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과목 수(秀)’, 엄마의 성적표 속 비밀
⊙ 내게는 엄마가 곧 외할머니이자 외갓집
봉달호
1974년생.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중퇴. 전남대 31대 총학생회장 / 북한전문매체 ‘데일리엔케이’ 논설실장, 대한상공회의소 북경사무소 연구위원 역임 / 저서 《매일 갑니다, 편의점》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 《힘들 땐 참치 마요》 / 現 GS25 편의점 점주
⊙ 내게는 엄마가 곧 외할머니이자 외갓집
봉달호
1974년생.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중퇴. 전남대 31대 총학생회장 / 북한전문매체 ‘데일리엔케이’ 논설실장, 대한상공회의소 북경사무소 연구위원 역임 / 저서 《매일 갑니다, 편의점》 《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 《힘들 땐 참치 마요》 / 現 GS25 편의점 점주
“엄마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단다.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 이 모양이니?”
친구는 이런 말을 숱하게 들으며 자랐다는데 우리 집에서는 이런 말이 필요 없었다. ‘증거’가 다 있었으니까.
어릴 적 우리 집엔 두툼한 앨범이 하나 있었다. 텔레비전 옆이나 화장대 위, 거실 탁자, 눈에 띄는 곳에 언제나 그 앨범이 있었다. 부모님 젊을 때 사진, 결혼사진, 우리 남매 돌사진 등은 여느 집 구성과 다르지 않은데, 앨범 중간에 ‘공문서’가 하나 끼여 있는 것이 유별났다. 엄마의 초등학교 시절 생활통지표였다. 전 과목 수(秀). 어떻게 이런 성적표가 있을까 싶은 성적표였다. 어느 법과대학 교수님처럼 위조하지는 않았을까, 좌우로 살피며 의심하곤 했다.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
엄마의 성적표 속 비밀
통지표 하단에는 담임선생님이 수기로 작성하는 종합의견란이 있었다. 그 또한 소름 돋았다. “대단히 훌륭합니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통솔력이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됩니다.”
열성 팬이 보내는 팬레터가 이 정도일까. 칭찬 일색. 스승의 기대와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이러니 꼭 엄마 자랑을 하는 것 같지만, 어릴 적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주눅 들었다. 똑같은 양식의 성적표인데 나의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적곤 했으니까.
“명랑하지만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고 산만합니다. 가정에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엄마의 친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가 잠시 맡겨놓고 간 생명체는 아닐까, 홀로 상상하곤 했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평상에 드러누워 까만 하늘을 향해 깜빡깜빡, 플래시 불빛을 흔들었다. 깜빡깜빡, 진짜 엄마를 찾았다. 엄마, 비행접시 타고 지나가다 내가 보이면 손이라도 흔들어줘.
엄마의 기죽이는 성적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엄마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을 맡았다. 이른바 ‘빽’ 있고 돈 있고 공부 잘하는 삼박자를 모두 갖춰야 될 수 있다는 그 회장님 말이다. 그런 ‘촉망받는’ 어린이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 분식집 주인장으로 떡볶이를 팔고 있으니, 성적표의 어린이가 정말 나의 엄마 맞을까, 나는 또 의심했다. 역시 나의 엄마 맞았다. 장순덕. 엄마 이름 세 글자가 반듯이 적혀 있었다. 초등학교 때 ‘대단히 훌륭한’ 학생이었던 나의 엄마는 나중에 어쨌기에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일까. 이번엔 그것을 의심했다. 아무래도 엄마가 외계인이 아닐까….
어느 집안이나 출생의 비밀 비슷한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비밀의 화원(花園)이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나는 줄곧 “외삼촌” “이모”라고 불렀던 어른이 사실은 친외삼촌, 친이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두 엄마의 외가 쪽 사촌이었다. 내게는 외가의 외가여서 외척이라 하기에도 촌수가 먼, 정확히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분들이었다. 엄마는 왜 친가 형제들이 없는 걸까. 천애고아(天涯孤兒)인 걸까. 아니, 엄마의 외갓집이 존재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데. 뭔가 복잡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교내 백일장을 하는데 교장선생님이 족자를 펼쳐 보여준 세 글자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외갓집.’
