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당국, CNC에서 RO로 흘러간 거액 자금 포착… ‘내란자금’ 여부 집중 수사
⊙ 이석기, 이메일 등 각종 계정에 김정일 생일(216), 北 대남공작기관(225) 등 연상 숫자 사용
⊙ 감청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 휴대전화 사용, 비밀 아지트엔 도청감지기
⊙ 수사당국, 녹음파일 40여개 집중분석 중… RO조직원 130여 명 중 90여 명 신원 확인
⊙ 현행 형사소송법엔 디지털 정보·저장매체에 대한 정의조차 없어… 傳聞증거 취급받는 디지털 증거
⊙ 증거인정 여부 두고 치열한 법정공방 예상… 이석기 ‘공판투쟁’할 경우 재판 장기화
⊙ 이석기, 이메일 등 각종 계정에 김정일 생일(216), 北 대남공작기관(225) 등 연상 숫자 사용
⊙ 감청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 휴대전화 사용, 비밀 아지트엔 도청감지기
⊙ 수사당국, 녹음파일 40여개 집중분석 중… RO조직원 130여 명 중 90여 명 신원 확인
⊙ 현행 형사소송법엔 디지털 정보·저장매체에 대한 정의조차 없어… 傳聞증거 취급받는 디지털 증거
⊙ 증거인정 여부 두고 치열한 법정공방 예상… 이석기 ‘공판투쟁’할 경우 재판 장기화
- 지난 9월 5일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석기 의원이 경기 수원 남부경찰서에서 수사 관계자들에 이끌려 호송차로 이동하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다.(조선DB)
남민전은 자생적(自生的) 공산주의 지하조직이다.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약자로, 1976년 결성돼 무장강도와 절도를 벌이고 총기를 탈취하는 등 범죄를 저질러 1995년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확정된 바 있다.
당시 수사 당국이 압수한 증거물은 카빈소총, M16 공포탄, TNT 폭약, 뇌관, 사제폭탄, 흉기 등이다. 1969년 통일혁명당과 같은 간첩사건 때는 이적표현물과 함께 무전기, 라디오 수신기, 난수표 등 증거가 공개됐다. 대부분 공안사건의 증거물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올 가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 준 국회의원 이석기(李石基)와 RO(혁명조직)의 내란음모 사건은 종전(從前)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26일 검찰이 중간수사결과 발표 때 공개한 ‘총책 이석기 압수물’을 보면, 북한소설이나 영화 등 이적표현물은 예전과 비슷하게 발견되지만, 무기나 무전기와 같은 장비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봉인(封印)된 각종 디지털 저장매체가 다수 보인다. 만약 내란음모가 실행 직전까지 갔다면, 무기나 폭발물은 나와도 통신장비나 종이문건 등은 더 이상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종북세력과 북한 공작원의 수법이 전문화했기 때문이다.
한 전직 공안수사 관계자는 “예전엔 압수수색하러 들어가면 화장실에 숨어 각종 문건을 몰래 불태우거나 장비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며 “최근엔 모든 기록이 다 디지털로 존재해 과거와 같이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증거물이 나오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수사당국이 압수한 물품 604점 중 디지털 압수물은 164점이다. USB 메모리와 하드디스크 등 디지털 저장매체가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RO 조직원들은 이를 보다 쉽게 인멸하기 위해 마이크로SD카드와 같은 초소형 메모리장치를 쓰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긴박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즉시 씹어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RO의 진화한 보안수칙
이석기 RO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은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지령·보고 체계가 적발된 최초의 사례다. 1998년 재건(再建) 민혁당 총책인 하영옥(河永沃)은 남파 간첩을 만나 인터넷 연락방법을 직접 교육받았다. PC방에서 이메일을 활용해 지령을 받는 방식으로 보안을 유지하려 했다. 수사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핫메일(Hotmail) 계정을 이용했다. PGP라는 이메일 암호 프로그램 사용도 시도했다.
민혁당의 조직원이었던 이석기는 당시 보안방식을 더욱 발전시켰다. 당시 국내에 서버를 뒀던 핫메일을 해외 서버인 지메일(Gmail)로 바꿨고, 업그레이드된 PGP로 더욱 강력한 암호화를 실행했다. RO는 까다로운 보안수칙을 정해 철저히 지켰다. 통신, 컴퓨터, 문서, USB, 외부활동 등으로 세분화한 수칙은 그들의 보안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보안수칙에 따르면, RO 조직은 개인 휴대전화나 일반 유선전화기로는 조직과 관련한 사항을 말하지 않는다. 필요할 경우 공중전화나 ‘비폰(비밀 휴대전화)’을 사용하며, 회합 시엔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개인 전화기 전원을 끈다. 대신 비상상황을 대비해 비폰만 켜 놓는다. 이때 비폰은 지휘 성원 이상만 소지한다.
모임이나 학습을 진행할 땐 자동녹음과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노트북 전원도 끈다. 문서작업 후엔 흔적을 지우고, 개인 이메일로 회합 장소나 조직 관련 내용은 절대 송수신하지 않는다. 노트북과 PC 하드디스크는 6개월 단위로 교체한다.
종이문서는 원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득이 종이에 조직 관련 내용을 작성할 경우 끝나면 반드시 소각한다. 모든 문서는 암호화한 USB 메모리로만 관리한다.
USB 메모리는 PGP나 트루크립트 등 보안프로그램을 이용해 암호화해서 사용한다. 삭제 프로그램을 사용해 문서를 수시로 삭제한다. 그리고 삭제 흔적은 SNOOP란 프로그램을 이용해 다시 제거한다. USB 메모리는 반드시 지퍼가 달린 주머니에 연결해 분실을 방지하고, 위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신속하게 칩을 파손해 복구되지 않도록 한다.
회합 때 수사기관의 미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꼬리따기’를 한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이동하고, 버스를 타면 목적지 전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식이다. 신변 위급 상황을 대비해 경기도 인근에 자신만이 아는 장소를 물색해 둔다.
