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모클레스의 검(劍) : 월간조선

“니 아버지는 모델이었단다. 키는 하늘같이 크고 허벅지는 단단한 쇠 같았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눈길 둘 데가 마땅치 않아 창가로 떨어지는 햇살의 끝이 어디인지 따라가 보는 중이었다. 창가에는 어머니의 최근 작품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이스터 섬의 석상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선 형상물들의 시선은 제각각이었다. 나를 보는 놈, 땅바닥을 보는 놈. 아, 그리고 저건 머리가 기니까 년인가. 내 반응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는 듯 어머니는 과거 생각이 나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어머니는 갑자기 신이 난 듯 윤기 없이 푸석푸석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니 아버지, 다리가 꼭 무쇠 같았는데 정말 빨랐어. 1루에서 2루로 뛸 때는 꼭 100미터를 달리는 표범 같았단다.” 이럴 줄 알았다. 어느새 아버지는 모델에서 야구선수가 되어 잔디 구장을 달리고 있었다. “갈게요.” 일어서는 나를 어머니는 야속하게 올려다보았다. “넌, 애새끼가 매정해. 지 애비를 닮았어. 남의 얘긴 들을 생각도 안 하지. 너도 나중에 니 애비처럼 죽을 거야.”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내 등짝에 꽂혔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수십 년 그렇게 꽂힌 작살 같은 말들이 내 등에는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방문 앞에는 패드를 든 간호사가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서명을 하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창가에 저 똥 좀 치워요. 더럽지도 않나.” 간호사는 사막처럼 메마른 어투로 내 말을 받았다. “못 치우게 해요. 자기 아들이래요.”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목소리만큼이나 서늘한 표정의 여자가 나를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었다. 모아진 입술이 붉고 동그란 것이 마치 홍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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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혀가 빨랐고 그녀는 손이 민첩했다. 만지고 빨고 핥고 숨 가쁜 질주 끝에 나는 여러 번 죽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여자의 어깨는 푸르고 창백했다. 진동도 없이 불규칙하지 않고 고른 숨소리. 묘하게 식욕이 돌았다. 허리를 타고 내려가는 내 손길에 여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쩌면 작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래서 인간이 좋아. 시도 때도 없다니까.” 나는 그녀를 펼쳐놓고 다시 짓누르기 시작했다. 허연 가슴이 출렁였다. 신음 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여자가 감았던 눈을 뜨며 나를 밀어내려 했다. “병원에 들어가 봐야 해요. 처리할 일이 생겼대.” 무선 신호다. 그럴 줄 알았다. 사람은 그렇게 얌전하고 곱게 못 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야 된다니까.” 대꾸 대신 나는 더 세게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자는 아랫도리를 빼면서 어떻게든 나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교양 있게 대해 주면 안돼요?” 여자의 눈은 울고 있었다.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이런 씨X 기계 주제에.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목으로 옮겨갔다. 더욱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캑캑 그녀가 버둥거렸다. 절정은 빨리 왔다. 내 몸에서 뭔가 길게 빠져나가는 순간 그녀의 눈알이 튀어나왔다. 한쪽만 눈알이 튀어나온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왜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목을 잡아 뽑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대굴대굴 굴러가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 어머니가 죽었대.” 회로가 엉켰는지 말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당신 어머니 죽었대. 어머니 당신 죽었대.” 그 말이 내 귀에는 마치 이렇게 들렸다. “어머니 당신이 죽였대.” 나는 옹알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힘껏 발로 걷어찼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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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댁 같은 분이 있는 줄 몰랐네. 그게 사람 할 짓입니까.” 판사는 경멸하듯 말했다.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하긴 로봇 헌장에 이어 로봇 인권 선언이 나온 게 한참 전이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로봇이 자꾸 나를 뿌리쳐서 …” 판사는 말을 잘랐다. “로봇이라니. 휴먼 안드로이드라고 하세요. 정치적 올바름 모르세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에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념 편향적인 판사가 늘고 있다더니 하필 내가 그런 놈에게 걸린 것이다. 서류를 넘기던 판사는 어머니 이름을 확인하더니 난데없이 아버지 이름을 물었다. “간이법정이지만 위증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안다, 이 자식아. 