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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手의 세계

‘싸움의 전설’ 다섯 격투가의 ‘野人 시대’

風雲兒, 난세를 꺾다!

글 :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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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만 가지의 발차기를 연습한 사람보다, 발차기 하나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이 두렵다”(이소룡)
⊙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
⊙ 풍운의 시절 속에서 致富보다는 ‘낭만주먹’을 택했던 ‘시라소니의 길’
⊙ 데뷔 1년차 19경기 연속 ‘KO승’… 역대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 복서의 말년은?
⊙ 치고·차고·던지고·조이고·찌르고… 일본 열도 제패한 브라질의 武林高手
  “김두한과 효도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가끔 남자들은 치기 어린 생각을 한다. 주먹세계의 강자와 전문 무도인(武道人)들의 가상대결을 떠올리며 친구들끼리 편을 갈라 입씨름한다. 조건은 맨손싸움이다. “김두한은 실전에 강해서 30초면 끝난다” “날쌘 괴력의 소유자 효도르가 뒤집는다” 등 필살기를 예상해 승패를 가정한다. 1대1로 속칭 ‘맞짱’을 붙었을 때, 누가 먼저 주먹을 내지르고 돌려차기를 할지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세계 최강의 파이터들은 어떻게 상대를 제압했을까? 번개같은 발차기로 17대1의 대결에서 승리했을까? 회칼과 쇠파이프를 든 잔인한 폭력배들을 회심의 ‘박치기’로 때려눕혔을까? 아니, 이글거리는 눈빛만으로 적들을 물러가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름마저 전설로 불리는 다섯 격투가들의 일생을 추적해 봤다. 정열과 낭만, 기행(奇行)을 벗 삼아 야인(野人)처럼 살았던 ‘싸움의 전설’들을 만나 본다.
 
 
  이소룡
  뒷골목 대장, 영웅이 되다
 
왕년의 이소룡. 그의 깡마른 체격은 밀도 높은 근육으로 다부졌고, 체지방이 거의 없어서 극단적으로 탄탄한 몸을 유지했다. 사진=조선DB
  중국계 미국인 무도인이자 영화배우인 이소룡(李小龍, 1940~1973)은 어려서부터 싸움을 좋아했다고 한다. 왜소한 체격과 병약한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길거리 싸움에 몰두, 퇴학과 전학을 반복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패싸움을 즐기는 타고난 골목대장에다 춤까지 잘 춰 각종 댄스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여자친구와 댄스장에서 춤을 추던 중 시비를 거는 미군병사들을 때려눕히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소룡의 고강한 무술 실력은 중국 전통무예인 ‘쿵푸’에 뿌리를 뒀다. 7살 때부터 태극권을 익혔고, 청년기에는 당대의 고수 엽문과 그의 제자들에게 유명 권법인 영춘권(詠春拳)과 채리불권(蔡李佛拳)을 배웠다. 여기에 권투·펜싱·태권도까지 연마했다. 이렇게 익힌 무술로 1959년 한 격투기 대회에 출전, 1·2라운드에서 장사(壯士)들을 상대로 5분 만에 KO승을 거둬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소룡은 중국 대륙의 주먹계를 석권한 뒤부터 전통 쿵푸의 단점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형식에 과도하게 얽매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좀 더 실용적인 무술이 필요했다. 이소룡은 세계 각국의 무술들을 종합·연마한 뒤 장점만을 골라 새 무공(武功)을 창조해 냈다. 자신이 오래 익힌 쿵푸를 바탕으로 권투·펜싱·태권도에 유도·레슬링·가라테·무에타이 등 다양한 무술들의 가장 강력한 기술들만 조합했다. 그를 홍콩영화와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유명 액션배우로 거듭나게 만든 ‘절권도’(截拳道)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 핀 꽃’이라고 불리는 절권도는 상대의 공격을 간단한 동작으로 미리 차단시킨다는 뜻의 무술이다. 다시 말해 적의 빈틈을 노려 급소만 정확히 가격하는 등, 불필요한 몸동작을 절약해 기력을 낭비하지 않는 무술이다. 이소룡은 사후(死後) 출간된 책 《절권도》에서 본인 무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절권도는 그저 최소한의 움직임과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쿵푸의 진정한 길에 더 가까이 갈수록, 표현의 낭비는 더 줄어든다.”
 