유사시를 대비해 항상 10만원 정도 현금을 소지하고, 잠수(도피) 후 재접속 시 암구호를 사용한다. 회합 땐 조직원 간에 실명 대신 ‘조직명(가명)’ 또는 ‘○형’과 같은 호칭만 사용한다. 인터넷을 통해 북한 관련 자료를 다운받을 땐 집이나 사무실 PC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PC방을 이용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나 자리는 이용하지 않는다. 조직과 관련한 내용은 가급적 암기하고 근거를 남기지 않는다.
녹음파일 40여 개 분석 중
수사당국에 따르면, 이석기는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거소지(비밀아지트)엔 도청감지기까지 설치했다. 자신에 대한 통신감청을 방지하려는 목적인데, 정작 수사당국은 해당 전화와 거소지를 감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장(통신제한조치 허가서)에 따른 합법적 감청의 대상은 휴대전화, 유선전화, 이메일 등으로 나뉜다. 감청대상은 주로 타인 명의 전화를 사용하고, 잘 사용하지 않는 유선전화 통화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보통 사건의 경우 이메일 감청이 중요한 증거가 되는데, RO조직은 지메일 계정을 교묘히 사용해 감청을 피했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한 계정을 양쪽이 공유하면서 임시보관함에 정보를 올리고 확인한 사람이 이를 지우는 방식이다. 지메일을 운영하는 구글(Google)이 미국 기업인 데다 임시보관함 내용은 완전히 삭제되기 때문에 복구가 어렵다는 점을 활용한 사례다.
수사당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종북세력이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 IT 서비스로 혁명거점을 옮겨가고 있다”며 “이른바 ‘사이버 망명’을 통해 대남혁명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내란음모 사건을 촉발한 내부조력자의 제보와 현장녹음은 RO의 보안수칙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다. 수사당국은 현재 40개 이상의 녹음파일을 분석 중이며, 현장수사와 사진분석 등을 통해 조직원 130여 명 중 90여 명의 신원을 확보했다.
수사 관계자는 “실제로 녹음파일을 들어 보면 분위기가 상당히 살벌하다”며 “텍스트로 접하는 것보다 사안이 훨씬 심각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공안사건의 경우 내부조력자의 제보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자수자에 대한 형(刑) 면제 또는 감경(減輕) 등 파격적 조치가 이뤄진다”며 “이는 국가보안법에도 명시된 것으로, 현재 추가 제보자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사당국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디지털 증거물 분석을 통해 이메일 등 다수의 이석기 계정에 0216, 0225, 0615 등과 같은 숫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했다.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 북한 대남공작기관 225국, 6·15남북공동선언 등이 연상되는 숫자들이다. 우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나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등 이적단체 수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패턴이어서 216과 225와 같은 숫자는 추후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100억원대 자금
수사당국은 현재 이석기 계좌를 비롯해 관련 자금을 추적 중이며, 이 과정에서 100억원 단위의 금액이 RO조직으로 흘러간 정황을 확보해 자금출처와 유입과정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월간조선》 취재 결과 확인됐다.
지하조직은 사상, 조직, 자금 등 3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이석기는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RO조직이 있었다. 강력한 힘의 배경은 이석기의 자금력이었다. 과거 가난한 운동권이 굶주리면서 하는 투쟁에서 이른바 자본력을 동원한 혁명으로 진화한 셈이다.
수사당국은 자금의 출처와 목적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내란음모 관련 자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그 연계성을 조사하고 있다. 100억원대 자금 중 약 50억원은 통합진보당이 선거비용 명목으로 제공한 것으로, 나머지 자금은 여론조사와 광고홍보 등 사업을 통해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사당국은 계좌 압수수색을 통해 CN커뮤니케이션즈와 그 자회사인 길벗투어, 사회동향연구소 등 이석기 관련 업체의 자금흐름을 추적해 왔다. 자금줄을 파악하면 ‘RO 회합’에서 언급된 총기구입 등의 실행의사를 증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금줄 의혹을 받는 CN커뮤니케이션즈는 이석기가 2005년 CNP전략그룹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선거기획 광고대행사로, 이후 CNC로 개명했다가 2013년 3월 CN커뮤니케이션즈로 이름을 바꿨다. 회사는 설립 후 2011년까지 120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일감 몰아주기와 탈세 등의 의혹을 받아 왔다.
유동열(柳東烈)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은 “통합진보당이 2011년 말 창당 이후 현재까지 정당보조금과 선거보조금 명목으로 총 95억4782만원을 받았는데, 이 중 절반에 이르는 금액이 이석기 측에 선거비용으로 흘러 들어갔다”며 “1990년대부터 20년 가까이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이른바 ‘보급투쟁(재정확보투쟁)’을 통한 자금력 확보였다”고 설명했다.
종북의 ‘안티 포렌식(anti forensic)’
지난 10월 14일 공판준비기일이 시작되면서 공은 법정으로 넘어갔다. 앞으로 공판일정과 증인 등이 확정되면 법정공방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기소된 이석기와 RO 조직원들은 검찰조사 과정에서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종북세력의 법정 대응 능력도 과거와 달리 전문화해 법리적 허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방식이다.
이석기는 지난 9월 5일 구속된 후 수사기간 중 매일 변호인들을 불러 최대 8시간씩 접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태(金鎭台) 새누리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국회의원 이석기의 변호인 접견현황’에 따르면, 이석기는 9월 6일부터 14일까지 총 11차례 변호인을 별도 접견하거나 조사 시 입회시켰다. 시간은 하루 6~8시간이다.
