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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기행

한국 근대사를 흔든 ‘維新의 심장’ 가고시마에 가다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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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시마(사쓰마)는 야마구치(조슈)와 함께 메이지유신의 양대 주역
⊙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유신 성공시킨 후 征韓論 주장하다가 몰락… 오쿠보 도시미치, ‘관료국가 일본’ 原型 만들어
⊙ 작은 마을 가지야초,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야마 이와오, 도고 헤이하치로 등 배출
⊙ 시마즈 나리아키라, 자기 별장 센간엔에 제철시설, 유리 공장, 도자기 공장 등 만들어 근대화 추진
⊙ 일장기·기미가요의 고향, 임진왜란 때는 陶工들 납치해 가고 이순신 장군 전사시켜
세이난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시로야마전망대에서 바라본 사쿠라지마. 가고시마의 상징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수시로 분화하는 활화산이다.
  ‘가고 싶은 가고시마.’
 
  오래전 일본 가고시마(鹿兒島)현 관광국이 서울시내에 내걸었던 광고 문구다. 이 광고 문구처럼 가고시마는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고시마는 그렇게 유쾌한 곳은 아니다. 1598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은 사쓰마(薩摩·가고시마의 옛 이름)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함대와 전투 중 전사(戰死)했다. 사쓰마번은 전쟁 중에는 수많은 조선 도공(陶工)을 납치(일본인들은 ‘연행’이라고 표현)해 갔다. 우리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 일본 국기 일장기(日章旗)는 원래 사쓰마의 함선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강화도조약의 빌미가 된 운요(雲揚)호 사건(1875)을 일으킨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도 사쓰마 출신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을 불쾌하게 하는 기억은 사쓰마 출신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제창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1828~1877)일 것이다.
 
  내가 가고시마에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것도 사이고 다카모리, 아니 그가 원훈(元勳) 중 하나로 꼽히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마침 금년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본 NHK는 이를 기념해 금년 한 해 동안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재로 한 대하사극 〈세고돈〉을 방영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형제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터를 돌아보는 관광객들. NHK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재로 한 대하사극 〈세고돈〉을 방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을 주장했던 침략의 원흉(元兇)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왜일까?
 
  아마 메이지유신의 1등 공신이면서도, 유신 이후 몰락해 가는 사무라이들과의 의리(義理) 때문에 자신이 세운 메이지 정부에 반역했다가 비명(非命)에 간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직정적(直情的)이고 솔직담백하며 포용성 있고 정(情)이 많은 그의 품성도 일본인들을 매료시키는 요소이다.
 
  당연히 가고시마의 메이지유신 탐방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궤적을 따라가는 게 된다. 시작은 가지야초(加治屋町)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에서 시작된다. 가고시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중앙역이나 텐몬칸(天文館)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쓰구미치(從道·가고시마에서는 ‘주도’라고 함)도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사이고 쓰구미치는 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동조하지 않고 메이지 정부에 남았다. 해군대신·문부대신·내무대신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해군 원수(元帥·육해군 대장 가운데 공이 많은 군인에게 천황이 부여한 명예 칭호)·원로(元老·국가에 공로가 많은 신하에게 천황이 내린 최고의 명예 칭호)까지 지냈다.
 
  NHK 드라마 〈세고돈〉 덕분일까?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쿠보 도시미치, 요시다 시게루, 아소 다로
 
  사이고 형제의 집에서 150m쯤 떨어진 천변(川邊)의 녹지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강변 둑에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다. ‘성공한 근대화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곳이 바로 메이지유신 3대 원훈 중의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의 생장지(生長地)다.
 
