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일본인 장사들과 억지로 대원군을 끌어내어 선두에 세워 왕궁으로 향했다”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치의 보고서)
⊙ 대원군이 공덕리에서 지체하는 바람에 민비 시해 작전 늦어지고, 목격자 많이 남기게 돼
⊙ 대원군 별장 아소당 자리에는 중학교 들어서, 아소당 본당 건물은 봉원사에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치의 보고서)
⊙ 대원군이 공덕리에서 지체하는 바람에 민비 시해 작전 늦어지고, 목격자 많이 남기게 돼
⊙ 대원군 별장 아소당 자리에는 중학교 들어서, 아소당 본당 건물은 봉원사에

- 서울 봉원사 대방. 원래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본채였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아소당이 들어선 것은 대원군이 1870년 공덕리에 자신의 묫자리를 만들면서부터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고종 7년 8월 25일자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고종과 신하들이 차대(次對)한 자리에서 ‘(대원군의 묫자리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사방으로 100보(步)를 넘지 않게 하여 푯말을 세우고 써서 백성들이 주관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묫자리의 소유권을 둘러싼 산송(山訟)의 폐해가 심할 때다. 묫자리의 경계를 제한하고 백성들이 들어와 이용할 수 있게 해서 임금의 덕의(德義)가 백성들에게 미쳤다고 신하들은 아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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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이하응. |
조정에서는 같은 해에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120보 밖에 잡인의 접근을 금하는 금표(禁標)를 세웠다. 이 금표는 원래는 대원군을 예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대원군을 외부인사들로부터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됐다. 지금도 지하철 공덕역 인근 롯데캐슬프레지던트의 마포대로 쪽에 남아 있다.
아소당에 연금된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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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덕리 금표. 대원군의 별장에 잡인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 |
이곳에 친러정책을 펴는 민비를 몰아내려는 일본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궁내부 및 군부 고문으로 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라는 자였다. 대원군과 친해진 그는 1895년 10월 5일 대원군에게 귀국인사를 올린다는 명목으로 공덕리 별장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는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李載冕), 손자 이준용이 배석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에게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주한일본공사의 지시로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일등서기관이 작성한 4개조의 약정서를 내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태공(대원군)은 대군주(고종)를 보좌하여 궁중사무의 정비를 전담하되, 국정에는 간여하지 않는다.
2.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을 중심으로 개혁파 인사들을 요직에 앉히고, 고문관의 의견을 들어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3. 이재면을 궁내부 대신, 김종한을 궁내부 협판으로 임명한다.
4. 이준용을 3년간 일본에 유학하게 한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가였던 윤효정(尹孝定)의 《대한제국아 망해라》(원제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에 의하면 이 네 가지 조항을 읽고 난 후 대원군은 희색이 역력했으며 일본인들이 “동의한다는 증거의 글을 써 달라”고 하자 두말없이 붓을 들어 ‘우측의 네 개 조항을 내가 인정하고 진심으로 동의한다’는 글을 적어 주었다고 한다.
낭인들
이렇게 대원군과 일본공사관 간에 민비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밀약이 맺어졌다. 거사일은 10월 10일이었다. 미우라 고로는 조선 훈련대를 앞장세울 계획이었다. 훈련대는 일본인 장교들이 육성하고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등이 대대장으로 있는 부대로 친일적이라 하여 조만간 해산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10월 7일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가 미우라 고로 공사를 방문해 다음 날 훈련대를 해산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미우라 고로는 거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당초 계획과는 달리 일본군과 일본 낭인들이 거사의 중심에 서게 됐다.
낭인이라지만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메이지유신 초의 탈번(脫藩) 무사들과는 달랐다. 상당수가 일본 국내외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당대의 엘리트들이었다. 주동자 중 한 사람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후일 체신대신·내무대신 등을 지냈다. 이들은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한 세대 앞의 ‘유신지사(志士)’들을 동경하는 한편, 청일전쟁 후 일껏 수립해 놓은 조선의 친일정권이 민비의 반격으로 흔들리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는 현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다듬이질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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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아소당의 원래 모습. 아흔아홉칸짜리 저택이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
용산은 경성(서울)의 남쪽 1리 남짓 거리의 한강 북쪽 기슭에 자리한 한촌이었다. 뒤에는 만리창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멀리 공덕리의 언덕과 마주하고 있었다.
만리창은 선혜청의 창고로 현재의 효창공원 및 청파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모였던 곳은 아마 지금의 숙명여대나 선린인터넷고등학교, 혹은 삼각지역 인근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용산으로 모인 것은 인천으로 나가 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맞이한 후 공덕리 별장으로 가서 대원군을 옹위하기 위해서였다.
