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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원문

사후 60주기 맞아 공개된 노천명의 ‘병상(病床)일기’

‘홀로 청춘을 다 보내버렸다!’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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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슴〉 시인은 시보다 수필이 더 매력적”… 시·수필·소설 등 전집 간행
⊙ ‘일기’는 시인이 백혈병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쓰여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고고한 〈사슴〉의 시인 노천명(盧天命·1912~1957)의 미발굴 시와 산문이 빛을 보게 됐다. 2017년은 시인의 사후 60년이 되는 해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급성 백혈병(재생 불능성 빈혈)으로 46세에 세상을 떠난 시인은 ‘계획적·의지적·지성적이기보다 직감적·순정적·서정적’(평론가 조연현)인 시를 썼다. 시인 정지용이 ‘연둣빛 수채화 같은 은은한 삶의 향기가 높다’고 평할 만큼 결이 고운 작품을 남겼으나 친일(親日)행적 논란으로 노천명은 현대문학사에서 평가절하돼 왔다.
 
  그러나 60주기를 즈음해 국립중앙도서관 ‘보존문서’ 서고 속에 있던 미공개 시와 수필, 소설·평론 등이 《노천명전집》(전 3권, 스타북스 刊)으로 묶인다. 앞서 2016년 11월 25일 수필 전집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출간됐다.
 
  생전 노천명은 자신의 글에 대해 ‘구두를 닦는 소년의 손이 오리발처럼 얼어 결사적으로 구두를 닦듯, 나는 시장기를 참아 가며 때로는 가슴이 꽁꽁 얼어들어오는 고독한 환경에서 글을 썼다’고 했다.
 
  스타북스 출판사 김상철 대표는 “〈사슴〉 시인은 시보다 수필이 더 매력적”이라며 “연둣빛 수채화 같은 글솜씨로 슬픔, 눈물, 고통, 외로움, 저항이 행간마다 촉촉하다”고 말했다.
 
  노천명은 《조선일보》가 발행한 월간지 《여성》 편집부,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다. 시집으로 《산호림》 《창변》 《별을 쳐다보며》,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여성서간문독본》이 있다. 유고시집은 《사슴의 노래》다. 시인의 본명은 ‘기선(基善)’, 문단 데뷔 후 필명이 ‘천명’이다.
 
  잊힌 작품을 발굴한 서지연구가 김종욱씨와 민윤기(월간 《시(see)》 편집인)씨는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상처 입은 시인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둘려 고고한 〈사슴〉 시인의 이미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일기(日記)’는 시인이 백혈병으로 생과 사를 오갈 때 쓴 글이다. 1956년 3월 27일 시작해 이듬해 3월 13일까지 쓰였다. 시인은 마지막 일기를 쓰고 3개월 뒤인 1957년 6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지면 사정으로 일부만 게재한다.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수정했다.
 
 
  〈日記〉
 
  1956년 3월 27일
 
노천명 사후 60주기를 맞아 간행된 수필 전집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
  완전히 하루를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계획했다.
 
  중요한 계획은 역시 작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써지지가 않는다. 영감이 내리질 않는다.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뉴질랜드 출신 여류작가. D.H.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등과 교유했다.-편집자주)의 일기를 읽었다. 무언지 몰라 압박을 느낀다. 죽음의 위협을 받는 좋지 못한 건강 상태에서도 그의 쉴 새 없이 쓰려는 그 의욕이 내게 많은 훈계를 준다. 10시에 이층 자기 방엘 올라서 각혈이 심해가지고 10시 반에 숨을 거뒀다 한다. 사람이 죽기 전 30분까지도 이층 같은 데를 올라갈 수 있다는 데 나는 놀랐다.
 
