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7년 징역을 구형한 검사 세 명을 향해 아내가 절규했다.
⊙ 오늘도 주님께 물어보았다. 어찌 이리하셨어요?
⊙ ‘3체 6조지기’… ‘아는 체’ ‘있는 체’ ‘잘난 체’, ‘먹어 조지기’ ‘세어 조지기’ ‘패 조지기’ ‘불러 조지기’ ‘미뤄 조지기’ ‘챙겨 조지기’
⊙ 나는 벽 쪽에 앉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러 군데 쓰여 있었다.
⊙ 검사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반복적으로 신문하고 필요한 진술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
[편집자 주]
강만수 전(前) 기획재정부장관이 과거 옥중에서 쓴 소설을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수장이었던 그는 산업은행장 재직 당시 대우조선해양 비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2016년 12월 구속돼 4년여간 옥고(獄苦)를 치렀다. 옥중에서 10편 이상의 소설을 쓴 그는 지난 2022년 11월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는 제73회 한국소설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에 〈동백꽃처럼〉을 투고해 당선됐다. 강 전 장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중편소설 〈최후진술〉을 3회에 걸쳐 싣는다.
[작가 소개 | 姜萬洙]
서울대에서 법을, 뉴욕대에서 경제를 공부했고, 공직에서 일하였으며, 2022년 《한국소설》에 단편 〈동백꽃처럼〉으로 등단하여, 2023년 단편 〈쪽새미 애가〉를, 2024년 한국소설가협회 ‘2024 신예작가’로 선정되어 〈세종로 블루스〉를 발표함. snowkang21@naver.com
[작가의 말 | 시대의 아픔을 광장에]
시대의 아픔을 광장에 올린다. 갇힌 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기를 바랐던 〈최후진술〉을 제물로 올린다. 어떤 前 대법원장이 자기가 구속되자 그렇게 부른 ‘조물주’의 세상을! 있는 법은 없이 하고 없는 법은 있게 하는 그들의 초능력을 민중은 모른다. 민중은 돌을 던졌고 피에 열광했다. 문명 이전의 세상에서나 있을 시대의 아픔이 다시는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오지랖에 돌팔매 맞을 각오를 하고 광장에 나선다. 또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러느냐는 아내의 절규를 뒤로하고. 보통 시민이 보통으로 사는 문명 이후의 세상을 위하여! 아 어찌 잊으랴 그 고독과 애통과 수치를! 다시는 보지 말아야 할 일제와 전제의 유산을! 금단의 벽 속에서 긴 세월을 살다가 긴 복도를 걸어 나오던 그날의 햇살을! 조국이 준 최고 훈장을 버리려 한강에 나간 시대의 절망을! 강물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 나의 슬픈 삶을! 억울함이 클수록 시장은 커지는 비정의 카르텔을 깰 수 없을까?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는 민중의 선택이다! 아,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나의 조국이여!
⊙ 오늘도 주님께 물어보았다. 어찌 이리하셨어요?
⊙ ‘3체 6조지기’… ‘아는 체’ ‘있는 체’ ‘잘난 체’, ‘먹어 조지기’ ‘세어 조지기’ ‘패 조지기’ ‘불러 조지기’ ‘미뤄 조지기’ ‘챙겨 조지기’
⊙ 나는 벽 쪽에 앉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러 군데 쓰여 있었다.
⊙ 검사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반복적으로 신문하고 필요한 진술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
[편집자 주]
강만수 전(前) 기획재정부장관이 과거 옥중에서 쓴 소설을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수장이었던 그는 산업은행장 재직 당시 대우조선해양 비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2016년 12월 구속돼 4년여간 옥고(獄苦)를 치렀다. 옥중에서 10편 이상의 소설을 쓴 그는 지난 2022년 11월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는 제73회 한국소설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에 〈동백꽃처럼〉을 투고해 당선됐다. 강 전 장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중편소설 〈최후진술〉을 3회에 걸쳐 싣는다.
[작가 소개 | 姜萬洙]
서울대에서 법을, 뉴욕대에서 경제를 공부했고, 공직에서 일하였으며, 2022년 《한국소설》에 단편 〈동백꽃처럼〉으로 등단하여, 2023년 단편 〈쪽새미 애가〉를, 2024년 한국소설가협회 ‘2024 신예작가’로 선정되어 〈세종로 블루스〉를 발표함. snowkang21@naver.com
[작가의 말 | 시대의 아픔을 광장에]
시대의 아픔을 광장에 올린다. 갇힌 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기를 바랐던 〈최후진술〉을 제물로 올린다. 어떤 前 대법원장이 자기가 구속되자 그렇게 부른 ‘조물주’의 세상을! 있는 법은 없이 하고 없는 법은 있게 하는 그들의 초능력을 민중은 모른다. 민중은 돌을 던졌고 피에 열광했다. 문명 이전의 세상에서나 있을 시대의 아픔이 다시는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오지랖에 돌팔매 맞을 각오를 하고 광장에 나선다. 또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러느냐는 아내의 절규를 뒤로하고. 보통 시민이 보통으로 사는 문명 이후의 세상을 위하여! 아 어찌 잊으랴 그 고독과 애통과 수치를! 다시는 보지 말아야 할 일제와 전제의 유산을! 금단의 벽 속에서 긴 세월을 살다가 긴 복도를 걸어 나오던 그날의 햇살을! 조국이 준 최고 훈장을 버리려 한강에 나간 시대의 절망을! 강물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 나의 슬픈 삶을! 억울함이 클수록 시장은 커지는 비정의 카르텔을 깰 수 없을까?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는 민중의 선택이다! 아,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나의 조국이여!
출소한 다음 날 오후 차를 몰고 한강변 올림픽도로를 달렸다.
강변의 풍경은 내가 없는 사이 외국에 온 것같이 달라져 있었다. 123층의 롯데월드타워는 압도적이었다. 북한 개성도 보인다는 554.5m 높이의 전망대가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강동대교를 지나 미사리 한강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둑길에 오르니 초겨울 강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갈대숲이 바람 따라 일렁이며 파도를 쳤다. 내가 구속되기 전날 걸었던 둑길이었다.
0.1%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독과 슬픔과 분노의 4년여 동안이었다. 나중에는 시대와의 불화가 낳은 아픔으로 생각하고 체념하였지만, 그 체념의 상처는 뼛속 깊이 뿌리박혔다. 그대로 갖고 살기에는 너무 시렸다.
어둡고 어려웠던 체념의 공간에서 유사 이래 최장이라는 추석 연휴 열흘은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계곡이었다. 역사상 최대의 인파가 인천공항으로 출국하였던 그 연휴에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최후진술서를 쓰고 있었다. 열흘간의 그 혹독함은 내 체념의 상처를 가장 아프게 후벼 팠다.
둑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 열흘간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든 동그란 금속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무겁고 차가웠다. 강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높이 솟은 롯데월드타워에 해가 걸렸다.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추석 연휴를 앞둔 주말 금요일 오후 2시. 봄날에 시작해 여섯 달에 걸쳐 진행된 항소심의 마지막 결심 공판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세 명의 검사가 돌아가며 나의 12가지 혐의에 대해 신문을 했다. 벤처기업인과 국회의원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투자와 대출 부탁을 들어주었는지. 나는 원심과 마찬가지로 혐의 사실을 부인하는 대답을 했다. 그저 살아가다가 만났고 그저 일상의 부탁으로 들었고 그저 사람들의 얘기로 전달했다고. 모르는 사실은 모른다고, 아닌 사실은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면 기억에 없다고.
검사들의 신문이 끝나고 내가 선임한 변호사가 돌아가며 검사의 신문을 반박하는 신문을 하였다. 변호사의 신문이 끝나자 검사들은 다시 반대신문을 통해 참고인 진술과 증거를 제시하면서 벤처기업인의 투자와 국회의원의 대출 청탁을 들어주려고 강제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원심에서도 여섯 달에 걸쳐 혐의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진술하며 증거를 댔고 최후진술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소심에 들어와서도 여섯 달에 걸쳐 원심에서와 비슷하게 공판이 진행되었고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나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법정 싸움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경기였다. 그들은 수사에 오래 훈련된 프로였고, 게임의 규칙도 행태도 다 그들의 것이었다. 검사들의 생각과 행동 양식은 내가 살아오던 세상과는 달랐다. 가능하면 의심했고, 최대한 나쁘게 생각했고, 모르거나 잊어버린 것은 기억해 내라고 했다. 나의 진술이 그들의 의도와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묻거나 증거를 수집하여 그 조각들을 그들이 짜놓은 퍼즐에 끼워 맞추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검사는 무한정 사람을 부르고 압수수색을 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진술과 증거를 찾지만, 구속된 상태의 피의자는 증인과 증거를 찾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고, 또 필요한 증인은 대부분 자기도 걸려들까 봐 겁을 먹고 달리 말하거나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피의자에게는 없거나 아닌 것은 그저 없다는 것과 아니라는 것 말고 달리 증명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었다. 눈이 하나인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가서 눈이 두 개 달린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검사와 변호사의 신문과 반대신문이 여섯 시간에 걸쳐 진행된 후 마지막으로 피고인의 최후진술 순서가 되었다. 이미 나는 몸도 마음도 탈진되어 있었고 최후진술을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한 단 높은 판사석의 재판장과 내 사건의 주심 판사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또 나를 수사하고 기소하고 항소하여 오늘까지 오게 한 세 검사의 얼굴도 하나하나 바라보며 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두 판사님!
피고인은 몸과 마음이 지쳐 여기서는 한 가지만 말하고 나머지는 문서로 제출하겠습니다.
오늘 나를 이 법정에 세운 세 검사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정부 5년간 있었던 나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장관 때 추진했던 4대강 사업에 참여한 건설회사의 자금을 추적하고, 대통령 경제특보 때 추진한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국책 과제 선정에 대한 공정성을 따지고, K은행장 시절의 대출에 대한 적정성을 문제 삼고, 공직에서 물러난 후 골프와 해외여행 경비의 출처를 조사했습니다.
이런 방대한 추적 조사를 수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가 피고인과 같은 방법으로 수사당하고 기소당해도 온당하다고 생각하실 겁니까? 온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의 자식 세대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라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하는 특별수사라는 이름의 표적 수사와 먼지떨이 수사가 어느 문명 국가에 있을까요? 일본의 식민 통치와 과거의 권위주의 통치의 슬픈 유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혐의가 12개나 된다는 것은 한 개도 확실하게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요?
나머지 구체적 혐의에 대한 진술은 문서로 제출하겠습니다.
