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이어령 등 한국 문인 인장 1000여 점 소장
⊙ 경기대 교수로 퇴임한 후 2000년 7월 고향인 충남 예산에 내려가 작은 테마박물관 건립
⊙ 인장은 근대 문인들이 낙관(落款)처럼 사용하던 판권(版權) 도장
⊙ 가난한 시절, 검정고시와 소설가 오영수 도움으로 경기대 국문과 입학… 월남전 다룬 《악어새》 30만 부 팔려
李在仁
1945년생. 경기대 국문과, 숭전대 대학원·길림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충남 예산고 교사, 문교부 공보관실 연구사, 경기대 교수, 경기대 학생지원처장 역임. 現 한국문인 인장박물관·충남문학관 관장 / 소설 《악어새》 《정중부》 《일어서는 풀》 등 다수
⊙ 경기대 교수로 퇴임한 후 2000년 7월 고향인 충남 예산에 내려가 작은 테마박물관 건립
⊙ 인장은 근대 문인들이 낙관(落款)처럼 사용하던 판권(版權) 도장
⊙ 가난한 시절, 검정고시와 소설가 오영수 도움으로 경기대 국문과 입학… 월남전 다룬 《악어새》 30만 부 팔려
李在仁
1945년생. 경기대 국문과, 숭전대 대학원·길림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충남 예산고 교사, 문교부 공보관실 연구사, 경기대 교수, 경기대 학생지원처장 역임. 現 한국문인 인장박물관·충남문학관 관장 / 소설 《악어새》 《정중부》 《일어서는 풀》 등 다수
- 이재인 경기대 명예교수이자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관장.
지난 6월 27일 소설가인 이재인(李在仁·78) 경기대 명예교수와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전날 비가 쏟아져서인지 찾아가는 길이 무척 미끄러워 기자는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어쩌면 이 미끄러운 지그재그 길이 우여곡절로 가득한 그의 인생사를 상징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고, 결국 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 이 교수는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 중간중간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좀 더 들어보시게. 아마 납득이 갈 겁니다.”
납득이 갔다. 정말이지 군더더기 없는 일생(一生)의 말들을 기자의 귓속과 머릿속, 녹음기 안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리고 불판에 눌어붙은 고기 여러 점과 먹다 만 시래깃국까지 챙겨 반려견에게 주는 모습을 보며 달궈진 화로(火爐) 같은 삶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 근대 여성의 뿌리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한국문인 인장(印章)박물관(광시면 운산리)에 들어섰다. 그는 인장박물관의 관장이자 충남문학관의 관장이기도 했다.
이 박물관 옆에 ‘한국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곁에 검은 돌로 만든 ‘방인근 《조선문단》 창간 100주년 기념탑’도 보였다. 비는 2018년 5월 4일, 탑은 석 달 전인 지난 5월 4일 건립되었다. 한 세기(世紀)를 기리는 두 개의 비와 탑이 왜 하필 충남 예산에, 그것도 한적한 시골에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평범한 대상을 낯설게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 교수, 아니 이 관장의 설명을 들으니 절로 ‘납득’이 갔다. 아니, 납득을 당했다.
“한국 여성문학의 뿌리는 김명순(金明淳·1896~1951년)에서 시작되는데, 이분이 1917년 잡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죠. 이분이 예산 덕숭산 기슭 수덕사 발치에 있는, 그리고 지금도 있는 ‘수덕여관’에 머문 적이 있어요. 당시 김일엽이라는 근대 여성이 승려가 되려고 수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명순이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을 찾아간 것이죠.
또 화가 이응노(李應魯·1904~ 1989년)가 나혜석(羅蕙錫·1896~ 1948년)이 수덕여관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덕여관에서 살기도 했죠. 이 김명순·김일엽·나혜석이 모두 수덕사와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탑을 세운 겁니다.”
1896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김일엽(金一葉·1896~1971년)은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시와 소설, 평론을 전방위적으로 발표한 뒤 수덕사에 은거하며 승려 시인이 되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근대 여성사의 선각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말년에 벗이었던 일엽스님과 수덕사 부근을 전전했다고 전한다.
─ 소설가 방인근(方仁根·1899~1975년) 선생은 예산이 고향이지요?
“맞습니다. 1898년 예산의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 많은 재산으로 근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인 이광수(李光洙·1892~1950년)와 최서해(崔曙海·1901~1932년)를 앞장 세워 《조선문단》 발간에 기여했지요. 1924년에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색채 움직임에 맞서 《조선문단》을 창간한 것이죠.
그 《조선문단》을 서울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아 고향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서 기념탑을 만든 것이죠.”
우리의 대화는 인장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그는 “인장박물관을 서울서 낙향한 2000년 7월 17일 개관했다. 1200여 점의 소중한 인장 문화재를 이런 시골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행운”이라며 자부심을 강조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끈 쥔’ 행운과 더불어 기자는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고급 문화의 징표인 인장의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인장은 근대 한국 문인의 文藝정신
요즘 책들은 대개 인지(印紙)를 생략하지만 과거엔 반드시 우표 크기의 인지가 있었고 그 인지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인지에 찍힌 도장이 인장이다. 이재인 교수의 말이다.
“인지는 ‘검인(檢印)쪽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저작권(著作權) 증지(證紙)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어요. 저작권이 근대문화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인지는 근대자본주의의 산물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이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오래된 책, 그 말미 판권에 붙인 저자와 출판사 간에 공동 제작한 인지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우리 출판 문화의 음양(陰陽)이 짙게 반영된 증표(證票)이기도 했죠.”
