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소〉보다 인상적인 이중섭의 ‘그림 편지’
⊙ 장욱진, 향토적 소재로 표현 기법 실험해
⊙ ‘고려인 화가’ 변월룡, ‘평양’ 주제로 작품 여러 점 남겨
⊙ 거대 서사 다룬 전시지만, 화가 개인의 이야기 더 와닿아
⊙ 장욱진, 향토적 소재로 표현 기법 실험해
⊙ ‘고려인 화가’ 변월룡, ‘평양’ 주제로 작품 여러 점 남겨
⊙ 거대 서사 다룬 전시지만, 화가 개인의 이야기 더 와닿아
- 이중섭, 〈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 1954, 개인 소장
세찬 봄비가 내리던 5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이중섭(李仲燮·1916~ 1956년)의 〈황소〉(1953~54), 박수근(朴壽根·1914~1965년)의 〈골목 안〉(1950년대 후반), 김환기(金煥基·1913~1974년)의 〈산〉(1955), 이응노(李應魯·1904~1989년)의 〈군상〉(1986)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오픈 시각에 맞춰 소마미술관으로 달려갔다. 실제로 본 이들 작품은 기대만큼 아름다웠고, 명성에 걸맞은 아우라(Aura·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서려 있는 독특한 기운)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자의 눈이 가장 오래 머문 작품은, 다름 아닌 이중섭의 ‘그림 편지’였다.
‘지금 아고리(이중섭의 별명)는 온통 작품에 둘러싸여 온통 어지러운 방 한구석에서 그대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오.’ ‘그림을 팔아서 돈과 선물 많이 사 들고 갈 테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세요. パパ(파파) ㅈㅜㅇㅅㅓㅂ’
공산 치하 북한에서 재산을 몰수당한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避亂)했다. 전쟁이 본격화된 1951년 1월 이중섭과 가족들은 1.4평 남짓한 제주 서귀포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마음만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그는 제주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이렇게 썼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던 제주에서의 10개월은 내 생애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해 12월 일본으로부터 장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중섭은 한국에 남고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슴 절절한 이 그림 편지는 이때 쓰였다. 그들은 분명 부산항 부두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곧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이중섭의 눈에 비친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 황달, 정신병 등이 겹쳐 1956년 서울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그림 편지 앞에서 눈가가 촉촉해진 사람은 기자만이 아닌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관람객이 그림 편지 주위에 모여들어 한참 동안 편지를 곱씹고 있었다.
매직으로 ‘대충’ 끼적인 그림
“엄마! 나도 이것보단 잘 그릴 것 같아!” 장욱진(張旭鎭·1917~1990년)의 그림 앞에 선 한 꼬마 아이의 말이다. 주위 관람객들의 입에선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전시를 관람하면서도 모두가 마음속으론 이 꼬마 아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매직으로 ‘대충’ 끼적인 유리병과 태양, 사람 그리고 소나무 형상은 완성하기까지 길게 잡아야 1분쯤 걸렸을 것 같다.