  오쿠보와 사이고는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아버지가 정변(政變)에 연루되어 유배된 후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오쿠보는 배를 곯다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지면 사이고의 집으로 갔다. 사이고 형제는 오쿠보가 밥상에 끼어들면 아무 말 없이 자기들의 밥을 덜어주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또래들과 사쿠라지마(櫻島)까지 헤엄을 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오쿠보를 살려준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은 막부를 타도하고 유신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둘도 없는 동지였다. 하지만 후일 그들은 정한론 때문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 정부 초기에 내무경(內務卿)을 지냈다. 행정·지방·경찰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무행정은 물론 산업·교육·언론·보건복지 등 그야말로 모든 국내 정책을 관장하는 자리였다. 오쿠보는 사실상의 총리였다. 오쿠보는 신정부의 관료제도를 정비하고,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이라는 이름의 경제건설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관료국가 일본’의 원형(原型)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오쿠보였다.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풍운아와 함께 오쿠보 같은 경세가(輕世家)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일본의 행운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장지임을 알리는 비석 근처에 또 다른 비석이 있다.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1861~1949)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마키노는 메이지~쇼와(昭和)시대의 정치가로 외무대신·문부대신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특히 1930년대에 히로히토 천황의 고문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키노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그의 아버지가 바로 오쿠보 도시미치이기 때문이다. 노부아키는 마키노 가문의 양자(養子)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버지와는 다른 성(姓)을 쓰게 된 것이다. 마키노의 사위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4번에 걸쳐 총리를 역임하면서 부흥을 이끈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다.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가 아소 다로(麻生太郞·1940~) 전 일본 총리(현 부총리 겸 재무대신)이다.
 
 
  ‘유신의 고향’
 
고쓰키가와 川邊에 휘날리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 깃발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유신후루사토관’이고, 그 앞쪽이 오쿠보 도시미치가 자란 곳이다.
  오쿠보 도시미치 생장지 옆에는 ‘유신후루사토관’이라는 메이지유신기념관이 있다. ‘후루사토’란 ‘고향’이라는 뜻이다. 메이지유신의 또 다른 축이었던 야마구치(山口·옛 이름 조슈)가 ‘유신의 발상지’ ‘유신의 책원지(策源地)’임을 자처하듯이 가고시마(사쓰마)는 ‘유신의 고향’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유신의 고향’ 가고시마에서도 가지야초는 유독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에서 북동쪽으로 170m쯤 떨어진 곳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총사령관이었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巌·1842~1916)의 생가터가 있다. 오야마 이와오는 메이지유신 후 자신이 좋아하던 옛 시가(詩歌)에 곡을 붙여 군가(軍歌)로 삼았는데, 이것이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됐다. 여기서 길을 건너면 가고시마중앙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우측 면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4)의 생가터가 있다. 여기서 350m를 더 올라간 곳에서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대신으로 후일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야마모토 곤베에(山本兵衛·1852~1933)가 태어났다. 불과 500여m를 사이에 두고 일본 근대사를 만든 주역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유신후루사토관은 막부 말기 및 메이지유신 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의 유품과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료(史料)들을 전시하고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입었던 바지, 러일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입었던 해군 예복 등이 눈길을 끈다.
 
 
  갑돌천, 고려교, 고려마을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 오쿠보는 ‘관료국가 일본’의 원형을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장지 및 유신후루사토관 앞을 흐르는 작은 내(川)의 이름이다. 고쓰키가와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甲突川(갑돌천)’이라고 쓴다. ‘갑돌이’ ‘갑순이’ 할 때의 ‘갑돌’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오쿠보는 원래 고쓰키가와 건너 고라이마치(高麗町·고려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지야초와 고라이마치를 잇는 다리의 이름은 고라이바시(高麗橋·고려교)이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가고시마 출신임을 자랑하는 일본 청년들에게 “일본에서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예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 가고시마”라고 일갈했다던데,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유신후루사토관을 나와서 가고시마중앙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새파란 하늘 아래 고쓰키가와를 배경으로 멋진 신사의 동상이 서 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이다. 동상의 오쿠보는 서양인들도 울고 갈 정도로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수염은 ‘가발’이라고 한다. 서양을 순방했을 때, 서양의 귀족·고관들이 멋진 수염을 가진 것을 보고 수염을 길러보려다가 여의치 않자 ‘수염 가발’을 사 왔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서양을 따라잡으려 안간힘을 쓰던 당시 일본인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고라이바시 남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가터를 찾아가 보았다. 앞서 들렀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장지에서 직선거리로 500m쯤 되는 곳이다. 주차장 한구석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그런데 오쿠보의 생가터에서 불과 50m쯤 떨어진 곳에 또 다른 표지석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1845~1929)의 생가터였다. 이노우에 요시카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는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운요호의 함장이었다. 운요호 사건 당시 해군 소좌였던 그는 후일 해군 원수까지 승진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첫걸음이 된 운요호 사건의 유발자가 ‘고려마을’ 출신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 측 특명전권대사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구로다 기요타카(田隆·1840~1900)도 사쓰마 출신이었다. 구로다는 제2대 총리로 ‘대일본제국헌법’을 발포(發布)한 인물이다.
 