도장이 인감증명서처럼 공식적이고 재산의 가치까지 포함한 증표라면 인장은 근대 문인들이 낙관(落款)처럼 사용하던 판권(版權) 도장으로 이해하면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장은 그 자체로 이미 전각(篆刻·나무나 돌, 금옥 등에 새기는 행위)으로서 예술성을 지니고 있고 특히 문인들의 인장은 작가의 정체성과 문학혼(魂)이 깃들어 있다. “이들이 디자인한 인장의 글자, 즉 서체와 인장을 새긴 이들의 공예정신은 작품과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란다.
이 교수가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박물관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고 전등을 켰다. 대도시에서 보는 번쩍번쩍함은 없었지만 수많은 도장이, 아니 인장이 붉은 눈을 뜨고 초롱초롱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함이 느껴졌다. 수많은 인장이 저마다 사연이 있을 법했다. 또 이 인장들을 수집하기 위해 흘린 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부러 굼뜨게 박물관 내부, 거창할 것도 없는 공간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추리소설 같은 서스펜스는 없으나 그의 말에는 디테일이 담겨 있었고 정감이, 어떤 기지와 상상력의 세월이 묻어 있었다.
이 교수는 마치 빛바랜 편지를 읽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펴낸 장편소설 《악어새》(1989)가 30만 부나 팔려나갔단다. 그는 장·단편 소설집과 수필집, 각종 논저 등을 100권 가까이나 집필한,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저술 왕’이었다. 비교적 근래에도 그는 《근대 예산 풍류선》(2020), 《한국의 인지(印紙)》(2022) 같은 인문서적을 펴냈다.
─ 인장이 왜 중요합니까.
“책 판권에 인지가 있던 시절, 인장이 찍혀야 책이 정품임을 인정받았어요. 과거 식민지 시대 통치 기관의 통제 및 관리 감독의 한 수단이었죠.”
─ 인장이 안 찍힌 책은 책이 아니라는 의미군요.
“검인 없는 출판물은 불법(不法)이라는 죄명이 씌워졌던 게 당대 식민지 현실이었어요. 이런 점에서 애국지사나 항일(抗日) 단체에서 발간한 서책들은 검인이나 저자 서명이 들어간 간행물이 없었지요.”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청록파 3인, 이어령까지 1000여 점
그의 설명에 우리의 식민지 근대사가 포함되니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李人稙·1862~1916년)의 《혈의 누》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만세보》에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연재됐던 소설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지요.
이 소설집에 찍힌 검인 인장을 보면 당시 삼엄(森嚴)한 현실을 보는 것 같아요.”
─ 그동안 모은 한국 문인들의 인장 수는 얼마나 됩니까.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오영수, 조연현, 백철, 이어령 선생까지 1000여 명 정도 되는 문인들의 인장이 보관되어 있지요.”
자세히 관찰해보니 막도장에서부터 원형인장, 사각인장, 대형인장, 조형인장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기다 고려 시대 노비의 이마에 찍었던 불도장, 추사(秋史 金正喜·1786~1856년) 선생의 낙관, 조선 시대 임금의 국새(國璽) 등에다 세계 각국의 인장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인장 감정이나 인장의 진위를 가리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의 말이다.
“인장은 그냥 성과 이름을 새긴다고 다 인장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형의 삐침과 획에 의미를 담는 일이 최우선이었죠. 직관력이 없이 새기는 도장에도 그 사람의 삶을 축소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인장이 없이도 살 수가 있다. 사인만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고 은행 결제도 가능하다. 그나마 인감증명서가 있지만 그 무게는 예전만 못하다.
─ 이 많은 인장을 어떻게 다 모으신 겁니까.
“작가 인장 대부분은 친분을 활용해 직접 기증받았고, 작고(作故)한 문인의 경우 유족으로부터 받았어요. 문인들이 박물관을 찾아오면 입장료(?) 대신 인장을 받았지요. 나중에는 인장박물관이 회자(膾炙)되면서 문인들이 일부러 인장을 주려고 박물관을 찾기도 했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박물관에서 매년 춘추(春秋)로 나눠 명사 초청 강연회를 가졌는데 사례금 영수에 쓸 인장을 지참하라고 한 뒤 상습적으로….”
─ 그래서요?
“사례금 지급 전에 인장을 건네고는 얼떨떨하게 서 있다간 ‘이것은 박물관에…’. 하여튼 인장마다 일천야화가 존재하는데 곡진하고, 벌렁거리는 마음, 스릴 있는 획득과 사들인 명품을 손에 들었을 때의 희열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어요?”
최근에는 인장 대신 문인들이 사용하던 필통이나 머그컵 등을 받아 박물관 곳곳을 다양하게 꾸미고 있다고 말하는 이 교수는 꿈을 꾸는 십대 소년의 눈빛이었다.
印章 수집의 에피소드
─ 인장 수집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언젠가 ‘문학의 집·서울’에서 김후란 선생의 요청으로 〈한국문학인 인장전〉을 한 달간 열었던 적이 있었어요. 방명록에 200여 문인이 다녀갔지만 단 한 분만이 전시회가 끝나고 인장을 직접 주셨어요.
방송 사극을 집필하는 신봉승(辛奉承) 선생으로 〈조선왕조 500년〉 등을 쓰신 분이죠. 그분은 역사소설이나 사극이 사실과 약간은 다르더라도 시대정신 자체를 왜곡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신, 진정한 대하사극의 대가(大家)셨지요. 당시 제 손목을 잡으시며 인장 한 질을 편지와 함께 직접 건네주셨어요.”
─ 신봉승 선생 외에 애걸복걸 없이 인장을 선뜻 내주신 분 중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요?
“김남조(金南祚) 선생이 생각납니다. 선생은 ‘이 인장을 시인 이근배(李根培)씨가 새긴 것인데 보내니까 잘 활용하세요’라고 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으셨어요.
제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며 고맙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했는데….”
