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면 이겼다고 한잔, 지면 졌다고 한잔”
⊙ 김선웅은 인천 야구의 대부, 독문과 교수 김종은은 야구 논문 발표
⊙ ‘야구 덕후’ 김우정은 걸어 다니는 야구 기록 사전
⊙ 김선웅은 1936년 일본 고시엔 대회에 조선 대표로 출전
⊙ 1958년 미국 MLB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내한 경기 당시 찾아가
⊙ 김선웅은 인천 야구의 대부, 독문과 교수 김종은은 야구 논문 발표
⊙ ‘야구 덕후’ 김우정은 걸어 다니는 야구 기록 사전
⊙ 김선웅은 1936년 일본 고시엔 대회에 조선 대표로 출전
⊙ 1958년 미국 MLB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내한 경기 당시 찾아가
- 김종은 인천대 명예교수와 김우정씨.
기자는 작년 9월 17일부터 《월간조선》 인터넷 뉴스룸에 〈한국프로야구 출범 40주년 40장면〉을 40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나름 배고픈 시간여행자가 되어 1982~2022년까지의 프로야구 기록을 저인망 그물을 쳐놓고 둘러보았다.
기자의 야구 상식은 ‘몰상식’만 아닐 뿐이지 절대 전문가 수준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타격할 때 머리가 들리는 헤드업을 조심하라”거나 “저 투수의 커브 구질은 이런데, 데이터로 봐서는 어떤 상황에서 많이 던진다”고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의 야구 마니아가 수두룩하다.
고백하자면 기자는 이승엽과 박찬호, 이대호가 한때 몸 담았던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스의 전신(前身)이 긴데쓰 버팔로스라는 사실도 최근에 어쩌다 알게 되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그저 평범하달 수밖에 없다.
야구시즌 내내 야구에 빠져 산 것도 아니고, 주위에 야구 관심사를 털어놓은 적도 없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고 모구단 어린이 팬클럽 회원으로서 오지 않을 답장의 팬레터를 부치거나 극악무도했던 1980년대 어른들의 야구장 소동을 외면할 줄 아는 단지 이런 소심한 팬에 불과했다.
마니아의 ‘가르침’
어쨌든 나름 공들여 40년 한국 프로야구사를 정리하던 중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받고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연재 글을 모두 읽고서 각종 오탈자를 지적하고 관련 기록의 오류와 부가(附加) 기록을 꼼꼼히 덧붙인 글이었다. 오금이 저려왔다. 분명 말로만 듣던 야구 마니아의 ‘가르침’이었다.
이 마니아는, 예컨대 ‘1992년 선동열이 받은 1억2000만원 역시 당시 최고액이었다. 다만 어깨 건초염이 발병해 1승 2세이브에 그쳤다’고 쓴 글에 대해 ‘1승이 아니라 2승’이라고 지적했다.
또 작년 LG트윈스의 철벽 마운드를 이끈 케이시 켈리가 16승(다승 1위), 아담 플럿코가 15승(다승 2위)이라고 썼더니 부가 기록을 덧붙였다. ‘케이시 켈리는 16승이 모두 선발승이고 아담 플럿코의 15승 역시 모두 선발승인데 이는 키움 안우진과 선발승 공동 2위’라는 것이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 개의 태양 최동원 vs 선동열” 기사에서 롯데 레전드 최동원의 승수 옆에다 괄호로 선발승 기록을 부가했다.
〈최동원은 1987년을 89승(49선발승)으로 마친 후 11승을 더 보태는 데 무려 2년 반이 더 걸렸다. 최동원은 어느덧 전성기를 지나 ‘지는 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 7월 12일 OB베이스와의 경기에서 100승(55선발승)을 올렸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시작해 삼성에서 은퇴하는 통산 8시즌 동안 248경기에 등판해 1414.2이닝, 103승(56선발승) 26세이브 74패, 1019탈삼진, 방어율 2.46을 기록했다.〉
1987년 최동원이 거둔 89승 중 49승이 선발승이라는 기록은 어디서 찾은 것일까. 기자가 아는 야구 기록 사이트에는 이런 사실을 확인할 자료가 없었다. 아마도 KBO 내부 직원이 아닌지, 아니면 당대 현장에서 뛰었던 선수가 아닌지,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걸어 다니는 야구 백과사전’
이런 이유로 기자는 인천에 사는 ‘야구 덕후’ 김우정(金祐正·35)씨를 만나게 되었고, 더불어 그의 아버지인 김종은(金鍾銀·70) 인천대 명예교수(독문과)와 야구 명문 인천고의 뿌리인 인천상고[여기서 말하는 인상(仁商) 시절은 일제강점기 때다]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한 김 교수의 선친 김선웅(金善雄·1919~1978년)씨까지 알게 되었다. 3대 100년의 야구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했다. 개항도시 인천의 야구 역사의 뿌리를 전수(?)받았다고 할까. 인터뷰는 지난 1월 30일 김 교수의 인천 자택(부평구 산곡1동)에서 가졌다.
우정씨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동안이었다.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아버지 김 교수의 설명을 빌리자면 “야구사와 기록에 관한 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젊은 야구 덕후”란다. 다음은 우정씨와의 대화다.
“다섯 살 때부터 야구책을 접했어요. 한글도 야구책을 읽으며 혼자 깨쳤죠. 또 일본 프로야구와 야구 관련 서적을 읽으며 일본어도 혼자 터득했죠.”
― 직접 야구 할 생각은 안 했나요.
“야구를 좋아해도 직접 글러브를 손에 잡진 않았어요. 정확히는 야구보다는 야구 기록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할까? 기록에선 한국 야구 기록뿐만 아니라 일본(프로) 야구, 미국 MLB(메이저리그)의 세밀한 오류를 찾아내고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었어요.”
― 어디서 기록을 찾아 봅니까.
“국립중앙도서관에 찾아가 《한국야구사연표》 같은 관련 서적을 통해 오류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야구 관련 사이트나 야구 통계 기록을 살펴서 검증합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끼리 야구와 관련한 논쟁이 붙으면 으레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야구 기록에 있어서 절대 침범 불가의 해결사였다. 곁에 있던 김 교수가 혼잣말을 하듯 아들에 대해 말을 보탰다.
“사회성이 없어서…. 혼자만의 세계라고 할까.”
― 누구나 자기만의 세상을 추구하니까, 좋은 거죠.
우정씨의 말이다.
“지금은 없는 야구잡지 《주간야구》를 모두 모았어요. 이리로 잠깐 와보시겠어요?”
《주간야구》가 책장에 가득 꽂혀 있었다. 얼마나 읽었던지 죄다 너덜너덜했다.
《주간야구》는 1987년 3월에 창간한 야구 전문 주간지다.(그해 《조선일보》에 실린 잡지 광고문구가 ‘야구보다 더 재미있는 야구 전문지’였다.) 앞서 1986년 10월 《월간 프로야구》가 창간되었을 정도로 당시 야구잡지 인기는 시사잡지를 위협할 정도였다.
기자에게 우정씨가 건네준 《주간야구》 표지에 지금은 은퇴한 롯데 자이언츠 투수 윤학길의 얼굴이 보였다. 표지에 실린 기사 제목은 “윤학길 ‘목표는 20승’” “지옥의 8월, 살아남을 팀은?” “‘울고 싶어라’ 이만수” 등.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은 1986년 데뷔해 1997년 은퇴하기까지 통산 117승(94패 10세이브)을 거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100경기 완투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요즘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완투 100경기 중 이긴 경기가 74경기, 완봉승(점수를 1점도 안 주고 이긴 경기)이 20경기다. 전성기는 1987~89년으로 3년간 48승을 거뒀다. 1988년 18승(10패)이 커리어 하이였다.]
집을 둘러보니 야구잡지만이 아니라 이 방 저 방 야구책으로 가득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아직도 《주간야구》가 발행된다면 잡지 기자로 우리 아들이 딱인데….”
독문학 교수의 야구사 논문
우정씨는 자기소개 비슷한 말을 보탰다.
