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接賓客 奉祭祀와 집안 갈등과 비극 온몸으로 감싸 안아
⊙ 외삼촌이 나자 외할머니는 핏덩이 데려와 열세 살까지 키워
金演光
1962년생. 서울대 정치학과·同 대학원 졸업 / 《조선일보》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 역임 / 특임장관실 특임실장,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국민의힘 원내대표 비서실장, 국회 부의장 비서실장 역임
⊙ 외삼촌이 나자 외할머니는 핏덩이 데려와 열세 살까지 키워
金演光
1962년생. 서울대 정치학과·同 대학원 졸업 / 《조선일보》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 역임 / 특임장관실 특임실장,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국민의힘 원내대표 비서실장, 국회 부의장 비서실장 역임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가 나를 받아 안으셨다.
경북 문경군 산양면의 개성 고(高)씨 집성촌(集姓村). 외가 안채 마당에 두 평쯤 되는 작은 기와집이 있었다. 어머니는 혼사를 치르고 나서도 처녀 적 살던 그 별채에서 계속 살았다. 육군 초급 장교였던 아버지는 휴전선 인근의 임지와 처가를 오갔다.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장가간다는 말은 ‘처갓집에 간다’는 뜻이다. 경상도에는 남자가 결혼하면 처갓집에서 사는 풍속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신행 묵는다’는 말도 있다. 혼사를 치른 새색시가 자신의 집에서 살다가 시댁으로 넘어갈 때 쓰는 말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무얼 두서없이 서두르면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삼 년 신행 묵은 처자 횃대 불에 속옷 말려 입 듯하네.”
‘혼인하고 자기 집에 3년이나 머물던 새색시가 시댁으로 갈 준비를 하나도 해놓지 않아서, 새벽에 횃불을 켜서 속옷을 말려 입고 간다’, 그런 정도의 뜻이다.
외할머니는 파평 윤(尹)씨다. 함자는 말 두(斗), 기쁠 희(喜).
일제하에서 태어나셨고, 개성 고씨 집안으로 시집오셨다. 외할아버지 함자는 길 도(道), 기쁠 환(煥)이다. 외할아버지는 문경군청의 공무원이었다. 고등문관 시험을 본 고관은 아니고, 하위직 공무원이었다. 고위직이야 다 일본 사람들 차지였다.
두 분 사이에서 1939년 어머니가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읍내 문경군청과 가까운 곳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외할머니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그때였다고, 어머니는 기억했다.
“나는 읍내에 있는 호서남국민학교에 다녔지. 다른 아이들이 헝겊으로 된 책보를 매고 다닐 때 나는 가죽으로 된 니꾸사꾸(륙색)를 메고 다녔어요. 국민학교 3~4학년 때쯤 어머니하고 나는 본가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따로 읍내에서 사시게 됐지. 그때부터 어머니 고생이 시작됐고.”
외할머니는 맏며느리로서 본가의 큰 살림, 큰 농사일을 다 떠안았다. 외할아버지는 외지를 떠돌았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였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쓴 긴 행장(行狀)에서 외할머니의 한없는 부덕(婦德), 인고(忍苦)의 세월을 애달파하셨다.
부엌 문틀 위에 매달았던 왕소금 ‘봉다리’
내 어머니는 무남독녀(無男獨女)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낳은 후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고추를 떡하니 달고 있는 아들을 순산했을 때 외할머니의 기쁨이 오죽했을까? 맏며느리로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평생의 한(恨)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어린 아기의 고추를 열심히 들여다보던 외할머니는 아기의 몸에서 이상을 발견했다. 한쪽 고환이 다른 쪽보다 조금 작았던 것이다. 고심 끝에 외할머니는 민간에서 전해오는 비방(秘方)을 썼다.
부엌 문틀 위에 왕소금을 담은 무명 ‘봉다리’를 매달았다. 집 안 여인네들이 물동이를 지고 문지방을 넘어설 때 그 봉지가 물 항아리에 퐁당 들어가, 소금기가 물에 스며들게 했다. ‘소금 속의 나트륨 미네랄 성분이 고환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민간의 속설이 어떤 과학적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색 바랜 봉다리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외갓집 부엌 문틀에 매달려 있었다.
짝불알 소년은 두 살이 될 무렵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외가에서 백 리쯤 떨어진 경북 상주의 본가로 갔다. 거기서 친가 어른들께 첫인사를 올렸다.