 
  데루쿠니신사
 
가고시마 중앙공원 인근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서양식 군복 차림이다.
  다음날. 걷는 데도 한계가 있다 싶어 가고시마 시티뷰(city view) 버스에 올랐다. 가고시마 시내의 주요 사적지 대부분을 도는 버스다. 600엔짜리 티켓(1일권)을 사면 하루에 몇 번이고 승하차가 가능하다. 티켓은 버스에서도 살 수 있다. 시티뷰 버스뿐 아니라 시내 노면전차(트램)나 공영버스, 사쿠라지마행 페리, 사쿠라지마 아일랜드 뷰 버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가고시마 큐트 티켓도 있는데, 1200엔(1일권)이다.
 
  버스에서 ‘사이고 도조 마에(사이고 동상 앞)’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차창 밖으로 서양식 군복 차림을 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보인다. 메이지유신 성사 직후 육군 대장, 근위도독(近衛都督)으로 위세 당당하던 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원래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록(家祿) 47석에 불과한 하급 무사의 아들이었다. 역사의 격랑을 타지 못했다면, 그는 일본에서도 유달리 엄격했던 사쓰마의 사무라이 위계질서 아래서 피곤한 인생을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 갔을지도 모른다.
 
  사이고 동상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데루쿠니신사(照國神社)가 있다. 가고시마의 야스쿠니(靖國)신사라고 할 만한 곳이다. 경내에는 메이지유신 후 신정부와 막부파 간의 내란이었던 무진(戊辰)전쟁(1868~1869)이나 태평양전쟁 전몰자, 원폭(原爆) 희생자 등을 기리는 비(碑)들이 서 있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막부 말~메이지 시기 사쓰마를 이끌었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 1809~1858),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1817~1887),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1840~1897)의 동상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사쓰마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시마즈 집안의 가신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운명도 이들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
 
 
  시마즈 가문
 
사쓰마번은 영주인 시마즈 가문의 별저인 센간엔 일대에 근대 공업시설을 만들었다.
사진은 기계공장이던 슈세이칸의 모습이다.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16세기 후반부터 남규슈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다. 일본의 패권을 놓고 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맞섰다가 패하기는 했지만, 사쓰마번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내내 비(非)도쿠가와계 번 중에서는 최대 규모, 일본 전역을 통틀어 세 번째 규모의 웅번(雄藩)이었다.
 
  제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자신의 별저(別邸)인 센간엔(仙巖園)에 근대식 공업시설인 슈세이칸(集成館)을 설치, 사쓰마번 차원의 부국강병(富國强兵)정책을 추진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발탁한 것도 나리아키라였다.
 
  1858년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 그의 조카인 시마즈 다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다다요시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가 섭정(攝政)으로 사실상 번주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은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과 이듬해 미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격동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었다. ‘존왕’은 ‘막부타도’, ‘양이’는 ‘배외주의(排外主義)’를 의미했다. 특히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패한 후 도쿠가와 막부에게 영토의 3분의 2를 빼앗기고 혼슈(本州) 서쪽 끝으로 쫓겨 가야 했던 조슈(長州·야마구치)는 교토(京都)의 천황 세력을 선동하면서 존왕양이 운동의 선봉에 섰다.
 
  반면에 시마즈 히사미쓰는 과격한 존왕양이 주장은 배격하면서 도쿠가와 막부 내부의 개혁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나리아키라의 양녀 아쓰히메(篤姫·1836~1883)가 도쿠가와 막부의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에게 시집간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쓰마의 이런 노선은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 타도에 몰두하던 조슈와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교토의 사쓰마군은 교토수호(京都守護·교토경비사령관)인 아이즈(會津)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와 손잡고 조슈 세력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1863년 8월 18일 교토의 사쓰마-아이즈연합군은 천황 주변의 공경(전통귀족)들과 연대해 과격한 존왕양이 주장을 펴는 조슈 세력을 추방했다. 이를 8·18정변이라고 한다. 이듬해 7월 조슈는 교토에서의 주도권 회복을 위해 무력(武力)으로 황궁 장악을 시도했다. 이것이 ‘금문(禁門)의 변(變)’이다. 이때 교토 주둔 사쓰마군 지휘관으로 이를 진압한 사람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조슈와 사쓰마는 철천지원수가 됐다.
 
