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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

데뷔 60주년 맞은 임권택 감독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 그런 영화 못 남기고 간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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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총 102편 남겨
⊙ “삶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가출 후 영화 〈장화홍련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정창화 감독 눈에 띄어 영화 연출 시작
⊙ “〈서편제〉 인기 보면서,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가 위험한 매체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다”
⊙ “가장 훌륭한 감독은 죽어라고 뛰어다니는 감독, 준비를 철저히 하는 감독… 헌팅이 중요”
사진=조준우
  1962년 2월 4일 서울 국도극장(國都劇場). 구정(舊正) 대목을 맞아 새 영화가 걸렸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했다. 제목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파괴하고, 온갖 시련 끝에 만주로 건너가 항전(抗戰)을 계속한다는 이야기다. 사랑, 배신, 오해, 고문을 당해 목숨을 잃는 가족, 필사(必死)의 탈출과 일본군의 산중(山中) 추격전 등을 담은 흑백영화다. 마지막 장면은 전설로 남았다. 설원(雪原)을 배경으로 한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독립군은 스키를 타고 총을 쏘며 일본군을 압도한다.
 
  이전의 한국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상상력과 스케일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제작자는 최관두(崔貫斗), 관객 수는 6만9000명이다. 서울 인구가 250만명으로, 관객이 5만명을 넘으면 제작자가 돈방석에 앉는다고 하던 시절이다. 2022년 기준이라면 ‘500만 관객 동원’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신인 감독의 이름은 임권택(林權澤·87). 그래서 2022년 2월 4일은 거장(巨匠)의 감독 데뷔 60주년 기념일이다.
 
 
  ‘영화에 미친 남자’ 정종화
 
정종화 선생과 임권택 감독. 사진=조준우
  이 인터뷰의 출발점은 한 통의 전화다. ‘걸어 다니는 영화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정종화(鄭宗和·80) 선생의 목소리였다. 안동 출생으로, 1953년 무렵 피란지 부산에서부터 영화 포스터를 수집하고 평생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한 또 다른 ‘영화계의 전설’이다. 학생 시절 영화 관람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물상과 쌀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서라벌예대 졸업 후 충무로에서 영화사 7곳, 극장 3곳, 영화잡지사 4곳에서 일하며 입장권, 팸플릿, 스틸사진, 포스터 등 수만 점의 자료를 수집한, 인생이 영화이고 영화가 인생인 사람. 수집품의 훼손을 우려해서 장마에 대비, 산꼭대기로 이사를 하기도 했다는, 본인의 책 제목 그대로 ‘영화에 미친 남자’다. 그의 소장 자료 중 일부는 근현대사 박물관, 단성사영화박물관, 안성기영화박물관 등에서 대중과 만나고 있다. 1960년대는 영화 필름이 밀짚모자의 테두리 장식으로 팔려나가던 시절이다. 그래서 영영 사라지고 없는 명작(名作)이 태반이다. 영화가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 그는 모았고 그의 수집품은 살아남아 옛일을 증거 한다. 그의 분투(奮鬪)가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다.
 
  정종화 선생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임권택 감독의 60주년을 기념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와 불경기가 겹쳐 영화계 내부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했다. 기념일, 기념식은 역사와 현재가 만나는 자리다. “한 나라의 품격은 그 나라가 기리는 인물과 그 인물을 기념하는 방식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며 노(老)감독은 만남을 고사했다. “정종화 선생과 함께 가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며칠을 매달리자 ‘1월 6일 집에서 보자’는 답변이 왔다.
 
  ― 감독 데뷔 6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혹시 생애 첫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사무라이 영화였는데 제목은 모르겠고…. 왜정(倭政) 때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틀어줬어요.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앉아서 영화를 봤죠. 천막도 없고, 하늘이 깜깜하니까 천 하나를 영사막처럼 펼쳐놓고 필름을 돌렸습니다. 평소에 영화와 만나고 살던 시대가 아니니까, 신기했죠.”
 

  영화를 그냥 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아내 채령(蔡姈·71) 여사의 증언이다.
 