우리 가족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부산으로 대구로 경북 영천으로 이사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딸과 외손자를 그리워하는, 기나긴 편지를 보내셨다.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걸 늘 소리 내어 내게 읽어주셨다. 그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내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 불연속선 어디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실아 몸 건강히 잘 있느냐, 광이 남매는 무탈하고…’
외할머니의 칼국수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여름방학·겨울방학을 외가에서 보냈다. 어머니가 미리 편지로 가는 날짜를 다 알려드렸지만, 외할머니는 버선발 차림으로 뛰어나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껌딱지처럼 외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외가의 사랑채 서가에는 한서(漢書)들이 빼곡했다. 모두 외증조부님이 소장한 책이었다. 중학교 들어가서 한자를 배운 뒤로 그 책들이 어떤 내용들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 서책 중에는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년)의 문집도 있었다. 문집의 첫머리는 귀신론(鬼神論)이었다.
조선 성리학이 사변(思辨)에 사변으로 기울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미수 허목은 서인(西人)의 영수(領袖)인 송시열(宋時烈)에 맞섰던 남인(南人)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글씨, 문장에 모두 능했고,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궁벽한 문경의 사가(私家)에 그의 전집이 보관된 이유는 우리 외가가 영남 남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갓 쓰고 하얀 도포 입은 할아버지들이 외증조부님의 사랑채로 왔다. 외할머니는 열댓 명이 넘는 유생들의 점심과 주안상을 마련해야 했다. 춘궁기(春窮期)를 겨우 넘긴 여름철, 그 시절 농촌에 대접할 게 무엇이 있었을까?
외할머니는 점심으로 칼국수를 많이 내셨다. 안동국수의 면발이 왜 그렇게 가느냐고? 밀가루 반죽을 많이 밀면 밀수록 국수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실처럼 가느다란 그 면발을 삶아 멸치 국물에 말아 냈다.
논이 없는 문경에서는 6월쯤이면 잘살든 못살든 깡보리밥에 열무김치가 전부였다. 그래도 사랑채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외할머니는 아껴둔 쌀을 꺼내, 조금이라도 이밥을 섞어드리려고 애썼다.
일제하에서도 ‘융희’ 연호 썼던 외증조부
외증조부님의 함자는 여름 하(夏), 수풀 림(林)이다. 외할머니는 시아버지를 이렇게 평하곤 했다.
“하림 어른이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으셨다. 아들 삼 형제에게 험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들들을 좀 호되게 키우셔야 했는데…”
몇 해 전 문경 지역 신문에 외증조부님 관련 기사가 하나 실렸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고씨 문중이 일제하에서 영모각(永慕閣)을 새로 지었다. 최근 영모각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됐다. 상량문에 1926년을 융희 20년으로 기록했다. 사라진 왕조의 연호를 고집했다.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꼿꼿한 선비정신을 보여준다.〉
외증조부님이 그 영모각을 새로 지을 때 감역(監役)을 맡으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토목공사의 감독인 셈이다. 문경 상주 인근에서 명망이 높은 한학자였다.
한없는 婦德을 갖추신 분
외할머니는 한없는 부덕(婦德)을 갖추신 분이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외손자의 입장에서 평하라면, 봉건적 유습에 짓눌려서 살았던 분이다.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는 기본이고, 집안의 갈등과 비극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안타깝고 애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외할머니는 평생 작은 동서와 함께 살았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작은 동생은 본처와 아들 딸을 버리고, 새살림을 차렸다. 본처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언감생심 이혼은 생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남편은 떠나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 외할머니의 작은 동서는 남매를 데리고 본가로 들어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작은 동서를 ‘작은 외할머니’, 아들과 딸을 ‘외삼촌’ ‘이모’라고 불렀다. 이런 기구한 가족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사춘기를 보낼 무렵이었다.
더 기구한 사연이 있다.
본처와 남매를 버린 외할아버지의 동생 분이 ‘작은댁’에게서 새로 남매를 얻었다. 그런데 그 작은댁이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 버려진 남매를 우리 외할머니가 거둬들이셨다.
이복형제 넷이서 한집에서 살았다. 그나마 본댁 남매는 엄마라도 있었지만, 다른 이복 남매는 우리 외할머니를 어머니로 여기고 살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서럽게 울었던 사람들은 그분들이다.
외삼촌
우리 외할아버지는 환갑이 넘으셔서 아들을 보셨다. 나의 진짜 외삼촌이다. 평생 한이셨던 가문의 대를 이으신 것이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지금 아들 보셔서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 아이 대학 가는 거나 보고 돌아가시겠어요?”