친구들은 잠시 웅성거리다 쓱쓱 쓰기 시작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쓰라는 격이니까. 내게는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이모와 외삼촌도 없었다. 외갓집이라는 곳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외갓집에 대해 쓰라는 것은 ‘화성인을 그려보시오’라는 미션과도 같았다. 뭐라고 적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백일장에서 상을 받지는 못했다. 다른 주제가 나왔어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얼굴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 일이 있고서야 엄마에게 언니와 남동생이 한 명씩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외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내게 외할아버지가 있다고요?”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는요?”
“얼굴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외삼촌을 낳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가 일곱 살 때 일이다. 외할아버지가 재혼하자 삼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고, 외할아버지는 아들만 거두고 두 딸은 쫓아내다시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때는 다들 힘들 때라, 그런 일이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었제….”
눈물조차 잃었는지 엄마의 눈동자는 넌지시 허공만 바라봤다. 이것이 엄마가 외가에서 부엌데기로 자라게 된 배경이다.
사연이 이러하니 《월간조선》에서 “외할머니에 대해 써주세요”라고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흠모하던 잡지에 내 글이 실리게 된다니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일이지만 옛날 교장선생님이 펼쳐 든 족자를 다시 목도한 기분이랄까. 아니 이건 ‘외갓집’보다 심하잖아. 나는 한 번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쓰라니. 하지만 어쨌든 내게도 외할머니는 있을 것이고, 그러니 우리 엄마도 있고, 지금 나도 있는 것 아닌가. 호기롭게 “잘 써보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외할머니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똑순이 장순덕 여사
나중에 커서 술 마시고 담배도 피울 수 있게 된 날, 거실 귀퉁이에 있던 옛날 앨범을 발견했다. 그사이 나와 동생들의 학창 시절 사진이 붙고, 가족사진이 추가되고, 졸업사진이 채워지면서 앨범은 더욱 두툼해져 있었다. 엄마의 성적표도 여전히 거기 있었다. 어릴 적 나를 주눅 들게 했던 누런 성적표. 언젠가 엄마가 독백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열이 펄펄 끓고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아도 학교는 꼭 갔시야. 기어서라도 갔어. 옷은 언제나 깨끗이 빨아 입고, 머리도 꼭 단정히 묶고 댕겼어. 어미 없는 기집애라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거든.”
엄마의 외가가 부유한 편은 아닌데 거기서 더부살이하면서, 어린 소녀가 어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해야 했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1등을 하는 것밖에 더 있었을까. ‘어미 없는 기집애’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철저히 모든 것에 모범이어야 했다. 그래서 어릴 적 엄마는 억척스럽다고 ‘억순이’, 똑 부러진다고 ‘똑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빛바랜 성적표의 이면에 스며 있는 이악스러운 눈물의 흔적을 먼 세월의 강을 건너 쓰다듬을 수 있었다.
빨리 돈 벌어 보란 듯 잘살고 싶었던 엄마가 선택한 진로는 상업고등학교였다. 당시에는 대학 진학보다 현명한 선택으로 여겼다. 상고를 졸업해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 또한 엄마의 오랜 소원이었으리라. 스무 살에 결혼해 나를 낳았다. 결혼과 육아가 그리 무모하지 않게 느껴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뭐든 시장에 내놓으면 쑥쑥 팔려나가던 고도성장의 시대, 부모님은 시골 터미널 앞에 농약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눈칫밥을 먹고 자란 외갓집 근처에서 보란 듯 주택과 상가를 샀다. 한때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기도 했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생사를 넘나들며 재산을 모두 날리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가장이 병석에 드러눕자 엄마는 앞치마를 둘러매고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 다시 그 옛날의 ‘억순이’로 거듭나 떡볶이를 뒤집고 김밥을 말았다. 삼 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이것이 어미 없는 기집애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똑순이’ 장순덕 여사의 칠십 년 인생이다.
