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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정치학자 최명 교수가 쓴 종횡무진 《칼 이야기》

칼을 둘러싼 동서고금 이야기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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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리처드 버튼 경)
⊙ 중세의 칼은 길고, 양날이고, 직선형… 갑옷이나 쇠미늘 갑옷 자르는 것이 목적
⊙ 시간이 흘러 ‘가느다란 양날의 찌르는 검’으로 진화
⊙ 대포와 장총 등장 후에도 칼은 여전히 보병·기병의 중요한 무기
⊙ 이순신이 사랑한 두 자루의 칼에 적힌 검명(劍銘)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一揮掃蕩 血染山河”

崔明
1940년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 / 서울대 신문대학원 조교수(1972~1975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1975~2006년)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1594년 4월 제작된 충무공 장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칼이다. 1969~1970년경 붉은 페인트로 덧칠한 것을 문화재청이 제거한 후 2015년 첫 공개했다. 사진=조선DB
  
최명 교수가 펴낸 신간 《칼 이야기》.
  최명(崔明) 서울대 명예교수(정치학과)가 칼을 주제로 책을 펴냈다. 《칼 이야기》(조선뉴스프레스 刊)에는 동서양에 흩어진 칼 이야기가 종횡무진 펼쳐진다.
 
  칼을 둘러싼 방대한 이야기가 최명 식(式)으로 묶으니 흥미진진한 명작이 되었다. 《삼국지》 박사답게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에 등장하는 칼 이야기도 무릎을 치며 읽게 한다.
 
  리처드 버튼 경(1821~1890년)은 “칼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The history of the sword is the history of humanity)”라고 했다. 석기시대 사람들도 칼을 썼다. 돌칼이다. 부싯돌을 연장이나 무기로 쓰기 시작한 것은 수천 년 전부터일 것이다. 최명 교수는 “주석과 구리를 녹이는 방법과 청동(靑銅)의 주조 방법을 알게 되면서 도끼, 단검, 화살촉, 창, 칼 등이 유럽 전역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검(劍)이라 할지 혹은 그냥 칼이라고 불러도 되는 swords는 귀하고 비쌌다. 소아시아의 루리스탄(Luristan)에서 만들어진 청동 칼이 요즘도 골동품 시장에서 거래될 정도다.
 
 
  칼은 ‘무기의 여왕’
 
중세 기사의 칼들. 왼쪽 아래 그림은 15세기 양손검을 들고 싸우는 독일 병사들의 모습.
  “청동기시대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칼이 나타났을 적부터 칼은 ‘무기의 여왕(queen of weapons)’이었다”는 것이 최 교수의 지론이다.
 
  기원후 1세기경부터 철(鐵)이 청동을 대신하여 무기의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철은 강한 대신 녹이 슬기도 하고, 부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약 1세기부터 15세기까지 만들어진 철검은 귀하고, 비쌀 수밖에 없다.
 
  최 교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중세의 칼은 길고, 양날이고, 직선형이다. 가죽으로 된 손잡이에는 단순한 십자형의 보호대가 있다. 이런 칼들은 보통 갑옷이나 쇠미늘 갑옷[찰갑(札甲)·작은 쇠고리를 엮어 만든 갑옷]을 쳐서 자르는 것이 목적이고, 양손으로 잡게 손잡이가 긴 것도 있다.
 
  16세기에는 공격 방식이 베는 것에서 찌르는 것으로 변했다. 갑옷이 점차 단단해졌기 때문에 칼도 이젠 단단한 갑옷을 뚫을 수 있게 변한 것이다. 중세가 지나면서 칼은 점차 길어졌고 칼끝도 날카로워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가느다란 양날의 찌르는 검’을 개발했다. 영어로는 레이피어(rapier)라고 한다. 처음에 레이피어는 길었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길어서 제대로 쓰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또 보호 목적이긴 하나, 손은 바구니같이 생긴 금속 보호대에 지나치게 갇혀 부자유스러웠다. 검술(sword play) 혹은 펜싱 등이 발전하면서 레이피어의 쓸모는 점점 없어졌고, 그사이 디자인도 변해 점점 짧아지고 가벼워졌다.
 
  18세기 장교들의 칼은 보통 작은 칼(small sword)의 변형이다. 양면 고리(rings) 혹은 딱딱한 외피(外皮)의 손가락 관절 보호테와 작은 코등이(quillon·칼을 휘두르는 사람의 손등을 보호하기 위해 칼 손잡이 위쪽에 달아놓는 장치)가 있는 길고 좁은 직선의 칼이었다.
 