 
  老莊철학과 실전무술의 정수 ‘절권도’
 
  이소룡은 홍콩에서 5년 동안 영춘권을 연마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12년 동안 절권도를 창시·수련했다. 그는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서 절권도의 기본 공격기가 되는 ‘1인치 펀치’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3년 뒤에는 LA에 도장을 열어 당대 할리우드의 극작가·영화배우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았다.
 
  절권도의 철학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전 형식이나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찌르는 이소룡의 무술은 단순하고 자연스런 공격을 강조한다. 그는 생전 ‘물이 돼라’ ‘물처럼 싸우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도가(道家)에서의 화육(化育)과 부쟁(不爭)을 뜻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의 절권도는 현란하고 수세적인 방어보다, 간단하고 적극적인 가격으로 싸움의 우선권을 장악한다. 그는 주먹이나 발차기를 내지를 때도 힘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곡선보다 직선을, 복잡한 초식보다 재빠른 기술들을 선호했다.
 
  이소룡은 자신의 몸을 항상 최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을 중요시했다. 난삽한 기교보다는 기본적인 체력단련과 정신수련에 집중했다. 그는 실제 시비가 붙어 싸울 때나 정식 대련이 있을 때면, 영화에서처럼 특유의 괴성을 내지르며 화려하게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최대한 신속하고 간결하게 대결을 마무리짓는다고 한다.
 
  일례로 영화 《용쟁호투》 촬영 때 엑스트라 배우 몇 명이 와서 이소룡에게 ‘싸워 보자’며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엑스트라들은 실제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던 ‘진짜 깡패’들이었다. 이소룡은 이를 귀찮아하면서도 단 몇분 만에 소리 없이 대결을 끝냈다고 한다. 학창 시절처럼 이전투구를 벌인 게 아니라, 속도전으로 일격을 가해 승부를 가린 것이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엑스트라들은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이소룡에게 존경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한계는 없다, 꼭대기만 있을 뿐”
 
  이소룡의 전기(傳記)를 쓴 브루스 토마스는 그가 영화배우이기 전에 진지한 무도인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만큼 이소룡은 승부에 대한 열정이 강한 인물이었다. 토마스는 이소룡이 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세상에 한계라는 것은 없다. 꼭대기만 있을 뿐이다. 꼭대기에 머물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분명히 넘어서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세계적 무술가이자 20세기 문화의 상징이었던 이소룡. 그의 생전 체격은 키 173cm, 몸무게 62kg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깡마른 체격은 밀도 높은 근육으로 다부졌고, 체지방이 거의 없어서 극단적으로 탄탄한 몸을 유지했다. 실제 그의 서재에 꽂힌 2500여 권의 책 중 대다수는 스포츠 생리학에 관한 책들이었다고 한다.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싸울 수 있을지, 이소룡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여러 명언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회자되는 세 문장이 눈에 띈다. “훌륭한 무술가는 긴장하지 않는다. 단지 준비할 뿐이다.” “한계 따윈 없다. 정체기가 있을 뿐이다.” “나는 만 가지의 발차기를 연습한 사람보다, 발차기 하나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이 두렵다.”
 
 
  최배달
  泰山의 괴력, 항우의 現身
 
황소를 길들이는 왕년의 최배달. 그는 1950년 11월 일본 다테산(館山)에서 맨손으로 수십 마리의 소와 결투를 벌여 총 47마리를 무찌르고 4마리를 즉사시켰다. 사진=조선DB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난 최배달(崔倍達, 본명 최영의, 1923~1994)은 9살 때부터 택견·씨름 등 전통무술을 익혔다. 16살이 되던 해 도일(渡日), 군관학교에서 가라테를 배우고 10여 년 뒤 일본 가라테 선수권대회에서 최종 우승해 이름을 알렸다. ‘최배달’이라는 명칭은 당시 그의 일본식 이름인 ‘대산배달(大山倍達)’에서 유래했다.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잊지 않기 위해 ‘배달’이라는 별칭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는 무술 고수로서 일본 전역을 제패했으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십 개월 입산수도를 통해 가공할 만한 가라테 실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최배달은 1950년 11월 일본 다테산(館山)에서 맨손으로 수십 마리의 소와 결투를 벌인다. 총 47마리를 무찌르고 그중 4마리를 즉사시켰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다.
 
