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 때 미국의 선제타격설은 블러핑…, 클린턴, 경수로 비용 등 한국에 전가(轉嫁)
⊙ 김영삼, “한미 간 정보 공유 부족했다”… 제네바합의 가까워질수록 한미 외무당국 간 협의 약화
⊙ 클린턴 정권, “(김대중 정권이) 좌파면 어떠냐? 親美的 정책 펴니 얼마나 좋은가”
⊙ 더 이상 폭탄 돌리기 할 수 없는 트럼프, 북핵문제 꼭 해결해야
김석우
1945년 출생.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제법 석사, 美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수료 / 외무부 정세분석관, 아주국장,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의전수석비서관, 통일원 차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역임. 현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장
⊙ 김영삼, “한미 간 정보 공유 부족했다”… 제네바합의 가까워질수록 한미 외무당국 간 협의 약화
⊙ 클린턴 정권, “(김대중 정권이) 좌파면 어떠냐? 親美的 정책 펴니 얼마나 좋은가”
⊙ 더 이상 폭탄 돌리기 할 수 없는 트럼프, 북핵문제 꼭 해결해야
김석우
1945년 출생.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국제법 석사, 美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수료 / 외무부 정세분석관, 아주국장,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의전수석비서관, 통일원 차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역임. 현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장
- 3월 8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왼쪽)과 만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북정상회담 관련 내용을 정 실장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사진=청와대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5월 또는 6월에는 미북(美北)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한편 3월 26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북(中北)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혈맹관계를 다시 확인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금년 1월 31일 연두교서(年頭敎書)에서 “북한의 무모한 핵미사일 추구가 매우 가까운 미래에 미국 본토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과거의 미국 정부와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화염과 분노’와 같은 격한 표현까지 쓰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도 서슴지 않아 왔다. 그러던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사이에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북핵(北核)문제로 인해 전쟁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한반도에 긴장이 조성됐다가 갑작스럽게 정상회담과 대화 모드로 바뀌는 상황을 우리는 25년 전에도 목격했다.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가 그것이다.
제1차 북핵 위기는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시작됐다. 북한의 폭탄선언은 갓 출범한 김영삼(金泳三) 정권의 외교를 유령처럼 괴롭혔다.
전 세계 NPT 체제의 중심인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한미 간의 협의를 기초로 하여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도록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미·북 간 뉴욕채널을 통한 물밑 준비를 거쳐 1993년 7월 로버트 갈루치 미국 국무부 정치군사담당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 간에 핵협상이 시작됐다. 북한 측은 살라미 전법으로 단계를 쪼개고, 단계마다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여 최대한 보상을 받아내는 끈질긴 수법을 구사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 13일 서명한 남북기본합의서나 12월 31일 발표한 한반도비핵화(非核化)공동선언은 김일성에게는 한낮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애당초 이 조약들은 김일성-김정일이 전 세계적 공산권 몰락의 쓰나미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평화공세를 펴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명 전날 김일성은 연형묵 북측 단장에게 어떤 양보라도 좋으니 합의문을 타결하라고 지시했다.
고(故) 황장엽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 측이 대폭 양보하여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바로 그날 김일성은 북한의 대표단을 헬리콥터를 보내 평양으로 귀환시켰다. 이들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목란관에서 성대한 만찬을 열었다. 김일성은 감격해서 북한 대표단에게 “동무들 때문에 우리 조국이 살게 됐다”고 크게 치하했다.
북한의 과감한 양보는 위기상황에서 상대의 공세를 막기 위한 편법에 불과했다. 한국 대표단은 합의서 서명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만세를 불렀으나, 김일성-김정일은 합의를 지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안으로는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게리 럭, “北 장사정포에 100만명 희생”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철저하게 막아주기를 원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 NPT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북한 핵개발을 막으려 했지만, 북한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어려움이 컸다.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 간에 북핵문제 해결 방안에 관하여 점차 간극이 생겼다. 전화통화가 1시간씩이나 계속되다가 논쟁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컸다. 때문에 과거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앞으로의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경 입장이었다.
반면에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11월 8일 중간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북핵문제에서 진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과거 핵문제는 대강대강 덮어두고 앞으로의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선의 미봉책(彌縫策)을 택하게 된다.