그건 왜 묻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말 길어지는 건 질색이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나는 그저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기물 손괴죄로 벌금을 선고받고 법원을 나서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 판사 로봇 새끼 진짜 깐깐하네.” 병원에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손목에 내장된 칩폰(microchip phone)을 켜고 메시지를 누르자 흰 천을 뒤집어쓴 어머니가 누워 계신 영상이 허공에 떠올랐다. 영상은 곧이어 납골당 전경으로 이어졌고 그 위로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사망자를 모신 곳은 도시 묘지 구역 S-227-004호입니다. 사망자가 남긴 유품이 있습니다. 직접 찾아가라는 유언이 첨부되어 있어 병원에서 처리하지 못하니 빨리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항의하듯 말했다. “처리 비용을 낼 테니까 그냥 태워 버리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안내 멘트는 바로 바뀌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망자 수습에 관한 법률 제250조 1항에 의해 망자가 유언을 남긴 경우 상속자는 유언을 수행할 의무가 있으며 ….” 나는 칩폰을 꺼 버리고 쌍욕을 내뱉었다. 그 노인네 정말 마지막까지 피곤하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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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언제부터 치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날부터 말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처음에는 시제가, 나중에는 등장인물들이 오락가락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피해 살았다. 이웃들과 낯이 익을 무렵이면 그건 이사할 때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멀리 갔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더 먼 곳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내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찬송가를 불렀다. “멀리 멀리 갔더니 피곤하고 곤하여 ….”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제 발로 가 놓고 딴소리였다. 집은 가난했다. 하긴 버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시 보조금으로 겨우 밥만 먹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그냥 존재일 뿐이었다. 기억은 희미했다. 내가 두 살 때 집을 나갔다고 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게 아니라 밖에서 화염이 덮쳐 오듯 그렇게 뜨거웠다. 병원은 법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나를 보고 슬금슬금 피했다. 소리 없는 말들이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목 졸라 죽였대’ ‘저 얼굴에 같이 자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섹스하다가 목을 졸라야 쾌감이 증폭되는 변태라던데?’ 오냐, 맘대로 떠들어라. 나는 본척만척 무시하며 병원 원무과로 들어섰다. 원무과장은 사람 좋게 생긴 대머리였다. “불상사가 있었네요. 우리 병원에서는 제일 인기 좋은 간호사였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기계 값은 충분히 물었수다.” 기계 값이란 말에 대머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어딜 가나 꼭 이런 놈들이 있다. 인간에게 고유한 권리를 제 멋대로 확장해서 동물과 곤충, 파충류에 이어 이제는 기계에까지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 말이다. “차라도 한잔 하시렵니까?” 대머리는 조금 전의 불편한 대화를 빨리 잊고 싶다는 듯 찻잔을 꺼내고 커피 캡슐을 만지작거렸다. “커피는 됐소. 나가서 술이나 왕창 퍼마실 생각이오.” 대머리는 뭐 좋으실 대로, 하는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더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어머니 유품은 어디 있소?” 대머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머니가 남기신 거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거라면 저희 병원에서 그냥 처리해 드립니다.” 이 자식들이 지금 장난치나. 좀 전에는 직접 와서 처리하라더니 딴소리네. “아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머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규정이 바뀐 것을 아직 시스템에 입력을 안 한 모양입니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오기가 생겼다. “아니요. 사랑하는 어머니가 남기신 건데 그럴 수는 없지. 명색이 자식인데.” 대머리는 내 대답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기신 거래야 종이 노트 몇 권뿐입니다. 그냥 저희에게 맡기시지요. 태우려면 귀찮으실 텐데요.” 나는 대머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 자식은 대화를 모르는 놈이다. 그렇게 말하면 싫은 일도 하겠다고 나서는 게 사람이다. “태우긴 누가 태워. 어머니의 귀한 유품인데. 오래오래 평생 간직하며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볼 생각이오.” 