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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 ‘창원 기계공업단지 건설과 박정희 대통령’

“중화학공업화 덕분에 민주화·복지·자주국방 가능”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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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리는 것”(조갑제)
⊙ “공업의 지방분산, ‘공단+주거도시’ 복합개념을 갖춘 자족(自足)도시 건설 염두에 두고 창원 건설”(김재수)
⊙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공단을 방문했을 때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격려해 주시던 일 잊을 수 없어”(김찬모)
⊙ “중후장대형(重厚長大型) 산업구조 때문에 산업구조 개편이 늦고, IT 융합도 낮아 경쟁력 약화”(황석주)
창원에서 열린 ‘창원기계공업단지 건설과 박정희 대통령’ 세미나에는 300명 가까운 청중이 참석했다.
  《월간조선》·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공동주최하는 ‘박정희시민강좌’가 경상남도 창원에서 열렸다. 작년 11월부터 진행해 온 박정희시민강좌가 지방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 창원학술대회-창원 기계공업단지 건설과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오늘날 경제강국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중화학공업 건설과 이를 뒷받침했던 10월 유신에 대해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는 창원공단 건설 이후 이 지역에서 기능공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른 전문경영인, 현 시국을 걱정하는 보수 인사 등 300명 가까운 청중이 참석했다. 창원은 물론 서울・부산・구미 등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방위산업의 75%를 창원이 담당”
 
황영재 남해안미래포럼 회장.
  이날 개회사에서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한국의 공업화 산업혁명을 통한 ‘한강의 기적’은 중화학공업 성공, 나아가 창원 기계공업단지 없이는 불가능했다”면서 “창원 기계공업단지는 우리나라 국방혁명의 진원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좌 이사장은 “우리나라 경제학계는 한편에서는 정부가 직접 나서 일으킨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시장원리에 역행한다는 이유에서, 일부 정치권에서는 낭만적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농업 주도 발전이라는 환상에서 비판하고 있다”면서 “창원의 성공 역사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는 산 증언”이라고 말했다.
 
  창원 출신으로 쌍용정공(주) 대표 이사, 쌍용자동차(주) 부사장, 정수장학회 범동창회 회장 등을 지낸 황영재 (사)남해안미래포럼 회장은 “창원의 발전은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방위산업 건설과 궤를 같이한다”면서도 최근 창원의 수출이 연간 7~8%씩 감소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잘살아보자’던 의지가 약화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역사의 이름으로 폄하하는 풍조와 무관하지 않다”고 개탄했다.
 
  그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75%를 창원 기계공업단지가 담당하고 있는데, 방위산업도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서 “일부에서 조금 잘못했다고 해서 방위산업을 정죄(定罪)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물었다. 황 회장은 “오래전부터 박완수 전 창원시장(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과 함께 손에 스패너를 들고 허리띠를 졸라맨 노동자 형상의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창원에 세우자고 얘기하곤 했는데, 일부의 반대로 아직까지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중화학공업화, 민주화·복지·자주국방으로 이어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박정희의 대전략: 중화학공업 건설’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중화학공업 건설은 한국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문명 건설의 핵심은 경제이며, 경제를 어느 수준으로 운영하느냐 하는 것은 지도자의 선택”이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해 한국을 미국, 중국, 독일, 일본에 이은 세계 5대 공업국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켰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중화학공업화가 가져온 성과로 민주화·복지·자주국방을 꼽았다. 조 대표는 “중화학공업화에 바탕을 둔 경제발전의 결과 질 좋은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노동자들의 월급이 오르고 중산층이 성장했다. 1980년대에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의 70% 이상이었다”면서 “이들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게 되면서 민주화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그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다. 반면에 국민들은 기아와 궁핍으로 몰아넣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아들, 손자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한 북한의 김일성은 ‘자기 실패의 성공자’다”라고 말했다.
 
  조갑제 대표는 “복지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면서 중화학공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7년 국민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조 대표는 한국이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에서 선진국 수준인 18위에 오른 사실, 영국 런던의 임페리얼칼리지 소속 공공건강연구팀이 2030년 세계 최장수국은 한국이 될 것으로 예상한 사실, 남한 사람들의 평균연령이 북한보다 12년 높다는 사실 등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복지와 장수국화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욕을 먹어가면서 추진한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고 말했다.
 
  조갑제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독트린,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시도,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등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면서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했기에 더욱 위대하다”면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점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은 데 있다”고 말했다.
 
 
  유신과 중화학공업화
 
  조갑제 대표는 “1997년 외환(外換)위기, 2008년 국제 금융위기 등이 있었지만, 한국은 이를 잘 극복했고, 그 위기를 넘기면서 세계 경제 순위가 한 단계씩 올라갔다. 김대중・이명박 대통령이 잘한 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중화학공업 덕분에 대한민국의 경제 펀더멘틀이 단단했기 때문에 그런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중화학공업화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잘해야 말레이시아 수준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갑제 대표는 10월 유신에 대해 중화학공업 건설과 연결해 설명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수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을 만들어 낸 남북회담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한 체제 정비를 거론했지만,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서 유신체제를 선포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는 오원철 전 경제 제2수석비서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력의 집중은 수단이고,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고 설명했다.
 