 
  사카모토 료마와 삿초동맹
 
  견원지간(犬猿之間)이던 조슈와 사쓰마를 화해시킨 사람이 바로 도사(土佐)번 출신 낭인(浪人)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였다. 료마는 막부와 주요 번(웅번·雄蕃)들이 계속 분열·갈등하는 틈을 타서 영국·프랑스 등 외세가 개입하면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사이고에게 역설했다. 료마에게 설복된 사이고는 료마와 함께 사쓰마로 가서 번의 중신들을 설득했다. 료마는 더 나아가 사쓰마로부터 자금을 얻어내 1865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존왕양이의 선봉이었던 조슈는 교토의 조정과 에도의 막부 모두로부터 공적(公敵)이 되어 있었다. 교토의 고메이(孝明) 천황은 강경한 양이론자(배외주의자)였지만, 막부체제에 도전할 의사는 없었기 때문에 조슈와 등을 졌다.
 
  사카모토 료마는 고립된 조슈와 사쓰마 간의 동맹을 추진했다. 그 무렵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를 토벌하려 하고 있었다. 조슈는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이를 입수할 방도가 없었다. 1865년 료마는 사쓰마의 자금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서양 함선과 총기들을 구입한 후, 자신의 가메야마사추 소속 선박을 이용해 조슈에 제공해 주는 방안을 제안, 이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조슈와 사쓰마, 그리고 료마의 출신 번인 도사번 간 동맹의 토대가 닦였다. 이때 조슈번에서 무기 구입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10)였다. 그해 말 사쓰마에 흉년이 들자 조슈는 사쓰마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으로 빚을 갚았다.
 
  이렇게 해서 신뢰가 구축되자 1866년 1월 교토에 있는 사쓰마의 중신 고마쓰 다테와키(小松帶刀·1835~1870)의 저택에서 사쓰마를 대표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를 대표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1833~1877)가 회동했다. 가쓰라 고고로는 그동안 사쓰마에 대해 품고 있던 울분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사이고의 사내다운 태도에 두 번 간의 갈등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로써 사쓰마와 조슈 간의 동맹, 즉 삿초동맹이 성립됐다. 덕분에 조슈는 1866년 막부의 조슈토벌(제2차 조슈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가고시마 관광버스들에 그려진 메이지유신 시기 사쓰마의 인물들. 왼쪽부터 고마쓰 다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시마즈 나리아키라, 아쓰히메, 오쿠보 도시미치다. 버스 뒤로 16세기 중반 가고시마에 천주교를 전파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이 보인다.
  삿초동맹은 1867년에 이르러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정치동맹으로 발전했다. 궁지에 몰린 것을 감지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는 1867년 10월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그래도 도쿠가와 가문은 일본에서 가장 큰 영지와 무력을 보유한 세력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를 바탕으로 다이묘(大名·영주)평의회 의장 자격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사번을 비롯한 많은 번이 이러한 방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사쓰마와 조슈는 차제에 도쿠가와 막부를 완전히 타도하려 들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교토 시내에서 막부 시설과 기관들에 대한 도발을 자행,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자극했다. 결국 1868년 1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아이즈번, 신센구미(新選組) 등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지만, 역사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해 4월 신정부군은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江戶)로 진격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의 중신인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와 담판, 에도성에 무혈(無血) 입성했다. 막부의 잔당이 홋카이도로 도주해 에조(蝦夷)공화국을 세우고 저항했지만, 그들도 이듬해 5월 신정부에 항복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메이지유신 초기 신정부의 총구를 장악한 것은 삿초, 그중에서도 사쓰마였다. 그리고 그 사쓰마를 대표하는 사람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육군 대장, 근위도독으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메이지 정부의 실권자(實權者)였다.
 