엄마가 곧 외할머니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읊으라면 나는 엄마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외갓집에 대해 말하라면 그 또한 엄마에게 가서 닿는다. 나를 있게 한 반쪽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내게는 엄마가 곧 외할머니고 외갓집의 전부다. 사진으로조차 본 적 없는 외할머니가 엄마 속에 들어가 엄마를 튼튼하게 키웠고, 그 엄마가 나를 쓰다듬으며 키웠을 것이라 여긴다.
40년 전 초등학교 백일장에도 이렇게 썼어야 마땅하지만 그때는 그저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하는 한탄만 적어 제출했던 것 같다. 사람은 시간의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깨닫는 만각(晩覺)의 존재고, 끝끝내 깨닫지 못하는 몰각(沒覺)의 존재며, 때로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으스대는 착각(錯覺)의 존재이기도 하다.
엄마의 고향은 전라북도 정읍이다. 외가에 가본 적은 없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다 정읍이란 표지판만 보여도 왠지 그쪽으로 마음이 끌린다. ‘저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외가가 나오겠지’ 생각하곤 한다. 외할머니가 웃으며 나를 반겨줄 것 같다.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잊고 있던 어떤 존재로부터 우리는 종종 ‘나’를 깨닫고 그것에 고마워한다. 우리가 그렇게 정중히 대해야 할 대상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몇 번 이사를 다니는 동안 우리 집 빨간 앨범은 겉장이 뜯기고 망가졌다. 앨범 속에 있던 사진은 우리 삼 남매가 결혼하면서 각자 자기 것을 취해 가져갔다. 아침에 엄마에게 전화로 물었다.
“엄마, 성적표 어딨어요?”
어떤 성적표를 말하는지 잠시 어리둥절했던 엄마는 옛날 그 성적표를 이르는 줄 알게 되자 “왜? 뭐 할라고?” 하고 되물었다. 이번 설날에는 큼직한 앨범을 하나 준비해야겠다. 흩어졌던 사진을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엄마의 여덟 손주 사진까지 얹으면 더욱 튼실해지겠지. 장래가 촉망된다는 어느 어린이의 성적표가 들어갈 자리도 당연히 정해져 있다. 엄마의 인생은 ‘올 수’다. 외할머니도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친구는 이런 말을 숱하게 들으며 자랐다는데 우리 집에서는 이런 말이 필요 없었다. ‘증거’가 다 있었으니까.
어릴 적 우리 집엔 두툼한 앨범이 하나 있었다. 텔레비전 옆이나 화장대 위, 거실 탁자, 눈에 띄는 곳에 언제나 그 앨범이 있었다. 부모님 젊을 때 사진, 결혼사진, 우리 남매 돌사진 등은 여느 집 구성과 다르지 않은데, 앨범 중간에 ‘공문서’가 하나 끼여 있는 것이 유별났다. 엄마의 초등학교 시절 생활통지표였다. 전 과목 수(秀). 어떻게 이런 성적표가 있을까 싶은 성적표였다. 어느 법과대학 교수님처럼 위조하지는 않았을까, 좌우로 살피며 의심하곤 했다. 아무리 봐도 진짜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
통지표 하단에는 담임선생님이 수기로 작성하는 종합의견란이 있었다. 그 또한 소름 돋았다. “대단히 훌륭합니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통솔력이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됩니다.”
열성 팬이 보내는 팬레터가 이 정도일까. 칭찬 일색. 스승의 기대와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이러니 꼭 엄마 자랑을 하는 것 같지만, 어릴 적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주눅 들었다. 똑같은 양식의 성적표인데 나의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적곤 했으니까.