1994년 3월 19일 남북 특사(特使) 파견을 위한 판문점 실무회담이 열렸다. 북한의 박영수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는 바람에 긴장이 고조됐다. 북한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박전술로 위기를 고조시킨 것이다. 라면·휴지 등 일부 생필품의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한(駐韓)미국대사관은 유사시 미군 가족이나 미국인들을 소개(疏開)시키기 위한 계획안을 일상적으로 점검했다. 5월 중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은 미군 가족들 소개를 위한 안내서를 입수,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가 손주들을 본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얘기와 함께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바로 그날 오후 레이니 대사와 게리 럭 유엔군 사령관을 청와대에 초치했다. 김 대통령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先制)타격 가능성 소문과 관련, 북한이 보복공격을 할 경우 한국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럭 사령관은 “수백 문의 북한 장사정포(長射程砲)의 첫 포격을 피할 수 없으며, 서울 시민 100만명 정도가 피해를 입게 된다”고 대답했다. 그 후 게리 럭 사령관은 워싱턴의 의회 청문회에서도 100만명 피해 가능성에 대해 증언했다. 김 대통령은 그렇게 피해가 크다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방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정상회담 무산
마침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후, 앨 고어 부통령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에게도 그 뜻을 전달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등장을 불편하게 생각한 클린턴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 정부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카터 전 대통령이 6월 14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방북(訪北) 취지를 설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막판에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카터의 청와대 면담 요청을 받아들였다.
카터가 6월 15~18일 평양을 방문, 김일성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김일성도 동의했다. 귀로(歸路)에 한국을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이 이 사실을 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수락 의사를 표함으로써,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됐다. 남북은 곧바로 이에 관한 협의에 들어가 7월 2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양측이 실무적 준비를 진행하던 7월 9일 북한중앙방송은 12시뉴스에서 김일성이 하루 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제네바에서의 갈루치-강석주 간의 북핵문제 협상 제3차 회의도 7월 8일 시작됐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중단됐다. 7월 19일 장례 일정이 끝난 직후인 7월 21일 미북은 8월 5일에 제네바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갈루치 차관보가 이끄는 대표단이 7월 19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일본·중국·러시아를 방문, 북한 희망대로 흑연감속로를 경수로(輕水爐)로 전환하는 데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8월 5~12일 제네바에서 속개된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북핵문제의 전반적 해결을 위한 실질적 합의문을 타결, 서명했다.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한은 NPT에 잔류해 안전협정을 이행하며,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기로 했다. 9월 23일 제3차 미북회담의 제2차 회의가 제네바에서 시작됐다. 10월 21일 미북은 기본합의서(Agreed Framework)에 서명했다. 11월 8일 미국 중간선거 3주 전이었다.
김정일에 대한 오판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했지만 미북 간 제네바 협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됐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첫째, 김정일이 이미 북한의 완벽한 실질 통치자였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정권의 생존을 위해 핵개발을 추구하면서,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미국의 양보를 얻어냈다. 강석주는 협상에서 미국을 농락했고, 북한 정권의 핵심에서는 김정일이 사태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빈틈없이 끌고 간 것이다. 한국 정부는 김정일이 방탕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됐고 비정상적이라는 첩보를 믿으려 했다. 한국의 대북(對北) 정보가 형편없었음을 반성해야 한다. 미국 측은 미북 협상 타결에 급급해 김정일 정권이 곧 망한다든지, 경수로는 결국 한국 게 된다든지 하는 말을 흘렸다.
둘째, 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버티는 상황에서 클린턴 정부는 손쉬운 미봉책으로 타결하기 위해 한국 측에 위기의식을 증폭시켰다. 5월 미국인 소개훈련에서 시작하여 북핵시설을 선제타격할 경우 10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다는 경고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겁을 준 것이다. 일종의 블러핑(bluffing)이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서두르는 제네바합의에 동의하고, 경수로 건설비용 46억 달러의 70%를 두말없이 부담하기로 했다.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Two Koreas)》에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정책 일관성이 없는 변덕쟁이’라고 혹평했다. 처음에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핵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라고 강하게 요구하다가, 막상 북한 핵시설 선제타격 방안을 준비하자 반대로 돌변했다고 비난했다. 국내에도 비슷한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는 소리가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도 북핵 선제타격 방안은 구체화된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미국이 정말 선제타격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미국 관계자가 극비리에 정종욱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및 김영삼 대통령과 협의했어야 한다. 정종욱 수석비서관이 주한미군 가족 소개훈련 안내서를 입수,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가지고 당시 미국이 선제타격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사실관계의 왜곡이다. 이는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군사적 옵션에 관한 준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하고 치밀하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1999년 봄 퇴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돈 오버도퍼의 비판을 전했다. 김 대통령은 “첫째, 어느 대통령이 100만명의 국민이 희생되는 무력(武力) 충돌에 쉽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둘째, 미북 핵협상과 관련하여 한미 간에는 동맹이라기에는 관계 정보의 공유(共有)가 부족했다”고 담담하게 답변했다. 실제 제네바 협상 시 현지에 파견된 장재룡 외무부 미주국장과 갈루치 미국 국무부 차관보 간에는 초기에는 사전·사후(事前·事後) 협의가 있었으나, 막바지로 갈수록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북핵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 달라는 한국 측의 요구를 피해 가면서, 경수로 건설비용을 한국 측에 전가(轉嫁)하기 위해 선제타격 카드를 블러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은 NPT 탈퇴를 통해 정권 생존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그는 벼랑끝 전술을 통해 경제적 보상을 받고, 대신 핵동결을 약속하는 제네바 핵합의를 얻어냈다. 이후 경수로 지원, 대규모 식량·중유(重油) 지원이 있었지만, 실제 북한 주민의 민생은 개선되지 않았다. 참혹한 폭압정치를 행하는 북한 정권의 수명만 연장시켜 주었다. 북한이 핵동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드러났다. 북한 정권은 계속 속임수를 써가면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여 미국 본토를 타격권에 넣을 수 있는 오늘의 단계에 도달했다.
