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나무 밑에서 선봉이네가 ‘정주야’ 하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 “항상 그놈의 피리인지 급살인지만 불면 배가 부른지 몰라”
⊙ “선봉이는 귀밑에서부터 보기좋게 자라난 검고도 꺼칫꺼칫한 쉬염(수염)을 달고…”
⊙ “항상 그놈의 피리인지 급살인지만 불면 배가 부른지 몰라”
⊙ “선봉이는 귀밑에서부터 보기좋게 자라난 검고도 꺼칫꺼칫한 쉬염(수염)을 달고…”
- 《新時代》 1942년 8월호에 실린 미당의 산문 〈故鄕이야기〉.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전집은 1972년 일지사에서 펴낸 《서정주 문학전집(5권)》이 최초다. 이후 1983년 민음사에서 시만 따로 꾸려 《미당 서정주 시전집》을 냈고, 11년 후 같은 출판사에서 1994년 3권짜리 《미당 시전집》을 출판했다.
그리고 작년 6월 말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5권 분량의 《미당 서정주 전집》을 간행했다.
많은 연구자를 통해 여기저기 흩어졌던 미당의 시들이 하나로 모아졌으나 산문 발굴 작업은 아직 더뎌 보인다. 미당은 자신의 시적 토대를 ‘유년기의 질마재에 대한 추억과 가치화’(최현식)를 통해 구현했는데 이와 관련한 미당 산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다. 장르를 떠나 ‘시적 영원성과 유년기 기억의 절대화’는 미당 문학의 중요 테마이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고향(故鄕)이야기〉는 미당 전집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으로, 미당의 고향 질마재에 대한 미당의 동양적 예지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시에서 접할 수 없는 미당의 절절한 산문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씨가 이번에도 자료발굴에 도움을 주었다. 원본 의미를 살리면서 현대어 맞춤법 표기에 따라 수정했음을 밝혀 둔다.
〈故鄕이야기〉
신장사 蘇生員
흔히 볼 수는 없는 일이나, 반도인(半島人)의 얼굴을 일일이 점검(點檢)하고 지내 가면은 ‘흥, 이건 정말 토종(土種)이로구나’ 하고 느끼어지는 사람이 만(萬)에 하나쯤은, 아니 적어도 십만(十萬)에 하나쯤은 반드시 있다.
유사이전(有史以前)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의 형체(形體)와는 판이(判異)하게 다른 사람들이, 텅-빈 산골짜기에서 땅강아지나 오랑캐 곰들을 벗으로 칡뿌리나 뒤져 먹고살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척 한번 보아서 어쩐지 그렇게만 느끼어지는 사람이 어쩌다간 있다.(이건 혹 나의 감관(感官)의 오해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신장사(장수-편집자주) 소생원(蘇生員)도 웬일인지 그렇게만 보여지는 사람 중의 하나이었다.(물론, 이것은 후에 우연히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이고, 소생원을 늘 면접(面接)하던 나의 소년시절에는 그저 이상(異常)하여서 말할 수 없는 일종(一種)의 신비감(神秘感)만을 느끼었을 뿐이었으나) 중 줄에도 이르지 못하는 짧달막한 키에 후리후리한 몸집이 언뜻 보면은 없는 것 같으나 균형(均衡)은 째어 있고, 노오란 노오란 수염을 가슴 우에까지 땋아 늘였으나 숱이 많지도 못하고, 젊어서도 늙어서도 나이는 한 사십으로만 보여지는, 꼬집어 주면 아프다고는 할 것 같으나 한 번 울어 본 일도 없는 것 같은 면모(面貌). 졸(拙)한 필치(筆致)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나 하잘것없는 것이 수(壽)는 할 것 같은 소생원이었다.
소생원은 또 무슨 혈족(血脈)의 부름으로 그의 아내와 같은 아내를 찾아낸 것인지, 역시 작은 키에 후리후리한 몸집, 솜솜이 얽은 얼굴에 벙그러진 이, 무슨 돌멩이 가루를 먹은 듯한 음성(音聲)이 나는 것이, 봄에도 화롯(火爐)가에만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소동(蘇童)이라는 아들이 단 하나 있을 따름이었다.