─ 특별히 인상적인 인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월북 작가 박팔양(朴八陽)이 1920년대 각인한 이해문(李海文) 시인의 인장은 불가사의한 데가 있어요. 물소뼈와 상아가 상단, 하단으로 나뉘어 있어요. 상단은 상아, 하단은 물소뼈의 재질입니다. 지금에야 이런 도장뿐만 아니라 더 난해한 것까지 수공예로 제작된다지만 당대 기술로 어찌 이런 훌륭한 인장을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 아, 이해문 시인은 어떤 분인가요?
“이해문(1911~1950년)은 이곳 예산에서 지방 최초의 문예지 《문예광》 동인으로 활동했어요. 아울러 서울의 《시인춘추》 동인지에 열정적으로 시 작품을 기고하고 《조선중앙일보》에다 자주 작품을 선보였죠. 또 《바다의 묘망(渺茫)》(1938)이란 당시로 봐선 호화판 시집을 출간한 일도 있어요.
이해문은 시인이면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6·25 때 북괴군에게 희생되었어요. 《바다의 묘망》 시집 판권에 찍었던 인장을 국보처럼 소장하고 있죠.”
전국 최초의 지방 문예지 《문예광》 발견
이 교수에 따르면 예산에서는 1930년 2월 7일 소위 전국 지방 문예지로 손꼽히던 충남 최초의 《문예광》이란 동인지가 탄생했다. 이 동인지는 일본 경찰의 검열에 의해 성진호의 소설 〈머슴 사회〉가 전문 삭제되고 책마저 전량 압수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예광》 창간호를 서울 S대학 도서관에서 이 교수가 발견, 세상에 알렸다. 이로써 예산이 지방 문학사 최초의 공간이 되었다. 그는 “전량 압수됐는데 경찰의 압류본 한 권이 살아남아 기록으로 남게 됐다. 새삼 기록이 무섭다는 걸 실감한다”고 토로했다.
인장박물관에는 문학단체, 예술단체 직인과 관인 여럿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글자를 드러내기 위해 뱃가죽을 훤히 드러내고 있어 “그 지엄함을 훼손하는 느낌이 들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유치진(柳致眞·1905~1974년) 선생이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즉 예총 회장 시절 사용하던 직인도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이곳 예산까지 오게 된 것일까.
“대학로 예총회관에서 목동예술인센터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복도 재떨이에 내다 버린 것을 그때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던 정종명(鄭鍾明) 작가가 습득해 제게 건네준 겁니다.
옛날 낡은 종이에 둘러싸인 돌도장이었으니 (예총 직원들이) 그냥 내다 버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돌도장 등피에 새긴 방각(傍刻)을 보지 못했기에 버렸을 거예요. 이게 바로 대한민국 예총 직원의 교양 수준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그러니까 옛 예총회관 2층 복도 재떨이에 도장 4개가 내동댕이쳐 있더랍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장항선 유일의 특급 새마을열차를 타고 바로 상경했지요.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죠.
붉은 인주 머금은 사각 낙관과 눈에 익은 방각서체가 눈에 들어왔어요. 글씨가 소전(素田 孫在馨·1903~ 1981년) 선생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 인장 4개는 어떤 것이었나요?
“유치진 선생의 낙관에 예총 직인, 예총 축제 시에 주차증을 확인하던 스탬프 출입증인 등이었죠.
정종명 작가도 그 돌도장의 실체를 모르기에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가지고 가서 돋보기로 확인해 봐야…’라며 말끝을 흐리고, 준비해 간 닥종이로 싸고 또 싸서 아기처럼 뭉치로 정성껏 배낭에 모셔 들었죠. 두 다리가 자꾸만 후들거렸습니다.”
‘머슴 가거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무슨 문학이냐?’
이재인 교수는 1945년 4월 3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6세 때 한자 1000자 익히기를 완수했고 8세 때 한글을 뗐다. 시조시인인 백부(이봉열)가 소지한 《자유문학》 《현대문학》 《사상계》를 틈틈이 읽고 완전히 이해했다고 한다. 6·25가 끝난 이듬해인 1954년 초등학교에 입학해 6년 내내 반장을 맡았을 만큼 명민했다. 14세 때 ‘이승만 대통령 83회 탄신 기념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면서 글재주를 세상에 알렸다. ‘국립경찰 창립 예산군내 학생 글짓기대회’ 최우수상, 품행방정으로 충남교육감상 수상, 혹은 소설가 오영수(吳永壽·1914~1979년) 선생이나 언론인 장준하(張俊河·1915~1975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는 기쁨도 누렸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일찍이 문학의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땐 남의 집 머슴을 가면 쌀이 두 가마, 꼬박 3년을 살면 여섯 가마를 구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이 여섯 가마를 6년 정리(高利)쌀로 따진다면 논 세 마지기와 초가삼간을 지을 수 있던 시절이 1960년대의 사회구조였죠. 근면 검소하고 육체가 튼튼한 제게 그날도 아버지는 저를 구슬렸어요.
‘머슴 가거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무슨 문학이냐? 얼어 죽을…’이라고.
저는 아무래도 머슴 갈 위인이 아니었어요. 글도 잘 쓰고 한문도 《명심보감》까지 배웠고 군내(郡內) 유명한 백일장과 각종 글짓기 전국대회 최우수상도 받았죠. 《학원》 《현대문학》 애독자로서 더러 대중잡지 독자 투고란에 응모작이 입선되어 세상에 ‘이재인’이란 이름이 나돌고 특히 《서울신문》 《경향신문》 투고란에 제 이름 석 자가 고딕으로 인쇄되어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나’였단 말이에요.”