피고인 간절한 마음으로 최후진술을 마칩니다.〉
항상 그랬듯 검사들의 눈은 나를 피해 책상의 서류에 가있었고 판사들의 눈은 허공에 떠있었다. 나의 최후진술이 끝나고 검사는 원심에서 무죄가 된 D조선 관련 배임을 포함하여 12개의 혐의에 대한 전면 유죄를 청구하며, 살인죄의 최저 형량인 5년 이상 징역보다 높은 7년 징역을 구형하였고, 재판장은 4주 후에 선고 공판을 열겠다고 선언하였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 결심 공판은 끝났고 검은 법복의 판사들은 그들의 전용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은 여섯 달의 재판을 마무리하는 날이라 20석 정도의 방청석이 가득 찼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친지들은 측은한 눈길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원심에서 무죄였던 혐의도 유죄를 주장하며 7년 징역을 구형한 검사 세 명을 향해 아내가 절규했다.
교도관이 내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칙칙한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차고, 교도관에 끌려 법정을 나가는 나를 가족들과 친지들이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법정 옆에 붙은 피고인 대기실에 잠깐 앉았다가 피고인 전용 승강기를 타고 지하에 설치된 피고인 구치감으로 향했다. 여섯 시간 넘게 참았던 오줌이 급해 화장실부터 갔다.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수갑 찬 손으로 바지 지퍼를 어렵게 내려 오줌을 누었다. 수갑을 차고도 볼일을 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손을 씻었더니 법정의 피로가 풀리는 것같이 시원했다.
구치감에 들어서니 재판이 끝난 20여 명의 피고인이 먼저 와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에 피곤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맨 뒤쪽 벤치에 앉았다. 앞줄 나무 의자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교도관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머릿수를 세었다.
한 시간 넘게 그렇게 기다렸더니 호송 버스가 왔다. 교도관은 피고인들을 수갑 위에 다시 포승줄로 두 팔을 몸통에 묶고 또 4명씩 연결하여 묶는 연승을 한 다음 버스에 태웠다. 나는 고령이라고 수갑만 채우고 버스 맨 뒷자리에 앉혔다. 버스는 법원 뒷마당을 돌아 정문을 나온 다음 서초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차도 사람도 많았다. 밤길을 못 걸어본 지 1년이 되었다. 가끔 가던 ‘서초갈비집’ 앞을 지날 때 소주를 마시며 갈비를 구워 먹는 사람의 모습들이 보였다. 갈비 굽는 냄새가 스며오는 것 같았다. 버스는 예술의전당 밑으로 우면산터널을 지나 과천 들길을 달렸다. 인덕원네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밤늦게 서울구치소에 도착했다.
굴비같이 꿰인 채로
서울구치소는 청계산 남쪽 자락에 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들로 구성된 H자 구조의 거대한 콤플렉스인데 3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남북으로 200m 정도의 두 복도가 있고 이것을 동서로 연결하는 100m 정도의 복도가 축을 이룬다. 남북 복도 좌우에 16개씩의 남자 수용동이 있고 여자 수용동은 동남쪽 구석에 분리되어 있다. 동서 복도 가운데에는 남쪽 바깥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고 그 끝에 행정동이 있는데 그 바깥에 높이 7m 정도의 담벼락이 둘러처져 있다.
버스는 구치소 정문을 지나 행정동에 이르러 앞뒤 이중으로 차단된 철문에 들어섰다. 교도관이 버스에 올라 인원수를 점검한 다음 육중한 앞쪽 철문이 열리고 안쪽 마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굴비같이 꿰인 채로 줄지어 검색실로 들어갔다. 교도관은 연승을 먼저 풀고 개인별로 두 팔을 묶은 포승을 푼 다음 온몸을 수색했다. 신발 깔창을 빼고 양말을 벗게 하여 신발 속도 검사한 다음 수갑을 풀어주었다. 포승줄을 푸는 스스슥 소리와 수갑을 푸는 찰그락 소리만 들렸다. 우리는 감옥 속의 작은 자유를 다시 찾았다.
우리는 검색실을 나와 동서 복도 가운데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한참 걸었다. 50여m 지나 좌우로 수용동이 배치되어 있는 남북 복도에 들어섰다. 긴 남북 복도에는 초가을 밤바람이 써늘하게 불었다. 모두 말없이 걸었다. 구치소에서는 교담(대화를 구치소에서는 그렇게 말했다)이 금지되어 있다. 수용자들이 각자가 수용된 사동(건물을 말하는데 구치소에서 쓰는 말 대부분은 일제시대의 유산 같았다)에 들어갈 때 철책 문이 열리고 다른 수용자들은 그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철거덕 또 철거덕 하며 감옥의 적막을 깼다. 수용자들은 교도관의 계호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수용된 사동은 구치소의 서북쪽 끝에 있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 여섯 개의 철문을 통과했고 내가 갇혀 있는 ‘16중 2방’(16동 2층 2번방을 그렇게 불렀다)에 들어가려면 다시 두 개의 철문을 지나야 한다. 모두 여덟 개의 철문을 통과해 내 방에 왔다.
방에는 마분지로 만든 밥상에 밥과 반찬이 놓여 있었다. 모래알처럼 식은 밥을 물에 말아서 차가운 된장국과 김치로 허기를 때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방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구치소는 겨울 난방이 들어오기 전 이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긴 복도는 바람의 통로가 되어 구치소는 바깥보다 항상 온도가 낮은데 밤공기는 더 차갑다. 법정에 나가지 않을 때는 오후에 주는 뜨거운 물을 코카콜라 페트병에 채우고 그것에 양말을 씌워 안고 자는데 오늘은 늦어 그것도 할 수 없었다. 모포를 깔아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잠이 들지 않아 내의를 겹으로 입었다. 7년 징역을 구형한 검사를 향해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하며 절규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귀청에 계속 울렸다.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섯 달에 걸친 지방법원의 원심 재판을 마치고 또 여섯 달에 걸친 고등법원의 항소심을 종결하는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연휴 10일 240시간을 독거방에 갇혀
아침 6시에 기상 음악이 흘렀다. 오늘은 대학생 때 듣던 비틀스의 ‘예스터데이’가 나왔다. 일어나 모포를 개고 창문을 열었다. 쇠창살 창문 앞 운동장 담장 위에 하얀 들국화 두 개가 댕그라니 피어 있었다. 새들이 울었다. 봄부터 울던 청계산 뻐꾸기가 뻐꾹 뻐꾹 크게 울었다. 오늘은 구치소 남쪽 담장 멀리 수리산 위의 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10일간의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든 역사상 가장 긴 연휴였다. 2017년은 10월 4일이 추석인데, 9월 30일 토요일과, 10월 2일 월요일은 올해 특별히 정한 징검다리 공휴일, 그리고 3일간의 추석 휴일과 개천절의 대체공휴일인 10월 6일 금요일, 여기다가 한글날인 10월 9일 월요일까지 합쳐 10일간의 연휴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황금 연휴가 되어 유사 이래 최대의 관광객이 인천공항을 빠져나갔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담장 안의 우리에게는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는 모든 것이 정지되는 날이다. 평소에도 일요일과 공휴일은 견디기 힘들지만, 연휴가 되면 영혼과 육신은 어둠의 계곡을 헤매다가 지친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꼼짝없이 어둠의 계곡에서 10일간의 혹독한 극기 훈련을 하게 되었다. 전쟁 포로도 제네바 협정에 따라 72시간에 한 번은 운동을 시켜 준다는데 10일 동안 240시간을 독거방에 갇혀 살아야 했다. 얼마나 힘들까를 알 수 없는 일이라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6시 30분 기상 점검이 시작되었다. 우리 층 담당 주임(각층 담당 교도관을 그렇게 불렀다)이 목청을 뽑아 소리 질렀다.
“각방~ 점검 준비~!”
철거덕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차렷~!”
주임의 구령에 따라 감독 교도관이 방마다 머릿수를 세었다. 수용자들은 관복(칙칙한 녹갈색의 죄수복을 말한다)을 차려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야 한다.
“1방, 2방, 3방… 15방.”
주임은 방 이름을 차례로 부르고 감독 교도관은 작은 쇠창살 문을 통해 방마다 이상 여부를 확인했다. 나는 별일 없다는 표시로 감독 교도관과 얼굴을 마주쳤다. 1방과 2방은 1.5평이 조금 안 되는 독거방이고 3방부터 15방까지는 4평 정도의 혼거방인데 4~6명이 있으니 사동의 층마다 60명 전후가 수용되어 있다. 주임과 감독 교도관은 복도 저쪽 끝에 있는 15방까지 점검을 마치고 되돌아왔다.
“각방~ 쉬어~!”
복도 입구 쪽에서 주임이 마지막으로 소리 지르면서 아침 점검이 끝났다. 철거덕 하며 철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감독 교도관이 떠났다.
이어서 7시에 사소(청소와 배식을 담당하는 죄수를 그렇게 불렀다)가 소리쳤다.
“배식~!”
사소는 두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밥통, 국통, 반찬통을 실은 카트를 끌고와서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작은 배식구를 통해 다섯 개의 플라스틱 그릇에 음식을 나누어 준다. 오늘은 밥과 된장국에 김치·콩나물·꽁치구이 3가지 반찬이 나왔다. 나는 얼마 전부터 매운 것을 먹으면 속이 쓰려 김치를 물에 씻어 먹었는데 오늘은 콩나물에도 고춧가루가 많아 물을 부어 씻어 먹었다. 감옥에서는 모든 것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아야 한다. 3000명 정도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식사라 가끔 고두밥 같은 밥이 나오면 물에 말아 먹었고, 반찬이 짜면 물에 씻어 먹었다. 한 끼 재료비 원가는 1,400원 정도라고 했는데 양은 부족하지 않았다. 주간 단위로 짜이는 식단은 끼니마다 바뀌고 그 식단도 매월 바뀌었다.
교도소는 무엇이든지 탈옥과 자해를 예방하기 위해 가능하면 불편하고 안 되게 만들어져 있었다. 특히 자해 행위를 할 수 있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은 일절 금지되어 있다. 볼펜으로 눈을 찌르는 자해 행위가 있었다고 해서 개인 소지를 금지하고 집필실(과거에 편지 쓰는 방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에서 편지를 쓰게 했는데, 어떤 민주 투사의 강력한 투쟁으로 방에서 볼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바지는 허리띠 없이 고무줄과 단추로 조여 엉덩이에 걸치는데 그것도 먼저 다녀간 수용자들이 입던 것을 세탁한 것이었다. 하늘색의 사복을 사서 법정에 나갈 때는 그것을 입었지만, 감옥에서는 푸르죽죽한 녹갈색의 관복을 입고 지냈다. 복도와 방은 24시간 전등이 켜져 있어 취침 시간에는 눈가리개를 끼고 자야 했다. 신발도 고무신이나 끈이 없는 운동화를 신게 했고, 옷을 거는 횃대는 아래 방향에서 걸어놓아 세게 당기면 빠지게 만들어 놓았다. 특별히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목을 걸 수 있는 끈이나 고리가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게 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과 수저를 화장실 수돗물에 씻어 문턱에 늘어놓았다. 일이 없는 감옥살이에서 설거지는 시간을 보내기에 소중한 일거리였다.