재판 과정 중 이석기는 이른바 ‘공판투쟁’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기간 내내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법정에선 모든 증거가 조작되고 강압수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투쟁방식을 뜻한다. 김진태 의원은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적법한 수사집행은 불법 운운하면서도 묵비권과 변호인 조력권은 당연한 권리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이 의원이 사실상 수사방해에 가까운 릴레이식(式) 변호인 접견을 하면서 공판투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제보자의 녹음파일은 법정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전망이다. 녹음파일이 증거로 인정되려면 ▲영장 없이 녹음한 녹취자가 수사관이 아니어야 하고 ▲녹취자가 대상에 포함돼야 하며 ▲법정에서 자신이 녹음한 것임을 증언해야 한다. 현재 제보자의 법정 증언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이러한 조건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석기 변호인단은 해당 녹취록에 대해 “녹취록이 내부 제보자가 녹음한 것이라면 국정원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해 감청한 것”이라며 “불법 수집된 것이어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공안사건 추세는 피압수자가 참관을 일단 거부 또는 방해하고, 재판 과정에서 디지털 증거의 무결성과 동일성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피의자와 변호인의 권리는 충분히 보장해야 하는 게 분명하지만, 법리적 허점을 지나치게 악용하는 방식 또한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최초로 사이버수사대를 창설한 이정남(李楨南) 한국사이버포렌식전문가협회 사무국장은 “한국의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컴퓨터 법의학) 기술은 이미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며 “이른바 종북세력의 안티 포렌식(anti forensics) 기술은 지능화하고 있지만, 디지털 증거에 대한 취약한 법체계로 인해 수사·재판 과정에서 소모적 논쟁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전자지문
‘디지털 압수수색’은 법정 논란이 예상된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박스에 서류뭉치를 쓸어담는 모습은 이미 옛날 얘기가 됐다. 주요 증거 대부분이 디지털로 저장되기 때문에 디지털 포렌식 전문수사관이 투입돼 정밀한 작업을 실행한다.
디지털 증거는 쉽게 위·변조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증거의 무결성(無缺性)과 동일성이 필수다. “압수수색 때 하드디스크와 USB를 확보해 포장 후 봉인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 있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법은 일괄(一括)압수가 아닌 선별(選別)압수를 원칙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안사건의 압수수색 절차는 상당히 복잡하다. 수사관이 포렌식 장비를 이용해 압수 대상 하드디스크 또는 USB 메모리와 연결한다. 사건과 관련된 데이터만 압수할 수 있기 때문에 선별 작업을 거친다. 만약 해당 하드디스크에 10만 개의 파일이 있다면 모두 현장에서 사건 연관성을 검증해야 한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다만 선별압수에 예외를 두고 있다. 범위를 정해 출력·복제하는 방법이 불가능하거나 압수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현저히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때다. 특정 파일에 암호가 걸려 있거나 압수현장이 혼란스러울 땐 저장매체 압수를 할 수 있다.
포렌식 압수 절차를 마치면 저장매체를 봉인한다. 이때 해시(hash) 값을 대조해 증거의 무결성을 확인한다. 해시 값은 특정 파일의 고유 값이 128비트(bit)로 기록돼 이른바 ‘전자지문’으로 불린다. 해시 값이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인간의 지문이 일치할 가능성보다 훨씬 희박하다.
압수수색 후에도 수사당국에 의한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에 참관인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과거 공안사건 때 변호인 측에서 참관인의 비전문성을 지적한 이후, 지금은 관련 학회 회원 등 전문가들이 별도로 입회하고 있다.
압수수색에서 디지털 증거는 현행법상 그 정보에 대한 규정은 물론, 저장매체에 대한 정의 규정도 없다. 다만 형사소송법 제106조는 ‘압수의 목적물이 컴퓨터용 디스크,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정보저장매체인 경우’라고 목적물로 명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구체적인 증거 인정 여부는 법관의 해석에 의존하는 셈이다.
일본의 경우 2011년 개정된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디지털 증거와 관련해 전자기록 등 기록매체의 압수를 원칙으로 하고, 예외적인 경우 복사·인쇄 등 방법을 시행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사이버범죄방지조약은 컴퓨터 원본 압수와 출력물 압수를 병렬적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수색과 압수의 방법을 제한하는 별도의 법령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영장 청구 때 부당한 압수수색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진술을 첨부케 하고 구체적인 집행방법은 현장 조사관의 합리적 재량에 맡긴다.
傳聞증거의 함정
안성진(安星珍) 성균관대 컴퓨터교육과 교수는 “우리 검찰과 경찰의 수사능력 자체는 상당히 높지만, 디지털 증거의 특성상 적법절차에 따라 수집한 증거도 법정에서 논란이 발생해 재판이 장기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디지털 증거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관련 형사소송법 적용의 완비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현재 컴퓨터로 구현된 모든 것은 100%가 아니라 100%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간혹 전송오류가 발생해도 우리는 일단 완벽하다고 믿고 사용하는 것이죠. 해가 서쪽에서 뜰 확률도 시간을 무제한으로 두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재판과정에서 이런 확률로 접근하면, 끝없는 논쟁이 돼 버립니다.”
전문증거(傳聞證據) 논란은 이번 공판의 핵심 쟁점이다. 전문증거란 증인의 법정진술이 아닌 타인의 증언이나 진술서와 같은 형태로 보고하는 증거를 말한다. 한국에선 반대신문의 결여와 직접주의 등을 이유로 그 증거능력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증인이 “나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고 증언할 경우, 증언의 정확성은 증인의 지각력, 기억력, 표현력, 정직성 등에 의존한다. 이 증언은 반대신문을 통해 검증을 거치게 되고, 재판관은 증인의 태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증인이 “피고인이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고 A로부터 들었다”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제 목격자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각력과 정직성 등을 판단할 수 없다. 권순철(權純哲) 검사는 <미국 증거법상 증거능력 체계>란 논문에서 “법정 외 진술이 피고인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면, 증언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증인이 아니라 원진술자(A)의 신뢰성”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독일 등이 의존하고 있는 대륙법에선 증인 자신이 체험한 사실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들은 사실을 진술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영미법에선 반대신문을 거치지 않은 진술과 그 진술을 대신하는 서면을 전문증거라고 한다. 전문증거를 원칙적으로 증거로 할 수 없게 한 것을 전문법칙 또는 전문증거 배척의 원칙이라고 한다.
