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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남시욱 저 《한미동맹의 탄생비화》

“말이 아니라 행동이 침략 세력을 억제할 것”(이승만)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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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휴전협상 초기부터 美에 상호방위조약 요구… 미국이 제안한 참전 16개국의 공동선언 거부
⊙ 美, 1953년 5월 말 국무부-합참 연석회의에서 상호방위조약 수용으로 방향 전환
⊙ 이승만, 로버트슨 美 특사와 12차례 회담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 합의
⊙ 로버트슨, “이승만은 미국 역사에 관해 철두철미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 이승만, “한국은 북아시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믿을 만한 요새가 되도록 노력할 것”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며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줄 것이다.”
 
  1953년 8월 7일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 가조인(假調印)이 있은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무척이나 예언적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로부터 불과 7년 후에 4·19로 하야(下野)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즉 한미동맹 덕분에 대한민국은 안전할 수 있었고, 그러한 안전보장을 바탕으로 경제 건설에 매진해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한미동맹은 아마도 김춘추(金春秋)의 삼국통일 외교와 더불어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큰 외교적 성취일 것이다.
 

  2020년 현재 미국의 동맹국은 60여 개국에 달한다. 그런데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게 된 경위를 따져보면 한국은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다. 다른 동맹국, 즉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29개국, 앤저스(ANZUS)조약을 맺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필리핀·태국 등 양자(兩者) 조약을 맺고 있는 33개국 등은 모두 냉전(冷戰) 시기에 미국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미국의 동맹이 된 나라들이다. 반면에 한미동맹은 한국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 그리고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 당시만 해도 미국의 전략상 한국은 우선순위가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였다. 그랬던 나라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쟁취(爭取)해낸 것이다. 미국이 그 전략적 가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나라, 미국의 관심을 끌 만한 자원도 없고 시장(市場)도 없는 나라,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 ‘빌어먹는 나라’가 미국의 멱살을 잡아끌고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에 선뜻 동의하기를 거부하면서 미국의 애간장을 태웠고, 휴전협정 조인을 40일쯤 앞둔 시점에서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해 자신이 언제든 판을 깰 수 있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 측 의사결정 과정 보여줘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하지만 외교란 상대가 있는 법이다. 상대는 냉전시대에 자유세계의 리더 역할을 하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었다. 그 때문에 한미동맹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의 입장은 어떠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받아들이게 됐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반추(反芻)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한미동맹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지난 70년 가까이 우리 자유와 번영, 안보를 지켜온 동맹을 망가뜨리려는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오늘날, 그 소중한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시사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로 언론인인 남시욱(南時旭) 전 《문화일보》 사장이 최근 펴낸 《한미동맹의 탄생비화》(청미디어 펴냄)는 참 의미 있는 책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면서 한미동맹을 성사시킨 그의 업적도 상당한 조명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동안 한미동맹 형성에 관한 국내 저작이나 논문들의 경우 ‘이승만 문서’에 기초한 내용이 많았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한미동맹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노심초사(勞心焦思) 고심참담(故心慘憺) 하는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다. 반면에 그렇게 이승만을 중심에 놓고 한미동맹 형성 과정을 볼 경우, 미국 측 입장은 상대적으로 작아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대한민국의 위상 차이를 상기하면, 실제 현실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한국 측 입장은 물론 미국 측 입장, 특히 한미동맹을 받아들이기까지 미국 측 의사(意思)결정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장점(特長點)이다.
 
 
  이승만, 미국의 립서비스 거부
 
  주지하다시피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휴전협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한국 정부는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해 8월 변영태(卞榮泰) 외무부 장관은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변 장관은 미국이 그해 7월 호주·뉴질랜드와 앤저스조약을 체결하고, 필리핀과 상호방위조약,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안보외교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통하다.
 
  하지만 6·25 이전에도 한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를 묵살했던 미국은 이번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조차 1953년 4월 18일 합동참모본부(합참)에 보낸 보고 전문(電文)에서 “현시점에서 양국 간의 안보조약 체결을 고려하지 않을 것을 건의한다”고 상신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3년이나 함께 피 흘리면서 싸웠건만, 미국 그리고 미국 군인의 눈에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입으로는 한국의 통일 열망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명예로운 휴전을 성취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배치되는 한국 정부의 조치는 한국에 오직 재앙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했다.
 
