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생이라는 세 가지 증거, 몸에 있는 점과 일본어 실력,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
⊙ 나를 통해 오늘도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외할머니
⊙ 나를 통해 오늘도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외할머니
‘나는 외할머니의 환생이다’라고 꽤 어릴 적부터 생각했다.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몸에 있는 표식이다. 머리 속에 ‘666’이 새겨져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배꼽 옆 쪽에 엄지손톱만 한 반점(斑點)이 있다.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반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 엄마랑 똑같은 곳에 점이 있을 수가 있지. 신기하네.”
점도 유전되는 게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서민석 교수는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점은 몸의 어디에나 생길 수 있다. 우연히 같은 위치에 생긴 것일 뿐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외할머니와 같은 위치에 점이 있는 게 유전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K-장녀’
둘째, 일본어 실력이다. 나는 왜인지 일본어를 꽤 한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1년 남짓 배웠을 뿐인데 일본어는 머릿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급기야 일어일문학과 전공 수업인 일본 소설 번역 수업을 듣기도 했다. (기억을 헤집어보니 그 수업을 위해 스터디까지 결성해 끙끙대며 공부했던 것 같지만, 글의 맥락을 위해 후천적 노력도 타고난 거라 우겨보겠다.) 일본의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아라카와 시즈카의 공식 행사 통역을 즉석에서 맡기도 했다. (거절할 수 없어 했지만 비 오는 날 개 떨듯 떨었다는 건 비밀이다.)
나의 외할머니 김홍점 여사는 1931년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한중간에 태어나 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히 일본어는 잘했을 터다. 1945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했고,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시 14세 즈음이었던 외할머니를 일본인 선생 부부는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머리가 좋은 아이입니다. 일본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습니다. 일본으로 데려가게 해주세요.”
외할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겐 외증조모(약간 농담 같은 호칭이지만 표준어다) 되시는 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다. 김홍점 여사는 ‘집안의 살림 밑천’이라는 장녀였다. 아래로 동생이 4명이나 있었다. 학교 다니면서는 가사를 돕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든 생활 전선에 빨리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돼야 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걸 ‘K-장녀’라 표현한다.
학업을 마친 김홍점 여사는 전매청에 들어갔다. 담배와 홍삼 전매를 담당하던 정부기관으로 KT&G의 전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매청은 꽤 괜찮은 일자리였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전매청에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아직 자르지 않아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 있는 담배 개비들을 인민군 소년병이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외할머니는 스무 살 무렵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자신보다 스무 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다. 외할아버지는 북에서 월남했다. 서울에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에 정착했다. 결혼해 자식들까지 낳고 살았지만, 북한 정권의 핍박을 못 이겨 월남했다. 스무 살 어린 여성과 재혼한 외할아버지는 처가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자식의 숫자다. 외할아버지는 북에서 3남 1녀를 뒀고, 남한에 내려와 재혼해서 다시 3남 1녀를 얻었다. 캐나다로 이민 가신 작은 외할아버지는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북한을 방문해 가련한 조카들을 수소문해 찾아냈다. 나에겐 이복 외삼촌, 이모가 되는 그분들은 자신들을 두고 남한으로 간 외할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나의 어머니 역시 요리 솜씨가 꽤나 좋았다. 요리 솜씨는 어느 정도는 유전되는 것 같다. 나도 지금까지 집들이 2회와 홈파티 2회를 집밥으로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사업 실패 등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돈을 못 벌게 되자, 외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배추밭에서 도매로 배추를 떼어와 파는 일도 했는데, 좋은 배추를 알아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다만 돈 계산에는 약지 못했는지 같이 배추를 떼가는 사람들에게 번번이 이익을 뺏겼다고 한다. 나도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중고 녹즙기로 사기를 치는 인간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인간은 병아리 성별 감별기로 중고거래 사기를 친 적도 있었다. 천안경찰서의 총력 수사에도 이 잡범은 잡히지 않고 있다.)