문제는 현재 디지털 증거가 전문법칙에 적용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석기의 사무실 압수수색 중 PC에서 충성맹세문이 나와도 증거가 되려면 작성자가 이를 인정해야 한다. 피의자가 이를 부인하면 일반증거 대신 전문증거로 취급돼 증거능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은 게 우리의 법 현실이다.
否認 무죄, 認定 유죄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정황상 피의자의 문서가 확실하면 판사의 재량으로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 증거의 증명력을 법관의 자유판단에 맡기는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판사가 증거 여부를 판단하면 된다. 터무니없는 근거로 무조건 부인만 하는 피의자는 가중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수 디지털 증거는 그 증거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게 법학계의 해석이다.
일반 형사사건이 아니라 공안사건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가운데, 변호인 측이 강력하게 항의하며 디지털 증거를 모두 부정하면 일일이 입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상당한 시간이 추가로 소요되며, 소모적 논쟁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명백한 증거도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디지털 증거가 전문법칙에 적용되는 이유는 현행법상 정보저장 매개체에 대한 정의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장치가 디지털로 대체되면서 디지털 증거에 대한 의존도가 최근 급증했지만, 법 규정은 여전히 형사소송법 관련 조항이 개정된 196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검찰의 디지털 증거 수집·분석 건수는 2008년 916건, 2009년 1546건, 2012년 6301건을 기록했다.
2006년 일심회와 2011년 왕재산 사건 당시 상당수 디지털 증거물에 전문법칙이 적용됐다. 피의자 자신의 PC에서 작성된 문건임에도 당사자가 모른다고 잡아떼면 작성자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무의미해진다. 조직도와 강령 등 주요 문건이 다수 발견됐지만, 모두 재판 과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일부 피의자는 자신의 PC가 해킹당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거 수차례 재판을 참관했던 한 수사 관계자는 “디지털 증거에 대한 관련법 자체가 없는 한국은 어찌 보면 IT 강국이 아니라 IT 후진국이란 생각이 든다”며 “법정에서 무조건 부인하면 증거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부인(否認) 무죄, 인정(認定) 유죄’란 말까지 나왔다”고 토로했다.
“전문법칙은 디지털 증거가 존재하지도 않던 때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착각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인간의 기억은 증거로 인정되고 컴퓨터에서 나온 기록은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죠. 경험사실과 의사표현에 대한 구분도 필요합니다.”
미국의 경우 연방형사소송 절차규칙과 연방증거규칙 등에서 디지털 증거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연방증거규칙 제901조(a)는 “증거 채택은 그 증거의 신청자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증거가 원본과 같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증거에 의해 성취된다”고 규정한다.
노명선(盧明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에선 디지털 증거가 전문증거라 해도 증거로 인정될 수 있게 예외를 법률로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며 “디지털 증거를 임의로 삭제하거나 은닉하는 행위를 민·형사상 처벌하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입법 보완 필요한데 무관심한 국회의원들
김희균·노명선·오경식·정승환 등 법학자 4명이 쓴 《서초동 0.917》은 재판을 ‘대차대조표 그리는 일’로 설명했다. 검사가 증거를 제출하고 피고인은 그 증거에 흠집을 낸다. 판사가 할 일은 양쪽의 증거를 두고 대차대조표를 그리는 것이다. 쟁점이 첨예하게 대립할 땐 물증 한 조각, 진술 한마디에 따라 전체 재판의 방향이 달라진다. 깃털 하나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책은 이를 ‘깃털이론’이라고 설명했다.
임종인(林鍾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은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디지털 증거 처리 표준 가이드라인’을 각기 마련해 두긴 했지만, 대부분의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디지털 증거의 복잡한 특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특정 재판부를 전문화하거나 여건이 된다면 특허법원과 같은 전문법원을 세우는 방법을 고민해 법체계의 후진성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점을 보완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높지만, 입법기관인 국회는 이 사안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워낙 전문적인 분야라 의원이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 난관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재판 중 제삼자가 보기에도 억지인 주장이 나와도 전적으로 법관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포렌식 전문가가 본 압수수색 현장
“증거 조작은 확률적·기술적으로 불가능”
한국포렌식학회 부설 포렌식연구소의 김용호(金用昊) 소장은 “바람직한 전례는 아니지만, 예전엔 파란 박스 가져가서 컴퓨터 본체를 그대로 담아 오거나, 압수 대상 서버를 통째로 트럭에 싣고 온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며 “요즘은 1%의 조작 가능성도 배제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검증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정보보호 전문가 출신으로 2002년부터 포렌식 분야 일선에서 활동해 왔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를 거쳐 2004년 경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 창립멤버로 각종 민·형사 사건 수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압수수색 현장에 가 보면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번 이석기 사건 때 생중계된 것과 같이 대놓고 합법적 압수수색을 저지하거나 참관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식입니다. 압수수색은 강제집행이 원칙이라 변호사의 입회 여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변호사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작정 버팁니다. 그 사이에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저희는 제3자 입장에서 참관하는 건데,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피압수자 입장에서 보면 과도한 압수수색으로 볼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압수의 범위를 정한 형사소송법 106조의 경우 그 취지는 좋으나 현실적으로 적법한 수사에 많은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법 조항은 현장상황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는데, 그보다는 사건의 경중(輕重)과 사안의 복잡성에 따라 범위에 대한 규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지털 증거의 조작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누가 조작을 하겠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포렌식 장비도 상당히 발달해 중간에 조작을 시도하면 자동으로 에러가 나게 돼 있어요.”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100% 확신은 어려운데요.
