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균 당시 외무부 동남아과장대리 “당시로서는 외무부가 사건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 사건 발생 직후 외교부 동남아과에서 상황 통제하며 체포 주도
⊙ 일본, 바레인 등 국제 공조 상황 기록으로 사건 조작이 불가능했음을 입증
⊙ 사건 발생 직후 외교부 동남아과에서 상황 통제하며 체포 주도
⊙ 일본, 바레인 등 국제 공조 상황 기록으로 사건 조작이 불가능했음을 입증
1987년의 KAL 858기 폭파범인 김현희(金賢姬)가 가짜 범인이었다는 식으로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조작하려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당시 외교부가 작성했던 기록들에 따르면 김현희가 가짜일 수는 없음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최근 ‘김현희 가짜 만들기의 진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외교가를 통해 <1987년 KAL 858기 사건 관련 보고서>라는 외교부 문건을 단독 입수했다. 이 문건은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맨처음 국내에 ‘KAL 858기 실종’으로 알려진 직후부터 김현희가 바레인에서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보고서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외무부(지금의 외교통상부) 동남아과는 김현희씨 체포까지의 사건담당 주무부서였다.
이 문건은 외무부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987년 11월 30일 밤 12시경 주(駐)아랍에미리트(UAE)대사관으로부터 ‘마유미(김현희의 가짜 일본 이름)의 신원이 특이하다’는 전문(電文)을 입수한 후 이를 주일본대사관에 통보하고, 일본 측으로부터 마유미의 일본 여권이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주바레인대사관에 마유미의 여권이 위조임을 통보하고 마유미의 소재 파악과 바레인 출국 저지를 지시한 후, 마유미 체포까지의 모든 상황을 날짜별 시간대별로 기록해 놓고 있다. 전체 상황에 외무부가 일차적·주도적으로 대처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KAL 858기 폭파 사건 조작설’ 또는 ‘김현희 가짜설’은 사건의 의혹을 제기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낸 한 공중파 방송이 “이 모든 의혹의 중심에는 안기부(지금의 국정원)가 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내 정보기관의 사건 조작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설’들임을 감안할 때, 이 문건은 사건 발생 초기 국내 정보기관의 개입이 없었다는 방증이 된다. 이 문건은 이 사건이 발생 초기부터 UAE, 바레인, 일본 등 여러 나라와 관련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국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관련돼 있어 국제 관계상 사건을 조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문서이기도 하다.
이 보고서의 작성일자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2월 1일이고, 외교부의 공식 문건으로 등록된 날짜는 그해 6월 7일이다. KAL 858기 폭파 사건 등을 재조사하기 위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발족한 것은 2004년 11월이고, 2005년 12월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위)가 발족했다. 진실위에서도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다뤄졌음은 물론이다.
국정원 과거사위나 진실위에서 KAL 858기 폭파 사건 재조사를 공식 안건으로 채택하기 전에는 종교·사회 단체와 방송 등에서 ‘김현희 가짜설’이 연이어 제기되기도 했다. 2003년 11월 3일에는 ‘김현희 KAL 858기 조작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115인 선언’이 나왔고, 11월 18일 MBC은 ‘16년간의 의혹, KAL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을 보도했으며, 11월 29일에는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16년간의 의혹과 진실’을 보도했다. KBS는 이듬해인 2004년 5월 22일과 23일 양일간 <일요 스페셜>을 통해서 ‘폭파, 진실은 무엇인가’, ‘김현희와 김승일 의문의 행적’을 보도했다. 공중파 방송 3사의 ‘김현희 의혹’ 보도가 릴레이 식으로 이어진 후 KAL 858기 폭파 사건 등을 재조사하기 위한 국정원 과거사위가 발족했던 것이다.