  최배달은 23세 때 일본 에도시대 전설의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五輪書)》를 읽고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는 ‘무예 단련의 끝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련을 반복해 비로소 자신만의 무도를 창시하게 된다. 바로 극진가라테(極眞空手)다. 실전 무술을 중시한 무사시의 뜻을 이어 기존의 가라테를 공격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손에 의한 얼굴 가격을 제외하고 모든 공격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한 극진가라테는 최배달이 업그레이드시킨 당대 제일의 무술이었다.
 
  최배달은 1952년 3월 일본대표 신분으로 11개월 동안 미국 전역 32곳에서 무술 지도를 했다. 최배달은 1년 뒤 미국 시카고에서 다시 소와 격투를 벌인다. 당시 수도(手刀, 손날)를 연마한 그는 달려드는 소를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 억센 뿔까지 잘라내는 진기(珍技)를 선보인다.
 
 
  《五輪書》를 읽고 소의 뿔을 절단 내다
 
  그는 1951년 3월 일본에서 검도·유도의 강자들과 결전을 치른 뒤부터 세계를 순회하며 최강의 파이터들과 겨뤘다. 쿵푸·복싱·레슬링에 프랑스 무술 ‘사바트’, 브라질 무술 ‘카포에이라’까지 그의 손끝에 무너진 세계의 무술은 다양했다. 이때 최배달은 미국 대표 레슬러 톰 라이스, 태국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 코프라 등을 꺾으며 무림고수(武林高手)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심지어 1954년 한 도장에서 유도 실력자 100명과 겨룬 적도 있다. 당시 1대100의 대결은 사생결단의 격투나 다름없는 실전이었다고 한다. 이때도 그는 너끈히 100명의 고수들을 상대하며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괴력을 보였다. 1958년 미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연방수사국(FBI)과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 무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명성과 맹위(猛威)를 떨친 최배달의 수도는 훗날 ‘신의 손’이라는 영광스런 칭호까지 받게 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아들들에게 ‘황소까지 때려잡는’ 극진가라테의 비법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동전을 쉽게 구부릴 정도의 악력, 새끼손가락 하나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손가락 힘, 100m를 11초 만에 주파(走破)하는 달리기, 벤치프레스 106~150kg을 너끈히 들어올리는 완력(腕力),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서 배에 붙일 수 있을 정도의 괴력.’ 이상 다섯 가지가 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주먹이 단련된다면, 포악한 황소까지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아들 최광범씨는 훗날 부친을 이렇게 기억했다. “아버지는 산 같은 분이었다. 곁에 있어도 존재의 크기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다.”
 
  최배달은 극진가라테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세계 곳곳에 도장(道場)과 대회를 열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의 도장은 고수들을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1975년 11월 열린 제1회 극진가라테 국제대회에는 36개국 120명의 선수가 나섰다. 그 뒤 관중과 참가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지부(支部)도 늘었다. 1960년대 말부터 북미·남미·중동·유럽·동남아시아 등에 지부를 설립하고 4년 뒤에는 일본 도쿄에 극진회관 총본부를 차렸다. 이때 그는 ‘국제가라테연맹’을 발족해 총재로 취임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지부와 도장은 최배달의 극진가라테를 배우기 위해 찾아드는 입문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그는 생전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요르단 왕실 훈장(1979), 브라질 정부 문화 공로상(1984)을 받기도 했다.
 