  “집안 어른들께 들었어요. 그때는 동네에 곡마단(曲馬團)도 들어오고, 곡예 사이사이에 노래도 하고 쇼도 하고 연극도 보여주고 그랬는데, 어쩌다 곡마단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이면 임 감독님이 마을 아이들 모아서 역할도 주고 대사도 주고, 연극 놀이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놀이’가 영화감독 임권택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영화를 처음 본 장소는 전라남도 장성군 월평초등학교다. 졸업은 다른 곳에서 했다. 4학년 때 할아버지가 사시던 곳으로 이사해 진원초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때는 광주로 나가 장성중학교를 졸업했고, 숭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12년생 동갑내기 부부 임종영(林鍾英)과 이현효(李賢孝) 사이 3남 4녀 중 장남. 알려진 대로, 아버지 임종영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다.
 
  “아버지는 교사를 하시며 읍내 축구단에도 관여하시고, 외모가 특출하셔서 배우를 꿈꾸시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주(地主)셨는데, 기(氣)가 세셔서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늘 조심하고 피해 다니셨죠.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이 모두 따를 정도로 통솔력이 있고 인기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엄하셔서 저도 많이 맞고 자랐어요. 동네 어른들께는 볼 때마다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방금 전에 인사를 드렸다고 그냥 지나쳤다간 여지없이 혼나는 겁니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군화 장사
 
  소년 임권택의 가족사에는 사연이 많다. 할머니는 일제(日帝) 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재혼 후 광주와 장성에서 두 집 살림을 했다. 임권택이 중학교를 다닌 곳이 바로 ‘광주 할머니’ 집이다. 일제, 광복(光復), 6·25동란을 겪으며 집안은 몰락했다. 부자(父子) 사이의 갈등이 증폭(增幅), 할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하는 아들을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18세 때 소년 임권택이 집에서 기찻삯만 훔쳐서 가출한 배경이다. 휴전(1953년 7월) 전의 이야기다. 돈을 더 들고 나왔더라면 좋았겠지만, 집안에는 훔치고 싶어도 훔칠 것이 없었다. 가정이 편안했다면 형제자매 중에 예술가가 서넛은 더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7남매의 막내인 임은자씨가 30여 년 전 국전(國展)에 입상한 화가이기에 드는 생각이다.
 
  임권택은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도착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사흘을 굶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노동판에서 지게를 졌다. 힘이 없으니 일이 서툴고, 일이 서투니 일감도 부족했다. 글자 그대로 춥고 배고파서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육체노동과 음주의 후과(後果)는 수전증.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시작한 일이 군화(軍靴) 장사다. 무엇이든 원단과 원료가 귀하던 시절이니, 미군이 폐기한 군수품,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수선과 공예를 거쳐 여러 생필품으로 팔려나갔다. 미군 물품은 피란민들의 생존 필수품이었다.
 
  장사를 한 곳은 국제시장이다. 이 사실이 미리 그리고 널리 알려졌다면, 2014년 영화 〈국제시장〉에 청년 시절의 정주영(鄭周永)과 앙드레 김뿐만 아니라, ‘좌판 군화 장수’ 임권택도 등장했을지 모른다.
 
 
  영화 〈장화홍련전〉
 
정창화 감독. 사진=뉴시스
  전쟁통에서도 예술혼은 피어난다. 자유를 갈망하는 기질은 포화(砲火)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법이다. 군화 장사로 돈을 번 사람 중 일부는 서울로 가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1956년에 개봉한 〈장화홍련전〉이다. 이 영화를 만들 때에 인편으로 임권택에게 연락이 왔다. 촬영 현장에서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떠돌지 않고 먹고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화 장사가 거의 망한 지경이었죠. 그래서 바로 상경(上京)했습니다. 연출부가 아니라 제작부로 들어간 거죠. 촬영하는 걸 보기는 했지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연출부로 옮긴 건 4~5년 뒤죠. 제작부에서도 연출부에서도, 저는 처음부터 영화판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영화 〈장화홍련전〉 유령이 나오는 장면, 배경 그림이 그려진 대형 원통을 돌리고, 귀신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선풍기를 돌리는 것이 가출청소년 임권택의 임무였다. 〈장화홍련전〉의 성공은 한사군(漢四郡) 시대가 배경인 〈풍운의 궁전〉(1957)과 이후의 여러 작품으로 이어졌다.
 
