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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펴낸 류석춘 교수

“이승만의 근대화·항일·반공 의지가 번영하는 대한민국 만들었다”

글 : 이근미  객원기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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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대기 중 중요한 것들을 뽑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
⊙ “이승만, 반민특위 등에 대해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국민을 설득하려고 노력”
⊙ “박정희, 이승만이 세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뼈대 안에서 움직여”

柳錫春
1955년생.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사회학 박사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한국사회학·동남아시아연구 편집위원,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박정희연구회 회장,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 역임 / 저서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 《유교와 연고》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외 다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연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120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는 류석춘(柳錫春) 전 연세대 교수의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출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류 교수는 서문에서 “원래 2025년 4월에 1, 2, 3권을 한꺼번에 낼 계획이었는데 〈건국전쟁〉이 성공하면서 책 출판을 서두르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는 《자유일보》(2021년 11월 창간)에 주 1회씩 기고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을 1권과 2권에 담았고 3권에 들어갈 내용은 계속 연재 중이다. 류석춘 교수는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가 기존의 이승만 관련 책들과 다른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동안 나온 책들은 대부분 이승만의 특정한 어떤 주제, 구체적인 쟁점만 부각시켰어요. 이 책은 1875년 태어났을 때부터 1965년 돌아가실 때까지 일대기 중 중요한 것들을 뽑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한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이 90세까지 사신 데다 하신 일이 너무 많아 한 권에 담으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해요. 그래서인지 일생 전체를 다룬 책이 별로 없어요.”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는 3권으로 기획됐다. 1권은 ‘성장부터 해방까지’(1875~1945), 2권은 ‘미군정과의 대립과 유엔’(1945~1948)을 담았다. 2025년 발간 예정인 3권은 ‘건국의 시간과 죽음’(1948~1965)을 조명하게 된다. 1권이 이승만이 어떻게 국제적 안목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여정이라면 2권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미군정과 싸워서 이긴 기록을 담았다.
 
 
  “이승만이라는 더 큰 봉우리 발견”
 
류석춘 교수는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위치한 이승만연구원 건물.
  류 교수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서문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돋보인 인물은 박정희였다.… 그러나 어느 날 박정희 뒤에 우뚝 서 있는 이승만이라는 더 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자유당 시절만 해도 대통령 관련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下野) 직후 경무대(景武臺)에 보관 중이던 각종 문서를 이 대통령의 사저(私邸)인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겨놓았다.
 
  그 문서들과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이승만 문서들이 돌고 돌다 연세대가 소장하게 되면서 1997년 11월 이승만 연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내세울 상황이 아니어서 ‘현대한국학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출발했다. 연세대 김한중 총장의 결단으로 ‘이승만연구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2010년, 류석춘 교수가 초대 원장으로 부임했고 본격적으로 이승만 탐구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 관련 책자가 많지 않았다.
 
  “유영익, 이정식 선생 같은 극소수의 전문 연구자들이 학술서적이나 학술논문 형식으로 이승만에 관한 연구를 ‘숨어서’ 진행하는 정도였어요. 이승만 연구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면 책을 내라고 적극 권유해서 이승만연구원 총서로 출간했죠. 5년 동안 일하면서 20권 이상 냈어요. 이승만 연구가 대중에 퍼지는 데 제가 좀 역할을 했죠.”
 

  ― 당시 김구(金九) 선생에 관련된 책은 어느 정도였나요.
 
  “책이 엄청 많았어요. 다들 민족의 영웅이라고 했잖아요. 그에 비해 이승만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이승만은 굉장히 긍정적인 측면이 많고 비범한 분인데 사람들이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승만 책을 내려고 애썼죠.”
 
 
  미국 선교사 네트워크
 
  ―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처음 밝힌 내용이 있나요.
 
  “처음 밝히는 것이라기보다 새롭게 조명한 것들이 있어요. 이승만이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일곱 살 아들 태산이 박용만의 손에 이끌려 미국에 왔어요. 이승만의 아버지, 부인, 둘 중 한 사람이 아들을 보냈을 텐데 이 책에 부인이 보낸 거라고 썼어요.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던 부인이 이승만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아들을 보낸 거라고 해석했는데, 이런 해석은 제가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울러 ‘이승만은 이렇게 평가받아야 한다’라고 얘기하는 최근 자료까지 다 모으는 작업을 했죠.”
 