“IMF사태는 김영삼 정권에 교훈 주기 위한 것”
한편, 한미 간에는 북핵문제 처리 과정에서 전선(戰線)의 불일치가 발생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 간에 짙은 앙금이 남게 됐다.
필자는 김대중 정권 출범 후인 1998년 말부터 워싱턴의 CSIS(전략국제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했다. 이때 필자는 전 주한미국대사관 정무과장이던 로버트슨 담당관을 1999년 가을 만났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클린턴 백악관이 얼마나 해피한지 모른다”며 흥분조로 이렇게 말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미국 대통령을 괴롭히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으로 잠자고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놀라게 한 데서 시작해서, 군(軍) 출신을 포함하여 보수적 대통령들이 모두 미국 대통령을 어렵게 만들었다. 유일하게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예외는 월남파병 결정이었다.”
그의 말 속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불만이 녹아 있었다.
CSIS의 커트 캠블 부소장(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시 동아태 차관보)은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국의 IMF 금융위기는 김영삼 정권에 교훈을 주려는 클린턴 정권의 목적과 한국의 알짜 금융시장을 개방시키려는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의도에 원인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금융위기 바로 직전 1997년 11월 11일 엄낙용 재정경제원 차관보는 급히 일본을 방문해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대장성(大藏省) 재무관과 회담을 갖고 30억 달러 상당의 통화스와핑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월스트리트 출신인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미쓰즈카 히로시 일본 대장상에게 보낸 편지로 무산됐다. 결국 한국은 IMF 구제금융 체제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앙금이 만든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북핵 개발 도운 김대중·노무현 정권
클린턴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이념적 색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앞에서 말한 로버트슨 담당관은 클린턴 백악관의 분위기를 필자에게 전했다. “좌파면 어떠냐? 친미적(親美的) 정책을 펴니 얼마나 좋은가”라는 것이다. 클린턴에게 애를 먹인 ‘우파’ 김영삼 정권보다는 미국에 고분고분한 ‘좌파’ 김대중 정권이 더 편하다는 얘기였다.
미국이 김대중 정부의 실체를 알게 되는 데는 2년이나 걸렸다. 클린턴과 호흡이 잘 맞는다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 사회에서 난데없이 반미주의(反美主義)가 봇물 터지듯이 일어났다. 미국 사회는 반미주의 운동이 거의 없던 동맹국 한국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핵심 지지 세력 중 하나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념적으로 좌파 운동권이라는 것을 미국인들이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클린턴 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북한을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2000년 10월 9~12일 워싱턴을 방문해 관계 개선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10월 23~25일 북한을 답방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자신을 위해 10만명이 동원된 집단체조를 관람하고 감격했다고 한다.
2000년 11월 7일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퇴임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은 직접 북한을 방문하려다가 부시 당선자 측의 만류로 포기했다.