“2011년 왕재산 사건 때 법정에 증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변호인 측 심문을 하는데 집요하게 묻더라고요. 조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학자적 양심을 걸고 확신한다고 했더니, 복사 중 화장실에 갔다 오면 공백이 있지 않으냐고 묻습디다. 화장실에 가도 중간에 조작하면 에러가 난다고 했더니 학자적 양심이 있으면 화장실도 참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해시 값이 바로 달라지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다고 답하니 더는 묻지 않더군요.”
—변호하는 입장에선 충분히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으로 재판이 지연될 뿐입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다뤄야 하는데, 기초적인 논쟁만 계속하는 거죠. 압수수색 과정에서 공권력의 낭비도 상당하다고 봅니다. 일반 사건은 수사관 2~3명이면 되는데, 큰 공안사건은 추가 참관인이 입회하고 경찰은 통제하고, 이 모든 과정을 다 촬영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수십 명이 가야 하잖아요.”⊙
당시 수사 당국이 압수한 증거물은 카빈소총, M16 공포탄, TNT 폭약, 뇌관, 사제폭탄, 흉기 등이다. 1969년 통일혁명당과 같은 간첩사건 때는 이적표현물과 함께 무전기, 라디오 수신기, 난수표 등 증거가 공개됐다. 대부분 공안사건의 증거물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올 가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 준 국회의원 이석기(李石基)와 RO(혁명조직)의 내란음모 사건은 종전(從前)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26일 검찰이 중간수사결과 발표 때 공개한 ‘총책 이석기 압수물’을 보면, 북한소설이나 영화 등 이적표현물은 예전과 비슷하게 발견되지만, 무기나 무전기와 같은 장비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봉인(封印)된 각종 디지털 저장매체가 다수 보인다. 만약 내란음모가 실행 직전까지 갔다면, 무기나 폭발물은 나와도 통신장비나 종이문건 등은 더 이상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종북세력과 북한 공작원의 수법이 전문화했기 때문이다.
한 전직 공안수사 관계자는 “예전엔 압수수색하러 들어가면 화장실에 숨어 각종 문건을 몰래 불태우거나 장비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며 “최근엔 모든 기록이 다 디지털로 존재해 과거와 같이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증거물이 나오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수사당국이 압수한 물품 604점 중 디지털 압수물은 164점이다. USB 메모리와 하드디스크 등 디지털 저장매체가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RO 조직원들은 이를 보다 쉽게 인멸하기 위해 마이크로SD카드와 같은 초소형 메모리장치를 쓰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긴박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즉시 씹어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RO의 진화한 보안수칙
이석기 RO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은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지령·보고 체계가 적발된 최초의 사례다. 1998년 재건(再建) 민혁당 총책인 하영옥(河永沃)은 남파 간첩을 만나 인터넷 연락방법을 직접 교육받았다. PC방에서 이메일을 활용해 지령을 받는 방식으로 보안을 유지하려 했다. 수사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핫메일(Hotmail) 계정을 이용했다. PGP라는 이메일 암호 프로그램 사용도 시도했다.
민혁당의 조직원이었던 이석기는 당시 보안방식을 더욱 발전시켰다. 당시 국내에 서버를 뒀던 핫메일을 해외 서버인 지메일(Gmail)로 바꿨고, 업그레이드된 PGP로 더욱 강력한 암호화를 실행했다. RO는 까다로운 보안수칙을 정해 철저히 지켰다. 통신, 컴퓨터, 문서, USB, 외부활동 등으로 세분화한 수칙은 그들의 보안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보안수칙에 따르면, RO 조직은 개인 휴대전화나 일반 유선전화기로는 조직과 관련한 사항을 말하지 않는다. 필요할 경우 공중전화나 ‘비폰(비밀 휴대전화)’을 사용하며, 회합 시엔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개인 전화기 전원을 끈다. 대신 비상상황을 대비해 비폰만 켜 놓는다. 이때 비폰은 지휘 성원 이상만 소지한다.
모임이나 학습을 진행할 땐 자동녹음과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노트북 전원도 끈다. 문서작업 후엔 흔적을 지우고, 개인 이메일로 회합 장소나 조직 관련 내용은 절대 송수신하지 않는다. 노트북과 PC 하드디스크는 6개월 단위로 교체한다.
종이문서는 원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득이 종이에 조직 관련 내용을 작성할 경우 끝나면 반드시 소각한다. 모든 문서는 암호화한 USB 메모리로만 관리한다.
USB 메모리는 PGP나 트루크립트 등 보안프로그램을 이용해 암호화해서 사용한다. 삭제 프로그램을 사용해 문서를 수시로 삭제한다. 그리고 삭제 흔적은 SNOOP란 프로그램을 이용해 다시 제거한다. USB 메모리는 반드시 지퍼가 달린 주머니에 연결해 분실을 방지하고, 위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신속하게 칩을 파손해 복구되지 않도록 한다.
회합 때 수사기관의 미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꼬리따기’를 한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이동하고, 버스를 타면 목적지 전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식이다. 신변 위급 상황을 대비해 경기도 인근에 자신만이 아는 장소를 물색해 둔다.
유사시를 대비해 항상 10만원 정도 현금을 소지하고, 잠수(도피) 후 재접속 시 암구호를 사용한다. 회합 땐 조직원 간에 실명 대신 ‘조직명(가명)’ 또는 ‘○형’과 같은 호칭만 사용한다. 인터넷을 통해 북한 관련 자료를 다운받을 땐 집이나 사무실 PC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PC방을 이용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나 자리는 이용하지 않는다. 조직과 관련한 내용은 가급적 암기하고 근거를 남기지 않는다.
