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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서양미술관 기행

브리지스톤 미술관

도쿄 긴자의 인상파 창고

글·사진 :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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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선회사에서 시작, 세계적 타이어 회사 세운 이시바시 쇼지로의 컬렉션 전시
⊙ 피카소의 〈여자의 얼굴〉 등, 인상화 등 서양 명작 보유
⊙ 아오키 시게루 등 일본 초기 서양화가들의 작품도 다수 소장

최정표
1953년생.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경제학박사 / 경실련 공동대표, 건국대 상경대학장 역임. 현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재벌사연구》, 《경영자혁명》 출간
브리지스톤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인 피카소의 〈여인의 얼굴〉.
  도쿄 긴자(銀座)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이런 거리가 끝나 가는 곳에 인상파 그림이 가득한 미술관이 하나 있다. 브리지스톤 미술관(Bridgestone Museum of Art)이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마네, 고흐, 고갱, 모로, 세잔, 모네, 모딜리아니, 모리스 데니스, 루오, 피카소, 폴 클레, 마티스, 로댕 등 서양 미술사를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이 가득하다. 이런 것이 일본의 저력인지도 모른다.
 
  브리지스톤은 일본의 재벌 사업가인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郞·1889~1976)가 만든 타이어 회사의 이름이다. ‘브리지스톤 타이어’ 본사 빌딩 2층에 미술관이 만들어져 있고, 그 이름도 ‘브리지스톤 미술관’이다. 창업자인 이시바시가 수집하고 소장한 작품들로 만들어진, 말하자면 이시바시의 미술관인 것이다.
 
  미술관은 1952년 개관했다. 이시바시는 사업에 성공하면서부터 미술품을 수집하였기 때문에 개관 시에는 이미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업을 다시 일으킨 이시바시는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된 본사 건물을 새롭게 지으면서 여기에 미술관도 만들었다.
 
브리지스톤 타이어 본사 안에는 서양과 일본의 명작들을 소장한 미술관이 있다.
  새 건물의 기공식을 가진 1950년 이시바시는 미국의 유명한 타이어 회사인 굿이어(Goodyear) 타이어사와 기술제휴를 위해 미국 여행을 떠났다. 이때 새 건물의 설계자도 동반해 함께 미국의 유명 미술관들을 둘러보았다. 귀국 후 새로 짓는 건물의 설계를 일부 수정해 2층에 제대로 된 미술관을 갖추도록 했다. 1952년 건물이 완공되고 1월 8일 미술관 개관식이 열렸다. 그리고 1월 11일부터 3월 30일까지 개관기념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개관기념 전시회에는 서양 작가 작품 55점, 일본 화가 작품 55점, 조각 9점, 합계 119점이 전시되었다. 이 중 10점은 전시를 위해 빌려온 작품이었다고 한다. 이시바시는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서양 작가와 일본 작가를 대비시켜 일본 작가들의 예술적 재능을 평가하고 조명해 보도록 했다. 그만큼 일본 예술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다.
 
  1952년은 일본에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일본은 2차 대전에 패한 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었는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연합군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조약은 1952년부터 발효되었는데 그해에 도쿄 한복판에 브리지스톤 미술관이 개관되었던 것이다. 이 일은 패전(敗戰)의 폐허 속에서 좌절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자긍심을 안겨 준 대사건이었다.
 
  1962년에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브리지스톤의 소장품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시바시 컬렉션을 서양세계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2015년에는 브리지스톤 타이어 회사의 새 건물 신축을 위해 미술관이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새 건물은 2019년 완공될 예정이고 이 기간 동안 소장품은 다른 미술관에 대여해 주고 있다.
 
 
  버선 회사로 출발
 
브리지스톤의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
  후쿠오카(福岡) 구루메(久留米)가 고향인 이시바시 쇼지로는 1906년 구루메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7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았다. 가내수공업으로 운영하던 조그마한 재봉점이었다. 이시바시는 재봉점을 발전시켜 1918년 일본식 버선인 다비를 만드는 ‘닛폰다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시바시는 다비의 바닥에 고무를 대는 지카다비를 만들면서 사업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다비회사가 고무회사로 바뀌는 것이다. 이때는 세계적으로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일본에도 자동차가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지카다비를 만들면서 축적한 고무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타이어 산업에 진출했다. 일본인 최초였다.
 