소생원은 밤이나 낮이나 신만 삼았다. 실낱같이 자는 시간과, 커다란 대통에 잎담배를 피우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신만 삼았다. 아니, 소생원에게도 밖에 나오는 시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있다가 이야기하겠다.
질마재 70호(戶) 남녀노소의 신발을 한결같이 만들어 신기는 것만으로도 소생원은 충분히 훌륭하였다. 엽전(葉錢) 열다섯 닢씩만 주면은 누구의 신발이건 삼아서 골 박아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추석 명절이 2~3일쯤 남아서, 새 신발을 맞추러 가는 게 내겐 어찌 그리도 즐거웠던 것인지. 아버지에게 승낙을 얻어서 소생원네 집에 내려가면은 먼저 반가이 맞아 주는 건 털이 노오란 누렁이였다. 키와 몸뚱이에 비해서는 유난히도 큰 꼬리를 흔들면서, 나의 돈반[三錢]을 미리 들고 온 손을 마구 핥아 주는 것이었다.
소생원네 집 창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보이는 건 방 한가운데 천정(天井)을 떠받고 섰는 과히 적지 않은 기둥이었다. 집이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으로. 그러니까 외양(外樣)으로 보면 소생원 네 집은 약간 옆으로 자라난 버섯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지붕 위에는 가느다란 버섯도 많이 나 자랐다.
“꽃신을 심어 주례?”
하고 소생원이 골을 박던 손을 잠깐 멈추고 내게 물으면,
“왕골 꽃신을 심어 주례?”
하고 소생원네(마누라)가 역시 그 석분(石粉)을 마신 듯한 목소리로 화롯가에서 내게 재쳐 묻는 양은 부부(夫婦)라고 하기보다는 어디 머언 청국(淸國) 뽕나무정이 같은 데에(거기를 그때 나는 제일 먼 곳이라 들었으므로) 나란히 자란 무슨 버섯 같은 식물(植物) 비슷하였었다.
소생원에게는 또 하나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가끔 허리띠의 회색(灰色) 주머니 속에서 까맣게 때에 전 생(生薑)을 꺼내어서는 청성으로 질근질근 씹어 먹는 것이었다. 그 먹는 시간으로 따져 보면은 하루에 아마 스무 번쯤은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이걸 보고 있노라면, 마을에 가끔 오는 백발(白髮)이 하얗던 생장사 노총각(老總角)이 연상(聯想)되는 것이었으나, 생긴 품이 소생원은 생장사와도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이러한 소생원네 방에 한참만 그대로 앉아 있으면 어데선지 물컥물컥 노린내가 나고, 벽에 걸려 있는 메투리(미투리-편집자주), 육날 메투리, 신골 망태, 박아지짝 거미집, 이런 것들이 모두 구역만 나 보이고 죽었으면 죽었지 나는 이런 버섯 속 같은 방에서는 한 시(時)도 살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겨드랑에서 나는 것인지 아랫도리에서 나는 것인지 이상한 노린내가 소생원에게서는 어찌도 풍기는 것이었던지. 역시 나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아버지나 아저씨들처럼 밖에 나가서 밭도 갈고 김도 매고 베짱이 소리도 듣고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밖에 나오면 벌써 소생원의 하늘은 아니었었다.(이것도 후에 생각하면 나의 오해였던 모양이나)
집집이 대추 남겐(나무엔-편집자주) 풋대추가 붉게 붉게 물들어져 있고, 돌무데기 풀섶에서는 벳쟁이(베짱이-편집자주)가 툭툭 뒷발로 무엔지 차고 날아다니면서 쩍쩍쩍쩍 머언 하늘나라에서처럼 울어대는 것이었다.
×
하루는(추석도 지나간 후의 어느 날) ‘귀염다래’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아버지를 따라서 성묘(省墓)를 갔었다.
성묘하는 철이 다아 끝난 후에 똥이 마려워서, 혼자 외진 골짜기로 빠져나와 어느 바위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으려니까, 어데서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소생원네 집 누렁이가 씩씩거리고 내 옆에 와서는 떡갈 나무 잎사귀를 한움큼 쥐고 있는 내 손등을 핥으려 덤비는 것이었다.
