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대사 비록

《毛澤東, 인민의 배신자》에 나타난 마오쩌둥의 親日

장제스군 약화시키려 스파이 통해 일본군에 정보 넘겨

글 : 박상후  前 MBC 시사제작국 부국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중국공산당항일10대강령〉 발표하면서 뒤로는 “애국주의에 현혹되면 안 되며 前線에서 抗日영웅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시
⊙ 마오쩌둥, “일본군이 우리 중국에 進攻한 것에 감사”… 한 번도 난징대학살 거론 안 해
⊙ 장제스와 중국침략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쟁탈전 벌이기도

朴商厚
1968년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동아시아학과 석사 / MBC 베이징특파원·전국부장·문화부장·국제부장·시사제작국 부국장 역임
  지난 1월 2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인민대회당에서 〈타이완 동포에게 고하는 서신(告臺灣同胞書)〉 발표 40주년을 기념하며 “중국인은 중국인을 때리지 않는다(中國人不打中國人)”란 말을 했다. 중국과 타이완은 같은 동포니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타이완 동포에게 고하는 서신〉은 1979년 초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처음 발표한 것으로 타이완을 목표로 한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타이완에 대해 평화를 외치면서도 끊임없이 타이완 해협 주변에서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동원해 무력(武力)시위를 하고 있다.
 
  시진핑이 거론한 “중국인은 중국인을 때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1936년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 전 마오쩌둥(毛澤東)이 항일구국(抗日救國)을 하자면서 내세운 구호다. 당시 국민정부군은 홍군(紅軍)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는데, 심리전(心理戰)의 천재인 마오쩌둥의 이 구호에 둥베이(東北)대학 학생들이 흔들려 “이제 국민당군과 공산군이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면서 시위를 벌여 여론을 확산시켰다. 장쉐량(張學良)도 이 구호에 휘둘리는 바람에 시안사건(西安事變)을 일으켜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라 국공합작을 이뤄낸다.
 
  마오쩌둥은 “중국인은 중국인을 때리지 않는다”는 구호를 국민당군의 패색(敗色)이 짙어가던 1948년에 또다시 사용한다. 쉬저우(徐州)에서 공산군에 며칠을 포위돼 탄약과 식량이 바닥나는 상황에 몰린 국민당군이 이 구호를 믿고 항복하거나 자포자기해 탈영했다.
 
 
  장시로 간 시진핑
 
  미중(美中) 무역분쟁 과정에서 시진핑은 5월 20일 희토류(稀土類)를 대미(對美) 반격카드로 꺼낸다는 점을 시사(示唆)하기 위해 장시(江西)성 간저우(州)시 장시진리융츠과기(江西金力永磁科技)라는 업체를 방문했다. 이에 앞서 중국 관영 CCTV는 대미항전을 고취시키는 전쟁영화 7편을 연속 방영했다. 마오쩌둥의 인민전쟁, 지구전(持久戰)처럼 끝까지 미국의 공세에 대항하자면서 민족주의를 부추긴 것이다.
 
  시진핑이 시찰한 장시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931년 11월 마오쩌둥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창설한 곳이 바로 장시성의 루이진(瑞金)이다. 그리고 1934년 국민당군을 피해 도주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루이진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가 이끌던 홍군 제1방면군과 각지에 흩어져 있던 30만명의 공산군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처음에는 서북으로 도주한다.
 
  도보로 1만5000km를 주파한 이 패주(敗走) 과정을 마오쩌둥은 훗날 ‘북상항일(北上抗日)’이라 했다. 그러나 공산군을 추격한 것은 국민당군이었고, 일본군이 없는 서북으로 ‘도망가라’고 타전한 것은 코민테른이었다. 여차하면 소련으로 도주할 계산도 있었는지 무전기와 인쇄기 등 코민테른과 연락할 수 있는 도구들을 지닌 채 도주했다.
 