16세 소년은 머슴이 되기 싫어 무조건 가출을 결심했다. 이날 밤 그는 부엌 뒷문 흙벽의 대못에 걸린 마늘 석 접을 떼어냈다. 부엌 바닥에 파묻은 밤 구덩이를 헤쳐 알밤 닷 되를 훔쳐냈다. 그것만으로 안 돼 쌀독을 열어 계란 두 줄까지 챙겼다. 새벽이 되자 첫닭 울음소리를 신호로 홍성 읍내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서울행 기차에 올랐지만 경찰관 같은 복장에 챙이 넓은 모자와 감색 양복에 눈이 부리부리한 공안(公安)에게 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하지만 마음속에는 서울로 올라가 취직도 하고 야학을 하려는 엉뚱하고 다부진 꿈을 지니고 있었죠.”
경기대 국문과 입학과 양주동編 《국어대사전》
두 달 후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두 번째 무단가출이었다. 이번에는 혈혈단신, 손에 책 한 권 이외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서울 돈암교 부근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하루 종일 찌그러진 자동차와 씨름하며 무보수 인턴을 하다 낙향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세 번째 가출을 감행했는데 소설가 오영수 선생을 찾아가 입성은 남루했지만 또렷또렷한 음성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 헌책방에 들러 2500원에 1m 높이의 과월호(過月號) 문예지와 단편 소설집 두어 권을 새끼로 가로세로 묶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듬해 봄에 오영수 선생으로부터 우편엽서 한 통을 받았어요. 공부할 의사가 있으면 상경하라는 통보였죠.”
오영수 선생의 도움으로 스무 살이던 1964년 경기대 국문과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김광식, 장호, 양주동, 박남수, 정태영, 이태극, 이형기 등 유명 문인을 스승으로 만났다.
“저의 대학 2년은 가난과 허기의 연속이었어요. 일정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하루는 고모님댁, 하루는 친구집, 하루는 절간 또 하루는 큰댁, 또 하루는…. 이렇게 연속적인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었어요. 이러한 삶 속에 머리를 짜내어 고안한 것이 양주동편 《국어대사전》 한 권을 싸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었어요.”
─ 친구들은 사전으로 낱말 공부에 열중하는 줄 알았겠네요.
“친구집에 가서 잠을 자게 되면 베개가 필요했어요. 혹시 그 집에서 베개 제공을 해도 높낮이가 맞지 않아 불편했기에 반드시 《국어사전》을 끼고 다녔던 겁니다.”
그와 베트남은 남다른 감회가 있다. 만약 그가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과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인생에 가설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에 ‘소설가’란 이름과 ‘교수’라는 직분이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여름에 군에 입대했어요. 등록금뿐 아니라 책값을 비롯해 쓸 용돈이 씨알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죠. 친구들한테 이따금 돈을 얻어다 썼지만 그것들도 ‘코끼리 코에 비스킷’에 지나지 않았어요. 에라, ‘이 판에 군에나 가자’면서 입대했어요.”
논산에서 신병 훈련 42일을 마치고 육군통신기지창에 배속되었다. 여기서 10개월간 상등병을 붙이고 고달픈 졸병 생활을 하던 중 베트남전 모병(募兵)에 대해 알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과 소설 《악어새》
대략 50여 일간의 지옥 같은 전투 훈련을 마치고 퀴논에 있는 군수지원단 행정병으로 명령을 받았다. 여기에서 군사 우편, 행정문서 수발에 관계하면서 미지의 베트남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이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소설을 쓰기 위한 소재 수집”이었단다.
어느새 1년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열대병에 지쳤다. 더욱이 한국에 두고 온 연인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녀의 신변에 이상 징후가 있음을 그의 동생이 귀띔해주어 귀국을 서둘렀다. 제대 10개월을 앞두고 서울 수색에 있는 ○○사단의 전투 대대에 배속받았다.
“베트남 소재를 소설로 엮기 위한 작업을 구성하기로 작정했어요. 장흥, 일영, 파주, 화성 등 진지를 옮겨 다니면서 전쟁 소설을 구상했어요. 마지막 부대인 수원 근교 칠보산에서 제대 명령을 받았어요. 물론 복학도 했죠. 등록금은 베트남에서 받은 전투수당과 급여를 모아 이미 돈을 불렸지요. 시골의 아버지께서 제가 송금한 피 같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어미 소로 길러 놓았던 겁니다.”
이 소를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내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도 했다. 대학 졸업 전부터 《월간 전자과학》 같은 잡지사를 옮겨 다니며 한 가족의 가장 노릇을 하다가 《월간 축구》 기자를 그만두고 스물여덟에 낙향해 충남 예산고 국어교사가 되었다. 부지런히 습작을 해 해마다 수필집 한 권씩을 발간했고 그사이 충북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부천 소명여고, 영동군 용문중, 미원고(현 충북에너지고), 청주농고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빼어난 글 솜씨 덕분인지 서울의 문교부 공보관실로 전근돼 근무하기도 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본격적인 소설 쓰기에 도전했다. 1985년 《예술계》 신인상에 단편소설 〈금이빨과 금지구역〉이 당선됐다. 같은 해 교육신보사의 2000만원 현상 공모전에서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직접 겪은 체험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악어새》(1989)란 장편소설을 썼다.
《악어새》는 전쟁의 무모성과 그로 인해 빚어진 인간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베트남인을 소설의 전면에 등장시켜 전쟁의 치부를 여러 각도에서 실감 나게 묘사했다는 평이다.
“인생, 苦海만은 아니었다”
출판 사흘 만에 기적같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6개월 만에 10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신문, 잡지, TV에 클로즈업되었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모교인 경기대 국문과 전임교수 자리가 마련되었고 무사히 정년을 마쳤다.