대머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랍에서 작은 손가방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원무과를 나서는 내 뒷모습에 대고 대머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져가 봐야 짐만 될 텐데.” 젠장, 어제 오늘은 왜 이렇게 뒤에서 나불대는 인간이 많은 거냐. 돌아보고 한마디 더 쏘아 줄까 생각도 했지만 피곤했다. 아니, 그보다 빨리 술을 마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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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주 파는 곳을 안다. 캡슐로 맛만 내는 술이 아니라 진짜 술을 판다. 차갑고 껄끄러운 술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술은 일찍부터 마셨다. 그리고 빨리 마셨다. 빨리 마셔야 쉬 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어머니는 역정을 냈다. “니 애비도 그렇게 술을 마셔대더니 너까지냐.” 밀주 가게 주인은 오래된 친구다. 녀석은 항상 뉴스에서 본 것들을 뭔가 대단한 얘기라도 되는 듯 내게 들려주곤 했다. “아프리카 연맹에서 나이지리아가 탈퇴한다는데?” 라든가 “아랍 연맹이 요새 잘나가더라고. 그새 나라 둘을 더 포섭했더라니까.” 뭐라 떠들든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세상은 몇 개의 큰 덩어리로 쪼개졌다. 아프리카 연맹은 가입한 나라가 가장 많았다. 무려 56개국. 숫자로만 치면 일등이었지만 진짜 실세는 베이징 협력 기구와 북아메리카 연합, 둘이었다. 전통의 강자 북아메리카 연합은 어느 때부터인가 고립주의 정책을 쓰면서 까다롭게 동맹국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베이징 협력 기구는 인도와 남미 그리고 동남아를 아우르는 신생 제국이었다. 아랍 동맹은 그다음 규모고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서유럽 기구와 동유럽 기구는 쪼그라들었다. 교회가 비기 시작하면서 유럽은 힘을 잃었다. 한반도 연합은 원래 북아메리카 연합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 전에 베이징 협력 기구 속으로 편입되었다.

가입과 탈퇴는 자유였다. 국민들이 원하면 언제라도 연맹이니 연합이니 하는 명찰을 바꿔 달 수 있었다. 뭐 이 정도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다. 하긴 그 이상은 더 알 필요도 없었지만. 길쭉한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녀석은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전에 없던 일이다. 이놈은 머리가 나쁘다. 그래서 표정관리가 안 된다. 녀석의 눈은 계속 내 손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뭐야?”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머니가 나 주고 간 거.” 녀석이 다시 물어 왔다. “어머니 어디 가셨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자 몸이 풀리고 정신이 나른해졌다. “투표가 얼마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마른 수건으로 잔을 닦던 녀석은 갑자기 생각나기라도 한 듯 말했다. 투표라. 아마도 베이징 협력 기구 잔류를 놓고 찬반을 묻는 것이리라. 투표 안 한다. 그런 걸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는다면 바보다. 게다가 선거 가능 연령이 16세다. 이제 겨우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애들과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이 나는 싫었다. “당연히 안 하지. 내가 애냐.” 녀석은 킥킥 웃더니 오늘은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이상하다. 녀석은 한 번도 그런 걸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질문 자체가 비상식적이다. 잠이야 원래 근처 가까운 PH(Public House)에서 자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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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을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칩폰을 켜서 가까운 곳에 적당한 PH가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이상하다. 평소라면 널린 게 원룸 PH인데 오늘따라 근처에 빈 PH가 없었다. 투룸은 몇 개 보였지만 벌금 때문에 당분간 이용하지 못할 것 같다. 검색 범위를 넓히자 그제야 VM(Virtual Map)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멀다. 걸어서 20분은 걸리는 외진 곳에 PH가 하나 있었다. 날씨가 선선해 걸을 만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건물 외벽 스크린에서는 베이징 협력 기구 잔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과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자동차 소음 때문에 그들의 말은 띄엄띄엄 들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난해졌습 … 그게 다 북아메리카 연합을 탈퇴한 뒤에 벌어진 … 이제라도 …” 뭐라는 건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스크린을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북아메리카 연합 지지자들은 한때 우리도 잘살았다고 했다. 지랄하네. 차라리 고려 시대에 잘살았다고 해라. PH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몇 겹 돌자 평소라면 결코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허름한 단층 주택이 나왔다. 칩폰으로 대금을 지불하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비정상적일 만큼 조용하다. 