“저는 1988년 인천 출생입니다. 김포대 졸업이고요. 고정 직업은 아직 없어요. 야구 기록에 관심이 많고… 2015년에 출간된 《한화 이글스 때문에 산다》에 나오는 야구 기록을 감수한 것 이외에는 아직 공개적인 업적(?)은 없습니다. 혼자서 야구 기록을 점검, 기록하고 있어요.
아버지(김종은)는 야구와 직접 관련은 없는 독문학 교수셨지만, 조부(김선웅)의 영향을 받아 인천 야구사에 대한 논문을 4편이나 발표하셨죠.”
김 교수가 말을 받았다.
“야구 관련 집안입니다. 김선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고시엔(甲子園) 대회에 조선 대표 선수로 출전하셨고 해방 후 인천고 야구부 감독으로 인천 고교야구 전성기를 이룩하셨죠.”
독문과 교수가 야구 논문이라니…. 하지만 실제 쓴 논문을 기자에게 보여주었고, 기사를 쓰면서 틈틈이 읽어보았다. 김 교수는 자신의 야구 논문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4편의 야구 논문을 제본한 소책자를 기자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독어독문과 전공 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 고찰〉)도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야구박물관 마련되면 다 기증할 것”
김 교수의 말이다.
“지금까지 모아둔 야구와 관련한 자료들은 야구박물관이 마련되면 다 기증할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제가 《월간조선》 최장기 구독자였어요. 잡지 세일즈 하시던 분이 그걸 자랑으로 여겼는데 나중에 책이 너무 쌓여서 정기구독을 끊고 말았어요.”(이 말이 기자에게 아픔으로 다가와 저절로 ‘아이고~’라는 탄식을 뱉고 말았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신이 나 보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야구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집 넓은 마당(정미소)이 슬라이딩 연습하기 안성맞춤이었어요.
장훈, 백인천 같은 당대 야구 스타들을 보려고 서울까지 찾아간 기억도 나고, 미국 MLB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아버지랑 경기를 보러 갔었지요.”
그 당시 MLB 야구팀이 내한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서 《조선일보》 옛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놀랍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음은 1958년 10월 22일 자 신문 2면 “우리 야구 팀 선전(善戰)” 기사 중 일부다.
〈동업 한국일보사 주최로 미국 ‘푸로’야구‘팀’인 ‘쎈트루의스 카디날스’ 야구‘팀’과 이루어진 한미 친선 야구전은 21일 하오 3시39분부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관람하는 가운데 이 대통령 시구(始球)로서 ‘카디날스’‘팀’ 선공으로 개막되었는데 전서울‘팀’은 시종 선전분투하여 3대 0으로 ‘카디날스’‘팀’에게 석패하였다.
그런데 전서울‘팀’의 투수(投手)인 김양중(金洋中) 선수의 호투(好投)로 ‘카디날스’‘팀’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며 ‘카디날스’‘팀’은 원로(遠路)의 피로로 인함인지 ‘콘디숀’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김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셔서…, 이기면 이겼다고 한잔, 지면 졌다고 한잔…. 술로 인해 40대 후반부터 지병에 시달리셨어요. 그러다 59세에 돌아가셨죠.
저는 제물포고 시절부터 독일어를 좋아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했는데 석사를 마치고 인천대에 독문과가 생겼어요. 바로 교수가 되어서 유학을 안 갔지. 박사 학위는 교수가 되고 한참 후인 2000년에 땄어요.
아버지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어요. 야구 안 하실 땐 일본 야구책도 보시고, 문학서적도 즐겨 읽으셨지요.”
주(註): 인천 야구의 대부, 김선웅
인천 야구를 빛낸 인물사전인 《인천 야구 인명록(1899~2005)》에 김선웅의 활약상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김선웅(1919~4.3~1978.3.28.) 학력: 인천상업 24회(현 인천고), 위치: 외야수(우투우타), 팀: 전인천군(1946~50년), 조선운수(1948~50년), 인천고 감독(1947~72년). 경기 출전: 조선중등대표=고시엔 대회(1936년 일본 오사카), 대한야구협회 이사(1957년, 1959~62년). 주(註): 인천 야구의 대부 ▲인천상업(현 인천고)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장영식(張榮植)·김영택(金榮澤) 등과 고시엔 대회 조선중부 예선서 경성사범을 11-2, 2차 예선서 대구상업을 8-4로 물리치고 본선 대회 출전 ▲36년 제22회 고시엔 대회(36년 8월 12~20일 오사카 고시엔구장)에 인천상업 선수로 장영식과 함께 출전,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마지막 한국인 선수 ▲광복 후 인천상업(현 인천고) 야구부를 재건, 25년간 감독으로 재직 ▲1946년 박근식, 장영식, 유완식, 박현덕, 심연택, 한광희, 이연구, 한득봉, 김상준, 유인식 등과 전인천군을 결성 ▲1947년 제1회 전국지구대표전(7월 3~13일 서울운동장)서 전서울군을 5-4로 격파하고 우승 ▲1947년 제2회 월계기 도시대항(8월 7~12일 서울운동장)에 조선운수 좌익수로 출전, 금융조합을 3-2로 물리치고 우승 ▲감독으로 출전한 경기: (하략)〉
감독으로 출전한 경기와 우승한 대회는 너무 많아서 생략한다. 놀랍게도 《인천 야구 인명록(1899~2005)》의 표지인물이 바로 김선웅이었다.
김종은 교수는 1세기 인천 야구의 굵고 빛나는 뿌리를 더듬어나가다 가장 중요한 뿌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인천고였다.
“인고(인천고)의 원줄기는 인상(인천상업학교)인데 1895년 6월에 세워진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仁川支校)가 모태입니다. 그리고 인고의 또 다른 가지는 인천남공립상업학교(인천남상)인데 이 학교는 1887년 인천의 거류민단들이 세운 인천영학사(仁川英學舍)가 모체입니다. 1933년 ‘인상’으로 통폐합되죠.”
이 인상이 1951년 인천고로 교명(校名)이 바뀌었다.
인상이 야구로 이름을 날리던 무렵은 식민지 시절로 조선에 상업학교(경성상업, 대구상업, 신의주상업)라고는 몇 곳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경쟁률도 높았지만 주로 일본인 자제들이 다녔다. 더구나 학교를 다니며 야구부 활동을 겸하는 여유는 거의 일본인 학생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야구 기록: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
항구도시 인천은 야구를 도입한 시기나 활동 면에서 서울과 비교해 별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항만 부근에 밀집한 일본인 거류민단의 활동으로 오히려 인천이 서울보다 야구 도입 시기가 빨랐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온다.
김 교수는 인천영어야학회(인천영학사의 후신) 1학년생이던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 후지사와(藤山藤芳)의 1899년 2월 3일 자 일기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학생의 일기장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3시 근무가 끝난 다음 4시경부터 베이스볼이란 서양 공치기를 시작하고 5시경에 돌아와서 목욕탕에 갔다.’
1899년은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1872~1938년)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하기 시작한 1905년보다 무려 6년이나 앞선 때입니다.”
김 교수는 “14~15세 일본인 학생의 일기이나 이 땅에서 ‘야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이 시기(1899년 무렵)는 일본에 야구가 도입된 지 26년이 지난 때이고, 일본인들이 인천 지역 조계지로 이주해온 지는 16년 후이며, 1901년 서울 YMCA 총무를 맡은 질레트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하기 6년 전입니다.”
― 당시 일본인 학생이 즐겼다는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가 지금과 같은 유형의 야구였을까요.
“지금과 같은 유형의 정식 야구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단순한 캐치볼 이상의 야구가 구한말부터 먼저 인천에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은·우정 부자(父子)에 따르면 인천은 1876년에 이뤄진 개항의 관문으로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밀집하여 거주한 도시였단다. “일본의 야구 역사가 한국보다 30여 년이나 앞선 만큼 그 당시에 이미 상당 수준의 야구를 인천에서 즐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야구 도입이라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질레트에게 공(功)이 돌아가지만 한반도에 야구를 전면적으로 확산시킨 일은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 김 교수의 추가 설명이다. 한국인은 일본인이 야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지켜보고 야구를 배웠다는 것이다.
