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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르포

《진달래꽃》 100년, 소월의 空間을 찾아서

허물어져 가는 소월의 하숙집… 지금은 한복 스튜디오로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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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건동 121번지… 《진달래꽃》 판권에 적힌 매문사 주소는 김억·소월 주소와 동일
⊙ 사간동 97-9번지… 지역 주민들, 배재고 시절 소월이 하숙했다고 증언해
⊙ 소월의 시 ‘왕십리’ 근거로 왕십리역 앞 성동광장에 詩碑 세워져
⊙ 日 간토 대지진 직후 귀국해 청진동에 거주 추정… 소월 스승 김억도 청진동 여관에서 살아
  한국 시의 첫사랑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년)의 시집 《진달래꽃》이 올해로 출간 100주년을 맞았다.
 
  시집 《진달래꽃》은 1925년 12월 26일 소월의 스승 안서(岸曙) 김억(金億·1896~?)의 주선으로 소월이 그동안 써두었던 시 126편을 모아 펴낸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다. 출판사는 김억이 경영하던 매문사(賣文社).
 
  전체 234쪽이며 규격은 12.5×10cm. 책값은 1원20전. 초간본 표제(標題)는 ‘진달래꽃’이 아니라 ‘진달내꽃’이었다.
 

  당시 1원20전은 어느 정도의 가격일까?
 
  1925년에 발표된 한국 현대소설의 선구자 김동인(金東仁·1900~1951년)의 단편 〈감자〉에서 소나무 송충이를 집게로 집어 약물에 집어넣는 비숙련 하루치 노동의 대가가 32전이었다. 송충이를 잡기 위해선 사다리를 타고 소나무에 올라가야 했을 정도로 노동 강도가 셌다. 이 액수가 전체 비숙련 노동의 하루 임금을 의미하진 않겠지만, 시집 가격으로 1원20전은 당시 물가를 고려해 보았을 때 절대 싼 값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경성(京城) 연건동 121번지와 소월
 
《진달래꽃》 초판본의 모습. 10년 전 경매에서 1억 35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사진=조선DB
  소설가 계용묵(桂鎔默·1904~ 1961년)이 1955년 10월호부터 12월호까지 3회에 걸쳐 《현대문학》에 연재한 〈한국문단 측면사〉에 김소월이 시집 《진달래꽃》을 출간하게 된 동기가 나온다.
 
  〈이 무렵에 안서는 4·6배판 8면의 시(詩)잡지 《가면》을 내었습니다. 여기 유력한 필자 한 사람은 물론 소월(素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월의 발표 무대는 좀 더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면》은 자금난(資金難)으로 폐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소월은 자기의 발표작·미발표작 합하여 우금껏 써온 시고 전부를 안서에게 내맡기어, 판권을 선생에게 양도할 것이니 시집을 출판하여 《가면》을 살리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은 스승 안서의 손으로 《가면》사에서 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월은 계용묵보다 두 살이 많고 고향이 평안북도로 동향이다. 문학평론가 구자룡(具滋龍)씨는 “소월이 죽은 후 계용묵은 1948년 김억과 같이 출판사 수선사(修繕社)를 경영하기도 했다”며 “계용묵과 소월이 교류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억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닌가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은 ‘가면사’가 아니라 ‘매문사’ 이름으로 1925년에 출간되었다. 명칭은 다르지만 가면사나 매문사 모두 김억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5년 12월 18일 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실린 시잡지 《가면》의 광고. 주소가 경성 연건동 121번지로 적혀 있다.
  소월의 《진달래꽃》이 출간되기 일주일 전인 1925년 12월 18일 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시잡지 《가면》의 광고가 실려 있다. 《가면》 발행처는 매문사, 주소는 ‘경성 연건동 121’이라고 적혀 있다. 도로명 주소는 종로구 대학로5길 13.
 
  그렇다면 소월이 자비로 시집을 출판했다는 지금까지 일부 학자가 주장해 온 내용은 허구라는 의미다. 구자룡 선생의 말이다.
 