  보통 이 패주 과정을 ‘대장정(大長征·the Great March)’이라는 거창한 용어로 포장해 탄도미사일 이름으로도 명명된다. 하지만 ‘대장정’에 참여했다가 신(新)중국 탄생 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지낸 수위(粟裕)는 회상록에서 “항일의 목적은 없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공농(工農)홍군의 북상항일선언〉을 내는가 하면, 〈일치단결해 일본제국주의를 중국에서 몰아내자〉는 선전 삐라는 160만 부 이상 인쇄해 배포했다. 중국인들은 이 선전을 믿게 됐다.
 
 
  “戰力의 10%만 對日작전에 사용하라”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왼쪽). 펑더화이는 백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마오쩌둥의 질책을 받았다.
  1937년 8월 22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는 산시(陝西)성 뤄촨(洛川)현에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연다. 이를 뤄촨회의라 한다. 여기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라’ ‘항일을 위해 민족은 단결하라’는 〈중국공산당항일10대강령〉을 결의한다. 하지만 이는 인심을 장악하기 위한 선전문구에 불과했다. 그 이면으로는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은 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홍군 제4방면군 군사위원회 주석이던 장궈타오(張國燾)의 회상록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애국주의에 현혹되면 안 되며 전선(前線)에서 항일영웅이 돼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린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전력(戰力)의 70%는 공산당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20%는 (국민당과의) 타협을 위해, 나머지 10%는 대일(對日)작전에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워 팔로군(八路軍)이 강하다고 알려지면 일본군이 전력을 집중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제1선에 나서서 전투하는 것을 엄금(嚴禁)했다.
 
  그러나 전장(戰場)의 장수들은 적을 이겨 전과(戰果)를 올리고 싶은 결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펑더화이(彭德懷)의 백단대전(百團大戰)이다. 이는 펑더화이 팔로군 부총사령관이 백 개의 단(團)을 조직해 1940년 8월 일본군과 정면에서 싸운 전투로 일본군의 보급망에 커다란 손실을 입히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그 정도 눈에 띄는 전투를 하면 안 된다”고 격하게 질책했다.
 
  백단전투 외에 공산군이 일본군과 크게 싸운 전투는 평형관(平型關)전투 정도가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경우는 소규모의 후방 게릴라전과 일반인과 국민당 병사들을 목표로 한 선전과 세뇌 작업이었다. 제1선에서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공산당은 배후에서 세력 확장에만 골몰했다.
 
 
  장제스軍 약화시키려 일본군에 정보 팔아넘겨
 
장제스군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팔아넘긴 공산당 스파이 판한녠.
  1939년 마오쩌둥은 판한녠(潘漢年)이라는 스파이를 상하이(上海)에 있는 일본첩보기관 ‘이와이공관(岩井公館)’에 잠입시켜 외무성의 이와이 에이이치(岩井英一)와 친숙해지도록 했다. 이와이 에이이치는 판한녠에게서 국민당군에 관한 군사정보를 취득했다. 그 대가로 고액의 정보제공비를 지불했다. 판한녠은 보름에 한 차례씩 당시 경찰관의 5년 치 급여에 해당하는 2000홍콩위안을 받았다. 상당한 거액이어서 이와이 에이이치는 외무성 기밀비를 너무 낭비했다는 이유로 이후 광저우(廣州)영사관으로 좌천될 정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판한녠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중공군과 일본군 간의 정전(停戰)을 제의했다는 사실이다. 판한녠은 당시 일본 육군참모본부 산하 ‘매(梅)기관’이라는 첩보기관을 운영했던 가케사 사다아키(影佐禎昭) 대좌를 통해 일본의 괴뢰정권이었던 왕자오밍(汪兆銘)의 특무기관 ‘76호’와도 내통했다.
 
  1936년 이후 형식적이긴 하지만 제2차 국공합작을 했기 때문에 중공군이 국민당군의 군사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쉬웠다. 일본이 전쟁에서 싸운 것은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국민당군에 관한 군사정보를 얻는 것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중공군은 국민당으로부터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당군에 대한 군사정보를 일본 첩보기관에 팔아넘겼다.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 토사구팽당한 판한녠
 
中日관계 개선에 기여한 랴오청즈.
  영화 〈색계(色戒)〉의 실제 무대던 상하이 일대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 같은 첩보전에는 판한녠, 랴오청즈[廖承志·쑨원(孫文)의 좌파 동지던 랴오중카이(廖)의 아들], 여성스파이 관루(關露) 등 여러 인물이 활약한다.
 