일어서서 나는 사면(四面)을 살피었다. 누렁이가 왔음에는 소생원네 집에서 누가 반드시 그 근처에 와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어쩌면 기이(奇特)하게도 소동(蘇童)이가 명감이나 산포도를 따려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나 소동이가 온 것은 아니었다.
선운사(禪雲寺)라는 절로 가는 길의 낭떠러지 선바위 아래, 일어섰다가는 엎드리어 절을 하고 절을 하고는, 다시 일어서고, — 이러한 짓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솔나무 사이로 힐끗힐끗 보여서, 가 보니까 그게 소생원이었다.
먼빛으로 볼 때에는, 소생원에게도 무슨 절할 묘(墓)등이 다 있어서 우리처럼 성묘를 왔는가 생각했더니, 바짝 옆에 가서 보니까 묘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바위[立岩]에다 대고 그렇게 지극(至極)히도 절을 해싸는 것이었다. 닭이 물을 마시듯, 하늘 한 번 우러러 보고는 절을 하고, 절을 하고, 절을 하고, 하는 것이었다. 누런 수염이 햇볕에 유체 누리게 보이는 것이었다, 무슨 원(願)이 있었던 것인지, 혹은 별다른 원도 없이 절하는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습성(習性)이었던지, 그건 알 수 없으나 그 후에도 2~3차 나는 이 선바위 아래 절을 하는 소생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생원이 다른 일로 밖에 나오는 것을 나는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선봉이네
선봉이네에게는 진한 꽃 자주 저고리를 입었으면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항시 수수한 흰 저고리만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사십이 다 된 선봉이네의 예쁜 곳을 똑 집어서 말하라면 나는 곧 대답할 수는 없다. 하여간, 몸이나 키가 보통 여자보다는 큰 편이었다. 수족(手足)도 큰 편이었다. 퉁퉁한 살이 찐 게 아니라, 향(香) 맑고 밝은 뼈다귀 위에 오히려 간단히 붙어 있었다.
잘된 남자를 생각하게 하는 대문이 있는 여인(女人)이었다. 늘 든든히 땅을 디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걸 보면 정말보담은 훨씬 커 보이었다.
이(齒)는 유난히도 가지런히, — 그러나 조금도 잘지 않은 것이, 얇고 좀 큰 편인 입술 속에서 어떤 때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행용은 굳이 닫혀 있었다. 희기보다는 푸른 잇빨이었다.
푸른빛은, 또 너무나 숯이 짙은 머리 밑에 약간 넓어 보이는 이마와 얼굴에도 있었다. 굵다란 손가락의 손톱 끝에도 눈매에도 있었다.
눈썹이 그리 짙으지 않은 게 얼굴에 어울렸다. 기다란 속눈썹 밑에서 말할 때에도 생각은 머언 곳만을 바라보는, 눈에 어울렸다. 아무도 쉬이 가까이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같이 우리 모두가 거기 가서 쉴 수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술국이는 쥐게 되었는지 조금도 술장수티라고는 없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적을 수 있는 게 나는 기쁘다. 조히 생각을 기울이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3월의 양광(陽光) 아래 동백꽃나무 밑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꼴이다. 밖에 나타내이지는 않으나, 머언 바다를 바라보며 아마 속으로는 어찌했으면 좋을지를 모르던 모양이다.
나룻목으로 가는 언덕 아래 길가에 있던 선봉이네 술집엔 뒤뜰에 수월찮이 너른 경사(傾斜)진 풀빛이 있었고, 두 그룬지 세 그루의 동백나무가 거기 있었다.
어느 3월이든지, 선봉이네 집 마당에서 아버지가 누구와 싸우다가 많이 맞았다고 하여서, 종형(從兄)과 둘이 아버지를 찾으러 갔었다. 가 보니 아버지는 겨우 이가 두 개가 빠지셨을 뿐, 맞은 것은 오히려 저편이어서 종형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가려고 하니까 뒤 한 동백나무 밑에서 선봉이네가 “정주야” 하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싱거운 싸움이 무척은 심심하였던 모양이다.