2000년 6월 열린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관찰하던 미국 전문가들은 부자연스런 측면을 발견했다. 대북 불법송금에 관한 정보가 의회조사국 래리 닉시 박사 등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불법 대북송금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 취임 후 워싱턴 방문을 서둘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7일 워싱턴을 방문해 한미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1월 25일 축하 전화를 걸었을 때에 햇볕정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다. 부시 대통령은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옆 사람에게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지? 어떻게 이렇게 순진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 유화정책을 취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은 핵을 가질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하면서 “만약 핵개발을 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의 임기 말에 무리하게 방북하여 10·4 공동선언을 채택, 방대한 재정부담을 필요로 하는 대북지원을 약속했다. 김정일과 만났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외국 주요 인사들과 만나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는 취지의 자랑까지 했다. 이러한 일들이 북한의 은밀한 핵개발에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美北, 긴장국면에서 정상회담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년간 역대 미국 정권이 미봉책을 쓰는 바람에 생긴 폭탄을 넘겨받았다.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결단해야 한다. 그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대북압박 수단에는 군사적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 셰일가스 혁명 덕분에 중동(中東)사태에 급히 달려갈 필요도 줄어들었다. 물론 군사적 방안을 선호할 리는 없다. 최대한 압박을 통해서 북핵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핵포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 대화는 할 생각이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도 강화됐다. 중국은 상당기간 유엔제재에 부정적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압박을 가하자 북한의 석탄·수산물·의류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엄격한 제재에 동의하게 됐다. 얼마 전까지 김정은은 중국의 대북제재 동참에 대해 “큰 나라가 줏대 없이 미국에 놀아난다”고 비난했었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후 8일 만인 2017년 9월 11일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제재결의 제2375호의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연간 30억 달러 수준이던 북한의 2017년 수출액이 16억 5000만 달러로 급감한 것이다. 북한이 작년 11월 29일 화성-15형 장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안보리는 12월 23일 안보리결의 2397호를 채택했다. 작년 12월과 금년 1월 수출액은 전년 대비 80% 이상 줄어들었다.
금년 북한 수출액은 5억 달러도 안 될 전망이다. 단둥의 북중(北中)무역이 얼어붙었다. 돈주들은 ‘폭풍 전야의 고요’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 위기 속에서 미국의 군사옵션 가능성이 점차 커져왔다.
김정은 정권으로서는 제2의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래서 평화공세가 필요했다. 그들이 보기에 가장 약한 고리는 문재인(文在寅) 정부였을 것이다.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 의향을 내비쳤다. 이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문재인 정부는 일사천리로 북한 대표단과 응원단의 방한(訪韓)을 받아들였다.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김여정은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에 따라 정의용 안보실장 일행이 3월 5일 평양을 방문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있은 후에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미북정상회담이 결정됐다. 정의용 실장이 ‘북한의 핵포기를 전제로 하는’ 미북정상회담 제의를 전달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즉각 수락하고, 정 실장에게 그 내용을 언론에 브리핑하라고 했다. 하지만 정 실장 발표 후 한 시간 뒤에 열린 백악관 자체 브리핑은 북한이 비핵화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압박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상회담을 앞둔 미국과 한국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하는 바람에 북핵 폐기와 관련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맞이하게 됐다. 김정은은 응원이 필요했다. 3월 26일 시진핑과의 전격적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비핵화는 선대(先代)의 유언”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폈다. 북한 핵의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한 불가역적(不可逆的) 핵폐기(CVID)’를 요구하는 미국과는 결이 다르다. 단계적 해결로 보상과 시간 끌기를 하겠다는 의도가 나타났다. 이에 청와대 주변에서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의 강경 입장을 바꾸도록 설득하자는 ‘북한응원론’마저 나온다. 또다시 북한 정권의 시간 벌기를 도와주는 조연이 되려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3월 29일 오하이오주 리치필드 연설에서 “북핵문제 해결 이후로 한미 FTA 완결 문제는 미루겠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북핵문제 해결에 진력하라는 압박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에서는 일견 친미주의자라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그 지지 기반에는 ‘민족끼리’ 구호를 주장하는 반미 세력이 있었다. 이 세력은 한미동맹을 흔들어댔다. 황장엽 선생은 생전에 “1997년 4월 내가 망명할 당시에 북한 정권의 수명이 거의 다했으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북한 정권과 군대는 빈사(瀕死)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0년간 80억 달러 이상의 대북지원이 북핵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북한에 지원을 해주면 북한도 화답할 것이라는 사고는 너무 순진하든가, 아니면 친북적(親北的)이든가 둘 중의 하나다. 북한 정권의 끊임없는 속임수를 경험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대북 유화론자들은 순진하다기보다는 친북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편에 서서 북한 주민들의 민생과 인권을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다. 그들은 북한인권법 제정 과정과 그 후 계속되어 온 북한 인권 사보타주에서 그 실체를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에는 임종석 비서실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과거 주사파(主思派) 운동권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들이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을 외치면서 친북 활동하던 입장에서 전향(轉向)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친북 행보를 택할지, 트럼프 대통령과 공동 보조를 취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문재인 정부 핵심 인사들의 과거 경력에 비추어 볼 때, 이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체제 완성을 방조하는 구원투수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문재인-김정은 회담에서 어떤 이면(裏面) 합의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농락할 가능성도 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북핵문제를 미봉책으로 끌고 갈 수 없다. 국무장관으로 마이크 폼페이오 전 CIA 국장, 안보보좌관으로 존 볼턴 전 주유엔대사 같은 강경파들을 전격 기용해 안보라인을 새로 짠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볼턴 안보보좌관은 북한에 대한 선제 폭격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다. 무엇보다 그들은 북한 정권과 한국 좌파의 속임수를 잘 읽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정부들과 다르다.