이 문건은 이렇게 ‘김현희 가짜몰이’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작성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한 부처가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 일각의 의도와는 다른 스탠스를 취하면서 진실을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밤 12시 ‘마유미가 수상하다’는 전문 입수돼
문건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 정부 실무대책본부가 구성된 시점은 1987년 11월 29일 저녁 8시40분이다. 단장은 외무부 제1차관보가 맡았다. 실무대책본부가 구성된 지 1시간15분이 지난 후인 밤 9시55분 외무부 대변인은 ‘KAL기 실종(失踪)’을 공식 발표했다. 당시까지는 KAL 858기의 폭파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실종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KAL 858기 탑승자의 신원을 확인했지만 이때까지는 신원 특이자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외무부는 공식 발표와 함께 전 해외공관에 비상근무 조치를 내리고 관련 특이사항이 있으면 모두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다음 날인 11월 30일 오전 7시30분 외무부 제2차관보, 동남아과장 등으로 구성된 정부조사단이 비행기가 실종된 곳 부근인 것으로 알려진 태국 방콕으로 출발했다. 이날 오후 2시경 사건담당 주무과가 동남아과로 정해졌고 동남아과장이 정부 조사단의 일원으로 방콕으로 출국함에 따라 외무부 본부의 실무책임자는 동남아과 과장대리가 맡게 된다.
그날 밤 12시 주UAE대사관은 일본인 승객 ‘마유미’에 대한 특이사항을 전문으로 외무부 본부에 보내 왔다. 전문은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의 승객 중 15명이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는데, 그중 ‘일본인’ ‘마유미’ 등의 신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실을 지휘하던 동남아과 과장대리는 이런 내용의 UAE 전문을 주일본대사관에 긴급 전송토록 외신과에 조치했다. 주일본대사관은 밤늦은 시간이라 퇴근해 있던 정무과장 집에 긴급 상황으로 전화를 했다. “즉시 공관으로 나가서 전문을 해독하고 일본 경시청 등과 접촉하라”는 지시였다.
그 시각 테러범 김현희와 김승일은 KAL 858기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내렸던 아부다비 공항을 빠져나와 바레인의 리젠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묵고 있었다. 김현희씨의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레인에 도착한 첫날은 휴일이었고 둘째날은 이미 (비행기가) 만원이어서 이틀 밤을 바레인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항공권 예약을 끝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본인 관광객으로 보이기 위해 택시를 대절하여 관광에 나섰다. … 시내 중심가에서 김(승일) 선생 와이셔츠와 샌드위치, 과일을 산 뒤 오후 5시쯤 되어 호텔로 돌아왔다. …>
호텔로 돌아온 그들은 사 들고 온 샌드위치와 과일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바레인의 오후 5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밤 11시다. 주UAE대사관이 마유미에 대한 특이사항을 전문으로 보내 오기 직전의 상황인 것이다.
악몽 같은 밤
날짜를 하루 넘긴 12월 1일 새벽 3시30분경 주일본대사관 정무과장이 전화로 보고를 해 왔다. 마유미 등 2인의 여권은 위조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실무책임을 맡은 동남아과 과장대리는 즉시 제1차관보에게 긴급보고를 했다. 새벽 4시경 동남아과 과장대리는 주바레인 대사대리(당시 대사는 해외공관장 회의 참석차 한국에 와 있는 상태였음)에게 전화를 걸어 여권 위조사실을 알리고 마유미의 숙소를 방문해 동태를 탐문할 것을 주문했다. 위조여권 확인 후 마유미 일행에 대해 수배조치를 내린 일본대사관 측과도 협조해 이들의 출국을 저지하라는 주문도 함께였다.
