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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원문

全集에 없는 횡보 염상섭의 산문 〈어머니 회상〉

“대체 무엇을 재미로, 낙으로 살아가셨는지…”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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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경주 김씨, 외며느리로 시집와 슬하에 8남매 낳아 길러
⊙ ‘눈살 한 번 찌푸리고 군소리 한마디 하시는 법 없으셨다’
한국 현대소설의 거목 횡보 염상섭.
  횡보 염상섭(廉想涉·1897~1963)은 한국 현대소설의 문을 연 개척자다. 사실주의 서사문학으로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탁월하게 그려낸 거목이다. 신문기자로, 명정(酩酊)으로 시대를 풍미한 그는 1897년 전주, 의성, 가평 등지의 군수를 지낸 염규환(廉圭桓)의 6남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횡보의 어머니는 외며느리로 관향이 ‘경주 김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부는 동갑(1869년생)으로, 남편 염규환의 성격이 여성적이고 얌전한 데 반해 어머니 경주 김씨는 남성적이고 대범하며 자녀들에 대한 이해심이 깊었다고 전해진다.(이어령의 《한국작가전기연구》 참조)
 
  여장부처럼 대소사를 챙길 정도로 적극적이었으나 자식들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머리를 쥐어박거나 손찌검을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맏형인 염창섭(廉昌燮)은 일본 육사를 나와 육군 대위로 예편했다. 영친왕이 인질로 일본에 있을 때 시종으로 있었다고 한다.
 
  193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아버지 염규환도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또 둘째 염명섭(廉明燮)도 그해 사망했다. 당시 횡보는 만주 장춘으로 가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다.
 
  〈어머니의 회상〉은 1987년 간행된 전 12권 《염상섭전집》(민음사)에 실리지 않은 글이다. 어머니를 그리는 행장(行狀)이되 과장이나 영탄이 없는 사실적 문체가 진솔하게 느껴진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다. 공연예술연구가 김종욱(金鍾旭) 선생이 발굴,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어머님 回想〉
  廉想涉
 
  1.
 
염상섭 선생은 난세의 시대를 신문기자로, 소설가로, 명정(酩酊)으로 치열하게 건넜다.
  얼마나 변변한 자식이라고 저 잘난 듯이 자기 자친의 사적(事跡)을 드러내겠으며, 더욱이 내 부모거나 남의 부모거나 이러한 기록에 붓을 대기란 거북한 일이지마는, 모처럼 어머님의 추억담을 하라는 부탁이기로 기억을 더듬어 대강 적어볼까 한다.
 
  칠순(七旬)을 채우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이 지금 사셨으면 아흔이 되실 것이니 어머님을 여읜 것이 21년 전 애가 40을 마악 넘어서의 일이었고, 그 이듬해 가친께서 일흔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두 분이 동갑으로 기사생(己巳生)이시라,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란 말로 보면, 지금 세상처럼 의약이 발달되고 보건사상이 보급된 시대와 달라서, 어머니께서는 손티는 별로 없으시나 마마[天然痘]를 하셨던 그 시절이니 사실 만큼 사신 편이오 우리 문중(門中)에도 위 아랫대에 이만치 장수하신 분이 없었다.
 
  가계까지 들추어낼 것은 없을지 모르지마는, 20 전에 홀로 되신 고조모님의 유복자 한 분(曾祖)을, 그나마 큰댁에 바쳐 계사(繼嗣)케 하여 우리 일문이 퍼진 것만 보아도 손이 얼마나 놀았던지 알겠고, 우리 대에 와서도 40 전후 아니면 고작해야 60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을 하였던 것인데, 별 호강은 못 하셨을망정 그만큼 사신 것만도 무던한 일이었다.
 
  이것은 어려서 들은 말씀이거니와, 우리 둘째 이모님이 일점혈육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신 데에, 친정 부모님은 얼마나 애절하시고 그 정상이 측은하고 가련해 하셨던지, 셋째 따님, 즉 우리 어머님을 시집보내실 때는 외조부께서 몸소 관상쟁이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간선을 하셨더라 하니, 두 분의 70 향수도 그럴 법하거니와, 자친의 그 아버님의 뜻을 받아 그러하셨던지, 과부 소리는 안 듣겠다는 것이 평생소원이셨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의 생각에는 소시부터 포류지질(蒲柳之質·몸이 약하여 병에 잘 걸리는 체질-편집자 주)이시어서 의사의 권고로 20 전부터 반주를 잡수셨다 하고, 평생을 주기(酒氣)로 버티어 사시다가 말년에는 아주 몸져누우신 지도 오랜 아버님보다는 더 사시려니 하였었다. 그러던 것이 뜻밖에 한 해를 앞서신 것은 그해 봄에 내 집에 산고가 있어 한 이래에 아이를 보러 오셨다가 가시는 길인데, 아이놈을 하나 데리시기는 하였으나 초저녁의 침침한 거리라, 마주 오는 자전거에 치여 그 빌미로 이내 못 일어나시고 만 것이었었다. 자식의 집에 다녀가시다가 그렇게 되셨으니 나로서는 더욱 한이 되었다.
 