 
  “무술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성”
 
  그는 생전 “무술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성”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무도인은 무예단련 못지않게 정신수련과 인격도야도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던 것일 테다. 그의 일대기는 한국의 대표 만화가 고우영의 〈대야망〉,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로 극화(劇化)돼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특히 당시 《스포츠서울》(1989~1993)에 연재된 만화 〈바람의 파이터〉는 1일 신문 판매고를 100만부까지 올려놓는 인기작이었다. 이후 다섯 권의 단행본 만화책으로 출간(1994~1995)됐으며, 2004년 동명(同名)의 영화가 스크린을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 유도의 전설 기무라 마사히코는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고 그를 평가했다. 최배달의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싸움 실력을 상찬한 말이다. 그럼에도 최배달은 생전 “모든 무도는 공존하면서 발전하는 것이지 적대관계의 무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겸손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시라소니
  절대고독의 ‘인간 미사일’
 
왕년의 시라소니. 그는 3m 공중까지 뛰어올랐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박치기’부터 상대의 이마를 작살내는 무릎치기까지 공격 기술이 다양했다. 사진=페이스북 페이지 ‘시라소니 이성순’ 게시물 캡처
  일제 치하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1916~1983)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로 유명한 ‘장군의 아들’ 김두한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최고의 주먹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각종 소설·영화·드라마에서 협객(俠客)으로 극화될 만큼 한국 건달 역사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훗날 개신교에 귀의하는 시라소니는 사실 전주 이씨 가문 목사의 아들 출신이다. 괴력의 소유자답게 아버지인 이기정 목사 역시 15살에 활을 당겨 쏠 정도로 대단한 완력을 지녔다고 한다. 당시 전통 활은 성인 남자도 오랜 연습을 거쳐야 겨우 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드는 무기였다.
 
  시라소니는 집안 생계가 어려워지자 17세 때부터 만주와 신의주를 오가는 기차에서 비단 밀무역으로 살림을 꾸렸다. 그는 일본 단속원들의 감시를 피해 기차와 기차 사이를 재빠르게 뛰어넘어 가면서 살벌한 생존의 법칙을 익혔다. 시라소니 특유의 노련한 판단력과 행동력은 소싯적부터 길러진 본능이었다. 이후 그는 고양잇과 동물인 ‘스라소니’의 민첩성과 용맹함을 본인과 동일시해 자신의 별칭을 ‘시라소니’로 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4년 중국으로 건너간 시라소니는 백두산 수련 후 상하이·청두·톈진 등지를 유랑하며 ‘주먹 강자’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인 출신 폭력배들은 물론 당시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 헌병들과도 맞서 싸웠다. 그는 3년 뒤 상하이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중, 일본인의 아편을 태워 버린 일로 잔인무도한 중국인 청부 폭력배들과 싸우기도 한다. 시비를 걸던 미국·러시아 등 여러 서양 출신 폭력배들도 제압한다. 그는 또 한때 중국 샨하이관을 지나 베이징으로 가던 중 공문서 위조 혐의로 체포돼 8개월 징역에 처해졌는데, 거기서도 건장한 일본인 죄수들과 싸워 이겼다고 한다. 그 넓은 대륙에서도 시라소니의 맞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로통’ 김두한을 아우로 삼다
 
  당시 시라소니의 명성은 중국을 넘어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에도 퍼지고 있었다. 그는 ‘하라다’ 신의주 경찰서장의 복심(腹心)들을 척결하면서 당대의 일본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라소니의 ‘주먹 신화’는 중국 전역은 물론 조선팔도에도 널리 알려졌다. 반쯤 졸린 눈을 하면서도 어디선가 시비가 붙으면 안광(眼光)이 형형했다. 그는 일반적인 주먹다짐보다도 상황에 맞춰 급소를 노리는 임기응변이 강했다. 3m 공중까지 뛰어올랐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박치기’부터 상대의 이마를 작살내는 무릎치기까지 공격 기술이 다양했다. 일순 비룡(飛龍)처럼 날아올라 피스톤 펀치를 날리거나, 돌개바람보다 매서운 발차기를 가하는 등 화려한 무예로 ‘조선 제일의 주먹’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심지어는 당대의 맞수 종로통 김두한(1918~1972)까지 그 절륜한 실력에 감복해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모실 정도였다.
 