8시. 일과를 시작하는 노래가 울렸다. “법은 지킬수록 기분 좋은 기본”이라고 경쾌하게 노래하는데 들을 때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자들은 또 점검을 받는다. 주간 근무를 위해 교대한 주임은 기상 점검 때와 꼭 같이 “점검 준비~!”를 소리친 다음 “차렷~!”을 외치고 주간 담당 감독 교도관이 각 방을 점검했다.
구치소에는 시설과 행태와 용어뿐 아니라 이야기도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는 ‘3체 6조지기’였다. 모르는 게 ‘아는 체’, 없는 게 ‘있는 체’, 못난 게 ‘잘난 체’한다는 것이 ‘3체’인데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태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6조지기’는 죄수는 닭장 같은 방에 갇혀 ‘먹어 조지기’, 간수는 죄수가 탈옥했는지 ‘세어 조지기’, 순사(일제시대 경찰을 그렇게 불렀다)는 자백하라고 ‘패 조지기’, 검사는 수갑 채워 ‘불러 조지기’, 판사는 법정에 불러 놓고 ‘미뤄 조지기’, 그리고 변호사는 거액의 변론비를 ‘챙겨 조지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시대 상황은 바뀌어도 3체 6조지기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언론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기사를 마구 써서 인격 살인을 하니 ‘기자는 써 조지기’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은 지킬수록 기분 좋은 기본”
연휴 첫날은 달력의 글자가 빨간색이 아닌 파란색의 토요일이라고 평소대로 오후에 1시간 운동을 시켜주었다. 교도관이 열어주는 철문을 나가 계단으로 1층에 내려가서 복도로 나가는 데 네 개의 철문을 통과했다. 복도 중간쯤에서 운동장에 들어가서 개인별로 구분된 작은 운동 마당에 들어가는 데 두 개의 철문을 또 통과했다. 운동장은 구치소 서쪽 15동과 16동 사이에 있는데 학교 운동장 정도의 크기를 세 곳으로 나누어, 두 곳은 족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혼거 수용자들이 사용하고 나머지 한 곳에는 둥글게 담을 쳐서 독거 수용자들이 사용했다. 독거 수용자 운동장은 2층으로 된 감시탑을 중심으로 피자를 잘라놓은 것같이 12개의 작은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파놉티콘이라고 불렀다.
내가 항상 들어가는 7번 마당에는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었다. 빛을 보아야 잘 잔다고 하여 팬티만 남기고 옷은 벗어 시멘트 벽에 걸고 고무신도 벗었다. 땀을 흘려야 잘 먹을 수 있다고 하여 7m 정도 길이의 피자 조각 마당에 삼각형을 그리며 땀이 나게 뛰고 걸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감옥살이가 달라진다고 하여 “죽기보다는 낫지, 빠삐용(살인 누명으로 무기형을 살다가 탈옥에 성공한 이야기의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보다는 낫지”를 계속 반복하여 되뇌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지난번에 날카로운 돌이 발바닥에 박혀 피가 났는데 아직도 아팠다.
비행기가 머리 위를 날아 관악산 너머 김포공항 쪽으로 날아갔다. 태평양을 건너 지구를 한 바퀴 돌았던 첫 해외 출장의 감동이 생각났다. 가을 햇볕은 따갑게 내리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땅을 밟고 해를 보며 땀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바깥에서는 몰랐다. 작은 마당에서라도 운동이 최고의 휴식이고 안식이었다.
마당 가운데 작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행운을 위해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지난 원심 때 선고 공판이 있기 전날 네잎클로버를 찾았어도 유죄가 선고되었는데 뭐. 그래도 이번에는 무죄라도 나올까 하여 한참을 찾아도 없었다. 행운이 없으려나.
가을인데도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민들레가 홀씨를 바람에 태워 높은 담장 넘어 날려 보내고 있었다. 개미가 부지런히 민들레 옆을 지나다녔다. 광활한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에, 지구의 티끌 같은 내가 또 티끌 같은 개미를 본다. 운동 나올 때마다 민들레와 개미가 반가운 친구였다. 민들레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개미가 안 보이면 개미집 앞에서 기다렸다. 태초에 나와 저 개미의 조상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민들레는? 그런데 태초에 하늘과 땅은? 전능자의 창조가 아니라면?
교도관이 철문을 열었다. 한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두 개의 철문을 거꾸로 지나 서늘한 가을바람이 부는 복도를 한참 걸었다. 살아오면서 200m나 되는 이렇게 긴 복도는 여기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벽 위쪽 높다랗게 걸린 창 너머 흰 구름이 파란 가을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었다.
또 두 개의 철문을 지나 방으로 돌아왔다.
긴 복도를 걸어 두 번 꺾은 다음 지하 통로를 거쳐
연휴 둘째 날 일요일이 되었다.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두 번째 점검도 지나갔다.
내가 다닌 교회의 11시 주일 예배 시간에 맞추어 혼자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를 불렀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가슴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솟아올랐다.
시편을 읽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오늘도 주님께 물어보았다. 어찌 이리하셨어요? 어찌 감옥까지 오게 하셨어요? 평생을 아파트 한 채에 눌러앉아 살면서 부정한 돈 챙긴 것 없는데요? 아침 저녁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 어두운 감옥에서 혼자 견디기 힘드니 함께하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이번에는 집에 보내주소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오늘도 주님은 침묵하셨다.
예배를 마치고 명상을 시작했다.
반듯이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빼고, 호흡을 깊고 길게 하며, 생각을 멈추고. 긴 복도에 유령이 나올 것 같은 고요가 흘렀다. 교도관이 순찰하는 발걸음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생각 멈춤을 십 분도 못 견디고 오늘도 생각한다.
꿈만 같았다. 내가 구속되면서부터 원심을 거쳐 항소심 결심 공판에 오게 된 모든 과정을 생각할수록 슬펐다. 원심에서 검사는 7년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4년 징역을 선고했으니 그래도 판사는 5년 이상 징역의 살인범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으로 본 것 같았다. 그저 보통의 일상을 살았는데 어떻게 4년이라는 무거운 징역을 내렸을까?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일이고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조선시대가 아니라서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지 않아 다행이고 일제시대가 아니라서 고문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가을 햇살이 멀리 수리산 위에 내렸다.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를 읽었다. 치점 신부에게 이방의 땅 중국 오지에 세운 성당이 홍수로 무너져 다시 지어야 하는 고난이 닥쳤다. 천국의 열쇠는 고난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인가? 엉덩이가 방바닥에 배겨서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읽었다. 의자에서 살다가 바닥에서 사는 것이 감옥살이의 큰 고통이었다. 엉덩이 양쪽 모두 멍이 들었고 어깨에서 허리를 거쳐 발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통증이 오다가 마비 증세가 오기도 했다. 걸터앉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가를 밖에서는 몰랐다.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이제껏 몰랐다. 누웠다가는 까마귀(모자부터 구두까지 까맣게 신은 기동순찰대를 그렇게 불렀다)가 와서 야단을 친다. 벽에 기대어 책을 읽으니 다리가 아팠다. 화장실에 들어가 양변기 위에 앉아 읽었다. 걸터앉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가을 햇살에 잠이 들었다.
징검다리 공휴일인 월요일은 당초 평일이라고 해서 접견이 특별히 주어졌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있는데 주임이 9시에 접견이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보통 때는 예약을 하는데 오늘은 갑자기 통보했다. 접견 담당 교도관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 두 번 꺾은 다음 지하 통로를 거쳐 대기실로 갔다. 가을 햇살이 창살로 내리고 수용자들 모두 다닥다닥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벽 쪽에 앉았다. 볼펜으로 원초적 본능에 따라 그린 성기와 억울함을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낙서들이 가득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러 군데 쓰여 있었다.
9시에 접견실에 들어갔다. 아내는 큰애와 함께 접견실에 들어설 때부터 눈물을 글썽거렸다. 새벽에 집을 나와 아침 일찍 구치소에 왔는데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했다.
“지난밤 잠은 잘 주무셨어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잘 잤어요. 눈물 보이지 말아요.”
“그러려고 하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마음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큰애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참았다. 구속된 그 주일 일요일 밤 목 놓아 울었고, 원심에서 4년 징역을 받던 날 구치소로 돌아와 긴 복도를 걸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되뇌며 눈물이 수의를 적시도록 울었다. 오늘은 가족들 앞이라 울 수가 없었다.
“긴 연휴 얼마나 힘들겠어요. 면회도 운동도 못 하고.”
“닥치면 되겠지요.”
“열흘이나 되는데….”
“….”
나는 말없이 아내를 쳐다보았다. 감옥에서는 대화보다 만남 자체가 소중했다. 아내는 추석 10일 연휴 내내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큰애는 새 정부가 들어서서 혹독하게 밀고 나가는 적폐 청산으로 바깥세상도 감옥같이 살벌하다고 했다. 지난 정부에서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감옥에 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을 와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하게 된 접견이 10분 만에 끝났다. 양쪽을 갈라놓은 유리 창문에 손바닥을 마주하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큰애의 부축을 받고 접견실을 나가는 아내의 모습은 힘이 없었다.
접견실을 나가는 아내의 모습
감옥은 죄수가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산다고 말한다. 재판이 없을 때는 하루도 빼지 않고 면회 오는 아내의 모습이 항상 처량해 보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와서, 주차장에 내려 10분 넘게 걸어서 대기실에 온 다음, 30분 정도 기다리다가, 10분을 유리창 너머로 내 얼굴을 보고, 또 한 시간이나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그 한나절의 수치와 분노와 허무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감옥 안에는 보통 사람이 들어올 수 없으니, 감옥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살며, 무엇을 먹는지를 모르는 가족들의 상상은 그 자체가 고문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람과 짐승의 중간 정도, 어쩌면 짐승에 더 가까운 대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항상 나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눈물 보이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나의 말이고 생각일 뿐! 요즘은 지하철을 타고 인덕원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구치소 앞에서 내려 접견실까지 1km 정도 되는 길을 걸어온다는데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힘들까. 더운 여름 땀은 얼마나 흐르고 추운 겨울 찬바람은 얼마나 매서울까.