 
  2.
 
《여원(女苑)》 1958년 2월호에 실린 염상섭의 산문 〈어머니 회상〉 첫 장.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 드러난 효부, 열녀도 아니시고 평범한 구식 가정부인이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립고 존경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시다. 열다섯에 외며느님으로 시집오셔서, 소반 차리고 만만치 않은 시집살이에, 외롭고 고달프게 50여 년 동안 드난살이보다 나을까 말까 한 일생을 아무 불평 없이 바치시고 곱게 가신 분이기에 더욱 가엾으신 것이요, 늙게까지도 간절히 추억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체수가 자그마하시고 강강하시며 기력도 좋으신 편이나,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8남매를 기르시고, 더욱이 중년부터는 가세가 기울어져 간구한 살림에 시달리면서 외며느님으로서 연로하신 홀시아버님 봉양과 약주가 과하신 가장 밑에서 뼛골이 빠지게 늙도록 시집살이가 호되셨던 것이니, 지칠 대로 지치셨을 것이요, 일가친척이 모이면 저 여덟을 키우기에 무에 변변히 입에 들어 갔으랴고 동정의 인사를 하는 것도 어렸을 적부터는 듣던 말이지마는, 원체 화사한 몸치장을 모르시듯이 음식을 가리시는 일이 없어 도리어 그것이 건강을 도왔던지, 내가 어렸을 때 큰 병환을 한번 치르신 것밖에는 몸져누워 앓으시는 것을 뵈온 일이 없었다.
 
  그만큼 강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차차 가세가 다시 피어 가서 사람을 부리게 되고, 차례로 며느리들을 앞에 데리고 지내시게 되어서도, 가친의 약주 시중이나 부엌일을 아주 내어 맡기시는 일이 없이, 진일이고 마른일이고 간에 당신의 손이 가야 할 일은, 찌개 하나 마름질 하나라도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두시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가친의 노환으로 뒤를 받아내게 되고, 더럽힌 옷을 빨게 되면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고 보니, 같이 늙어 가시는 칠십 줄의 노인이시건마는, 눈살 한 번 찌푸리고 군소리 한마디 하시는 법 없이, 자기의 맡은 직책이거니 혹은 자기의 피치 못할 팔자거니 하는 생각이신 듯이 혼자 맡아 하시곤 하였다.
 
  대체 무엇을 재미로, 낙으로 살아가셨는지? 자식을 기르는 것도 낙으로거나 장래의 뉘를 보고 덕을 보려니 하는 생각보다도, 자기의 짊어진 책임이요 의무거니 여기시는 눈치요, 세 끼 진지를 자시는 것도 맛을 취하거나 재미라기보다는 역시 안 먹으면 죽는 거니 의무적으로 잡숫는 양 싶었다. 잘사나 못 사나 50여 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술상을 보셔야, 약주 한 모금 마시는 일이 없고, 안주 한 점 입에 집어넣으시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인네끼리 모여 앉으면 노인네가 너무 심심하시겠다고 아주머니, 할머니 담배라도 좀 피우시라고 하여 졸리다 못하여, 한두 모금 빨아보시고는 쓰고 어지럽다고 꺼버리시는 것이었다. 이런 성미시고 기품이시라, 몰취미하고 인정머리 없고 쌀쌀하거나 무되실 것 같은데, 자식들에게서나 일가친척에게나 대범하고 경우와 조리에 닿지 않는 말이나 일은 아니 하시면서도 인사성 있고 지상한 일면을 잃지 않으셨고, 육십이 훨씬 넘으신 뒤에는 차차 마음이 약하여지고 신경과 감정이 날카로워져서 그러한지, 며느님이나 손주들에게 다소 청하 하는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였지마는, 자손에게 대하여서도 공평하고 원만하게 하려 하셨다.
 
