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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읽기

송광용의 1953년 12월 그림일기

‘ㅁ,ㅎ,ㄱ가 되려고, 꼭 그런 깨끗한 사람이고 싶다’

글 : 송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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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얼마나 이 그림이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 ‘어려운 난관이 닥쳐와도 놀 때는 놀고 싸울 때는 싸우고…’
4286년 12월 15일과 12월 19일 그림일기다. 송광용은 붉은색 모자를 씌워 다른 학생과 구별되게 그렸다.
  [편집자 註]
 
  송광용(宋光鏞·1934~2002년)의 만화일기 원고는 모두 131권(호)이지만 27권이 소실되어 104권이 남아 있다. 제6호 일기가 현존하는 일기 중 가장 빠른 일기다.
 
  저자 송광용은 머리말 부분에 자신의 사진을 붙이고 ‘중학교 3학년 때의 나의 얼굴 - 4287년도 17세’라고 기록해놓았다. 단기 4287년은 1954년이다.
 
  그런데 일기 시점은 4286년이다. 아마도 세월이 흐른 뒤,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학창 시절 사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6호 일기는 그가 영월중학교 2학년 때인 단기 4286년, 즉 1953년 12월 6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한편 위의 내용에 의하면 이 일기의 호수는 12호에 해당되는데, 저자는 이 일기의 표지와 속표지의 12호 표기를 6호라고 고친 흔적이 보인다. 원래는 11호까지 일기를 작성하였으나 어떤 연유에서 번호를 다시 매긴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 직후 접경지역(강원도 영월) 한 소년의 비망록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일기 내용도 손색이 없다. 만화가를 꿈꾸는 모습이 순수해 보인다.
 
  ‘12호 일기장이 또 떨어지자 마침 아버지께서 월급을 타가지고 와 억지로 억지로 사정하여 돈 100원을 얻어 이 일기 책장을 샀다.’(머리말)
 
 
  6·25전쟁 직후 한 소년의 비망록
 
  송광용은 1934년생이다. 아마도 학교에 늦게 진학해 또래보다 성숙했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서울에 올라가 만화가로 데뷔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찬란한 문화도시의 건물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썼다. 당시 서울은 전후 폐허나 다름없었지만 소년의 동경은 달랐다. 물론 일기장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이 깊게 패 있다.
 
  ‘저녁에 큰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모두가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근심에 싸인 얼굴이다.’(4286년 12월 6일)
 

  1950년대 강원도 영월은 전쟁통이라고 해도 다른 지역보다 살기가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영월은 광산이 있던 덕에 “간주날(봉급날)이면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탄광인 마차탄광(해방 후 대한석공 영월광업소)도 이곳에 있었다.
 
  ‘제 동무 용태가 우리 집에 카메라(사진기)를 가지고 와서 나와 동생의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4286년 12월 21일)
 
  송광용은 영월중학교와 영월공고를 졸업한 후 만화가의 꿈을 이루려 상경했다. 그러나 서울의 냉혹한 현실을 접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울에 왔던 1962년 5월에 ‘서울 거리를 나서면 고개를 들기 힘들다. 평화당 인쇄 주식회사에 원서를 넣었지만, 2~3명 뽑는 데 70여 명이 지원했다 한다. 기분이 울적해 150환 주고 종로 화신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버스·전찻삯이 아까워 무던히 시내를 걸어 다녔다’고 적었다.
 
  현대 표기법에 따라 일부 문장과 단어를 고쳤고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은 주석을 달았다.
 

  1. 이것이 희망이고 장래의 꿈
 

  머리말
 
  ‘나의 마음과 이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
 
  ‘나의 태도와 이것을 보는 사람의 태도’
 
  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이것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지, 어떠한 비평을 할지 이것을 쓴 자는 모른다.
 
  나는 아마 이 일기 종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혼자 울었을는지도 모른다. 제11호 그림일기가 떨어지자 제12호 일기는 그냥 글씨만 썼다.
 
  12호 일기장이 또 떨어지자 마침 아버지께서 월급을 타가지고 와 억지로 억지로 사정하여 돈 100원을 얻어 이 일기 책장을 샀다.
 
  좋은 종이를 사서 쓰고 싶었으나 그것까지 살 형편은 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제일 값이 싼 종이를 사서 이 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이 그림이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난날 교감 선생님 및 여러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희망이고 장래의 꿈이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그림, 이것뿐이었다. 학교 가서도 수업시간에 여러 아이들의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매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가지 신기한 일은 수업시간에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를 나에게 묻지 않은 이것이 고마웠다.
 
  학급위원이라 해서 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런지 이것만은 고마웠다. 학급위원으로서 세상에 나같이 공부 못하는 놈은 없을 것이다. 사실 노력만 하면 우등생쯤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림의 꿈 때문인 것이다.
 