나는 접견실을 나와 대기실에 있다가 교도관의 호송을 받으며 지하 통로를 거쳐 긴 복도를 걸었다. 접견을 오가며 긴 복도를 걷는 것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갈 때는 담벼락 멀리 수리산을 보고, 올 때는 창살 너머 관악산을 볼 수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과 그림들을 보는 것도 큰 호사였다. 노란 꽃술에 빨갛게 타오르는 동백꽃 사진을 볼 때는 고교 때 가던 해운대 동백꽃을 생각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산마루 억새밭 사진을 지날 때는 힘들게 공부하던 대학 생활을 회상한다. 죄수들이 남긴 그림들을 지날 때는 그림에도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쇠창살 너머 하얀 뭉게구름이 관악산 능선을 따라 흘렀다. 가을바람도 소슬했다.
나에 대한 수사는 새 정부가 들어서자 시작되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4대강 정비 사업부터 내사 형태로 시작되어 죄를 찾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K은행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통해 D조선의 분식 회계를 문제 삼아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에서 수사를 시작하였다.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검찰총장의 하명 사건을 수사하던 중앙수사부가 반인권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다가 이름을 바꾸어 부활된 특별 수사 조직(그 후 정권이 바뀌면서 3년 만에 다시 폐지되었다)이었다. 그 중앙수사부가 부활된 다음 내가 처음으로 걸려든 고위공무원이라는 것이 불운의 시작이었고,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혹독했다. 그들이 수집한 과장되거나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그린 밑그림에 필요한 조각들을 찾는 수사는 처음부터 나를 덫에 걸려 발버둥 치는 사슴으로 만들었다.
아내와 함께 여름휴가를 마치고 회사(내가 공직에서 물러나 지인들과 함께 설립한 투자펀드회사였는데 이 사건으로 영업이 중단된 후 청산되었다)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비상계단에서 기다리던 건장한 사내 여럿이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중 인상이 사나운 사내가 자기가 검사라면서 압수수색영장을 보여주었다. 그 검사는 내 휴대폰부터 빼앗더니 나를 작은 회의실에 몰아넣었다. 압수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의실 TV에 나에 대한 압수수색 뉴스가 떴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집행하기 전에 언론에 흘린 것 같았고 언론은 첫날부터 거대한 부정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화면에 뜬 내 얼굴과 압수수색 사실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나는 폭탄을 맞아 허물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함께 온 사내들이 내 집무실의 컴퓨터부터 시작하여 서류들을 모두 뒤지며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서류들을 검찰청 로고가 찍힌 상자에 담았다. 나는 압수수색영장을 보았지만 황망한 상황이라 내가 받는 혐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수사관이라 하는 사내가 내가 지난해 유럽 여행에서 사온 기념품 칼을 가지고 오더니 왜 허가 없이 도검을 소지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오스트리아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인데 허가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그 검사가 칼을 돌려주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사무실의 수색과 압수가 점심시간을 훨씬 넘어서 네 시간 만에 끝났다. 그동안 나는 그 인상 사나운 검사와 함께 회의실에 붙들려 있었다. 그들은 여남은 개의 상자에 압수 물품을 담고는 압수 목록에 사인을 받았다. 휴대전화는 내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 사내 검사는 그 주말쯤 검찰에 출두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철수했다.
집에 오니 내가 출근한 직후 검찰 수사관 3명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그들은 금고가 어디 있는지부터 물었다고 했다. 없다고 하자 다른 곳에 숨겨 둔 금괴와 보석이 있을까 하여 온 집안을 수색하였다고 했다. 한참을 찾아도 금괴와 보석이 나오지 않자 은행 대여금고는 없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세 시간을 수색하고는 은행 통장과 나의 수첩 등을 빈 케이크 상자 하나에 넣어 갔다고 했다. 3명의 수사관이 나와서 케이크 상자 하나를 가지고 허겁지겁 가는 모습이 기자 카메라에 잡혀 방송되었다고 했다. 기자까지 동행하여 태산이 울리는 것처럼 왔다가 생쥐 한 마리 잡아가는 코미디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경제 부처 요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금괴와 보석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 같았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실들이 연일 뉴스에
압수수색 다음 날 친구의 소개로 변론을 맡기로 약속한 변호사를 찾아갔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그는 약속과 달리 변론으로 해결될 사건이 아니라면서 선임을 사양했다. 청와대 하명 사건을 수사하는 경우는 범죄의 내용보다 정치적 상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지금 청와대와 관계가 원활하지 않은 자기가 맡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혹시 청와대 고위층과 연결이 되면 그곳과 접촉해 볼 것을 권유하며 다른 변호사를 소개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청와대 특별보좌관과 전화로 접촉해 보았다. 그는 관여하기 어렵다고 했다. 처음 찾아갔던 변호사가 추천하여 선임한, 대검찰청 부장 출신의 다른 변호사도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선임을 해지하자고 했다. 나는 D조선과 관련하여 돈 받은 것도 없고 특별히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변론을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간청에 그는 소송 수행은 다른 변호사가 맡는 조건으로 구속영장 단계까지만 맡기로 타협했다. 변호사도 맡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무언가 거대한 장벽을 느꼈다.
검찰은 D조선의 전현직 두 사장을 이미 구속한 상태에서 계속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실들을 언론에 흘려 나를 부정한 일을 많이 하고 부패한 공직자로 몰고갔다. 압수수색이 있은 다음 날은 ‘D조선 비리 눈감아 주고 개인 이익 챙겨’라는 제목으로 TV 뉴스가 떴고 그다음 날 모든 신문도 같이 보도했다. 이어서 ‘측근을 연봉 1억원의 D조선 고문에 앉혀’라는 뉴스가 떴다. 그리고는 ‘친척에게 부당하게 공사 수주’라는 뉴스도 떴다. 계속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실이 뉴스에 뜨는 동안 주말에 부른다던 검찰은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부르지 않고 참고인들을 불러 조사하고 혐의들을 언론에 흘리면서 그들이 그린 그림에 따라 혐의를 언론과 함께 사실로 만들어갔다. 구체적으로 무슨 혐의로 어떤 수사가 진행되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언론 보도를 통해서만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억지로 변론을 맡은 변호사는 오히려 나에게 수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었다.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출입 기자는 그들만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카르텔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보도를 통해 안 사실에 대한 증거 자료들을 찾아 정리하며 소환에 대비했다.
검찰은 처음부터 국가 반역자라도 잡는 듯이 내 집과 사무실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비서와 운전기사를 압수수색한 다음 가까운 지인들과 친구들 심지어 고향에 있는 종친까지 광범위하게 압수수색을 하고 불러가 심문을 했다. 압수수색이 있은 지 한 달이 더 지나도 검찰은 나를 소환하지 않았다.
추석이 되어 아내와 함께 강화도 바닷가 펜션에 갔다. 해 질 녘 어지러운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을 때 수평선 멀리 낙조가 붉게 타올랐다. 바다 건너 석모도에 어둠이 내렸다. 아내와 나는 바닷가 횟집에서 조개탕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 날은 교동도에 가서 갯벌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교동도 전통시장에 들어가 시골스러운 작은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아내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도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연휴가 끝나는 날, 변호사가 다음 날 검찰에 출두하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부른다고 했던 날보다 한 달 반이나 지나 불렀다.
알 수 없는 세상에 와서 알 수 없는 일을 당하며
검찰에 출두하는 날 아침에 바쁘게 식사를 마치고 검찰청사로 갔다. 검찰이 변호사를 통해 미리 얘기해 준 대로 현관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차를 내렸다. 수십 명의 기자가 진을 치고 있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다. 나는 삼각형으로 표시된 포토라인에 서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준비한 대로 말했다.
“부끄러운 일 안 하고, 부정한 돈 안 받고, 평생을 나라 위해 일했습니다. 보도된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러고는 압수수색 때 보았던 수사관이라는 사내가 검찰청사로 끌고 들어가더니 수사팀장인 부장검사실로 데려갔다. 커피를 한 잔 주었다. 평소에도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데 그날 커피 맛은 아주 썼다. 부장검사는 야릇한 표정으로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말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녹화 장치가 설치된 특별조사실로 들어갔다.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수사팀의 차장이라는 검사는 애써 정중하게 태도를 가다듬더니, 그들은 합리적인 의심을 기초로 수사를 한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대답해 달라고 했다. 준비한 신문 사항에 따라 3명의 담당 검사가 번갈아가며 물었다. D조선에 대한 경영 감사를 왜 했는지부터 물었다. 나는 K은행은 D조선의 주채권은행으로서 법률상 감사 권한이 없어서 컨설팅 계약에 따라 컨설팅을 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K은행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국회가 국정감사에서 D조선의 방만 경영과 사장의 경영 부정을 지적하며 감사를 요구해서 감사 대신 컨설팅을 하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것을 계속 사실상의 감사가 아니냐고 몰아가며 그들이 마련한 질문 순서에 따라 되풀이하여 물었다. 마주 보고 앉은 검사 옆에서 수사관은 문답 내용을 워드프로세서로 쳤다.
감사냐 컨설팅이냐에 대해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문답을 한 시간 가까이 하다가 이미 구속된 D조선 사장의 경영 비리 문제로 넘어갔다. 검찰은 감사 결과 사장의 비리를 발견하고도 검찰에 고발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채권은행으로서 컨설팅을 한 것이기 때문에 비리에 관해 고발할 권한과 의무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묻는 사항 대부분은 내가 했던 일 중에 사소한 것들이어서 기억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참고인을 불러 그들의 그림에 필요한 진술들을 먼저 받고 그것을 토대로 만든 질문을 되풀이하여 물었다. 나에게 반복하여 물어서 얻은 사실 중 필요한 것을 엮어 그들에게 필요한 그림을 그려갔다. D조선이 우뭇가사리로 휘발유를 뽑는 벤처기업에 강압적으로 투자하게 한 혐의에 관해 물었다. 과거 내가 일했던 부처의 출입 기자였던 벤처기업인을 D조선 사장에게 소개한 것도 아물거리는데 그 벤처기업에 50억원을 투자하도록 강압했다는 말은 더구나 알 수 없었다. 참고인들의 진술은 그들도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겁박과 회유에 따른 유도 질문에 따라 대답한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참고인들의 진술과 다른 나의 대답에 대해서는 검사가 생각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물었다.