클린턴 대통령이 25년 전 이러한 결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의 속임수를 알고 있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그걸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금년 1월 31일 연두교서(年頭敎書)에서 “북한의 무모한 핵미사일 추구가 매우 가까운 미래에 미국 본토를 위협할 것”이라면서 “과거의 미국 정부와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화염과 분노’와 같은 격한 표현까지 쓰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도 서슴지 않아 왔다. 그러던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사이에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북핵(北核)문제로 인해 전쟁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한반도에 긴장이 조성됐다가 갑작스럽게 정상회담과 대화 모드로 바뀌는 상황을 우리는 25년 전에도 목격했다.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가 그것이다.
제1차 북핵 위기는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시작됐다. 북한의 폭탄선언은 갓 출범한 김영삼(金泳三) 정권의 외교를 유령처럼 괴롭혔다.
전 세계 NPT 체제의 중심인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한미 간의 협의를 기초로 하여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도록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미·북 간 뉴욕채널을 통한 물밑 준비를 거쳐 1993년 7월 로버트 갈루치 미국 국무부 정치군사담당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 간에 핵협상이 시작됐다. 북한 측은 살라미 전법으로 단계를 쪼개고, 단계마다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여 최대한 보상을 받아내는 끈질긴 수법을 구사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 13일 서명한 남북기본합의서나 12월 31일 발표한 한반도비핵화(非核化)공동선언은 김일성에게는 한낮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애당초 이 조약들은 김일성-김정일이 전 세계적 공산권 몰락의 쓰나미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평화공세를 펴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명 전날 김일성은 연형묵 북측 단장에게 어떤 양보라도 좋으니 합의문을 타결하라고 지시했다.
고(故) 황장엽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 측이 대폭 양보하여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바로 그날 김일성은 북한의 대표단을 헬리콥터를 보내 평양으로 귀환시켰다. 이들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목란관에서 성대한 만찬을 열었다. 김일성은 감격해서 북한 대표단에게 “동무들 때문에 우리 조국이 살게 됐다”고 크게 치하했다.
북한의 과감한 양보는 위기상황에서 상대의 공세를 막기 위한 편법에 불과했다. 한국 대표단은 합의서 서명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만세를 불렀으나, 김일성-김정일은 합의를 지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안으로는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게리 럭, “北 장사정포에 100만명 희생”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철저하게 막아주기를 원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 NPT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북한 핵개발을 막으려 했지만, 북한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어려움이 컸다.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 간에 북핵문제 해결 방안에 관하여 점차 간극이 생겼다. 전화통화가 1시간씩이나 계속되다가 논쟁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컸다. 때문에 과거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앞으로의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경 입장이었다.
반면에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11월 8일 중간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북핵문제에서 진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과거 핵문제는 대강대강 덮어두고 앞으로의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선의 미봉책(彌縫策)을 택하게 된다.
1994년 3월 19일 남북 특사(特使) 파견을 위한 판문점 실무회담이 열렸다. 북한의 박영수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는 바람에 긴장이 고조됐다. 북한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박전술로 위기를 고조시킨 것이다. 라면·휴지 등 일부 생필품의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한(駐韓)미국대사관은 유사시 미군 가족이나 미국인들을 소개(疏開)시키기 위한 계획안을 일상적으로 점검했다. 5월 중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은 미군 가족들 소개를 위한 안내서를 입수,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가 손주들을 본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얘기와 함께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바로 그날 오후 레이니 대사와 게리 럭 유엔군 사령관을 청와대에 초치했다. 김 대통령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先制)타격 가능성 소문과 관련, 북한이 보복공격을 할 경우 한국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럭 사령관은 “수백 문의 북한 장사정포(長射程砲)의 첫 포격을 피할 수 없으며, 서울 시민 100만명 정도가 피해를 입게 된다”고 대답했다. 그 후 게리 럭 사령관은 워싱턴의 의회 청문회에서도 100만명 피해 가능성에 대해 증언했다. 김 대통령은 그렇게 피해가 크다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방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정상회담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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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부가 김일성 주석 등 노동당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황장엽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크리스텐슨 부대사, 카터 전 대통령, 김일성 주석, 로잘린 카터 전 대통령 부인, 오른쪽 끝이 강석주 외교부부장. |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카터 전 대통령이 6월 14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방북(訪北) 취지를 설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방북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막판에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카터의 청와대 면담 요청을 받아들였다.
