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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5·16의 현장들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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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신당동 자택(시간대) → 종로 미화여관 → 한강교 → 6관구사령부 → 김포 1공수단 → 염창교 → 한강교 → KBS 방송국 → 안국동 광명인쇄소 → KBS 방송국 → 용산 육군본부 → 청와대 → 육군본부
⊙ 신당동 자택, 1930년대 신당동에 세워진 문화주택단지 주택 중 유일하게 남아 있어
⊙ 6관구사령부가 있던 문래근린공원에는 박정희 흉상…, 지하벙커도 남아 있어
⊙ 박정희 소장이 해병대와 만난 염창교는 산책로 겸 자전거 도로
⊙ 남산 KBS 방송국 자리는 일제 때 통감부, 조선총독부가 있던 곳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문래근린공원.
1966년 세워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은 훼손을 막기 위해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하철 6호선 신당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으면 기와를 얹은 작은 양옥집이 나온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5·16 이전까지 살던 신당동 자택이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다산로 36가길 25(중구 신당동 62-43)이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지만,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 가옥’이라는 안내판이 계속 나타나주기 때문이다.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은 대로변에 있지만 안내판 하나 없어 택시기사들도 잘 알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박정희 준장이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1958년 5월이었다. 서울 노량진, 동숭동, 고사북동, 충현동 등지를 전전하던 끝에 마련한 집이었다. 원래는 1930년대에 조성된 ‘문화주택단지’에 있던 일본식 가옥 중 하나다. 당시 세워진 집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으로 건축사적 의미도 작지 않다고 한다. 지상 1층, 지하 1층짜리 건물로 건축면적 123.97m2(38평), 연면적 128.93m2(39평)이다. 2008년 등록문화재 제412호로 지정됐다.
 
  인터넷을 보면 가옥 내부를 관람하려면 서울시공공서비스예약(yeyak.seoul.go.kr)을 통해 사전 예약하라고 되어 있지만, 현장에서 신청해도 된다.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사저.
  신당동 자택은 안방과 자녀들 방, 서재, 거실, 도슨트실(대기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엌이 있던 곳은 현재는 작은 영상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기자가 찾았던 날에는 세 명의 70대 노인이 먼저 와서 ‘5·16혁명’을 알리는 ‘대한늬우스’를 보고 있었다. 육사(陸士)생도들의 혁명지지 시위가 있던 1961년 5월 18일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장군의 모습을 보면서 한 노인이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양반 아니었으면… 저때는 정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배를 채웠는데…”
 
  이어 화면에 ‘혁명공약’이 흘러나왔다.
 
  “…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한 노인이 말했다.
 
  “아… 저대로만 했으면, 저 양반은 정말 끝내주는 인물이 되었을 텐데…”
 
  그러자 다른 노인이 핀잔하듯 말했다.
 
  “이 사람아, 그랬으면 그만큼 못 했을 거야.”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은 1961년까지 3년간 이 집에서 살았다.
1930년대에 만든 신당동 문화주택단지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5・16 거사 직전, 박정희 소장이 혁명공약 등을 검토했을 서재에는 군용 점퍼가 하나 걸려 있었다. 안내원에게 “저 군복, 박 대통령이 입으시던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아니에요. 이 집에 있는 것들은 다 당시 것들을 구해다 놓기는 했지만, 직접 사용하던 것들은 아니에요.”
 
  실망스러웠다. 자녀들 방에 있는 책상 위에는 국민학교 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1961년 5월 15일 밤, 박정희 소장이 김종필, 이낙선, 장태화 등과 함께 출동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육영수 여사가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얘기다. 박정희 소장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박근혜를 굽어보고, 윗목 외할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근영, 지만에게도 눈길을 준 후 방을 나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부부는 그런 식으로 서로에 대한,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때 국민학교 5학년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금은 징역 24년을 선고받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다.
 