◆PGP(Pretty Good Privacy): 필 짐머만(Phil Zimmermann)이 개발한 이메일 보안 시스템. 이메일을 암호화 또는 복호화해 제삼자가 볼 수 없게 하며 구현이 쉽다. 이메일의 기밀성을 확보하고, 메시지 인증, 사용자 인증, 송신부인 방지 등 기능이 있다. ◆트루크립트(TrueCrypt) : 저장매체 전체를 암호화하거나 가상 드라이브를 만들어 데이터를 보호한다. 성능이 강력하고 휴대용 저장매체에서도 구동이 가능하다. ◆완전삭제 프로그램 : 복구 불가능한 완전삭제를 시도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레이저(Eraser)가 대표적이다. 데이터를 덮어 쓰는 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삭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SNOOP : 삭제프로그램 이레이저의 사용 흔적까지 지우기 위해 디스크 전체를 초기화하는 프로그램. |
녹음파일 40여 개 분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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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주요 공안사건 증거물들. 총기, 무전기, 폭약 등 실물 증거들이 눈에 띈다.(조선DB) |
영장(통신제한조치 허가서)에 따른 합법적 감청의 대상은 휴대전화, 유선전화, 이메일 등으로 나뉜다. 감청대상은 주로 타인 명의 전화를 사용하고, 잘 사용하지 않는 유선전화 통화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보통 사건의 경우 이메일 감청이 중요한 증거가 되는데, RO조직은 지메일 계정을 교묘히 사용해 감청을 피했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한 계정을 양쪽이 공유하면서 임시보관함에 정보를 올리고 확인한 사람이 이를 지우는 방식이다. 지메일을 운영하는 구글(Google)이 미국 기업인 데다 임시보관함 내용은 완전히 삭제되기 때문에 복구가 어렵다는 점을 활용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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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6일 수원지검 공안부가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공개한 증거물들.(조선DB) |
이번 내란음모 사건을 촉발한 내부조력자의 제보와 현장녹음은 RO의 보안수칙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다. 수사당국은 현재 40개 이상의 녹음파일을 분석 중이며, 현장수사와 사진분석 등을 통해 조직원 130여 명 중 90여 명의 신원을 확보했다.
수사 관계자는 “실제로 녹음파일을 들어 보면 분위기가 상당히 살벌하다”며 “텍스트로 접하는 것보다 사안이 훨씬 심각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공안사건의 경우 내부조력자의 제보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자수자에 대한 형(刑) 면제 또는 감경(減輕) 등 파격적 조치가 이뤄진다”며 “이는 국가보안법에도 명시된 것으로, 현재 추가 제보자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사당국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디지털 증거물 분석을 통해 이메일 등 다수의 이석기 계정에 0216, 0225, 0615 등과 같은 숫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했다.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 북한 대남공작기관 225국, 6·15남북공동선언 등이 연상되는 숫자들이다. 우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나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등 이적단체 수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패턴이어서 216과 225와 같은 숫자는 추후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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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와 RO의 자금줄 의혹을 받은 CN커뮤니케이션즈. 사진은 지난해 6월 압수수색 모습이다.(조선DB) |
지하조직은 사상, 조직, 자금 등 3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이석기는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RO조직이 있었다. 강력한 힘의 배경은 이석기의 자금력이었다. 과거 가난한 운동권이 굶주리면서 하는 투쟁에서 이른바 자본력을 동원한 혁명으로 진화한 셈이다.
수사당국은 자금의 출처와 목적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내란음모 관련 자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그 연계성을 조사하고 있다. 100억원대 자금 중 약 50억원은 통합진보당이 선거비용 명목으로 제공한 것으로, 나머지 자금은 여론조사와 광고홍보 등 사업을 통해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사당국은 계좌 압수수색을 통해 CN커뮤니케이션즈와 그 자회사인 길벗투어, 사회동향연구소 등 이석기 관련 업체의 자금흐름을 추적해 왔다. 자금줄을 파악하면 ‘RO 회합’에서 언급된 총기구입 등의 실행의사를 증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금줄 의혹을 받는 CN커뮤니케이션즈는 이석기가 2005년 CNP전략그룹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선거기획 광고대행사로, 이후 CNC로 개명했다가 2013년 3월 CN커뮤니케이션즈로 이름을 바꿨다. 회사는 설립 후 2011년까지 120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일감 몰아주기와 탈세 등의 의혹을 받아 왔다.
유동열(柳東烈)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은 “통합진보당이 2011년 말 창당 이후 현재까지 정당보조금과 선거보조금 명목으로 총 95억4782만원을 받았는데, 이 중 절반에 이르는 금액이 이석기 측에 선거비용으로 흘러 들어갔다”며 “1990년대부터 20년 가까이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이른바 ‘보급투쟁(재정확보투쟁)’을 통한 자금력 확보였다”고 설명했다.
종북의 ‘안티 포렌식(anti foren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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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8일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의 국회 사무실 압수수색을 시도하자 이정희,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등이 집무실 앞에 앉아 압수수색을 막고 있다.(조선DB) |
이석기는 지난 9월 5일 구속된 후 수사기간 중 매일 변호인들을 불러 최대 8시간씩 접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태(金鎭台) 새누리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국회의원 이석기의 변호인 접견현황’에 따르면, 이석기는 9월 6일부터 14일까지 총 11차례 변호인을 별도 접견하거나 조사 시 입회시켰다. 시간은 하루 6~8시간이다.