“명랑하지만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고 산만합니다. 가정에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엄마의 친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가 잠시 맡겨놓고 간 생명체는 아닐까, 홀로 상상하곤 했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평상에 드러누워 까만 하늘을 향해 깜빡깜빡, 플래시 불빛을 흔들었다. 깜빡깜빡, 진짜 엄마를 찾았다. 엄마, 비행접시 타고 지나가다 내가 보이면 손이라도 흔들어줘.
엄마의 기죽이는 성적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엄마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을 맡았다. 이른바 ‘빽’ 있고 돈 있고 공부 잘하는 삼박자를 모두 갖춰야 될 수 있다는 그 회장님 말이다. 그런 ‘촉망받는’ 어린이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 분식집 주인장으로 떡볶이를 팔고 있으니, 성적표의 어린이가 정말 나의 엄마 맞을까, 나는 또 의심했다. 역시 나의 엄마 맞았다. 장순덕. 엄마 이름 세 글자가 반듯이 적혀 있었다. 초등학교 때 ‘대단히 훌륭한’ 학생이었던 나의 엄마는 나중에 어쨌기에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일까. 이번엔 그것을 의심했다. 아무래도 엄마가 외계인이 아닐까….
어느 집안이나 출생의 비밀 비슷한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비밀의 화원(花園)이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나는 줄곧 “외삼촌” “이모”라고 불렀던 어른이 사실은 친외삼촌, 친이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두 엄마의 외가 쪽 사촌이었다. 내게는 외가의 외가여서 외척이라 하기에도 촌수가 먼, 정확히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분들이었다. 엄마는 왜 친가 형제들이 없는 걸까. 천애고아(天涯孤兒)인 걸까. 아니, 엄마의 외갓집이 존재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데. 뭔가 복잡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교내 백일장을 하는데 교장선생님이 족자를 펼쳐 보여준 세 글자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외갓집.’
친구들은 잠시 웅성거리다 쓱쓱 쓰기 시작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쓰라는 격이니까. 내게는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이모와 외삼촌도 없었다. 외갓집이라는 곳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외갓집에 대해 쓰라는 것은 ‘화성인을 그려보시오’라는 미션과도 같았다. 뭐라고 적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백일장에서 상을 받지는 못했다. 다른 주제가 나왔어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그런 일이 있고서야 엄마에게 언니와 남동생이 한 명씩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외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내게 외할아버지가 있다고요?”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는요?”
“얼굴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외삼촌을 낳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가 일곱 살 때 일이다. 외할아버지가 재혼하자 삼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고, 외할아버지는 아들만 거두고 두 딸은 쫓아내다시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때는 다들 힘들 때라, 그런 일이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었제….”
눈물조차 잃었는지 엄마의 눈동자는 넌지시 허공만 바라봤다. 이것이 엄마가 외가에서 부엌데기로 자라게 된 배경이다.
사연이 이러하니 《월간조선》에서 “외할머니에 대해 써주세요”라고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흠모하던 잡지에 내 글이 실리게 된다니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일이지만 옛날 교장선생님이 펼쳐 든 족자를 다시 목도한 기분이랄까. 아니 이건 ‘외갓집’보다 심하잖아. 나는 한 번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쓰라니. 하지만 어쨌든 내게도 외할머니는 있을 것이고, 그러니 우리 엄마도 있고, 지금 나도 있는 것 아닌가. 호기롭게 “잘 써보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외할머니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나중에 커서 술 마시고 담배도 피울 수 있게 된 날, 거실 귀퉁이에 있던 옛날 앨범을 발견했다. 그사이 나와 동생들의 학창 시절 사진이 붙고, 가족사진이 추가되고, 졸업사진이 채워지면서 앨범은 더욱 두툼해져 있었다. 엄마의 성적표도 여전히 거기 있었다. 어릴 적 나를 주눅 들게 했던 누런 성적표. 언젠가 엄마가 독백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열이 펄펄 끓고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아도 학교는 꼭 갔시야. 기어서라도 갔어. 옷은 언제나 깨끗이 빨아 입고, 머리도 꼭 단정히 묶고 댕겼어. 어미 없는 기집애라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거든.”