“살아오면서 직접 삶의 현장에서 열정을 다했어요. 젊은 날의 한낱 수고와 질고쯤이야 신앙이 기초가 된 제 삶에서는 도전과 극복의 비전으로 여길 수 있었어요. 모두 축복이었고 은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산다는 것은 누구 말처럼 고해(苦海)만은 아니었어요. 잔잔하고 작은 행복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어요.”
예산에서 그와 헤어지며 기자의 마음속에 ‘이재인’이란 이름의 인장이 깊이 새겨졌다. 그가 살아온 삶의 풍경이 총천연색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그가 이름 그대로 덕을 닦는 사찰 수덕사(修德寺)와 ‘한국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비’가 풍광에 깊이를 더해주는 곳, 예(禮)의 향취가 풍기는 예산에 인장박물관을 세운 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 이 교수는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 중간중간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좀 더 들어보시게. 아마 납득이 갈 겁니다.”
납득이 갔다. 정말이지 군더더기 없는 일생(一生)의 말들을 기자의 귓속과 머릿속, 녹음기 안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리고 불판에 눌어붙은 고기 여러 점과 먹다 만 시래깃국까지 챙겨 반려견에게 주는 모습을 보며 달궈진 화로(火爐) 같은 삶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 근대 여성의 뿌리
![]() |
이재인 교수가 김명순·김일엽·나혜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한국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비’. |
이 박물관 옆에 ‘한국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곁에 검은 돌로 만든 ‘방인근 《조선문단》 창간 100주년 기념탑’도 보였다. 비는 2018년 5월 4일, 탑은 석 달 전인 지난 5월 4일 건립되었다. 한 세기(世紀)를 기리는 두 개의 비와 탑이 왜 하필 충남 예산에, 그것도 한적한 시골에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평범한 대상을 낯설게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 교수, 아니 이 관장의 설명을 들으니 절로 ‘납득’이 갔다. 아니, 납득을 당했다.
“한국 여성문학의 뿌리는 김명순(金明淳·1896~1951년)에서 시작되는데, 이분이 1917년 잡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죠. 이분이 예산 덕숭산 기슭 수덕사 발치에 있는, 그리고 지금도 있는 ‘수덕여관’에 머문 적이 있어요. 당시 김일엽이라는 근대 여성이 승려가 되려고 수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명순이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을 찾아간 것이죠.
또 화가 이응노(李應魯·1904~ 1989년)가 나혜석(羅蕙錫·1896~ 1948년)이 수덕여관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덕여관에서 살기도 했죠. 이 김명순·김일엽·나혜석이 모두 수덕사와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탑을 세운 겁니다.”
1896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김일엽(金一葉·1896~1971년)은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시와 소설, 평론을 전방위적으로 발표한 뒤 수덕사에 은거하며 승려 시인이 되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근대 여성사의 선각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말년에 벗이었던 일엽스님과 수덕사 부근을 전전했다고 전한다.
─ 소설가 방인근(方仁根·1899~1975년) 선생은 예산이 고향이지요?
“맞습니다. 1898년 예산의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 많은 재산으로 근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인 이광수(李光洙·1892~1950년)와 최서해(崔曙海·1901~1932년)를 앞장 세워 《조선문단》 발간에 기여했지요. 1924년에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색채 움직임에 맞서 《조선문단》을 창간한 것이죠.
그 《조선문단》을 서울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아 고향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서 기념탑을 만든 것이죠.”
우리의 대화는 인장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그는 “인장박물관을 서울서 낙향한 2000년 7월 17일 개관했다. 1200여 점의 소중한 인장 문화재를 이런 시골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행운”이라며 자부심을 강조하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끈 쥔’ 행운과 더불어 기자는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고급 문화의 징표인 인장의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인장은 근대 한국 문인의 文藝정신
![]() |
한국문인 인장박물관에 있는 문인들의 다양한 인장 모습이다. |
“인지는 ‘검인(檢印)쪽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저작권(著作權) 증지(證紙)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어요. 저작권이 근대문화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인지는 근대자본주의의 산물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이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오래된 책, 그 말미 판권에 붙인 저자와 출판사 간에 공동 제작한 인지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우리 출판 문화의 음양(陰陽)이 짙게 반영된 증표(證票)이기도 했죠.”
도장이 인감증명서처럼 공식적이고 재산의 가치까지 포함한 증표라면 인장은 근대 문인들이 낙관(落款)처럼 사용하던 판권(版權) 도장으로 이해하면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장은 그 자체로 이미 전각(篆刻·나무나 돌, 금옥 등에 새기는 행위)으로서 예술성을 지니고 있고 특히 문인들의 인장은 작가의 정체성과 문학혼(魂)이 깃들어 있다. “이들이 디자인한 인장의 글자, 즉 서체와 인장을 새긴 이들의 공예정신은 작품과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란다.
이 교수가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박물관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고 전등을 켰다. 대도시에서 보는 번쩍번쩍함은 없었지만 수많은 도장이, 아니 인장이 붉은 눈을 뜨고 초롱초롱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함이 느껴졌다. 수많은 인장이 저마다 사연이 있을 법했다. 또 이 인장들을 수집하기 위해 흘린 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부러 굼뜨게 박물관 내부, 거창할 것도 없는 공간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추리소설 같은 서스펜스는 없으나 그의 말에는 디테일이 담겨 있었고 정감이, 어떤 기지와 상상력의 세월이 묻어 있었다.
이 교수는 마치 빛바랜 편지를 읽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펴낸 장편소설 《악어새》(1989)가 30만 부나 팔려나갔단다. 그는 장·단편 소설집과 수필집, 각종 논저 등을 100권 가까이나 집필한,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저술 왕’이었다. 비교적 근래에도 그는 《근대 예산 풍류선》(2020), 《한국의 인지(印紙)》(2022) 같은 인문서적을 펴냈다.
─ 인장이 왜 중요합니까.