  해방 후 시라소니가 한반도로 돌아올 때, 경성(京城)의 주먹들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었다. 우미관을 중심으로 한 김두한, 명동 신사 이화룡, 동대문 ‘알카포네’ 이정재가 세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시라소니는 이화룡이 감찰부장을 맡고 있는 ‘서북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반도에 명성이 자자한 ‘인간 미사일’이었다. 시라소니의 타고난 위력의 박치기를 당해 낸 인사가 없었다. 항간에는 시라소니의 ‘박치기’가 5m 이상의 거리를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고 해서 ‘권총의 탄환(彈丸)보다 빨랐다’는 소문도 나돌 정도였다. 이에 호승심을 부린 일제 잔병(殘兵)들이 나름의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시라소니만의 예리한 ‘칼 던지기’ 솜씨에 일본군 무리가 와해됐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시라소니는 해방 정국에서 서북청년단 감찰부장은 물론,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의 경호실장을 맡을 정도로 무력이 대단했다. 그는 이미 1945년 본인의 친구를 박살낸 한국계 일본 깡패 가네미야(金宮) 일당 40여 명과 단신(單身)으로 대적해 끝장을 본 위인이었다. ‘낭만주먹’의 마지막 전설인 ‘인간미사일’ 시라소니의 명성이 세상을 뒤덮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정치깡패 이정재와의 갈등
 
  시라소니가 아무리 당대 1인자 주먹이었다 할지라도 세월에 장사 없고 조직에 못 버티는 게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당시 남한의 조직폭력배 두목들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조직을 거느린 경우 직속 휘하에 1만명 이상의 무리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시라소니는 혈혈단신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조폭 세계에 입문하였으니 여러모로 장애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바야흐로 그때 동대문 거두(巨頭) 이정재와의 갈등이 빚어지게 된 것이다.
 
  씨름꾼 출신인 이정재는 당시 전국대회에서 황소 10마리를 부상으로 거둘 만큼 천하제일의 장사였다고 한다. 그 같은 괴력을 지닌 이정재도 6·25 동란 당시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지역깡패 ‘용가리’ 소속 10명의 불량배에게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 길을 우연히 지나가던 시라소니가 깡패들을 제압해 이정재를 살려줬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깍듯이 모셨다.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이정재도 당시 혼란한 시대상황을 틈타 나름 본인의 조직을 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라소니와의 갈등이 시작됐다. 동대문의 ‘알카포네’로 불렸던 이정재에게는 이북 출신 명동파의 시라소니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제일의 주먹 강자인 시라소니도 1953년 이정재 일당에게 가혹한 린치를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이정재의 복심(腹心) 이석재에게 한 번 더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뒤에는 모두가 시라소니의 재기(再起)는 불가능하다고 점칠 정도였다.
 
  그때 시라소니는 동향(同鄕)인 이북 상인들의 민원을 청탁하기 위해 이정재에게 갔으나, 그의 부하들은 이미 갈퀴·도끼·절굿공이로 무장한 상태였다. 혼자였던 시라소니는 보스 이정재에게 점포 양도를 요구하다 그 일파에게 모진 집단구타를 당해 중상해를 입는다. 이석재의 추가 린치에도 겨우 명줄을 잡고 있던 시라소니는 복수를 위해 2년 동안 권총을 품고 다녔다.
 
  하지만 이정재는 박정희 혁명정부가 집권한 이후 형장의 이슬로 돌아갔다. 그 일파도 자유당 독재정권의 주구(走狗) 노릇을 했다 하여 불명예의 정치깡패로 종식됐다. 시라소니로서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소리 없이 죽어 버린 셈이었다. 그는 이후 서북청년단 소속의 옛 부하들을 교화(敎化)시키는 기독교인이 됐다.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들인 이의현 목사는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싸움에 이기고도 그 지역을 접수하지 않았어요. 오직 일제에 대항하여 주먹을 휘두르셨으며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신익희 선생의 경호실장을 역임하고 6·25 때에는 국군으로 참전하는 등 나라를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최종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시라소니는 풍운의 시절 속에서 치부(致富)보다는 ‘낭만주먹’을 택했다. 그것이 비록 무지막지한 주먹세계의 소설이었다 할지라도,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살아온 이성순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마이크 타이슨
  괴짜 핵주먹, 끈기의 鐵拳
 