  5월 15일 밤 11시경 박정희 소장이 장경순 준장(육군본부 작전교육처장),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 김종필 예비역 중령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신당동을 출발하자 방첩대(지금의 기무사령부) 소속 지프가 따라붙었다. 박정희 소장 일행은 먼저 서울 종로구 청진동으로 향했다. 화신백화점 뒤 미화호텔에 묵고 있던 한웅진 준장이 호텔에 자기 권총을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어 박정희 소장 일행은 삼각지를 경유해 한강인도교(한강대교)로 향했다. 한강인도교를 건너기 전 김종필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처삼촌이기도 한 박정희 소장을 배웅한 후 안국동에 있는 광명인쇄소로 향했다. 박정희 소장은 영등포에 있는 6관구사령부로 향했다. 6관구사령부는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1960년 1월까지 이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수난 계속되는 박정희 흉상
 
  박정희 소장이 나타났을 때, 6관구사령부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이석제, 박원빈, 윤필용 등 혁명군 장교들과 ‘반란군’을 체포하기 위해 온 이광선 헌병차감 휘하 헌병이 뒤섞여 있었다.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혁명군에 가담해 있던 것은 박정희 소장에게는 행운이었다. 6관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 대령은 출동한 헌병들을 영내(營內)에 있는 제사공장 창고에서 대기하도록 한 후, 육사 5기 동기인 이광선 헌병차감을 설득했다.
 
  사령부에 나타난 박정희 소장은 혁명군 장교들을 포함해 부대 내에 있던 장교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자유당 정권을 능가하는 부패와 무능으로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이 정권을 보다 못해 우리는 목숨을 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동지들도 이제부터 구국혁명의 대열에 서서 각자 맡은 임무에 전력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박정희 소장은 자기를 잡으러 온 이광선 헌병차감, 정명환 508방첩대장에게도 “혁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박 장군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쿠데타군 지휘관을 잡으러 출동한 헌병과 방첩대 지휘관들이 혁명군에 가담한 것이다. 그것이 당시 군부의 분위기였고, 사회분위기였다.
 
  이곳에서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통화했다.
 
  “망해가는 이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장도영 총장은 “이번에는 장면 정부에 대해서 경고하는 정도로 그치고 내일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를 해봅시다”라면서 달랬다.
 
  현재 6관구사령부가 있던 자리에는 문래근린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박정희 벙커’라고 불리는 지하벙커가 있다. 바로 이곳이 5·16 당시 대한민국의 운명을 놓고 혁명군과 진압군이 뒤엉켜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자아냈던 곳이다.
 
  지금 공원은 평화롭다. 노인들이 게이트볼을 하고, 산책 나온 시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 이 공원에서 그다지 평화롭지 못한 곳이 한 군데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흉상(胸像)이 있는 곳이다. 1966년 6관구사령부의 의뢰로 최기원 홍익대 교수가 제작한 이 흉상은 참 잘 만들어진 흉상이다.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다른 동상들과는 달리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흉상 아래에는 ‘5・16혁명의 발상지’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소설가 박종화 선생이 쓴 글이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려는 일편단심. 결연히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흉상은 철책과 CCTV의 보호를 받고 있다. 철책 한쪽에는 고(故)박정희대통령흉상보존회 명의의 경고문이 붙어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 흉상을 훼손하거나 주위 시설을 손괴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엄중 조치함.〉
 
  이는 지난 2000년과 2016년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흉상을 철거하거나 망치로 내려치고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016년 11월 서울시 의회에서 흉상 철거를 요구하는 한 시의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근거를 새로 마련하든, 전문가와 협의를 하든 가능한 한 철거나 이전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었다.
 
 
  박정희와 해병대가 만난 염창교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염창교는 김포에서 한강대교로 이어지는 최단 통로에 있었다.
  6관구사령부로 혁명군을 잡으러 온 헌병과 방첩대 장교들은 설득했지만, 거사를 성사시키려면 실병력이 필요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2시, 박정희 소장은 공수단과 해병대의 출동을 독려하기 위해 6관구사령부를 나섰다. 먼저 박정희 소장은 김포에 있는 제1공수단 본부로 가서 출동 태세를 점검했다. 당시의 제1공수단은 지금의 제1공수특전여단이다. 5・16 관련 기록들은 제1공수단의 주둔지를 ‘김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은 강서구 외발산동에 속한다.
 