외삼촌의 증언에 따르면, 외할머니는 손기술도 좋았다.
“가위가 부서지면 쇠를 버리지 않고 재활용해서 드라이버로 만들었을 정도였어.”
나도 손기술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파트 누전차단기를 1회 교체한 경력이 있다. 전파사에 수리 비용을 물었더니 출장비 포함 20만원을 달라고 하기에 누전차단기 부품을 사 왔다. 유튜브에서 전기기사 실습 동영상을 찾아내 3회 반복 시청 후 대범히 한 번에 교체에 성공했다. 속으론 벌벌 떨며 고무장갑을 두 겹이나 낀 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엄마와 라면
셋째, 무엇보다 외할머니와 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똑같은 사람을 무척 사랑했다는 점이다. 외할머니에겐 외동딸, 나에게는 엄마였던 사람.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제일 웃기고 낙천적이었던 사람.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자신이 얼마나 철없이 굴었는지, 그런 자신을 외할머니가 어떻게 지켜봐 줬는지 반복적으로 얘기하곤 했다. “그때는 어려운 살림이어서 그랬는지 라면이 귀했어. 아버지가 회사에서 간식으로 받은 라면을 안 먹고 두 봉지 가져오신 거야. 나를 제일 예뻐했으니까 아버지는 라면을 내 품에 안겨주셨지. 나는 엄마에게 지켜보기만 하라며 라면 두 봉지를 끓여 앉은자리에서 먹어버렸지 뭐야. 엄마는 우리 딸 잘 먹는다며 나를 보고만 있었어.”
누가 등짝을 맞았다거나, 하다 못해 손들고 벌이라도 섰다는 극적 서사가 없는 그 에피소드를 엄마는 기억나기로만 예닐곱 번 넘게 얘기했다. ‘옛날 라면이 더 맛있었다’는 요지의 연설 도중 한 토막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너의 외할아버지는 그다지 성실하지 못했던 것 같아’라는 인물 비평 중 뜬금없이 ‘그런데 라면은 자주 가져다주셨지’라며 시작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듭된 회상은, 외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해소하는 엄마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49세에 돌아가셨다. 암이었다. “원자력병원에 갔는데, 진료한 의사가 막 뭐라 했어. 왜 이제야 왔냐고, 손도 못 쓸 지경이라고. 이렇게 젊은 사람이 이리됐으니 어떡하냐고 한탄을 했어.” 엄마는 자주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마 역시 10여 년의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였던가, 사그라든 줄 알았던 엄마의 암이 또다시 재발했다는 걸 통보받은 날을 기억한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암 선고를 받은 날도, 두 번째 재발한 날도 엄마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지만, 그날은 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깨달았다. 그날 나는 자식으로서는 포기한 것 같다. 엄마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병과 맞서보려는 의지가 내 안에서 꺾여버렸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세포에 새겨진 외할머니의 영혼 덕에 버텨낸 게 아닐까.
그래서 외할머니의 환생인 게 진짜냐고? 나는 그렇게 믿지만, 과학자들은 다른 얘기를 할 거다. 외할머니를 한없이 그리워했던 엄마를 위로해주고 싶어 어렸던 내가 만들어낸 상상쯤이라고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외할머니가 묻어둔 금괴의 위치가 생각났다는 식의 감동적인 결말도, 아쉽지만 아니다.
나는 외할머니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그녀의 이야기는 엄마에게, 외삼촌들에게 전해 들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하나도 그립지 않다. 김홍점 여사는 내 안에 함께 있으니까. 나의 의식 속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낙관이 흐르고 있다면 그 시원(始原)은 아마 외할머니일 거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보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며, 좋은 사람들과 깊은 정신적 교류를 나누며, 나는 그녀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던 나의 외할머니는 오늘도 내가 읽는 책장을 함께 넘긴다. 어렸을 때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읽어보려 했다. 온 세상을 다 가보고 싶었다. 마흔이 된 나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포기나 체념이 아닌 또 다른 희망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언젠가 나의 생이 다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의 지평이 넓어질 거라는. 그게 나의 외할머니, 김홍점 여사가 내게 속삭여준 삶의 비밀이다.⊙
첫째, 몸에 있는 표식이다. 머리 속에 ‘666’이 새겨져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배꼽 옆 쪽에 엄지손톱만 한 반점(斑點)이 있다.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반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 엄마랑 똑같은 곳에 점이 있을 수가 있지. 신기하네.”