  미국은 립서비스로 이승만 대통령이 요구하는 한미동맹을 대신하려 했다. 월터 스미스 국무차관은 1953년 5월 22일 엘리스 브릭스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미국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한국에 가까운 지리적 근접성이 침략에 대한 억지력이 되고 있다. ▲휴전협정과 더불어 발표할 유엔의 제재강화성명(공산 측의 재침략이 있을 경우 참전 16개국이 공동으로 그에 맞서는 제재에 참여한다는 약속)이 미국이 한국의 장래 방어를 위해 계속적인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라면서 “현 상황에서는 대통령(아이젠하워)이 대한민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고려할 수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안전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공허한 다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에버레디계획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훼방하기 위해 취할 것으로 예견되는 조치들에 대해 보고했는데, 그중에는 ‘현재 유엔군사령부가 수용하고 있는 북한군 비(非)송환포로들의 일방적 석방’도 들어 있다. 이는 20일 후 반공포로 석방으로 현실화됐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면서,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빼내거나, 더 나아가 유엔군에 대해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경우 유엔군을 동원해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고 미국에 고분고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1952년 5월 3일 맥스웰 테일러 주한 미8군사령관이 입안하고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참에 보고한 ‘에버레디(Ever Ready)’계획이다. 이 계획 속에는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戒嚴)을 선포하고 이에 불복종하는 한국 군부(軍部) 및 민간 지도자들을 감금한 다음, 유엔군 사령부 명의의 군정(軍政)을 실시해 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이 추진하는 정전(停戰)협정에 동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실 미국이 이승만 정부 전복(顚覆) 계획을 꾸민 것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의 와중에서도 미국은 이와 유사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치적 선언’ 거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왼쪽 끝). 사진=조선DB
  이렇게 이승만 정부 전복 음모를 꾸미는 한편, 미국 정부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브릭스 주한미국대사를 5월 26일 경무대로 보내 다시 한 번 휴전협상에 대한 한국의 협조를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수 및 유엔군 철수 이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클라크 사령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방위조약 대신 만약 침략이 일어나면 참전 16개국이 돌아올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는 말로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며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방위조약뿐이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가 변하면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라며 클라크 사령관의 제안을 일축했다.
 
  클라크 사령관이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수 이후 방위조약 체결” 가능성을 시사(示唆)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도 “동시 철수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초강대국이자 대한민국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미국이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선언’은 무의미하다면서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조약’을, 그것도 중공군 및 유엔군 철수 ‘이전’에 체결되어야 한다고 완강하게 요구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은 ‘종전(終戰)선언’이라는 정치적 쇼를 위해 안달하는 문재인(文在寅) 정권의 행태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정치학을 공부했음을 떠올리게 된다.
 
 
  “무슨 권한으로 우리가 한국 정부를 접수하나?”
 
  이승만 대통령이 클라크 사령관 등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에버레디작전의 실행을 놓고 5월 29일 국무부-합참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일대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에버레디계획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고 나선 사람은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동아시아담당차관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권한으로 우리가 한국 정부를 접수하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말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참석자들 간에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졌다. 찰스 던캔 해군참모차장이 말했다.
 
  “이승만과 미국 사이에 가로놓인 마지막 문제는 우리가 그에게 안보조약을 체결해주느냐 않느냐인데, 이승만을 정상 위치에 남아 있게 하기 위해 안보조약을 체결해줄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나는 합참 멤버들인 각군(各軍) 참모총장들이 보기에 만약 주한미국대사관과 유엔군 최고사령관이 이승만과의 관계 파열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의 시각에 긴요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들에게 양국 간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할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조지프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나는 개인적으로는 양국 간 방위조약 체결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 보면 이승만이 일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 측의 곤혹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필요한 예비조치를 취할 권한”과 함께 “유엔군사령관의 재량(裁量)에 따라 위험하고 도발적인 상황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일 경우, 국무장관이 한국과의 양국 간 안보조약을 교섭하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이라는 점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 부정적이던 미국 국무부와 군부의 태도가 이날 회의를 계기로 180도 전환한 것이다.
 