  끝.
 

  2. 아이들과 같이 놀고 싶지가 않았다
 

  4286년 12월 6일, 일요일
 
  오후에는 약간 산보 삼아 동무들 집으로 갔다. 국민학교 근처까지 가니 여러 아이들이 ‘제기’ ‘공’ 등을 가지고 즐겁게들 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여러 아이들과 어쩐지 같이 놀고 싶지가 않았다. 같이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귀에 들어가는 말도 없이 마구 떠들고 노는 그들과 같이 놀기 싫었고 다만 나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고 싶었다.
 
  용태는 친절한 동무다. 과거에는 학교를 갈 때나 놀 때도 그와 같이 놀았지만 현재에는 그의 집과 우리 집이 거리가 멀고 보니 이제는 만나는 날이 항상 적었다.
 
  저녁에 큰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모두가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근심에 싸인 얼굴이다. 더구나 형님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오늘날은 근심이 온 얼굴 위에 나타나듯 싶었다.
 

  3. 매일같이 동생과 둘이
 

  4286년 12월 8일, 화요일, 하늘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은 안개로 덮였다.
 
  겨울이건만 아직도 눈이 오지를 않아서 도무지 겨울 같은 마음이 나지를 않는 것이다. 그전 같으면 벌써 눈이 적어도 두 번쯤은 왔을 것인데. 이상하다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안개가 어찌나 끼었는지 먼지 같은 안개 알갱이가 흘러 다닌다. 매일같이 동생과 둘이 학교를 갈 때 여느 아이들과는 가지를 않고, 꼭 동생과 학교를 가기 때문에 아이들은 우리를 놀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때는 약간에 부끄러움도 있는 것 같았으나 기쁘기도 한 것이다. 오늘 학교 가는 길에는 떼를 지어 가기 때문에 우리들은 갈림길로 피해갔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발에 구령을 맞추어주는 것이었다.
 
  학교에 가서 ‘아주 두 형제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가던데? 아주 걸사해(그럴싸해? 근사해?-편집자)’ 이렇게 말하며 우리를 놀리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스운 것 같지만 어느 한 편 가슴속에는 기쁨이 솟아오른 것이다.
 
  오늘도 학교서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여러 아이들은 모두가 일을 열심히 했다. 나는 언제나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이다.
 
  영월중학교에 어떠한 학년이고 이 학교에 모범이 될 만한 학생이 있으면 꼭 학교 여러 선생님들과 연락하여서 1학년이든지 2학년이든지 3학년이든지 꼭 표창을 받게끔 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던 중에 오늘 우연히도 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어떤 약한 노인이 가느다란 팔로 도끼를 잡고 나무를 패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 유심히도 바라보고 그야말로 불쌍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또 조금 있다가 보니 그 아이는 농부가 소를 끌고 가는 것을, 또 여자가 나무를 해가지고 이고 가는 것을 무심히도 바라보고 슬픔을 참지 못하는 기세였다.
 
  보니 그 아이는 1학년이었다. 나는 불러서 “너는 왜서(왜 서서-편집자)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도 무심히 보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니요”라며 반색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고제종이며 이북 양양에서 넘어왔다고 말했다. 그의 형님은 경찰이고 부모는 없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마음만 가진 사람이 산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 것인가. 내일 교감 선생님에게 연락해서 칭찬을 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4. 고제종 군에 대한 편지
 

  4286년 12월 9일, 수요일, 하늘 구름, 비
 
  이렇게 마음먹은 나는 아침에 일어나 곧 고제종 군에 대한 편지를 썼던 것이다. 교감 선생님에게 올리기로 마음먹은 나는 커다랗게 똑똑하게 썼다. 혹시나 눈이 멀어서 읽기가 곤란할까 봐.
 
  이렇게 쓰느라고 학교에 가기가 매우 늦었던 것이다. 나는 다 써가지고 학교로 달음박질하여서 갔다. 그러나 늦지는 않고 학교서도 운동장에서 몇 분 동안 뛰어놀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곧 편지를 교감 선생님에게 전해 줄려고 마음먹었으나, 도무지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적당히 보아서 전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점심시간에 친구 황윤달 군이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하므로 갔다. 곧 그 친구가 밥을 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었다. 윤달이는 부모도 없고, 자기 누이하고만 같이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방을 보니 매우 재미있게 살아나가는 모양이었다. 점심이 끝난 후에 학교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공 받기니 배구니 하며 재미있게들 놀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덮여 비가 뚝뚝 떨어졌다. 기분이 나쁜 그런 마음도 들었다. 비가 오면 언제나 기분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시에 담임선생님한테 꾸중을 듣고 왔다. 아마 학급위원들의 활동량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 교련시간에는 교련을 하지 못하고 대신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농업중학교”니 “작업중학교”니 저마다 한마디씩은 다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올 때 요번에야 꼭 선생님에게 편지를 전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도무지 좋은 찬스가 생기질 않아 편지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망설였다.
 
