이 현지 일본대사관에 통보)
 
  브라질은 KAL기 사건을 안보리에서 토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으나, 일본 정부의 요청을 고려,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의제 채택 여부에 관한 투표 시 찬성하겠음.
 
  - 의제 내용 자체가 안보리 토의내용을 PREJUDGE(예단)하지 않아야 함.
  - 본 건이 국련헌장 제34조 및 제35조에 따라 안보리의 권한 범위 내에서 토의돼야 함.
  - 안보리 토의 내용은 상호 정보교환의 차원이어야 하며, 결의안이나 의장성명 등이 채택되지 않아야 함.
 
  나. 유고(2.9. 자가얏치 외무성 아주국장이 일본대사 대리에게 표명한 입장)
 
  - 유고는 본 건이 안보리에서 토의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으며(NOT BE AGAINST), 안보리 토의 시에는 유고도 동 토의에 참가 예정임.
  - 다만, 동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동 사건에 따른 현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에는 반대함.
  - (의제 채택 여부에 관한 투표 시 찬성할 것인가라는 일측 질문에 대하여) 타국의 태도를 포함, 전체적으로 검토하여 금후 결정할 것인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임. 입장이 결정되면 일측에 연락하겠음.
 
  2. 모찌쯔기 과장은 브라질이 의제 채택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결정함으로써, 투표 시 10국의 찬성은 확보된 것으로 보이며, 유고의 경우는 찬성할 가능성은 없는 것은 아니나, 기권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한다고 언급하였음.〉
 
  이 보고가 전달된 것은 2월 10일 오전 11시41분이었다. 한국 정부는 10개국이 찬성할 것이라는 일본의 분석을 접하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 장관은 이날 오후 3시 이규호 일본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뉴욕시각으로 2월 10일 안보리 소집 요청 공한을 제출할 것이며 일본도 거의 동시나 직후에 제출할 것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한국과 일본은 안보리 회의 소집 요청 서한을 서로 협의해 제출했으며, 유엔 안보리는 2월 16일부터 17일까지 양일간 관련 회의를 개최하게 됐다.
 


이규호 주일한국대사가 1988년 2월 9일 “일본의 분석에 따르면 안보리 이사국 중 9개국이 회의 소집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내용을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보고하는 문서.

최광수 외무장관이 1988년 2월 10일 이규호 주일한국대사에게 안보리 회의 소집 서한 제출 계획을 알리며 “일본도 같은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할 것”을 지시하는 문서.
 
  박근 대사 “北은 몽상에서 깨어나라”
 
박근 전 주유엔대사.
  2월 16일 오전 11시부터 유엔 안보리 1차 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투표 없이 채택됐다. 소련 측은 “이 사건이 안보리 토의에 적절치 않으며 한반도를 긴장시키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으나, 이런 입장을 회의기록에 남겨둘 것만 요청하고 의제 채택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북한·서독 순으로 연설이 있었고, 미국과 북한의 답변 발언이 진행됐다. 박근(朴槿) 유엔대사(지난 3월 15일 작고)는 2월 16일 회의에서 독일의 철학가 니체의 명언을 언급하며 한국과 북한의 상황을 비교했고, “한국에 와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는 김현희의 증언을 소개하며 북한에 압박을 가했다.
 
  “한국은 북한의 지독하고 오랫동안 지속돼온 적대행위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독일 철학가의 충고에 담긴 지혜를 한 번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신식 경제체제를 확장하는 열린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반면 북한에는 속임수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통제와 억압이라는 괴물과 같은 국가기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국가가 직접 지휘하는 북한의 테러행위는 이런 괴물과 같은 정권의 천성(天性)이다. (중략) 그녀(김현희)의 발언들은 대한민국의 궁극적인 강력함과 북한의 근본적인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발언들은 북한 당국에 대한 마지막 경고가 돼야 한다. 우리는 북한이 너무 늦기 전에 깨어날 것을, 이 오랜 몽상(nightmare·악몽)에서 지금 깨어날 것을 촉구하고 싶다.”
 