쓰노다 후사코의 《명성황후》에 의하면, 오카모토가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은 10월 8일 자정 무렵이었다. 일본 공사관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가 이날의 작전계획서라고 할 수 있는 ‘방략서’를 오카모토에게 줬다. 이 작전계획서에 의하면 오카모토, 오기하라 경부와 6명의 순사,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이끄는 40명의 무리가 공덕리로 가서 대원군을 모신 후 남대문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합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고바야가와는 공덕리로 향할 때의 상황에 대해 “언덕을 넘고 물을 건너 공덕리로 향하다. … 차가운 기운이 살을 저미고 … 여기저기서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 …”라고 회고했다.
공덕리로 향하는 자칭 ‘지사’들의 복색에 대해 고바야가와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사들이 각자 나름대로 분장한 모습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 큰 칼을 어깨에 멘 사람, 허리에 칼을 늘어뜨린 사람, 칼이 든 지팡이를 쥔 사람, 피스톨을 가진 사람, 또는 가벼운 차림에 짚신을 신거나 양복에 조리를 신고 …. 마치 농민 반란군의 진군이라고 할 만했다.
윤효정의 기록
이들이 공덕리 아소당에 도착한 것은 이날 새벽 1시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효정의 《대한제국아 망해라》에 의하면 대원군은 이들을 아주 반갑게 맞이한 것으로 돼 있다.
7일 밤 10시경 이에 동조하는 조선인과 일본인 50여 명이 용산에 모인 다음 바람같이 달려 공덕리에 이르니, 이를 흔쾌히 여긴 대원군이 하인들로 하여금 나아가 이들을 맞이하게 했다. 그들이 나서며 말했다.
“저희들이 저하를 모시고 입궐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대원군은 거듭거듭 고마움을 표하고 태평히 앉아 있었다. (중략) 이들 무리가 대원군이 행차할 시간이 되었음을 고하자 대원군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어린 하인에게 명했다.
“관을 가져오너라!” “의복을 입혀라!”
그런데 이 어린 하인이 당황해 옷을 반대로 들어 입히려 하니 손이 소매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대원군이 껄껄 웃으며 하인에게 말했다.
“너 역시 천하의 큰 변화를 아느냐? 어찌 옷을 거꾸로 입히느냐?”
그 말에 자리한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 문을 나서니, 거사를 획책한 무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대중들을 거리에 모이게 한 다음 대원군을 대신하여 선언하듯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의 뜻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의 이 일은 오로지 대군주를 호위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니 궁중에서는 감히 폭거하지 말라!”
이 말에 모여 있던 대중들이 모두 박수갈채를 보내고 “국태공 만세!”를 외쳤다.
대원군의 지체
윤효정의 기록과는 달리 그날 새벽 공덕리 아소당에서는 대원군과 일본 낭인배들 사이에 만만치 않은 밀고 당기기가 있었던 듯하다.
공덕리 별장에 도착한 낭인배들은 경호 겸 감시를 위해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조선 정부의 경리(警吏)들을 기습했다. 이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낭인배들은 경리들을 창고에 감금했다. 귀스타브 뮈텔 주교는 당시 공덕리 별장에 있던 경무관 강화석의 목격 내용을 인용, “대원군을 지키던 순검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순검 제복을 벗었다. 일본인들이 그 순검들의 제복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오카모토, 호리구치, 통역 스즈키가 대원군의 침실로 들어갔다. 대원군이 아끼던 손자 이준용도 침실로 불려 왔다. 옆방에서 침실을 지켜본 고바야가와의 증언에 의하면, 대원군은 침실에 들어온 일본인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침대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고 반쯤 옆으로 누운 채 ‘매우 침착한 태도로 응답’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상황에 대해 모순되게 기록했다. 한편으로는 “대원군이 일본인 일행의 마중을 기뻐하며 같이 경복궁으로 향했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원군과의 교섭에는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기다리느라 지쳤다”고 했다.
일본인들이 겨우 설득한 후에도, 대원군은 계속해서 미적거렸다. 일본공사관 관계자들이 준비해 온 대원군 명의의 포고문을 조선식 한문서식에 맞춰 다시 쓰느라 지체했고, 하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해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느라 또 시간을 보냈다. 결국 이들이 공덕리 별장을 나선 것은 새벽 3시경이었다.
을미사변 직후에 비교적 객관적으로 사건을 조사한 우치다 사다쓰치(內田定侈槌) 일등영사는 《왕성사변상세보고서》에서 〈대원군은 좀체로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면 날이 새기 때문에 많은 일본인 장사(壯士·낭인배-기자 주)들과 억지로 대원군을 끌어내어 선두에 세워 왕궁으로 향했다〉고 기록했다. 현장에 있던 이준용은 나중에 뮈텔 주교에게 “대원군이 협박에 못 이겨 대궐로 끌려갔다”고 했고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도 주한영국총영사 W.C. 힐리어에게 “나의 부친이 일본군에 끌려 궁궐로 오게 되었는데 일본 공사가 만약 이 사실을 누설한다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국왕과 태자에게는 해를 끼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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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초상. |
“대원군을 호위하여 왕궁에 도착한 후 여우는 적당히 처치하라!”
