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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좋다 / Busan is good! 부산이라 좋다

부산 속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국토의 최후 보루에서 세계박람회 준비하는 일류 도시로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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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머물렀다.
함흥에서 온 피란민이 우암동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기원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관저를 그대로 재현한 임시수도기념관
  소설가 김동리는 1·4후퇴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는 부산역 앞 중구 광복동의 한 다방 ‘밀다원’에서 벌어진 당대 예술가들의 고뇌를 담은 소설 《밀다원 시대》(1955)를 펴냈다. 이 소설에서 부산은 이렇게 묘사된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
 
  2023년 8월 18일, 경부선의 시작이자 종착점인 부산은 ‘피란수도’ ‘전시(戰時) 수도’가 된 지 73년 째를 맞았다. 정부는 6·25전쟁이 터지자 수도를 옮겨야 했다. 대전(6월 27일), 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다.
 

  ‘국토 수호의 최후 보루’가 된 부산은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서울로 환도(還都)할 때(1차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 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까지 두 차례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피란 정부는 당시 경남도청 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서구 부민동)를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삼아 국난을 극복해나갔다. 1925년에 만든 경남도청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였다. 임시정부가 입주해 ‘임시 중앙청’이라고도 불렀다. 경남도청(1925~1950년), 제1차 임시수도 정부청사(1950년 9월 29일~10월 27일), 제2차 임시수도 정부청사(1951년 1월 4일~1953년 8월 15일), 경남도청(1953~1983년), 부산지방검찰청(1984년 11월~2001년 9월)을 거쳐 현재는 동아대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동아대 석당박물관을 나와 왼쪽 언덕길로 약 200m를 걸어 올라가면 ‘부산 경무대’로 표현했던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서구 부민동·현 임시수도기념관)가 나온다. 동서양의 양식을 혼합한 2층 목조 기와 건물로 1926년에 만들어졌다. 피란기에는 경남도지사 관사(1926~1950년)였던 이 곳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있는 서양식 응접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 지도부가 이곳에서 국정과 외교를 논했다.
 
  대통령 내외와 수행비서들이 피란 생활을 한 이 관저는 1953년 환도 이후 1983년까지 경남도지사 관사였다.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도청을 옮기자 1984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관저 뒤편에는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있다.
 
  정부가 수도를 옮기자 피란민들도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1945년 광복 당시 인구 28만 명이었던 부산은 1950년 말 89만 명을 기록했다. 부산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집을 지을 만한 공간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부산의 적정 인구를 30만 명으로 봤다.
 
  집을 구하지 못한 피란민들은 깡통, 가마니, 판자 등을 이용해 산비탈이나 개울가에 움집과 판잣집을 지었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면 산비탈에 빼곡히 자리 잡은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부산의 지형과 전쟁, 피란민이 만들어낸 흔적이다.
 
 
  확인된 판잣집 2만8619호
 
  전쟁 직후 시작된 피란을 ‘1차 피란’, 1950년 10월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이북·이남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란(1·4후퇴)을 ‘2차 피란’이라 한다. 피란민 수는 1차가 약 150만 명, 2차가 약 480만 명이었다. 1차 피란민은 주로 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과 10월 19일 평양 탈환으로 정부가 환도(1차)하자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북에서 온 피란민의 대다수는 부산, 거제 등 피란지에 정착했다.
 
  부산시는 피란민이 몰리자 피란민 수용소를 마련했다. 영도구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남구 대연고개, 서구 남부민동, 사하구 괴정·당리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세웠지만, 피란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공터만 보이면 판잣집을 지었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동구 범일동, 초량동, 수정동, 중구 영주동 등지에 판잣집이 세워졌다. 피란을 온 남성은 주로 부둣가에서 하역 등의 육체노동을 했고, 여성은 자갈치시장·국제시장·부평시장 등지에서 어물을 나르거나 좌판을 벌였다.
 
  피란민들의 흔적이 남은 주거지로는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과 남구 우암동 소막(牛幕)마을 등이 있다. 아미동 비석마을의 출발은 공동묘지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민이 늘자 1892년 산비탈 빈민촌인 아미동에 약 8만㎡(2만5000평)의 일본인 공동묘지가 조성됐다. 약 9000기의 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수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아미동 비석마을과 우암동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사진=비짓부산
  피란수도 시기에는 빈번한 화재와 부산 시내 판잣집 철거 정책으로 수많은 피란민이 산으로 떠밀려 갔다. 일부는 아미동 공동묘지를 거처로 삼았다. 이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과 상석(床石)이 널려 있었다. 피란민들은 비석과 상석에다가 손에 잡히는 각종 자재를 덧대 집을 만들어 나갔다. 계단과 담벼락, 주춧돌, 옹벽으로 재활용된 비석과 상석이 마을 곳곳에 노출돼 있어 이곳이 공동묘지였음을 지금도 알려주고 있다.
 