재판 과정 중 이석기는 이른바 ‘공판투쟁’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기간 내내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법정에선 모든 증거가 조작되고 강압수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투쟁방식을 뜻한다. 김진태 의원은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적법한 수사집행은 불법 운운하면서도 묵비권과 변호인 조력권은 당연한 권리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이 의원이 사실상 수사방해에 가까운 릴레이식(式) 변호인 접견을 하면서 공판투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제보자의 녹음파일은 법정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전망이다. 녹음파일이 증거로 인정되려면 ▲영장 없이 녹음한 녹취자가 수사관이 아니어야 하고 ▲녹취자가 대상에 포함돼야 하며 ▲법정에서 자신이 녹음한 것임을 증언해야 한다. 현재 제보자의 법정 증언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이러한 조건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석기 변호인단은 해당 녹취록에 대해 “녹취록이 내부 제보자가 녹음한 것이라면 국정원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해 감청한 것”이라며 “불법 수집된 것이어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공안사건 추세는 피압수자가 참관을 일단 거부 또는 방해하고, 재판 과정에서 디지털 증거의 무결성과 동일성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피의자와 변호인의 권리는 충분히 보장해야 하는 게 분명하지만, 법리적 허점을 지나치게 악용하는 방식 또한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최초로 사이버수사대를 창설한 이정남(李楨南) 한국사이버포렌식전문가협회 사무국장은 “한국의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컴퓨터 법의학) 기술은 이미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며 “이른바 종북세력의 안티 포렌식(anti forensics) 기술은 지능화하고 있지만, 디지털 증거에 대한 취약한 법체계로 인해 수사·재판 과정에서 소모적 논쟁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압수수색’은 법정 논란이 예상된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박스에 서류뭉치를 쓸어담는 모습은 이미 옛날 얘기가 됐다. 주요 증거 대부분이 디지털로 저장되기 때문에 디지털 포렌식 전문수사관이 투입돼 정밀한 작업을 실행한다.
디지털 증거는 쉽게 위·변조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증거의 무결성(無缺性)과 동일성이 필수다. “압수수색 때 하드디스크와 USB를 확보해 포장 후 봉인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 있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법은 일괄(一括)압수가 아닌 선별(選別)압수를 원칙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안사건의 압수수색 절차는 상당히 복잡하다. 수사관이 포렌식 장비를 이용해 압수 대상 하드디스크 또는 USB 메모리와 연결한다. 사건과 관련된 데이터만 압수할 수 있기 때문에 선별 작업을 거친다. 만약 해당 하드디스크에 10만 개의 파일이 있다면 모두 현장에서 사건 연관성을 검증해야 한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다만 선별압수에 예외를 두고 있다. 범위를 정해 출력·복제하는 방법이 불가능하거나 압수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현저히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때다. 특정 파일에 암호가 걸려 있거나 압수현장이 혼란스러울 땐 저장매체 압수를 할 수 있다.
포렌식 압수 절차를 마치면 저장매체를 봉인한다. 이때 해시(hash) 값을 대조해 증거의 무결성을 확인한다. 해시 값은 특정 파일의 고유 값이 128비트(bit)로 기록돼 이른바 ‘전자지문’으로 불린다. 해시 값이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인간의 지문이 일치할 가능성보다 훨씬 희박하다.
압수수색 후에도 수사당국에 의한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에 참관인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과거 공안사건 때 변호인 측에서 참관인의 비전문성을 지적한 이후, 지금은 관련 학회 회원 등 전문가들이 별도로 입회하고 있다.
압수수색에서 디지털 증거는 현행법상 그 정보에 대한 규정은 물론, 저장매체에 대한 정의 규정도 없다. 다만 형사소송법 제106조는 ‘압수의 목적물이 컴퓨터용 디스크,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정보저장매체인 경우’라고 목적물로 명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구체적인 증거 인정 여부는 법관의 해석에 의존하는 셈이다.
일본의 경우 2011년 개정된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디지털 증거와 관련해 전자기록 등 기록매체의 압수를 원칙으로 하고, 예외적인 경우 복사·인쇄 등 방법을 시행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사이버범죄방지조약은 컴퓨터 원본 압수와 출력물 압수를 병렬적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수색과 압수의 방법을 제한하는 별도의 법령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영장 청구 때 부당한 압수수색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진술을 첨부케 하고 구체적인 집행방법은 현장 조사관의 합리적 재량에 맡긴다.
傳聞증거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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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회와 왕재산 사건 당시 재판과정에서 디지털 증거물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사진은 2011년 검찰이 왕재산 사건 수사결과 발표 중 디지털 증거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현재 컴퓨터로 구현된 모든 것은 100%가 아니라 100%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간혹 전송오류가 발생해도 우리는 일단 완벽하다고 믿고 사용하는 것이죠. 해가 서쪽에서 뜰 확률도 시간을 무제한으로 두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재판과정에서 이런 확률로 접근하면, 끝없는 논쟁이 돼 버립니다.”
전문증거(傳聞證據) 논란은 이번 공판의 핵심 쟁점이다. 전문증거란 증인의 법정진술이 아닌 타인의 증언이나 진술서와 같은 형태로 보고하는 증거를 말한다. 한국에선 반대신문의 결여와 직접주의 등을 이유로 그 증거능력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증인이 “나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고 증언할 경우, 증언의 정확성은 증인의 지각력, 기억력, 표현력, 정직성 등에 의존한다. 이 증언은 반대신문을 통해 검증을 거치게 되고, 재판관은 증인의 태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증인이 “피고인이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고 A로부터 들었다”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제 목격자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각력과 정직성 등을 판단할 수 없다. 권순철(權純哲) 검사는 <미국 증거법상 증거능력 체계>란 논문에서 “법정 외 진술이 피고인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면, 증언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증인이 아니라 원진술자(A)의 신뢰성”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독일 등이 의존하고 있는 대륙법에선 증인 자신이 체험한 사실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들은 사실을 진술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영미법에선 반대신문을 거치지 않은 진술과 그 진술을 대신하는 서면을 전문증거라고 한다. 전문증거를 원칙적으로 증거로 할 수 없게 한 것을 전문법칙 또는 전문증거 배척의 원칙이라고 한다.
문제는 현재 디지털 증거가 전문법칙에 적용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석기의 사무실 압수수색 중 PC에서 충성맹세문이 나와도 증거가 되려면 작성자가 이를 인정해야 한다. 피의자가 이를 부인하면 일반증거 대신 전문증거로 취급돼 증거능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은 게 우리의 법 현실이다.