  이 가운데 장제스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과 공모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활약했던 판한녠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자 마오쩌둥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됐다. 그는 1977년에 옥사(獄死)한다. 마오의 책략을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매국노(賣國奴)로 몰아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한 그는 죽은 지 5년 후인 1982년에야 명예가 회복됐다.
 
  스파이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랴오청즈였다. 그는 판한녠에 비해 일본 측과 덜 밀접해 ‘비밀을 지나치게 많이 아는 자’는 아니었던데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와세다대학을 다녀 일본어에 능통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랴오청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자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副部長)과 국무원 외사판공실 부주임을 역임하면서 일본의 다카사키 다쓰노스케(高達之助)와 협력해 1962년 중일장기종합무역각서에 조인하는 등 전후(戰後) 대일관계 개선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본군과 공모해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은 전후에도 ‘다시 한 번 일본군을 이용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오가 신중국을 세웠지만 유엔은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을 승인해준 국가도 매우 적었다. 한국전쟁에 개입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여러 나라를 적으로 돌리게 된 것도 외교 고립의 한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중국을 국가로 승인해주도록 힘을 쏟았다.
 
 
  장제스, 일본군사령관을 군사고문으로 활용
 
마지막 지나파견군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마오쩌둥은 일본어에 능통한 랴오청즈를 통해 전쟁 당시의 일본군 장성을 베이징(北京)에 초청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국민당군에 앞서 일본군의 무기와 항공기 개발 기술을 확보하려 했던 공산군은 일본군의 효용성을 높이 산 것이다.
 
  또 마오쩌둥은 장제스에 호감을 가진 최후의 지나(支那)파견군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이 중화민국 편에 서는 것을 우려했다.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한 후 “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에 보복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일본군 포로를 ‘도수관병(徒手官兵·무장이 해제된 병사)’이라고 부르면서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오카무라 대장도 장제스의 배려로 전범(戰犯) 신세를 모면하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이에 감격한 오카무라는 비밀리에 군사고문단을 결성, 장제스의 대륙 탈환 노력을 돕게 된다.
 
  마오쩌둥도 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오카무라를 자기편으로 끌어오려 했지만 오카무라는 방중(訪中)을 거절한다.
 
  오카무라 대신 전(前) 일본군 대표로 방중한 이는 엔도 사부로(遠藤三) 중장이었다. 이때 통역을 담당한 이가 랴오청즈였다. 1956년 마오쩌둥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엔도 사부로 일행에게 “일본군이 우리 중국에 진공(進攻)한 것에 감사한다. 그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흩어진 모래 같던 인민이 단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침략’이나 ‘침공’이란 어휘를 일부러 피했다.
 
  이후에도 많은 일본인이 마오쩌둥을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하는데도 마오쩌둥은 싫증이 났는지 “황군(皇軍)에 감사한다”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마오는 1964년 7월 10일 일본사회당의 사사키 고조와 구로다 히사오 등이 방중했을 때도 “국민당에 패주해 홍군의 병력이 30만명에서 2만5000명으로 줄었지만 일본군이 국민당군과 싸워주는 8년 동안 120만 군대로 늘어 기사회생(起死回生)했으니 어찌 일본의 황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장쩌민의 아버지는 친일파
 
  마오쩌둥은 홍군이 용감하게 일본군과 싸웠다고 선전하고 인민을 세뇌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을 경축한 적은 없다. 공식적으로 항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것은 당시 연합국 측인 장제스를 찬양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항일전승기념일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축하하기 시작한 것은 장쩌민(江澤民)이다. 1995년 9월 3일 ‘세계반파시즘전쟁기념일’과 병합해 경축한 것이 시초다.
 
