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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기행

메이지유신 150주년, 교토를 가다

도바·후시미 전투 벌어진 곳에는 쓸쓸한 표지석만…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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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의 옛 황궁인 교토고쇼(御所), 이제는 사전 허가 없이 관람 가능
⊙ 정원이 아름다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별장 무린안, 이토 히로부미 등이 모여 러일전쟁 결심한 곳
⊙ 사카모토 료마가 습격당했던 데라다야 여관과 막부군과 조슈·사쓰마군 간 도바·후시미 전투 전적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별장 무린안.
히가시야마를 마치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끌어안고 있다.
  2년여 만에 다시 교토(京都)를 찾았다. 올해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50주년이 되는 해. 메이지유신은 우리에게는 일제(日帝)식민통치로 이어지는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도전(挑戰)에 일본이 어떻게 응전(應戰)했는지를 아는 것은,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처음 찾은 곳은 신센구미(新選組)의 최초 주둔지였던 미부데라(壬生寺)였다. 신센구미는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 지사들의 출현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1863년 9월 막부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보조 조직이다. 낭인(浪人) 무사들로 이루어진 신센구미는 자유당 말기의 ‘정치깡패’ 비슷한 조직이었다.
 
  그런 집단의 이야기를 시바 료타로, 아사다 지로 등의 작가들은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면서까지 사무라이의 마코토(誠)를 실천하려 한 진정한 무사집단으로 그려냈다.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는 ‘있었던 사실로서의 역사’를 주장했다지만, ‘있었던 사실’이 모두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후세가 기억해 주는 사실’이 역사가 된다.
 
  교토에서도 후미진 동네 골목길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절이지만 미부데라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인도 있지만, 서양인들도 보인다. 신센구미의 이야기가 일본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얘기다.
 
 
  휘파람새 복도
 
교토에 있는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성인 니조성 니노마루 궁전. 니조성의 본관이다.
  니조(二條)성은 1606년 완공된 도쿠가와 막부 쇼군(將軍)의 성(城)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두었기 때문에 니조성은 치소(治所)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니조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할 무렵에 만들어진 성이다. 때문에 전국(戰國)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성들에 비하면 해자(垓字)의 폭이 좁고 천수각(天守閣)도 높지 않다.
 
  본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니노마루 궁전으로 들어가면 무사 대기소가 나온다. 호랑이와 표범의 그림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우리나라 건물에 학(鶴)이 그려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역시 무사의 나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건물의 마루는 ‘휘파람새 복도’라고 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걸쇠와 복도를 지탱하는 못이 닿으면서 휘파람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닌자(忍者)의 침입을 알아챌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니노마루 궁전의 주실(主室)인 대형실에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와 다이묘(大名), 중신(重臣)들의 실물 크기 인형들이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에 앞서 1867년 10월 13일 다이묘와 막부 중신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10월 15일 천황은 쇼군의 상주(上奏)를 수락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니노마루 궁전 앞 정원이 아름답다. 군데군데 눈에 덮인 풍경이 일품이다. 언젠가 꽃피는 계절에 아내와 같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여 년간 황궁이었던 교토고쇼
 
궁내청이 관리하는 교토고쇼는 이제는 사전 신청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옛 황궁인 교토고쇼(御所)까지는 차량으로 10분 거리다. 1331~1869년 황궁으로 쓰인 곳이다. 막부 말기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 정치의 중심이 됐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막부정치 시절, 천황의 존재는 유명무실(有名無實)했다. 전국시대의 천황들 중에는 글씨나 그림을 팔아 끼니를 이어야 했던 이도 있었다.
 