  1930년 첫 타이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브리지스톤의 출발이었다. 1931년에는 본격적인 타이어 생산을 목적으로 ‘브리지스톤(Bridgestone) 타이어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의 성(姓)인 이시바시(石橋)가 ‘돌다리(stone bridge)’라는 뜻이라 처음에는 스톤브리지라고 했다가 나중에 브리지스톤으로 고쳤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기에는 농담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일본어를 영어로 옮기면 어순이 바뀐다고 생각했다. 영어에서는 이름과 성(姓)도 반대로 쓰고, 주소도 거꾸로 쓰고, 날짜도 거꾸로 쓰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영어로 옮기면 ‘다리 돌’로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스톤브리지 대신 브리지스톤으로 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브리지스톤으로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제는 확실한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브리지스톤과 관련해서는 또 하나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2차 대전이 터지고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자 일본에서는 영어 사용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일어났다. 적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불충(不忠)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 이름을 ‘닛폰타이어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이때 미국의 유명한 타이어 회사인 굿이어(Goodyear) 회사는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이 이 섬을 점령한 후 일본 정부는 이 공장의 운영권을 브리지스톤에 맡겼다. 이시바시 사장은 일본이 전쟁에 패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 경우 공장을 잘 관리하여 굿이어사에 더 좋은 상태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그렇게 되었다. 여기에 감동받은 굿이어 회사는 1950년 브리지스톤과 기술제휴를 맺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시바시의 사업적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토야마 가문과 혼인
 
자유민주당을 창당, 일본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이치로.
  재벌의 성을 쌓은 이시바시는 전후에 유력 정치인과 탄탄한 혼맥까지 만든다. 2013년 2월 12일 한국의 도하 신문에는 한 일본인 노파의 부음이 실렸다. 하토야마 야스코(鳩山安子· 1922~2013)라는 91세 여인이다. 일본인 노파의 죽음이 한국의 언론에 일제히 보도될 정도이면 그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바로 브리지스톤의 창업자 이시바시의 장녀였다.
 
  이름이 하토야마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면 하토야마 집안으로 시집갔음을 알 수 있다. 시아버지는 자민당을 만들어 초대 총재를 지내고, 1954년 이후 3번이나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1883~1959)이다. 이시바시는 당시 일본 최고의 정치인과 사돈이 되었던 것이다.
 
  하토야마 가문은 지금까지도 일본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정치 거물을 배출하고 있다. 이시바시의 사위는 외무상을 지낸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郞)이다. 큰 외손자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1947~)이다. 일본의 만행을 사죄하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을 꿇은 바로 그 사람이다. 둘째 외손자는 자민당의 중의원 의원이면서 총무대신을 지낸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이다.
 
  재계의 최고 거물이 정계의 최고 거물과 탄탄한 혼맥까지 만들었으니 이시바시 쇼지로의 일본 내 위상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제 브리지스톤은 미쉐린을 제치고 세계 1위 타이어회사가 되었고 2016년 기준으로 종업원이 14만명, 연 매출액이 33조원이다.
 
  이시바시의 딸 하토야마 야스코에게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상속되었다. 야스코는 두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기 위해 한 사람에게 매달 1억5000만원을 후원했다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2000억원이 넘는 브리지스톤 주식을 물려받았다. 외손자들도 각기 500억원이 넘는 주식을 받았다. 브리지스톤 미술관이 어떤 미술관인지 짐작할 만하다.
 
 
  쇼지로 컬렉션
 
  이시바시는 사업이 기반을 잡아 가자 구루메에 머물고 있던 1927년(38살)부터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서양식으로 대저택을 짓고 서양식 생활방식도 즐겼다. 저택의 70% 이상은 서양식 시설이었다. 저택을 장식할 작품도 당연히 서양화였다. 회사 이름까지 영어로 지은 것을 보면 상당히 서구 취향적 일본인이었던 모양이다.
 
  이시바시가 서양 작가들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이지만 서양 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도쿄에 대저택을 짓기로 한 1935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바시는 사업이 번창하자 본사를 도쿄로 옮겼다. 1936년에는 도쿄에 거대한 맨션을 지었고 이듬해에 가족과 함께 아예 도쿄로 이사를 했다. 도쿄의 새 저택에는 서양 작가들의 작품을 걸고 싶었지만 작품가격이 너무 비쌌다.
 