  밤낮없이 묵묵하게 그러나 미친 듯이 소임을 다하는 임권택을 당대의 일류 정창화(鄭昌和·94) 감독이 주목했다. 정창화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출부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임 감독은 그 시절부터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만 울리면 바로 사무실로 어김없이 나와서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정창화 감독이 임권택을 키워보겠다고 결심하고 연출부로 발탁한 이유다.
 
  여담이지만, ‘성실함’을 바탕으로 정창화 감독이 발탁한 제자가 한 명 더 있다. 홍콩 시절의 제자인, 〈영웅본색(英雄本色)〉(1986)과 〈첩혈쌍웅(疊血雙雄)〉(1989)의 우위썬(吳宇森) 감독이다.
 
  정창화 감독은 임권택을 연출부로 발탁한 뒤에는 촬영장에서 수시로 의견을 물었다. 액션 스릴러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우이동과 창동에 만주 거리를 재현한 거대한 오픈스튜디오를 짓고 찍은, 하얼빈을 배경으로 한 독립군 이야기 〈지평선〉(1961) 등이 임권택 감독이 기억하는 조감독 시절의 작품이다. 정 감독은 임권택에게 김승호, 허장강, 조미령, 엄앵란 등 톱스타들이 출연한 1961년 작 〈노다지〉의 시나리오를 맡기기도 했다.
 
  “따로 영화 공부를 한 적은 없습니다. 제게는 오로지 정창화 감독님의 촬영장이 교과서이자 학교였죠. 영화 일도 정창화 감독님 아래에서만 배웠어요. 정 감독님은 고지식하시고, 성실하시고, 예술적 고집이 센 분이셨습니다. 정확한 콘티(continuity)를 바탕으로 촬영하셨죠. 콘티만 봐도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신문광고.
  ― 감독 데뷔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그때는 예비 감독들에게 영화적 재능이 있는지 부족한지를 가늠할 길이 없었어요.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는 것이 재능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죠. 그래서 처음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감격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으로 내 영화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소원이 평생 열 작품만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감독 제의 이전에 신호가 있었다. 최관두 제작자가 예고편을 만들어보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본 영화 상영 전에 나가는 차기작 영화 예고편이 가장 중요한 홍보 수단이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고, 대개는 감독이 직접 편집해서 예고편을 만들었다.
 
  “제가 만든 예고편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고편을 몇 편 더 제작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작자와 감독님이 저에게 기회를 주신 겁니다. 제 평생의 은인이시죠.”
 
  감독 입문 후 첫 작품은 에피소드투성이다. 조감독 때는 말을 잘 듣던 배우들이 도무지 작업에 협조하지 않았다. 살얼음이 낀 개천을 건너가라는데, 얼음물이라 다들 입수를 꺼렸다. 감독이 먼저 강에 몸을 담그고 반대편까지 건너갔다가 오니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관령, 횡계 등 강원도에서 보름을 찍었는데, 신발을 벗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 덴 상처를 붕대로 싸매고 일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뒤꿈치 피부 일부가 썩어 있었다.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는 데뷔작의 상처다.
 
  정종화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두만강아 잘 있거라〉와 흥행 경쟁을 한 작품은 다음 네 편이다. 명보극장의 선택은 신상옥 감독의 〈폭군 연산〉, 반도극장(피카디리)엔 김수용 감독의 〈브라보 청춘〉,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국제극장엔 최훈 감독, 김지미 주연의 〈양귀비〉가 걸렸다. 대한극장은 외화 〈벤허〉로 승부를 걸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3주 동안 흥행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스키 장면에선 관객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독립군이 스키를 타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도 즐거워했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영화 속에서 스키를 타며 독립군으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스키부대의 현역 장병들이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것이다.
 
  정종화 선생은 이 영화를 두고 “2008년 660만을 동원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이어지는 ‘한국산 만주 서부극’의 단초가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 들어 있는 셈”이라고 평가한다.
 