한국 시간으로 12월 1일 새벽, 외무부 상황실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그 시간, 바레인에서 11월 30일 밤을 보내고 있던 김현희와 김승일에게는 악몽이 시작된다. 일본대사관 측의 신분확인 전화와 한국대사관 직원의 숙소 방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김 선생이 통화를 했는데 일본대사관에서 KAL기가 방콕 도착 전에 실종되었다면서 우리 이름과 생년월일, 여권번호를 상세히 물어 온 것이었다. … 전화를 끊은 뒤 좀처럼 긴장할 줄 모르던 김 선생도 표정이 굳어져 한숨만 내쉬었다. 김 선생을 하늘처럼 믿고 따라다니던 나는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한 심정이었다. … 정말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전화종이 또 울렸다. 한국대사관 성원이 호텔 로비에 와 있다며 우리 방을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한국대사관 직원이 숙소를 방문해 일본인으로 가장한 김승일과 필담을 나누고 있을 때의 심정을 김현희씨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심장은 두방망이질을 하고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려 억제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
숙소 방문 이후에도 주바레인대사관의 마유미 일행 동태 감시는 계속됐고, 한국 시간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주바레인대사관은 마유미 접촉 및 일정 탐문 사항을 수시로 보고해 왔다. 전화상으로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4시경 마유미 일행이 공항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했다는 보고가 있었고 30분 후에는 이런 사실을 주바레인대사관이 공식 전문으로 보고해 왔다.
“김현희 가짜 만들기 보고 문서화 결심”
12월 1일 오후 6시30분 주바레인대사관의 공식 전문 보고 접수로 끝나는 이 문건은 사건 초기 외무부가 주도적으로 이 상황에 대처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당시 동남아과 과장대리로서 주일본대사관으로의 전문 전달과 마유미 일행 동태 감시 지시 등 상황을 지휘했던 장철균(張哲均) 전(前) 스위스 대사다. 문건에서 장 전 대사는 작성 사유에 대해 “김현희 추적 과정에 개입한 본부(동남아과), 주UAE-바레인-일본대사관 등 4개 지역 간의 협의 진행과 체포 과정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직원이 부재하다”면서 “사건 초기 상황이 매우 긴박했고 관련 공관과의 주요한 업무 협의의 일부가 국제통화로 이루어졌으나 이 부분이 공식기록에 남겨지지 못함에 따라 이를 문서로 보완코자 하는 것임”이라고 밝히고 있다.
《월간조선》은 문건 입수 후 장 전 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장 전 대사는 “나서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기자는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는 ‘서희외교포럼’ 사무실로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 전 대사는 서희외교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
기자가 《월간조선》이 입수한 KAL 858기 관련 외교부 문건을 보여주자 “내가 작성한 것이 맞다”고 했다. 인터뷰가 아닌 인터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문건에 보면 작성 사유를 ‘주요 업무 협의가 국제통화로 이루어졌는데 그 부분이 공식기록에 남겨지지 못함에 따라 이를 문서로 보완코자 한다’고 밝혔던데, 사건 직후에 문서화해도 됐을 일을 왜 하필 사건이 한참 지난 후인 2005년 2월에 작성했나요.
“내가 문건을 작성했던 시기에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도를 넘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방송에도 나오고, 하다못해 소설로도 나오고. 그 전에는 김현희가 가짜라는 상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나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문건으로 만들어 외교부 공식문서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야 객관성이 담보되는 것이니까. 당시 김현희 체포까지의 상황을 지휘한 실무책임자로서 김현희 가짜 만들기를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나 자신도 김현희가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문건 작성 시기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데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중점적으로 시도된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불이익은 없었나요.
“그런 건 묻지 말아 주세요.”
―이 문건이 국정원 과거사위나 진실위에서 KAL 858기 폭파 사건을 재조사할 때 참고 자료로 쓰였다고 봅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후 그런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외교부가 이 사건을 최초에는 ‘실종’으로 발표했던데요.
“115명의 탑승객 중 신원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북한과의 관련성을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테러라는 예단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건 초기에는 기체 결함에 의한 폭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시청 창에 불이 꺼져 있었다면…
―문건을 보면 일본 경시청과 접촉한 시간이 밤 12시가 넘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 시간에 접촉이 가능한 일인가요.
“당시 일본 경시청은 중동에서 적군파가 준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야근 중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위조 여권인지 아닌지 판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시 일본 경시청이 야간근무를 하지 않았다면 김현희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전문 대신 국제전화로 해외공관과 연락을 취한 이유는 뭡니까.
“문건 작성 사유에서 밝힌 것처럼 상황이 매우 긴박했습니다. 전문을 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11월 30일 밤 12시에 주UAE대사관에서 전문이 왔을 때 윗사람은 없었습니까.