 
  北, “미국이 테러국가”
 
  2월 17일 외무부가 작성한 토의 결과 보고서에는 “소련을 제외한 중공과 잠비아 등 친(親)북한 공산국가조차 중립적 발언을 하거나 북한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알제리와 브라질이 발언하지 않은 점은 북괴 만행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도 파나마와 쿠바, 인디아 항공 등 추락사건이 미국 정부 테러에 의한 사건이라는 등 미국을 테러국가라고 주장함으로써 안보리 의장인 미국대사가 그러한 쓰레기 같은 소리(SUCH RUBBISH)를 안보리가 참고 들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했다.
 
  북한은 이날 회의에서 KAL기 사건은 모두 한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며 일본과 미국, 그리고 바레인까지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김현희를 서울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한국이 바레인 측에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줬다는 주장을 했다. 바레인은 “북한과 외교 관계가 있었다면 단교(斷交) 조치까지 검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2월 17일 안보리 회의가 끝난 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안보리 토의 내용을 보고했다. 최 장관은 “미국 유엔대표부 측은, 아국이 온건하나 침착하고 외교적인 연설을 통해 전체 안보리 이사국을 확신시키는 데 성공한 데 반해, 북한은 비논리적이고 저속한 발언으로 궁경(窮境)에 몰려 아측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했다”고 했다. 일부 보고 내용을 소개한다.
 
  〈3. 북한은 오늘 발언에서 바레인을 자극, 비난함으로써 바레인은 두 번 발언을 통하여 북한이 바레인의 범죄인 인도에 한국이 위협하고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일본 대표는 한국과 일본의 합의하에 범인을 한국으로 인도시켰다고 하는 북한 대표의 발언이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였는바, 이에 대하여 북한은 답변권을 행사, 일본은 군국주의를 부활시켜 아시아 국가를 재침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미-일이 공동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 등 억지 주장을 하였습니다.
 
  4. 소련·중공·잠비아 등 북한에 동정적인 발언을 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국가들도 모두 테러행위는 어떠한 국가에 의하여 저질러졌느냐를 막론하고 규탄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만 금번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진상이 더 밝혀져야 한다고 하여 금번 사건이 한국 조작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옹호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 것이 주목되었습니다.〉
 
  2월 24일 주일대사관의 박련 공사는 무라타 외무사무차관과의 면담 내용을 최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무라타 차관과 만난 자리에서 KAL기 사건의 안보리 토의 관련 일본 측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에 사의(謝意)를 표하였는바 무라타 차관은 일측도 금번 안보리 토의 결과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다.
 
박근 주유엔한국대사가 1988년 2월 17일 안보리 회의가 끝난 뒤 결과를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보고하는 문서.
 
  김현희 “진실이 싫고 북한을 옹호하고 싶은가 봅니다”
 
1989년 3월 7일 첫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출두한 김현희. 일부 세력은 아직까지도 KAL858기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한국은 안기부 수사 발표 직전부터 미국, 일본과 공조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은 거부권이 있는 소련과 중국으로 인해 사실상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한 다음 일단 회의를 소집, 세계 앞에서 북한 정권을 고발하는 전략에 주력, 성공하였다.
 
  그런데도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사람들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지 않았고 이는 한국의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이 사건을 추적해왔다는 한 신부는 201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관련 기사를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
 
  〈안보리에서 한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나라는 미국뿐이었습니다. 7개국의 나라는 한국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이 테러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물과 객관적 사실들을 제시하지 못한 부분이 참가국들에는 설득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한국이 강력하게 주장한 UN 안보리의 ‘대북규탄 결의안’ 채택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주장이 담긴 기사는 사건 발생 30년이 되던 해인 2017년에 게재됐다. 냉전(冷戰)시대인 30년 전 소련과 중국조차도 안보리 회의에서 하지 않던 주장들이 30년이 흐른 지금도 피해국 언론의 지면에 소개되고 있는 판이다. 김현희씨는 사건 발생 30주년이던 2017년 11월, 김영남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가짜로 모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글쎄요. 제가 유일하게 살아 있고 그 수많은 증언과 증거가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아무리 진짜라고,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해도 그들은 진실이 싫은 것 같습니다. 북한이 했다는 이 테러의 진실이 싫고, 북한을 이념적으로 옹호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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