외할아버지는 우리 외삼촌이 아이 넷을 낳는 것을 보고 93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외삼촌이 나자 외할머니는 핏덩이를 데려와서 열세 살까지 키우셨다. 그러고 돌아가셨다. 건실한 농촌지도자인 외삼촌은 지난해 문경시 시의원이 됐다.
외할머니에 대한 가벼운 글을 쓰려다가 우리 집안의 내밀한 가족사를 다 털어놓게 됐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무에 그런 글을 쓰느냐’고 극구 말렸을 게 분명하다. 어쩌겠나, 이게 외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이고, 우리가 살아온 여정인 것을….⊙
경북 문경군 산양면의 개성 고(高)씨 집성촌(集姓村). 외가 안채 마당에 두 평쯤 되는 작은 기와집이 있었다. 어머니는 혼사를 치르고 나서도 처녀 적 살던 그 별채에서 계속 살았다. 육군 초급 장교였던 아버지는 휴전선 인근의 임지와 처가를 오갔다.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장가간다는 말은 ‘처갓집에 간다’는 뜻이다. 경상도에는 남자가 결혼하면 처갓집에서 사는 풍속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신행 묵는다’는 말도 있다. 혼사를 치른 새색시가 자신의 집에서 살다가 시댁으로 넘어갈 때 쓰는 말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무얼 두서없이 서두르면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삼 년 신행 묵은 처자 횃대 불에 속옷 말려 입 듯하네.”
‘혼인하고 자기 집에 3년이나 머물던 새색시가 시댁으로 갈 준비를 하나도 해놓지 않아서, 새벽에 횃불을 켜서 속옷을 말려 입고 간다’, 그런 정도의 뜻이다.
외할머니는 파평 윤(尹)씨다. 함자는 말 두(斗), 기쁠 희(喜).
일제하에서 태어나셨고, 개성 고씨 집안으로 시집오셨다. 외할아버지 함자는 길 도(道), 기쁠 환(煥)이다. 외할아버지는 문경군청의 공무원이었다. 고등문관 시험을 본 고관은 아니고, 하위직 공무원이었다. 고위직이야 다 일본 사람들 차지였다.
두 분 사이에서 1939년 어머니가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읍내 문경군청과 가까운 곳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외할머니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그때였다고, 어머니는 기억했다.
“나는 읍내에 있는 호서남국민학교에 다녔지. 다른 아이들이 헝겊으로 된 책보를 매고 다닐 때 나는 가죽으로 된 니꾸사꾸(륙색)를 메고 다녔어요. 국민학교 3~4학년 때쯤 어머니하고 나는 본가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따로 읍내에서 사시게 됐지. 그때부터 어머니 고생이 시작됐고.”
외할머니는 맏며느리로서 본가의 큰 살림, 큰 농사일을 다 떠안았다. 외할아버지는 외지를 떠돌았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였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쓴 긴 행장(行狀)에서 외할머니의 한없는 부덕(婦德), 인고(忍苦)의 세월을 애달파하셨다.
내 어머니는 무남독녀(無男獨女)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낳은 후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고추를 떡하니 달고 있는 아들을 순산했을 때 외할머니의 기쁨이 오죽했을까? 맏며느리로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평생의 한(恨)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어린 아기의 고추를 열심히 들여다보던 외할머니는 아기의 몸에서 이상을 발견했다. 한쪽 고환이 다른 쪽보다 조금 작았던 것이다. 고심 끝에 외할머니는 민간에서 전해오는 비방(秘方)을 썼다.
부엌 문틀 위에 왕소금을 담은 무명 ‘봉다리’를 매달았다. 집 안 여인네들이 물동이를 지고 문지방을 넘어설 때 그 봉지가 물 항아리에 퐁당 들어가, 소금기가 물에 스며들게 했다. ‘소금 속의 나트륨 미네랄 성분이 고환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민간의 속설이 어떤 과학적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색 바랜 봉다리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외갓집 부엌 문틀에 매달려 있었다.
짝불알 소년은 두 살이 될 무렵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외가에서 백 리쯤 떨어진 경북 상주의 본가로 갔다. 거기서 친가 어른들께 첫인사를 올렸다.
우리 가족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부산으로 대구로 경북 영천으로 이사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딸과 외손자를 그리워하는, 기나긴 편지를 보내셨다.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걸 늘 소리 내어 내게 읽어주셨다. 그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내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 불연속선 어디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실아 몸 건강히 잘 있느냐, 광이 남매는 무탈하고…’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여름방학·겨울방학을 외가에서 보냈다. 어머니가 미리 편지로 가는 날짜를 다 알려드렸지만, 외할머니는 버선발 차림으로 뛰어나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껌딱지처럼 외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외가의 사랑채 서가에는 한서(漢書)들이 빼곡했다. 모두 외증조부님이 소장한 책이었다. 중학교 들어가서 한자를 배운 뒤로 그 책들이 어떤 내용들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 서책 중에는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년)의 문집도 있었다. 문집의 첫머리는 귀신론(鬼神論)이었다.