  다음 날인 5월 30일 국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필두로 해서 국무부 및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의 연석회의가 다시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 정부가 휴전협정 체결과 시행에 동의하고,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존치시킨다는 조건 아래 미국-필리핀 방위조약과 앤저스(미국-호주·뉴질랜드)조약과 같은 수준의 양국 간 안보조약의 체결을 한국 측에 제안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결정을 재가(裁可)했다.
 
 
  “로버트슨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산파역”
 
  이 이야기를 길게 소개한 것은 미국의 대외(對外)정책이 결정되는 의사결정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외교·안보라인의 실무자들이 모여 치열하게 토론하고, 거기서 결정된 내용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면, 설사 그것이 기존의 상부 방침과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각료급, 그리고 대통령까지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미국의 시스템이라는 얘기다. 이런 하의상달(下意上達·bottom up) 방식이 일반적이고,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상의하달(上意下達·top down) 방식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 아닐까?
 
  5월 29일의 국무부-합참 연석회의에서 회의의 물굽이를 바꾼 사람은 에버레디계획의 정당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로버트슨 국무부 동아시아차관보였다. 저자는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산모(産母)라면 로버트슨 차관보는 산파(産婆)역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중국 대륙이 적화(赤化)되기 전 주중(駐中)미국대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강경 반공주의자였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국무부-합참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건의를 받아들인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냈다. 이 친서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은 결코 평화의 대가(代價)로 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제도를 팔아넘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지금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국제침략 세력을 억제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67년 전 미국 대통령에게 한 말이지만, 마치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했다. 사진=조선DB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6월6일자 답신(答信)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휴전협정 체결에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넙죽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6월17일자 회신(回信)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20세기 초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과 1945년 미소(美蘇)의 일방적인 38선 획정, 그리고 1950년 애치슨선언으로 북한의 남침을 촉발한 사실 등 미국의 전과(前過)들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한 번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한국에 베푸는 시혜(施惠)가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마땅히 갚아야 할 도덕적 채무(債務)라는 투였다.
 
  이 친서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다음 날인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뒤통수를 호되게 갈겼다.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미국 측도 금방 간파했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면서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휘권으로부터 철수시켜 대한민국 단독으로 북진통일 작전을 하겠다고 미국을 위협한 것이 결코 ‘허세’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포커 게임’을 하면서 반공포로 석방을 숨겨놓은 ‘에이스 카드’로 사용했다.”
 
  격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리는 친구 대신 다른 적(敵)을 얻은 것 같아 보인다”고 푸념하면서 “만약 이승만이 그런 행동을 계속하면 그것은 바로 ‘굿바이 코리아’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로버트슨의 訪韓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
  6·25전쟁이 발발한 지 딱 3년이 되는 1953년 6월 25일 미국 대통령 특사(特使)인 로버트슨 미 국무부 동아시아차관보가 서울에 도착했다. 여의도공항에 내린 그는 “한미 양국의 목적은 동일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수단’이 무엇인가를 조정하기 위해 내한(來韓)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수단’을 찾아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6월 26일부터 시작된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은 7월 11일까지 12차례나 계속됐다.
 
  첫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 문제는 거의 해결이 된 상태이고, 나머지 경제지원 문제와 군사지원 문제도 현재 가장 관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남은 문제는 휴전 후 개최되는 정치회담의 3개월 개최 시한 문제와 포로 문제”라고 말했다.
 
  여기에 고무되어서일까?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날 회담이 성공적이었다고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천천히 갔으면 합니다. 당신이 성공적이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은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많은 오해를 해소해서 장래가 희망적이라고 발표하지요.”
 
  가히 ‘밀당의 천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 계속되는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강하게 요구한 것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 ▲휴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 통일을 위해 개최되는 정치회담이 90일 내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에서 탈퇴한 후 한국 통일을 위한 군사작전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미 상원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었으나, 휴전협정 체결을 방위조약 체결 이후로 미룰 수는 없다. ▲미국 헌법상 선전포고(宣戰布告) 권한은 대통령이 아닌 상원에 있기 때문에 휴전협정 후 한국 통일을 위한 군사작전에 미국이 동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줄다리기가 계속되자 미국 국무부는 급기야 7차 회담 후인 7월 3일 로버트슨 차관보에게 철수해도 좋다는 훈령까지 내렸다.
 