  ―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다니다가 감옥에서 5년 7개월을 보낸 후 미국으로 갔는데 바로 주요 신문에 기사가 나고 유명인사들을 만났잖아요. 그 시절에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이승만은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改宗)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최고의 엘리트였던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네트워크에 올라타게 된 거예요. 나중엔 맥아더 장군, 윌슨 대통령과 다 친밀해집니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이 몇몇 있지만 그들의 네트워크와 이승만의 네트워크는 비교가 안 돼요.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영어를 잘하고, 자신들이 전하는 근대적 지식을 받아들이고, 대화가 되니까 큰일 할 인물이라고 판단해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도왔던 거죠. 이승만이 워낙 뛰어난 면도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가 상당한 힘이 되었어요. 당시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가 전국에 900개나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죠.”
 
 
  “대중에게 자신에 대한 홍보를 잘한 사람”
 
일본을 비판하는 이승만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1905년 1월 17일 자 《워싱턴포스트》.
  1905년 1월 17일 자 《워싱턴포스트》는 12면에 〈일본은 러시아만큼 나빠〉라는 제목의 이승만 인터뷰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일본에 대한 침략을 고발하고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담은 기사였다. 그해 6월 4일 자 《워싱턴타임스》는 이승만의 아들을 돌봐줄 기독교 가정을 찾는다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크게 실었다. 곧이어 8월 4일 자 《뉴욕타임스》는 1면에 〈루스벨트를 만나 대한 사람을 보호해달라 요청할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진실을 좇는 두 외교 사절의 기이한 미션, 오이스터 베이 도착, 왕이 아닌 계몽된 민중의 청원서 소지, 두 나라의 조약 주목’이라는 소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민영환의 밀서를 품고 1904년 11월 5일 인천에서 배를 탄 이승만이 하와이를 경유해 워싱턴에 도착한 건 1904년 12월 말이에요. 그때까지 미국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한국에서 영어만 배우고 간 30세 청년의 기사가 연이어 세 번이나 주요 언론에 크게 나왔다는 건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죠. 기적이었죠. 선교사들의 네트워크도 있었지만 이승만 자체가 굉장히 탁월했던 것 같아요.”
 
  ― 이승만 대통령이 귀국하거나, 지방 강연 갈 때 구름 관중이 모이던데 인터넷이 없던 시대에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제한되어 있는 정보였지만 입소문으로 퍼져나간 거죠.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신문에 났더라’, ‘미국을 움직였다더라’ 그런 입소문이 많이 났어요. 무엇보다 이승만은 대중의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대중에게 자신에 대한 홍보를 잘한 사람이에요. 언론인 출신이잖아요. 언론을 통해 자신을 잘 알리는 건 정치인에게 중요한 자질입니다.”
 
 
  이승만과 김구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하지 미군정사령관을 만났다. 사진=조선DB
  ―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까지 협력을 잘했고, 김구가 어떤 모임이나 행사를 할 때 항상 이승만의 이름을 좌장(座長)으로 올렸더군요.
 
  “이승만과 김구는 미국과 중국에서 각각 귀국했는데 둘이 합치게 된 계기는 좌익이 찬탁(贊託)으로 돌아서면서부터였어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좌익들이 1946년 1월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잖아요. 찬탁과 반탁(反託)으로 나눠질 때 이승만과 김구가 반탁으로 힘을 합치게 된 거죠.”
 
  ― 2권 중간까지만 해도 김구는 우익 인사로 분류되다가 어느 순간 돌아섰더군요.
 
  “김구는 한국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어요. 미소공동위원회가 3개월 만에 파탄 나자 김구는 계속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직접 언급했어요. 북한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항하는 자율적 정부가 남한에 수립되어야 한다는 이승만의 생각이 공식화되는 순간이었죠. 이후 미소공위가 다시 재개되었다가 또 파탄 나면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총회 의제로 넘겼어요. 이후 이승만은 유엔으로 가고 김구는 계속 임시정부 법통을 주장하다가 북한하고 합작한 거죠.”
 
  ― 김구는 왜 그렇게 임시정부를 주장했을까요.
 
