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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기행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고향 나카쓰(中津)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주장, 아베신조의 ‘친미반중(親美反中)’ 외교노선 연상케 해

글·사진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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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마다 후쿠자와 유키치 어록이나 지역 출신 위인들을 소개하는 패널 걸려 있어
⊙ 나카쓰성 내 천수각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주, 충신 도리이 스네에몬의 초상 등 전시
나카쓰역 앞에 서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동상.
그가 1만 엔권 지폐 초상인물이 된 지 30주년임을 알리는 선간판이 서 있다.
  일본 규슈(九州) 오이타(大分)현 나카쓰(中津). 역사(驛舍)를 나서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파란 하늘 아래 팔짱을 끼고 하늘을 응시하는 사내의 동상이 서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온천 도시 벳푸(別府)에서 특급열차 소닉으로 45분 거리에 있는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 사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 메이지(明治)시대의 교육가이자 사상가・저술가, 게이오(慶應)대학의 설립자…. 나카쓰는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향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일본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은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일본 돈 1만 엔권에 그의 얼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동상 옆에는 ‘축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 1만 엔권 발행 30주년 기념’이라고 적힌 커다란 선간판이 서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나카쓰성의 모습을 담은 맨홀 뚜껑. 맨홀 뚜껑에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나카쓰역에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택(古宅)으로 가는 길. 발 아래 맨홀 뚜껑이 눈에 들어온다. 나카쓰성 아래 강을 오가는 작은 배들이 새겨져 있다. 파란 하늘, 파란 강, 석축과 소나무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실 나카쓰의 맨홀 뚜껑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일본의 맨홀 뚜껑들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3년 전 여행했던 야마구치(山口)시 유다(湯田)에서는 유다의 상징인 흰 여우, 조총을 쏘는 병사들, 열차의 그림이 새겨진 맨홀 뚜껑들을 보았다. 벳푸의 맨홀 뚜껑들에는 색색의 꽃이 새겨져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 맨홀 뚜껑 마니아까지 형성되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 담장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록(語錄)과 사진을 담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 말이 변용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옛집 뒤에 있는 이나리신사.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은 단출하다. 본채와 창고로 썼음 직한 작은 부속 건물이 전부다. 마당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흉상, 쇼와(昭和) 천황이 심은 나무 등이 있다.
 
  본채 뒤로 돌아가면 주홍빛 도리이(鳥居)가 있는 아주 작은 신사(神社)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이나리(稻荷)신사가 바로 이 신사일 것이다.
 
  어린 시절 유키치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나리신사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열어보았다. 돌이 들어 있었다. 유키치는 그 돌을 꺼내고 다른 돌을 넣어두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유키치가 바꿔치기 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숭배했다. 유키치는 그것을 보고 우스웠다고 회고록에서 회상했다. 어려서부터 기성의 권위를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그에 도전했음을 알 수 있다.
 
 
  메이지시대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의 옛집.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곳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가는 아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사카(大阪)의 도지마(堂島)였다. 나카쓰번(藩)의 하급 무사였던 그의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福澤百助)는 유키치가 태어났을 때 당시 상업 중심지였던 오사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키치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키치는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14세 때부터는 시라이시 쇼잔(白石照山)에게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까지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봉건제도 아래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급 사무라이의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은 이 시절 뼈저린 경험의 소산일 것이다.
 
  후쿠자와의 고택 옆에 있는 기념관에 들어가 본다. 후쿠자와의 가계도, 인맥도, 어린 시절 공부했던 책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혼자서 기념관 안을 돌아보았다.
 
  후쿠자와가 태어난 오사카의 고지도(古地圖), 그가 공부했던 한학 및 난학(蘭學) 서적들…. 1860년 유키치를 비롯한 막부의 외교사절단을 태우고 미국으로 갔던 간린마루(咸臨丸)의 모형도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군함이다. 일본 사절단은 선장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지휘 아래 일본인 선원들이 모는 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후쿠자와 유키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서양사정》.
이 책 등으로 번 돈을 가지고 후쿠자와는 난학숙을 확장, 게이오대학을 세웠다.
  ‘사무라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긴 칼과 작은 칼을 차고 한껏 폼을 잡은 사진, 역시 사무라이 차림으로 미국인 소녀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미소를 짓게 한다. 나름 패기가 엿보이지만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는 얼굴….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상투(존마게)를 자르고 양복 차림을 한 ‘개명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시사신보(時事新報)》의 발행인, 게이오의숙의 창립자이자 총장…. 시간으로 놓고 보면 메이지유신 이후 5~6년 사이에 확 달라지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모습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변한 일본의 모습 그 자체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서양사정》도 보인다. 1863년부터 펴낸 이 책에서 그는 ‘Civilization’을 ‘문명(文明)개화’로, ‘Culture’를 ‘문화(文化)’, ‘Liberty’를 ‘자유(自由)’로 번역했다. 또 다른 베스트셀러 《학문의 권장》은 각국에서 나온 판본의 표지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한국어판 《학문의 권장》 표지도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저작 활동 덕분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대 최고의 서양전문가로 꼽혔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여러 차례 입각(入閣) 권유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저술과 언론, 교육을 통해 일본인들을 일깨우는 것을 자신의 업(業)으로 삼았다. 그는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의 스승이었다. 그가 일본 돈 가운데 최고액권인 1만 엔권의 초상 인물이 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라”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담백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마냥 현창(顯彰)하기에는 찜찜한 인물이다. 그를 제국주의 일본의 이데올로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초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개화시키고 동양 3국이 힘을 합쳐 서양 세력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1년 이후 일본을 찾은 김옥균・박영효・유길준・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도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에게 ‘조선판 메이지유신’을 기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방성통곡했다. 특히 그는 조선 정부가 전(前)근대적인 연좌제(連坐制)를 적용해 개화파 인사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처형한 데 대해 격분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1885년 3월 자신이 발간하는 《시사신보》에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한 것도 갑신정변 실패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다. 이 사설에서 후쿠자와는 이렇게 주장했다.
 