 
  칼이 총을 만났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 군인들이 쓰던 칼들. 사진=《Swords: A Visual History》(2010)
  흑색화약(black powder)이 처음 등장하고, 전장에서 대포와 장총이 쓰이기 시작한 뒤로도 칼은 여전히 보병과 기병의 중요한 무기였다. 17세기 후반부터 군대는 점점 구식 보병총(muskets)으로 무장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장편소설 《삼총사(The Three Musketeers)》는 제목부터 이 보병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총은 한 번 발사하고는 다시 장전을 해야 했다. 장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군사들은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어떤 방법이든지 방어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총검이다.
 
  처음에 총검은 단순히 큰 칼이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유럽과 미국의 거의 모든 군인들은 소켓 총검(socket bayonet)을 사용했다. 어떤 것은 장착과 분리가 쉽도록 용수철 클립을 달기도 했다. 17세기 후반에 고안된 소켓 총검에는 삼각형으로 갈라진 직선의 칼날(triangular section blade)이 있고, 짧은 실린더(short cylinder)에 이르는 휘어진 목덜미(curved neck)가 부착되어 있었다. 여기엔 화승식(火繩式) 방아쇠 장치가 있는 구식 보병총의 총신(銃身)이 미끄러지지 않고 또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손잡이(stud)를 달았다. 유럽과 북미 군검(軍劍)의 스타일과 제조 방식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표준화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 금속 탄약통과 다발화기(multi-shot firearms)가 발전하면서 날이 있는 무기의 쓰임새가 줄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미증유의 흉포한 포병의 탄막 사격(barrages)과 기관총의 무자비한 대량 발사가 표준이 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조차 칼은 기병의 전형적인 무기였고, 그러한 현상은 적어도 대전 초기에는 보병 장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최 교수의 말이다.
 
  “제2차 대전 중인 1942년에도 영국의 기마농민의용연대(British Yeomanry Regiments)의 일부 병사들은 말 대신 탱크 위에서도 1908년 패턴의 기병 칼(Troopers’ Swords of 1908 Pattern)을 놓기 위한 선반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이 사랑한 두 자루의 칼
 
  칼이나 단검은 유럽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프리카, 인도, 극동에서도 많이 제조되었다.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양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 대부분은 베기보다는 찌르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아프리카 수단(Sudan)의 전통 검 카스카라(Kaskara)는 직선의 양날칼로 아주 단순하다. 십자군의 칼도 여러 종류가 있었겠지만 십자군 당시의 기독교 무사들이 쓰던 칼과 유사하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또 하나의 날 달린 무기, 던지거나 찌르는 창(槍) 문화가 발달했다. 창들은 크기도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남아프리카 줄루족(Zulus)의 가느다란 투창(assegai)이 있다. 또 소말리아(Somalia)의 창도 유명하다. 이것에는 아주 넓은 칼날이 달려 있다. 던지기보다는 찌르는 용도의 무기다.
 
  우리나라는 고려 이전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조는 특히 중기에 들어서서 문약(文弱)한 나라였다. 무기를 등한시했다. 북방의 거란(契丹)과 여진(女眞)과 싸울 적에 어떤 무기를 썼는지 궁금하다.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처음엔 북방에서 싸웠다. 그때의 무기가 적의 그것을 압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순신은 뛰어난 무장(武將)이다. 활과 칼 같은 무기를 귀히 여겼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칼이 두 자루 있었다. 두 칼에는 검명(劍銘)이 있다. 하나는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안다)’, 다른 하나는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한번 휘둘러 소탕하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이다. 최명 교수는 “오래전 아산(牙山) 현충사(顯忠祠)에서 이순신의 칼로 전시된 두 자루의 검을 보았다. 그것이 위의 그 칼인지는 알 수 없다. 한산섬의 이순신 사당에서도 칼을 본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일본 사무라이의 칼
 