카터가 6월 15~18일 평양을 방문, 김일성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김일성도 동의했다. 귀로(歸路)에 한국을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이 이 사실을 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수락 의사를 표함으로써,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됐다. 남북은 곧바로 이에 관한 협의에 들어가 7월 2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양측이 실무적 준비를 진행하던 7월 9일 북한중앙방송은 12시뉴스에서 김일성이 하루 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제네바에서의 갈루치-강석주 간의 북핵문제 협상 제3차 회의도 7월 8일 시작됐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중단됐다. 7월 19일 장례 일정이 끝난 직후인 7월 21일 미북은 8월 5일에 제네바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갈루치 차관보가 이끄는 대표단이 7월 19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일본·중국·러시아를 방문, 북한 희망대로 흑연감속로를 경수로(輕水爐)로 전환하는 데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8월 5~12일 제네바에서 속개된 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북핵문제의 전반적 해결을 위한 실질적 합의문을 타결, 서명했다.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한은 NPT에 잔류해 안전협정을 이행하며,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기로 했다. 9월 23일 제3차 미북회담의 제2차 회의가 제네바에서 시작됐다. 10월 21일 미북은 기본합의서(Agreed Framework)에 서명했다. 11월 8일 미국 중간선거 3주 전이었다.
김정일에 대한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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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위 이사회. 제네바합의 이행 비용은 한국이 거의 부담했다. |
첫째, 김정일이 이미 북한의 완벽한 실질 통치자였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정권의 생존을 위해 핵개발을 추구하면서,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미국의 양보를 얻어냈다. 강석주는 협상에서 미국을 농락했고, 북한 정권의 핵심에서는 김정일이 사태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빈틈없이 끌고 간 것이다. 한국 정부는 김정일이 방탕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됐고 비정상적이라는 첩보를 믿으려 했다. 한국의 대북(對北) 정보가 형편없었음을 반성해야 한다. 미국 측은 미북 협상 타결에 급급해 김정일 정권이 곧 망한다든지, 경수로는 결국 한국 게 된다든지 하는 말을 흘렸다.
둘째, 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버티는 상황에서 클린턴 정부는 손쉬운 미봉책으로 타결하기 위해 한국 측에 위기의식을 증폭시켰다. 5월 미국인 소개훈련에서 시작하여 북핵시설을 선제타격할 경우 10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다는 경고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겁을 준 것이다. 일종의 블러핑(bluffing)이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서두르는 제네바합의에 동의하고, 경수로 건설비용 46억 달러의 70%를 두말없이 부담하기로 했다.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Two Koreas)》에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정책 일관성이 없는 변덕쟁이’라고 혹평했다. 처음에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핵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라고 강하게 요구하다가, 막상 북한 핵시설 선제타격 방안을 준비하자 반대로 돌변했다고 비난했다. 국내에도 비슷한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는 소리가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도 북핵 선제타격 방안은 구체화된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미국이 정말 선제타격을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미국 관계자가 극비리에 정종욱 외교안보수석비서관 및 김영삼 대통령과 협의했어야 한다. 정종욱 수석비서관이 주한미군 가족 소개훈련 안내서를 입수,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가지고 당시 미국이 선제타격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사실관계의 왜곡이다. 이는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군사적 옵션에 관한 준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하고 치밀하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1999년 봄 퇴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돈 오버도퍼의 비판을 전했다. 김 대통령은 “첫째, 어느 대통령이 100만명의 국민이 희생되는 무력(武力) 충돌에 쉽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둘째, 미북 핵협상과 관련하여 한미 간에는 동맹이라기에는 관계 정보의 공유(共有)가 부족했다”고 담담하게 답변했다. 실제 제네바 협상 시 현지에 파견된 장재룡 외무부 미주국장과 갈루치 미국 국무부 차관보 간에는 초기에는 사전·사후(事前·事後) 협의가 있었으나, 막바지로 갈수록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북핵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 달라는 한국 측의 요구를 피해 가면서, 경수로 건설비용을 한국 측에 전가(轉嫁)하기 위해 선제타격 카드를 블러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은 NPT 탈퇴를 통해 정권 생존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그는 벼랑끝 전술을 통해 경제적 보상을 받고, 대신 핵동결을 약속하는 제네바 핵합의를 얻어냈다. 이후 경수로 지원, 대규모 식량·중유(重油) 지원이 있었지만, 실제 북한 주민의 민생은 개선되지 않았다. 참혹한 폭압정치를 행하는 북한 정권의 수명만 연장시켜 주었다. 북한이 핵동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드러났다. 북한 정권은 계속 속임수를 써가면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여 미국 본토를 타격권에 넣을 수 있는 오늘의 단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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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24일 APEC 정상회담에서 만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 두 사람은 북핵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