세 시간 정도 조사를 하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한 시간 쉬기로 하고 설렁탕을 시켜 먹었다. 식사 후 30여 분의 여유가 있어 수사관을 따라 옥상에 올라갔다.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멀리 보였고 남쪽으로는 관악산이 보였다. 알 수 없는 세상에 와서 알 수 없는 일을 당하며 먼 산을 바라보니 세상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오후에는 경영 비리가 문제 되었던 사장의 후임으로 새로 선임된 K 사장으로 하여금 국회의원 총선거 때 여야 의원 7명에게 각각 200만원 전후의 후원금을 주게 한 것을 물었다. 검찰은 후원금을 전달한 D조선 임원의 진술을 근거로 강압적으로 선거 후원금을 주도록 한 것으로 몰고가는 신문을 시작했다. 검찰은 신문을 시작할 때부터 계속 같은 방법으로 기억에 없는 것들은 참고인의 진술로 채워나갔고, 애매한 것들은 그들 의도대로 신문과 답변을 반복하여 그림을 채웠고, 부인하는 내용은 그들이 필요한 진술이 나올 때까지 계속 물었다. 참고인의 진술을 부인하기 위해서는 내가 증거를 대야 했는데 아닌 것을 아니라는 말 이외에 아닌 증거를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세상을 산다. 그저 사는 일상이 쌓여 삶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사는 일상들을 많은 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상 중에서 특별한 일, 즉 특별한 사건이거나 행사이거나 아니면 범죄처럼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경우 이외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검사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의 의도된 구도에 따라 계속 반복적으로 신문하고 필요한 진술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이런 인간은 처음 보았다. 어디 할 짓이 없어 남을 옭아매기 위해 허구한 날 사람을 함정으로 몰고가는 것을 일로 삼는지. 한심하고 가련한 생각도 들었다.
검사의 신문에 해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새로운 신문이 늘어나고 혐의도 늘어났다. 계속 반복되는 검찰의 신문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참고인들의 진술과 나의 진술이 섞여서 새로운 그림이 되어갔고 나 자신도 아니라는 주장 이외에 명백한 물증이 또한 없었다. 처음에는 아니었던 것이 나중에는 비슷한 것같이 되었고, 어떤 것은 생각 없이 한 말이 빌미가 되어 올가미에 걸리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직업적으로 쳐놓은 덫은 견고했다.
저녁도 설렁탕으로 시켜 먹고 밤 11시 넘도록 14시간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영혼과 육신 모두 탈진되고 나중에는 사실과 진술과 주장이 뒤섞여 나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혼동이 왔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온 젊은 변호사가 배석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검찰 수사는 근본적으로 피의자에게 불리한 구조였다.
“사실대로 부는 것이 서로가 고생을 덜 하는 것”
마지막으로 나에게 경제 부처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땅 한 평, 주식 한 장 없이, 아파트 한 채에 눌러산다는 것을 국민 누가 믿겠느냐고 물었다. 숨기거나 차명으로 보유한 재산을 사실대로 부는 것이 서로가 고생을 덜 하는 것이라고 했다. D조선의 사장 둘을 이미 구속한 상태에서 결국은 나도 구속될 것인데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사건이 있어서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나를 불렀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피해자의 고발에 따라 정해진 피의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피의 사실을 찾아내 나를 감옥에 보내려는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렇게 14시간에 걸친 조사로 만들어진 진술 조서를 자정인 12시가 되기 직전에 읽어보라고 했다. 고쳐달라고 하는 곳 일부는 고쳐주었지만, 기본적인 그림에 손을 대는 것에는 그들의 태도가 완고하였다. 일부 내용이 내가 말한 뜻과 달라 손도장을 찍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도 자정을 넘었고 영혼과 육신이 모두 탈진한 데다가 달리 버틸 대안도 없어 새벽 1시가 지나고는 손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다. 명백하게 돈을 받은 것이 있었거나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것인데 오히려 명백한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
새벽 3시경에 검찰청을 나오는데 그때까지 기자들 몇 명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플래시를 터뜨리며 물었다. 혐의 사실을 인정했느냐고. 나는 아니라고 짧게 말하고는 큰애가 준비한 차에 올랐다. 집에 오니 새벽 3시가 훌쩍 넘었다.
맥주에 소주를 탄 소맥을 한잔하고 잠에 떨어졌다.⊙ (다음 호에 계속)
강변의 풍경은 내가 없는 사이 외국에 온 것같이 달라져 있었다. 123층의 롯데월드타워는 압도적이었다. 북한 개성도 보인다는 554.5m 높이의 전망대가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강동대교를 지나 미사리 한강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둑길에 오르니 초겨울 강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갈대숲이 바람 따라 일렁이며 파도를 쳤다. 내가 구속되기 전날 걸었던 둑길이었다.
0.1%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독과 슬픔과 분노의 4년여 동안이었다. 나중에는 시대와의 불화가 낳은 아픔으로 생각하고 체념하였지만, 그 체념의 상처는 뼛속 깊이 뿌리박혔다. 그대로 갖고 살기에는 너무 시렸다.
어둡고 어려웠던 체념의 공간에서 유사 이래 최장이라는 추석 연휴 열흘은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계곡이었다. 역사상 최대의 인파가 인천공항으로 출국하였던 그 연휴에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최후진술서를 쓰고 있었다. 열흘간의 그 혹독함은 내 체념의 상처를 가장 아프게 후벼 팠다.
둑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 열흘간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든 동그란 금속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무겁고 차가웠다. 강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높이 솟은 롯데월드타워에 해가 걸렸다.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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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 청사. 일러스트=조선DB 참조 |
세 명의 검사가 돌아가며 나의 12가지 혐의에 대해 신문을 했다. 벤처기업인과 국회의원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투자와 대출 부탁을 들어주었는지. 나는 원심과 마찬가지로 혐의 사실을 부인하는 대답을 했다. 그저 살아가다가 만났고 그저 일상의 부탁으로 들었고 그저 사람들의 얘기로 전달했다고. 모르는 사실은 모른다고, 아닌 사실은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면 기억에 없다고.
검사들의 신문이 끝나고 내가 선임한 변호사가 돌아가며 검사의 신문을 반박하는 신문을 하였다. 변호사의 신문이 끝나자 검사들은 다시 반대신문을 통해 참고인 진술과 증거를 제시하면서 벤처기업인의 투자와 국회의원의 대출 청탁을 들어주려고 강제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원심에서도 여섯 달에 걸쳐 혐의 내용이 사실과 다름을 진술하며 증거를 댔고 최후진술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소심에 들어와서도 여섯 달에 걸쳐 원심에서와 비슷하게 공판이 진행되었고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나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법정 싸움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경기였다. 그들은 수사에 오래 훈련된 프로였고, 게임의 규칙도 행태도 다 그들의 것이었다. 검사들의 생각과 행동 양식은 내가 살아오던 세상과는 달랐다. 가능하면 의심했고, 최대한 나쁘게 생각했고, 모르거나 잊어버린 것은 기억해 내라고 했다. 나의 진술이 그들의 의도와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묻거나 증거를 수집하여 그 조각들을 그들이 짜놓은 퍼즐에 끼워 맞추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검사는 무한정 사람을 부르고 압수수색을 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진술과 증거를 찾지만, 구속된 상태의 피의자는 증인과 증거를 찾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고, 또 필요한 증인은 대부분 자기도 걸려들까 봐 겁을 먹고 달리 말하거나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피의자에게는 없거나 아닌 것은 그저 없다는 것과 아니라는 것 말고 달리 증명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었다. 눈이 하나인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가서 눈이 두 개 달린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검사와 변호사의 신문과 반대신문이 여섯 시간에 걸쳐 진행된 후 마지막으로 피고인의 최후진술 순서가 되었다. 이미 나는 몸도 마음도 탈진되어 있었고 최후진술을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한 단 높은 판사석의 재판장과 내 사건의 주심 판사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또 나를 수사하고 기소하고 항소하여 오늘까지 오게 한 세 검사의 얼굴도 하나하나 바라보며 물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두 판사님!
피고인은 몸과 마음이 지쳐 여기서는 한 가지만 말하고 나머지는 문서로 제출하겠습니다.
오늘 나를 이 법정에 세운 세 검사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정부 5년간 있었던 나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장관 때 추진했던 4대강 사업에 참여한 건설회사의 자금을 추적하고, 대통령 경제특보 때 추진한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국책 과제 선정에 대한 공정성을 따지고, K은행장 시절의 대출에 대한 적정성을 문제 삼고, 공직에서 물러난 후 골프와 해외여행 경비의 출처를 조사했습니다.
이런 방대한 추적 조사를 수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가 피고인과 같은 방법으로 수사당하고 기소당해도 온당하다고 생각하실 겁니까? 온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의 자식 세대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라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하는 특별수사라는 이름의 표적 수사와 먼지떨이 수사가 어느 문명 국가에 있을까요? 일본의 식민 통치와 과거의 권위주의 통치의 슬픈 유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혐의가 12개나 된다는 것은 한 개도 확실하게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요?
나머지 구체적 혐의에 대한 진술은 문서로 제출하겠습니다.
피고인 간절한 마음으로 최후진술을 마칩니다.〉
항상 그랬듯 검사들의 눈은 나를 피해 책상의 서류에 가있었고 판사들의 눈은 허공에 떠있었다. 나의 최후진술이 끝나고 검사는 원심에서 무죄가 된 D조선 관련 배임을 포함하여 12개의 혐의에 대한 전면 유죄를 청구하며, 살인죄의 최저 형량인 5년 이상 징역보다 높은 7년 징역을 구형하였고, 재판장은 4주 후에 선고 공판을 열겠다고 선언하였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 결심 공판은 끝났고 검은 법복의 판사들은 그들의 전용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은 여섯 달의 재판을 마무리하는 날이라 20석 정도의 방청석이 가득 찼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친지들은 측은한 눈길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원심에서 무죄였던 혐의도 유죄를 주장하며 7년 징역을 구형한 검사 세 명을 향해 아내가 절규했다.
교도관이 내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칙칙한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차고, 교도관에 끌려 법정을 나가는 나를 가족들과 친지들이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법정 옆에 붙은 피고인 대기실에 잠깐 앉았다가 피고인 전용 승강기를 타고 지하에 설치된 피고인 구치감으로 향했다. 여섯 시간 넘게 참았던 오줌이 급해 화장실부터 갔다.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수갑 찬 손으로 바지 지퍼를 어렵게 내려 오줌을 누었다. 수갑을 차고도 볼일을 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손을 씻었더니 법정의 피로가 풀리는 것같이 시원했다.
구치감에 들어서니 재판이 끝난 20여 명의 피고인이 먼저 와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에 피곤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맨 뒤쪽 벤치에 앉았다. 앞줄 나무 의자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교도관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머릿수를 세었다.
한 시간 넘게 그렇게 기다렸더니 호송 버스가 왔다. 교도관은 피고인들을 수갑 위에 다시 포승줄로 두 팔을 몸통에 묶고 또 4명씩 연결하여 묶는 연승을 한 다음 버스에 태웠다. 나는 고령이라고 수갑만 채우고 버스 맨 뒷자리에 앉혔다. 버스는 법원 뒷마당을 돌아 정문을 나온 다음 서초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차도 사람도 많았다. 밤길을 못 걸어본 지 1년이 되었다. 가끔 가던 ‘서초갈비집’ 앞을 지날 때 소주를 마시며 갈비를 구워 먹는 사람의 모습들이 보였다. 갈비 굽는 냄새가 스며오는 것 같았다. 버스는 예술의전당 밑으로 우면산터널을 지나 과천 들길을 달렸다. 인덕원네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밤늦게 서울구치소에 도착했다.