 
  多作시대
 
  〈두만강아 잘 있거라〉의 촬영은 1961년 가을이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개봉 후 바로 제작에 돌입한 2호작이 김혜정, 김승호, 신영균, 최무룡, 곽규석 등이 출연한 〈전쟁과 노인〉, 3호작은 1963년에 개봉한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망부석〉이다.
 
  개봉 순서로만 치자면 3호작은 〈남자는 안 팔려〉다. 구봉서, 이대엽 등이 출연한 한국 최초의 여장남자(女裝男子) 코미디다. 메릴린 먼로가 나오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지방 흥행사들이 임권택 감독에게 ‘무거운 작품 말고, 사람들이 들 만한 코미디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 결과물이다.
 
  1960년대 초반이라면 아직 TV 수상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다. ‘이야기’에 대한 수요를 채우는 건 오롯이 영화의 몫이었기에 충무로에서, 전국 각지 로케이션 현장에서 연간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유명 배우가 시간을 쪼개 각기 다른 영화사의 네 군데 촬영 현장을 돌던 시절이다.
 
  영화를 사러 온 지방 업자들이 시사회장 객석에서 자기에 “영화 안 보시냐?”고 깨웠더니 “신성일 나와, 엄앵란 나와, 비 내리고 여자 울고 그러면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던 일화도 있다. 다작(多作)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임권택 감독도 매년 서너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1969년에는 9편을, 1970·1971년에는 연달아 7편을 만들기도 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51번째 영화 〈잡초〉(1973) 이전의 작품들은 불태우고 싶다고 말한 이유다. 충분한 온도에서 오랜 숙성을 거쳐 구워내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자평(自評)과는 반대로, 그의 초기작 중에는 국내외 평론가들이 극찬하는 작품도 많다.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1910~1998)가 대표적이다. 그는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와 인터뷰하면서 “한국인 감독 가운데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잘 알고 꾸준히 본다”면서 베스트 3로 〈만다라〉 〈씨받이〉 그리고 〈아벤고 공수군단〉을 언급했다.
 
 
 
16년 연하 배우 채령과 8년 연애 끝에 결혼

 
임권택 감독과 부인 채령 여사. 사진=조준우
  초기작 가운데 특별하게 기억해야 할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1971년 작 〈(검객녀) 요검〉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범대 지망생 채혜숙(蔡惠淑)은 광주에서 올라와 고모 집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이대 국문과 출신의 고모는 “앞으로 영상 시대가 온다”며 예쁘장한 조카를 사진관에 데려갔다. MBC 탤런트 응시원서를 대신 써줬다. 결과는 공채 3기 합격. 이때부터 사용한 예명이 채령이다. 동기가 ‘일용 엄마’ 김수미, 고(故) 김영애, 바로 다음 기수인 4기 후배가 ‘국민 엄마’ 고두심이다.
 
  MBC 입사 후 1년 동안 연수 중, 재학 중이던 서라벌예대를 통해 영화 출연 제안이 왔다. 채령은 “원래 하기로 한 여배우가 거절하니 급해서 연락했을 것”이라 하고, 거장은 “신인을 기용해 새롭게 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두 분은 어떻게 연애를 시작한 걸까? 증언은 또 엇갈린다. 감독은 “내가 잘생겼잖아요? 돈도 좀 있어 보였을 거고…”라고 한다. 아내는 “진솔하고 순박한데다 보호자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현장에서는 엄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채령은 8년 동안 부모님을 속이고 비밀 연애를 했다. 교육자 집안이라 16년 나이 차이가 나는 ‘선생님과 제자’의 만남을 친정 부모님께서 곱게 봐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 승낙을 받은 건 매스컴이 도운 결과다. 데이트를 하고 바래다줬는데,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들켜버렸다. 동료 연예인의 제보를 받은 도하 각 신문사로부터 확인 전화가 쏟아지고 기자들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기사가 난 신문을 들고 “이제 결혼 안 하면 안 된다”고 채령이 프러포즈를 했다. 양가에서도 허락이 떨어졌다. 40대 후반의 노총각 감독과 20대 여배우의 로맨스는 당대 장안의 최고 화제였다. 두 사람은 1979년 작가 한운사 선생의 주례로 앰배서더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결혼 이후로 인생이 달라졌습니까.
 