필자는 김대중 정권 출범 후인 1998년 말부터 워싱턴의 CSIS(전략국제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했다. 이때 필자는 전 주한미국대사관 정무과장이던 로버트슨 담당관을 1999년 가을 만났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클린턴 백악관이 얼마나 해피한지 모른다”며 흥분조로 이렇게 말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미국 대통령을 괴롭히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으로 잠자고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놀라게 한 데서 시작해서, 군(軍) 출신을 포함하여 보수적 대통령들이 모두 미국 대통령을 어렵게 만들었다. 유일하게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예외는 월남파병 결정이었다.”
그의 말 속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불만이 녹아 있었다.
CSIS의 커트 캠블 부소장(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시 동아태 차관보)은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국의 IMF 금융위기는 김영삼 정권에 교훈을 주려는 클린턴 정권의 목적과 한국의 알짜 금융시장을 개방시키려는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의도에 원인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금융위기 바로 직전 1997년 11월 11일 엄낙용 재정경제원 차관보는 급히 일본을 방문해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대장성(大藏省) 재무관과 회담을 갖고 30억 달러 상당의 통화스와핑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월스트리트 출신인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미쓰즈카 히로시 일본 대장상에게 보낸 편지로 무산됐다. 결국 한국은 IMF 구제금융 체제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앙금이 만든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북핵 개발 도운 김대중·노무현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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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7일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서로 간의 이견이 컸다. |
미국이 김대중 정부의 실체를 알게 되는 데는 2년이나 걸렸다. 클린턴과 호흡이 잘 맞는다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 사회에서 난데없이 반미주의(反美主義)가 봇물 터지듯이 일어났다. 미국 사회는 반미주의 운동이 거의 없던 동맹국 한국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핵심 지지 세력 중 하나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념적으로 좌파 운동권이라는 것을 미국인들이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클린턴 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북한을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2000년 10월 9~12일 워싱턴을 방문해 관계 개선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10월 23~25일 북한을 답방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자신을 위해 10만명이 동원된 집단체조를 관람하고 감격했다고 한다.
2000년 11월 7일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퇴임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은 직접 북한을 방문하려다가 부시 당선자 측의 만류로 포기했다.
2000년 6월 열린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관찰하던 미국 전문가들은 부자연스런 측면을 발견했다. 대북 불법송금에 관한 정보가 의회조사국 래리 닉시 박사 등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불법 대북송금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 취임 후 워싱턴 방문을 서둘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3월 7일 워싱턴을 방문해 한미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1월 25일 축하 전화를 걸었을 때에 햇볕정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다. 부시 대통령은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옆 사람에게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지? 어떻게 이렇게 순진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 유화정책을 취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은 핵을 가질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하면서 “만약 핵개발을 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의 임기 말에 무리하게 방북하여 10·4 공동선언을 채택, 방대한 재정부담을 필요로 하는 대북지원을 약속했다. 김정일과 만났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외국 주요 인사들과 만나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는 취지의 자랑까지 했다. 이러한 일들이 북한의 은밀한 핵개발에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년간 역대 미국 정권이 미봉책을 쓰는 바람에 생긴 폭탄을 넘겨받았다.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결단해야 한다. 그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대북압박 수단에는 군사적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 셰일가스 혁명 덕분에 중동(中東)사태에 급히 달려갈 필요도 줄어들었다. 물론 군사적 방안을 선호할 리는 없다. 최대한 압박을 통해서 북핵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핵포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 대화는 할 생각이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도 강화됐다. 중국은 상당기간 유엔제재에 부정적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압박을 가하자 북한의 석탄·수산물·의류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엄격한 제재에 동의하게 됐다. 얼마 전까지 김정은은 중국의 대북제재 동참에 대해 “큰 나라가 줏대 없이 미국에 놀아난다”고 비난했었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후 8일 만인 2017년 9월 11일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제재결의 제2375호의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연간 30억 달러 수준이던 북한의 2017년 수출액이 16억 5000만 달러로 급감한 것이다. 북한이 작년 11월 29일 화성-15형 장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안보리는 12월 23일 안보리결의 2397호를 채택했다. 작년 12월과 금년 1월 수출액은 전년 대비 80% 이상 줄어들었다.