 
  미국에 대해 잘 알았던 이승만
 
  그 다음 날 열린 8차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내비치며 로버트슨 차관보를 달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는 평생 동안 혁명가여서 말씨와 표현이 무뚝뚝하고 직설적입니다. 나의 말씨가 숨김이 없는 것처럼 나의 감정과 느낌도 순수합니다”라면서 “내 말씨 때문에 나의 진정한 감정을 잘못 판단하시지 말기를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슨 차관보는 “우리는 항상 이상적(理想的)인 것만 할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함께 가로막지 않는 실제적인 일만을 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우리는 앞으로 말이 아닌, 행동의 협정을 맺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7월 6일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역사에 관해 철두철미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협상한 조약을 상원에서 반드시 비준(批准)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대중적 지지를 잃어 그 이유 때문에 상원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동의할지에 약간의 의문을 갖고 있다. 이승만이 크게 우려하고 있는 바는 방위조약 없이는 한국이 다른 어떤 강대국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같은 그의 입장 때문에 현재 상황이 장래에 조약이 없을 시기를 맞아 생길 수 있는 상태 때보다 더 강하다고 그는 판단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협상 상대자인 미국의 정치시스템에 능통해 있고, 약자(弱者)이면서도 한국이 갖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당시 협상을 지켜보았던 로버트 머피 유엔군사령부 정전협상 담당 정치고문도 “이승만이 정치회담 실패의 경우 미국이 전투를 재개할 것을 약속하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수년간 정치학을 전공한 이로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임을 뻔히 알면서도 휴전협상을 망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 그런 발언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이승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가 행동의 자유를 유보하고 오로지 ‘수동적으로’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보고했다.
 
  결국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은 머피 고문이 예견한 대로 결말을 맺었다. 7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방해하지 않는 대신 ▲정치회담 기간을 90일로 하되, 만일 정치회담이 실패했을 때 전투 재개 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협의해서 결정한다. ▲한국과 미국은 휴전 성립 후 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을 조속히 체결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데 합의했다.
 
  7월 12일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차관보는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자기 목표를 향한 헌신적인 狂信徒”
 
  로버트슨 차관보는 자신의 진을 다 빠지게 만든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3년 7월 1일 국무부에 올린 보고서에서 이렇게 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략(智略)이 있는 거래 상대인 동시에 자기 나라를 자살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고도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狂信者)이다.…
 
  그는 단지 여론에 좌우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이미 미국과 동맹국들의 계속되는 논란과 욕설의 대상이 되고 있고, 미국과 세계의 여타 지역에서 여론의 지지를 상실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그의 나라를 아마도 우리 미국을 포함한 세계 어느 다른 나라와도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공산주의와 싸울 결의와 의지를 갖도록 각성시켜놓았다. 그 같은 정신과 용기는 보존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자면 미국이 무장시킨 그의 군대는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이자 최고로 효율적인 반공 군대이며, 미국 편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몹시 필요한 존재이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은퇴한 후인 1967년 4월에는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처럼 자신의 목표를 향한 헌신적인 광신도이며 완고하다. 이승만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는 멋진 노인이었으며 진정한 철학자이고, 미국 고전과 중국 고전에 통달한 최고의 고전학자의 한 사람이자 시인(詩人)이며 세계 최고의 서예가이며 세계 최고의 낚시꾼이기도 하다. 그는 별 할 일이 없을 때에는 낚시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낚시터가 그가 사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반공주의에 대한 광신적이고 정신병적인 헌신-그는 한국에 대해 과거에 저지른 소행들 때문에 일본인들을 공산주의자들만큼이나 증오한다-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면 그리고 그의 일생에서 그 부분을 떼어낸다면 그보다 매력적이고 다정하고 신사다운 노인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공적 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어려운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한미방위조약, 일본으로부터도 한국 방위”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사진=조선DB
  그해 8월 4일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은 4차례 회담을 갖고 한미상호방위조약, 휴전협정 이후의 정치회담 대책 등에 대해 논의했다.
 