  아미동 사람은 묘지 위에 집을 지은 미안함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면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을 더 올려놓는다고 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아미동 비석마을은 2022년 1월 부산의 첫 등록문화재가 됐다.
 
  일본은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에서 소를 수입했는데, 우암동 일대에는 소를 반출하기 위한 소검역소(우역검사소)와 소 2400마리를 수용하는 막사(40개 동)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우암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를 일본으로 이출(移出)한 곳이었다.
 
  막사 한 개 동은 폭 9m, 길이 42m의 목조 건물이었다. 소 막사의 한 칸 규격은 폭 2.5m, 길이 4m로 약 4평이다. 사람들이 이 한 칸 한 칸에 나무판을 벽 삼아 살다가 시간이 흘러 시멘트로 벽을 세우며 지금의 골목 형태를 갖추게 됐다. 그 흔적은 여전히 좁고 빽빽한 골목길로 남아 있다.
 
  〈황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도 이곳에 머물렀다. 우암동 일대에는 북한에서 피란 온 이들이 많았다. 함흥에서 온 피란민이 우암동에서 냉면집을 차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기원이다.
 
  소막마을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1919년 북한에서 동춘면옥으로 시작해 흥남철수 후 우암동에 자리 잡은 내호냉면이다. 10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이곳에서 부산 최초의 밀면이 만들어졌다. 당시 냉면의 원재료인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미국의 원조 물품 중에 밀가루가 많았고, 메밀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지금의 밀면이 탄생했다.
 
 
  영도대교, 한국 최초의 연륙교
 
부산 남구 부경대에 있는 워커하우스. 사진=비짓부산
  1934년 11월에 개통한 영도대교는 육지(중구 남포동)와 섬(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한국 최초의 연륙교이자 동양 최대의 도개교였다. 영도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선(渡船)으로 하루 평균 1만 명이 육지와 섬을 오갔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현인도 영도에서 태어났다. 급히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이들은 헤어지면서 훗날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부산에서 서로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곳이 영도다리였기 때문이다. 2013년 새롭게 단장한 영도대교는 총길이가 214.6m, 폭이 25.3m이다.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영도다리 한쪽을 들어 올리기 위해 사이렌이 울리고 주변 교통이 통제된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릴 때면 ‘굳세어라 금순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옛 노래가 흘러나온다.
 
  73년 전, 낙동강까지 밀려난 국군과 유엔군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두고 전투를 벌일 때 그 전투를 지휘했던 건물이 아직도 부산에 남아 있다.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Harris Walker)의 이름을 딴 ‘워커하우스(Walker House·현 부경대·남구 대연동)’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워커 장군은 당시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 지휘본부를 1950년 9월 6일 부산수산전문대학(현 부경대)으로 옮겼다. 워커하우스는 18일간 미 8군의 지휘본부로 활용됐고 사람들은 ‘돌집’이라고 불렀다. 바닷가에서 자연석을 모아 콘크리트와 섞어 벙커 모양으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1995년 개· 보수를 한 이 건물은 현재 학생들의 배를 채워주는 학생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4년 개장한 부산시민공원(부산진구 범전동)은 캠프 하야리아(Camp Hialeah)가 있던 곳이다. 하야리아 부지는 부산의 도심인 서면과 인접해 있으며 면적은 54만3360㎡(약 16만 평)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마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시설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고는 미 극동사령부 산하의 부산기지사령부가 됐다.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주 하야리아시(市)에서 부대 명칭을 따왔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부대로 활용됐고, 2006년 8월 하야리아 부대 폐쇄가 결정되자 부산시는 6679억원을 들여 47만749㎡(약 14만 평) 규모의 공원을 조성했다.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 사진=조선DB
  남구 대연동에는 고마운 나라의 고마운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이곳은 1951년 1월 18일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한 유엔기념공원(UNMCK)으로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1951년 4월 묘지가 완공된 후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이곳으로 왔다. 현재 11개국 2320구의 유해가 이 곳에 있다.
 