대학원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한 기자는 미술학도로서 두 가지 말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첫 번째 말은 “이게 예술이라고?”다. ‘벽에 붙인 바나나’(마우리치오 카텔란)나 ‘7000그루의 참나무’(요셉 보이스) 같은 ‘해괴한’ 작품을 볼 때면 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지 늘 궁금했었다. 여전히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리진 못하지만, 더는 예술이 ‘미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번째는 “내가 그려도 이것보단 잘 그리겠네!”라는 말이다. 20세기 이전까지 ‘미적 가치’는 예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도 ‘아이디어’ 싸움이 됐다. 새로운 ‘아이디어’만 있으면 그 자체로 예술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장욱진의 그림을 다시 보면 그의 실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매직으로 ‘대충’ 그린 그림은 이전까지 국내 화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흡사 ‘데칼코마니(유리판이나 종이 등에 물감을 칠하고, 다른 종이 등을 덮어 누르거나 문지르고 떼어내는 미술 기법)’를 보는 듯 화면의 좌우를 균형 있게 맞춘 구도 또한 이전까지 없었다. 이처럼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면서도 장욱진은 문인화나 민화 속 도상들을 즐겨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선비, 아이, 나무, 고향 마을 등 향토적 소재들이 등장한다. 그의 그림이 친숙해 보이는 이유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많은 사람은 김환기를 ‘항아리 작가’라고 부른다. 매일같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하고 감탄하며 항아리를 주제로 작품 여러 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자는 김환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포도’가 떠오른다. 역시 가슴 절절한 사연 때문이다. ‘참, 포도를 보면, 포도를 먹으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미국 뉴욕에 홀로 머물던 김환기는 1963년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김환기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김환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내 김향안(1916~2004년·시인 이상의 전 부인)밖에 없었다. 김향안은 남편의 성공을 돕기 위해 남편보다 1년 앞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김향안은 먼저 불어를 배운 뒤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입학해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김환기가 그림을 완성하면 김향안은 그의 첫 번째 평론가가 되어주었다.
고된 작업과 학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탁자 위 잘 익은 포도는 둘에게 무척이나 달콤했으리라. 둘은 살아생전 파리를 많이 그리워했다. 뉴욕의 쓸쓸한 방에서 포도를 맛본 김환기가 김향안과 함께했던 파리를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김환기는 한국의 정서와 미를 탐구했다. 이 시기 김환기의 그림은 점점 추상화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항아리나 사슴, 매화와 같은 한국적 소재는 명확히 구분이 가능하다. 〈항아리〉(1956), 〈매화와 항아리〉(1957) 등이 이 시기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에는 파리 시절 제작한 작품은 빠져 있다. 그럼에도 〈산〉(1955)이나 〈돌〉 (1950년대)에서 충분히 김환기가 추구하던 ‘한국적 추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
“두메산골 내 고향은…” 기자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눈을 감으면 고향의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까지 저절로 그려진다고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차츰 쇠약해져 갔고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고려인 화가’ 변월룡(邊月龍·1916~1990년)도 평생을 고국을 그리워했다.
변월룡은 당대 소련 최고의 미술대학인 레핀미술대학의 부교수로 근무했다. 그러던 1953년 소련 당국의 지시로 평양미술대학으로 파견돼 학장을 역임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평양에 머문 시간은 1년 남짓했지만, 변월룡의 눈에 비친 북한 풍경은 평생의 영감이 됐다. 그는 고국의 문화와 사람들에게 큰 애정을 드러냈다. 〈평양 대동문〉(1953), 〈양지의 소녀〉(1953), 〈평양의 누각〉(1954), 〈조선의 모내기〉(1955) 같은 작품에서 당시 북한 주민들을 바라보던 변월룡의 따스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북한과 소련 사이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고, 북한은 변월룡을 추방한다. 동료와 제자들과 나누던 편지도 얼마 못 가 금지되고 만다.
소련으로 돌아온 변월룡은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한다. 소련 당국은 탁월한 실력을 갖춘 변월룡을 지원했는데 그 덕에 유럽과 극동 지방을 여행하며 풍경화 여러 점을 남길 수 있었다. 이후 변월룡은 레핀미술대학 정교수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가 그린 평양의 하늘은 온통 핑크빛 노을이다. ‘노을은 세상의 모든 그리움을 담고 있다’는 말처럼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든 저녁이면 변월룡의 향수병이 얼마나 독해졌을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자유로운 영혼’ ‘낭만주의 독신 여성’
‘어? 이거 피카소의 〈우는 여인〉 아냐?’