굴비같이 꿰인 채로
서울구치소는 청계산 남쪽 자락에 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들로 구성된 H자 구조의 거대한 콤플렉스인데 3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남북으로 200m 정도의 두 복도가 있고 이것을 동서로 연결하는 100m 정도의 복도가 축을 이룬다. 남북 복도 좌우에 16개씩의 남자 수용동이 있고 여자 수용동은 동남쪽 구석에 분리되어 있다. 동서 복도 가운데에는 남쪽 바깥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고 그 끝에 행정동이 있는데 그 바깥에 높이 7m 정도의 담벼락이 둘러처져 있다.
버스는 구치소 정문을 지나 행정동에 이르러 앞뒤 이중으로 차단된 철문에 들어섰다. 교도관이 버스에 올라 인원수를 점검한 다음 육중한 앞쪽 철문이 열리고 안쪽 마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굴비같이 꿰인 채로 줄지어 검색실로 들어갔다. 교도관은 연승을 먼저 풀고 개인별로 두 팔을 묶은 포승을 푼 다음 온몸을 수색했다. 신발 깔창을 빼고 양말을 벗게 하여 신발 속도 검사한 다음 수갑을 풀어주었다. 포승줄을 푸는 스스슥 소리와 수갑을 푸는 찰그락 소리만 들렸다. 우리는 감옥 속의 작은 자유를 다시 찾았다.
우리는 검색실을 나와 동서 복도 가운데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한참 걸었다. 50여m 지나 좌우로 수용동이 배치되어 있는 남북 복도에 들어섰다. 긴 남북 복도에는 초가을 밤바람이 써늘하게 불었다. 모두 말없이 걸었다. 구치소에서는 교담(대화를 구치소에서는 그렇게 말했다)이 금지되어 있다. 수용자들이 각자가 수용된 사동(건물을 말하는데 구치소에서 쓰는 말 대부분은 일제시대의 유산 같았다)에 들어갈 때 철책 문이 열리고 다른 수용자들은 그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철거덕 또 철거덕 하며 감옥의 적막을 깼다. 수용자들은 교도관의 계호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수용된 사동은 구치소의 서북쪽 끝에 있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 여섯 개의 철문을 통과했고 내가 갇혀 있는 ‘16중 2방’(16동 2층 2번방을 그렇게 불렀다)에 들어가려면 다시 두 개의 철문을 지나야 한다. 모두 여덟 개의 철문을 통과해 내 방에 왔다.
방에는 마분지로 만든 밥상에 밥과 반찬이 놓여 있었다. 모래알처럼 식은 밥을 물에 말아서 차가운 된장국과 김치로 허기를 때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방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구치소는 겨울 난방이 들어오기 전 이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긴 복도는 바람의 통로가 되어 구치소는 바깥보다 항상 온도가 낮은데 밤공기는 더 차갑다. 법정에 나가지 않을 때는 오후에 주는 뜨거운 물을 코카콜라 페트병에 채우고 그것에 양말을 씌워 안고 자는데 오늘은 늦어 그것도 할 수 없었다. 모포를 깔아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잠이 들지 않아 내의를 겹으로 입었다. 7년 징역을 구형한 검사를 향해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하며 절규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귀청에 계속 울렸다.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섯 달에 걸친 지방법원의 원심 재판을 마치고 또 여섯 달에 걸친 고등법원의 항소심을 종결하는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연휴 10일 240시간을 독거방에 갇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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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 풍경. 일러스트=조선DB 참조 |
10일간의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든 역사상 가장 긴 연휴였다. 2017년은 10월 4일이 추석인데, 9월 30일 토요일과, 10월 2일 월요일은 올해 특별히 정한 징검다리 공휴일, 그리고 3일간의 추석 휴일과 개천절의 대체공휴일인 10월 6일 금요일, 여기다가 한글날인 10월 9일 월요일까지 합쳐 10일간의 연휴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황금 연휴가 되어 유사 이래 최대의 관광객이 인천공항을 빠져나갔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담장 안의 우리에게는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날짜는 모든 것이 정지되는 날이다. 평소에도 일요일과 공휴일은 견디기 힘들지만, 연휴가 되면 영혼과 육신은 어둠의 계곡을 헤매다가 지친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꼼짝없이 어둠의 계곡에서 10일간의 혹독한 극기 훈련을 하게 되었다. 전쟁 포로도 제네바 협정에 따라 72시간에 한 번은 운동을 시켜 준다는데 10일 동안 240시간을 독거방에 갇혀 살아야 했다. 얼마나 힘들까를 알 수 없는 일이라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6시 30분 기상 점검이 시작되었다. 우리 층 담당 주임(각층 담당 교도관을 그렇게 불렀다)이 목청을 뽑아 소리 질렀다.
“각방~ 점검 준비~!”
철거덕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차렷~!”
주임의 구령에 따라 감독 교도관이 방마다 머릿수를 세었다. 수용자들은 관복(칙칙한 녹갈색의 죄수복을 말한다)을 차려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야 한다.
“1방, 2방, 3방… 15방.”
주임은 방 이름을 차례로 부르고 감독 교도관은 작은 쇠창살 문을 통해 방마다 이상 여부를 확인했다. 나는 별일 없다는 표시로 감독 교도관과 얼굴을 마주쳤다. 1방과 2방은 1.5평이 조금 안 되는 독거방이고 3방부터 15방까지는 4평 정도의 혼거방인데 4~6명이 있으니 사동의 층마다 60명 전후가 수용되어 있다. 주임과 감독 교도관은 복도 저쪽 끝에 있는 15방까지 점검을 마치고 되돌아왔다.
“각방~ 쉬어~!”
복도 입구 쪽에서 주임이 마지막으로 소리 지르면서 아침 점검이 끝났다. 철거덕 하며 철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감독 교도관이 떠났다.
이어서 7시에 사소(청소와 배식을 담당하는 죄수를 그렇게 불렀다)가 소리쳤다.
“배식~!”
사소는 두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밥통, 국통, 반찬통을 실은 카트를 끌고와서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작은 배식구를 통해 다섯 개의 플라스틱 그릇에 음식을 나누어 준다. 오늘은 밥과 된장국에 김치·콩나물·꽁치구이 3가지 반찬이 나왔다. 나는 얼마 전부터 매운 것을 먹으면 속이 쓰려 김치를 물에 씻어 먹었는데 오늘은 콩나물에도 고춧가루가 많아 물을 부어 씻어 먹었다. 감옥에서는 모든 것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아야 한다. 3000명 정도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식사라 가끔 고두밥 같은 밥이 나오면 물에 말아 먹었고, 반찬이 짜면 물에 씻어 먹었다. 한 끼 재료비 원가는 1,400원 정도라고 했는데 양은 부족하지 않았다. 주간 단위로 짜이는 식단은 끼니마다 바뀌고 그 식단도 매월 바뀌었다.
교도소는 무엇이든지 탈옥과 자해를 예방하기 위해 가능하면 불편하고 안 되게 만들어져 있었다. 특히 자해 행위를 할 수 있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은 일절 금지되어 있다. 볼펜으로 눈을 찌르는 자해 행위가 있었다고 해서 개인 소지를 금지하고 집필실(과거에 편지 쓰는 방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에서 편지를 쓰게 했는데, 어떤 민주 투사의 강력한 투쟁으로 방에서 볼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바지는 허리띠 없이 고무줄과 단추로 조여 엉덩이에 걸치는데 그것도 먼저 다녀간 수용자들이 입던 것을 세탁한 것이었다. 하늘색의 사복을 사서 법정에 나갈 때는 그것을 입었지만, 감옥에서는 푸르죽죽한 녹갈색의 관복을 입고 지냈다. 복도와 방은 24시간 전등이 켜져 있어 취침 시간에는 눈가리개를 끼고 자야 했다. 신발도 고무신이나 끈이 없는 운동화를 신게 했고, 옷을 거는 횃대는 아래 방향에서 걸어놓아 세게 당기면 빠지게 만들어 놓았다. 특별히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목을 걸 수 있는 끈이나 고리가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게 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과 수저를 화장실 수돗물에 씻어 문턱에 늘어놓았다. 일이 없는 감옥살이에서 설거지는 시간을 보내기에 소중한 일거리였다.
8시. 일과를 시작하는 노래가 울렸다. “법은 지킬수록 기분 좋은 기본”이라고 경쾌하게 노래하는데 들을 때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자들은 또 점검을 받는다. 주간 근무를 위해 교대한 주임은 기상 점검 때와 꼭 같이 “점검 준비~!”를 소리친 다음 “차렷~!”을 외치고 주간 담당 감독 교도관이 각 방을 점검했다.
구치소에는 시설과 행태와 용어뿐 아니라 이야기도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는 ‘3체 6조지기’였다. 모르는 게 ‘아는 체’, 없는 게 ‘있는 체’, 못난 게 ‘잘난 체’한다는 것이 ‘3체’인데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태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6조지기’는 죄수는 닭장 같은 방에 갇혀 ‘먹어 조지기’, 간수는 죄수가 탈옥했는지 ‘세어 조지기’, 순사(일제시대 경찰을 그렇게 불렀다)는 자백하라고 ‘패 조지기’, 검사는 수갑 채워 ‘불러 조지기’, 판사는 법정에 불러 놓고 ‘미뤄 조지기’, 그리고 변호사는 거액의 변론비를 ‘챙겨 조지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시대 상황은 바뀌어도 3체 6조지기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언론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기사를 마구 써서 인격 살인을 하니 ‘기자는 써 조지기’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은 지킬수록 기분 좋은 기본”
연휴 첫날은 달력의 글자가 빨간색이 아닌 파란색의 토요일이라고 평소대로 오후에 1시간 운동을 시켜주었다. 교도관이 열어주는 철문을 나가 계단으로 1층에 내려가서 복도로 나가는 데 네 개의 철문을 통과했다. 복도 중간쯤에서 운동장에 들어가서 개인별로 구분된 작은 운동 마당에 들어가는 데 두 개의 철문을 또 통과했다. 운동장은 구치소 서쪽 15동과 16동 사이에 있는데 학교 운동장 정도의 크기를 세 곳으로 나누어, 두 곳은 족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혼거 수용자들이 사용하고 나머지 한 곳에는 둥글게 담을 쳐서 독거 수용자들이 사용했다. 독거 수용자 운동장은 2층으로 된 감시탑을 중심으로 피자를 잘라놓은 것같이 12개의 작은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파놉티콘이라고 불렀다.