  공수단의 출동을 독촉한 후 박정희 소장은 다시 김윤근 준장의 해병 제1여단을 만나러 나섰다. 박 소장이 해병 제1여단과 만난 곳은 염창교 입구였다. 박정희 소장은 “해병대, 이상 없이 출동했습니다”라며 경례를 붙이는 김 준장에게 말했다.
 
  “30사단에서 거사 계획이 탄로가 났소. 이제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으니 김 장군만 믿소.”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염창교는 지금은 한강변에서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이 이용하는 작은 다리에 불과하다. 자동차 도로로서의 기능을 올림픽대로에 내준 지 오래다. 하지만 5・16 당시에는 김포 일대에서 출동한 해병대나 공수단이 한강인도교(한강대교)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이었다. 봄바람 부는 다리를 건너면서 ‘만일 이 다리에 중기관총을 갖춘 1개 중대 정도의 병력이나 전차(戰車) 1대만 배치했어도 해병대와 공수단은 이 다리를 건너지 못했거나 날이 완전히 밝은 뒤에야 건널 수 있었을 것이고, 5・16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염창교가 그런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다.
 
 
  한강교
 
노량진 쪽에서 본 한강대교. 1961년 5월 16일 해병대와 공수단은 3중의 방어선을 뚫고 서울시내로 진입했다.
  염창교를 건넌 해병대와 공수단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30분경 한강인도교(한강대교) 남단에 도착했다. 당시만 해도 한강철교를 제외하면 사람이나 차량이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한강 다리였다.
 
  해병대와 공수단 병력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 직할 헌병중대장 김석율 대위를 불러 “병력 50명을 카빈으로 무장시키고 GMC 트럭 여덟 대를 동원하여 한강다리를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육군본부 직할 15범죄수사대(CID) 대장 방자명 중령이 곁에서 “남산에 1개 공병단이 주둔하고 있고, 각 헌병대는 중화기를 갖고 있다”고 상기시켰지만, 장도영은 “아니, 됐어, 우선 그것으로 될 거야”라며 일축했다.
 
  방자명 중령은 한강다리에 트럭을 ‘八(팔)’자로 벌여 3중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가운데는 미군 작전차량이 통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았다. 정예 해병대와 공수단을 앞세운 쿠데타군을 막기에는 부실한 대비였다.
 
  지금은 왕복 8차선 차로에 보행로 1차선, 자전거 도로 2차선으로 확장됐지만 당시에는 차도와 인도 합쳐서 왕복 4차선에 불과했다. GMC 트럭 두 대로도 충분히 다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방자명 중령의 조언대로 중화기로 무장한 공병단 병력을 동원했으면 해병대와 공수단의 도강(渡江)을 저지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17년 전 미국에 살고 있던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과 통화했을 때, 기자는 “쿠데타군이 쳐들어오는 데 고작 그 정도 병력의 헌병을 보낸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장도영 전 총장은 “트래픽 컨트롤(traffic control)! 트래픽 컨트롤”을 연발했다.
 
  “군대는 병과(兵科)마다 기능이 달라요. 헌병은 전투하는 부대가 아니에요. 헌병을 내보낸 건 교통통제하라고 내보낸 것입니다.”
 
  해병대와 헌병이 교전(交戰)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박정희 소장은 걸어서 한강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총알이 쌩쌩 날아왔다. 박정희는 해병대가 작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석제 중령이 말했다.
 
  “각하, 일이 끝내 안 되면 각하 바로 옆 말뚝은 제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하나뿐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서 쓰나?”
 