 
  征韓論
 
  사이고 동상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영광을 보여준다면, 그다음에 찾은 사이고동굴과 사학교터, 그리고 그의 자결지는 그의 몰락을 보여준다.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廢藩置縣·1871), 폐도령(廢刀令·1871), 징병령(1873) 등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 유신이 지향하는 근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지만, 이는 사무라이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신을 위해 피를 흘렸던 사무라이들에게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메이지유신 후인 1868년 이래 일본은 수차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알리고 새로운 관계 수립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냈다. 여기에는 황상(皇上) 운운하면서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중국에 사대(事大)하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질겁할 일이었다. 조선은 국서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일본은 일본대로 격분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를 기화로 정한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해 달라고 조정에 요구했다. 1873년 조정 공경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이고는 “사절은 반드시 폭살당할 것이다.…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외국으로 돌려 국가를 흥하게 하는 책략…” 운운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좌우명으로 내세우던 사람답지 않은 황당한 논리였지만, 그가 정한론을 주장한 속셈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사이고를 조선에 사절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뜻밖의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일부 조정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1871년 12월부터 1년 10개월에 걸쳐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을 구미(歐美)에 파견했었다. 공식 사절 46명, 개인 수행원 및 유학생까지 포함해서 107명에 달하는 사절단에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1825~1883),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등 신정부의 핵심 요인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 구미 12개국을 순방하면서 세계정세를 직접 관찰했다. 귀국 후 이들은 서양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부터 각국의 정치체제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 《미구회람실기(美歐回覽實記)》 5권을 발간, 국민들에게 보급했다. 이들이 보기에 “5개 대대만 있으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오쿠보 등은 “지금은 외정(外征)을 할 때가 아니라 내실(內實)을 다질 때”라고 주장했다.
 
  결국 오쿠보 등은 교묘한 궁정공작을 벌여 메이지 천황으로 하여금 사이고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취소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수완을 발휘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와쿠라사절단으로 구미를 순방할 때부터 이토를 눈여겨보았던 오쿠보는 이를 계기로 이토를 더욱 총애하게 됐다. 오쿠보가 죽은 후 이토가 일본 정계의 기린아(麒麟兒)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세이난전쟁
 
서양인들을 포함한 관광객들이 가면을 쓰고 사이고 흉내를 내며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앞 광장의 포토 존(photo zone)을 돌고 있다.
  죽마고우에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10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했다. 정부와 군부의 요직에 있던 벳푸 신스케(別府晋介),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 등 그의 측근들도 행동을 같이했다. 사쓰마 출신 장교들은 물론 하사관들까지 줄줄이 낙향하는 바람에 군 간부 자리가 텅텅 빌 지경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동조했던 도사번 출신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1837~1919) 등도 정부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조슈 출신들이 메우면서, 이들이 향후 메이지 시대를 주도하게 됐다. 이를 ‘정한론정변(政變)’ 혹은 ‘메이지 6년의 정변’이라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학교(私學校)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교외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소일했다. 정부가 파견한 가고시마현 지사마저도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동조했다. 가고시마는 점점 사이고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반(半)독립국가처럼 변해갔다.
 
  도쿄에 있는 내무경 오쿠보는 이런 가고시마의 동향에 신경이 쓰였다. 오쿠보의 의중을 읽은 대경시(大警視·경찰청장)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1834~1879)는 밀정을 보내 사이고의 동향을 감시하기 시작했다(일본 경찰의 창설자인 가와지 도시요시도 사쓰마 출신이다. 가고시마현 경찰본부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이를 알게 된 사학교 학생들은 격앙됐다. 사학교 학생들은 1877년 1월 말 가와지가 보낸 밀정들을 체포하는 한편, 가고시마에 있는 육해군탄약고를 점거한 후, 다음달 반란을 일으켰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너희,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며 경악했다.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제자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의 주장처럼 일본 특유의 ‘공기’가 사이고 다카모리까지 지배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반란군은 규슈 중부의 구마모토(熊本)까지 진출했지만, 정부군에게 저지당했다. 유서 깊은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징병제 실시 후 만들어진 농민 출신 ‘국민군’에게 패한 것이다. 7개월간 계속된 내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을 통틀어 1만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
 
난슈묘지에 있는 고다마 5형제의 묘.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어갔을까?
  그해 9월 24일 가고시마 시내 시로야마(城山)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인근의 작은 동굴(사이고동굴)에서 잠시 쉰 후 600m쯤 떨어진 수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사이고는 “신(벳푸 신스케)아, 이제 그만 하자꾸나”라고 말하고 도쿄의 황궁을 향해 절을 한 후 할복(割腹)자결했다. 가고시마의 역사를 보여주는 레이메이칸(黎明館)에서 시로야마터널 방향으로 200m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철길을 160m쯤 간 곳이다. 그가 제자들을 길러냈던 사학교에서는 300여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사학교 터에는 가고시마 메디컬센터가 들어서 있다. 메디컬센터를 둘러싸고 아직도 남아 있는 돌벽에는 세이난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2003년에 나온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바로 이 세이난전쟁과 사이고 다카모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메디컬센터 앞(사쓰마의사비 앞)에서 시티뷰 버스를 탄다. 다음 목적지는 난슈묘지와 사이고난슈현창관이다. ‘난슈(南州)’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호(雅號)이다. 사쓰마를 일컫던 말이기도 하다.
 