  “젊은 시절엔 술에 취해서 눈길에서 헤매고 그랬죠.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데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결혼을 하고 아들이 둘 생긴 뒤엔 그런 짓은 없었습니다.”
 
 
  일에 들어가면 절대 禁酒
 
  임권택의 주량은 소주 2병 정도지만, 거의 매일 약주를 즐기는 애주가(愛酒家)다. 단, 예외는 있다. 일에 들어가면 절대 금주(禁酒)다.
 
  “그건 제 양심(良心)에 관한 문제죠. 40~50명의 스태프가 감독 하나만 보고 대기 중인데, 감독이 술을 먹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작업에 관한 원칙이라면 하나 더 있다. 캐스팅에 관한 한,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채령 여사의 증언이다.
 
  “처음에는 저한테 친척들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부탁을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제가 ‘데리고 올 필요 없다’라고 다 잘랐습니다. 감독님은 작품만 보고 배우를 고르죠. 평소엔 TV를 안 보셔서 유명 배우들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세요. 언젠가 톱스타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저한테 ‘저 예쁘게 생긴 아가씨는 뭐 하는 아가씨야?’라고 물으신 적도 있습니다.
 
  박노식 선생이 유일하게 감독님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배우인데 아들 박준규씨가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러더군요. ‘아빠 찬스를 쓴 적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 임권택 감독님이 저를 한 번도 쓰지 않으신 것이 증거다’라고요.
 
  〈장군의 아들〉(1990)이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작품이잖아요? 그런데 주인공을 맡았던 박상민 배우도 그 작품이 임 감독님과 작업한 전부입니다. 농반진반으로 ‘두 번째 작품 항상 대기 중입니다’라고 지금까지 말할 정도죠.”
 
  임권택 감독이 덧붙인다.
 
  “캐스팅을 잘못하면 감독도 망하고 배우 본인도 망하고 영화사도 망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다 폐를 끼치는 일이에요.”
 
 
  〈서편제〉 신드롬
 
  작품 구상에 들어가면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모든 신경세포가 ‘새 이야기’에 맞춰지는 것이다. 평소에는 보지 않던 TV를 켜고, 연극도 보러 다니며 저인망(底引網)으로 훑듯 작품에 맞는 인물을 고른다. 배우의 종합적인 느낌을 알아채면 그때 비로소 만나자고 연락을 한다. 〈서편제〉(1993)의 오정해가 대표적이다. TV에서 보고 ‘필요한 배우다, 작품과 맞을 것’이라는 느낌이 와서 바로 연락을 했다. 그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다.
 
  “고전미(古典美)가 있고,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고, 젊은 배우지만 한(恨)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서편제〉의 제작은 우연과 필연이 겹친 결과다. 같은 성향의 영화를 하면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차기작은 늘 전작(前作)에서 멀리 떨어진 주제를 고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의 성공이 완전히 다른 색깔의 영화 〈장군의 아들〉로, 다시 〈서편제〉로 이어진 것이다. 두 작품의 연속 빅히트를 기록하자 제작자 이태원이 “제작비 걱정 흥행 걱정은 하지 말고 평소에 만들고 싶었던 작품을 하자”며 통 크게 제안했다.
 

  “판소리는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가락입니다. 조연출 때 전라도에 갈 일이 많았어요. 술에 취해서 잠들면 어디선가 판소리꾼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래전부터, 언젠가는 판소리를 주제로 한국인이 가진 깊은 감성과 만나는 작품을 꼭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1993년 이청준이 발표한 소설 〈남도사람〉을 영화화한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에 있어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인 동시에,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넘어서 사회현상으로 승화(昇華)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서편제〉가 화제였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였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서편제〉를 봤고, 정계(政界)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던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은 단성사를 직접 찾았다. 오정해는 “결혼식을 하면 주례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주례의 인연으로 DJ의 장례식에서 만가(輓歌)를 불렀다.
 
  정치인만이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등 종교인들도 공개 관람하며 화제를 더했고, 기업인이, 외국인이, 단체관람 학생들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의 기묘한 조화 〈축제〉
 

  영화의 흥행도 흥행이지만, 판소리 소재의 영화가 이렇게까지 인기몰이를 한다는 것도 불가사의(不可思議)였다. 국악(國樂)은 ‘대중의 열광을 기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명맥(命脈)을 지키는 예술’이라는 이미지가 없지 않았던 까닭이다.
 