조선 성리학이 사변(思辨)에 사변으로 기울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미수 허목은 서인(西人)의 영수(領袖)인 송시열(宋時烈)에 맞섰던 남인(南人)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글씨, 문장에 모두 능했고,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궁벽한 문경의 사가(私家)에 그의 전집이 보관된 이유는 우리 외가가 영남 남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갓 쓰고 하얀 도포 입은 할아버지들이 외증조부님의 사랑채로 왔다. 외할머니는 열댓 명이 넘는 유생들의 점심과 주안상을 마련해야 했다. 춘궁기(春窮期)를 겨우 넘긴 여름철, 그 시절 농촌에 대접할 게 무엇이 있었을까?
외할머니는 점심으로 칼국수를 많이 내셨다. 안동국수의 면발이 왜 그렇게 가느냐고? 밀가루 반죽을 많이 밀면 밀수록 국수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실처럼 가느다란 그 면발을 삶아 멸치 국물에 말아 냈다.
논이 없는 문경에서는 6월쯤이면 잘살든 못살든 깡보리밥에 열무김치가 전부였다. 그래도 사랑채를 찾아온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외할머니는 아껴둔 쌀을 꺼내, 조금이라도 이밥을 섞어드리려고 애썼다.
외증조부님의 함자는 여름 하(夏), 수풀 림(林)이다. 외할머니는 시아버지를 이렇게 평하곤 했다.
“하림 어른이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으셨다. 아들 삼 형제에게 험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들들을 좀 호되게 키우셔야 했는데…”
몇 해 전 문경 지역 신문에 외증조부님 관련 기사가 하나 실렸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고씨 문중이 일제하에서 영모각(永慕閣)을 새로 지었다. 최근 영모각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됐다. 상량문에 1926년을 융희 20년으로 기록했다. 사라진 왕조의 연호를 고집했다.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꼿꼿한 선비정신을 보여준다.〉
외증조부님이 그 영모각을 새로 지을 때 감역(監役)을 맡으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토목공사의 감독인 셈이다. 문경 상주 인근에서 명망이 높은 한학자였다.
외할머니는 한없는 부덕(婦德)을 갖추신 분이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외손자의 입장에서 평하라면, 봉건적 유습에 짓눌려서 살았던 분이다.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는 기본이고, 집안의 갈등과 비극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안타깝고 애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외할머니는 평생 작은 동서와 함께 살았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작은 동생은 본처와 아들 딸을 버리고, 새살림을 차렸다. 본처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언감생심 이혼은 생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남편은 떠나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 외할머니의 작은 동서는 남매를 데리고 본가로 들어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작은 동서를 ‘작은 외할머니’, 아들과 딸을 ‘외삼촌’ ‘이모’라고 불렀다. 이런 기구한 가족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사춘기를 보낼 무렵이었다.
더 기구한 사연이 있다.
본처와 남매를 버린 외할아버지의 동생 분이 ‘작은댁’에게서 새로 남매를 얻었다. 그런데 그 작은댁이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 버려진 남매를 우리 외할머니가 거둬들이셨다.
이복형제 넷이서 한집에서 살았다. 그나마 본댁 남매는 엄마라도 있었지만, 다른 이복 남매는 우리 외할머니를 어머니로 여기고 살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서럽게 울었던 사람들은 그분들이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환갑이 넘으셔서 아들을 보셨다. 나의 진짜 외삼촌이다. 평생 한이셨던 가문의 대를 이으신 것이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지금 아들 보셔서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 아이 대학 가는 거나 보고 돌아가시겠어요?”
외할아버지는 우리 외삼촌이 아이 넷을 낳는 것을 보고 93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외삼촌이 나자 외할머니는 핏덩이를 데려와서 열세 살까지 키우셨다. 그러고 돌아가셨다. 건실한 농촌지도자인 외삼촌은 지난해 문경시 시의원이 됐다.
외할머니에 대한 가벼운 글을 쓰려다가 우리 집안의 내밀한 가족사를 다 털어놓게 됐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무에 그런 글을 쓰느냐’고 극구 말렸을 게 분명하다. 어쩌겠나, 이게 외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이고, 우리가 살아온 여정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