  조갑제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건설은 미래를 위한 투자였으며, 이를 위해 유신을 단행함으로써 본인은 욕을 많이 먹었다”면서 “국민들에 대한 인기를 좇는 것은 지금처럼 자기가 번 돈도 아니면서 이리저리 나누어주고 앞 세대가 이룬 것을 말도 안 되는 말로 폄하하면 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말년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에게는 훗날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오원철과 창원
 
김재수 창원대 겸임교수.
  조갑제 대표의 뒤를 이어 김재수 창원대 겸임교수는 ‘창원 기계공업기지를 통해 본 박정희 정신과 미래 발전방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을 ▲제1단계(1964~1966) - 경공업 수출 단계 ▲제2단계(1967~1970) - 경공업 원료 국산화 단계 ▲제3단계(1971~1977) - 기계의 국산화 및 중화학공업 건설 단계 ▲제4단계(1978~) - 기술의 국산화 및 산업합리화로 국제경쟁력 확보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창원 기계공업기지는 산업혁명의 3단계 시기에 자주적인 국가안보 확보와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경제성장이라는 부국강병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방위산업 육성과 기계의 국산화를 위해 건설되었다”고 설명했다.
 
  “병기란 중화학공업에서 나오는 제품이므로 중화학공업 육성은 방위산업 육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중화학공장은 평상시에는 산업기계를 만들고, 비상시에는 병기가 나오는 곳이 된다. 그래서 병기나 민수품이 동일한 기계공장에서 생산이 가능하도록 기획하고 시설을 갖추고자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산업기계 쪽에서 수요가 생겨났고, 방위산업 쪽에서도 수요가 나왔기 때문에 그 수요를 활용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조화롭게 효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창원에 기계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된 이유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때마다 진해에 내려왔고, 하계휴가 때에는 진해 별장(저도)을 이용했다. 또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 및 농기구 공장인 진일공업 등이 있는 마산시도 여러 번 다녀갔다”면서 “그러면서 마산만에 연하고 진해군항에 가까운 창원 지역이야말로 새로운 공업지역으로서의 입지적 여건이 매우 좋은 점을 눈여겨 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시 중화학공업 건설 실무책임자였던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이 공군 장교로 사천비행장에 근무할 때부터 창원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리적 이점에 대하여 많은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입지 선정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김재수 교수는 창원의 입지 조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창원공단의 입지 조건
 
  “첫째, 포항, 울산, 대구, 구미, 부산, 마산, 진주 등의 공업집적지가 다핵적 벨트를 이룬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활성적인 주변 도시들과 긴밀히 접촉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둘째, 부산, 마산, 대구, 진해 등과 연결되는 포장도로 및 남해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경전선과 진해선의 철도분기점일 뿐만 아니라 임해부에는 마산항의 일환으로서 수심 13m의 항만 축조가 가능한 것 등 교통상의 이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셋째, 표고 500~800m의 구릉에 둘러싸인 분지로서 그 안에 약 5000ha의 평야부가 있어 광활한 공장용지를 확보할 수 있다.
 
  넷째, 그 지반이 견고하여 중량물 공장을 건설하기에 알맞다.
 
  다섯째, 낙동강으로부터의 송수가 가능하여 막대하게 소요되는 공업용수와 생활용수를 확보할 수 있다.
 
  여섯째,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 등 천연적 조건이 기계공업에 적합하다.
 
  일곱째, 수림이 울창한 소구릉이 흩어져 있고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분지 내의 평야부 면적이 공업용지와 함께 광대한 주거용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 새로운 산업도시를 건설하기에 충분하다.”
 
  김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을 건설하면서 공업의 지방분산, ‘공단+주거도시’ 복합개념을 갖춘 자족(自足)도시 건설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강조했다.
 
  김재수 교수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성공요소로 ▲지도자의 리더십 ▲과학자의 꿈 ▲기업가의 땀 ▲산업역군의 열정을 꼽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매슬로가 말한 인간의 욕구 중에서 가장 낮은 1단계인 생리적 욕구 단계에 머물던 대한민국을 4단계인 존경의 욕구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면서 “북한 공산주의체제 극복(승공), 가난 극복(자립), 일제식민 잔재 극복(극일)이라는 3가지 목표를 향해 나가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후손들에 대한 사명감과 봉사정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신관(信管) 제조기술자 출신 경영인의 회고
 
김찬모 (주)부경 대표이사.
  이날 토론회에는 창원기계공단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참석,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과 경제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다.
 