  난슈묘지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벳푸 신스케, 무라타 신파치(村田新八) 등을 비롯해 세이난전쟁에서 전사한 ‘반란군’들을 안장한 곳이다. 어리면 10대 중반, 많으면 서른 남짓한 젊은 사무라이들의 무덤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특히 발걸음을 잡은 것은 고다마(兒玉) 5형제의 묘비였다. 맏이인 사네나오(實直)는 35세, 막내 히로키치(彦吉)는 17세에 전사했다. 사네나오, 셋째 사네야스(實休·당시 28세), 넷째 사네타케(實健·당시 23세)는 1877년 3월, 두 주 사이에 구마모토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죽어간 것일까? 세이난전쟁 이후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게 되었다. 시대의 마지막 모순을 끌어안고 동귀어진(同歸於盡)했으니, 그것으로 이들은 역사의 소명을 다한 것일까? 그런 희생 위에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끝없이 이어지는 석비의 행렬을 보며 새삼 ‘역사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죽은 지 8개월 후인 1878년 5월 오쿠보 도시미치는 출근길에 불평 사족(士族)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보다 1년 전인 1877년 5월에는 조슈 출신 유신 원훈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가 병사(病死)했다. 1년 사이에 유신의 3대 원훈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들의 빈자리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면서도 외국물을 먹은 보다 젊은 세대들이 메웠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세례를 받은 지도자들이 일찍 사라져 준 것이 메이지유신의 진행에는 오히려 득이 됐다.
 
 
  슈세이칸과 리진칸
 
시마즈 가문의 별저인 센간엔은 정원과 풍광이 아름다운 名勝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이곳에 각종 근대 산업시설을 지었다.
  난슈공원 다음 목적지는 센간엔이다. 긴코만(錦江灣) 바닷가에 위치한 시마즈 가문의 별장이다. 정원도 일품이거니와,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긴코만과 사쿠라지마의 모습은 절경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이 일대에 제철용 반사로(反射爐), 기계 공장, 유리 공장, 수력발전 시설, 도자기 공장 등을 만들었다. 자신이 아끼는 별장에 이런 시설들을 들여놓은 데서 근대화를 향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쓰마가 추진한 일련의 근대화사업은 나리아키라 사후(死後)에도 계속됐다. 이를 1865년 만들어진 기계 공장 슈세이칸(集成館)의 이름을 따서 ‘슈세이칸사업’이라고 한다. 슈세이칸 관련 유적들은 2015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나리아키라가 발탁한 사람 가운데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經芳·1838~1921)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총 연구에 평생을 바친 그는 서양식 소총을 개량한 무라타 소총의 개발자이다. ‘무라타 소총’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4년 12월 공주 우금치전투 때, 총알도 피해가게 해준다는 주문(呪文)을 외우며 돌진하는 동학군에게 쏟아진 것도 무라타 소총탄이었다. 여기에 개틀링 기관포까지 더해지면서 동학군은 일방적으로 살육당했다. 일본군에서는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와 전(前)근대의 대결이었다.
 
센간엔에 있는 반사로터. 무기 제작용 철을 생산하기 위해 만든 반사로가 있던 곳이다.
  센간엔의 반사로터에 서는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왕과 왕비는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복이나 빌고 있지 않았나?’
 
사쓰마번이 초빙했던 영국인 방적기술자의 숙소 리진칸. 서양식 건물 모양을 하고 있는 목조건물이다.
  센간엔에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리진칸(異人館)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867년 사쓰마번이 초빙한 영국인 방적기술자의 숙소로 지은 건물이다. 외관만 보면, 유리창까지 달린 번듯한 서양식 건물이다. 하지만 목조건물이다.
 