내가 항상 들어가는 7번 마당에는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었다. 빛을 보아야 잘 잔다고 하여 팬티만 남기고 옷은 벗어 시멘트 벽에 걸고 고무신도 벗었다. 땀을 흘려야 잘 먹을 수 있다고 하여 7m 정도 길이의 피자 조각 마당에 삼각형을 그리며 땀이 나게 뛰고 걸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감옥살이가 달라진다고 하여 “죽기보다는 낫지, 빠삐용(살인 누명으로 무기형을 살다가 탈옥에 성공한 이야기의 영화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보다는 낫지”를 계속 반복하여 되뇌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지난번에 날카로운 돌이 발바닥에 박혀 피가 났는데 아직도 아팠다.
비행기가 머리 위를 날아 관악산 너머 김포공항 쪽으로 날아갔다. 태평양을 건너 지구를 한 바퀴 돌았던 첫 해외 출장의 감동이 생각났다. 가을 햇볕은 따갑게 내리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땅을 밟고 해를 보며 땀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바깥에서는 몰랐다. 작은 마당에서라도 운동이 최고의 휴식이고 안식이었다.
마당 가운데 작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행운을 위해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지난 원심 때 선고 공판이 있기 전날 네잎클로버를 찾았어도 유죄가 선고되었는데 뭐. 그래도 이번에는 무죄라도 나올까 하여 한참을 찾아도 없었다. 행운이 없으려나.
가을인데도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민들레가 홀씨를 바람에 태워 높은 담장 넘어 날려 보내고 있었다. 개미가 부지런히 민들레 옆을 지나다녔다. 광활한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에, 지구의 티끌 같은 내가 또 티끌 같은 개미를 본다. 운동 나올 때마다 민들레와 개미가 반가운 친구였다. 민들레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개미가 안 보이면 개미집 앞에서 기다렸다. 태초에 나와 저 개미의 조상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민들레는? 그런데 태초에 하늘과 땅은? 전능자의 창조가 아니라면?
교도관이 철문을 열었다. 한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두 개의 철문을 거꾸로 지나 서늘한 가을바람이 부는 복도를 한참 걸었다. 살아오면서 200m나 되는 이렇게 긴 복도는 여기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벽 위쪽 높다랗게 걸린 창 너머 흰 구름이 파란 가을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었다.
또 두 개의 철문을 지나 방으로 돌아왔다.
긴 복도를 걸어 두 번 꺾은 다음 지하 통로를 거쳐
연휴 둘째 날 일요일이 되었다.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두 번째 점검도 지나갔다.
내가 다닌 교회의 11시 주일 예배 시간에 맞추어 혼자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를 불렀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가슴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솟아올랐다.
시편을 읽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오늘도 주님께 물어보았다. 어찌 이리하셨어요? 어찌 감옥까지 오게 하셨어요? 평생을 아파트 한 채에 눌러앉아 살면서 부정한 돈 챙긴 것 없는데요? 아침 저녁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 어두운 감옥에서 혼자 견디기 힘드니 함께하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이번에는 집에 보내주소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오늘도 주님은 침묵하셨다.
예배를 마치고 명상을 시작했다.
반듯이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빼고, 호흡을 깊고 길게 하며, 생각을 멈추고. 긴 복도에 유령이 나올 것 같은 고요가 흘렀다. 교도관이 순찰하는 발걸음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생각 멈춤을 십 분도 못 견디고 오늘도 생각한다.
꿈만 같았다. 내가 구속되면서부터 원심을 거쳐 항소심 결심 공판에 오게 된 모든 과정을 생각할수록 슬펐다. 원심에서 검사는 7년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4년 징역을 선고했으니 그래도 판사는 5년 이상 징역의 살인범보다는 조금 나은 사람으로 본 것 같았다. 그저 보통의 일상을 살았는데 어떻게 4년이라는 무거운 징역을 내렸을까?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일이고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조선시대가 아니라서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지 않아 다행이고 일제시대가 아니라서 고문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가을 햇살이 멀리 수리산 위에 내렸다.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를 읽었다. 치점 신부에게 이방의 땅 중국 오지에 세운 성당이 홍수로 무너져 다시 지어야 하는 고난이 닥쳤다. 천국의 열쇠는 고난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인가? 엉덩이가 방바닥에 배겨서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읽었다. 의자에서 살다가 바닥에서 사는 것이 감옥살이의 큰 고통이었다. 엉덩이 양쪽 모두 멍이 들었고 어깨에서 허리를 거쳐 발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통증이 오다가 마비 증세가 오기도 했다. 걸터앉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가를 밖에서는 몰랐다.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이제껏 몰랐다. 누웠다가는 까마귀(모자부터 구두까지 까맣게 신은 기동순찰대를 그렇게 불렀다)가 와서 야단을 친다. 벽에 기대어 책을 읽으니 다리가 아팠다. 화장실에 들어가 양변기 위에 앉아 읽었다. 걸터앉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가을 햇살에 잠이 들었다.
징검다리 공휴일인 월요일은 당초 평일이라고 해서 접견이 특별히 주어졌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있는데 주임이 9시에 접견이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보통 때는 예약을 하는데 오늘은 갑자기 통보했다. 접견 담당 교도관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 두 번 꺾은 다음 지하 통로를 거쳐 대기실로 갔다. 가을 햇살이 창살로 내리고 수용자들 모두 다닥다닥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벽 쪽에 앉았다. 볼펜으로 원초적 본능에 따라 그린 성기와 억울함을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낙서들이 가득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러 군데 쓰여 있었다.
9시에 접견실에 들어갔다. 아내는 큰애와 함께 접견실에 들어설 때부터 눈물을 글썽거렸다. 새벽에 집을 나와 아침 일찍 구치소에 왔는데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했다.
“지난밤 잠은 잘 주무셨어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잘 잤어요. 눈물 보이지 말아요.”
“그러려고 하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마음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큰애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참았다. 구속된 그 주일 일요일 밤 목 놓아 울었고, 원심에서 4년 징역을 받던 날 구치소로 돌아와 긴 복도를 걸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되뇌며 눈물이 수의를 적시도록 울었다. 오늘은 가족들 앞이라 울 수가 없었다.
“긴 연휴 얼마나 힘들겠어요. 면회도 운동도 못 하고.”
“닥치면 되겠지요.”
“열흘이나 되는데….”
“….”
나는 말없이 아내를 쳐다보았다. 감옥에서는 대화보다 만남 자체가 소중했다. 아내는 추석 10일 연휴 내내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큰애는 새 정부가 들어서서 혹독하게 밀고 나가는 적폐 청산으로 바깥세상도 감옥같이 살벌하다고 했다. 지난 정부에서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감옥에 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을 와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하게 된 접견이 10분 만에 끝났다. 양쪽을 갈라놓은 유리 창문에 손바닥을 마주하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큰애의 부축을 받고 접견실을 나가는 아내의 모습은 힘이 없었다.
접견실을 나가는 아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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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수색 모습. 일러스트=조선DB 참조 |
나는 접견실을 나와 대기실에 있다가 교도관의 호송을 받으며 지하 통로를 거쳐 긴 복도를 걸었다. 접견을 오가며 긴 복도를 걷는 것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갈 때는 담벼락 멀리 수리산을 보고, 올 때는 창살 너머 관악산을 볼 수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과 그림들을 보는 것도 큰 호사였다. 노란 꽃술에 빨갛게 타오르는 동백꽃 사진을 볼 때는 고교 때 가던 해운대 동백꽃을 생각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산마루 억새밭 사진을 지날 때는 힘들게 공부하던 대학 생활을 회상한다. 죄수들이 남긴 그림들을 지날 때는 그림에도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쇠창살 너머 하얀 뭉게구름이 관악산 능선을 따라 흘렀다. 가을바람도 소슬했다.
나에 대한 수사는 새 정부가 들어서자 시작되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4대강 정비 사업부터 내사 형태로 시작되어 죄를 찾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K은행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통해 D조선의 분식 회계를 문제 삼아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에서 수사를 시작하였다.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검찰총장의 하명 사건을 수사하던 중앙수사부가 반인권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다가 이름을 바꾸어 부활된 특별 수사 조직(그 후 정권이 바뀌면서 3년 만에 다시 폐지되었다)이었다. 그 중앙수사부가 부활된 다음 내가 처음으로 걸려든 고위공무원이라는 것이 불운의 시작이었고,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혹독했다. 그들이 수집한 과장되거나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그린 밑그림에 필요한 조각들을 찾는 수사는 처음부터 나를 덫에 걸려 발버둥 치는 사슴으로 만들었다.
아내와 함께 여름휴가를 마치고 회사(내가 공직에서 물러나 지인들과 함께 설립한 투자펀드회사였는데 이 사건으로 영업이 중단된 후 청산되었다)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비상계단에서 기다리던 건장한 사내 여럿이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중 인상이 사나운 사내가 자기가 검사라면서 압수수색영장을 보여주었다. 그 검사는 내 휴대폰부터 빼앗더니 나를 작은 회의실에 몰아넣었다. 압수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의실 TV에 나에 대한 압수수색 뉴스가 떴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집행하기 전에 언론에 흘린 것 같았고 언론은 첫날부터 거대한 부정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화면에 뜬 내 얼굴과 압수수색 사실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나는 폭탄을 맞아 허물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함께 온 사내들이 내 집무실의 컴퓨터부터 시작하여 서류들을 모두 뒤지며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서류들을 검찰청 로고가 찍힌 상자에 담았다. 나는 압수수색영장을 보았지만 황망한 상황이라 내가 받는 혐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수사관이라 하는 사내가 내가 지난해 유럽 여행에서 사온 기념품 칼을 가지고 오더니 왜 허가 없이 도검을 소지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오스트리아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인데 허가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그 검사가 칼을 돌려주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사무실의 수색과 압수가 점심시간을 훨씬 넘어서 네 시간 만에 끝났다. 그동안 나는 그 인상 사나운 검사와 함께 회의실에 붙들려 있었다. 그들은 여남은 개의 상자에 압수 물품을 담고는 압수 목록에 사인을 받았다. 휴대전화는 내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 사내 검사는 그 주말쯤 검찰에 출두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철수했다.