  “계용묵은 분명히 소월이 김억에게 자신의 시 원고를 맡기면서 시집을 출판해 ‘가면사’를 살리라고 했다고 증언하고 있어요. 소월 연구가들이 〈한국문단측면사〉를 제대로 읽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소월의 《진달래꽃》은 매문사에서 펴냈다. 서울 연건동 121번지에는 현재 3층 다가구주택이 들어섰다. 사진 속 인물은 구자룡 선생이다.
  초간본 《진달래꽃》의 판권지에 나오는 ‘매문사’ 주소는 연건동 121번지다. 기자는 구자룡 선생과 버스에서 함께 내려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주변을 헤매며 연건동 121번지를 찾았다. 흥미롭게도 3층 높이의 다가구주택이었는데 이런 초록색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시인 김소월의 옛집
 
  여기는 출판사 매문사의 옛터이다. 시인 김소월이 1925년 경성부 연건동 121번지 매문사에 적을 두고 시집 《진달내꽃》을 펴냈으며 문필 활동을 했던 명작의 산실이다. 현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그는 본명이 김정식으로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같은 명시를 남겼다. 소월의 시를 아끼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종로문인들의 뜻을 모아 이 표지를 붙인다.
 
  2018년 3월 16일 (사)한국문인협회 종로지부〉

 
  표지석에는 ‘소월이 매문사에 적을 두고 시집을 펴냈다’고 적혀 있다. 《진달래꽃》 판권지에도 저자 겸 발행인 김정식의 주소가 ‘연건동 121번지’로 적혀 있다. 매문사에 적을 두고 소월이 살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구자룡 선생은 “매문사는 단지 출판사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닐 수 있다. 소월뿐 아니라 당시 문인들의 임시 숙소 역할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리하자면 매문사의 주소, 김억의 주소, 김소월의 주소, 《가면》과 《진달래꽃》 본거지가 모두 동일한 주소인 연건동 121번지였다.
 
 
  사간동 97–9번지와 소월
 
김소월이 배재고보에 재학 중에 하숙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사간동 97–7번지 한옥. 지금은 한복 스튜디오로 이용 중이었다.
  계용묵의 〈한국문단측면사〉를 보면 소월이 배재고보를 다닐 때 잠시나마 서울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월은 1917년 오산중학에 입학해 스승이던 김억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고 3년 뒤인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듬해 21년 배재고보에서 학업을 이었는데 그 이유는 1919년 3·1운동으로 오산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월은 ‘서울 간동’에서 하숙하며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다음은 계용묵의 〈한국문단측면사〉에 서술된 내용이다.
 
  〈당시 소월은 배재고보의 학생으로 간동(諫洞) 모 하숙에서 고학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런 가난한 생활이 문학하는 그로 하여금 중학 졸업과 같이 상과(商科)를 택하게 만들었던 것이니, 동경상대에 입학을 하게 되기까지의 그의 뇌리에는 복잡한 생각이 기막히게 그를 울렸던 것입니다.〉
 
  ‘간동’은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 건너편 동북쪽 건춘문(建春門) 앞을 말한다. 조선 시대 사간원이 있던 마을로 1936년 이전 일제 시대 때 이름이다. 현재 이곳은 종로구 사간동(司諫洞)으로 불린다.
 
  〈한국문단측면사〉에 따르면 소월이 1년 남짓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배재고보에 다닐 때 사간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소월 학적부에는 본적 기록은 있어도 사간동 집 주소는 없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 하숙집에 잠시 머물렀기 때문인 듯하다.
 
  기자는 구자룡 선생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사간동 일대를 탐문해 지역 주민과 노인들의 기억과 증언을 토대로 알아봤는데 소월이 ‘사간동 97–7번지’에서 하숙했다는 사실이었다. 즉 “객관적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복수의 증언자를 통해 소월의 하숙집을 ‘사간동 97–7번지’로 특정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도로명 주소는 종로구 율곡로1길 36.
 

  기자는 사간동 97–7번지를 찾아갔다. ‘ㄷ’자 한옥으로 여러 채 방이 마루와 연결돼 있었으며, 한쪽 벽이 휑한 것으로 보아 원래는 ‘ㅁ’자 집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 집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옥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하는 한복 스튜디오로 변해 있었다. 그곳을 스튜디오로 임차했다는 30대 여성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 이 집이 김소월의 옛 하숙집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집주인에게 들었고, 더러 소월이 살았던 곳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분들이 찾아와 저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당황스러웠지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줄 순 없었어요.”
 
  ― 집주인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집주인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했어요. 통화해도 지금의 답변 이상의 이야기를 듣긴 힘들 겁니다.”
 