  ‘상갓집 개’ 같던 천황의 팔자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후 약간 피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중견 다이묘 수준의 대우를 해준 것이다. 대신 막부는 1615년 7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를 반포했다. 천황과 공경들을 규제하는 법령이었다. 제1조는 “천황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학문이다”였다. 정치는 신경 쓰지 말고 고전 공부 열심히 하면서 조상 제사나 잘 지내라는 얘기였다. 니조성에 파견한 막부의 관리들은 천황이나 공경들이 다이묘들과 결탁해 딴짓을 하지 않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들어가 국교(國交)를 요구하자, 막부는 다이묘들에게 대책을 구하는 한편, 천황에게도 이 사실을 상주했다. 막부로서는 널리 ‘소통(疏通)’을 하면서 천황의 권위를 빌려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막부의 권력 유지 측면에서 마이너스가 됐다. 260년 동안 다이묘와 천황을 정치에서 배제해 왔던 막부가 새삼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막부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됐다.
 
 
  고메이 천황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孝明) 천황은 병적일 정도로 서양인들을 두려워했다. 막부는 미국・영국・프랑스 등 구미(歐美) 열강과 수교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천황은 ‘양이’를 고집했다.
 
  전국이 존왕양이 주장으로 들끓는 판국에 막부는 천황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막부가 양이와 관련해 천황에게 양보할 때마다 막부의 권위는 추락하고 천황의 권위는 올라갔다.
 
  고메이 천황은 ‘양이’는 절실하게 원했지만, ‘존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타협해서 편하게 살고 싶어 했지,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천황의 의중을 잘못 읽은 조슈 세력이 막부 타도를 서두르다가 오히려 교토의 정치에서 밀려난 사건이 1863년의 8・18정변이었다. 이듬해 조슈 세력은 교토에서의 정국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해 7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교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아이즈(會津)와 사쓰마번, 신센구미가 이를 진압했다. 이를 ‘하마구리몬(蛤門)의 변(變)’이라고 한다. 교토고쇼 바깥쪽에 있는 하마구리몬에는 아직도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구사카 겐즈이, 이리에 구이치, 기시마 마타베, 데라지마 주사부로 등이 자결했다. 하마구리몬 근처에는 특이한 모양의 나무가 있다. 이 앞에서 조슈의 지사들이 목숨을 끊었다.
 
  고메이 천황은 1867년 1월 36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때문에 암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고메이 천황은 유약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천황의 정치적 권위는 높아졌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메이지 천황이 유신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선포한 곳, 시신덴
 
교토고쇼의 정전인 시신덴. 1868년 3월 14일 메이지유신을 선포한 곳이다.
  조슈의 지사들이 자결한 나무 오른쪽으로 담장이 쳐진 곳이 바로 고쇼이다. 재작년에 왔을 때만 해도 고쇼는 일반 공개가 되지 않았다. 궁내청에 사전에 견학 신청을 해야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사전 신청 없이도 관람할 수 있게 됐다. 대박!
 
  고쇼 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시신덴(紫宸殿)이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勤政殿)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노송나무 껍질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1868년 3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공경과 다이묘들을 거느리고 하늘과 땅의 신(神)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가 ‘5개조 어서문(五箇條御誓文)’을 낭독했다.
 
  1.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에 따라 나라의 정치를 한다.
  2. 상하가 마음을 합쳐 국가정책(경륜)을 활발하게 펼친다.
  3. 중앙 관리, 지방 무사가 하나가 되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뜻한 바를 이루어 불만이 없도록 한다.
  4. 옛날부터 내려오는 낡은 관습을 깨뜨리고 천지의 공도(公道)에 따른다.
  5.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황국의 기반을 크게 진작시킨다.

 
  동양에서 예부터 군신(君臣)이 개혁을 다짐할 때에 으레 하는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선서문은 바로 메이지유신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대호령(大號令)이었다.
 
  세이료덴(清涼殿・청량전)은 천황의 생활공간이었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에 해당한다. 오가쿠몬쇼(御學問所)는 이름 그대로 천황과 신하들이 학문을 공부하던 곳이다.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에 해당한다. 고고쇼(小御所)도 메이지유신의 현장이다. 1867년 12월 9일 밤, 이곳에서 왕정복고(王政復古) 모의가 이루어졌다.
 