타이슨의 과거 경기 장면들. 타이슨은 데뷔 1년 만에 19경기 연속 ‘KO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다. 사진=영화 스틸컷 캡처
  미국 출신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1966~)은 약관의 나이에 세계 복싱 대회에서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전설의 주먹이다. ‘핵주먹’ ‘핵이빨’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반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3개의 복싱단체 타이틀을 거머쥘 만큼 복싱계의 실력자다.
 
  타이슨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바깥으로 나돈 타이슨은 소싯적 ‘소매치기 천재’로 범죄도시에서 이름을 날렸다. 파란만장한 소년원 수감을 마치고 1985년 프로복싱 선수로 데뷔했다. 그의 나이 불과 18살 때였다. 타이슨은 데뷔 1년 만에 19경기 연속 ‘KO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다. 그는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당대 챔피언 ‘트레비 버벅’을 한 방에 제압해 역대 최연소(20살) 헤비급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당시 타이슨은 공식 체급에 비해 몸집이 작았다. 그러나 그는 살과 근육으로 육중한 최강의 경쟁자들을 단박에 때려눕히고선 이렇게 말했다. “덩치가 크면 쓰러질 때의 소리만 더 클 뿐이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세계 최강 복서가 된 타이슨은 서서히 오만으로 보이는 난폭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90년 2월 11일, 일본 도쿄 통합 타이틀전에서 당시로서는 무명선수였던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참패한 이후부터였다. 더구나 그때는 1년 전 이혼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혼돈에 빠진 타이슨의 사생활은 문란했다. 1991년 흑인 소녀를 강간해 구속된 사건은 그의 복싱선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타이슨은 3년 동안 복역한 뒤 1995년 3월 25일 가석방됐다. 1년 뒤 WBC(세계복싱평의회) 왕좌를 되찾은 그는 6년 만에 다시 복싱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다
 
  타이슨은 1997년 일생일대의 흥행(?)이자 흠결이 되는 사건을 벌인다. 그해 6월 28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MGM 호텔에서 열린 ‘에반더 홀리필드’와의 헤비급 타이틀 리턴 매치에서 상대의 귀를 사정없이 물어뜯어 버린 것이다. 타이슨은 앞서 1996년 11월 홀리필드에게 ‘KO패당한’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당시 복수심에 불탄 그는 민첩한 홀리필드의 몸놀림에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타이슨 특유의 강력한 핵주먹도 바람처럼 빠른 홀리필드의 회피 기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분개한 타이슨은 사리분별조차 못하고 3라운드 2분20초경 악물고 있던 마우스피스를 뱉어 버리고 억센 이빨로 홀리필드의 오른쪽 귀 윗부분을 물어뜯었다.
 
  삽시간에 낭자한 선혈(鮮血)이 링 위에 뿌려졌다. 타이슨은 입술을 우물거리다 홀리필드의 한쪽 귀 살점을 뱉어냈다. 홀리필드는 극심한 고통에 절규했다. 주심은 흥분한 타이슨에게 “한 번만 더 귀를 물게 되면 실격패를 선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타이슨은 3라운드에도 홀리필드의 왼쪽 귀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타이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세에 몰린 홀리필드를 막무가내로 공격했다. 양측 관계자와 경찰들이 몰려와 간신히 싸움을 말렸지만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타이슨은 이른바 ‘핵이빨’이라는 오명을 자초한 당시 사건 발발로 유력 스폰서와의 계약이 끊어졌다. 스포츠계의 ‘비(非)매너남’으로 찍혀 세간의 지탄까지 받았다.
 
  이후 ‘선수자격 정지’를 당한 그는 5년 동안 자숙한 뒤 재기를 모색했다. 2002년 다시 링 위에 올라섰지만 당시 챔피언이었던 영국 선수 ‘레녹스 루이스’에게 8회 KO패로 패전했다. 2004~2005년 연속으로 챔피언 자리를 노렸지만 끝내 복싱의 왕좌를 수복하지 못했다.
 