  문득 교토에서 본 류고쿠(龍谷)대학 구(舊)본관 건물이 생각났다. 1879년 건립한 이 건물은 외양은 서양식 석조건물이지만 내부는 일본 전래의 목조건축 방식으로 지었다. 서양식 건축기술을 배워오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서양식으로 짓자니 자신이 없어서 외양만 석조로 서양식으로 꾸미고 내부는 일본 목조건축기법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고시마의 리진칸과 비교하면 불과 10여 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룬 셈이다.
 
  두 건물은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을 모방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또 그 발전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1896년에 이르면 일본 건축가가 일본은행 건물을 서양식으로 건립하게 된다.
 
 
  사쓰에이전쟁
 
가고시마중앙역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1864년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후일 각 분야의 선구자가 된 사쓰마의 젊은이 17명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센간엔에서 다시 버스를 탄다. 5분 정도 달린 후 이시바시(石橋)기념공원에서 내린다. 인근 기온노슈(祇園之洲)공원을 가기 위해서다. 이 공원에는 세이난전쟁 당시 관군전몰자위령비와 함께 사쓰에이(薩英)전쟁기념비와 당시의 포대가 있다.
 
  사쓰에이전쟁이란 1863년 6월 벌어졌던 사쓰마와 영국의 전쟁을 말한다. 사쓰에이전쟁은 1862년 8월 요코하마의 나마무기(生麥)에서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을 가로막은 영국인들을 사쓰마 무사들이 베어버린 사건이 발단이 됐다. 사쓰에이전쟁 당시, 사쓰마군은 영국군의 상륙은 저지했지만, 영국군의 함포사격으로 가고시마 시내가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서구 열강의 무력을 호되게 체험한 사쓰마는 이후 양이(攘夷) 주장을 버리고,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864년 사쓰마는 17명의 젊은이를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가고시마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이라는 이름의 동상은 바로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13세,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34세였다. 이들 가운데서 메이지 정부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1832~1893),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森有礼·1847~1889), 초대 일본은행 총재 요시하라 시게토시(吉原重俊·1845~1887) 등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조슈도 비슷했다. 무리하게 양이를 하겠다면서 서양 선박들에 포격을 가했다가 1864년 8월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의 연합함대로부터 두들겨 맞은 후, 서양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들이 ‘양이’에 대한 입장을 바꾼 논리는 간단했다. 외세를 감정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소양이(小攘夷)’이고, 외세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은 ‘대양이(大攘夷)’라는 것이었다.
 
 
  도전과 응전
 
다카야마에서 긴코만을 내려다보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동상.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메이지유신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기온노슈공원 위쪽 다카야마(多賀山)공원에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궤멸시킨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동상이 서 있다. 등신대(等身大)의 아담한 크기의 동상이다.
 
  일본인들은 도고 헤이하치로의 승리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문명사적 도전(挑戰)에 대한 응전(應戰)이었던 메이지유신의 마지막 장(章)을 장식했다. ‘대양이’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에 맛 들인 일본은 이후 제국주의·군국주의의 길로 폭주하다가 40년 후 패망(敗亡)하고 만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메이지유신은 여전히 ‘성공한 근대화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 NHK는 3년에 한 번꼴로 막부 말~메이지시대를 다룬 대하사극을 방영, 그 기억을 반추(反芻)한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이해 올해 방영한 〈세고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구한말(舊韓末) 동학이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 고종의 의사(擬似)근대화에 대한 과장된 미화(美化)만 있을 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윗세대가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이만한 나라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폄훼하지 못해 안달인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다카야마 꼭대기에서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자문(自問)해 본다.
 
  ‘150여 년 전 어리석은 조상들 때문에 한 세기에 걸쳐 고난을 겪어 놓고,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나? 100년, 150년 후의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를 두고 뭐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질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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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진영팬    (2018-12-05)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배진영 차장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발품과 풍부한 지식이 합쳐진 훌륭한 글입니다.평소에 관심이 있던 주제였는데 배차장님 덕분에 일본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정규재TV에서 일본의 근대역사와 관련한 여행을 한 사진으로 설명해 주셨지요. 다음 번엔 조슈번 탐방도 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생가터도 찾고 아베 총리가 다녔던 소학교도 찾고....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지도가 없다는 점입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와 이번에 탐방한 곳을 보여주는 상세 지도가 있었으면 글을 이해하기에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배진영 애국기자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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