  철없는 손주새끼들이 애미나 애비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꼴을 보시면 대기를 하고 호되게 나무라시며, 난 자식을 몇몇씩 길러야 엉덩이 하나 뚜덕거려 주고 털끝만 한 꾸중을 준 일이 없었다 하시며 엄하게 기르지 말라고 이르시는 것이었지마는, 그 대신에 우리가 자랄 때 대강땡이를 쥐어박거나 손찌검 하나 하시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평생에 한 번 아버님께 종아리를 맞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갓 들어가서, 동무의 누이요 아버님 친구의 딸이 남의 첩으로 들어간 집에, 끌려가서 놀다가 밤늦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 어머니께서는 말리거나 역성을 드시는 일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잠자리에 오줌을 잘 싸고 똥질이 심하고, 고집불통이고 하기 때문에 귀염은 못 받았으나, 그렇다고 미워서 매를 맞게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었었다. 그보다도 어머니께서 내게 눈물을 꼭 두 번 보여주신 것을 일생에 잊지 않는다.
 
  열세 살 때에 집안이 낙향하여 경상도 지방에 내려가 살게 되었었는데, 학교 관계로 서울에 처져 있던 내가, 여름방학에 집에 가 있다가 개학 때 새벽길을 떠나 올라오는데 섭섭해 우시는 것을 뵈었고, 또 한 번은 일본에 가서 있다가 4년 만엔가? 열아홉 살이 되어 방학 때 돌아왔을 때 커다랗게 자란 모습을 보시고 반갑고 고생시킨 것이 불쌍하다는 뜻인지 자꾸만 우시는 것이었다.
 
 
  3.
 
《여원(女苑)》은 1958년 2월호에 횡보의 〈어머니 회상〉을 실으면서 작게 염상섭 사진을 실었다.
  조부가 돌아가시던 해가 병오년(丙午年·1906년-편집자 주), 내 나이 아홉 살 때이었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이듬해라 국내는 어수선하고, 가친은 집에 들어앉아 계셔서 집안은 한참 간구한 판이었다. 구차하면 강근지친(强近之親·아주 가까운 일가친척을 이르는 말-편집자 주)도 발길이 떨어지는지라, 동기도 없으신 단 두 내외분이 밤잠을 번갈아 쉬시며 시탕(侍湯·간병)에 지치신 것을 조부께서 보시고 유언 대신에 “너희들이 내게 이렇게까지 극진히 할 줄은 몰랐구나” 하는 한마디를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친아드님에게도 그러시겠지만,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고생시키는 것이 가엾고 고마워서 하신 말씀이었던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러한지, 나는 종형제가 없어, 제삿날 제종형제들이 모여 앉으면, “자네 어머니께서야 여중군자(女中君子)시지” 하거나 “아주머니 말씀이시라면…” 하고 칭송하고 열복(悅服)하는 양을 보면, 큰 뒤에도 인정이 후하다거나 인복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문중에 유공(有功)하셨다는 뜻일 게다.
 
  이것도 어렸을 제의 이야기이지마는, 가친께서 지방 수령으로 돌아다니실 때, “이번 등내(等內·벼슬을 하고 있는 동안-편집자 주)의 반은 내아(內衙·지방관아에 있던 안채-편집자 주)에서 원님을 사셨지” 하는 뒷공론들이 있었다는 것은, 내조가 그만큼 컸더라는 말이요, 바깥일에 참섭(參涉)을 하였다거나 드세다는 비꼬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체 부전부전하거나 수선스럽거나 내주장을 하려 드는 그런 거벽스러운 데가 없으셨던 천품(天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가 자식 된 정리나 도리로서 부모를 헐어 말하려 들거나, 자랑을 자랑삼아 말하고 싶지 않으랴마는, 이런 이야기는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집 가정의 주부로서 상봉하솔(上奉下率·윗사람과 아랫사람-편집자 주)하고 꾸려나갈 데까지 꾸려나간다든지 하는 일이 의당 할 일이요 남 못하는 일을 치렀다는 것은 아니로되, 오십 평생을 기울여 지성껏 섬기고, 기르셨다는 그 희생적 정신과 한결같이 꿋꿋이 굽히지 않으신 그 심지에 경복하는 바이며, 또 한말 당시에 있어 신통할 것 없는 관리생활이 무슨 명정(銘旌)감이나 되는 명예인 것이 아니라, 가족을 굶기지나 않으려고 생도를 구하여 본의 아닌 그러한 길을 더듬어 지방으로 전전하시던 부모의 고충에 차라리 동정도 가는 바이지마는, 그래도 어머님의 생애에서 평온하고 안락하신 때가 첫 시집살이를 하시던 색시적 시절이었고, 중년에 가까워 오시면서 가친을 따라 지방으로 다니시던 때가 무난하였던가 싶다.
 