  “자신이 임시정부 대표였으니까요. 호형호제했지만 김구가 이승만을 위해 넘버2 자리를 받아들일 사람은 절대 아니죠. 자신이 넘버1을 하려면 임시정부 봉대론(奉戴論), 임시정부 법통론을 계속 주장하고 그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길 원했죠. 그건 김구의 희망사항일 뿐이었죠.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요.”
 
 
  “지금이 더 심하죠”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이승만과 ‘생각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공개 발언을 여러 번 했던 김구는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이후 결별의 수순을 하나하나 밟았다. 그러다가 1947년 12월 2일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이 김구의 추종자들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이후 김구는 자유대한민국 건국의 첫 단추인 5·10 선거를 거부하고 북한을 방문한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소련에 직접 가서 담판하겠다면 모를까, 김일성을 백번 만나야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한탄했다.
 
  “지금 김구를 제대로 파헤친 책을 준비하는 분이 있어요. 곧 출간될 겁니다.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3권에도 김구가 성시백에게 포섭당하면서 북한과 결탁한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올 겁니다. 김구는 우파 인사였는데 이승만과 결별하자 북한이 접근했어요. 앞으로 김구에 대한 평가가 정확히 이루어져야 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남북을 분할 점령하기로 결정하자 소련은 김일성을 보내 북쪽을 단칼에 평정했다. 남쪽은 미군정이 좌우합작 정권을 만든다는 명분 아래 복잡다단한 절차들이 오가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했다.
 
  ―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과 이념이 맞는 북한으로 가면 깔끔할 텐데 왜 미군정하에서 온갖 술수를 벌이는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남한을 공산화해야 우리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니까 과업을 수행하느라 안 간 거죠.”
 
  ― 1947년에 서울중앙방송국(KBS) 직원 14명이 공산당에게 넘어가잖아요.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까요?
 
  “당연히 있죠. 당시와 다른 점은 그때는 그래도 검거를 했지만 지금은 수사도 안 하고 검거도 안 한다는 거죠.”
 
  ― 2권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단 3년간의 일을 기록한 건데 읽는 동안 이념 대립, 각종 갈등 때문에 머리가 아팠어요. 지금 우리나라도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운데 그때와 비교해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지금이 더 심하죠. 당시는 방송사의 일부 종사자가 좌익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종사자가 좌익인 방송사가 여럿 있잖아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기념사에서 건국의 기초가 되는 8가지 요소를 밝혔다. ‘민주의 실천, 민권과 자유, 자유의 인식, 자유와 반동(反動), 근로자 우대, 통상공업, 경제적 원조, 통일의 방략(方略)’을 내세우며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류석춘 교수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출발점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의 기본 운영 원리로 내세운 이승만이 1948년 국회, 헌법, 정부를 순차적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이란 새 나라를 세우면서부터’라고 기술했다. 아울러 ‘근대화, 항일, 반공’이라는 동력이 발전의 발판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전통국가를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한 ‘근대화’ 의지다. 둘째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추구한 ‘항일’ 의지다. 셋째는 소련 공산전체주의에 반대한 ‘반공’ 의지다. 이 세 가지 동력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오늘날 번영하는 대한민국은 결코 세워질 수 없었다.〉
 
  ― 건국의 기초 8가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근대화·항일·반공 세 가지 동력이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고 보나요?
 
  “박정희 대통령이 잘 이어받았죠. 국가 주도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자유시장경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일부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이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까지는 비교적 잘 이어졌다고 봐요. 민주화 이후에 많이 헝클어졌죠.”
 
 
  “윤 대통령, 강단 있게 나가야”
 
  ― 박정희 대통령은 4·19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개탄해 5·16을 일으켰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을 잘 이어간 것이 신기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비약적인 점프를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박 대통령은 쿠데타를 하고 온갖 혁명적인 일을 할 때 이승만이 세운 뼈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큰 정책 안에서 움직였지요. 국가가 주도적으로 경제 정책을 시행한 것이 많지만 지향하는 바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시장경제였어요. 만약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원칙을 마련해놓지 않은 상황에서 박정희가 권력을 잡았다면 어떤 방향으로 갔을지 알 수 없죠. 사회주의로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연구를 많이 하셨는데 두 분과 비교해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 평가한다면요?
 
  “외교, 특히 미국·일본과의 관계 복원을 어느 정도까지 한 건 잘했어요. 내치(內治)에 관해서는 기대에 못 미치죠. 구속되어야 할 사람들이 구속되지 않고 있잖아요. 사법부 수장(首長)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변명 같은 건 통하지 않아요. 내치를 제대로 못 해 총선에서 크게 지면서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어요.”
 