어디서 사 왔는지 성성한 능금 두 개를 나에게 주며, 따뜻한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다가 ‘너희 5촌’ 배 들어오는 것이나 보고 가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동백나무 위에선 빠알간 동백꽃이, 이 커다란 여인이, 머언 바다를 내어다보며 눈을 끔쩍이는 사이만큼 사이를 두고 조용히 조용히 낙화(落花)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주워 모았다. 모아서는 선봉이네에게 갖다 주었다. 두 손으로 그득히 갖다 주어도 선봉이네의 손바닥으론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서 한 손을 벌리며 오래간 만에 가느다란 입술을 벌려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흰 치마에다 끄리는(차리는-편집자주) 것이었다. 선봉이네의 항시 쉬어 있는 두 손과 좀 넓은 듯한 손톱들이 오히려 나는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선봉이는 항시 낚시질만 다녔었다. 아주 추운 겨울과 비 나리는 날만 제(除)하고는 거의 매일과 같이 영남 낭떠러지 밑에 가서 살찐 숭어를 낚아 날렀다. 낚아다가는 회를 만들어 대개는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선봉이는 좀처럼 병(病)이 나는 일이 없었다.
그전에 어디서 형리(刑吏)를 하였단 말도 있고, 동학토벌대(東學討伐隊)를 따라다녔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마을에서 총(銃) 놀 줄 아는 사람은 선봉이뿐이라는 풍문(風聞)이 있었다.
나이는 나의 기억에 남는 걸로는 45~6세, 귀밑에서부터 보기 좋게 자라난 검고도 꺼칫꺼칫한 쉬염을 달고, 아직 피가 돋는 듯한 얼굴이 젊어서는 꽤 단단하였던 모양이었다.
선봉이 내외가 우리 마을에 들어오기는 아마 내가 떡 아기적이거나 그보다도 좀 먼저였을 것이다. 언제 들어왔는지는 본 기억이 안 나나, 본래 그들이 질마재 사람들은 아닌 까닭이다.
질마재에 들어올 때에는 소반 한 닙도 없이, 큰놈이라는 아들 하나만을 데불고 와서, 나중에 자기들이 술집을 하게 된 그 집에 유숙(留宿)하고 며칠 동안은 세 사람의 밥을 사 먹었다는 것이다. 돈은 몇백 냥이나 가지고 왔던지, 나중에 그 집과 세간을 모조리 사 버렸다는 것이다.
선봉이네 내외가 남달리 의(誼)가 좋게 지낸다는 말도, 그러하고 의가 틀려서 싸운다는 말도,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아내는 아내대로 술 국자를 안 들 때는 머언 바다만 내어다보고, 남편은 남편대로 낚시질만 다니는 것이었다.
도대체 밥 먹을 때 외에, 선봉이네 내외(內外)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기는 퍽 드문 일이었다. 절대로 한번 겸상을 하여 보는 일도 없이 따로따로의 상가에 앉아서, “국이 좀 싱겁네” 하고 끓인 술국이 좀 싱겁다고 선봉이가 말하면, “간장을 드릴까요?” 하고 처는 그저 간단히 받아넘길 뿐, 간장병을 손수 갖다 주는 일도 싱거운 쑥국에 그걸 쳐 주는 일도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고 선봉이가 화를 내는 일도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꼭 하나 있었다. 그건 좀처럼 아파서 누워 본 일이 없는 선봉이가 병이 날 때였다. 잘해야 1년에 한 번쯤, 선봉이가 앓던 병은 대체 무슨 형체도 모를 열병(熱病)이었다. 흔히 그건 여름이었다.
그렇잖아도 붉은 얼굴이 유체 벌겋게 달아가지고, 옅은 홑이불을 쓰고 방 아랫목에서 선봉이가 앓고 있을 때는 아내는 평시(平時)와는 완연히 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자기의 얼굴도 약간 붉어져 가지고는, — 이상한 일이나 선봉이가 병을 앓을 때에만 선봉이네 아내의 얼굴에는 화기(花氣)가 돋았다. — 마을 아는 집으로 돌아다니며 접시꽃 뿌리와 앵속각(罌粟殼·양귀비 열매의 껍질-편집자주)을 구해 오는 것이었다.
접시꽃 뿌리를 끓인 물을 사기대접으로 하나 그득히 들고 들어와서는 선봉이의 머리맡에 공손히 앉아서 곱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그의 손으로 선봉이의 아마를 고요히 짚으며 가만히 소근거리는 것이었다.
“좀 일어나서 잡수어 보시오. 예?”