  “국민적 성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조심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죠. 내 영화가 이렇게 많은 관객과 만난다면, 그러니까 국민의 정신적·정서적 건강에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로 보면,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가 위험한 매체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이 아니다’라고 수시로 다짐했습니다. 인기(人氣)와 명성(名聲)에 놀아나고 자기를 놓치면 곤란하다고 되뇌었어요.”
 
  이청준과의 공동 작업은 한 편이 더 있다. 동명 소설과 영화의 동반 창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축제(祝祭)〉(1996)다. 소설가 준섭(안성기)이 모친상을 당해 겪는 장례식이 소재다. 영화 선전문구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남은 이들의 향연’에 대한 이야기다. 준섭은 이청준의 분신일 터이다.
 
  시골집에서 펼쳐지는 질박하고 리얼한 삼일장(三日葬)의 모습은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때로는 판타지처럼, 때로는 극 영화처럼 관객들의 가슴에 스며든다. 고인(故人)과 상주(喪主)와 가족과 문상객(問喪客)과 마을 사람들과 배다른 가족이 한데 섞이고, 눈물판과 술판과 노래판과 도박판이 범벅이 된 농밀(濃密)한 시간이 매우 한국적인 영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의 기묘하고 절묘한 조화다.
 
  장례가 끝나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 상주(안성기)는 시종일관 겉돌던 배다른 가족(오정해)에게 옆자리를 내준다. 침통한 표정의 가족들에게 문상객 중 누군가가 ‘우린 못 웃지만 다들 웃으라’며 촬영 직전 한마디를 툭 던진다.
 
  “무슨 초상났냐?”
 
  상복(喪服)을 입은 유족(遺族)들 모두가 순간 환히 웃음을 터뜨리는 이 인상적인 컷은 영화의 라스트신으로 그리고 포스터로 길이 남았다.
 
 
  이태원과 정일성
 
정일성(왼쪽) 촬영감독과 이태원(오른쪽) 태원영화사 사장은 임권택 감독의 ‘영혼의 동반자’이다. 사진=조선DB
  ‘임권택 감독 데뷔 60주년 기념 인터뷰’라는 취지에 맞춰 역사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축제〉에서 주인공 할머니로 나온 한은진(韓銀珍·1918~2003)은 이 작품이 생애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임권택 감독과는 〈장희빈〉(1968), 〈씨받이〉(1986) 등을 함께했고, 해방 이전에만 13번 재공연을 했다는 전설의 흥행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일명 홍도야 우지 마라)〉(초연 1936년 7월 동양극장)에서 홍도(차홍녀 분)를 끝까지 괴롭히는 시누이 역으로 출연, 객석의 원성을 들었던 배우다.
 
  이청준(1939~2008)과는 이웃사촌이었다. 용인의 한 아파트에 우연히 함께 입주, 수시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영화와 문학을 논했다. 〈축제〉에는, 화투판에서 돈을 잃자 조의금을 탈취해 판을 이어가는 평론가 이야기가 나온다. 극도로 무례한 행동이지만, 생생하다. 이청준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에 살을 붙여 만든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동반자라면 두 사람이 더 있다. 제작자 이태원(李泰元·1938~2021)과 촬영감독 정일성(鄭一成·93)이다.
 
  “두 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한 사람이죠. 두 분이 없었다면 제 영화 인생도 다르게 흘러갔을 겁니다. 영화 인생을 살면서 참 좋은 분들과 만났었구나, 내 인생이 폐만 끼치는 인생이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아끼는 작품은 〈서편제〉
 
  ― 영향을 받은 외국 작품이 있습니까.
 
  “조감독 할 때 외국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두 번 본 영화가 딱 한 편 있어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La Strada)〉입니다.”
 
  정종화의 증언에 의하면, 〈길〉의 한국 상영은 1958년 11월, 장소는 명보극장이다.
 
  ― 가장 아끼는 작품은 무엇일까요.
 