  장쩌민의 아버지는 왕자오밍 친일괴뢰정권의 선전부 부부장을 지냈다. 나름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 출신인 장쩌민은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사교댄스를 추고 피아노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이 패전하자, 허둥지둥 중국공산당에 접근해 결국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에까지 올랐다. 장쩌민은 이런 자신의 출신성분이 중국 인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반일적(反日的)인지 보여주기 위해 장쩌민은 1994년부터 시작한 ‘애국주의 교육’을 통해 필사적으로 반일 선동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항일전쟁 승리와 이에 따른 애국주의 반일교육은 후진타오(胡錦濤) 정권을 거쳐 시진핑 정권 들어 더욱 강화된다. 특히 2015년 7월 7일(중일전쟁 발발일)부터 9월 3일까지 중국의 중앙텔레비전 CCTV는 매일 뉴스 뒤에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라는 항일전쟁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연속해서 방영했다. 마치 현재 중국 인민이 항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한 격렬함이 넘쳐났다.
 
  시진핑 정권의 반일 기조는 2018년부터 시작된 미중(美中) 갈등으로 다소 수그러들었다. 대신 대미(對美) 민족주의 선전 공세로 전환됐다. 시진핑 정권은 미국과 무역, 과학기술 전쟁을 벌이면서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유령을 불러내면서 마오의 인민전쟁을 다시 부르짖고 있다.
 
 
  마오쩌둥, 한 번도 ‘난징대학살’ 거론하지 않아
 
마오쩌둥의 이면을 고발한 《모택동 인민의 배반자》의 저자 엔도 호마레.
  마오쩌둥은 ‘난징(南京)대학살’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육현장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는 중국 인민의 반일감정과 일본 국민의 반중(反中)감정을 억제함으로써 일본을 장제스의 타이완이 아닌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난징대학살’이 발생했을 시기 마오쩌둥의 홍군은 옌안이라는 깊은 산중에 도주한 상태여서 일본군과는 그다지 전투를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1953년 2월 이래 20여 차례 난징을 방문했지만 단 한 번도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을 언급한 적이 없다. ‘난징대학살’이 중국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다. 난징대학살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 건립된 것도 중일전쟁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일본의 물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엔도 호마레(遠藤78) 쓰쿠바대 명예교수가 2015년 펴낸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원제: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사나이)》 에 나오는 얘기다. 엔도 박사는 현대 중국의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 중국 학자다.
 
 
  창춘 포위에서 살아남아 중공의 실상을 알리다
 
  엔도 호마레 박사의 부친은 마약 치료약 제조 기술로 아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중국 지린(吉林)성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이 때문에 엔도 박사는 중국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만주국 시절 신징(新京)으로 불린 창춘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소련군과 국민당군, 공산당군이 번갈아 점령했던 도시다.
 
  엔도 박사는 7세 소녀 시절 공산군이 창춘에 진입했을 때 팔에 유탄(流彈)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는 당시의 참상을 이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한다. 1948년 5월부터 10월까지 린뱌오(林彪)가 지휘하는 20만명의 공산군은 국민당군을 섬멸하겠다면서 창춘을 완전 포위하고 수도와 전기, 식량을 두절시킨다. 공산군이 포위를 위해 쳐놓은 철조망과 국민당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구축한 철조망 사이의 오도 가도 못 하는 공간을 ‘카쯔(子)’라고 한다. 여기에는 아사자(餓死者)들의 시신이 쌓여만 갔다. 카쯔뿐 아니라 창춘시 전체에서 최소 10여만명에서 최대 65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엔도 박사는 신중국 탄생 이후 살해된 ‘중국 인민’은 대략 7000만명 선으로 추정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많은 자국민(自國民)을 살해한 자는 마오쩌둥밖에 없다. 이는 전쟁 때문이 아니라 국가 건설에 따라 국민이 행복해져야 할 시기에 살육된 국민의 수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전쟁 시기에 마오가 중국의 제왕(帝王)이 되기 위해 중국 인민을 배신하고 일본군에 팔아넘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조회 : 4052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08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