  혹시나 누가 보고 연애편지나 아닐까 하고 말할까 봐 겁도 슬슬 났다. 편지에는 누가 썼다는 이름도 안 썼던 것이다.
 
  나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교무실 옆으로 갔다. 그때 1학년 학생이 있어 나는 그 아이를 불러서 편지를 교감 선생님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그랬더니 “송광용이 갖다주랬다고 그래요?” 하며 말했다. “아니야, 누가 날 보고 좀 교감 선생님에게 전해 달라고 하기에 그런 거야.”
 
  그 아이는 곧 교무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곧 책보를 끼고 집으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지금쯤은 교감 선생님이 보고 있을 터인데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걱정도 적지 않았다. 내일 학교에 가보면 알겠지?!!…
 

  5. 미국 영화 텍사스 용사들
 

  4286년 12월 10일, 목요일, 하늘 구름
 
  밤에 몹시도 칼바람이 불었다. 소변을 보러 밖을 나가니 매우 추운 날씨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높은 산에는 눈이 많이 내려 있었다. 금년도에 오늘이 처음으로 눈이 온 셈이다. 그러나 아직 근처에는 눈이 오지를 않아 눈을 직접 만져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 학교서는 인권옹호주간이라 식을 거행했다. 문득 교감 선생님이 눈에 띄자 어제 편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받아보고 무엇이라 했을까 걱정도 되고 마음도 두근두근했다.
 
  오늘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좀 늦게 돌아오시니 아이들은 뛰는 게 야단이었다. 싸움도 일어났던 것이다. 신발장에 있는 고무신으로 등줄기를 갈겨서 맞은 아이는 튼튼한 송판 쪼가리를 어디서 주어가지고 고무신짝으로 때리던 아이를 함부로 등을 내리치니 그만 그 아이는 쓰러졌다.
 
  딱. 딱. 죽을까 봐 겁났다.
 
  그때 영화 찍는 기계나 있었으면 한번 찍으면 근사할 것 같았다.
 
  어떤 아이는 고무 새총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함부로 아이들을 쫓아서 엉엉 우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흡사 미국 영화 텍사스 용사들의 술을 먹으며 술집에서 싸우는 광경 같다. 누가 어디서 숨어 본다면 참 우스울 것이다.
 

  6. 책보를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4286년 12월 11일, 금요일, 하늘 흐림
 
  아침에 일어나니 몹시도 추웠다. 겨울바람이 매우 쌀쌀하게 불었다. 학교를 갈 때 가슴을 웅크리고 벌벌 떨면서 갔던 것이다. 장갑을 끼지 않으니 손등이 새빨갛다.
 
  오늘 점심시간의 일이다. 여러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면서 놀았다. 딴 아이들은 이 술래잡기를 하지 않지만 나는 매우 즐겼다.
 
  오니(술래?-편집자)가 죽으면 죽은 사람과 전의 오니가 같이 잡는다. 이렇게 해서 맨 마지막에는 한 사람이 남고 모두가 오니가 되는 것이다. 매우 재미있는 놀이인 것이다.
 
  이것은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술래잡기를 하면서 놀다 보니 교감 선생님이 부르신다. 나는 앞으로 가면서 씩 웃는다. 교감 선생님도 같이 웃는다. 나는 무엇 때문에 웃는지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표창을 하라는 고제종 군의 편지 때문이다. 교감 선생님과 나 사이 말이 벌어졌다. 여러 아이들도 점점 모인다. 대강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교감 선생님이 “고제종 군보다 송광용이가 더 훌륭하지 않을까? 나는 고제종보다 송광용이에게 표창장을 주어야겠는데” 하며 웃는다. 나도 웃는다.
 
  교감 선생님은 내가 글씨 쓴 것이 여자 글씨 같다고 말씀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오랫동안 계속하다가 교감 선생님과 나는 서로 헤어졌다.
 
  나는 좀 부끄러운 그런 감이 났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남자로서 수줍은 편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같이 얌전하고 남자같이 씩씩하고 용감하고 활발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 보면 너무 욕심쟁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둘째 시간까지는 작업, 즉 우리 학급 환경정리를 하였던 것이다. 벌써부터 문이 망가진 것을 모두 고치고 문종이로 문을 바르고 환경을 아주 깨끗이 하였다. 선생님께서도 같이 협력하여서 일은 더욱 잘 진행되었다.
 