“책 판권에 인지가 있던 시절, 인장이 찍혀야 책이 정품임을 인정받았어요. 과거 식민지 시대 통치 기관의 통제 및 관리 감독의 한 수단이었죠.”
─ 인장이 안 찍힌 책은 책이 아니라는 의미군요.
“검인 없는 출판물은 불법(不法)이라는 죄명이 씌워졌던 게 당대 식민지 현실이었어요. 이런 점에서 애국지사나 항일(抗日) 단체에서 발간한 서책들은 검인이나 저자 서명이 들어간 간행물이 없었지요.”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청록파 3인, 이어령까지 1000여 점
![]() |
인장박물관에는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오영수, 조연현, 백철, 이어령 선생까지 1000여 명 정도 되는 문인들의 인장이 보관되어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李人稙·1862~1916년)의 《혈의 누》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만세보》에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연재됐던 소설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지요.
이 소설집에 찍힌 검인 인장을 보면 당시 삼엄(森嚴)한 현실을 보는 것 같아요.”
─ 그동안 모은 한국 문인들의 인장 수는 얼마나 됩니까.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오영수, 조연현, 백철, 이어령 선생까지 1000여 명 정도 되는 문인들의 인장이 보관되어 있지요.”
자세히 관찰해보니 막도장에서부터 원형인장, 사각인장, 대형인장, 조형인장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기다 고려 시대 노비의 이마에 찍었던 불도장, 추사(秋史 金正喜·1786~1856년) 선생의 낙관, 조선 시대 임금의 국새(國璽) 등에다 세계 각국의 인장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인장 감정이나 인장의 진위를 가리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의 말이다.
“인장은 그냥 성과 이름을 새긴다고 다 인장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형의 삐침과 획에 의미를 담는 일이 최우선이었죠. 직관력이 없이 새기는 도장에도 그 사람의 삶을 축소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인장이 없이도 살 수가 있다. 사인만으로 통장을 만들 수 있고 은행 결제도 가능하다. 그나마 인감증명서가 있지만 그 무게는 예전만 못하다.
─ 이 많은 인장을 어떻게 다 모으신 겁니까.
“작가 인장 대부분은 친분을 활용해 직접 기증받았고, 작고(作故)한 문인의 경우 유족으로부터 받았어요. 문인들이 박물관을 찾아오면 입장료(?) 대신 인장을 받았지요. 나중에는 인장박물관이 회자(膾炙)되면서 문인들이 일부러 인장을 주려고 박물관을 찾기도 했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박물관에서 매년 춘추(春秋)로 나눠 명사 초청 강연회를 가졌는데 사례금 영수에 쓸 인장을 지참하라고 한 뒤 상습적으로….”
─ 그래서요?
“사례금 지급 전에 인장을 건네고는 얼떨떨하게 서 있다간 ‘이것은 박물관에…’. 하여튼 인장마다 일천야화가 존재하는데 곡진하고, 벌렁거리는 마음, 스릴 있는 획득과 사들인 명품을 손에 들었을 때의 희열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어요?”
최근에는 인장 대신 문인들이 사용하던 필통이나 머그컵 등을 받아 박물관 곳곳을 다양하게 꾸미고 있다고 말하는 이 교수는 꿈을 꾸는 십대 소년의 눈빛이었다.
印章 수집의 에피소드
![]() |
이재인 교수 뒤로 베스트셀러 소설 《악어새》 문학비가 보인다. 국가문화재 198호인 사운고택 앞에 세워졌다. |
“언젠가 ‘문학의 집·서울’에서 김후란 선생의 요청으로 〈한국문학인 인장전〉을 한 달간 열었던 적이 있었어요. 방명록에 200여 문인이 다녀갔지만 단 한 분만이 전시회가 끝나고 인장을 직접 주셨어요.
방송 사극을 집필하는 신봉승(辛奉承) 선생으로 〈조선왕조 500년〉 등을 쓰신 분이죠. 그분은 역사소설이나 사극이 사실과 약간은 다르더라도 시대정신 자체를 왜곡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신, 진정한 대하사극의 대가(大家)셨지요. 당시 제 손목을 잡으시며 인장 한 질을 편지와 함께 직접 건네주셨어요.”
─ 신봉승 선생 외에 애걸복걸 없이 인장을 선뜻 내주신 분 중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요?
“김남조(金南祚) 선생이 생각납니다. 선생은 ‘이 인장을 시인 이근배(李根培)씨가 새긴 것인데 보내니까 잘 활용하세요’라고 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으셨어요.
제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며 고맙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했는데….”
─ 특별히 인상적인 인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월북 작가 박팔양(朴八陽)이 1920년대 각인한 이해문(李海文) 시인의 인장은 불가사의한 데가 있어요. 물소뼈와 상아가 상단, 하단으로 나뉘어 있어요. 상단은 상아, 하단은 물소뼈의 재질입니다. 지금에야 이런 도장뿐만 아니라 더 난해한 것까지 수공예로 제작된다지만 당대 기술로 어찌 이런 훌륭한 인장을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 아, 이해문 시인은 어떤 분인가요?
“이해문(1911~1950년)은 이곳 예산에서 지방 최초의 문예지 《문예광》 동인으로 활동했어요. 아울러 서울의 《시인춘추》 동인지에 열정적으로 시 작품을 기고하고 《조선중앙일보》에다 자주 작품을 선보였죠. 또 《바다의 묘망(渺茫)》(1938)이란 당시로 봐선 호화판 시집을 출간한 일도 있어요.
이해문은 시인이면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6·25 때 북괴군에게 희생되었어요. 《바다의 묘망》 시집 판권에 찍었던 인장을 국보처럼 소장하고 있죠.”