  김찬모 (주)부경 대표이사는 1976년 4월 서울에 있던 국제전광사가 창원공단으로 이전해 오면서 ‘창원시민’이 되었다. 김 대표에 의하면 국제전광사는 원래 기계식 시계 회사였는데 기술력을 인정받아 기계식・전자식 신관제조 업체로 업종이 변경됐으며 (주)한화의 모태가 된 기업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1990년까지 신관제조 기술자로 일하면서 현무미사일 제작 등에 참여했으며, 사고로 손가락이 잘렸다고 한다. 그는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공단을 방문했을 때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격려해 주시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전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하고 국민과 소통했던 분이자,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난 50년간 지탱할 수 있게 해온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켰지만, 보수들의 어리석은 양반자세 때문에 국가를 재건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개탄했다.
 
  김찬모 대표는 창원공단의 현황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창원 국가산업단지공단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국가적 차원의 로드맵이 만들어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서 “최근(2015년) 창원 국가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중앙정부로부터 약 8000억원 규모의 지원이 진행되고 있으나 지원시기가 늦어졌으며, 그 자금도 실질적인 R&D 지원이나 핵심기술 개발 지원보다는 근로자 편의시설이나 기타 건축비용 등에 집중적으로 쓰이고 있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산학연(産學硏) 협력이 창원공단 성공 요인”
 
황석주 전 한국산업단지관리공단 동남권본부장.
  30년간 창원단지에서 일해 온 황석주 전 한국산업단지관리공단 동남권본부장은 창원단지의 어제를 회고하면서 그 나아갈 바를 이야기했다.
 
  황 전 본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하면서 포항, 울산, 창원, 여수 등에 공업단지를 건설해 지역균형발전을 꾀했다”면서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혁신도시 건설과 비교했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혁신단지에 정착해 사는 비율은 32%에 불과하고, 혁신도시에 입주한 공기업 근무자들은 대부분 기러기 아빠가 돼 있다. 이들은 두 집 살림을 하면서 한 달 교통비만도 50만원 가깝게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런 데 돈을 쓸 여유가 있나?”
 
  그는 “창원 국가산업단지가 40년 넘게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단지 조성 당시 기업유치와 더불어 기술자 양성학교 및 연구소 등을 조성하여 산학연(産學硏)이 협력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황 전 본부장은 창원단지가 오늘날 겪고 있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중후장대형(重厚長大型) 산업구조로 인해 첨단산업으로의 산업구조 개편이 늦고, 기존 기계산업도 핵심 부품의 국산화 및 IT 융합도가 낮아 기계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 조성된 지 40년이 지나면서 산업단지가 노후화되고, 단지 기반시설과 R&D, 편의복지시설 등 산업인프라와 혁신역량이 부족한 점도 문제다.”
 
  그는 “최근 창원산업단지를 4차 산업혁명 등 산업구조 변화에 걸맞은 산업공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2014년부터 정부, 지자체,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노후화된 산업인프라를 확충, R&D 혁신공간 조성, 기업의 혁신역량 강화, 산업단지의 근로환경 개선 등 3개 분야 29개 사업에 8500억원을 투입하여 ‘창원산단 구조고도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유관기관 간 협력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산업인프라 확충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업종고도화를 위한 산업클러스터를 구축하여 기존의 기계산업과 ICT, S/W산업과의 융복합을 강화하기 위한 산업 개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황 전 본부장은 “산업 메커니즘의 변화에 부응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산업육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창원국가산업단지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일원에 조성된 기계산업 중심의 국가산업단지로서 총면적은 35.4㎢이며, 11개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1973년 9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 기계공업기지 건설 지시’를 하면서 공단 건설이 시작됐으며, 1974년 4월 1일 ‘산업기지개발촉진법’에 의거해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창원단지는 최초 기획단계부터 단순한 산업단지가 아니라 우수한 기술자와 기능공 양성 기관 및 연구소 등이 입지한 산업·교육·연구 기능이 조화를 이룬 새로운 산업단지로 기획되었다.
 
  지정 당시 단지 명칭은 ‘창원 종합기계공업기지’로 생산 규모 약 20억 달러, 계획인구 약 20만명 규모로 조성되었다. 1975년 밸브를 생산하는 부산포금(현 PK밸브)이 가동을 시작했으며, 이어 금성사, 대우중공업, 기아기공, 한국종합특수강, 부산제철, 삼성중공업, 효성중공업 등이 입주해 본격적으로 생산 활동에 들어갔다.
 
  창원단지는 1979년 제2차 석유파동과 10·26사태, 노사분규, 기업 도산 등으로 1980년대 초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산업구조 합리화와 1980년대 중반 ‘3저 현상(저달러, 저환율, 저금리)’에 힘입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1990년대 이후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창원단지의 2016년 말 현재 생산 규모는 53조원, 창원시의 인구는 107만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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