― 일제 시대 인상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또 김선웅 선생은 어떤 야구인입니까.
김 교수의 말이다.
“인상의 전신인 남상(인천남상)이 1932년 열린 제8회 조선신궁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막강한 팀이었어요. 이 남상이 이듬해 인상으로 통폐합되면서 전력이 배가(倍加)되었어요.”
고시엔으로 가는 길
인상은 1934~36년까지 조선신궁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1936년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인조차 ‘꿈의 제전’이라 일컫는 오사카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선수는 김선웅·장영식·김영택 등 3명에 불과했다. 김영택은 저학년이어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김선웅은 장영식과 더불어 좌익수 겸 8번 타자로 활약했다.
“고시엔 대회에 진출할 조선 야구팀을 선발하기 위해 전국 38개 팀이 출전했는데, 5개 지역에서 예선전(중부, 서부, 북부, 남부, 호남)을 거쳤어요.”
당시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그 열기는 지금의 전국 규모 대회와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5개 지역 예선전을 먼저 치른 후 여기서 1위를 차지한 5개 팀이 본선행을 놓고 다시 최종 예선을 치르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죠.”
1936년 7월 22일부터 31일까지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중부 예선전에서 인상은 경성공업을 17대 2, 경성상업을 4대 0으로 차례로 격파해 예선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경성사범을 11대 2로 물리쳐 조선 중부를 대표하는 팀으로 선발되었다.
“최종 예선에서 인상은 1차전에서 조선 서부 대표인 광성공보를 11대 6으로 눌렀어요. 준결승에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광주중학을 13대 1로 연파했지요. 결승에서 남부 대표인 대구상업마저 8대 4로 격파, 대망의 고시엔 본선행을 결정지었던 겁니다.”
김선웅과 장영식
― 김선웅 선수는 인상의 선수 명단에 분명 올라 있었겠지요?
“두 명의 걸출한 조선인 외야수 김선웅과 장영식을 비롯해 김영택의 이름이 올라 있었죠.”
― 한국인은 세 명밖에 없었나요.
“네, 안타깝게도. 김영택 선수의 경우, 명단에 올라 있었지만 2학년이어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어요.”
당시 인상의 주전선수는 8번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김선웅은 8번 타자 겸 좌익수로 장영식과 교대로 뛰었다. 일본인 학생에 비해 실력이 뒤처져서일까? 민족 차별이 내재된 것으로 짐작된다. 김 교수는 “김선웅과 장영식은 일본인들의 심한 텃세 가운데서도 교대로 좌익수로 활약했다”고 귀띔했다.
“이들은 인천 선수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꿈의 제전이라 불리던 고시엔 대회 본선에 나갔던 인물로 인천 야구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인상이 조선 대표팀 선수로 출전하기 사흘 전인 그해(1936년) 8월 9일 손기정과 남승룡 역시 일장기를 달고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출전하여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손기정의 메달 소식을 듣고 아버지 또한 그런 영광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꿈의 제전 ‘고시엔’에 조선 대표로 가다
인상은 고시엔 대회에 나가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대회에는 인상을 비롯해 일본 각 지역 대표로 22개 팀이 참가했으며, 그해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펼쳐졌다.
행운이 따라 1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인상은 2차전에서 헤이안(平安)중학교의 히로세(廣瀨)에게 3안타를 얻어맞는 등 철저히 눌리면서 17대 0으로 완패했다. 헤이안중은 결승까지 진출한 강호였기에 인상으로서는 역부족이 아닐 수 없었다. 그해 준우승을 차지한 헤이안중은 1938년 제24회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인천 ‘웃터골’에서 기껏해야 2000~3000명이 있는 데서 야구를 했는데 고시엔에 가니까 6만 관중이 함성을 질러대더라는 거예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휘두르고 아웃되고 그랬다고 하시더군요. 2회전에서 바로 탈락하고 일본 관광만 잘하고 왔다고 하셨죠.”
오사카의 거대한 구장에서 6만 관중의 일방적인 함성에 조선의 소년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던 것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대목을 떠올려보았다. 왠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비록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인상의 실력은 당시 대단한 것이었다. 1938년과 1939년, 2년 연속 고시엔 본선에 조선 대표팀으로 출전할 정도였으니. 김 교수의 말이다.
“안타깝게도 김선웅, 장영식 등 조선인 선수들이 활약한 대회는 1936년 대회뿐이었어요. 그해를 제외하고 인상 선수단은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졌거든요. 어쨌든 인상의 전통이 해방 이후 인천고 야구팀으로 그대로 이어져 1950년대 인천 고교야구의 전성기를 여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智將’ 김선웅
― 해방 후 김선웅은 어떤 일을 했나요.
“인상 야구단은 해방 후인 1946년 9월 재창단됐는데 당시 감독이 선친이신 김선웅이었습니다.(인상 야구단은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해체되고 만다. 고시엔 대회도 중단되었다.)
해방 후 아버지는 삼화정미소 전무로 일하셨어요.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인지 야구 감독은 무보수였죠.”
김선웅이 몸담고 있던 삼화정미소를 지금의 기준으로 보고 일개 도정공장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미소는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던 당시 조선인이 할 수 있었던 기업에 속하는 것이었다. 삼성의 이병철 역시 첫 사업이 정미소였다. 더구나 물류의 중심지인 인천에 위치할 정도의 정미소라면 규모 면에서 전국적인 것이었으리라.
김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천야구백년사편찬위가 만든 《인천야구 한 세기》라는 두꺼운 책을 펼쳤다. 얼마나 무거운지 한 손으로는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책은 2005년 발행되었다.
〈김선웅 감독의 지장(智將)다운 면은 재창단 후 곧바로 출전한 제1회 청룡기 대회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갓 출범한 팀에게 곧바로 상위 입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면 빠른 시일 내에 팀이 도약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중략) 그의 예상대로 일취월장한 인천상업의 실력은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2년 10월 제33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특히 초고교급 투수 서동준을 발탁해 그가 맹활약한 1952, 53년은 제33회 전국체육대회 우승(52년), 제5회 쌍룡기 대회 우승(53년), 제8회·9회 청룡기 대회 우승(53, 54년), 제34회 전국체육대회 우승(54년) 등의 위업을 일구었다. 사실상 전국대회 전관왕이 된 것이다.
이 정도의 결과는 김선웅 감독의 이후 화려한 전적에 비하면 겨우 전초전에 불과했다.〉(188쪽)
김선웅과 1950년대 인천 야구 전성기
6·25전쟁 직후여서 나라는 어수선했지만 인천고의 1950년대는 그야말로 야구의 황금기였고, ‘김선웅 감독’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이후 아버지는 우승을 밥 먹듯이 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기록이 있어요. 청룡기 대회(《조선일보》 주최)의 경우 연속 3연패하면 우승기를 영구 소장할 수 있는데, 2연패 후 라이벌 인천 동산고와 맞붙었어요.
인천을 대표하는 두 팀이 맞붙는 것이어서 인천 팬들은 좋기도 하면서도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난감했던 한판 승부였죠. 결국 동산고가 우승을 하면서 인고의 3연패를 막았습니다.”
심지어 동산고는 1955~57년까지 청룡기 3연패의 위업을 달성, 우승기(청룡기)를 영구 보관하게 되었다.
“운보 김기창(金基昶·1913~ 2001년) 화백의 그림에 자수를 놓아 만든 청룡기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 학생 야구 대회 우승의 상징물이었어요. 인고가 거의 손에 넣었다가 놓친 그 역사적인 우승기가 인천 동산고의 수중에 들어간 겁니다.”
이후 김선웅은 야구 행정가로 변신했다.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경기도 야구협회장을 역임한 것이다. 오랫동안 명목상 감독직은 유지했지만 대행 체제로 후배들에게 인고를 맡겼다고 한다.
다음은 《인천야구 한 세기》의 한 대목이다.