소월이 하숙한 사간동 97-7번지 낡은 한옥은 빗물이 새는 탓인지 지붕 위에 두꺼운 비닐이 덮여 있다.
  김소월이 배재고보 시절에 하숙했다는 이 목조 한옥은 낡았지만 비교적 고풍스럽고 아담했다.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집의 토지 면적은 126.5㎡. 1976년 3월부터 윤모씨가 소유하고 있는데 시중은행에 2억4000여만원가량의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었다.
 
  한옥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빗물이 새는 탓인지 지붕 위에는 두꺼운 비닐이 덮여 있었고, 바람에 기와가 날아가지 않도록 여러 개의 돌이 지붕 위에 얹혀 있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치면 집이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구자룡 선생의 말이다.
 
  “이 집은 조선 말기 대표적인 서민주택으로 보입니다. 전형적인 ‘ㄷ’자 집에 사랑채를 ‘ㅁ’자로 앉힌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아요. 한옥의 한쪽이 터인 것으로 봐 허물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소월이 한때 살던 하숙집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보존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왕십리(往十里)와 소월
 
소월의 시 ‘왕십리’ 시비와 흉상이 서울 성동구 행당동 왕십리역 앞에 세워져 있다. 사진=성동문화재단
  2013년 10월 20일 서울 성동구청이 발행한 《성동 나들이》를 보면 소월이 성동구에서 살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유는 시 ‘왕십리’ 때문이다. 구 선생은 “시 ‘왕십리’가 1923년 8월 잡지 《신천지》에 발표되었는데 소월이 배재고보에 다녔던 시기다. 성동구청은 이런 이유에서 학창 시절 왕십리에서 살았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시 ‘왕십리’는 4연으로 된 시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 날엔
  온다고 허고
  초하루 삭망(朔望)하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소월의 시 ‘왕십리’ 전문

 
  현재 왕십리는 행정구역상 서울 성동구 행당동 관할 동네 이름이다. 김소월이 성동구 왕십리 어디에서 살며 통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럼에도 성동구청은 1997년 일찍이 소월의 시 ‘왕십리’ 시비와 흉상을 서울지하철 왕십리역 앞에 세웠고, 2012년부터는 몇 차례 〈김소월 문학콘서트〉도 개최했다. 성동문화원에서는 ‘소월 백일장’도 개최하고 성동구민회관 이름 또한 ‘소월아트홀’로 변경한 지 오래다. 구 선생의 말이다.
 
  “일부 문학평론가에 의하면 김소월의 시 ‘왕십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먼 곳을 가리키는 상징성이 더 크다고 하는데 어찌하리오…. 대한민국에 왕십리를 주소지로 가진 곳은 성동구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기자는 언론인 출신 김경은(金經恩) 여행작가에게 왕십리 지명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았다.
 
  조선 시대 때 왕십리는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쪽 기착점이었다. 성저십리는 옛 한양 도성의 4대문 안을 말하는데, 조선의 심장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양성 4대문을 기점으로 약 10리에 달한다. 이 반경 내에서는 묘지도 쓸 수 없었고 나무뿌리도 캘 수 없었다. 현대식 그린벨트와 다름없었다. 성저십리는 현재의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북구, 서대문구 전 지역과 영등포구, 성동구, 은평구, 도봉구, 마포구 일부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이 지역 백성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나갔을까. 김경은 작가는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왕십리 일대는 특히 미나리꽝이 많았다”며 “일제 강점기에 한양에 편입되면서 성장을 거듭했지만, 백성의 삶은 조선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백성의 삶이 김소월의 시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라며 “왕십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꽤 많은데, 대표적인 작품이 김소월의 시”라고 강조했다.
 
 
  청진동과 소월
 
채만식 소설가
  1986년 10월 범우사에서 초판 2쇄를 발행한 문고판 《김소월 시집》에는 소월이 서울 청진동에서 살았다는 내용이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1923년 배재고보 졸업, 고향에 돌아와 아동 교육에 종사, 도일하여 도쿄상대에 입학(낙제했다는 설도 있음), 9월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이후 4개월간 서울 청진동에서 유숙, 나도향과 사귐, ‘임의 노래’ ‘옛이야기’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산’ 등을 《개벽》에 발표.〉
 
  배경이 되는 사료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월이 청진동에서 살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05년 8월 범우사에서 펴낸 《진달래꽃》(고려대 최동호 명예교수가 책임 편집)에서는 청진동이 빠지고 ‘나도향과 어울려 서울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청진동’이 빠지고 넓은 의미의 ‘서울 생활’로 바뀐 셈이다.
 