  7. 마음만은 항상 서울에
 

  4286년 12월 14일, 월요일, 하늘 맑음
 
  어젯밤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변소에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배가 끓고 팔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대단히 아팠었다. 아침에 학교 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한 듯 까마득하다. 1학년서부터 2학년 오늘까지 조퇴나 지각은 좀 했었지만 결석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꼭 학교에 갔다 와야 되겠다.
 
  조금 후에 아침밥이 들어왔다. 먼 옛날부터 상 위에서 밥을 못 먹어본 우리 가족은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자리 바닥에서만 먹어야 될 형편이다. 흰쌀밥이지만 도무지 먹고 싶지를 않았다.
 
  한 서너 숟갈 떠먹고 세수도 하지 않고 누덕누덕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로 간다. 골이 빙빙 돈다. 골이 깨어져서 사방으로 일렁거리는 듯싶었다. 도무지 학생들 틈에 같이 끼어서는 가기 싫었다. 아주 친한 사람이 있다면야 백리를 걷고 천리를 걸어도 다리 아픈 줄 모를 것이다.
 
  언제나 집을 나설 때나 들어올 때 자그마한 나의 집을 바로 본다. 시시한 집에 비해도 변소 턱밖에 되지 않는 집. 그러나 장차 훌륭한 집을 이루어 행복스럽게 살아가리라.
 
  지금은 고생이다. 겨울이 왔으면 반드시 봄이 오리라.
 

  8. 엄재국 군의 괴로움을 위로
 

  4286년 12월 16일, 수요일, 하늘 맑음
 
  하늘에 새털 같은 구름이 풀려 있다. 부드러운 솜이라 하면 좋을까? 갓난아기같이 폭 파묻혀 포근히 꿈나라로 가고 싶다.
 
  학교서 즐겁게 뛰어놀았다. 모두가 즐거운 얼굴이다. 바람도 없이 봄과 같이 따뜻하다. 외국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겨울이 뭐 이렇게도 따뜻하냐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삼한사온 역시 좋은 기후다. 겨울이라고 해서 매일과 같이 춥기만 하다면 겨울 맛도 없을 것 같다.
 
  뛰어노는 운동장의 아이들은 모두가 즐겁게 보였다. 누구 하나 외로움에 잠긴 사람은 없을 성싶다. 나는 사람의 그 가지각색의 성격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어제 대위원회 때, 내가 말한 것이 오늘 아침에 실천되었던 것이다. 교실 앞에 게시판이 없어서 그 불평을 말했더니 오늘 아침에 만들어놓았다.
 
  두 시간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발전소 있는 곳에 엄재국 군의 괴로움을 위로하러 갔다. 지난날 폭발물을 가지고 놀다가 폭발하여 오른손이 아주 못 쓰게 되었고 기타 몸의 상처가 심하여 요사이 학교에 못 나오기 때문에 위로하러 갔다 왔던 것이다.
 

  9. 만화가가 되려고
 

  4286년 12월 22일, 화요일, 하늘 맑음
 
  거리거리에는 크리스마스의 축하를 하기 위하여 매우 분주한 것이다. 더구나 국군아저씨들도 이 크리스마스에는 굉장한 놀이가 있는 모양이다. 벌써 어떤 집에는 문종이 초롱인 십자가를 만들어 문 앞에 걸어 놓은 것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재산이 풍부한 사람과 아주 가난뱅이 사람만 믿는 것이다. 풍부한 재산을 가진 자는 몸이 쉴 그러한 까닭으로 다닌다고 한다. 가난뱅이 사람은 거기서 덕을 좀 얻어볼까 하며 다니는 두 편이 있는 것 같은 것이다.
 
  나도 매일과 같이 서울에 갈 꿈을 꾸는 것이다. 뛰어놀 때까지도 서울을 꿈꾸는 것이다. ㅁ,ㅎ,ㄱ,(만화가. 처음으로 일기에 만화가의 꿈을 드러냈다. 얼마나 조심스러웠던지 ‘만화가’를 초성으로만 표기했다-편집자)가 되려고 꼭 그런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을 졸업 맡고(마치고-편집자)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되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올라가면 고생도 괴로움도 있을 줄 생각한다. 그것이 이루어지자면 그 모든 고난을 이겨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마 대한민국 어린들(어린이들-편집자)의 그 자랑과 배움을 보면 앞으로 얼마 나가지 않아 훌륭한 나라가 건설되리라고 나는 꼭 믿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 나라에 어떠한 물건 하나를 봐도 얼마만큼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인 이 나라에 이마만큼 훌륭한 물자가 나온다는 것도 드문 일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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