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의 고전이자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H. 트리스트럼 엥겔하트의 저서가 국내 소개됐다. 역자는 이화여대 의대의 권복규 교수다.
생명윤리에서 공통의 기준이 가능한가.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질문이다. 종교와 철학,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생명윤리적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
엥겔하트의 답은 냉혹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도발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역자가 직접 경험한 한 장면이다. 번역을 맡은 권 교수는 2010년 서울에서 엥겔하트와 직접 만났다.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 학술 심포지엄의 주제는 〈의료에서의 정의〉였다.
당시 엥겔하트는 “돈이 없는 노인이 국가에 치료비를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순간 영어 듣기 실력이 부족해 뭔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화장실에서 그를 만나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질문했다.
엥겔하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죽어야 한다.”
이 말은 끔찍하지만, 엥겔하트의 논리는 촘촘하다. 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 사조가 현대 생명윤리의 실제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이성에 기반한 보편적 도덕이라는 계몽주의의 약속은 실현 불가능하다. 공리주의든 롤스의 정의론이든, 결국 모두 특정한 가치 전제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공통의 도덕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애초부터 헛된 것 아닌가.
그가 클린턴 대통령의 이른바 의료개혁에 극구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엥겔하트가 제시하는 대안은 ‘허락 원칙’이다. 보편적 이성이 부재한 세계에서 도덕적 권위는 당사자들의 실제 동의에서만 비롯된다. 국가조차도 개인의 자율적 선택을 침해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도덕 이방인들’이 공존하려면, 강제 없이 협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 즉 자유주의적 틀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지만…
이는 한국의 생명윤리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권 교수의 지적은 신랄하다. 대한민국은 우리가 단일한 도덕 공동체라는 판단하에, 윤리적 이슈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또 그래야 한다는 신념하에 살아왔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법제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정부가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한 현실이 이러한 신념의 한계를 매우 잘 보여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근원적 문제에 아무도 성찰하거나 지적한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권 교수는 이 책이 “그러한 도덕적으로 거칠기 짝이 없는 행위에 대한 해독제(antidote)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엥겔하트가 낙태와 상업적 안락사에 비판적이면서도, 세속 생명윤리 차원에서는 비난할 근거가 없다고 본다는 점이다. 권 교수는 이를 세속 생명윤리학의 한계를 냉정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전통적 종교 공동체의 가치를 부각시키려는 전략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입장은 엥겔하트의 신앙 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서양의 모든 철학과 신학 전통에 실망하면서 1991년 정교회로 개종한다. 신학자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서양 전통의 한계에 절망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듯이…. 엥겔하트는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종교 전통으로 복귀한 것이다.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이 이 책을 “생명윤리 분야에 등장한 가장 뛰어난 저작 가운데 하나”라고 평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엥겔하트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보기 드문 철학자로서, 의료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 방대한 책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정말로 생명윤리에 관한 공통의 도덕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덕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강압 없이 공존하는 방식을 찾는 것일까.⊙
생명윤리에서 공통의 기준이 가능한가.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질문이다. 종교와 철학,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생명윤리적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
엥겔하트의 답은 냉혹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도발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역자가 직접 경험한 한 장면이다. 번역을 맡은 권 교수는 2010년 서울에서 엥겔하트와 직접 만났다.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 학술 심포지엄의 주제는 〈의료에서의 정의〉였다.
당시 엥겔하트는 “돈이 없는 노인이 국가에 치료비를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순간 영어 듣기 실력이 부족해 뭔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화장실에서 그를 만나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질문했다.
엥겔하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죽어야 한다.”
이 말은 끔찍하지만, 엥겔하트의 논리는 촘촘하다. 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 사조가 현대 생명윤리의 실제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이성에 기반한 보편적 도덕이라는 계몽주의의 약속은 실현 불가능하다. 공리주의든 롤스의 정의론이든, 결국 모두 특정한 가치 전제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공통의 도덕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애초부터 헛된 것 아닌가.
그가 클린턴 대통령의 이른바 의료개혁에 극구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엥겔하트가 제시하는 대안은 ‘허락 원칙’이다. 보편적 이성이 부재한 세계에서 도덕적 권위는 당사자들의 실제 동의에서만 비롯된다. 국가조차도 개인의 자율적 선택을 침해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도덕 이방인들’이 공존하려면, 강제 없이 협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 즉 자유주의적 틀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지만…
이는 한국의 생명윤리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권 교수의 지적은 신랄하다. 대한민국은 우리가 단일한 도덕 공동체라는 판단하에, 윤리적 이슈에 대해서는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또 그래야 한다는 신념하에 살아왔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법제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정부가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한 현실이 이러한 신념의 한계를 매우 잘 보여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근원적 문제에 아무도 성찰하거나 지적한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권 교수는 이 책이 “그러한 도덕적으로 거칠기 짝이 없는 행위에 대한 해독제(antidote)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엥겔하트가 낙태와 상업적 안락사에 비판적이면서도, 세속 생명윤리 차원에서는 비난할 근거가 없다고 본다는 점이다. 권 교수는 이를 세속 생명윤리학의 한계를 냉정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전통적 종교 공동체의 가치를 부각시키려는 전략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입장은 엥겔하트의 신앙 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서양의 모든 철학과 신학 전통에 실망하면서 1991년 정교회로 개종한다. 신학자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서양 전통의 한계에 절망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듯이…. 엥겔하트는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종교 전통으로 복귀한 것이다.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이 이 책을 “생명윤리 분야에 등장한 가장 뛰어난 저작 가운데 하나”라고 평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엥겔하트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보기 드문 철학자로서, 의료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 방대한 책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정말로 생명윤리에 관한 공통의 도덕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덕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강압 없이 공존하는 방식을 찾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