  2014년 4월 남기혁이 엮은 《근대에 맞선 경계인 김소월》에는 “(소월이) 귀국 후 4개월간 서울에 머물면서 안서, 나도향과 교류하면서 문단 활동을 도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자룡 선생은 “이 3가지 연보를 종합해 보면 소월이 일본에서 귀국 후 소설가 나도향과 함께 어울리며 적어도 4개월간 서울, 그것도 종로구 청진동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청진동에서 실제 살았는지, 그 주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청진동은 과거 술지게미, 비지찌개를 파는 선술집이 많아 서민의 애환이 깃든 공간이다. 해장국 거리, 피맛골로 유명했다. 조선 시대 육조거리(세종로 앞길)와 운종가(종로)가 T자로 교차해 일찍부터 상권이 발달한 곳이었는데 1920년대에는 색주가(色酒家)로 점점 변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은 도심 재개발로 흔적이 사라졌지만, 청진동은 6·25 전란을 겪은 뒤인 1950~70년대에도 가난한 예술가와 문인들이 모여 뒤풀이를 하던 장소였다.
 
  소설가 김동인이 1948년 3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잡지 《신천지》에 연재한 〈문단 30년의 자취〉에 소월이 청진동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가 나온다.
 
  동인이 자신의 ‘처소(태평여관)’로 돌아가는 길에 ‘청진동 안서의 여관에 들렀다’는 문장이 있다. 소월의 스승인 안서 김억이 청진동의 한 여관에서 지냈다는 말이다. 소월이 간토(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해 잠시 서울에 머물렀다면 안서가 지내던 청진동에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시인 최하림(崔夏林)이 쓴 〈문단 이면사〉(《경향신문》 1983년 9월 17일 자 7면)에는 ‘분홍빛 와이셔츠에다 새까만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던’ 김억이 사치를 부려 ‘매해 500섬을 추수하던 막대한 토지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런 문장도 있다.
 
  〈염상섭이 그(김억–편집자 주)를 모델로 하여 소설을 썼다고 해서 물의를 빚었던 〈밥과 질투〉에 나오듯이 푹신한 베드에서 유숙하던 그가 청진동 골목의 조그마한 여숙으로 자리를 옮긴 얼마 뒤였다.〉
 
  청진동은 여러 문인이 살았던 곳이다.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2 ~1950년)의 처가가 금강산 온정리에서 살다가 청진동 289번지로 옮겨와 하숙을 하기도 했다. (참조 《월간조선》 2023년 7월호 〈최초 심층 인터뷰, 채만식 작가의 고명딸 정현 스님〉) 채만식은 그 하숙집 근처에 살다가 김씨영(金氏榮)과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이본(異本) 600여 종과 《진달래꽃》의 공간
 
  김소월 시집은 훗날 ‘진달래꽃’뿐만이 아니라 ‘못 잊어’ ‘초혼’ ‘금잔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 후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엄마야 누나야’ ‘소월 시선’ 등 다양한 제목으로 재출간됐는데 그 수만 해도 600여 종에 달한다.
 
  또한 영어, 프랑스어, 일어, 중국어, 베트남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그 시의 향기가 전 세계를 가로질러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모든 흐름의 뿌리에는 한국인의 첫사랑, 1925년에 세상에 나온 《진달래꽃》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속에는 젊은 소월이 거쳐갔던 사간동, 연건동, 청진동, 왕십리의 공간들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3월에 산천을 분홍빛으로 물들일 진달래꽃을 기다리며, 한국인의 최고 애송시 ‘진달래꽃’을 음미해 보자. 여러 영역본이 존재하지만 작년 만해문예대상을 수상한 안선재(Brother Anthoy of Taizé) 서강대 명예교수 번역으로 소개한다. 소월의 진달래꽃 영혼이 세계인의 가슴에도 뜨거운 울림을 줬으리라.
 
  When seeing me sickens you
  (나 보기가 역겨워)
  and you walk out (가실 때에는)
  I’ll send you off without a word, no fuss.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Yongbyon’s mount Yaksan’s
  (영변에 약산[藥山])
  azaleas (진달래꽃)
  by the armful I’ll scatter in your path.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With parting steps (가시는 걸음걸음)
  on those strewn flowers (놓인 그 꽃을)
  treading lightly, go on, leave.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When seeing me sickens you
  (나 보기가 역겨워)
  and you walk out (가실 때에는)
  why, I’d rather die than weep one tear.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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