否認 무죄, 認定 유죄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정황상 피의자의 문서가 확실하면 판사의 재량으로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 증거의 증명력을 법관의 자유판단에 맡기는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판사가 증거 여부를 판단하면 된다. 터무니없는 근거로 무조건 부인만 하는 피의자는 가중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수 디지털 증거는 그 증거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게 법학계의 해석이다.
일반 형사사건이 아니라 공안사건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는 가운데, 변호인 측이 강력하게 항의하며 디지털 증거를 모두 부정하면 일일이 입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상당한 시간이 추가로 소요되며, 소모적 논쟁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명백한 증거도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디지털 증거가 전문법칙에 적용되는 이유는 현행법상 정보저장 매개체에 대한 정의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장치가 디지털로 대체되면서 디지털 증거에 대한 의존도가 최근 급증했지만, 법 규정은 여전히 형사소송법 관련 조항이 개정된 196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검찰의 디지털 증거 수집·분석 건수는 2008년 916건, 2009년 1546건, 2012년 6301건을 기록했다.
2006년 일심회와 2011년 왕재산 사건 당시 상당수 디지털 증거물에 전문법칙이 적용됐다. 피의자 자신의 PC에서 작성된 문건임에도 당사자가 모른다고 잡아떼면 작성자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무의미해진다. 조직도와 강령 등 주요 문건이 다수 발견됐지만, 모두 재판 과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일부 피의자는 자신의 PC가 해킹당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거 수차례 재판을 참관했던 한 수사 관계자는 “디지털 증거에 대한 관련법 자체가 없는 한국은 어찌 보면 IT 강국이 아니라 IT 후진국이란 생각이 든다”며 “법정에서 무조건 부인하면 증거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부인(否認) 무죄, 인정(認定) 유죄’란 말까지 나왔다”고 토로했다.
“전문법칙은 디지털 증거가 존재하지도 않던 때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착각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인간의 기억은 증거로 인정되고 컴퓨터에서 나온 기록은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죠. 경험사실과 의사표현에 대한 구분도 필요합니다.”
미국의 경우 연방형사소송 절차규칙과 연방증거규칙 등에서 디지털 증거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연방증거규칙 제901조(a)는 “증거 채택은 그 증거의 신청자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증거가 원본과 같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증거에 의해 성취된다”고 규정한다.
노명선(盧明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에선 디지털 증거가 전문증거라 해도 증거로 인정될 수 있게 예외를 법률로 폭넓게 규정하고 있다”며 “디지털 증거를 임의로 삭제하거나 은닉하는 행위를 민·형사상 처벌하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입법 보완 필요한데 무관심한 국회의원들
김희균·노명선·오경식·정승환 등 법학자 4명이 쓴 《서초동 0.917》은 재판을 ‘대차대조표 그리는 일’로 설명했다. 검사가 증거를 제출하고 피고인은 그 증거에 흠집을 낸다. 판사가 할 일은 양쪽의 증거를 두고 대차대조표를 그리는 것이다. 쟁점이 첨예하게 대립할 땐 물증 한 조각, 진술 한마디에 따라 전체 재판의 방향이 달라진다. 깃털 하나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책은 이를 ‘깃털이론’이라고 설명했다.
임종인(林鍾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은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디지털 증거 처리 표준 가이드라인’을 각기 마련해 두긴 했지만, 대부분의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디지털 증거의 복잡한 특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특정 재판부를 전문화하거나 여건이 된다면 특허법원과 같은 전문법원을 세우는 방법을 고민해 법체계의 후진성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점을 보완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높지만, 입법기관인 국회는 이 사안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워낙 전문적인 분야라 의원이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 난관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재판 중 제삼자가 보기에도 억지인 주장이 나와도 전적으로 법관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포렌식 전문가가 본 압수수색 현장
“증거 조작은 확률적·기술적으로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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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경리 |
김 소장은 정보보호 전문가 출신으로 2002년부터 포렌식 분야 일선에서 활동해 왔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를 거쳐 2004년 경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 창립멤버로 각종 민·형사 사건 수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압수수색 현장에 가 보면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번 이석기 사건 때 생중계된 것과 같이 대놓고 합법적 압수수색을 저지하거나 참관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식입니다. 압수수색은 강제집행이 원칙이라 변호사의 입회 여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변호사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작정 버팁니다. 그 사이에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저희는 제3자 입장에서 참관하는 건데,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피압수자 입장에서 보면 과도한 압수수색으로 볼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압수의 범위를 정한 형사소송법 106조의 경우 그 취지는 좋으나 현실적으로 적법한 수사에 많은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법 조항은 현장상황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는데, 그보다는 사건의 경중(輕重)과 사안의 복잡성에 따라 범위에 대한 규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지털 증거의 조작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누가 조작을 하겠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포렌식 장비도 상당히 발달해 중간에 조작을 시도하면 자동으로 에러가 나게 돼 있어요.”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100% 확신은 어려운데요.
“2011년 왕재산 사건 때 법정에 증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변호인 측 심문을 하는데 집요하게 묻더라고요. 조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학자적 양심을 걸고 확신한다고 했더니, 복사 중 화장실에 갔다 오면 공백이 있지 않으냐고 묻습디다. 화장실에 가도 중간에 조작하면 에러가 난다고 했더니 학자적 양심이 있으면 화장실도 참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해시 값이 바로 달라지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다고 답하니 더는 묻지 않더군요.”
—변호하는 입장에선 충분히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으로 재판이 지연될 뿐입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다뤄야 하는데, 기초적인 논쟁만 계속하는 거죠. 압수수색 과정에서 공권력의 낭비도 상당하다고 봅니다. 일반 사건은 수사관 2~3명이면 되는데, 큰 공안사건은 추가 참관인이 입회하고 경찰은 통제하고, 이 모든 과정을 다 촬영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수십 명이 가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