엄마의 외가가 부유한 편은 아닌데 거기서 더부살이하면서, 어린 소녀가 어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해야 했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1등을 하는 것밖에 더 있었을까. ‘어미 없는 기집애’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철저히 모든 것에 모범이어야 했다. 그래서 어릴 적 엄마는 억척스럽다고 ‘억순이’, 똑 부러진다고 ‘똑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빛바랜 성적표의 이면에 스며 있는 이악스러운 눈물의 흔적을 먼 세월의 강을 건너 쓰다듬을 수 있었다.
빨리 돈 벌어 보란 듯 잘살고 싶었던 엄마가 선택한 진로는 상업고등학교였다. 당시에는 대학 진학보다 현명한 선택으로 여겼다. 상고를 졸업해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 또한 엄마의 오랜 소원이었으리라. 스무 살에 결혼해 나를 낳았다. 결혼과 육아가 그리 무모하지 않게 느껴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뭐든 시장에 내놓으면 쑥쑥 팔려나가던 고도성장의 시대, 부모님은 시골 터미널 앞에 농약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눈칫밥을 먹고 자란 외갓집 근처에서 보란 듯 주택과 상가를 샀다. 한때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기도 했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생사를 넘나들며 재산을 모두 날리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가장이 병석에 드러눕자 엄마는 앞치마를 둘러매고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 다시 그 옛날의 ‘억순이’로 거듭나 떡볶이를 뒤집고 김밥을 말았다. 삼 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이것이 어미 없는 기집애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똑순이’ 장순덕 여사의 칠십 년 인생이다.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읊으라면 나는 엄마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외갓집에 대해 말하라면 그 또한 엄마에게 가서 닿는다. 나를 있게 한 반쪽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내게는 엄마가 곧 외할머니고 외갓집의 전부다. 사진으로조차 본 적 없는 외할머니가 엄마 속에 들어가 엄마를 튼튼하게 키웠고, 그 엄마가 나를 쓰다듬으며 키웠을 것이라 여긴다.
40년 전 초등학교 백일장에도 이렇게 썼어야 마땅하지만 그때는 그저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하는 한탄만 적어 제출했던 것 같다. 사람은 시간의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깨닫는 만각(晩覺)의 존재고, 끝끝내 깨닫지 못하는 몰각(沒覺)의 존재며, 때로 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으스대는 착각(錯覺)의 존재이기도 하다.
엄마의 고향은 전라북도 정읍이다. 외가에 가본 적은 없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다 정읍이란 표지판만 보여도 왠지 그쪽으로 마음이 끌린다. ‘저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외가가 나오겠지’ 생각하곤 한다. 외할머니가 웃으며 나를 반겨줄 것 같다.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잊고 있던 어떤 존재로부터 우리는 종종 ‘나’를 깨닫고 그것에 고마워한다. 우리가 그렇게 정중히 대해야 할 대상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몇 번 이사를 다니는 동안 우리 집 빨간 앨범은 겉장이 뜯기고 망가졌다. 앨범 속에 있던 사진은 우리 삼 남매가 결혼하면서 각자 자기 것을 취해 가져갔다. 아침에 엄마에게 전화로 물었다.
“엄마, 성적표 어딨어요?”
어떤 성적표를 말하는지 잠시 어리둥절했던 엄마는 옛날 그 성적표를 이르는 줄 알게 되자 “왜? 뭐 할라고?” 하고 되물었다. 이번 설날에는 큼직한 앨범을 하나 준비해야겠다. 흩어졌던 사진을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엄마의 여덟 손주 사진까지 얹으면 더욱 튼실해지겠지. 장래가 촉망된다는 어느 어린이의 성적표가 들어갈 자리도 당연히 정해져 있다. 엄마의 인생은 ‘올 수’다. 외할머니도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