“그 전문을 본 사람은 당시 나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상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관과 차관에게는 새벽에 보고했습니다.”
―안기부(국정원) 직원이 나와 상황을 통제하지 않았습니까.
“안기부 직원은 없었습니다. 정부 내에서 김현희가 체포될 때까지의 전 과정을 아는 사람은 당시로서는 나 한 명이었습니다. 시간도 그렇고 사건의 성격도 그렇고, 외무부가 사건의 진행을 통제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상황이 아침에 벌어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작을 주장하던 인사까지 조사관으로 참여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조차 조작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아직도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시기에 강하게 가졌던 신념체계와 가치체계를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고 봅니다. 이 사건에는 일본, 바레인, UAE 등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습니다. 조작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의혹을 주장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심정은 이해되지만 이 사건 초기의 상황을 통제했던 사람으로서 이 사건의 조작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최근 ‘김현희 가짜 만들기의 진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외교가를 통해 <1987년 KAL 858기 사건 관련 보고서>라는 외교부 문건을 단독 입수했다. 이 문건은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맨처음 국내에 ‘KAL 858기 실종’으로 알려진 직후부터 김현희가 바레인에서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보고서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외무부(지금의 외교통상부) 동남아과는 김현희씨 체포까지의 사건담당 주무부서였다.
이 문건은 외무부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987년 11월 30일 밤 12시경 주(駐)아랍에미리트(UAE)대사관으로부터 ‘마유미(김현희의 가짜 일본 이름)의 신원이 특이하다’는 전문(電文)을 입수한 후 이를 주일본대사관에 통보하고, 일본 측으로부터 마유미의 일본 여권이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주바레인대사관에 마유미의 여권이 위조임을 통보하고 마유미의 소재 파악과 바레인 출국 저지를 지시한 후, 마유미 체포까지의 모든 상황을 날짜별 시간대별로 기록해 놓고 있다. 전체 상황에 외무부가 일차적·주도적으로 대처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KAL 858기 폭파 사건 조작설’ 또는 ‘김현희 가짜설’은 사건의 의혹을 제기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낸 한 공중파 방송이 “이 모든 의혹의 중심에는 안기부(지금의 국정원)가 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내 정보기관의 사건 조작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설’들임을 감안할 때, 이 문건은 사건 발생 초기 국내 정보기관의 개입이 없었다는 방증이 된다. 이 문건은 이 사건이 발생 초기부터 UAE, 바레인, 일본 등 여러 나라와 관련돼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국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관련돼 있어 국제 관계상 사건을 조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문서이기도 하다.
이 보고서의 작성일자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2월 1일이고, 외교부의 공식 문건으로 등록된 날짜는 그해 6월 7일이다. KAL 858기 폭파 사건 등을 재조사하기 위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발족한 것은 2004년 11월이고, 2005년 12월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위)가 발족했다. 진실위에서도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다뤄졌음은 물론이다.국정원 과거사위나 진실위에서 KAL 858기 폭파 사건 재조사를 공식 안건으로 채택하기 전에는 종교·사회 단체와 방송 등에서 ‘김현희 가짜설’이 연이어 제기되기도 했다. 2003년 11월 3일에는 ‘김현희 KAL 858기 조작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115인 선언’이 나왔고, 11월 18일 MBC
이 문건은 이렇게 ‘김현희 가짜몰이’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작성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한 부처가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 일각의 의도와는 다른 스탠스를 취하면서 진실을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밤 12시 ‘마유미가 수상하다’는 전문 입수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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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L 858기 가족회’와 ‘KAL 858기 진상규명대책위’가 지난 2003년 11월 11일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KAL 858기 폭파 사건의 진상 재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
다음 날인 11월 30일 오전 7시30분 외무부 제2차관보, 동남아과장 등으로 구성된 정부조사단이 비행기가 실종된 곳 부근인 것으로 알려진 태국 방콕으로 출발했다. 이날 오후 2시경 사건담당 주무과가 동남아과로 정해졌고 동남아과장이 정부 조사단의 일원으로 방콕으로 출국함에 따라 외무부 본부의 실무책임자는 동남아과 과장대리가 맡게 된다.