  이시바시의 미술품 수집시기와 수집패턴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이시바시가 개인 자격으로 미술품을 사 모으던 시기, 둘째는 재단이 구매하지만 이시바시가 깊이 간여하고 있던 시기, 셋째는 이시바시가 죽은 1976년 이후 재단이 독립적으로 사 모은 시기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에 수집한 작품들이 양과 질 모두에서 미술관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이시바시의 직접적인 지시나 참여로 수집된 것들이어서 이를 ‘쇼지로 컬렉션(Shojiro Collection)’이라고 부른다.
 
  이시바시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브리지스톤은 미술사에 기록되고 있는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가격이 너무 높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20세기의 유명 현대 작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는데 이제는 이들도 그 가격이 너무 올랐다. 한 발 앞서가야 좋은 작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시바시는 웅변으로 보여주었다.
 
  이시바시는 두 개의 미술관을 만들었다. 1952년에는 도쿄에 ‘브리지스톤 미술관’을 만들었고 1956년에는 고향인 후쿠오카(福岡)의 구루메(久留米)에 ‘이시바시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시바시 미술관에는 주로 일본인 화가들의 서양화가 보관되어 있다. 유럽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브리지스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시바시는 1956년 이시바시 재단(石橋財團)을 만들어 미술관의 소유와 운영을 모두 이 재단에 맡겼다. 같은 해에 고향 구루메에 이시바시 문화센터를 만들어 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시바시는 문화예술의 증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업가였다.
 
 
  아오키 시게루와 사카모토 한지로
 
일본 근대 미술의 거목 사카모토 한지로.
  이시바시의 수집품은 대부분 서양화이다. 작품 수집을 시작한 1927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는 주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일본 서양화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아오키 시게루(靑木繁·1882~1911)와 사카모토 한지로(板本繁二郞·1882~1969)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일본 근대미술사의 거목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카모토 한지로는 구루메가 고향이고 청년 시절 구루메 고등소학교의 미술선생을 지냈다. 이때 이시바시가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그 이후 이 미술 선생은 도쿄로 갔다가 1921년부터 24년까지 3년간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그린 〈모자를 든 여인〉은 지금 브리지스톤에 걸려 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사카모토는 다시 고향 구루메로 돌아와서 이시바시의 옆집에 살게 된다. 구루메에 아틀리에를 만들고 한평생 고향에서 작업을 했다. 이시바시가 사업에 기반을 닦아 갈 즈음인 1930년(41살) 사카모토는 이시바시에게 일본의 천재화가 아오키 시게루의 작품을 수집하라고 권했다.
 
  아오키 시게루는 28세에 요절한 천재화가다. 그도 구루메 출신이었고 사카모토 한지로와는 동갑내기 친구로 함께 그림을 공부했다. 그가 죽은 후 주옥같은 걸작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버릴 위기에 처하자 사카모토는 이시바시에게 이들을 사 모아 미술관을 만들라고 권했다. 이시바시는 이미 서양화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고 40줄에 들어서자 미술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바시는 사카모토의 권고에 따라 10여 년에 걸쳐 아오키의 주요 작품들을 사 모았다. 아오키 시게루는 일본 서양화의 개척자인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1866~1924)와 후지시마 다케시(藤島武二·1867~1943)의 제자이다. 그는 일본의 신화와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거기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브리지스톤이 소장하고 있는 〈바닷속의 궁전〉은 일본의 고대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처음에는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오키의 대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근대 일본미술 초기 서양화 다수 수집
 
  이시바시는 사카모토 한지로와 후지시마 다케시의 작품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그뿐만 아니라 초창기 일본 작가들의 명품을 수집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브리지스톤 미술관은 일본 근대 회화의 핵심적 계보 작품들을 많이 소장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근대 서양회화의 선구자는 아사이 추(殘井忠·1856~1907), 구로다 세이키, 후지시마 다케시, 아오키 시게루, 사카모토 한지로 등인데 브리지스톤은 이들의 대표작들을 고르게 소장하고 있다.
 
  아사이 추는 일본의 1세대 서양화 작가이다. 메이지 정부가 만든 첫 미술학교에서 이탈리아인 스승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40살이 넘어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 유학까지 다녀왔다.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일본 근대회화의 기초를 닦았다. 브리지스톤에 걸려 있는 〈그레의 빨래터〉는 아사이 추의 1901년 작품인데 파리의 화가들이 사생 장소로 즐겨 찾던 파리 근교 강가 마을의 빨래터를 그린 인상파 그림이다.
 