  ―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어떤 점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운영할 때 국민의 지지를 100% 받은 게 아니에요. 좌익들은 죽어라 반대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게든 헤쳐나갔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헤쳐나가는 걸 못 하는 것 같아요. 거대 야당 핑계 대지 말고 강단 있게 나가야 해요. 강단 있게 못 해서 선거에서 참패했잖아요. 이승만 대통령도 소수당일 때가 있었어요.”
 
 
  “유능한 정치인, 자기가 마이크 잡고 말 많이 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전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국민들을 말로 설득하려 애쓴 대통령이었다. 사진=조선DB
  ― 이승만 대통령은 설득도 하지만 제헌의회가 내각제로 기울려고 할 때 소리치고 나갔잖아요.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행동을 하고 결단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진 걸까요.
 
  “개인적인 역량이 탁월했던 거죠. 일종의 카리스마인데 그런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많은 지식인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실제 행동을 못 하거든요. 이승만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현실에서 집행되려면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가야 하는지를 알았어요. 사람들을 설득하고 반대파와 싸우고 내 얘기를 어떻게 관철시키겠다는 게 죽 연결돼요. 정치력을 갖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고 조직하고 적과 싸우고 경우에 따라 감옥에도 가고 엄청난 물리적 싸움을 하고 온갖 성명전을 다 벌이잖아요. 이승만 대통령만 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한국에 없었던 것 같아요. 뛰어난 능력을 정치적인 힘으로 활용했잖아요.”
 
  ― 정치인들이 그런 능력을 이어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능한 대통령은 자기가 마이크를 들고 말을 많이 해요. 이승만 대통령도 반민특위 사건이 터졌을 때 ‘반민특위는 이래서 문제다, 저래서 문제다’라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국민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6·3 항쟁 때 ‘학생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박 대통령이 말을 많이 했어도 결국 계엄령까지 갔지만.
 
  지금 윤석열 대통령은 마이크를 잡지 않잖아요.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이 고작이에요. ‘내 생각은 이러니 따라주세요’라는 설득을 아예 안 해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언론을 상대로 얘기를 엄청 많이 했어요. 언론의 문제점까지 다 얘기했어요.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언론을 기피하고 있어요.”
 
  ― 요즘 매체도 많고, 워낙 강해서 예전처럼 말하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예요.
 
  “할 말은 해야죠.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소신을 갖고 근거와 이유를 얘기해서 사람들이 ‘저 말이 맞구나’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해요. 그런데 아예 언론을 상대로 말을 안 해버리면 사람들이 따를 방법이 없잖아요. 언론을 상대로 회유와 설득, 온갖 걸 다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법적 절차까지도 집행되도록 해야 해요. 지금 언론이 제일 중요해요.”
 
 
  “이승만에게 감사해야”
 
  ― 앞으로 나올 3권까지 합쳐서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를 통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이승만 같은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 얘기를 하고 싶어요. 당장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일이 뭔지, 미리 준비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어요. 오히려 미래 세대를 착취하려고만 해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전 국민에게 25만원씩 뿌리자는 건 미래 세대한테 빚을 넘기는 거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고 명확하게 얘기하고, 안 되는 이유까지 다 설명하고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얘기해야 해요. 윤 대통령도 25만원 주자는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진 않던데 그걸 명확하게 얘기하지 않아요.
 
  사안마다 국민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고, 꼭 필요한 건 설득하고, 그게 안 되면 싸움까지 하면서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해요. 이승만 대통령은 가장 힘들 때 헤쳐나갔잖아요. 괴롭히는 사람이 많았지만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다 싸웠어요. 준비가 많이 된 사람이어서 가능했겠죠. 옛날 관료들은 나라 전체를 보는 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자기 분야만 보는 것 같아요. 미래를 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2권은 이렇게 끝난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유라시아 대륙은 동유럽부터 동아시아까지 공산주의라는 붉은 가치로 물들고 있었다. 그 넓고도 긴 공간의 끝자락 한 귀퉁이에 이승만은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을 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의 문제를 내다보고 그들과 싸우며 그들을 막아선 이승만 덕택에 만들어진 기적이었다. 이승만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없었다. 이승만에게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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