  분방한 여성편력과 갖은 기행으로 강력한 주먹보다 특이한 성격이 더 유명했던 타이슨. 그러나 그의 위력적인 펀치만큼 담대했던 배포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복싱 팬들을 놀라게 한다. 과거 한 영국 매체 보도에 따르면 타이슨은 한때 뉴욕 갱단의 살해 목표였다. 2000년경 당시 타이슨은 본인의 보디가드가 갱단에게 살해되자 이를 보복하도록 수하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렸고, 이에 맞서 갱단도 타이슨 살해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 타이슨은 당시 한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난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견했다”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괴팍한 성격만큼 특유의 배포도 그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 준 요소인 듯하다.
 
 
  연예계까지 넘나들던 奇人
 
  현역 시절 50승 6패의 기록, 그중 44전에서 KO승을 거둔 타이슨의 전설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초라해진다. 이혼·범죄·마약·알코올중독에 파산신청까지, 최연소 복싱 챔피언의 말로는 처량했다. 그러나 타이슨은 여타의 ‘인생 패배자’와 달랐다. 그는 늙어서까지 끊임없이 도전했다. 일면 웃음거리가 될지라도 본인의 의사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도전의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는 자서전을 펴내고, 배역의 비중과 관계없이 영화·드라마·원맨쇼·애니메이션에 거침없이 출연했다. 다소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자신감은 어떻게 보면 핵주먹보다도 더 무서운, 끈질긴 매력일지도 모른다.
 
  그의 오래된 어느 팬은 ‘선수 타이슨’ ‘인간 타이슨’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선수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선수였다. 타이슨에게 잔인한 동물 같은 페르소나가 있었던 것도, 여자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페르소나는 링에 오르기 위해, 세상과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것 같다.” 물론 그의 어지러운 사생활을 주먹 실력으로만 포장하는 것은 지나친 미화일지 모르겠다.
 
 
  힉슨 그레이시
  파워 老益壯, 무패의 신화
 
왕년의 힉슨 그레이시. 그는 현역 체급이 키 178㎝, 몸무게 87㎏에 불과했지만, 본인보다 30~40㎏ 체중이 더 나가는 헤비급 선수들을 거뜬히 제압했다. 사진=조선DB
  힉슨 그레이시(1958~)는 브라질 유술(柔術)의 창시자 엘리우 그레이시의 셋째 아들이다. 여기서 유술이란 병기(兵器)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로, 치고·차고·꺾고·던지고·조이고·찌르는 등의 기술을 발휘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도가 대표적이다. 그레이시 가문은 이 유술을 바탕으로 한 ‘주짓수’라는 격투기성 무술을 파생·발전시켰다. 주짓수는 유술 본래의 무예보다 실전 기술의 성격이 더 강하다.
 
  힉슨은 아버지의 무공을 이어받은 여러 형제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한때 세계 종합격투기 대회인 UFC에서 이름을 날리던 동생 호이스 그레이시가 “나의 형 힉슨은 나보다 100배는 강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 힉슨은 6살 때부터 주짓수 훈련을 받았다. 중학생 나이인 15세 때 당시 입문한 수련생들을 지도했다. 18살이 되던 해에는 주짓수 외에 유도·레슬링 등 무술 전반에 걸쳐 남다른 실력을 보였다. 모국(母國)인 브라질 레슬링 대회에서 2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삼보(러시아 격투기)로는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국제 주짓수 선수권 대회에서 20년 동안 미들급·헤비급·무제한급에서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2000년 일본 선수 후나키 마사카쓰에게 승전한 이후 현역에서 은퇴해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힉슨이 본국에서만 주짓수 신화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 원정까지 떠나며 당대의 최강 격투가들을 꺾었다. 1997년 다카다 노부히코를 1라운드 만에 처리하고 1년 뒤 열린 대회에서 또 다시 승전해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힉슨은 당시 5만명의 관중이 모여든 도쿄돔에서 경기 시작 4분 만에 다카다의 팔을 비틀어 암바를 시전해 보기 좋게 승리했다.
 