  “〈서편제〉입니다. 〈춘향뎐〉(2000)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내 채령의 선택은 〈취화선(醉畫仙)〉(2002)이다. 술 좋아하고, 훨훨 날아다니는 장승업(최민식 분)의 모습이 젊은 시절의 남편과 닮았기 때문이다.
 
  〈춘향뎐〉은 이들 부부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서편제〉의 성공에 힘입어 의욕적으로 진행했던 작품으로, 제작 전부터 국내외에서 화제와 기대를 모았던 영화다. 제53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았고, 유럽에선 상영 후 10여 분간의 기립박수가 쏟아졌지만, 국내에서의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
 
  “흥행 여부는 관객이 정해주는 것이니까요.”
 
  〈서편제〉가 판소리꾼들의 ‘이야기’라면, 〈춘향뎐〉은 ‘판소리 자체’다. 〈서편제〉는 판소리를 몰라도 몰입(沒入)할 수 있지만, 〈춘향뎐〉은 판소리에 그윽한 애정이 없다면 조금은 낯설게 느낄 수도 있겠다. 그것이 관객 동원이 부진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판소리의 진수가 거장의 손을 통해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영상으로 재탄생한 것은 문화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적지 않을 터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다.
 
  비단 판소리에 국한한 것이 아니다. 임권택 평생의 화두(話頭)는 ‘한국인들의 삶과 문화를 영화적으로 펼쳐놓는 것’이었다. 〈만다라〉(1981),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불교영화도 ‘우리 문화와 친한’ 것들에 대한 탐구의 결과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우리 시대의 자랑스러운 벽화(壁畫)다.
 
 
  “헌팅 소홀히 하면 영화 못 만든다”
 
영화 〈서편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 장면은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찍었다.
  ― 좋은 감독은 어떤 감독입니까.
 
  “죽어라고 뛰어다니는 감독, 준비를 철저히 하는 감독이죠. 그 가운데서도 헌팅이 중요합니다. 헌팅을 소홀히 하면 영화를 못 만들어요.”
 
  ‘헌팅’은 여행이 아니다. 지도에 나와 있는 명승고적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에, 들에, 강가에, 외딴 섬에, 폐허로 변한 광산촌에, 산동네 어디에 무슨 그림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찾아야 하는 일이다. 헌팅은 그래서 감독의 숙명이다. 전국을 방랑(放浪)하는 예술적 고행이다. 모든 감독이 필연적으로 고독한 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문열(李文烈)의 단편 〈익명(匿名)의 섬〉을 영화화한 〈안개마을〉(1983)에 나오는 몽환적(夢幻的) 분위기는 충청북도 단양, 〈서편제〉의 수채화(水彩畵) 같은 풍경은 전라남도 섬마을을 수없이 밟고 답사한 흔적이다.
 
  가끔은 영화가 현실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서편제〉에서 주인공 일행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멀리서부터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는 유명한 롱테이크신을 기억하시는지. 촬영지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있는 섬 청산도다. 전라남도는 ‘느리게 걷기’의 명소 청산도 슬로길 1코스의 명칭을 ‘서편제길’로 명명했다. 아무도 모르던 머나먼 바닷가의 한적한 섬 풍경이 영화와 더불어 누구나 추억하는 ‘문화적 명소’로 거듭난 것이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길 위에서 길 밖에서 어쩌면 어슴푸레 먼 곳에서 진도 아리랑이 들려올지도 모른다.
 
 
  허장강·김지미·안성기
 
배우 허장강.
  ― 임권택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저는 영화가 좋아서 평생을 더불어 살았을 뿐입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 배우들에게는 무엇을 주문하시는지요.
 
  “원하는 감정이 우러나도록 배우에게 여러 소리를 다 했죠. 그걸 못 끌어내면 영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 기억에 남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제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가 저한테는 다 좋은 인연이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래도 한 사람을 꼽으라면…. 허장강(1925~1975)은 독특한 배우였어요. 감정을 극대화시켜서 드러내는데, 자연스럽지 않지만 명확하게 느낌을 잡아냈거든요. 딱 그 상황에 걸맞은 연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했던 배우입니다.”
 
  말이 난 김에 몇몇 배우에 대한 평(評)을 더 듣고 싶었다.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배우들에 대해 질문했다.
 