일본 사무라이들이 쓰던 칼들.
  일본 무사도(武士道)의 전통은 칼을 최고의 무기로 쳤다. “칼은 사무라이의 영혼”이라는 유명한 금언(金言)이 있을 정도다. 일본 칼은 가장 뛰어난 동양의 무기 가운데 하나다. 일본도의 발달은 사무라이(侍)라는 봉건시대 무사 계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기의 일본 칼은 중국 칼의 모양을 따라 날이 직선이었다. 말 탄 사수(射手)의 무기였다고 한다. 9세기경에 호키노쿠니 야쓰스나(伯耆國安綱)라는 장인(匠人)이 신(神)의 영감(靈感)을 얻어 약간 휜, 한쪽 날의 칼을 만들었다. 이것이 근세까지 근 1000년 이어진 일본 칼의 효시(嚆矢)라고 전한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1392~ 1573년) 시절부터 사무라이의 주요 무기는 칼이었다. 이 무사 계급에는 강력한 다이묘(大名·dukes)와 그 가신(家臣), 독립 영주와 가난한 무사들이 속한다. 사무라이의 이념과 행동을 지배한 무사도는 선불교(禪佛敎)와 유교(儒敎)의 영향을 받은 정신적 믿음이다. 역대 쇼군(將軍)이 이를 장려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무라이 계급은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겪으면서 등장하고 성장했다. 특히 오닌(應仁)의 난(1467~77년·쇼군 후계를 두고 일어난 싸움) 당시 많은 사무라이와 추종자들이 사망했다. 죽은 추종자들은 농민 사수(農民射手)로 대치되었다. 그때부터 사무라이들은 활을 버리고 전적으로 칼에 의존하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에서 활동한 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co Javier)는 1550년경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무기(arms)를 아주 높이 존중했고, 무기에 의존했다. 지위에 관계없이 14세가 되면서부터 칼과 단검을 지녔다.”
 
  16세기 말에 쇠를 벼려서 만든 칼은 ‘고토(古刀)’라 불린다. 이것은 1.8m나 되는 ‘노다치(野大刀)’란 긴 칼인데, 칼등에 가죽이 달렸다. 1600년경부터 제조된 칼은 ‘신토(新刀)’라고 불린다. 자루는 몰라도 칼날은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엔 ‘가타나(刀)’란 것이 있는데, 칼날의 길이는 53~76cm 정도다. 칼날 길이 30~60cm 정도의 ‘와키자시(脇差)’, 갑옷을 찌르는 용도의 단검인 ‘요로이토시(鎧通し)’ 등도 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1603~1868년) 시대가 열리면서 사무라이 계급에 한해 두 자루의 칼을 차는 것이 허용됐다. 이른바 이도류(二刀流)의 등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일본제국의 육·해군 장교들은 전투에 임할 때 예외 없이 칼을 찼다.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함이다. 최 교수의 말이다.
 
  “오키나와 전투의 미군 사령관 보고에 의하면, 그의 운송 차량에 다섯 명의 칼을 든 일본 장교가 대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과달카날(Guadalcanal) 해변에서도 뉴질랜드 코르벳함(corvette)의 선원들이 바다 위로 부상한 일본 잠수함에 올라가 칼을 든 일본 해병과 싸웠다는 기록도 있어요.”
 
 
  언월도, 장팔사모, 쌍고검…
 
관우의 청룡언월도.
  당연히 동양 고전들에도 칼이 주인공이나 조연, 못해도 엑스트라로 감초처럼 등장한다.
 
  관우(關羽)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장비(張飛)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다. 청룡언월도는 이름 그대로 반달(언월)처럼 휘어진 칼이다. 무게가 81근이라고 하는데, 명나라 기준으로는 약 49kg, 현재 기준으로 19kg다. 장팔사모도 이름의 뱀 사(蛇)자 그대로 구불구불하고 창끝이 입을 벌린 것처럼 갈라진 긴 창이다. 그럼 유비(劉備)의 칼은?
 
장비의 장팔사모.
  쌍고검(雙股劍)이다. 쌍고검과 청룡언월도, 장팔사모 모두 유비가 장인(匠人)에 명해 만들게 한 것이다. 쌍고검은 ‘자웅일대검(雌雄一對劍)’이라고도 하여, 한쪽 면이 납작한 두 자루의 검이 한 칼집에 포개져 들어가는 쌍검(雙劍)이다. 유비는 관우나 장비처럼 무인이 아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적과 싸운 적이 몇 번 없다. 최 교수는 “유비의 칼과 그의 칼싸움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말한다.
 