  덜레스 장관과의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지는 못했다. 중공군을 한반도 밖으로 몰아내고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재개해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대해 덜레스 장관은 “미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의(不義)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할 수는 없다” “독일 통일을 위해 미국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대꾸했다. 세계에서 독재 정권들을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전쟁도 불사했던 21세기 초 네오콘(Neocon)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 조항도 얻어내지 못했다. 대신 이 부분은 후에 주한미군 지상군 부대들을 경기북부 지역에 배치해 인계철선(引繼鐵線)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으로 보완됐다.
 
  하지만 덜레스 장관은 “미국과 한국은 동맹국이자 긴밀한 동반자가 되어 누구든 한국을 건드리면 미국을 건드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세계가 알도록 해야 한다. 이 공식을 넘어가면 재앙이 있을 뿐이다”라고 다짐했다. 덜레스 장관은 또 “조약은 대한민국을 소련과 똑같이 일본으로부터도 방위하는 이득을 갖고 있다”고 확인해주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바였다.
 
  8월 8일 아침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다.
 
 
  1954년 11월에야 비준서 교환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종종 ‘북진(北進) 통일’ 카드를 꺼내 들어 미국을 긴장시켰다. 미국은 에버레디계획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이런 갈등 때문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월에 양국 국회에서 비준되었지만(한국 국회는 1월 15일, 미국 상원은 1월 28일), 그해 11월 17일에 이르러서야 비준서가 교환됐다.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는 이날 이렇게 말했다.
 
  “이 조약은 한미 양국이 한국이든 아시아 기타 지방이든 혹은 미국이든 유럽 혹은 세상 어느 지방에서든 간에 공산 침략에 대항해 자유를 수호하는 데 뭉쳐 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단결하여 자유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우의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한 결의의 첫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벼랑 끝 외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외교는 거래라는 것, 그리고 ‘외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교한 외교의 전범(典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미(對美)외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對美 외교의 성공요인
 
  첫째, 상대방인 미국의 정치시스템, 의사결정 과정, 역사, 국제법 등에 정통해 있었다.
 
  둘째, 반공·자유·민주·기독교 등 공통의 가치관에 호소할 줄 알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로버트슨 차관보 등 미국 측 인사들도 기본적으로 그런 가치관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큰 행운이었다.
 
  셋째, 자존심을 지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에게 준 도움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도, 비록 그런 처지에 있지만 대한민국이 미국을 위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제시했다. 그는 “한국전쟁은 ‘공동의 대의(大義)’를 위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범(汎)세계적 투쟁”이라면서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치른 희생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군이 아시아에서 ‘반공헌병’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내세우기도 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58년 공산주의자들과 내란 중이던 라오스에 1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미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이 제안은 후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월남 파병으로 현실화되었다. 외교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인 법이다.
 
  넷째, 약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일방적으로 매달리지 않고 필요하면 판을 깰 수도 있다는 위협도 적절히 구사했다.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한 것이 그 예이다.
 
  다섯째, 한국과 미국의 힘을 정확하게 형량(衡量)하고, 큰 차원에서 봐서 원하던 바를 얻었을 때에는 타협할 줄 알았다.
 
 
  이승만의 당부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1952년 12월 3일 당선인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트슨 차관보와의 협상이 끝난 후인 1953년 7월 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전략적 위치는 우리가 명백하고 의문의 여지 없이 강하지 않으면 항상 러시아·일본·중국에 타국(他國)에 대한 침략의 통로로서 우리를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를 위한 순수한 안보 제도가 한국의 독립과 한국의 국력(國力)이라는 강력한 기초 위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1953년 8월 3일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의 협상을 앞두고 작성한 비망록의 마지막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적었다.
 
  〈한국은 이미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현대에 들어와 최악의 파괴를 감내하도록 만든 반공, 친(親)민주, 그리고 친미적(親美的) 정책의 지속에 스스로 충실할 것을 맹세하고 있다. 미래에도 과거처럼 한국은 북아시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믿을 만한 요새가 되고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한 초석(礎石)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다짐이자, 후손들에게 주는 당부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미합중국주재대한민국특명전권대사’라는 사람이 “한국이 70년 전에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70년간 미국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공언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는 선대(先代)가 70년 전에 ‘미국을 선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고,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보내며 노심초사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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