그날 밤 12시 주UAE대사관은 일본인 승객 ‘마유미’에 대한 특이사항을 전문으로 외무부 본부에 보내 왔다. 전문은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의 승객 중 15명이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는데, 그중 ‘일본인’ ‘마유미’ 등의 신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실을 지휘하던 동남아과 과장대리는 이런 내용의 UAE 전문을 주일본대사관에 긴급 전송토록 외신과에 조치했다. 주일본대사관은 밤늦은 시간이라 퇴근해 있던 정무과장 집에 긴급 상황으로 전화를 했다. “즉시 공관으로 나가서 전문을 해독하고 일본 경시청 등과 접촉하라”는 지시였다.
그 시각 테러범 김현희와 김승일은 KAL 858기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내렸던 아부다비 공항을 빠져나와 바레인의 리젠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묵고 있었다. 김현희씨의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레인에 도착한 첫날은 휴일이었고 둘째날은 이미 (비행기가) 만원이어서 이틀 밤을 바레인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항공권 예약을 끝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본인 관광객으로 보이기 위해 택시를 대절하여 관광에 나섰다. … 시내 중심가에서 김(승일) 선생 와이셔츠와 샌드위치, 과일을 산 뒤 오후 5시쯤 되어 호텔로 돌아왔다. …>
호텔로 돌아온 그들은 사 들고 온 샌드위치와 과일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바레인의 오후 5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밤 11시다. 주UAE대사관이 마유미에 대한 특이사항을 전문으로 보내 오기 직전의 상황인 것이다.
악몽 같은 밤
날짜를 하루 넘긴 12월 1일 새벽 3시30분경 주일본대사관 정무과장이 전화로 보고를 해 왔다. 마유미 등 2인의 여권은 위조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실무책임을 맡은 동남아과 과장대리는 즉시 제1차관보에게 긴급보고를 했다. 새벽 4시경 동남아과 과장대리는 주바레인 대사대리(당시 대사는 해외공관장 회의 참석차 한국에 와 있는 상태였음)에게 전화를 걸어 여권 위조사실을 알리고 마유미의 숙소를 방문해 동태를 탐문할 것을 주문했다. 위조여권 확인 후 마유미 일행에 대해 수배조치를 내린 일본대사관 측과도 협조해 이들의 출국을 저지하라는 주문도 함께였다.
한국 시간으로 12월 1일 새벽, 외무부 상황실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그 시간, 바레인에서 11월 30일 밤을 보내고 있던 김현희와 김승일에게는 악몽이 시작된다. 일본대사관 측의 신분확인 전화와 한국대사관 직원의 숙소 방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김 선생이 통화를 했는데 일본대사관에서 KAL기가 방콕 도착 전에 실종되었다면서 우리 이름과 생년월일, 여권번호를 상세히 물어 온 것이었다. … 전화를 끊은 뒤 좀처럼 긴장할 줄 모르던 김 선생도 표정이 굳어져 한숨만 내쉬었다. 김 선생을 하늘처럼 믿고 따라다니던 나는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한 심정이었다. … 정말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전화종이 또 울렸다. 한국대사관 성원이 호텔 로비에 와 있다며 우리 방을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한국대사관 직원이 숙소를 방문해 일본인으로 가장한 김승일과 필담을 나누고 있을 때의 심정을 김현희씨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심장은 두방망이질을 하고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려 억제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
숙소 방문 이후에도 주바레인대사관의 마유미 일행 동태 감시는 계속됐고, 한국 시간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주바레인대사관은 마유미 접촉 및 일정 탐문 사항을 수시로 보고해 왔다. 전화상으로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4시경 마유미 일행이 공항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했다는 보고가 있었고 30분 후에는 이런 사실을 주바레인대사관이 공식 전문으로 보고해 왔다.