  조조(曹操)에게도 두 자루의 보검이 있었다. 하나는 의천검(倚天劍), 다른 하나는 청강검(靑釭劍)이다. 청강검은 날카로움이 비길 데가 없어서 쇠를 베기가 진흙을 이기는 것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식칼 이야기
 
  《수호전》에 흔히 나오는 보통 칼은 요도(腰刀)와 박도(朴刀)다. 요도는 이름처럼 허리에 차는 칼로 강철 날이 조금 휘어졌고 날 길이 석 자 두 치, 자루는 세 치이며 주로 육박전에 썼다. 박도는 중국의 보병들이 사용한 무기의 하나로 여러 무술 분야에서 사용된다. 보통 칼에 비해 손잡이가 길어 양손으로 잡고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쌍수대(雙手帶)라고도 불렸다. 전체적으로 더 기다란 형태(약 4~6피트)로 발전해 장권(長卷·나가마키)과 유사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최명 교수가 들려주는 칼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삼국연의》와 《수호전》에 등장하는 식칼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여포(呂布)에게 쫓긴 유비가 손건(孫乾)과 함께 도망가다 날이 저물어 한 촌가(村家)를 찾아든다. 젊은 주인인 엽호(獵戶) 유안(劉安)은 평소 우러러보던 유비를 보자 없는 살림이나마 정성껏 대접하고 싶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아내를 죽여 삶아 내어놓았다. 유비가 젓가락으로 한 덩어리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고긴가?”
 
  “이리 고기입니다.” 유안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이튿날 아침, 유비는 주인에게 하룻밤 신세를 사례하고, 말을 끌어내려고 뒷마당으로 가다가 부엌 뒤에서 한 젊은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두 젖통을 몽땅 베어내어 갈빗대가 드러난 무참한 시체였다. 최명 교수의 말이다.
 

  “유비는 한동안 유안의 손을 잡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고 유안 역시 울면서 ‘소인이 사또님 뫼시고 가고는 싶사오나, 다만 늙은 어미가 있어서 멀리 못 간다’고 했어요. 어미는 봉양해야 하고 아내는 죽여도 괜찮다니 ‘천하의 죽일 놈’인데, 소설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합니다.”
 
  유안이 아내를 베었을 적에 사용한 칼, 그리고 조조가 도피중에 여백사(呂伯奢)의 집에서 돼지 잡으려고 칼 가는 소리를 오인해 일가를 몰살했을 때 하인들이 갈던 칼, 모두 식칼이었으리라고 최 교수는 추정한다.
 
 
  입속의 칼, 舌劍과 舌刀
 
  최명 교수는 법학에 이어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에게 법과 정치와 칼이란 어떤 관계일까 속으로 궁금해 하던 중 어느덧 이야기는 ‘입속의 칼’ 설검과 설도에까지 미쳤다.
 
  설검(舌劍)은 돌이나 금속으로 된 게 아니라, 사람 누구나 입안에 갖고있다. ‘입안의 칼’이라 하여 설검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거꾸로 혀를 잘못 놀려 목숨을 잃기도 한다. 조조는 예형(禰衡)이라는 입만 살아 있는 독설가 선비를 계략으로 성미 급한 장수에게 보내게 하고, 과연 그가 장수의 칼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부른다.
 
  “부유(腐儒·썩은 선비)의 설검이 도리어 제 몸을 죽이고 말았구나.”
 
  설검의 화(禍)를 경계하는 유명한 일화가 플루타르크(Plutarch)의 《영웅전》에 나온다. 기원전 500년경 스파르타의 왕 데마라투스(Demaratus) 이야기다. 어떤 자리에서 그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누가 물었다. “당신은 할 말이 아무것도 없는 거요, 아니면 바보요?”
 
  그러자 데마라투스는 이렇게 되받았다. “바보는 입을 다물 줄 모른다오(A fool cannot hold his tongue).”
 
  설검과 조금 다른 뉘앙스로 ‘설도(舌刀)’란 말이 있다. ‘날카로운 말’이란 뜻이다. 남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최 교수의 말이다.
 
  “‘무딘 칼날의 명검’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도 무딘 것이 날카로운 것보다 낫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무딘 말’조차 침묵만 못한 것 아닐까요? ‘침묵은 금(金)이요, 웅변은 은(銀)(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이란 말도 있지요.”
 
  날카로운 말이 물리적인 무기보다도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허(虛)를 찔린 기분이다. 아니, 차라리 혀[舌]를 찔린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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