  그 후 우리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동안, 가친께서 다시 칩거하시어 겪으신 고초는, 전에 비할 바 아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거니와, 비록 형제들이 성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누구 하나 똑똑히 출세한 것 아니요, 시원한 꼴을 보여드리거나 나의 부모처럼 호강 한 번 시켜드리지 못한 것은, 자식으로서 면목 없고 죄송하기 짝이 없는 원통한 일이 되고 말은 것이다.
 
 
  4.
 
  “너도 내 팔자 같으리라.”
 
  이것은 시어머니께서 셋째 며느리인 내 내자에게 무슨 말씀 끝에 지나는 말로 술회하시던 말씀이란다. 늦게 처자를 거느리고도 술을 점점 못하는 것을 근심하시어 하신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술이 과한 것을 보실 때마다 내력 술이라고 역정을 내시면서도 자식들이 촐촐한 눈치를 보시면 없는 안주라도 마련해서 한 잔 먹여 보내려고 애를 쓰시는 어머니시오, 왜 애를 써 술을 맥이시느냐고 좌우에서 오금을 박아 드리면, “그럼, 어쩌니, 좋아하는 걸. 과히만 먹지 말라는 거지” 하시고 술 비위를 알아 차려주시는 어머니시기도 하였다.
 
  말이 가로 새어 술 이야기가 나왔거니와, 내력 술이라 하여도 가친의 약주는 그야말로 약주로서 건강을 위한 것이었고, 도가 과하시던 때가 없지 않아도 애주요, 세상이 뜻과 같지 않아 심화로 잡숫던 것이나, 나는 폭음으로 건강을 잃고 불고가사인 정도는 아니로되, 지금 이 나이에도 머리를 쓰고 운동이 부족한 때나 울적하면 역시 술잔을 들게 되고, 인음증(引飮症)은 술이 술을 먹게 하여 실수가 종종 있으며 가족을 고생시키기 예사 다름없으니, 가족에게나 어머님 고혼(孤魂)에나 미안하고 죄송한 생각이 없을 수 없기는 하다. 그러한 단주(斷酒)할 결심까지에는 아직 거리가 머니, 미안이니 죄송이니 하는 것도 결국 입에 붙은 말이요, 생리적으로 술이 받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한다.
 
  그것은 하여간에 그때 불의의 자전거 사고로 누워계실 때, 그래도 웬만큼 차도가 계신 것을 뵙고 나는 출가하여 만주로 가게 되었는데 병환도 그만하시고 내가 국외로 나가면 고생을 덜고 생활이 좀 나아지리라는 생각으로 그러하셨던지 매우 신기가 좋으셔서 떠나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이 될 줄이야 뉘 알았으랴.
 
  만주로 가서 또 새판으로 차리는 신접살이가 자리도 잡히기 전에, 어린 가권을 데리고 돌아와 초종을 마치고 또다시 임지로 갈 제, 그때 비로소 내 평생에 처음으로 울음을 울어보았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세상에 믿을 것이 없어진 것 같고, 가정의 중심이 무너져 동기도 이제는 뿔뿔이 헤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또 그 후의 소경사(所慶事)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좀 더 사셨을 것인데… 좀 더 사셨더라면 3~4남매가 차례로 어머니 뒤를 따르는 불행은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한탄이 없지 않으나, 또다시 생각하면 좀 더 사셔서 조국 광복의 기쁨은 보셨을지 모르지마는, 차례차례로 가는 자녀를 앞세우지 않으시고, 먼저 가셨음이 도리어 다행하지나 않았을까?
 
  오래 사셨다고 자식들이 별로 잘되는 신통한 꼴도 못 보시고 속만 썩이시다가, 저 몹쓸 동란까지 겪다 못해 돌아가셨던들 어찌했을까 하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차라리 더 고생 안 하시고 가셨음이 편하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한 것이다.
 
  어쩌다 좌우를 살펴보니, 어느듯 내가 문장(門長)이 되어버렸다. 쓸쓸하기 이를 데 없고, 차차 나도 가야 할 준비를 하여야 하겠다.
 
  (출처=《여원(女苑)》 195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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