  고쇼 내에는 두 개의 정원이 있다. 오이케니와 정원과 고나이테이 정원이다. 같이 이어져 있지만, 천황의 개인 정원인 후자(後者)가 더 아기자기하고 정감이 있다. 꽃피는 봄에 오면 더 좋겠지만, 군데군데 눈이 덮여 있는 풍광도 좋다.
 
 
  같은 장소에서 죽은 두 거물
 
오무라 마스지로(왼쪽)와 사쿠마 쇼잔의 조난비.
두 사람은 5년 사이에 같은 장소에서 암살당했다.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 등과 함께 유신 3걸로 불리는 인물이다. 조슈 상급 사무라이 출신인 그는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사쓰마와의 동맹을 주도했다. 유신 후에는 폐번치현(廢藩治縣) 등 굵직굵직한 개혁들을 지원했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무리한 정한론(征韓論)을 막았다.
 
  젊은 시절,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고 불리던 그는 신센구미가 조슈 지사들을 습격한 이케다야 사건(1864년 6월)에서 살아남은 후 한동안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기온의 게이샤 이쿠마쓰(幾松)였다.
 
  두 사람이 살던 곳이 오쿠라호텔 뒤쪽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가쓰라 고고로와 이쿠마쓰가 살던 곳에는 이쿠마쓰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 있다. 가격표를 보니 ‘벤토’ 값만 해도 ‘악’ 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쿠마쓰 길 건너편에 보니 석벽에 무슨 부조(浮彫) 같은 것이 보였다. 살펴보니, 세상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1864)과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1824~1869)의 조난비(遭難碑)다. 사쿠마 쇼잔은 나가노 마쓰시로 출신의 학자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스승이다(《월간조선》 2017년 11월호 〈나가노시 마쓰시로-징용의 한, 유신의 뿌리〉 참조). 오무라 마스지로는 조슈 출신의 군인으로 메이지유신 후 병부대보(兵部大輔・국방차관)로 있으면서 근대 일본 육군 건설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두 사람이 암살당한 곳은 교토에서 꼭 찾아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들이 5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같은 곳에서 암살당했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신 3걸 중의 하나가 숨어 살았다니 기연(奇緣)이다.
 
  이곳에서 걸어서 10여 분쯤 되는 거리에는 신센구미가 조슈 지사들을 습격했던 이케다야(池田屋) 자리가 있다.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당한 오우미야(近江屋)는 이케다야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인근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한 혼노지(本能寺)가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가보지 못했다.
 
 
  러일전쟁을 결심한 무린안
 
무린안 양관 2층 회의실. 1903년 3월 이토 히로부미 등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한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 꼭 찾아가 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무린안(無隣庵)이다. 교토를 찾는 한국인들이 한두 번은 지나쳐가게 되는 헤이안신궁(平安神宮)에서 풍광이 좋은 것으로 이름난 난젠지(南禪寺)로 가는 큰길가에 있다.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안이 보이지 않는다.
 
  제법 큰 저택이나 고급 요정이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이곳은, ‘일본 육군의 교황’이라고 불리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의 별장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요시다 쇼인에게 배운 인물이다. 일제 침략 과정에 등장하는 가쓰라 다로(桂太郞),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등이 모두 야마가타 슬하에서 성장한 조슈 군벌들이었다.
 
  무린안은 그런 무단(武斷) 정치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무린안 바깥에 있는 히가시야마(東山)까지도 마치 무린안의 일부인 것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을 차경(借景)정원이라고 한다던가? 겨울이라 꽃은 없지만 상록수들과 개울, 눈, 이끼가 어우러진 풍광이 기가 막히다.
 