점도 유전되는 게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서민석 교수는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점은 몸의 어디에나 생길 수 있다. 우연히 같은 위치에 생긴 것일 뿐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외할머니와 같은 위치에 점이 있는 게 유전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둘째, 일본어 실력이다. 나는 왜인지 일본어를 꽤 한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1년 남짓 배웠을 뿐인데 일본어는 머릿속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급기야 일어일문학과 전공 수업인 일본 소설 번역 수업을 듣기도 했다. (기억을 헤집어보니 그 수업을 위해 스터디까지 결성해 끙끙대며 공부했던 것 같지만, 글의 맥락을 위해 후천적 노력도 타고난 거라 우겨보겠다.) 일본의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아라카와 시즈카의 공식 행사 통역을 즉석에서 맡기도 했다. (거절할 수 없어 했지만 비 오는 날 개 떨듯 떨었다는 건 비밀이다.)
나의 외할머니 김홍점 여사는 1931년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한중간에 태어나 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히 일본어는 잘했을 터다. 1945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했고,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당시 14세 즈음이었던 외할머니를 일본인 선생 부부는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머리가 좋은 아이입니다. 일본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습니다. 일본으로 데려가게 해주세요.”
외할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겐 외증조모(약간 농담 같은 호칭이지만 표준어다) 되시는 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다. 김홍점 여사는 ‘집안의 살림 밑천’이라는 장녀였다. 아래로 동생이 4명이나 있었다. 학교 다니면서는 가사를 돕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든 생활 전선에 빨리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돼야 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걸 ‘K-장녀’라 표현한다.
학업을 마친 김홍점 여사는 전매청에 들어갔다. 담배와 홍삼 전매를 담당하던 정부기관으로 KT&G의 전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매청은 꽤 괜찮은 일자리였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전매청에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아직 자르지 않아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 있는 담배 개비들을 인민군 소년병이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외할머니는 스무 살 무렵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자신보다 스무 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다. 외할아버지는 북에서 월남했다. 서울에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한에 정착했다. 결혼해 자식들까지 낳고 살았지만, 북한 정권의 핍박을 못 이겨 월남했다. 스무 살 어린 여성과 재혼한 외할아버지는 처가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자식의 숫자다. 외할아버지는 북에서 3남 1녀를 뒀고, 남한에 내려와 재혼해서 다시 3남 1녀를 얻었다. 캐나다로 이민 가신 작은 외할아버지는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북한을 방문해 가련한 조카들을 수소문해 찾아냈다. 나에겐 이복 외삼촌, 이모가 되는 그분들은 자신들을 두고 남한으로 간 외할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나의 어머니 역시 요리 솜씨가 꽤나 좋았다. 요리 솜씨는 어느 정도는 유전되는 것 같다. 나도 지금까지 집들이 2회와 홈파티 2회를 집밥으로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사업 실패 등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돈을 못 벌게 되자, 외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배추밭에서 도매로 배추를 떼어와 파는 일도 했는데, 좋은 배추를 알아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다만 돈 계산에는 약지 못했는지 같이 배추를 떼가는 사람들에게 번번이 이익을 뺏겼다고 한다. 나도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중고 녹즙기로 사기를 치는 인간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인간은 병아리 성별 감별기로 중고거래 사기를 친 적도 있었다. 천안경찰서의 총력 수사에도 이 잡범은 잡히지 않고 있다.)
외삼촌의 증언에 따르면, 외할머니는 손기술도 좋았다.
“가위가 부서지면 쇠를 버리지 않고 재활용해서 드라이버로 만들었을 정도였어.”