손수 그릇을 들고 입에다가 마시어 주며,
“어찌서 그러시오? 예? 어찌서 그러라우?”
혼잣말처럼 물어보면서, 역시 양 볼을 붉혀 가지고 선봉이가 완쾌(完快)하여 일어나기까지는 그 옆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용, 우리들의 아내에 비겨 본다면 아내 이상의 성실이었다. 좀 자세히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일종의 의무(義務)와 같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봉이가 아주 낫으면 선봉이 아내의 얼굴에서도 붉은 도화(桃花)빛이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여전(如前)의 자태(狀態)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부 사이에 자녀는 어떻게 해 3남이나 둘 수 있는 것이었던지, — 그러나 이사(移徙)올 때 데불고 온 ‘큰놈’ 외에도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질마재에 와서 낳았다. 역시 자녀에게는 충실한 어머니였다.
선봉이네 내외에게는 대범(大凡) 아래와 같은 일화(逸話)가 있었다. — 간단히 말하면 선봉이는 선봉이네 아내의 본부(本夫)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본부는 딴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갑오년(甲午年)이라던가—을미년(乙未年)은 아닐 것이고, 아마 갑오년이라고 들은 것 같다. 시방 선봉이네 아내의 본부는 동학당(東學黨)이라던가 무어라던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하여간 좋지 못한 일단(一團)을 따라다녔었다고 한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한 20명쯤 지휘(指揮)했다는 말도 있다.
그게 공교롭게도, 그때 마침 청인(淸人)들과 합세(合勢)하여 동학을 토벌하러 나왔던 선봉이들의 분대(分隊)에게 잡힌 배 되어, 날만 밝으면 낭떠러지 아래에다 내세우고 총살(銃殺)의 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밤이었다.
한 명의 소부(少婦)가, 토벌대의 진지(陣地)를 찾아왔었다. 굳이 닫힌 입술가에는 굳은 결의가 보였었다.
다아 술에 떨어져서 자고, 홀로 깨어 있는 선봉이에게 소부는 엎드려 비는 것이었다.
“갑돌(甲乭)이의 목숨 구하여 주옵시오. 저를 대신 죽이시고 제 남편 갑돌이의 목숨을 구하여 주옵시오….”
청인들과 같이 얼근히 마신 술이 골수(骨髓)에 밴 선봉이의 눈에 먼저 보이는 건 범연치 않은 그의 미모(美貌)였다.
이렇게 해서 본부를 살린 선봉네는 선봉이를 따라서 질마재에까지 왔던 것이었다. 해마다 사노라면 나이는 또한 제대로 느는 것이어서, 나에게는 능금 두 개를 주던 때에는 벌써 30이 훨씬 지내었었고, 지금(至今)은 50이 넘은 연세(年歲)일텐데 불행히 연전(年前)에 작고(作故)하였다.
(출처=《신시대(新時代)》 1942년 8월호, p128~134)⊙
그리고 작년 6월 말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5권 분량의 《미당 서정주 전집》을 간행했다.
많은 연구자를 통해 여기저기 흩어졌던 미당의 시들이 하나로 모아졌으나 산문 발굴 작업은 아직 더뎌 보인다. 미당은 자신의 시적 토대를 ‘유년기의 질마재에 대한 추억과 가치화’(최현식)를 통해 구현했는데 이와 관련한 미당 산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다. 장르를 떠나 ‘시적 영원성과 유년기 기억의 절대화’는 미당 문학의 중요 테마이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고향(故鄕)이야기〉는 미당 전집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으로, 미당의 고향 질마재에 대한 미당의 동양적 예지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시에서 접할 수 없는 미당의 절절한 산문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씨가 이번에도 자료발굴에 도움을 주었다. 원본 의미를 살리면서 현대어 맞춤법 표기에 따라 수정했음을 밝혀 둔다.
〈故鄕이야기〉
신장사 蘇生員
흔히 볼 수는 없는 일이나, 반도인(半島人)의 얼굴을 일일이 점검(點檢)하고 지내 가면은 ‘흥, 이건 정말 토종(土種)이로구나’ 하고 느끼어지는 사람이 만(萬)에 하나쯤은, 아니 적어도 십만(十萬)에 하나쯤은 반드시 있다.