  〈오늘날 (국제 관계를) 도모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더불어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탈피하여 서양의 문명국들과 진퇴를 같이하여 저 지나(支那·청)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이좋게 대우해 줄 것도 없고, 바로 서양인이 저들을 대하듯이 처분을 하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자는 더불어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다. 문득 당시의 사정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2013~2014년에는 한국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고 말했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도 한국을 그렇게 표현했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종군위안부 문제 등으로 일본과 계속 날을 세우면서 그런 표현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일본에서는 과거 전전(戰前) 출생세대나 단카이(團塊)세대가 주류이던 시절과는 달리 교과서 문제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나 중국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일본 정부나 워싱턴 로비스트들은 미국에 대고 “한국은 결국 중국과 함께 갈 나라이며,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맹방은 일본뿐”이라는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중국·한국을 멀리하면서 스스로 구미국가들의 품에 안기려 한다는 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와 아베 신조는 일맥상통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130여 년 전의 ‘유럽’이 지금은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정도일까?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기원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논설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실상을 생각하면, 후쿠자와만 고약하다고 탓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란이 발생하자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며 동학군을 비난했다. 청일전쟁이 났을 때에는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라고 매도했다. 하지만 청일전쟁 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냈을 때에는 “일본이 중국에 요구해야 할 것은 영토가 아니라 무역”이라고 주장,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일본의 밝음과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메이지시대 기업인을 기념하는 공원
 
나카쓰 거리의 담장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록이나 지역 출신 위인들을 소개하는 패널들이 붙어 있다.
  기념관을 나와 기념품점에 잠깐 들렀다. 기념품점을 관리하는 60대 여성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나도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며 반긴다. 세계 지도를 가져와 그 속의 한반도를 가리키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한국인이 이곳까지 찾은 것은 흔치 않은 일인 듯 옆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이 왔다”며 수다를 떤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고택을 나서 나카쓰성으로 향하는 길. 편의점에서 ‘벤토’를 하나 사서 인근 어린이 공원에서 먹었다. 세금 포함해서 701엔, 우리 돈으로 7000원이다. 따뜻한 쌀밥에 생선가스와 함박스테이크, 계란말이, 우메보시, 후식용 과일까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벤토는 역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다.
 
  공원 이름은 ‘와다 도요지(和田豊治) 기념공원’이다. 공원 뒤쪽으로 와다 도요지의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생소한 인물이어서 안내판을 보니 와다 도요지는 이곳 태생으로 메이지~다이쇼 시대에 기업가,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외국 유학을 다녀와서 방직산업을 일으켰고, 은퇴 후에는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장학사업 등을 했다고 한다. 일본 어디를 가나 그 지역 출신으로 지역사회나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동상이나 송덕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병철기념공원, 정주영 송덕비가 서는 날이 있을까?
 
  와다 도요지 기념공원뿐이 아니었다. 길거리 담장 모퉁이마다 이 지역 출신 위인들을 소개하는 패널들이 걸려 있었다. 위인을 기억하는 그 풍토가 부러웠다.
 
 
  구로다 가문, 오쿠다이라 가문
 
나카쓰성. 나카쓰번을 지배했던 구로다 가문과 오쿠다이라 가문의 성으로 1964년 재건됐다.
  나카쓰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군사(軍師)였던 구로다 간베에(黒田官兵衛·구로다 요시타카[孝高]라고도 함)가 1588년에 축성(築城)했다. 구로다 간베에는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혼노지(本能寺)의 변(變)’으로 죽은 후, 당황해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고 채근해 도요토미의 천하 제패를 도운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군사 간베에’로 유명하다.
 
  나카쓰성 아래 있는 적벽사(赤壁寺)라는 절은 구로다 가문이 나카쓰를 접수할 당시 구(舊)지배층인 우쓰노미야(宇都宮) 일족과 그 가신들을 참살한 곳이다. 이들이 흘린 피가 흰 담장에 묻었는데, 아무리 지우려 해도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아예 붉은색으로 담장을 칠했다고 한다.
 