나도 손기술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파트 누전차단기를 1회 교체한 경력이 있다. 전파사에 수리 비용을 물었더니 출장비 포함 20만원을 달라고 하기에 누전차단기 부품을 사 왔다. 유튜브에서 전기기사 실습 동영상을 찾아내 3회 반복 시청 후 대범히 한 번에 교체에 성공했다. 속으론 벌벌 떨며 고무장갑을 두 겹이나 낀 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셋째, 무엇보다 외할머니와 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똑같은 사람을 무척 사랑했다는 점이다. 외할머니에겐 외동딸, 나에게는 엄마였던 사람.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제일 웃기고 낙천적이었던 사람.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자신이 얼마나 철없이 굴었는지, 그런 자신을 외할머니가 어떻게 지켜봐 줬는지 반복적으로 얘기하곤 했다. “그때는 어려운 살림이어서 그랬는지 라면이 귀했어. 아버지가 회사에서 간식으로 받은 라면을 안 먹고 두 봉지 가져오신 거야. 나를 제일 예뻐했으니까 아버지는 라면을 내 품에 안겨주셨지. 나는 엄마에게 지켜보기만 하라며 라면 두 봉지를 끓여 앉은자리에서 먹어버렸지 뭐야. 엄마는 우리 딸 잘 먹는다며 나를 보고만 있었어.”
누가 등짝을 맞았다거나, 하다 못해 손들고 벌이라도 섰다는 극적 서사가 없는 그 에피소드를 엄마는 기억나기로만 예닐곱 번 넘게 얘기했다. ‘옛날 라면이 더 맛있었다’는 요지의 연설 도중 한 토막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너의 외할아버지는 그다지 성실하지 못했던 것 같아’라는 인물 비평 중 뜬금없이 ‘그런데 라면은 자주 가져다주셨지’라며 시작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듭된 회상은, 외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해소하는 엄마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49세에 돌아가셨다. 암이었다. “원자력병원에 갔는데, 진료한 의사가 막 뭐라 했어. 왜 이제야 왔냐고, 손도 못 쓸 지경이라고. 이렇게 젊은 사람이 이리됐으니 어떡하냐고 한탄을 했어.” 엄마는 자주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마 역시 10여 년의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였던가, 사그라든 줄 알았던 엄마의 암이 또다시 재발했다는 걸 통보받은 날을 기억한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암 선고를 받은 날도, 두 번째 재발한 날도 엄마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지만, 그날은 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깨달았다. 그날 나는 자식으로서는 포기한 것 같다. 엄마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병과 맞서보려는 의지가 내 안에서 꺾여버렸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세포에 새겨진 외할머니의 영혼 덕에 버텨낸 게 아닐까.
그래서 외할머니의 환생인 게 진짜냐고? 나는 그렇게 믿지만, 과학자들은 다른 얘기를 할 거다. 외할머니를 한없이 그리워했던 엄마를 위로해주고 싶어 어렸던 내가 만들어낸 상상쯤이라고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외할머니가 묻어둔 금괴의 위치가 생각났다는 식의 감동적인 결말도, 아쉽지만 아니다.
나는 외할머니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그녀의 이야기는 엄마에게, 외삼촌들에게 전해 들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하나도 그립지 않다. 김홍점 여사는 내 안에 함께 있으니까. 나의 의식 속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낙관이 흐르고 있다면 그 시원(始原)은 아마 외할머니일 거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보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며, 좋은 사람들과 깊은 정신적 교류를 나누며, 나는 그녀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던 나의 외할머니는 오늘도 내가 읽는 책장을 함께 넘긴다. 어렸을 때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읽어보려 했다. 온 세상을 다 가보고 싶었다. 마흔이 된 나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포기나 체념이 아닌 또 다른 희망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언젠가 나의 생이 다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의 지평이 넓어질 거라는. 그게 나의 외할머니, 김홍점 여사가 내게 속삭여준 삶의 비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