  남을 만한 작품을 써보겠다는 야심과 함께 나는 요즘 돈에 대해서도 또 여기 못지않게 생각하고 있다. 돈 때문에 귀찮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돈만 있다면 직장엘 나가서 그 마땅치 않은 인간들과 마주앉아 내겐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그 일을 당장에 집어치울 수 있지 않은가? 필요한 책이나 좀 맘대로 사다 쌓아놓고, 혼자 들어앉아 마음 놓고 내 구상을 뻗쳐 나가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는데, 다달이 최소한도로 먹을 것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이제 정말 짜증이 나고 싫어졌다. 돈은 가끔 내 긍지까지를 잔인하게 꺾어주었다.
 
  이즈음에 와서 나는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리 드는 것을 느낀다. 혼자 살아나가는 것을 뭘 그처럼 걱정하느냐는 것은 전혀 모르는 섭섭한 소리들이다. 나는 걱정이 많다.
 
  나는 흉한 꼴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 한데 그것은 아무래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만 같다.
 
  맑은 날씨 하며 따스한 봄 햇살에 밖엘 나오니 당장에 살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신경쇠약이었다.
 
  나오니 이처럼 바깥세상은 좋은 것을, 집구석에서 그 늙은 할머니를 바라보며 속을 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이 필운대(弼雲臺)가 행화촌(杏花村)이었다는데, 살구나무는 내 눈에 한 그루도 안 보인다.
 
  토박이 서울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이 우대 풍경이 그다지 맘에 안 들어 다른 데로 이사를 좀 했으면 하나, 모든 절차와 잡무(雜務)들이 무서워 내버려 둔다. 이런 일에 내가 늙기 싫다.
 
  요즘 세상이 귀찮아 죽었음 좋겠다고 했더니 밥 짓는 할머니는 또 냉큼 “선상님은 세상이 구찮으시니, 나는 내 일신이 구찮아 하루가 급한데…” 하고 받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했다. 양심으로 돌아가 저 불쌍한 노인을 이젠 좀 덜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뉘 집을 찾느라고 ××동을 헤매면서 예쁜 양관(洋館)들을 수없이 지나쳤다. 풀빛으로 파랗게 단장을 한 울타리며 현관에 수박등이 달려 있는 살기 좋은 집들, 또 벽돌 담장 밖으로 넝쿨 장미가 휘늘어진 문화주택들을 지나친다.(중략)
 
 
  3월 28일
 
  아침 열 시 미사엘 갔다 왔다.
 
  신부님 강론에서 “진실로 믿는 신자라면 죽음은 공포로 맞을 것이 아니고 한없는 즐거움을 가지고 맞아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우리는 죽음이란 생각을 헤치고 영원한 세상으로 기쁘게 뛰어드는 것이라고.
 
  이 점이 내가 늘 의심하던 점이다. 어째서 신부나 수녀들이라면 마땅히 기쁘게 맞아야 할 이 죽음을 그들까지도 교인이 죽었을 때 왜 슬퍼하지 않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D에게 가자던 것이 아침 계획이었으나 내 자존심은 또 인색했다. 그래서 상추를 사려던 일, 꽃집에 가서 바이올렛 화분을 사려던 일은 보기 좋게 중단이 되고 말았다.
 
  자존심! 나는 죽을 때까지 이것으로 해서 내 애정을 한 번도 화려하게 펴보지는 못할 것 같다. 숱한 경우에 자존심이 나와서 번번이 마귀할멈처럼 해살을 놀았던 것이다.
 
  종일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을 읽었다.
 
  누가 오든 없다고 하라고 일렀는데도 불구하고 순해빠진 이 늙은이는 또 사람을 들여놨다.
 
  소학교 시절의 친구다. 전라도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무척 반가워야 할 친구인데 20여 년 동안의 격조는 무언지 모르게 그 친구와 내 사이를 거북하게 막아주는 것이 있었다. 아들이 이번에 대학 시험을 치르러 왔는데 청을 좀 넣어달라는 것이 온 목적이었다.
 
  그가 간 뒤엔 또 복덕방 사람이 왔다. 늙은이는 여전히 나를 불러댔다. 나중에 나는 늙은이를 단단히 나무랐다.
 