“김현희 가짜 만들기 보고 문서화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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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출간된 소설《배후》의 신문 광고. 안기부 직원들이 KAL 858기 폭파 사건을 기획·조작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이 문건의 작성자는 당시 동남아과 과장대리로서 주일본대사관으로의 전문 전달과 마유미 일행 동태 감시 지시 등 상황을 지휘했던 장철균(張哲均) 전(前) 스위스 대사다. 문건에서 장 전 대사는 작성 사유에 대해 “김현희 추적 과정에 개입한 본부(동남아과), 주UAE-바레인-일본대사관 등 4개 지역 간의 협의 진행과 체포 과정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직원이 부재하다”면서 “사건 초기 상황이 매우 긴박했고 관련 공관과의 주요한 업무 협의의 일부가 국제통화로 이루어졌으나 이 부분이 공식기록에 남겨지지 못함에 따라 이를 문서로 보완코자 하는 것임”이라고 밝히고 있다.
《월간조선》은 문건 입수 후 장 전 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장 전 대사는 “나서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기자는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는 ‘서희외교포럼’ 사무실로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 전 대사는 서희외교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
기자가 《월간조선》이 입수한 KAL 858기 관련 외교부 문건을 보여주자 “내가 작성한 것이 맞다”고 했다. 인터뷰가 아닌 인터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문건에 보면 작성 사유를 ‘주요 업무 협의가 국제통화로 이루어졌는데 그 부분이 공식기록에 남겨지지 못함에 따라 이를 문서로 보완코자 한다’고 밝혔던데, 사건 직후에 문서화해도 됐을 일을 왜 하필 사건이 한참 지난 후인 2005년 2월에 작성했나요.
“내가 문건을 작성했던 시기에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도를 넘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방송에도 나오고, 하다못해 소설로도 나오고. 그 전에는 김현희가 가짜라는 상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나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문건으로 만들어 외교부 공식문서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야 객관성이 담보되는 것이니까. 당시 김현희 체포까지의 상황을 지휘한 실무책임자로서 김현희 가짜 만들기를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나 자신도 김현희가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문건 작성 시기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데 ‘김현희 가짜 만들기’가 중점적으로 시도된 시기가 그때였습니다. 불이익은 없었나요.
“그런 건 묻지 말아 주세요.”
―이 문건이 국정원 과거사위나 진실위에서 KAL 858기 폭파 사건을 재조사할 때 참고 자료로 쓰였다고 봅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후 그런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외교부가 이 사건을 최초에는 ‘실종’으로 발표했던데요.
“115명의 탑승객 중 신원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북한과의 관련성을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테러라는 예단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건 초기에는 기체 결함에 의한 폭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시청 창에 불이 꺼져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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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일과 김현희가 소지하고 있다가 바레인 공항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독약 앰풀. 1988년 1월 15일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공개됐다. |
“당시 일본 경시청은 중동에서 적군파가 준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야근 중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위조 여권인지 아닌지 판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시 일본 경시청이 야간근무를 하지 않았다면 김현희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전문 대신 국제전화로 해외공관과 연락을 취한 이유는 뭡니까.
“문건 작성 사유에서 밝힌 것처럼 상황이 매우 긴박했습니다. 전문을 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11월 30일 밤 12시에 주UAE대사관에서 전문이 왔을 때 윗사람은 없었습니까.
“그 전문을 본 사람은 당시 나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상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관과 차관에게는 새벽에 보고했습니다.”
―안기부(국정원) 직원이 나와 상황을 통제하지 않았습니까.
“안기부 직원은 없었습니다. 정부 내에서 김현희가 체포될 때까지의 전 과정을 아는 사람은 당시로서는 나 한 명이었습니다. 시간도 그렇고 사건의 성격도 그렇고, 외무부가 사건의 진행을 통제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상황이 아침에 벌어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작을 주장하던 인사까지 조사관으로 참여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조차 조작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아직도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시기에 강하게 가졌던 신념체계와 가치체계를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고 봅니다. 이 사건에는 일본, 바레인, UAE 등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습니다. 조작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의혹을 주장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심정은 이해되지만 이 사건 초기의 상황을 통제했던 사람으로서 이 사건의 조작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