주변 한 집이라도 다투는 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바람 소리만 스산하게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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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하나와 작은 거실 그리고 주방이 있는 전형적인 원룸 PH였다. 벽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부착되어 있었다. PH는 그냥 모텔이나 여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무인 관리 시스템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사용한 것 중에서 파손했거나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마신 음료가 있으면 사후 결제를 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술기운은 남아 있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다. 하루 정도는 슬퍼도 좋은 날이었지만 어머니는 너무 오래 앓았고 그래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냥 그게 슬펐다. 슬프지 않다는 사실이 슬픈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쾌한 일도 아니다.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손가방을 열어 본 건 그 때문이었다. 혹시 어머니가 남긴 것 중에서 슬픔을 끌어낼 만한 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낡은 노트들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정확히는 일기장도 아니다. 가끔은 가계부였고 가끔은 낙서장이었으며 가끔은 신체 비율이 제멋대로인 되도 않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써 놓은 글들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대부분 출처 불명의 경구들이었다. ‘인간은 멀리 볼 수 없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삶을 소중히 여기라. 그래야 삶도 너를 소중히 대접한다’ 같은 건 그래도 읽어 줄 만했다. 나머지는 죄 쓰레기였다. 슬퍼지기는커녕 헛웃음만 나왔다. 차례로 노트를 훑어보던 나는 이내 지루해졌고 하품이 났다. 노트를 쓸어 담아 다시 가방에 넣으려는데 가방 밑바닥에 노트 한 권이 더 들어 있었다. 그 위에 노트들을 세워서 담았기 때문에 아까는 못 본 것 같았다.

노트는 달랐다. 어머니의 것은 죄다 검은 표지였지만 그 노트는 회색빛이었고 가장자리가 헐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불에 그슬린 자국이다. 겉장에는 무슨 신문사라고 인쇄되어 있었는데 오래 되어 신문사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해마다 나눠 주었다던 회사 다이어리인 것 같았다. 첫 장은 뜯겨 나가고 없었다. 둘째 장부터는 어머니의 것이 아닌 낯선 글씨가 백지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가 첫 문장이다. 소설인가? 호기심이 생긴 나는 손가락으로 밑줄을 치며 노트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丙申言亂, 彈劾, 憲法裁判所, 特檢 같은 한자들은 건너뛰었지만 내용을 짐작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무리가 있기는커녕 너무 흥미진진해서 다음 장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내용은 그러나 소설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일기였다. 노트를 읽어 가는 내내 나는 연신 허, 하고 한숨인지 탄식인지를 내뱉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은 한반도 연합이 출범하기 직전 남쪽의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공작과 음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논리 정연한 듯 보였지만 가끔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이런 게 통했다는 말이야? 옆에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정체불명의 PC에서 출발하여 법률 위반과 헌법 위반을 뒤섞고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뇌물죄를 뒤집어씌워 그걸로 거짓 여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신속했지만 나 정도의 지능으로 봐도 허점투성이였다. 아니 도통 말이 되지 않았다. 글은 탄핵 절차가 진행되는 부분에서 멈춰 있었지만 그 다음 일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바였다. 정권이 바뀌었고 그 정권이 북쪽과 연합 정권을 세웠으며 그리고 한반도는 북아메리카와 갈라섰다. 그게 벌써 50년 전 일이다. 마지막 문장은 다시 일기 형식이었다. ‘사장은 십 년만 침묵하면 된다고 했다. 아내는 진실을 밝히자고 말했다. 나는 사장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하긴 이미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기록인가.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질문을 했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런 게 어머니의 유품에 끼여 있을 리 없다. 아버지는 무서운 일을 꾸민 사람들 중 하나였다. 덩달아 괴로웠냐고? 무슨 소리. 노트를 덮은 나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건 돈이야 돈. 어머니랑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엄청난 유산이라고. 이제 다시는 로봇 따위와 안 자도 돼. 너무 기뻐 눈물까지 났다. 게다가 어쨌거나 울었으니 어머니한테 예의도 차린 셈이다. 울면서 펄쩍펄쩍 뛰어 본 적 있는가. 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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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선잠이 들었던 것 같다. 