인장의 소재들 청동, 도자, 떡살, 물소뿔, 상아… 이재인 교수에 따르면, 고려 시대 고급 인장들은 주로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간혹 도자인(印)도 있기는 하나 그리 흔하지는 않다. 도자인은 청자인으로서, 귀족이나 호족들이 제작해 사용했다. 도자인의 단점은 글자, 즉 자형이 목(木)조각처럼 살아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조선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떡살을 백자로 구워 사용하였다. 민속박물관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이 또한 문양이나 대소 자형이 예술적으로 되살아나지 못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려 이전에도 인장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고, 단군신화에도 천부인(天符印)이 거론된다. 인장의 소재는 모과나무, 목백일홍이 단단하여 자획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 주로 이용되었다. 귀족이나 호족들은 물소뿔이나 코끼리 상아(象牙)를 구해 인장을 새겼다. 이 물소뿔은 단단한 강질로 자획이 마모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가격 또한 상아보다 저렴하다. 근세 조선 시대 귀족들은 수입한 상아를 인장 소재로 선택했다. 하나 화장실 가까운 곳에 보관하면 갈라지고 벌어지는 단점이 있다. 돌 가운데에서는 황옥, 청옥, 흑옥이 있는데 옥은 단단하여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다. 서민에게는 부담되는 요소다. 우리나라 왕조사에 독자적인 옥새를 사용한 임금이 세 분이 있다. 고려 광종, 조선 고종과 순종은 독자적인 국새를 제작했다. 대단한 용단이었고 자주적(自主的)인 행보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단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
전국 최초의 지방 문예지 《문예광》 발견
![]() |
이재인 교수가 수집한 각 문인 인장들의 표정. |
인장박물관에는 문학단체, 예술단체 직인과 관인 여럿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글자를 드러내기 위해 뱃가죽을 훤히 드러내고 있어 “그 지엄함을 훼손하는 느낌이 들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유치진(柳致眞·1905~1974년) 선생이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즉 예총 회장 시절 사용하던 직인도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이곳 예산까지 오게 된 것일까.
“대학로 예총회관에서 목동예술인센터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이 복도 재떨이에 내다 버린 것을 그때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던 정종명(鄭鍾明) 작가가 습득해 제게 건네준 겁니다.
옛날 낡은 종이에 둘러싸인 돌도장이었으니 (예총 직원들이) 그냥 내다 버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돌도장 등피에 새긴 방각(傍刻)을 보지 못했기에 버렸을 거예요. 이게 바로 대한민국 예총 직원의 교양 수준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그러니까 옛 예총회관 2층 복도 재떨이에 도장 4개가 내동댕이쳐 있더랍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장항선 유일의 특급 새마을열차를 타고 바로 상경했지요.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죠.
붉은 인주 머금은 사각 낙관과 눈에 익은 방각서체가 눈에 들어왔어요. 글씨가 소전(素田 孫在馨·1903~ 1981년) 선생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 인장 4개는 어떤 것이었나요?
“유치진 선생의 낙관에 예총 직인, 예총 축제 시에 주차증을 확인하던 스탬프 출입증인 등이었죠.
정종명 작가도 그 돌도장의 실체를 모르기에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가지고 가서 돋보기로 확인해 봐야…’라며 말끝을 흐리고, 준비해 간 닥종이로 싸고 또 싸서 아기처럼 뭉치로 정성껏 배낭에 모셔 들었죠. 두 다리가 자꾸만 후들거렸습니다.”
‘머슴 가거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무슨 문학이냐?’
이재인 교수는 1945년 4월 3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6세 때 한자 1000자 익히기를 완수했고 8세 때 한글을 뗐다. 시조시인인 백부(이봉열)가 소지한 《자유문학》 《현대문학》 《사상계》를 틈틈이 읽고 완전히 이해했다고 한다. 6·25가 끝난 이듬해인 1954년 초등학교에 입학해 6년 내내 반장을 맡았을 만큼 명민했다. 14세 때 ‘이승만 대통령 83회 탄신 기념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면서 글재주를 세상에 알렸다. ‘국립경찰 창립 예산군내 학생 글짓기대회’ 최우수상, 품행방정으로 충남교육감상 수상, 혹은 소설가 오영수(吳永壽·1914~1979년) 선생이나 언론인 장준하(張俊河·1915~1975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는 기쁨도 누렸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일찍이 문학의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땐 남의 집 머슴을 가면 쌀이 두 가마, 꼬박 3년을 살면 여섯 가마를 구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이 여섯 가마를 6년 정리(高利)쌀로 따진다면 논 세 마지기와 초가삼간을 지을 수 있던 시절이 1960년대의 사회구조였죠. 근면 검소하고 육체가 튼튼한 제게 그날도 아버지는 저를 구슬렸어요.
‘머슴 가거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무슨 문학이냐? 얼어 죽을…’이라고.
저는 아무래도 머슴 갈 위인이 아니었어요. 글도 잘 쓰고 한문도 《명심보감》까지 배웠고 군내(郡內) 유명한 백일장과 각종 글짓기 전국대회 최우수상도 받았죠. 《학원》 《현대문학》 애독자로서 더러 대중잡지 독자 투고란에 응모작이 입선되어 세상에 ‘이재인’이란 이름이 나돌고 특히 《서울신문》 《경향신문》 투고란에 제 이름 석 자가 고딕으로 인쇄되어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나’였단 말이에요.”
16세 소년은 머슴이 되기 싫어 무조건 가출을 결심했다. 이날 밤 그는 부엌 뒷문 흙벽의 대못에 걸린 마늘 석 접을 떼어냈다. 부엌 바닥에 파묻은 밤 구덩이를 헤쳐 알밤 닷 되를 훔쳐냈다. 그것만으로 안 돼 쌀독을 열어 계란 두 줄까지 챙겼다. 새벽이 되자 첫닭 울음소리를 신호로 홍성 읍내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서울행 기차에 올랐지만 경찰관 같은 복장에 챙이 넓은 모자와 감색 양복에 눈이 부리부리한 공안(公安)에게 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어요. 하지만 마음속에는 서울로 올라가 취직도 하고 야학을 하려는 엉뚱하고 다부진 꿈을 지니고 있었죠.”