  그는 현역 체급이 키 178cm, 몸무게 87kg에 불과했지만, 본인보다 30~40kg 체중이 더 나가는 헤비급 선수들을 거뜬히 제압했다. 유도의 고장 일본 무대에서만 대전료가 무려 2억 엔에 달할 정도였다. 거구의 관절을 꺾고 급소를 조르는 신기(神技)는 오직 힉슨만 가능했던 비술(術)이었다. 여타의 주짓수 선수들과 같아 보이는 자세라도, 신체의 어느 곳에 무게를 더 싣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의 약점을 급습하고 장악할 수 있었다. 과거 국내의 한 격투 경기 해설위원은 힉슨에 대해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정타를 허용한 적이 없는 선수”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포지션을 만들 능력을 갖춘 선수”라고 극찬했다.
 
 
  “효도르·크로캅과 싸워도 이긴다”
 
  주짓수를 세계 최강 무술로 올려놓았던 힉슨은 2000년대 초반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난 뒤부터 끝내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 450전(戰)450승(勝), 무패의 신화를 달성하던 전설의 파이터도 부모로서의 죄책감과 상실감은 끝내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일까.
 
  그즈음 세계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종격투기 대회 K-1에 대한 인기가 열풍이었다. 당연히 브라질 유술의 고수 힉슨이 언급됐다. 당시 힉슨은 지금도 최강 격투가라 불리는 “효도르나 크로캅과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차마 링 위에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만한 자신감을 갖고 싸울 만한 기력이 남아 있다는 점을 내세운 말이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그의 나이 이미 50에 가까웠지만, 노익장을 과시하며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 했다는 점은 파이터로서의 ‘불굴의 자존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진정 그의 호언은 그저 철 지난 노익장에 불과했을까. 힉슨의 K-1 복귀설이 퍼질 당시 우리나라 격투기 해설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기대를 걸었다. “힉슨은 진정한 무도인이다. 일상생활 자체가 주짓수 단련이다.” “(평소)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경기가 잡히면 한 달 전부터 부인과 성관계도 하지 않는다.” “힉슨의 그라운드 능력은 레벨이 다르다. (그가) 40여 년간 익혀 온 브라질의 주짓수는 철저히 실전형 무술로 덩치의 크고 작음이 문제될 수 없다.”
 
  실제 당시 힉슨은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본인 도장에서 꾸준한 무예단련과 복식호흡, 요가체조 등으로 전성기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자신이 치른 경기 횟수에 대해 “비공식 대회까지 합하면 1000전이 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힉슨의 호기는 단순한 으름장의 수준을 넘어, 실전에서도 맞붙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외친 자신감의 발로였던 것이다.
 
 
  “몸집 불리기보다 궁극의 기술에 도달해야”
 
  힉슨은 무술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위인이다. 그에게 있어 무술이란 비루한 이전투구(泥田鬪狗), 길거리에서의 주먹다짐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덩치를 키우거나 강한 타격만 중시하는 파이터들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힉슨에게 무술이란 고도의 기술 연마, 궁극의 기술 시전이었다.
 
  “현재 격투기 선수들의 기술은 뒤떨어져 있다. 몸집을 불리고 타격과 그라운드의 균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술의 궁극에 도달해야 하는 파이터의 숙명으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힉슨의 주짓수에서 강도 높은 타격과 균형 잡힌 체력은 기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약점을 가릴 만큼 맷집도 있어야 하고, 완벽한 기술 발휘를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어느덧 전설의 고수가 된 힉슨이 새기고 익힌 명언은, 우리들에게 무술의 진면목이 곧 인생의 바른길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만약 네가 좋은 스승이 되려면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보여줘라. 만약 네가 위대한 스승이 되고 싶다면 학생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라.’ 이 말씀은 내가 가르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학생들을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에 맞추었거든요. 내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방법은 매우 심오한 방법이고 스승과 제자 모두를 성장시킬 것입니다.”
 
  힉슨이 근래 한 주짓수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가르침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이어받았고, 다시 제자들에게 본인이 배운 모든 것을 전수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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