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감독 허진호)가 개봉 열흘 만인 8월 13일 현재 관객 300만명을 넘어서며 순항하고 있다. 고종의 서녀(庶女)로, 한때 조선에 신속(臣屬)했던 대마도주의 후예에게 시집갔고 정신병에 걸려 고생했던 한 여인의 삶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나라가 감췄던 이야기’라면서 나온 이 영화는 아무리 영화가 창작의 영역이라고 해도 역사를 희롱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덕혜옹주가 어린 시절 ‘국민여동생’으로 인기를 얻어 일제에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는 설정이나 교포들 앞에서 “저는 조선의 옹주 이덕혜입니다”라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모습은 차라리 애교다.
덕혜옹주가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해 항일운동에 나서려 했다는 이야기는 역사 왜곡에 다름 아니다. 이씨 왕가에서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1919년 3·1운동 후 의친왕 이강이 대동단과 연계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려 했지만, 중국 안둥(지금의 단둥)에서 일제에 체포되고 마는 바람에 미수에 그친 것이 유일한 사례다.
덕혜옹주의 경우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서도 보듯 이미 10대 후반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독립운동은커녕 일상생활조차 어려웠던 무력(無力)했던 여성이 항일독립투쟁에 참여했던 것으로 그리는 것은 지나치다.
그동안 학계나 문화예술계에서는 고종이나 민비를 지나치게 미화해 왔다. 일부 사학자는 고종을 ‘근대화를 추구했던 계몽전제군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만 봐도 그런 평가가 얼마나 황당한가를 알 수 있다.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얘기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심지어는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민비의 혼령을 불러낸다는 무속인에게 걸려 사기를 당하는 얘기도 있다.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 민비를 ‘조선의 엘리자베스’로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민비는 동학란이 발생한 후 청나라에 청병(請兵)하면서 청나라 병사들을 끌어들였다가는 일본군도 들어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민영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차라리 왜군의 포로가 될지언정 임오년의 치욕(임오군란 당시 권력을 잃고 난군에게 쫓겨 충주까지 도망갔던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이처럼 국가 안위보다는 개인의 권력을 먼저 생각했던 여자가 ‘조선의 엘리자베스’라고? 경기도 여주군에서 만든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민비를 ‘조선을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다. 구한말 조선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였나?
고종과 민비를 미화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 덕혜옹주까지 끌어내는 것을 보면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이씨 왕실에서 독립운동한 사람 없어
안타깝게도 조선 왕실은 멸망에 즈음해 500년간 이 나라 이 백성을 다스렸던 왕가다운 책임의식과 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일제시대 내내 의친왕 이강 한 사람을 제외하면 조선 왕실은 일제에 철저히 순응했다. 경제사학자인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1910년에 망했지만 이씨 왕가의 사직(社稷)은 일본이 패전한 후 맥아더가 일본의 왕·공족(王・公族)제도를 폐지한 1945년에 이르러서야 문을 닫았다”면서 “영친왕 이은의 경우는 일제시대 동안 일본 전체를 통틀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호였다”고 말한다.
미국 역사학자인 캐럴 글럭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개인이든 국가적인 기억이든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는 흑백논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한 줄거리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는 복잡한 이야기, 맥락이 닿지 않는 사정이나 사실을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상상력이나 폐쇄적인 기억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복잡한 역사의 토대에서 장래를 생각하는 일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우리는 병적일 정도로 일방적인 상상력이나 폐쇄적인 기억(그것도 아주 질 나쁘게 왜곡된)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왜곡된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보는 민족의 현재와 미래는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나라가 감췄던 이야기’라면서 나온 이 영화는 아무리 영화가 창작의 영역이라고 해도 역사를 희롱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덕혜옹주가 어린 시절 ‘국민여동생’으로 인기를 얻어 일제에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는 설정이나 교포들 앞에서 “저는 조선의 옹주 이덕혜입니다”라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모습은 차라리 애교다.
덕혜옹주가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해 항일운동에 나서려 했다는 이야기는 역사 왜곡에 다름 아니다. 이씨 왕가에서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1919년 3·1운동 후 의친왕 이강이 대동단과 연계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려 했지만, 중국 안둥(지금의 단둥)에서 일제에 체포되고 마는 바람에 미수에 그친 것이 유일한 사례다.
덕혜옹주의 경우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서도 보듯 이미 10대 후반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독립운동은커녕 일상생활조차 어려웠던 무력(無力)했던 여성이 항일독립투쟁에 참여했던 것으로 그리는 것은 지나치다.
그동안 학계나 문화예술계에서는 고종이나 민비를 지나치게 미화해 왔다. 일부 사학자는 고종을 ‘근대화를 추구했던 계몽전제군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만 봐도 그런 평가가 얼마나 황당한가를 알 수 있다.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얘기들이 부지기수로 나온다. 심지어는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민비의 혼령을 불러낸다는 무속인에게 걸려 사기를 당하는 얘기도 있다.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 민비를 ‘조선의 엘리자베스’로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민비는 동학란이 발생한 후 청나라에 청병(請兵)하면서 청나라 병사들을 끌어들였다가는 일본군도 들어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민영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차라리 왜군의 포로가 될지언정 임오년의 치욕(임오군란 당시 권력을 잃고 난군에게 쫓겨 충주까지 도망갔던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이처럼 국가 안위보다는 개인의 권력을 먼저 생각했던 여자가 ‘조선의 엘리자베스’라고? 경기도 여주군에서 만든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민비를 ‘조선을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히다. 구한말 조선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였나?
고종과 민비를 미화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 덕혜옹주까지 끌어내는 것을 보면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이씨 왕실에서 독립운동한 사람 없어
안타깝게도 조선 왕실은 멸망에 즈음해 500년간 이 나라 이 백성을 다스렸던 왕가다운 책임의식과 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일제시대 내내 의친왕 이강 한 사람을 제외하면 조선 왕실은 일제에 철저히 순응했다. 경제사학자인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1910년에 망했지만 이씨 왕가의 사직(社稷)은 일본이 패전한 후 맥아더가 일본의 왕·공족(王・公族)제도를 폐지한 1945년에 이르러서야 문을 닫았다”면서 “영친왕 이은의 경우는 일제시대 동안 일본 전체를 통틀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호였다”고 말한다.
미국 역사학자인 캐럴 글럭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개인이든 국가적인 기억이든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는 흑백논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한 줄거리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는 복잡한 이야기, 맥락이 닿지 않는 사정이나 사실을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상상력이나 폐쇄적인 기억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복잡한 역사의 토대에서 장래를 생각하는 일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우리는 병적일 정도로 일방적인 상상력이나 폐쇄적인 기억(그것도 아주 질 나쁘게 왜곡된)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왜곡된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보는 민족의 현재와 미래는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