  이곳을 찾은 것은 우리에게는 아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1903년 4월 21일 이곳에 네 명의 거물이 모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로(元老)로 정우회 총재인 이토 히로부미, 총리 가쓰라 다로,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였다. 무린안에 있는 양관(洋館) 2층에서 이들은 ‘대(對)러시아방침 4개조’를 결정했다. 한마디로 만주는 러시아가,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때 고종은, 조정 대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세계 속 우리의 운명도 이런 식으로 거래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국제사회에서 약자(弱者)에겐 친구가 없다. ‘무린(無隣)’ 두 글자가 비수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깃발이 승패를 가른 도바·후시미 전투
 
도바-후시미 전투 전적지. 막부군과 조슈-사쓰마군이 격돌한 곳이다.
  2년 전 여행에서 놓쳤던 도바・후시미(鳥羽-伏見) 전투 발발지와 데라다야(寺田屋)도 이번에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다리 곁에 ‘도바・후시미 전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도바・후시미 전투는 1868년 1월 27~30일 막부군과 조슈・사쓰마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대정봉환 이후에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관직과 영지를 내놓고 은퇴할 것을 요구했다. 정권을 반납하면 다이묘평의회 의장 자격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로서는 날벼락 같은 얘기였다. 하지만 조슈와 사쓰마는 그런 식으로 도쿠가와 가문과 권력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은 계속 막부 측을 도발했다. 견디다 못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명분으로 막부군을 교토로 진격시켰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총포도, 군대도 아니었다. 천황을 상징하는 국화꽃 문양을 수놓은 ‘금기(錦旗)’였다. 이 깃발이 전장에 나타나자 막부군 지휘관들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기들이 ‘관군’으로서 반란군인 조슈・사쓰마군을 토벌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금기’는 조슈・사쓰마군이 천황의 군대, 즉 관군이고, 자신들은 역도라는 의미였다. 막부군은 한순간에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 막부군은, 상징 싸움, 정통성 싸움에서 진 것이다.
 
  오사카성에 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군함을 타고 에도로 도주했다. 막부 측을 대표한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 1868년 6월 10일 에도 성문을 열었다. 그해 9월 신정부는 연호를 ‘메이지’로 바꾸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막부가 마지막 순간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망한 것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체성(正體性)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傍系)인 미토(水戶)번 출신이었다. 미토번은 천황을 존숭하는 국수주의(國粹主義) 학문인 국학(國學), 일명 ‘미토학’의 본산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역시 미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영명했던 그는 언젠가는 도쿠가와 가문을 짊어질 인재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결국 ‘쇼군’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운명을 놓고 목숨을 걸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어려서부터 천황 존숭 사상인 미토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성장한 그로서는 조슈-사쓰마가 앞세운 ‘천황’에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도바・후시미 전투 이래 내내 무기력하게 처신했다. 최고 지도부가 적의 이데올로기에 전염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잘 보여준다.
 
 
  료마가 죽다 살아난 데라다야
 
데라다야여관. 사카모토 료마가 막부 관헌들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한 곳이다.
  데라다야 여관은 도바・후시미 전투 전적지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분 거리에 있다. 1866년 3월 8일 사카모토 료마가 후시미 부교(奉行・행정장관)가 보낸 관헌들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곳이다. 료마의 애인 오료가 목욕을 하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달려가 위급을 알려주었다. 료마와 그의 동지들은 칼을 휘두르고 권총을 쏘면서 간신히 탈출했다. 건물 옆 마당에는 이 사건을 알려주는 커다란 기념비와 료마의 동상이 서 있다.
 
  데라다야 사건, 도바-후시미 전투가 일어난 것은 이곳 후시미가 교토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를 벤 칼. 료젠역사관에 있는 이 칼에 대한 안내문에 의하면 료마를 죽인 사람은 막부의 보조경찰조직인 미마와리구미(見廻組) 소속 가쓰라 하야노스케라고 한다.
  료마와 오료의 작은 동상이 보이는 시냇가 다리 위에서 생각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한밤중에 어둠을 뚫고 정신없이 도주할 때, 조슈의 지사들이 하마구리몬 앞에서 동지들끼리 끌어안고 목숨을 끊을 때, 가쓰라 고고로가 이케다야에서 신센구미에게 동지들을 잃고 도망 다닐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절망뿐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들이 꿈꾸는 세상이 오리라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비명(非命)에 갔다. 하지만 그래도 꿈을 잃지 않고 내달린 사람들은 꿈을 이루었다. 독립되고 부강한 나라라는 꿈을….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 그 꿈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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