유사이전(有史以前)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의 형체(形體)와는 판이(判異)하게 다른 사람들이, 텅-빈 산골짜기에서 땅강아지나 오랑캐 곰들을 벗으로 칡뿌리나 뒤져 먹고살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척 한번 보아서 어쩐지 그렇게만 느끼어지는 사람이 어쩌다간 있다.(이건 혹 나의 감관(感官)의 오해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신장사(장수-편집자주) 소생원(蘇生員)도 웬일인지 그렇게만 보여지는 사람 중의 하나이었다.(물론, 이것은 후에 우연히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이고, 소생원을 늘 면접(面接)하던 나의 소년시절에는 그저 이상(異常)하여서 말할 수 없는 일종(一種)의 신비감(神秘感)만을 느끼었을 뿐이었으나) 중 줄에도 이르지 못하는 짧달막한 키에 후리후리한 몸집이 언뜻 보면은 없는 것 같으나 균형(均衡)은 째어 있고, 노오란 노오란 수염을 가슴 우에까지 땋아 늘였으나 숱이 많지도 못하고, 젊어서도 늙어서도 나이는 한 사십으로만 보여지는, 꼬집어 주면 아프다고는 할 것 같으나 한 번 울어 본 일도 없는 것 같은 면모(面貌). 졸(拙)한 필치(筆致)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나 하잘것없는 것이 수(壽)는 할 것 같은 소생원이었다.
소생원은 또 무슨 혈족(血脈)의 부름으로 그의 아내와 같은 아내를 찾아낸 것인지, 역시 작은 키에 후리후리한 몸집, 솜솜이 얽은 얼굴에 벙그러진 이, 무슨 돌멩이 가루를 먹은 듯한 음성(音聲)이 나는 것이, 봄에도 화롯(火爐)가에만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소동(蘇童)이라는 아들이 단 하나 있을 따름이었다.
소생원은 밤이나 낮이나 신만 삼았다. 실낱같이 자는 시간과, 커다란 대통에 잎담배를 피우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신만 삼았다. 아니, 소생원에게도 밖에 나오는 시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있다가 이야기하겠다.
질마재 70호(戶) 남녀노소의 신발을 한결같이 만들어 신기는 것만으로도 소생원은 충분히 훌륭하였다. 엽전(葉錢) 열다섯 닢씩만 주면은 누구의 신발이건 삼아서 골 박아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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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엔 산이 서 있고 오른쪽엔 내가 흐른다. 전북 고창 질마재길 초입이다. |
소생원네 집 창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보이는 건 방 한가운데 천정(天井)을 떠받고 섰는 과히 적지 않은 기둥이었다. 집이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으로. 그러니까 외양(外樣)으로 보면 소생원 네 집은 약간 옆으로 자라난 버섯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지붕 위에는 가느다란 버섯도 많이 나 자랐다.
“꽃신을 심어 주례?”
하고 소생원이 골을 박던 손을 잠깐 멈추고 내게 물으면,
“왕골 꽃신을 심어 주례?”
하고 소생원네(마누라)가 역시 그 석분(石粉)을 마신 듯한 목소리로 화롯가에서 내게 재쳐 묻는 양은 부부(夫婦)라고 하기보다는 어디 머언 청국(淸國) 뽕나무정이 같은 데에(거기를 그때 나는 제일 먼 곳이라 들었으므로) 나란히 자란 무슨 버섯 같은 식물(植物) 비슷하였었다.