  “김지미는 좋은 의미에서 독종이고, 안성기는 성실한 사람이죠. 강수연은 허술한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배우입니다.”
 
  ‘아픈 손가락’은 김희라다. 대배우 김승호의 아들. 김희라도 아버지 못지않은 출중한 연기자였다. 자기 직업에 충실했더라면 대배우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두고두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장 감사한 일은 위험한 촬영이 많았는데도 단 한 번도 사고(事故)가 없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는 안전의식이나 장비가 지금과는 달랐던 시절이다. 실제로 영화를 찍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영화인도 여럿이다.
 
  “촬영 중에 제가 실탄을 쏘기도 했으니까요. TNT 폭약을 미리 묻는 과정에서 실수로 터진 적이 몇 번 있지만, 다행히 촬영 중에는 한 번도 사고가 없었습니다. 그 점이 두고두고 감사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
 
  임권택의 필모그래피는 총 102편. 101번째 작품이 〈달빛 길어 올리기〉 (2010), 102번째 영화가 〈화장〉(2014)이다.
 
  “더는 작품을 하기 힘들겠죠. 무엇보다도 체력과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제 모든 작품은 습작(習作)입니다. 저는 평생을 영화를 하며 살았지만,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작품은 만들지 못했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 그런 영화를 못 남기고 갑니다.”
 
  ―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셨습니까.
 
  “삶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이니, ‘그런 인생을 살아간 선배가 있었구나’,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임권택에 관한 기억’을 구체적 자료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부산 동서대학교다. 2007년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을 만들겠다’는 제안이 왔다. 개인기록과 영화 관련 자료를 ‘종이쪽 하나까지 다 가져가겠다’고 했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살았던 가출청소년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이것도 인연’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동서대학교는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시나리오, 잡지 스크랩, 포스터, 훈장, 칸영화제 트로피 등 대부분의 자료를 가져가 박물관을 만들었다. 분신처럼 아끼던 〈두만강아 잘 있거라〉 신인감독상 트로피도 현재 동서대에서 보관 중이다.
 
  ― 후배 영화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우리 세대는 일제(日帝) 식민치하의 삶을 기억합니다. 약소국민의 설움이랄까, 안 좋은 것을 참 많이 보고 자랐어요. 해방 이후는 좌우익의 갈등이 엄청나게 심했고…. 그런 것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죠. 젊은 세대는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니 우리 세대보다 더 많은 업적을 이룰 겁니다.”
 
  채령 여사는 ‘2020년 아카데미 영화제를 TV로 시청하며 봉준호 감독의 수상 장면에서 감독님이 기립박수를 쳤다’고 부연한다.
 
 
  ‘겉모습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사람’
 
  노부부는 손자들을 돌보며 생애의 황혼기를 함께하고 있다. 새벽 무렵 냉장고 앞에 선 할아버지에게 “소주 드시고 싶어서 안 주무셨어요?”라고 묻는 초등학교 2학년 손자의 눈치를 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
 
  채령 여사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남편이 평생을 집 밖에서 미모의 여성들과 일하는데 신경 쓰이지 않느냐?”는 짓궂은 질문에 “여배우랑 사는 사람이니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죠”라고 답한 적이 있다. 프러포즈는 받은 적이 없지만, 묵언(默言)의 프러포즈는 확실하게 받았다. 오란C 광고, 연기자, 패션모델 활동 당시의 신문, 주간지, 여성지 기사 스크랩북이다. 채령도 잊고 있었던 기사와 화보 사진을 정리해 어느 날 불쑥 말없이 던져준 남자가 임권택이다. 이 이상의 고백과 애정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바깥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종화 선생은 “임권택은 겉모습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과묵한 내면에 용광로(鎔鑛爐)와 분화구(噴火口)가 끓어오르는 인물”이라고 평한다. 내면세계에 무한대의 창작력이 불타지 않았다면, 102편의 영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임권택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짝코〉와 〈취화선〉과 〈장군의 아들〉 그리고 〈노는 계집 창〉과 더불어 〈티켓〉을 끊고 〈개벽〉이 멀지 않은 하늘을 향해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읊조리며 〈천년학〉처럼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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