〈김선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78년, 뇌졸중으로 반신마비인 상태에서 당시 인천고 감독이었던 박정석을 불러 일본어 야구교본을 구술해 받아 적도록 했다.
야구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일제 시대부터 모아둔 일본 야구교본은 인고 감독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침서이자 선진야구를 인천고 야구부에 접목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이론 야구의 정립, 기본이 잘된 야구의 육성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야구의 철칙’이었던 만큼 인천고 후배에 대한 애정을 이러한 방법으로 마지막까지 표현한 것이다.
반신마비로 발음마저 어려운 상태에서 근 한 달간 박정석 감독에게 구술해 그의 남다른 후배 사랑을 느끼게 한 이 지침서는 그가 인천고 후배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교본은 안타깝게도 분실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또 하나 인천고 출신은 아니나 여러모로 인천고, 인천 지역 야구를 위해 공헌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김선웅의 맏형 김선영이다. 삼화정미소 사장으로 있으면서 동생 김선웅의 ‘야구사랑’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고, 그들 형제의 우애는 대단해 김선웅이 지병으로 타계한 그날 충격을 받고 그의 뒤를 밟았다. 김선웅의 장례식은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경기도야구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
원하지 않았으나 수많은 구단이 인천을 스쳐갔다. 김종은 교수는 인천을 거쳐간 모든 구단을 사랑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김종은 교수에게 있어 첫사랑이다. 밀렵꾼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잊을 수 없다.
“삼미 경기는 모든 경기를 다 본 것 같아요. 그땐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까요. 총 100게임으로 이뤄진 1983년 시즌에 너구리 장명부가 무려 60게임에 등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30승16패6세이브(26완투승)를 올린 기록이 떠오릅니다.
구위 자체가 뛰어났다기보다는 33세의 관록을 살려 절묘한 컨트롤과 체인지 오브 페이스, 타자와의 수 읽기 싸움에서 완전히 압도한 것이 원동력이었죠.”
장명부는 구도(球都) 인천의 야구 열기를 되살렸고 많은 관중을 끌어모아 삼미는 투자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83시즌에 장명부가 세운 기록은 최다 출장(60경기), 최다 선발(44경기), 최다 타자 상대(1712타석), 최다 투구 이닝(427과 3분의 1), 최다 투구 수(5886), 최다 완투승(26승) 등 초인적인 결과였는데 당시 시즌의 총 경기 수가 100경기인 걸 감안해도 거의 매일 등판한 바와 다름이 없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아요. 18연패의 치욕도 있지요. 1985년 3월 31일 롯데 박동수 투수에게 3대 0 완봉당할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대참사의 시발점이라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장명부는 시즌 최다 패전(25패)을 당해 불과 2년 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야 했어요. 그해 삼미는 4월 29일까지 꼬박 한 달 동안 18연패를 당하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4월 30일에 이르러 MBC청룡을 4대 0으로 누르고서야 지긋지긋하던 연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죠.
18연패의 사슬을 끊은 그날, 현장에 있었습니다. 마치 구단이 우승한 것처럼 모두들 기뻐했죠. 지는 데 익숙한 삼미가 이기니까…. 그런데 말이죠….”
“인천이라는 도시가 ‘모든 문명의 처음’”
― 그런데….
“5월 1일자로 삼미가 70억원에 청보로 매각이 된 겁니다. 청보 핀토스. 인천 야구팬들은 구단이 너무나 생소한 기업으로 넘어간 점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청보는 갓 창설한 청보라면의 홍보 활동에 야구단이 큰 도움을 주리라 믿었지만 라면 맛이 너무 없었어요. 양은 (기존 라면보다) 두 배인데 수프는 하나야. 그러니까 싱겁지. 야구장에서 두 개씩 무료로 나눠주던 ‘영라면’ ‘열라면’ ‘알자배기’ 등 새로 나온 라면들은 집에 가지고 가도 끓여 먹자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어요. 라면 홍보에 도움이 될까 하고 만든 청보 핀토스인데 연전연패하니까 뭐 ‘홍보’가 아니고 ‘공포’지.”
청보는 이후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로 이어졌고 이후 SK와이번스와 SSG랜더스로 바뀌었다. 유독 인천만 연고 구단이 40년 동안 여러 번 바뀌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김 교수와 우정씨의 같은 목소리다.
“SK를 끝으로 이제 더 이상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이 교체되지 않기를 인천 시민 모두가 그렇게 소망했었는데 또다시 SSG로 바뀌고 말았어요. 다시 한 번 빌어야지요. SSG에서 더는 바뀌지 말기를….”
두 사람은 SSG가 2022년 우승할 만큼 막강한 팀이라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내비쳤다. 아니, 그것보다 인천이란 도시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김 교수) 독문과 교수인 제가 야구 논문을 썼어요. 인천 야구를 총정리하는 논문이지요. 제가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모든 문명의 처음’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경인선 열차도 그렇고, 전화, 전신, 모든 제도가 다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인천을 서울의 위성도시처럼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끝에 가서는 인천을 떠나버립니다.”
인천 사람 별명이 ‘짠물’인 이유
“(우정) 야구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야구로 두각을 나타내면 서울의 중학교 교장이나 감독들이 와서 장학금 주고 다 데려갑니다.”
― 그런 현상은 꼭 인천만의 현상은 아니죠.
“(김 교수) 인천은 대한민국 모든 근대문명의 시발점이었지만 서울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일종의 삼투압 현상, 즉 문화 삼투압 현상 탓에 서울로 빨려 들어가 버렸어요.”
― 그렇군요.
“(김 교수) 인천의 야구세(勢)가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 언제냐? 경인고속도로가 개통(1968년 12월)되면서부터입니다. 이후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운행되면서 점점 인천 고유의 장점도 퇴색된 겁니다.”
― 너무 가까워 정체성 확립에 마이너스가 된 거네요.
“(김 교수) 인천 사람들 별명이 뭔지 아세요? ‘짠물’입니다. ‘인천 짠물’이라 부르지요.”
― 왜 그런가요.
“(우정) 인천 사람들이 서울에 흡수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짜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인천 사람이 인천 짠물이 된 거야. 인천 주안에 염전이 있어서 그 별명이 붙은 게 아니고.”
“인천 고유 ‘문화 인프라’ 마련하는 데 도움 됐으면”
― 1950년대 이름 높던 인천 야구가 SK, SSG 구단이 들어선 다음에 전성기를 보내고 있네요. 요즘 두 분 야구 볼 맛이 나겠어요.
“(우정) 인고가 청룡기 대회를 두 번 우승하고, 동산고가 3연패를 한 다음부터 오랜 침체기를 겪었어요. 백인천의 서울 경동고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서울로 넘어간 거예요. 그 후 몇십 년 동안 별로였어요. 삼미가 약했던 것도 선수 인재풀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 인천에서 야구를 잘하면 서울서 낚아채니까요.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 시절부터 시행된 지역 연고 선수 지정 선발 제도가 폐지된 것은 인천 야구를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어요. 인천 출신이 아닌 선수들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거지요.”
―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김 교수) 독문과 교수인 제가 인천 야구 논문을 쓴 것은 인천 고유의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쓴 겁니다. 다음에는 축구나 농구 등 다른 스포츠단의 인천 연고 현황 및 변천사 연구를 계획하고 있어요. 서울에 의한 일방적인 종속성에서 탈피해 인천 고유의 ‘문화 인프라’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덧붙여 (김우정씨를 쳐다보며) 아들이 그렇게 즐겨하는 야구 기록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자의 야구 상식은 ‘몰상식’만 아닐 뿐이지 절대 전문가 수준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타격할 때 머리가 들리는 헤드업을 조심하라”거나 “저 투수의 커브 구질은 이런데, 데이터로 봐서는 어떤 상황에서 많이 던진다”고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의 야구 마니아가 수두룩하다.
고백하자면 기자는 이승엽과 박찬호, 이대호가 한때 몸 담았던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스의 전신(前身)이 긴데쓰 버팔로스라는 사실도 최근에 어쩌다 알게 되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그저 평범하달 수밖에 없다.