소생원에게는 또 하나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가끔 허리띠의 회색(灰色) 주머니 속에서 까맣게 때에 전 생(生薑)을 꺼내어서는 청성으로 질근질근 씹어 먹는 것이었다. 그 먹는 시간으로 따져 보면은 하루에 아마 스무 번쯤은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이걸 보고 있노라면, 마을에 가끔 오는 백발(白髮)이 하얗던 생장사 노총각(老總角)이 연상(聯想)되는 것이었으나, 생긴 품이 소생원은 생장사와도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이러한 소생원네 방에 한참만 그대로 앉아 있으면 어데선지 물컥물컥 노린내가 나고, 벽에 걸려 있는 메투리(미투리-편집자주), 육날 메투리, 신골 망태, 박아지짝 거미집, 이런 것들이 모두 구역만 나 보이고 죽었으면 죽었지 나는 이런 버섯 속 같은 방에서는 한 시(時)도 살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겨드랑에서 나는 것인지 아랫도리에서 나는 것인지 이상한 노린내가 소생원에게서는 어찌도 풍기는 것이었던지. 역시 나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아버지나 아저씨들처럼 밖에 나가서 밭도 갈고 김도 매고 베짱이 소리도 듣고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밖에 나오면 벌써 소생원의 하늘은 아니었었다.(이것도 후에 생각하면 나의 오해였던 모양이나)
집집이 대추 남겐(나무엔-편집자주) 풋대추가 붉게 붉게 물들어져 있고, 돌무데기 풀섶에서는 벳쟁이(베짱이-편집자주)가 툭툭 뒷발로 무엔지 차고 날아다니면서 쩍쩍쩍쩍 머언 하늘나라에서처럼 울어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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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추석도 지나간 후의 어느 날) ‘귀염다래’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아버지를 따라서 성묘(省墓)를 갔었다.
성묘하는 철이 다아 끝난 후에 똥이 마려워서, 혼자 외진 골짜기로 빠져나와 어느 바위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으려니까, 어데서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소생원네 집 누렁이가 씩씩거리고 내 옆에 와서는 떡갈 나무 잎사귀를 한움큼 쥐고 있는 내 손등을 핥으려 덤비는 것이었다.
일어서서 나는 사면(四面)을 살피었다. 누렁이가 왔음에는 소생원네 집에서 누가 반드시 그 근처에 와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어쩌면 기이(奇特)하게도 소동(蘇童)이가 명감이나 산포도를 따려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나 소동이가 온 것은 아니었다.
선운사(禪雲寺)라는 절로 가는 길의 낭떠러지 선바위 아래, 일어섰다가는 엎드리어 절을 하고 절을 하고는, 다시 일어서고, — 이러한 짓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솔나무 사이로 힐끗힐끗 보여서, 가 보니까 그게 소생원이었다.
먼빛으로 볼 때에는, 소생원에게도 무슨 절할 묘(墓)등이 다 있어서 우리처럼 성묘를 왔는가 생각했더니, 바짝 옆에 가서 보니까 묘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바위[立岩]에다 대고 그렇게 지극(至極)히도 절을 해싸는 것이었다. 닭이 물을 마시듯, 하늘 한 번 우러러 보고는 절을 하고, 절을 하고, 절을 하고, 하는 것이었다. 누런 수염이 햇볕에 유체 누리게 보이는 것이었다, 무슨 원(願)이 있었던 것인지, 혹은 별다른 원도 없이 절하는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습성(習性)이었던지, 그건 알 수 없으나 그 후에도 2~3차 나는 이 선바위 아래 절을 하는 소생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생원이 다른 일로 밖에 나오는 것을 나는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선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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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마재 노변에서 나이를 잊은 노거수가 무심히 아침을 맞는다. |
사십이 다 된 선봉이네의 예쁜 곳을 똑 집어서 말하라면 나는 곧 대답할 수는 없다. 하여간, 몸이나 키가 보통 여자보다는 큰 편이었다. 수족(手足)도 큰 편이었다. 퉁퉁한 살이 찐 게 아니라, 향(香) 맑고 밝은 뼈다귀 위에 오히려 간단히 붙어 있었다.
잘된 남자를 생각하게 하는 대문이 있는 여인(女人)이었다. 늘 든든히 땅을 디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걸 보면 정말보담은 훨씬 커 보이었다.
이(齒)는 유난히도 가지런히, — 그러나 조금도 잘지 않은 것이, 얇고 좀 큰 편인 입술 속에서 어떤 때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행용은 굳이 닫혀 있었다. 희기보다는 푸른 잇빨이었다.
푸른빛은, 또 너무나 숯이 짙은 머리 밑에 약간 넓어 보이는 이마와 얼굴에도 있었다. 굵다란 손가락의 손톱 끝에도 눈매에도 있었다.