최욱경(崔郁卿·1940~1985년)의 〈화난 여인〉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작품 설명문을 보니 미국에서 유학을 막 시작했을 때 그린 작품이었다. 국내에서 아무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한들, 현대 미술의 본고장에서 경험한 ‘선진 미술’은 최욱경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최욱경은 특히 추상 표현주의의 선구자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의 작품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면서 차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간다. 〈줄타기〉(1977)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놀이인 ‘줄타기’를 최욱경만의 추상 표현주의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뉴멕시코주(州)에 머물 때 작업한 〈환희〉(1977)에서도 경쾌한 리듬감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최욱경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엿보인다.
최욱경에겐 ‘술과 담배를 즐기던 자유로운 영혼’ ‘낭만주의 독신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최욱경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화려한 색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사실 이번 전시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민족’ ‘분단’ ‘이주’ ‘세계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 서사를 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 기자는 이번 전시에서 또 다른 감명을 느꼈다. 바로 ‘화가 개인의 이야기’. 한국전쟁의 풍파 속에서, 분단의 비극 속에서 그리고 꿈을 찾아 떠난 이역만리 유학길에서 이들에게 ‘붓’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화폭 위에 붓을 세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나갈 때면 삶의 고단함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은 이들의 삶이 꽃이 되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세기를 살았던 이들의 감정이 지금까지 생생히 전해지는 까닭이다.⊙
‘지금 아고리(이중섭의 별명)는 온통 작품에 둘러싸여 온통 어지러운 방 한구석에서 그대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오.’ ‘그림을 팔아서 돈과 선물 많이 사 들고 갈 테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세요. パパ(파파) ㅈㅜㅇㅅㅓㅂ’
공산 치하 북한에서 재산을 몰수당한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避亂)했다. 전쟁이 본격화된 1951년 1월 이중섭과 가족들은 1.4평 남짓한 제주 서귀포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마음만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그는 제주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이렇게 썼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던 제주에서의 10개월은 내 생애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해 12월 일본으로부터 장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중섭은 한국에 남고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슴 절절한 이 그림 편지는 이때 쓰였다. 그들은 분명 부산항 부두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곧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이중섭의 눈에 비친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 황달, 정신병 등이 겹쳐 1956년 서울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그림 편지 앞에서 눈가가 촉촉해진 사람은 기자만이 아닌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관람객이 그림 편지 주위에 모여들어 한참 동안 편지를 곱씹고 있었다.
매직으로 ‘대충’ 끼적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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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욱진, 〈무제(Untitled)〉, 1975,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
대학원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한 기자는 미술학도로서 두 가지 말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첫 번째 말은 “이게 예술이라고?”다. ‘벽에 붙인 바나나’(마우리치오 카텔란)나 ‘7000그루의 참나무’(요셉 보이스) 같은 ‘해괴한’ 작품을 볼 때면 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지 늘 궁금했었다. 여전히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리진 못하지만, 더는 예술이 ‘미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번째는 “내가 그려도 이것보단 잘 그리겠네!”라는 말이다. 20세기 이전까지 ‘미적 가치’는 예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도 ‘아이디어’ 싸움이 됐다. 새로운 ‘아이디어’만 있으면 그 자체로 예술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장욱진의 그림을 다시 보면 그의 실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매직으로 ‘대충’ 그린 그림은 이전까지 국내 화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흡사 ‘데칼코마니(유리판이나 종이 등에 물감을 칠하고, 다른 종이 등을 덮어 누르거나 문지르고 떼어내는 미술 기법)’를 보는 듯 화면의 좌우를 균형 있게 맞춘 구도 또한 이전까지 없었다. 이처럼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면서도 장욱진은 문인화나 민화 속 도상들을 즐겨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선비, 아이, 나무, 고향 마을 등 향토적 소재들이 등장한다. 그의 그림이 친숙해 보이는 이유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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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기, 〈산〉, 1955,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
김환기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김환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내 김향안(1916~2004년·시인 이상의 전 부인)밖에 없었다. 김향안은 남편의 성공을 돕기 위해 남편보다 1년 앞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김향안은 먼저 불어를 배운 뒤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입학해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김환기가 그림을 완성하면 김향안은 그의 첫 번째 평론가가 되어주었다.