야구시즌 내내 야구에 빠져 산 것도 아니고, 주위에 야구 관심사를 털어놓은 적도 없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고 모구단 어린이 팬클럽 회원으로서 오지 않을 답장의 팬레터를 부치거나 극악무도했던 1980년대 어른들의 야구장 소동을 외면할 줄 아는 단지 이런 소심한 팬에 불과했다.
마니아의 ‘가르침’
어쨌든 나름 공들여 40년 한국 프로야구사를 정리하던 중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받고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연재 글을 모두 읽고서 각종 오탈자를 지적하고 관련 기록의 오류와 부가(附加) 기록을 꼼꼼히 덧붙인 글이었다. 오금이 저려왔다. 분명 말로만 듣던 야구 마니아의 ‘가르침’이었다.
이 마니아는, 예컨대 ‘1992년 선동열이 받은 1억2000만원 역시 당시 최고액이었다. 다만 어깨 건초염이 발병해 1승 2세이브에 그쳤다’고 쓴 글에 대해 ‘1승이 아니라 2승’이라고 지적했다.
또 작년 LG트윈스의 철벽 마운드를 이끈 케이시 켈리가 16승(다승 1위), 아담 플럿코가 15승(다승 2위)이라고 썼더니 부가 기록을 덧붙였다. ‘케이시 켈리는 16승이 모두 선발승이고 아담 플럿코의 15승 역시 모두 선발승인데 이는 키움 안우진과 선발승 공동 2위’라는 것이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 개의 태양 최동원 vs 선동열” 기사에서 롯데 레전드 최동원의 승수 옆에다 괄호로 선발승 기록을 부가했다.
〈최동원은 1987년을 89승(49선발승)으로 마친 후 11승을 더 보태는 데 무려 2년 반이 더 걸렸다. 최동원은 어느덧 전성기를 지나 ‘지는 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 7월 12일 OB베이스와의 경기에서 100승(55선발승)을 올렸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시작해 삼성에서 은퇴하는 통산 8시즌 동안 248경기에 등판해 1414.2이닝, 103승(56선발승) 26세이브 74패, 1019탈삼진, 방어율 2.46을 기록했다.〉
1987년 최동원이 거둔 89승 중 49승이 선발승이라는 기록은 어디서 찾은 것일까. 기자가 아는 야구 기록 사이트에는 이런 사실을 확인할 자료가 없었다. 아마도 KBO 내부 직원이 아닌지, 아니면 당대 현장에서 뛰었던 선수가 아닌지,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걸어 다니는 야구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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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정씨가 보여준 야구잡지 《주간야구》. 너무 열심히 읽어서 잡지가 너덜너덜해졌다. |
우정씨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동안이었다.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아버지 김 교수의 설명을 빌리자면 “야구사와 기록에 관한 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젊은 야구 덕후”란다. 다음은 우정씨와의 대화다.
“다섯 살 때부터 야구책을 접했어요. 한글도 야구책을 읽으며 혼자 깨쳤죠. 또 일본 프로야구와 야구 관련 서적을 읽으며 일본어도 혼자 터득했죠.”
― 직접 야구 할 생각은 안 했나요.
“야구를 좋아해도 직접 글러브를 손에 잡진 않았어요. 정확히는 야구보다는 야구 기록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할까? 기록에선 한국 야구 기록뿐만 아니라 일본(프로) 야구, 미국 MLB(메이저리그)의 세밀한 오류를 찾아내고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었어요.”
― 어디서 기록을 찾아 봅니까.
“국립중앙도서관에 찾아가 《한국야구사연표》 같은 관련 서적을 통해 오류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야구 관련 사이트나 야구 통계 기록을 살펴서 검증합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끼리 야구와 관련한 논쟁이 붙으면 으레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야구 기록에 있어서 절대 침범 불가의 해결사였다. 곁에 있던 김 교수가 혼잣말을 하듯 아들에 대해 말을 보탰다.
“사회성이 없어서…. 혼자만의 세계라고 할까.”
― 누구나 자기만의 세상을 추구하니까, 좋은 거죠.
우정씨의 말이다.
“지금은 없는 야구잡지 《주간야구》를 모두 모았어요. 이리로 잠깐 와보시겠어요?”
《주간야구》가 책장에 가득 꽂혀 있었다. 얼마나 읽었던지 죄다 너덜너덜했다.
《주간야구》는 1987년 3월에 창간한 야구 전문 주간지다.(그해 《조선일보》에 실린 잡지 광고문구가 ‘야구보다 더 재미있는 야구 전문지’였다.) 앞서 1986년 10월 《월간 프로야구》가 창간되었을 정도로 당시 야구잡지 인기는 시사잡지를 위협할 정도였다.
기자에게 우정씨가 건네준 《주간야구》 표지에 지금은 은퇴한 롯데 자이언츠 투수 윤학길의 얼굴이 보였다. 표지에 실린 기사 제목은 “윤학길 ‘목표는 20승’” “지옥의 8월, 살아남을 팀은?” “‘울고 싶어라’ 이만수” 등.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은 1986년 데뷔해 1997년 은퇴하기까지 통산 117승(94패 10세이브)을 거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100경기 완투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요즘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완투 100경기 중 이긴 경기가 74경기, 완봉승(점수를 1점도 안 주고 이긴 경기)이 20경기다. 전성기는 1987~89년으로 3년간 48승을 거뒀다. 1988년 18승(10패)이 커리어 하이였다.]
집을 둘러보니 야구잡지만이 아니라 이 방 저 방 야구책으로 가득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아직도 《주간야구》가 발행된다면 잡지 기자로 우리 아들이 딱인데….”
독문학 교수의 야구사 논문
우정씨는 자기소개 비슷한 말을 보탰다.
“저는 1988년 인천 출생입니다. 김포대 졸업이고요. 고정 직업은 아직 없어요. 야구 기록에 관심이 많고… 2015년에 출간된 《한화 이글스 때문에 산다》에 나오는 야구 기록을 감수한 것 이외에는 아직 공개적인 업적(?)은 없습니다. 혼자서 야구 기록을 점검, 기록하고 있어요.
아버지(김종은)는 야구와 직접 관련은 없는 독문학 교수셨지만, 조부(김선웅)의 영향을 받아 인천 야구사에 대한 논문을 4편이나 발표하셨죠.”
김 교수가 말을 받았다.
“야구 관련 집안입니다. 김선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고시엔(甲子園) 대회에 조선 대표 선수로 출전하셨고 해방 후 인천고 야구부 감독으로 인천 고교야구 전성기를 이룩하셨죠.”
독문과 교수가 야구 논문이라니…. 하지만 실제 쓴 논문을 기자에게 보여주었고, 기사를 쓰면서 틈틈이 읽어보았다. 김 교수는 자신의 야구 논문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4편의 야구 논문을 제본한 소책자를 기자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독어독문과 전공 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 고찰〉)도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야구박물관 마련되면 다 기증할 것”
김 교수의 말이다.
“지금까지 모아둔 야구와 관련한 자료들은 야구박물관이 마련되면 다 기증할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제가 《월간조선》 최장기 구독자였어요. 잡지 세일즈 하시던 분이 그걸 자랑으로 여겼는데 나중에 책이 너무 쌓여서 정기구독을 끊고 말았어요.”(이 말이 기자에게 아픔으로 다가와 저절로 ‘아이고~’라는 탄식을 뱉고 말았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신이 나 보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야구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집 넓은 마당(정미소)이 슬라이딩 연습하기 안성맞춤이었어요.
장훈, 백인천 같은 당대 야구 스타들을 보려고 서울까지 찾아간 기억도 나고, 미국 MLB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아버지랑 경기를 보러 갔었지요.”
그 당시 MLB 야구팀이 내한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서 《조선일보》 옛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놀랍게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음은 1958년 10월 22일 자 신문 2면 “우리 야구 팀 선전(善戰)” 기사 중 일부다.