구로다 가문이 나카쓰를 접수할 때 저항하는 구세력을 학살했던 합원사(合元寺)는 ‘적벽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차지한 후에는 오쿠다이라(奧平) 가문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오쿠다이라 가문은 원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섬기다가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귀순, 나가시노 전투에서 활약했다. 이때 무공을 세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奧平信昌)는 후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가 되었다. 1717년 오쿠다이라 마사시게(奧平昌成・사다마사[定昌]라고도 함)가 나카쓰번의 번주가 되면서, 오쿠다이라 가문이 154년간 이곳을 지배했다.
 
  나카쓰성은 오쿠다이라 가문의 거성(居城)이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건의로 성 대부분이 헐렸다. 지금 있는 천수각(天守閣)은 1964년 옛 번주였던 오쿠다이라 가문과 시민들이 힘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아직까지도 일본의 많은 지역은 자신들의 정체성(正體性)을 옛날의 번에서 찾고 있다. ‘나카쓰, 10만 석(도쿠가와 막부 시절 번주의 연봉) 오쿠다이라가(家)’ 하는 식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봉건적인 번이 폐지되고 근대적 지방행정단위인 현이 설치된 지 147년이 지나도록 그러는 것이 외부인의 눈에는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 어딜 가나 그 고장만의 특산물이 있고, 지역적 자부심이 넘치는 것은 바로 그런 전통 덕분일 것이다. ‘지방분권(地方分權)’이라는 것은 정치적 구호나 헌법상의 명문 규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도리이 스네에몬의 죽음
 
나카쓰성 천수각 내에 전시 중인 옛날 갑옷. 왼쪽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옷이다.
  천수각 안을 돌아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갑주(甲胄), 철포(鐵砲), 일본도(日本刀)…. 그러다가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훈도시 차림으로 십자가에 묶인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 그의 이름은 도리이 스네에몬(鳥居 强右衛門).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당시, 오쿠다이라 마사시게가 지키던 나가시노성은 다케다 가쓰요리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오쿠다이라는 도리이 스네에몬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내 원병(援兵)을 청하게 했다. 스네에몬은 천신만고 끝에 오다-도쿠가와를 만나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다케다군의 포로가 됐다. 다케다군은 그에게 “성의 방어군에게 ‘오다와 도쿠가와의 부대가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그려냈다.
 
  〈꽁꽁 묶인 스네에몬은 가까운 본성의 망루가 잘 보이는 앞 바위 위로 끌려갔다. 스네에몬은 시키는 대로 성을 향하여 외쳤다.
 
  “성안에 있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바위 위에 오른 스네에몬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리이 스네에몬, 성으로 돌아가려다 이렇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오다와 도쿠가와 두 대장님은…”
 
  일단 말을 끊었다.
 
  “이미 4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카자키를 출발하셨습니다. 이삼일 안으로 반드시 운이 트일 것입니다. 성을 굳건히 지켜주십시오!”
 
  “와아!”
 
  성안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케다군 졸병 두 명이 바위에 뛰어올라 스네에몬을 끌어내어 사정없이 구타했다. (중략)
 
나가시노 전투 당시 주군인 오쿠다이라 가문을 위해 목숨을 던진 도리이 스네에몬.
  스네에몬에게 놀림을 당해서 분노할 대로 분노한 가쓰요리는 그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스네에몬은 십자가에 묶이고 손에 못이 박힌 채 성을 바라보는 바위 위에 높이 세워졌다.
 
  구타로 정신을 잃은 스네에몬이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두 겨드랑이 밑에서 창끝이 교차하여 양 어깨를 뚫고 나갔다.
 
  “으으으…”
 
  스네에몬의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귀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런 가운데서 누군가가 열심히 무언가를 말했다.
 
  “도리이님! 도리이님이야말로 참다운 무사, 그 충성을 본받기 위해 최후의 모습을 그려 기치로 삼으려 하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다케다 군의 가신 오치아이 사헤이치(落合 左平次).
 
  “스네에몬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네에몬은 그 말에 웃음으로 답하려 했으나 더 이상 표정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방 무사는 붓통을 꺼내 종이에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다.
 
  장소는 아루미가하라, 사다마사 부대 야마가카 사부로베에의 진지 앞. 이미 대지에는 석양이 시뻘겋게 물든 핏빛을 비추어 반사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독립자존
 
  도리이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린 이 그림은 이렇게 그려진 것이다. 문득 박근혜 정권의 인간 군상(群像)의 모습이 떠오른다. 장관, 수석비서관, 심지어는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던 ‘문고리 3인방’마저 저마다 자기만 살겠다며 권력을 잃고 영어(囹圄)의 몸이 된 주군(主君)의 등에 칼을 꽂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아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보여주고 죽은 사내의 죽음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나카쓰성 앞에는 ‘獨立自尊’이라는 글자를 새긴 커다란 비석이 있다. ‘독립자존’은 후쿠자와 유키치 평생의 가르침이었다. 일본 국민을 독립자존의 근대인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독립자존의 근대 문명국가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국가나 사회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자존’의 인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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