금년 북한 수출액은 5억 달러도 안 될 전망이다. 단둥의 북중(北中)무역이 얼어붙었다. 돈주들은 ‘폭풍 전야의 고요’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 위기 속에서 미국의 군사옵션 가능성이 점차 커져왔다.
김정은 정권으로서는 제2의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래서 평화공세가 필요했다. 그들이 보기에 가장 약한 고리는 문재인(文在寅) 정부였을 것이다.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 의향을 내비쳤다. 이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문재인 정부는 일사천리로 북한 대표단과 응원단의 방한(訪韓)을 받아들였다.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김여정은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에 따라 정의용 안보실장 일행이 3월 5일 평양을 방문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있은 후에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미북정상회담이 결정됐다. 정의용 실장이 ‘북한의 핵포기를 전제로 하는’ 미북정상회담 제의를 전달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즉각 수락하고, 정 실장에게 그 내용을 언론에 브리핑하라고 했다. 하지만 정 실장 발표 후 한 시간 뒤에 열린 백악관 자체 브리핑은 북한이 비핵화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압박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상회담을 앞둔 미국과 한국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하는 바람에 북핵 폐기와 관련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맞이하게 됐다. 김정은은 응원이 필요했다. 3월 26일 시진핑과의 전격적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비핵화는 선대(先代)의 유언”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폈다. 북한 핵의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한 불가역적(不可逆的) 핵폐기(CVID)’를 요구하는 미국과는 결이 다르다. 단계적 해결로 보상과 시간 끌기를 하겠다는 의도가 나타났다. 이에 청와대 주변에서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의 강경 입장을 바꾸도록 설득하자는 ‘북한응원론’마저 나온다. 또다시 북한 정권의 시간 벌기를 도와주는 조연이 되려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3월 29일 오하이오주 리치필드 연설에서 “북핵문제 해결 이후로 한미 FTA 완결 문제는 미루겠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북핵문제 해결에 진력하라는 압박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에서는 일견 친미주의자라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그 지지 기반에는 ‘민족끼리’ 구호를 주장하는 반미 세력이 있었다. 이 세력은 한미동맹을 흔들어댔다. 황장엽 선생은 생전에 “1997년 4월 내가 망명할 당시에 북한 정권의 수명이 거의 다했으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북한 정권과 군대는 빈사(瀕死)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0년간 80억 달러 이상의 대북지원이 북핵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북한에 지원을 해주면 북한도 화답할 것이라는 사고는 너무 순진하든가, 아니면 친북적(親北的)이든가 둘 중의 하나다. 북한 정권의 끊임없는 속임수를 경험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대북 유화론자들은 순진하다기보다는 친북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편에 서서 북한 주민들의 민생과 인권을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다. 그들은 북한인권법 제정 과정과 그 후 계속되어 온 북한 인권 사보타주에서 그 실체를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에는 임종석 비서실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과거 주사파(主思派) 운동권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들이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을 외치면서 친북 활동하던 입장에서 전향(轉向)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친북 행보를 택할지, 트럼프 대통령과 공동 보조를 취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문재인 정부 핵심 인사들의 과거 경력에 비추어 볼 때, 이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체제 완성을 방조하는 구원투수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문재인-김정은 회담에서 어떤 이면(裏面) 합의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농락할 가능성도 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북핵문제를 미봉책으로 끌고 갈 수 없다. 국무장관으로 마이크 폼페이오 전 CIA 국장, 안보보좌관으로 존 볼턴 전 주유엔대사 같은 강경파들을 전격 기용해 안보라인을 새로 짠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볼턴 안보보좌관은 북한에 대한 선제 폭격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입장을 피력해 왔다. 무엇보다 그들은 북한 정권과 한국 좌파의 속임수를 잘 읽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정부들과 다르다.
클린턴 대통령이 25년 전 이러한 결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의 속임수를 알고 있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그걸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