〈동업 한국일보사 주최로 미국 ‘푸로’야구‘팀’인 ‘쎈트루의스 카디날스’ 야구‘팀’과 이루어진 한미 친선 야구전은 21일 하오 3시39분부터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관람하는 가운데 이 대통령 시구(始球)로서 ‘카디날스’‘팀’ 선공으로 개막되었는데 전서울‘팀’은 시종 선전분투하여 3대 0으로 ‘카디날스’‘팀’에게 석패하였다.
그런데 전서울‘팀’의 투수(投手)인 김양중(金洋中) 선수의 호투(好投)로 ‘카디날스’‘팀’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며 ‘카디날스’‘팀’은 원로(遠路)의 피로로 인함인지 ‘콘디숀’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김 교수의 계속된 말이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셔서…, 이기면 이겼다고 한잔, 지면 졌다고 한잔…. 술로 인해 40대 후반부터 지병에 시달리셨어요. 그러다 59세에 돌아가셨죠.
저는 제물포고 시절부터 독일어를 좋아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했는데 석사를 마치고 인천대에 독문과가 생겼어요. 바로 교수가 되어서 유학을 안 갔지. 박사 학위는 교수가 되고 한참 후인 2000년에 땄어요.
아버지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어요. 야구 안 하실 땐 일본 야구책도 보시고, 문학서적도 즐겨 읽으셨지요.”
주(註): 인천 야구의 대부,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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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야구의 대부 김선웅(1919~1978) |
〈김선웅(1919~4.3~1978.3.28.) 학력: 인천상업 24회(현 인천고), 위치: 외야수(우투우타), 팀: 전인천군(1946~50년), 조선운수(1948~50년), 인천고 감독(1947~72년). 경기 출전: 조선중등대표=고시엔 대회(1936년 일본 오사카), 대한야구협회 이사(1957년, 1959~62년). 주(註): 인천 야구의 대부 ▲인천상업(현 인천고)에 재학 중이던 1936년 장영식(張榮植)·김영택(金榮澤) 등과 고시엔 대회 조선중부 예선서 경성사범을 11-2, 2차 예선서 대구상업을 8-4로 물리치고 본선 대회 출전 ▲36년 제22회 고시엔 대회(36년 8월 12~20일 오사카 고시엔구장)에 인천상업 선수로 장영식과 함께 출전,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마지막 한국인 선수 ▲광복 후 인천상업(현 인천고) 야구부를 재건, 25년간 감독으로 재직 ▲1946년 박근식, 장영식, 유완식, 박현덕, 심연택, 한광희, 이연구, 한득봉, 김상준, 유인식 등과 전인천군을 결성 ▲1947년 제1회 전국지구대표전(7월 3~13일 서울운동장)서 전서울군을 5-4로 격파하고 우승 ▲1947년 제2회 월계기 도시대항(8월 7~12일 서울운동장)에 조선운수 좌익수로 출전, 금융조합을 3-2로 물리치고 우승 ▲감독으로 출전한 경기: (하략)〉
감독으로 출전한 경기와 우승한 대회는 너무 많아서 생략한다. 놀랍게도 《인천 야구 인명록(1899~2005)》의 표지인물이 바로 김선웅이었다.
김종은 교수는 1세기 인천 야구의 굵고 빛나는 뿌리를 더듬어나가다 가장 중요한 뿌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인천고였다.
“인고(인천고)의 원줄기는 인상(인천상업학교)인데 1895년 6월에 세워진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仁川支校)가 모태입니다. 그리고 인고의 또 다른 가지는 인천남공립상업학교(인천남상)인데 이 학교는 1887년 인천의 거류민단들이 세운 인천영학사(仁川英學舍)가 모체입니다. 1933년 ‘인상’으로 통폐합되죠.”
이 인상이 1951년 인천고로 교명(校名)이 바뀌었다.
인상이 야구로 이름을 날리던 무렵은 식민지 시절로 조선에 상업학교(경성상업, 대구상업, 신의주상업)라고는 몇 곳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경쟁률도 높았지만 주로 일본인 자제들이 다녔다. 더구나 학교를 다니며 야구부 활동을 겸하는 여유는 거의 일본인 학생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야구 기록: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
항구도시 인천은 야구를 도입한 시기나 활동 면에서 서울과 비교해 별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항만 부근에 밀집한 일본인 거류민단의 활동으로 오히려 인천이 서울보다 야구 도입 시기가 빨랐을 것이라는 가설까지 나온다.
김 교수는 인천영어야학회(인천영학사의 후신) 1학년생이던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 후지사와(藤山藤芳)의 1899년 2월 3일 자 일기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학생의 일기장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3시 근무가 끝난 다음 4시경부터 베이스볼이란 서양 공치기를 시작하고 5시경에 돌아와서 목욕탕에 갔다.’
1899년은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1872~1938년)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하기 시작한 1905년보다 무려 6년이나 앞선 때입니다.”
김 교수는 “14~15세 일본인 학생의 일기이나 이 땅에서 ‘야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이 시기(1899년 무렵)는 일본에 야구가 도입된 지 26년이 지난 때이고, 일본인들이 인천 지역 조계지로 이주해온 지는 16년 후이며, 1901년 서울 YMCA 총무를 맡은 질레트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원들에게 야구를 보급하기 6년 전입니다.”
― 당시 일본인 학생이 즐겼다는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가 지금과 같은 유형의 야구였을까요.
“지금과 같은 유형의 정식 야구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단순한 캐치볼 이상의 야구가 구한말부터 먼저 인천에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은·우정 부자(父子)에 따르면 인천은 1876년에 이뤄진 개항의 관문으로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밀집하여 거주한 도시였단다. “일본의 야구 역사가 한국보다 30여 년이나 앞선 만큼 그 당시에 이미 상당 수준의 야구를 인천에서 즐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야구 도입이라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질레트에게 공(功)이 돌아가지만 한반도에 야구를 전면적으로 확산시킨 일은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 김 교수의 추가 설명이다. 한국인은 일본인이 야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지켜보고 야구를 배웠다는 것이다.
― 일제 시대 인상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또 김선웅 선생은 어떤 야구인입니까.
김 교수의 말이다.
“인상의 전신인 남상(인천남상)이 1932년 열린 제8회 조선신궁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막강한 팀이었어요. 이 남상이 이듬해 인상으로 통폐합되면서 전력이 배가(倍加)되었어요.”
고시엔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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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고시엔 대회 개막식 모습. 사진=인천시, 구글 |
“고시엔 대회에 진출할 조선 야구팀을 선발하기 위해 전국 38개 팀이 출전했는데, 5개 지역에서 예선전(중부, 서부, 북부, 남부, 호남)을 거쳤어요.”
당시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그 열기는 지금의 전국 규모 대회와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5개 지역 예선전을 먼저 치른 후 여기서 1위를 차지한 5개 팀이 본선행을 놓고 다시 최종 예선을 치르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죠.”
1936년 7월 22일부터 31일까지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중부 예선전에서 인상은 경성공업을 17대 2, 경성상업을 4대 0으로 차례로 격파해 예선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경성사범을 11대 2로 물리쳐 조선 중부를 대표하는 팀으로 선발되었다.
“최종 예선에서 인상은 1차전에서 조선 서부 대표인 광성공보를 11대 6으로 눌렀어요. 준결승에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광주중학을 13대 1로 연파했지요. 결승에서 남부 대표인 대구상업마저 8대 4로 격파, 대망의 고시엔 본선행을 결정지었던 겁니다.”
김선웅과 장영식
― 김선웅 선수는 인상의 선수 명단에 분명 올라 있었겠지요?
“두 명의 걸출한 조선인 외야수 김선웅과 장영식을 비롯해 김영택의 이름이 올라 있었죠.”
― 한국인은 세 명밖에 없었나요.
“네, 안타깝게도. 김영택 선수의 경우, 명단에 올라 있었지만 2학년이어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어요.”