  나중에 한웅진 준장은 “형님, 그때 강물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박정희 소장은 “가족들 얼굴이 강물에 떠오르더군”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보았다. 빨리 걸으면 10분, 조금 천천히 걸어도 15분이면 건널 수 있었다. 박정희 장군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만들어 놓은 나라가 그의 딸의 대(代)에 이르러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역사의 무게가 쌓인 KBS 방송국
 
남산에 있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5·16 당시 KBS 방송국이 있던 곳이다.
  한강다리를 건넌 해병대 선두 부대는 용산역 인근에서 6군단 포병단(단장 문재준 대령) 병력과 만났다. 6군단 포병단은 이미 육군본부를 점령한 후였다. 박정희 소장은 공수단 병력과 함께 남산 KBS 방송국으로 갔다. 혁명방송을 하기 위해서였다. 새벽 4시30분경이었다. 하지만 혁명공약 등을 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던 김종필이 아직 오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윤태일 준장, 박순권 중령 등과 함께 혁명공약을 인쇄하고 있던 안국동 고려인쇄공사(사장 이학수)로 향했다. 고려인쇄공사는 조계사 건너편 골목길에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인쇄소에서 혁명공약이 인쇄된 전단을 넘겨받은 후 김종필과 함께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새벽 5시 직전이었다.
 
  김종필이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박종세 아나운서를 찾아왔다. 박정희 소장은 박종세에게 군사혁명의 필요성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혁명공약이 적힌 전단을 건네주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행진곡이 울리고 박종세가 전단을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KBS 방송국 자리에는 지금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다. 이곳은 원래 구한말 일본공사관과 일제(日帝)의 한국통감부가 있던 곳이다. 구한말 역사에 왜성대(倭城臺)라고 기록된 곳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1926년 경복궁으로 옮겨갈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있었다. 1921년 의열단의 김익상 의사가 총독부에 들어와 폭탄을 던진 곳도 이곳이다. 총독부가 이전한 후에는 은사(恩賜)기념과학관이 들어섰다가 해방 후에는 국립과학박물관이 됐다. 6・25 때 폭격으로 파괴된 자리에 1957년 KBS의 라디오 스튜디오와 보도국 등이 들어왔다. 이곳이 5・16의 현장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1976년 KBS가 여의도로 이전한 후에는 국토통일원, 국가안전기획부 등에서 사용하다가 1999년부터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입주했다. 역사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곳인 셈이다.
 
 
  초석만 남은 육군본부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왼쪽에 보이는 표석이 육군본부 본청 정초석(定礎石)이다.
  아침 7시 직전 박정희 소장은 해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용산 육군본부로 들어왔다. 육군본부는 이미 6군단 포병단 병력이 점령해 놓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1989년 충남 계룡시의 계룡대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는 1994년 전쟁기념관이 들어섰다. 전쟁기념관 오른쪽 비행기 등을 전시해 놓은 곳에는 육군본부 본청 건물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서울 장충동 동국대학교 맞은편에 있는 파라다이스문화재단 뒤편 언덕.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이 있던 곳이다.
  육군본부에서는 장도영 참모총장과 혁명군 장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오전 9시 KBS는 장도영 참모총장 명의의 계엄선포문과 포고문 1호를 방송했다. 박정희 소장은 이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청와대로 갔다. 현석호 국방부 장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김재춘 대령, 유원식 대령 등이 동행했다. 오전 10시30분, 접견실에서 이들과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올 것이 왔구나!”
 
  그해 7월 3일 명목상의 혁명지도자였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축출된 후, 박정희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됐다. 얼마 후 박 의장은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던 민의원 의장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국대학교 맞은편 파라다이스문화재단 뒤쪽 언덕이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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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p1940    (2018-05-17)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그 때는 넉넉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국가안보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군 생활도 무난히 하고 사회생활을 할 즘음 일자리가 없었던 시절 월부책장사도 보증인을 세워야 할 때였다.서대문 사거리 적십자 병원에는 피를 파는 고학생 실업자들이 장사진을 친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알겠나.

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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