고된 작업과 학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탁자 위 잘 익은 포도는 둘에게 무척이나 달콤했으리라. 둘은 살아생전 파리를 많이 그리워했다. 뉴욕의 쓸쓸한 방에서 포도를 맛본 김환기가 김향안과 함께했던 파리를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김환기는 한국의 정서와 미를 탐구했다. 이 시기 김환기의 그림은 점점 추상화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항아리나 사슴, 매화와 같은 한국적 소재는 명확히 구분이 가능하다. 〈항아리〉(1956), 〈매화와 항아리〉(1957) 등이 이 시기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에는 파리 시절 제작한 작품은 빠져 있다. 그럼에도 〈산〉(1955)이나 〈돌〉 (1950년대)에서 충분히 김환기가 추구하던 ‘한국적 추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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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월룡, 〈평양 대동문〉, 1953, 국립현대미술관 |
변월룡은 당대 소련 최고의 미술대학인 레핀미술대학의 부교수로 근무했다. 그러던 1953년 소련 당국의 지시로 평양미술대학으로 파견돼 학장을 역임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평양에 머문 시간은 1년 남짓했지만, 변월룡의 눈에 비친 북한 풍경은 평생의 영감이 됐다. 그는 고국의 문화와 사람들에게 큰 애정을 드러냈다. 〈평양 대동문〉(1953), 〈양지의 소녀〉(1953), 〈평양의 누각〉(1954), 〈조선의 모내기〉(1955) 같은 작품에서 당시 북한 주민들을 바라보던 변월룡의 따스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북한과 소련 사이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고, 북한은 변월룡을 추방한다. 동료와 제자들과 나누던 편지도 얼마 못 가 금지되고 만다.
소련으로 돌아온 변월룡은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한다. 소련 당국은 탁월한 실력을 갖춘 변월룡을 지원했는데 그 덕에 유럽과 극동 지방을 여행하며 풍경화 여러 점을 남길 수 있었다. 이후 변월룡은 레핀미술대학 정교수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가 그린 평양의 하늘은 온통 핑크빛 노을이다. ‘노을은 세상의 모든 그리움을 담고 있다’는 말처럼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든 저녁이면 변월룡의 향수병이 얼마나 독해졌을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자유로운 영혼’ ‘낭만주의 독신 여성’
‘어? 이거 피카소의 〈우는 여인〉 아냐?’
최욱경(崔郁卿·1940~1985년)의 〈화난 여인〉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작품 설명문을 보니 미국에서 유학을 막 시작했을 때 그린 작품이었다. 국내에서 아무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한들, 현대 미술의 본고장에서 경험한 ‘선진 미술’은 최욱경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최욱경은 특히 추상 표현주의의 선구자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의 작품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면서 차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간다. 〈줄타기〉(1977)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놀이인 ‘줄타기’를 최욱경만의 추상 표현주의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뉴멕시코주(州)에 머물 때 작업한 〈환희〉(1977)에서도 경쾌한 리듬감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최욱경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엿보인다.
최욱경에겐 ‘술과 담배를 즐기던 자유로운 영혼’ ‘낭만주의 독신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최욱경은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화려한 색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사실 이번 전시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민족’ ‘분단’ ‘이주’ ‘세계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 서사를 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 기자는 이번 전시에서 또 다른 감명을 느꼈다. 바로 ‘화가 개인의 이야기’. 한국전쟁의 풍파 속에서, 분단의 비극 속에서 그리고 꿈을 찾아 떠난 이역만리 유학길에서 이들에게 ‘붓’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화폭 위에 붓을 세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나갈 때면 삶의 고단함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은 이들의 삶이 꽃이 되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세기를 살았던 이들의 감정이 지금까지 생생히 전해지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