당시 인상의 주전선수는 8번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김선웅은 8번 타자 겸 좌익수로 장영식과 교대로 뛰었다. 일본인 학생에 비해 실력이 뒤처져서일까? 민족 차별이 내재된 것으로 짐작된다. 김 교수는 “김선웅과 장영식은 일본인들의 심한 텃세 가운데서도 교대로 좌익수로 활약했다”고 귀띔했다.
“이들은 인천 선수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꿈의 제전이라 불리던 고시엔 대회 본선에 나갔던 인물로 인천 야구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인상이 조선 대표팀 선수로 출전하기 사흘 전인 그해(1936년) 8월 9일 손기정과 남승룡 역시 일장기를 달고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출전하여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손기정의 메달 소식을 듣고 아버지 또한 그런 영광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꿈의 제전 ‘고시엔’에 조선 대표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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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고시엔 대회 개막식에 입장하는 인천상업학교 선수단. 사진=김종은 |
행운이 따라 1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인상은 2차전에서 헤이안(平安)중학교의 히로세(廣瀨)에게 3안타를 얻어맞는 등 철저히 눌리면서 17대 0으로 완패했다. 헤이안중은 결승까지 진출한 강호였기에 인상으로서는 역부족이 아닐 수 없었다. 그해 준우승을 차지한 헤이안중은 1938년 제24회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인천 ‘웃터골’에서 기껏해야 2000~3000명이 있는 데서 야구를 했는데 고시엔에 가니까 6만 관중이 함성을 질러대더라는 거예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휘두르고 아웃되고 그랬다고 하시더군요. 2회전에서 바로 탈락하고 일본 관광만 잘하고 왔다고 하셨죠.”
오사카의 거대한 구장에서 6만 관중의 일방적인 함성에 조선의 소년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던 것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대목을 떠올려보았다. 왠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비록 예선에서 탈락했으나 인상의 실력은 당시 대단한 것이었다. 1938년과 1939년, 2년 연속 고시엔 본선에 조선 대표팀으로 출전할 정도였으니. 김 교수의 말이다.
“안타깝게도 김선웅, 장영식 등 조선인 선수들이 활약한 대회는 1936년 대회뿐이었어요. 그해를 제외하고 인상 선수단은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졌거든요. 어쨌든 인상의 전통이 해방 이후 인천고 야구팀으로 그대로 이어져 1950년대 인천 고교야구의 전성기를 여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智將’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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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고 야구 감독 시절의 김선웅(오른쪽) |
“인상 야구단은 해방 후인 1946년 9월 재창단됐는데 당시 감독이 선친이신 김선웅이었습니다.(인상 야구단은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해체되고 만다. 고시엔 대회도 중단되었다.)
해방 후 아버지는 삼화정미소 전무로 일하셨어요.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인지 야구 감독은 무보수였죠.”
김선웅이 몸담고 있던 삼화정미소를 지금의 기준으로 보고 일개 도정공장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미소는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던 당시 조선인이 할 수 있었던 기업에 속하는 것이었다. 삼성의 이병철 역시 첫 사업이 정미소였다. 더구나 물류의 중심지인 인천에 위치할 정도의 정미소라면 규모 면에서 전국적인 것이었으리라.
김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천야구백년사편찬위가 만든 《인천야구 한 세기》라는 두꺼운 책을 펼쳤다. 얼마나 무거운지 한 손으로는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책은 2005년 발행되었다.
〈김선웅 감독의 지장(智將)다운 면은 재창단 후 곧바로 출전한 제1회 청룡기 대회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갓 출범한 팀에게 곧바로 상위 입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면 빠른 시일 내에 팀이 도약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중략) 그의 예상대로 일취월장한 인천상업의 실력은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2년 10월 제33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특히 초고교급 투수 서동준을 발탁해 그가 맹활약한 1952, 53년은 제33회 전국체육대회 우승(52년), 제5회 쌍룡기 대회 우승(53년), 제8회·9회 청룡기 대회 우승(53, 54년), 제34회 전국체육대회 우승(54년) 등의 위업을 일구었다. 사실상 전국대회 전관왕이 된 것이다.
이 정도의 결과는 김선웅 감독의 이후 화려한 전적에 비하면 겨우 전초전에 불과했다.〉(188쪽)
김선웅과 1950년대 인천 야구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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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당시 《조선일보》 주최 청룡기 야구대회에 3연패해 동산고가 가져간 청룡기 우승깃발.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청룡 그림에 자수를 놓았다. 사진=조선DB |
“이후 아버지는 우승을 밥 먹듯이 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기록이 있어요. 청룡기 대회(《조선일보》 주최)의 경우 연속 3연패하면 우승기를 영구 소장할 수 있는데, 2연패 후 라이벌 인천 동산고와 맞붙었어요.
인천을 대표하는 두 팀이 맞붙는 것이어서 인천 팬들은 좋기도 하면서도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난감했던 한판 승부였죠. 결국 동산고가 우승을 하면서 인고의 3연패를 막았습니다.”
심지어 동산고는 1955~57년까지 청룡기 3연패의 위업을 달성, 우승기(청룡기)를 영구 보관하게 되었다.
“운보 김기창(金基昶·1913~ 2001년) 화백의 그림에 자수를 놓아 만든 청룡기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 학생 야구 대회 우승의 상징물이었어요. 인고가 거의 손에 넣었다가 놓친 그 역사적인 우승기가 인천 동산고의 수중에 들어간 겁니다.”
이후 김선웅은 야구 행정가로 변신했다.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경기도 야구협회장을 역임한 것이다. 오랫동안 명목상 감독직은 유지했지만 대행 체제로 후배들에게 인고를 맡겼다고 한다.
다음은 《인천야구 한 세기》의 한 대목이다.
〈김선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78년, 뇌졸중으로 반신마비인 상태에서 당시 인천고 감독이었던 박정석을 불러 일본어 야구교본을 구술해 받아 적도록 했다.
야구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일제 시대부터 모아둔 일본 야구교본은 인고 감독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침서이자 선진야구를 인천고 야구부에 접목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이론 야구의 정립, 기본이 잘된 야구의 육성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야구의 철칙’이었던 만큼 인천고 후배에 대한 애정을 이러한 방법으로 마지막까지 표현한 것이다.
반신마비로 발음마저 어려운 상태에서 근 한 달간 박정석 감독에게 구술해 그의 남다른 후배 사랑을 느끼게 한 이 지침서는 그가 인천고 후배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교본은 안타깝게도 분실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또 하나 인천고 출신은 아니나 여러모로 인천고, 인천 지역 야구를 위해 공헌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김선웅의 맏형 김선영이다. 삼화정미소 사장으로 있으면서 동생 김선웅의 ‘야구사랑’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고, 그들 형제의 우애는 대단해 김선웅이 지병으로 타계한 그날 충격을 받고 그의 뒤를 밟았다. 김선웅의 장례식은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경기도야구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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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9월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 일정표. 당시 일반석 가격이 2000원이었다. |
“삼미 경기는 모든 경기를 다 본 것 같아요. 그땐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까요. 총 100게임으로 이뤄진 1983년 시즌에 너구리 장명부가 무려 60게임에 등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30승16패6세이브(26완투승)를 올린 기록이 떠오릅니다.
구위 자체가 뛰어났다기보다는 33세의 관록을 살려 절묘한 컨트롤과 체인지 오브 페이스, 타자와의 수 읽기 싸움에서 완전히 압도한 것이 원동력이었죠.”
장명부는 구도(球都) 인천의 야구 열기를 되살렸고 많은 관중을 끌어모아 삼미는 투자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83시즌에 장명부가 세운 기록은 최다 출장(60경기), 최다 선발(44경기), 최다 타자 상대(1712타석), 최다 투구 이닝(427과 3분의 1), 최다 투구 수(5886), 최다 완투승(26승) 등 초인적인 결과였는데 당시 시즌의 총 경기 수가 100경기인 걸 감안해도 거의 매일 등판한 바와 다름이 없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아요. 18연패의 치욕도 있지요. 1985년 3월 31일 롯데 박동수 투수에게 3대 0 완봉당할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대참사의 시발점이라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장명부는 시즌 최다 패전(25패)을 당해 불과 2년 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야 했어요. 그해 삼미는 4월 29일까지 꼬박 한 달 동안 18연패를 당하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4월 30일에 이르러 MBC청룡을 4대 0으로 누르고서야 지긋지긋하던 연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죠.