  “아, 부득부득 들어오는 걸 나가라고 해요? 어떻게 해요?”
 
  하고 유한 배짱의 대답을 한다.
 
  구렁이가 다 된 그 눈, 느려빠진 그 동작… 저 할머니 때문에 내가 정말 얼마나 죄질 기회를 많이 갖는지 모른다.
 
  신부님 앞에 나가 성사를 볼 때마다 ‘남을 미워했습니다’고 고죄를 한 가운데 그 몇 할은 저 할머니 때문이었다.
 
  부리는 사람을 잘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큰 복이다. 이 복은 아무나 못 타는 것 같다. 남편 복이 있는 사람이 이런 복도 한꺼번에 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디서 조용하고 총명한 내 비위에 맞는 계집애를 하나 얻었으면 좋겠다.
 
 
  4월 2일
 
  ×에게 내 시집을 괜히 주었다고 후회한다.
 
  내 시집이 그 집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바늘방석에 올라앉은 것처럼 송구해 할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다. 시집은 얼마나 나를 원망할까? 그런 곳으로 보내준 것을….
 
  봉건시대에 시집을 잘못 보내준 부모를 원망하는 딸의 얼굴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증정할 데를 정말 엄선한다.
 
  이 경우 결코 친·불친(親不親)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내 책을 성의 있게 읽어 줄 사람이라야 되는 것이다.
 
  책꽂이에 꽂아놓거나 할 사람은 안 된다.
 
  꽂아놓을 책꽂이도 없고 식구들이나 혹은 그 집에 드나드는 객들 손에만 지워진다는 경우도 불쾌하다. 적어도 내 책을 소중히 여겨주고 거기서 좋은 구절을 하나라도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몇 푼 되잖는 책 하나를 주면서 끔찍이도 까다롭다고 할 것이지만, 여기 내 얘기는 돈과는 다른 얘기다. 적어도 내 손으로 이 책이 나누어지는 경우 이러한 의도에서 행해지는 것인데, 그러한 마음이 약한 나는 가다가 당치 않은 대로 내 책을 보내는 실수를 하는 때가 있다.
 
  이런 실수를 한 뒤의 내가 받는 마음의 괴로움이란 작은 것이 아니다. 책이 그 집에 가서 하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마치 나 자신이 그 집엘 가서 신통치 않은 대접을 받는 거와 같은 생각이 들어 괴롭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이란 작가 자신의 육체의 일부분이 되어 피가 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4월 24일
 
노천명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창변》.     노천명의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   노천명의 첫 수필집 《산딸기》.
  오늘 나는 가톨릭 공회엘 나가 영세를 받았다.
 
  아침에 목욕을 하고 새로 만든 흰 옷을 갈아입고 형님(盧基用-편집자주)을 따라 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내게 있어 진실로 처음 갖는 엄숙한 길이었습니다.
 
  수녀님은 내게 화관을 씌워 주시고 신부를 만지듯이 만져주신 후 본당 신부님에게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영세를 주신 후 신부님은 장시간에 걸친 강론을 하셨습니다.
 
  천주를 떠나 내 마음대로 헤맨 내 지나온 생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 내 가슴 골짜기에서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늘 돌아가야 할 고향처럼 향수에 차 있던 가톨릭으로 이제 나는 돌아왔습니다.
 
  3년 전 조카딸 용자가 임종을 하던 날 아침 바로 그 머리맡에서 나는,
 
  “나도 입교를 하겠다. 그래서 나도 천당엘 가 너를 만나겠다”고 했더니 용자는 갑자기 희색이 만면해지며, “오늘같이 제가 기쁜 날은 없다”고 하며 그날 정오에 운명을 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늘 내가 귀여워하던 조카딸과의 이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이 은근히 괴로웠었는데 오늘 나는 이 큰 짐을 벗었습니다.
 