짧은 꿈이었지만 기억은 생생했다. 어린아이 하나가 불길 속에서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갑자기 팔 하나가 들어와 아이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팔의 주인을 확인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얼굴이 희미한 게 뚜렷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소리는 꿈이 아니었다. 식은땀을 훔치며 나는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밀주 가게를 하는 친구 녀석이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술이 좀 부족할 거 같아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녀석의 뒤로 병원 대머리의 얼굴이 보였다. 사람에게는 직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게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집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둘이 다가 아니었다. 사내 여럿이 나를 가운데 몰아넣고 냅다 밟아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질렀다. 옆집이든 앞집이든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뛰어나오고도 남을 큰 소리였다. “소리 그만 질러요. 이 집 주변은 다 우리가 빌렸거든. 그러니까 올 사람 없어요.”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젖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판사 녀석이었다. 순간 머리를 세게 차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까만 어둠이 밀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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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여 있었다. 벌거벗고 재갈이 물린 채 나는 참 초라한 자세로 묶여 있었다. 한쪽 눈은 눈꺼풀이 부어올라 뜨기 어려웠고 한쪽도 안구를 제대로 차였는지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친구 녀석과 대머리가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머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가방 놓고 가시라고 했잖아요.” 마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말투였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한구석에서 어머니의 노트가 불에 타고 있었다. 판사 녀석이 불쑥 눈앞에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못 보신 거 같아서.” 사진 속에는 젊은 날의 어머니와 훤하게 잘생긴 남자가 간난아이 하나를 안고 있었다. “노트 뒤에 끼여 있더라고요.” 사진을 툭 던져 버린 판사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영화 같은 데 보면 이럴 때 앞뒤 상황 다 설명해 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린 그렇게 친절하진 않아. 그러니까 그냥 알아서 대충 꿰어 맞추세요.” 사내 하나가 물었다. “이 새끼는 어떻게 할까요?” 판사 녀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같이 태워 버리세요.” 누군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고 곧이어 서늘한 액체가 몸 위로 쏟아졌다. 사람은 죽을 때 살았던 날들이 주마간산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죽기 직전에도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암호처럼 들려주었던 말들과 희미한 기억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니 얼굴이 화상으로 그렇게 흉하게 된 게 다 니 아버지 때문이란다’ 기억들이 살아났다. 집에 불이 났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죽어 버리겠다며 불을 냈다. 뛰쳐나왔던 아버지는 아이가 방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아이는 내보냈지만 아버지는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몸이 뜨거워졌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훅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이 찢어지는 듯 달아올랐다. 숨을 들이마시자 불길이 입안으로 타고 들어왔다. 살이 녹고 내장이 타면서 파열되는 그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건 친구 녀석과 대머리의 대화였다. “판사 놈이 제대로 한 건 했네. 배우자 이름까지 다 기억하지 못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거야.” “이런 게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판사는 어떻게 하신 겁니까? 로봇 아닌가?” “하하하, 이 사람, 참. 우리 예전에도 그랬잖아. 공장 그만 가고 법원이나 방송국으로 가라고. 진즉에 에이아이에도 심어 놨지.” 어느 놈이 말을 올리고 어느 놈이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대화 끝에 크게 웃었던 것 같다. 많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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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클레스의 검(劍)

50년 후에 되돌아보는 2016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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