18연패의 사슬을 끊은 그날, 현장에 있었습니다. 마치 구단이 우승한 것처럼 모두들 기뻐했죠. 지는 데 익숙한 삼미가 이기니까…. 그런데 말이죠….”
“인천이라는 도시가 ‘모든 문명의 처음’”
― 그런데….
“5월 1일자로 삼미가 70억원에 청보로 매각이 된 겁니다. 청보 핀토스. 인천 야구팬들은 구단이 너무나 생소한 기업으로 넘어간 점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청보는 갓 창설한 청보라면의 홍보 활동에 야구단이 큰 도움을 주리라 믿었지만 라면 맛이 너무 없었어요. 양은 (기존 라면보다) 두 배인데 수프는 하나야. 그러니까 싱겁지. 야구장에서 두 개씩 무료로 나눠주던 ‘영라면’ ‘열라면’ ‘알자배기’ 등 새로 나온 라면들은 집에 가지고 가도 끓여 먹자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어요. 라면 홍보에 도움이 될까 하고 만든 청보 핀토스인데 연전연패하니까 뭐 ‘홍보’가 아니고 ‘공포’지.”
청보는 이후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로 이어졌고 이후 SK와이번스와 SSG랜더스로 바뀌었다. 유독 인천만 연고 구단이 40년 동안 여러 번 바뀌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김 교수와 우정씨의 같은 목소리다.
“SK를 끝으로 이제 더 이상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이 교체되지 않기를 인천 시민 모두가 그렇게 소망했었는데 또다시 SSG로 바뀌고 말았어요. 다시 한 번 빌어야지요. SSG에서 더는 바뀌지 말기를….”
두 사람은 SSG가 2022년 우승할 만큼 막강한 팀이라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내비쳤다. 아니, 그것보다 인천이란 도시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김 교수) 독문과 교수인 제가 야구 논문을 썼어요. 인천 야구를 총정리하는 논문이지요. 제가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모든 문명의 처음’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경인선 열차도 그렇고, 전화, 전신, 모든 제도가 다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인천을 서울의 위성도시처럼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끝에 가서는 인천을 떠나버립니다.”
|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 小史 김종은 교수의 야구 논문 〈지역문화사 시각에서 본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의 변천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인천 연고 야구팀의 창단이 순탄치 않았던 이유는 우선 인천 출신으로서 프로야구에 관심이 있고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을 경영하는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던 점에 있었다. 유일하게 인천과 연고가 있는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이 프로야구 구단 창설에 관심을 보였으나 당시 국제적인 유류 파동으로 결국 야구단 창단을 포기하고 말았다. 엄격히 따져보면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의 모기업인 삼미, 청보, 태평양, 현대, SK 모두가 인천 지역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이들 기업 총수가 인천 출신도 아니었고 인천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인천과의 연관성을 굳이 찾아보자면 인천부두에 삼미해운 사무소가 있었고 수입된 목재를 바로 가공하는 삼미목재가 있었을 뿐이었다. 현대그룹 소속 인천제철 사원들이 프로야구 인천 개막전에 가끔씩 동원된 적도 있었다. 인천과의 관련성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인천 연고 야구팀의 반복된 구단 매각 프로야구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던 삼미그룹의 김현철 회장이 용단을 내려 삼미 슈퍼스타즈를 창단한 후 몇 년 터울을 두고 연쇄적으로 구단 매각이 반복되었다. 삼미, 청보, 태평양이 결국 구단을 매각하게 된 원인은 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인 근본 이유는 국내외 경제적인 여건 변화로 인한 모기업의 재무구조 악화, 전력의 열세로 인한 팀의 성적 부진, 그리고 이로 인한 관련 기업과 생산제품 이미지의 가치 하락과 구단 운영상의 만성적인 적자 때문이었다. 현대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1996년 창단 원년에 김재박 감독이 이끄는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1998년에는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막강한 전력을 가진 현대는 팀 성적도 최고였고 구단의 재무 능력도 최고였다. 문제는 현대가 인천을 지역 연고지로 삼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현대의 최종 목표는 인천의 영광이 아니라 ‘재계 선두 주자’라는 모기업 소유주의 뜻을 빛내줄 ‘국내 최고의 야구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고지를 서울로 옮겨야만 했다. 현대에 있어서 인천은 서울로 가기 위한 교두보나 임시 정거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기업이던 현대전자가 도산하면서 4차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불구, 2007년 말 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SK도 처음부터 인천을 지역 연고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KBO의 방침에 따라 현대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 임시로 수원을 연고지로 삼도록 결정되자, SK는 할 수 없이 인천을 연고지로 선택했다. 2000년 1월 초부터 3월 말까지 SK와 현대가 연고지로 서울을 두고 싸울 때 그 어느 쪽도 인천을 지역 연고지로 거론하지 않았다. 이때 인천 야구팬의 마음은 정말로 난감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다행스럽게도 SK가 막판에 인천 쪽으로 연고지를 급선회한 덕에 인천은 계속해서 자랑스러운 구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인천 야구팬들은 SK를 끝으로 이제 더 이상 교체되지 않기를 소망했지만 2021년 또다시 SSG로 바뀌고 말았다. 김 교수는 “미래의 일을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은 SSG를 끝으로 이제 더 이상 교체되지 않기를 인천 시민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
인천 사람 별명이 ‘짠물’인 이유
“(우정) 야구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야구로 두각을 나타내면 서울의 중학교 교장이나 감독들이 와서 장학금 주고 다 데려갑니다.”
― 그런 현상은 꼭 인천만의 현상은 아니죠.
“(김 교수) 인천은 대한민국 모든 근대문명의 시발점이었지만 서울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일종의 삼투압 현상, 즉 문화 삼투압 현상 탓에 서울로 빨려 들어가 버렸어요.”
― 그렇군요.
“(김 교수) 인천의 야구세(勢)가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 언제냐? 경인고속도로가 개통(1968년 12월)되면서부터입니다. 이후 1974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운행되면서 점점 인천 고유의 장점도 퇴색된 겁니다.”
― 너무 가까워 정체성 확립에 마이너스가 된 거네요.
“(김 교수) 인천 사람들 별명이 뭔지 아세요? ‘짠물’입니다. ‘인천 짠물’이라 부르지요.”
― 왜 그런가요.
“(우정) 인천 사람들이 서울에 흡수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짜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인천 사람이 인천 짠물이 된 거야. 인천 주안에 염전이 있어서 그 별명이 붙은 게 아니고.”
“인천 고유 ‘문화 인프라’ 마련하는 데 도움 됐으면”
― 1950년대 이름 높던 인천 야구가 SK, SSG 구단이 들어선 다음에 전성기를 보내고 있네요. 요즘 두 분 야구 볼 맛이 나겠어요.
“(우정) 인고가 청룡기 대회를 두 번 우승하고, 동산고가 3연패를 한 다음부터 오랜 침체기를 겪었어요. 백인천의 서울 경동고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서울로 넘어간 거예요. 그 후 몇십 년 동안 별로였어요. 삼미가 약했던 것도 선수 인재풀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 인천에서 야구를 잘하면 서울서 낚아채니까요. 프로야구 출범 초창기 시절부터 시행된 지역 연고 선수 지정 선발 제도가 폐지된 것은 인천 야구를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어요. 인천 출신이 아닌 선수들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거지요.”
―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김 교수) 독문과 교수인 제가 인천 야구 논문을 쓴 것은 인천 고유의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쓴 겁니다. 다음에는 축구나 농구 등 다른 스포츠단의 인천 연고 현황 및 변천사 연구를 계획하고 있어요. 서울에 의한 일방적인 종속성에서 탈피해 인천 고유의 ‘문화 인프라’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덧붙여 (김우정씨를 쳐다보며) 아들이 그렇게 즐겨하는 야구 기록과 관련한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