  신부님은 나에게 베로니카라는 본명을 주셨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께서 악당들에게 맞아서 피를 흘리고 넘어져 계실 때 군중 가운데에서 용감히 뛰어나와 제 손수건으로 그 얼굴의 피와 침을 닦아준 성녀의 이름이라고 하시며 이 이름을 내게 주셨습니다. 이제는 당신도 나를 베로니카라고 불러주십시오. 내가 가졌던 이름 석 자가 정말로 이제는 싫어졌습니다.(중략)
 
 
  5월 27일
 
  며칠 전에 나는 이 해안지대(부산 다대포항-편집자주)로 왔습니다.
 
  풍세와 자외선이 역시 좀 센 것 같습니다. 바닷물은 심청색입니다. 내 흰 치맛자락을 담그기만 하면 곧 물이 들어 나올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서 좀 있고 싶은 것이 여기 온 목적이라면 목적일까?
 
  이 어촌에서는 아무도 나를 몰라주어 내가 어떻게나 편안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온 뒤의 내 마음속은 깨끗이 치워 논 방 안 같아졌습니다.
 
  아침엔 바닷가에 나가 내 앞에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며 몇 시간이고 묵상(默想)을 하고 들어옵니다.
 
  이 동리는 집집이 처마 끝과 담장 위에다 떡들을 널어 말립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얼굴이 검습니다. 그 대신에 그 건강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란 또한 보암직합니다.
 
  나는 여기 처녀들을 좀 보았으면 하는데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이면 여인들이 양철통들을 가지고 물을 길러 갑니다. 옹기 동이 이고 물을 길던 고향의 여인네들이 그리워집니다.
 
  바다엘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섶에서 나는 와일드 로즈를 한 아름 꺾어 방 안에다 꽂아 놨습니다.
 
  꽃아장이를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내서 꽂아 놓음은 당신 시선을 위한 내 습관적인 정성입니다.
 
  나는 저녁마다 켜주는 램프 불을 꽃이 싫다 하고 그 대신 창문을 열어 놓고 어두운 밤하늘에 널려 있는 무수한 별들을 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달픈 영들이 떨어진 고도(孤島)에서, 사나토리움(sanatorium·결핵요양소-편집자주)에서, 또는 자유를 뺏긴 철창 속에서 나와 같이 저 별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1957년 3월 7일
 
  하오 세 시에 입원(위생병원에), 다섯 시쯤 500g 수혈, 두드러기가 돋아 괴로웠음.(중략)
 
 
  3월 12일
 
  엊저녁에 피를 넣고 참 몸이 편안한 중에 잠을 처음으로 잘 자다.
 
  아침에 기분이 좋아 일곱 시에 산보를 좀 나가겠다고 말했더니, 바깥이 춥다고….
 
  이에서도 피가 멎다.
 
  오후에 언니가 장조림이랑 밤초를 해 갖고 추운데 또 나오시다. 형제밖엔 없는 것. 눈물겨운 정성.
 
 
  3월 13일
 
  잠 잘 자다. 아침에 혀에 피가 묻다. 또 조금씩 이에서 피가 나다. 내 피가 처음엔 100만이던 것이 이젠 341만이 되었다고 한다.(황 간호원)
 
  어젯밤 꿈이 좋더니 기쁜 소식 듣다. 모든 것은 천주님의 은총임을 같이 깨닫다. 꿈에 조경희(趙敬姬·시인이자 수필가-편집자주)를 보고 통곡을 해봤더니 어쩌면 오전에 언니랑 반갑게 석영과 함께 달려드는 것일까.
 
  처음으로 기쁘게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언니는 뚱하면서도 내게는 참 정다웁거든….
 
  이틀 동안은 내게서도 피가 생기나보다고 안 넣다. 처음으로 서무과에 나가 전화를 걸다.
 
  (편집자 주 | 노천명의 ‘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병세 악화로 더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시인은 3개월 뒤인 1957년 6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서울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됐으나 1970년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천주교 공원묘지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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