경기대 국문과 입학과 양주동編 《국어대사전》
![]() |
충남 홍성군 장곡면에 위치한 사운고택에서 이재인 교수와 조환웅씨(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이듬해 봄에 오영수 선생으로부터 우편엽서 한 통을 받았어요. 공부할 의사가 있으면 상경하라는 통보였죠.”
오영수 선생의 도움으로 스무 살이던 1964년 경기대 국문과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김광식, 장호, 양주동, 박남수, 정태영, 이태극, 이형기 등 유명 문인을 스승으로 만났다.
“저의 대학 2년은 가난과 허기의 연속이었어요. 일정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하루는 고모님댁, 하루는 친구집, 하루는 절간 또 하루는 큰댁, 또 하루는…. 이렇게 연속적인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었어요. 이러한 삶 속에 머리를 짜내어 고안한 것이 양주동편 《국어대사전》 한 권을 싸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었어요.”
─ 친구들은 사전으로 낱말 공부에 열중하는 줄 알았겠네요.
“친구집에 가서 잠을 자게 되면 베개가 필요했어요. 혹시 그 집에서 베개 제공을 해도 높낮이가 맞지 않아 불편했기에 반드시 《국어사전》을 끼고 다녔던 겁니다.”
그와 베트남은 남다른 감회가 있다. 만약 그가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과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인생에 가설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에 ‘소설가’란 이름과 ‘교수’라는 직분이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여름에 군에 입대했어요. 등록금뿐 아니라 책값을 비롯해 쓸 용돈이 씨알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죠. 친구들한테 이따금 돈을 얻어다 썼지만 그것들도 ‘코끼리 코에 비스킷’에 지나지 않았어요. 에라, ‘이 판에 군에나 가자’면서 입대했어요.”
논산에서 신병 훈련 42일을 마치고 육군통신기지창에 배속되었다. 여기서 10개월간 상등병을 붙이고 고달픈 졸병 생활을 하던 중 베트남전 모병(募兵)에 대해 알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과 소설 《악어새》
대략 50여 일간의 지옥 같은 전투 훈련을 마치고 퀴논에 있는 군수지원단 행정병으로 명령을 받았다. 여기에서 군사 우편, 행정문서 수발에 관계하면서 미지의 베트남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이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소설을 쓰기 위한 소재 수집”이었단다.
어느새 1년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열대병에 지쳤다. 더욱이 한국에 두고 온 연인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녀의 신변에 이상 징후가 있음을 그의 동생이 귀띔해주어 귀국을 서둘렀다. 제대 10개월을 앞두고 서울 수색에 있는 ○○사단의 전투 대대에 배속받았다.
“베트남 소재를 소설로 엮기 위한 작업을 구성하기로 작정했어요. 장흥, 일영, 파주, 화성 등 진지를 옮겨 다니면서 전쟁 소설을 구상했어요. 마지막 부대인 수원 근교 칠보산에서 제대 명령을 받았어요. 물론 복학도 했죠. 등록금은 베트남에서 받은 전투수당과 급여를 모아 이미 돈을 불렸지요. 시골의 아버지께서 제가 송금한 피 같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어미 소로 길러 놓았던 겁니다.”
이 소를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내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도 했다. 대학 졸업 전부터 《월간 전자과학》 같은 잡지사를 옮겨 다니며 한 가족의 가장 노릇을 하다가 《월간 축구》 기자를 그만두고 스물여덟에 낙향해 충남 예산고 국어교사가 되었다. 부지런히 습작을 해 해마다 수필집 한 권씩을 발간했고 그사이 충북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부천 소명여고, 영동군 용문중, 미원고(현 충북에너지고), 청주농고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빼어난 글 솜씨 덕분인지 서울의 문교부 공보관실로 전근돼 근무하기도 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본격적인 소설 쓰기에 도전했다. 1985년 《예술계》 신인상에 단편소설 〈금이빨과 금지구역〉이 당선됐다. 같은 해 교육신보사의 2000만원 현상 공모전에서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직접 겪은 체험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악어새》(1989)란 장편소설을 썼다.
《악어새》는 전쟁의 무모성과 그로 인해 빚어진 인간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베트남인을 소설의 전면에 등장시켜 전쟁의 치부를 여러 각도에서 실감 나게 묘사했다는 평이다.
“인생, 苦海만은 아니었다”
출판 사흘 만에 기적같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6개월 만에 10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신문, 잡지, TV에 클로즈업되었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모교인 경기대 국문과 전임교수 자리가 마련되었고 무사히 정년을 마쳤다.
“살아오면서 직접 삶의 현장에서 열정을 다했어요. 젊은 날의 한낱 수고와 질고쯤이야 신앙이 기초가 된 제 삶에서는 도전과 극복의 비전으로 여길 수 있었어요. 모두 축복이었고 은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산다는 것은 누구 말처럼 고해(苦海)만은 아니었어요. 잔잔하고 작은 행복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어요.”
예산에서 그와 헤어지며 기자의 마음속에 ‘이재인’이란 이름의 인장이 깊이 새겨졌다. 그가 살아온 삶의 풍경이 총천연색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그가 이름 그대로 덕을 닦는 사찰 수덕사(修德寺)와 ‘한국 여성문학 100주년 기념비’가 풍광에 깊이를 더해주는 곳, 예(禮)의 향취가 풍기는 예산에 인장박물관을 세운 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