‘여우’란 민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문을 나선 지 100m쯤 갔을까? 대원군은 갑자기 가마를 세우게 했다. 대원군은 무거운 목소리로 “국왕과 태자에게는 결코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오카모토가 그 뜻을 일동에게 전했다. 고바야가와는 “백발의 노영웅이 가마를 멈추도록 지사에게 부탁하는 등 마치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닌가?”라며 이 장면에 깊이 감동받은 듯 기술했지만, 입맛이 쓰다. “국왕과 태자에게는”이라니? 뒤집어서 생각하면 대원군은 민비의 목숨은 이미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원군이 아무리 명성황후와 대립하고 있었다고 해도 황후를 시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원군을 앞세운 낭인배들은 새벽 4시경 남대문 인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만나 경복궁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 수비대는 보이지 않았다. 일본공사관 영사관보 호리구치와 경부 오기와라 히데지로(萩原秀次郞)가 일본군을 찾아 나섰다. 1시간쯤 지나서 호리구치가 일본군 수비대는 서대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일본군 수비대는 조금이라도 빨리 대원군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갈길을 달려 서대문 한성부 앞에 도착한 대원군 일행은 5시쯤 서대문에서 일본군 수비대 1중대 및 우범선의 훈련대 2대대 병력과 만났다. 이들은 정동과 경희궁을 거쳐 10월 8일 새벽 5시 반경 광화문에 도착했다.
경복궁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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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경복궁 건청궁 내 곤녕합. 민비의 시신은 잠시 옥호루에 두었다가 인근 녹원에서 불태워졌다. |
대원군과 함께 출발했던 오카모토는 낭인배들을 지휘해 먼저 경복궁에 도착, 새벽 4시 30분경 경복궁 추성문을 넘어 경복궁으로 침입했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은 일본군과 훈련대를 막아서다가 일본군 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楠賴幸彦)의 칼에 쓰러졌다.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쓰러진 상관에게 총격을 가했다. 왕실호위대인 시위대가 저항했지만 얼마 안 가 무너졌다. 낭인배가 고종과 민비 등이 있던 경복궁 뒤쪽 건청궁으로 침입했다.
민비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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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염리동 동도중학교. 아소당의 흔적은 아소당 표지석과 아소정쉼터(왼쪽사진)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
초조해진 낭인배들은 난폭하게 굴었다. 그들은 건청궁 내 왕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처소 곤녕합(坤寧閤) 등을 마구 쑤시고 다녔다. 고종의 어깨를 잡아당기고, 세자의 망건을 찢는가 하면 세자빈에게 칼을 겨누고 왕비가 있는 곳을 물었다. 오기하라 경부가 “국왕과 태자에게는 해를 가하지 말라! 대원군과의 약속이 있다!”고 외치며 낭인들을 제지했다. 용모가 아름다워 보이는 궁녀들을 보면 왕비이겠거니 싶어 칼질을 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은 곤녕합으로 침입하는 일본인들을 가로막다가 일본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린 후 쓰러졌다.
그러는 와중에 민비가 시해됐다. 기록에는 묘시(卯時·새벽 5~7시)로 되어 있지만, 새벽 5시 45분~6시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올리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들은 왕비와 궁녀들이 머물고 있던 방에 돌진했다. 왕비와 궁녀는 모두 왕비가 여기 없다고 대답했다.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고, 칼로 찔러서 죽였다.
민비가 시해된 곳은 건청궁 내 곤녕합. ‘곤녕’ 즉 ‘땅(왕비)이 평안하다’는 뜻을 가진 곳에서 왕비가 목숨을 잃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평했다.
왕후는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정치에 간여한 20년 동안 점차 망국에 이르게 하더니 마침내는 천고에 없던 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에 대원군은 경복궁 근정전 뒤 강녕전(康寧殿)에 머물고 있었다. 사건 현장에 대원군이 없는 것이, 대원군에게나 일본인들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다. 대원군은 일시 권력의 무대로 복귀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아관파천 후 법부(법무부) 고문 C. 그레이트하우스가 을미사변 당시의 행적에 대해 소명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이렇게 답했다.
“작년 8월(음력)의 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그저 조용하게 있을 뿐이다.”
봉원사

조용하게 살던 대원군은 1898년 2월 22일 사망, 아소당 뒤에 묻혔다. 대원군의 묘는 1908년 경기도 파주로 옮기면서 흥원(興園)으로 격상되었다. 1966년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다시 옮겼다.
아소당은 1962년 이곳에 학교를 만들면서 사라졌다. 교문 왼쪽 입구에는 이곳이 아소당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아소정쉼터’라는 공간이 있다. 주변에는 아소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조각난 반원형의 포석(鋪石)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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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봉원사 명부전. 편액(위)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주련(아래)은 매국원흉 이완용의 글씨라고 한다. |
‘국모(國母)’가 외국 낭인배들에게 시해당한 국치(國恥)의 현장인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앞에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쓴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으나, 경복궁 복원 사업에 따라 2001년 철거되어 경기도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기념관으로 옮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