  구로다 세이키는 가고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18살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갔다. 거기서 일본인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귀국해서는 일본 화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예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면서 재능 있는 작가를 길러내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예술문화의 행정에 치우치다 보니 자연히 작가로서의 활동은 소홀해졌다. 브리지스톤이 소장하고 있는 〈바느질하는 여인〉은 프랑스 유학 시절 하숙집 주인의 19살 된 딸을 그린 초상화이다. 1890년 작이니 구로다가 24살 때 그린 작품이다.
 
  후지시마 다케시는 일본화에서 서양화로 바꾼 작가이고 많은 제자를 양성한 작가이기도 하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국비 유학생으로 유럽에서 공부했다. 브리지스톤에 걸려 있는 〈검은 부채〉는 1909년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면사포를 쓴 서양 미인이 검은 부채를 들고 있는 매우 독특한 구도로서 미술관의 여러 전시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눈에 띄는 그림이다.
 
 
  해외로 나갈 뻔한 서양 명작들 붙잡아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부터는 이시바시의 컬렉션에 변화가 온다. 이때부터 이시바시는 인상파, 후기인상파 등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패전 후 사회가 혼란해지자 일본에 들어와 있던 유명 서양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으로 흘러나갈 위험에 처했다. 이시바시는 이 작품들을 일본 내에 잡아 두기 위해 이들을 사 모으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패전 후 일본은 일대 혼돈 상태였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은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먼저 재벌을 해체했다. 토지개혁으로 대지주도 사라졌다. 부자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 틈바구니에서도 해체 대상이 아니었던 이시바시는 행운을 잡았다. 중국 등 해외의 공장은 잃었지만 국내 공장은 폭격에서 살아남아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고무 원료도 야적장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대대적인 전후 복구사업과 더불어 트럭과 버스 등 자동차들이 다시 운행되자 타이어 수요는 급증하였고 이시바시는 돈방석에 앉았다.
 
  재벌 등 과거 부자들이 생활고에 빠지면서 소장하고 있던 서양 미술품들을 헐값에 내놓기 시작했다. 초(超)강세였던 달러 덕분에 많은 작품들이 해외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자금력을 갖춘 이시바시는 오히려 좋은 서양 작품들을 모을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1945년부터 미술관을 개관한 1952년까지 이시바시는 50점이 넘는 서양 명품들을 확보했다.
 
  이런 작품 중 피카소의 〈여자의 얼굴(Head of a Woman)〉은 이시바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1952년 브리지스톤 미술관이 개관할 때 만든 카탈로그의 표지에 사용된 그림이다. 피카소가 1923년에 그린 작품으로 사이즈(46.1cm×38.1cm)는 크지 않지만 1차 대전 후 피카소가 새롭게 시도한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작품이며 피카소 작품 중 매우 특색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시바시는 세계적 보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작품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네의 자화상
 
마네의 자화상.
  이 작품은 일본인 수집가가 파리의 저택에 걸어 두었던 것을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술상을 통해 이시바시가 구입하였다. 이시바시는 화집 등을 통해 이미 이 그림을 알고 있었는데 미술상으로부터 이 작품이 시장에 나온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보통은 작품을 구매하기 전에 전속 전문가들과 상의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절차 없이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지금 이 작품은 브리지스톤의 얼굴이 되고 있다. 브리지스톤을 대외적으로 소개할 때 소개서의 표지에 자주 사용하곤 한다.
 
  피카소는 여자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 작품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마치 그리스 미인의 조각상을 스케치한 것 같다. 어찌 보면 동양 여인 같기도 하다. 색깔이 화려하지 않은 것도 특색이다. 브리지스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작품이다.
 
  미술관이 설립된 이후에도 미술품 수집은 계속되었으나 서양 작품의 수집은 주춤해졌다. 서양 미술상들이 일본에 있는 서양 화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격이 급상승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이시바시는 82세가 되는 1971년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의 〈자화상〉을 사들였다. 얼굴만 그린 자화상이 아니고 전신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1879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당시는 거울이 자화상을 그리는 중요 수단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은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뀐다. 작가들은 이를 다시 바꾸어 본래 모습대로 환원시켜 놓는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작가들이 거울에 비친 모습 그대로 그리기도 했다. 마네의 〈자화상〉도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뀐 그대로이다. 단춧구멍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피카소 작품과 마네의 작품에서 이시바시의 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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