  기념공원에 들어서면 공동묘지라는 인상보다 경건하게 잘 정돈된 정원에 온 느낌이다. 공원 관계자는 “이곳이 묘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오히려 더 화려하게 조경을 한다”고 말했다. 미처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인지 형형색색의 꽃들로 묘역을 꾸몄다.
 
  우리나라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유엔기념공원 일대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聖地)로 지정했다.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하고 유엔 총회에서 결의문 제977(X)호로 채택했다. 1974년부터는 한국을 포함해 전사자가 안장된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가 관리를 맡고 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전쟁고아의 아버지’ ‘부산시민들의 은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리처드 위트컴(1894~1982년) 예비역 육군 준장이 잠들어 있다. 위트컴 장군은 세계 1·2차대전에 참전하고 6·25전쟁 당시에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1월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자 군수창고를 개방해 2만3000여 명분의 식량과 의복 등을 이재민들에게 지원했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 메리놀병원 등 의료기관 건립은 물론 전후 재건을 지원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돕는 데 여생을 바쳤다. 장군은 89세의 나이로 영면할 당시 ‘한국에 머물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부인 한묘숙(1927~2017년) 여사와 함께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그는 2022년 11월 8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제1등급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부산시민들은 위트컴 장군을 추모하고 알리기 위해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부산 남구갑)과 함께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을 위한 시민위원회’를 조직해 동상 건립 모금 운동을 벌였다. 2022년 10월부터 ‘1인당 1만원씩 총 3억원’ 모금 활동을 벌여 8개월 만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다. 위트컴 장군을 기리는 조형물은 오는 11월 11일 남구 대연동 유엔평화공원에 들어선다.Ⓑ
 

  INTERVIEW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
 
  “‘피란수도부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이 있는 곳을 지역구로 둔 박수영(朴洙瑩·59·부산 남구갑)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1964년 부산 남구 문현동의 산동네 판자촌에서 태어났다. 박 의원은 당시 보통 부산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똑같이 겪었다. 겨울이면 판자 사이로 파고드는 살이 에일 듯한 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는 “부산이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유치하는 도시가 된 것은 부산시민의 땀과 노력,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며 “대한민국의 번영은 부산과 함께한다. 전쟁 당시에는 최후의 보루로서, 경제발전기에는 관문 도시로 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피란수도가 남긴 유산이 가득한 부산 남구를 찾는 이들에게 그가 추천하는 ‘박수영 남구 추천 코스’가 있다.
 
  “유엔기념공원 방문으로 시작합니다. 사전 예약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참배를 할 수 있습니다. 유엔기념공원 맞은편에는 유엔평화기념관이 있습니다. 6·25전쟁과 부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부경대에 있는 워커 장군 지휘소도 꼭 방문해보십시오. 시간이 되면 남구청과 용호동 일대도 좋습니다. 6·25전쟁 당시 남구청 자리에는 미 제5전투비행단이, 용호동에는 미 해병 2사단이 주둔했습니다.
 
  우암부두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밀면집인 ‘내호냉면’이 있습니다. 밀면의 원조입니다. 꼭 맛보시고 우암동 ‘소막마을’도 들러보십시오. 아픈 과거를 함께 나누기 위해 만든 전시관도 있습니다. 우암부두는 2030부산세계박람회가 유치되면 전 세계 국가관이 설치되는 곳이므로 꼭 가셔야 합니다. 이곳은 유엔군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상륙할 때 꼭 거쳐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부산항대교와 영도, 오륙도를 바라보면 대한민국과 부산이 만든 기적에 절로 미소가 나올 겁니다.”
 
  박수영 의원은 위트컴 장군이 지난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을 수 있도록 윤석열 대통령에게 앞장서 건의했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에도 앞장섰던 그는 모금 운동과 관련해 일화를 들려줬다.
 
  “부산의 한 기업가가 동상 건립에 필요한 3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혀오셨어요. 종일 고민한 끝에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부산역 대화재 당시 3만 명의 이재민을 도와주신 위트컴 장군의 뜻을 기려 3만 명의 부산시민이 십시일반 1만원씩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의원은 ‘피란수도부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데 앞장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부산에 대한 단순 홍보 차원을 넘어 부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전 세계에 피란수도부산의 의의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아주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며 분야별 전문가와 힘을 합쳐 부산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원장직도 맡은 박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지방시대를 위해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권을 수도권 버금가는 성장축으로 발전시키겠습니다. 2030부산세계박람회는 부산의 재도약, 부산 경제 발전의 동력이 돼 지방시대를 앞당길 것입니다. 부산의 가장 큰 저력은 바로 시민과 바다입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도 적극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이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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