집에 오니 내가 출근한 직후 검찰 수사관 3명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그들은 금고가 어디 있는지부터 물었다고 했다. 없다고 하자 다른 곳에 숨겨 둔 금괴와 보석이 있을까 하여 온 집안을 수색하였다고 했다. 한참을 찾아도 금괴와 보석이 나오지 않자 은행 대여금고는 없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세 시간을 수색하고는 은행 통장과 나의 수첩 등을 빈 케이크 상자 하나에 넣어 갔다고 했다. 3명의 수사관이 나와서 케이크 상자 하나를 가지고 허겁지겁 가는 모습이 기자 카메라에 잡혀 방송되었다고 했다. 기자까지 동행하여 태산이 울리는 것처럼 왔다가 생쥐 한 마리 잡아가는 코미디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경제 부처 요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금괴와 보석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 같았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실들이 연일 뉴스에
압수수색 다음 날 친구의 소개로 변론을 맡기로 약속한 변호사를 찾아갔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그는 약속과 달리 변론으로 해결될 사건이 아니라면서 선임을 사양했다. 청와대 하명 사건을 수사하는 경우는 범죄의 내용보다 정치적 상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지금 청와대와 관계가 원활하지 않은 자기가 맡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혹시 청와대 고위층과 연결이 되면 그곳과 접촉해 볼 것을 권유하며 다른 변호사를 소개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청와대 특별보좌관과 전화로 접촉해 보았다. 그는 관여하기 어렵다고 했다. 처음 찾아갔던 변호사가 추천하여 선임한, 대검찰청 부장 출신의 다른 변호사도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선임을 해지하자고 했다. 나는 D조선과 관련하여 돈 받은 것도 없고 특별히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변론을 맡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간청에 그는 소송 수행은 다른 변호사가 맡는 조건으로 구속영장 단계까지만 맡기로 타협했다. 변호사도 맡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무언가 거대한 장벽을 느꼈다.
검찰은 D조선의 전현직 두 사장을 이미 구속한 상태에서 계속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실들을 언론에 흘려 나를 부정한 일을 많이 하고 부패한 공직자로 몰고갔다. 압수수색이 있은 다음 날은 ‘D조선 비리 눈감아 주고 개인 이익 챙겨’라는 제목으로 TV 뉴스가 떴고 그다음 날 모든 신문도 같이 보도했다. 이어서 ‘측근을 연봉 1억원의 D조선 고문에 앉혀’라는 뉴스가 떴다. 그리고는 ‘친척에게 부당하게 공사 수주’라는 뉴스도 떴다. 계속해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실이 뉴스에 뜨는 동안 주말에 부른다던 검찰은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부르지 않고 참고인들을 불러 조사하고 혐의들을 언론에 흘리면서 그들이 그린 그림에 따라 혐의를 언론과 함께 사실로 만들어갔다. 구체적으로 무슨 혐의로 어떤 수사가 진행되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언론 보도를 통해서만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억지로 변론을 맡은 변호사는 오히려 나에게 수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었다.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출입 기자는 그들만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카르텔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보도를 통해 안 사실에 대한 증거 자료들을 찾아 정리하며 소환에 대비했다.
검찰은 처음부터 국가 반역자라도 잡는 듯이 내 집과 사무실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비서와 운전기사를 압수수색한 다음 가까운 지인들과 친구들 심지어 고향에 있는 종친까지 광범위하게 압수수색을 하고 불러가 심문을 했다. 압수수색이 있은 지 한 달이 더 지나도 검찰은 나를 소환하지 않았다.
추석이 되어 아내와 함께 강화도 바닷가 펜션에 갔다. 해 질 녘 어지러운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을 때 수평선 멀리 낙조가 붉게 타올랐다. 바다 건너 석모도에 어둠이 내렸다. 아내와 나는 바닷가 횟집에서 조개탕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 날은 교동도에 가서 갯벌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교동도 전통시장에 들어가 시골스러운 작은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아내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도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연휴가 끝나는 날, 변호사가 다음 날 검찰에 출두하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부른다고 했던 날보다 한 달 반이나 지나 불렀다.
알 수 없는 세상에 와서 알 수 없는 일을 당하며
검찰에 출두하는 날 아침에 바쁘게 식사를 마치고 검찰청사로 갔다. 검찰이 변호사를 통해 미리 얘기해 준 대로 현관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차를 내렸다. 수십 명의 기자가 진을 치고 있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다. 나는 삼각형으로 표시된 포토라인에 서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준비한 대로 말했다.
“부끄러운 일 안 하고, 부정한 돈 안 받고, 평생을 나라 위해 일했습니다. 보도된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러고는 압수수색 때 보았던 수사관이라는 사내가 검찰청사로 끌고 들어가더니 수사팀장인 부장검사실로 데려갔다. 커피를 한 잔 주었다. 평소에도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데 그날 커피 맛은 아주 썼다. 부장검사는 야릇한 표정으로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말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녹화 장치가 설치된 특별조사실로 들어갔다.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수사팀의 차장이라는 검사는 애써 정중하게 태도를 가다듬더니, 그들은 합리적인 의심을 기초로 수사를 한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대답해 달라고 했다. 준비한 신문 사항에 따라 3명의 담당 검사가 번갈아가며 물었다. D조선에 대한 경영 감사를 왜 했는지부터 물었다. 나는 K은행은 D조선의 주채권은행으로서 법률상 감사 권한이 없어서 컨설팅 계약에 따라 컨설팅을 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K은행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국회가 국정감사에서 D조선의 방만 경영과 사장의 경영 부정을 지적하며 감사를 요구해서 감사 대신 컨설팅을 하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것을 계속 사실상의 감사가 아니냐고 몰아가며 그들이 마련한 질문 순서에 따라 되풀이하여 물었다. 마주 보고 앉은 검사 옆에서 수사관은 문답 내용을 워드프로세서로 쳤다.
감사냐 컨설팅이냐에 대해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문답을 한 시간 가까이 하다가 이미 구속된 D조선 사장의 경영 비리 문제로 넘어갔다. 검찰은 감사 결과 사장의 비리를 발견하고도 검찰에 고발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채권은행으로서 컨설팅을 한 것이기 때문에 비리에 관해 고발할 권한과 의무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묻는 사항 대부분은 내가 했던 일 중에 사소한 것들이어서 기억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참고인을 불러 그들의 그림에 필요한 진술들을 먼저 받고 그것을 토대로 만든 질문을 되풀이하여 물었다. 나에게 반복하여 물어서 얻은 사실 중 필요한 것을 엮어 그들에게 필요한 그림을 그려갔다. D조선이 우뭇가사리로 휘발유를 뽑는 벤처기업에 강압적으로 투자하게 한 혐의에 관해 물었다. 과거 내가 일했던 부처의 출입 기자였던 벤처기업인을 D조선 사장에게 소개한 것도 아물거리는데 그 벤처기업에 50억원을 투자하도록 강압했다는 말은 더구나 알 수 없었다. 참고인들의 진술은 그들도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겁박과 회유에 따른 유도 질문에 따라 대답한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참고인들의 진술과 다른 나의 대답에 대해서는 검사가 생각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물었다.
세 시간 정도 조사를 하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한 시간 쉬기로 하고 설렁탕을 시켜 먹었다. 식사 후 30여 분의 여유가 있어 수사관을 따라 옥상에 올라갔다.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멀리 보였고 남쪽으로는 관악산이 보였다. 알 수 없는 세상에 와서 알 수 없는 일을 당하며 먼 산을 바라보니 세상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오후에는 경영 비리가 문제 되었던 사장의 후임으로 새로 선임된 K 사장으로 하여금 국회의원 총선거 때 여야 의원 7명에게 각각 200만원 전후의 후원금을 주게 한 것을 물었다. 검찰은 후원금을 전달한 D조선 임원의 진술을 근거로 강압적으로 선거 후원금을 주도록 한 것으로 몰고가는 신문을 시작했다. 검찰은 신문을 시작할 때부터 계속 같은 방법으로 기억에 없는 것들은 참고인의 진술로 채워나갔고, 애매한 것들은 그들 의도대로 신문과 답변을 반복하여 그림을 채웠고, 부인하는 내용은 그들이 필요한 진술이 나올 때까지 계속 물었다. 참고인의 진술을 부인하기 위해서는 내가 증거를 대야 했는데 아닌 것을 아니라는 말 이외에 아닌 증거를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세상을 산다. 그저 사는 일상이 쌓여 삶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사는 일상들을 많은 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상 중에서 특별한 일, 즉 특별한 사건이거나 행사이거나 아니면 범죄처럼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경우 이외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검사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들의 의도된 구도에 따라 계속 반복적으로 신문하고 필요한 진술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평생 살아오면서 이런 인간은 처음 보았다. 어디 할 짓이 없어 남을 옭아매기 위해 허구한 날 사람을 함정으로 몰고가는 것을 일로 삼는지. 한심하고 가련한 생각도 들었다.
검사의 신문에 해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새로운 신문이 늘어나고 혐의도 늘어났다. 계속 반복되는 검찰의 신문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참고인들의 진술과 나의 진술이 섞여서 새로운 그림이 되어갔고 나 자신도 아니라는 주장 이외에 명백한 물증이 또한 없었다. 처음에는 아니었던 것이 나중에는 비슷한 것같이 되었고, 어떤 것은 생각 없이 한 말이 빌미가 되어 올가미에 걸리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직업적으로 쳐놓은 덫은 견고했다.
저녁도 설렁탕으로 시켜 먹고 밤 11시 넘도록 14시간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영혼과 육신 모두 탈진되고 나중에는 사실과 진술과 주장이 뒤섞여 나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혼동이 왔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온 젊은 변호사가 배석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검찰 수사는 근본적으로 피의자에게 불리한 구조였다.
“사실대로 부는 것이 서로가 고생을 덜 하는 것”
마지막으로 나에게 경제 부처의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땅 한 평, 주식 한 장 없이, 아파트 한 채에 눌러산다는 것을 국민 누가 믿겠느냐고 물었다. 숨기거나 차명으로 보유한 재산을 사실대로 부는 것이 서로가 고생을 덜 하는 것이라고 했다. D조선의 사장 둘을 이미 구속한 상태에서 결국은 나도 구속될 것인데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사건이 있어서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나를 불렀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피해자의 고발에 따라 정해진 피의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피의 사실을 찾아내 나를 감옥에 보내려는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렇게 14시간에 걸친 조사로 만들어진 진술 조서를 자정인 12시가 되기 직전에 읽어보라고 했다. 고쳐달라고 하는 곳 일부는 고쳐주었지만, 기본적인 그림에 손을 대는 것에는 그들의 태도가 완고하였다. 일부 내용이 내가 말한 뜻과 달라 손도장을 찍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도 자정을 넘었고 영혼과 육신이 모두 탈진한 데다가 달리 버틸 대안도 없어 새벽 1시가 지나고는 손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다. 명백하게 돈을 받은 것이 있었거나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것인데 오히려 명백한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
새벽 3시경에 검찰청을 나오는데 그때까지 기자들 몇 명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플래시를 터뜨리며 물었다. 혐의 사실을 인정했느냐고. 나는 아니라고 짧게 말하고는 큰애가 준비한 차에 올랐다. 집에 오니 새벽 3시가 훌쩍 넘었다.
맥주에 소주를 탄 소맥을 한잔하고 잠에 떨어졌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