눈썹이 그리 짙으지 않은 게 얼굴에 어울렸다. 기다란 속눈썹 밑에서 말할 때에도 생각은 머언 곳만을 바라보는, 눈에 어울렸다. 아무도 쉬이 가까이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같이 우리 모두가 거기 가서 쉴 수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술국이는 쥐게 되었는지 조금도 술장수티라고는 없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적을 수 있는 게 나는 기쁘다. 조히 생각을 기울이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3월의 양광(陽光) 아래 동백꽃나무 밑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꼴이다. 밖에 나타내이지는 않으나, 머언 바다를 바라보며 아마 속으로는 어찌했으면 좋을지를 모르던 모양이다.
나룻목으로 가는 언덕 아래 길가에 있던 선봉이네 술집엔 뒤뜰에 수월찮이 너른 경사(傾斜)진 풀빛이 있었고, 두 그룬지 세 그루의 동백나무가 거기 있었다.
어느 3월이든지, 선봉이네 집 마당에서 아버지가 누구와 싸우다가 많이 맞았다고 하여서, 종형(從兄)과 둘이 아버지를 찾으러 갔었다. 가 보니 아버지는 겨우 이가 두 개가 빠지셨을 뿐, 맞은 것은 오히려 저편이어서 종형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가려고 하니까 뒤 한 동백나무 밑에서 선봉이네가 “정주야” 하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싱거운 싸움이 무척은 심심하였던 모양이다.
어디서 사 왔는지 성성한 능금 두 개를 나에게 주며, 따뜻한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다가 ‘너희 5촌’ 배 들어오는 것이나 보고 가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동백나무 위에선 빠알간 동백꽃이, 이 커다란 여인이, 머언 바다를 내어다보며 눈을 끔쩍이는 사이만큼 사이를 두고 조용히 조용히 낙화(落花)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주워 모았다. 모아서는 선봉이네에게 갖다 주었다. 두 손으로 그득히 갖다 주어도 선봉이네의 손바닥으론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서 한 손을 벌리며 오래간 만에 가느다란 입술을 벌려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흰 치마에다 끄리는(차리는-편집자주) 것이었다. 선봉이네의 항시 쉬어 있는 두 손과 좀 넓은 듯한 손톱들이 오히려 나는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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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월 미당 1주기를 맞아 문인, 유족 80여 명이 고창 질마재 아래 미당 부부 묘역에 묘비를 제막하고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
그전에 어디서 형리(刑吏)를 하였단 말도 있고, 동학토벌대(東學討伐隊)를 따라다녔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마을에서 총(銃) 놀 줄 아는 사람은 선봉이뿐이라는 풍문(風聞)이 있었다.
나이는 나의 기억에 남는 걸로는 45~6세, 귀밑에서부터 보기 좋게 자라난 검고도 꺼칫꺼칫한 쉬염을 달고, 아직 피가 돋는 듯한 얼굴이 젊어서는 꽤 단단하였던 모양이었다.
선봉이 내외가 우리 마을에 들어오기는 아마 내가 떡 아기적이거나 그보다도 좀 먼저였을 것이다. 언제 들어왔는지는 본 기억이 안 나나, 본래 그들이 질마재 사람들은 아닌 까닭이다.
질마재에 들어올 때에는 소반 한 닙도 없이, 큰놈이라는 아들 하나만을 데불고 와서, 나중에 자기들이 술집을 하게 된 그 집에 유숙(留宿)하고 며칠 동안은 세 사람의 밥을 사 먹었다는 것이다. 돈은 몇백 냥이나 가지고 왔던지, 나중에 그 집과 세간을 모조리 사 버렸다는 것이다.
선봉이네 내외가 남달리 의(誼)가 좋게 지낸다는 말도, 그러하고 의가 틀려서 싸운다는 말도,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아내는 아내대로 술 국자를 안 들 때는 머언 바다만 내어다보고, 남편은 남편대로 낚시질만 다니는 것이었다.
도대체 밥 먹을 때 외에, 선봉이네 내외(內外)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기는 퍽 드문 일이었다. 절대로 한번 겸상을 하여 보는 일도 없이 따로따로의 상가에 앉아서, “국이 좀 싱겁네” 하고 끓인 술국이 좀 싱겁다고 선봉이가 말하면, “간장을 드릴까요?” 하고 처는 그저 간단히 받아넘길 뿐, 간장병을 손수 갖다 주는 일도 싱거운 쑥국에 그걸 쳐 주는 일도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고 선봉이가 화를 내는 일도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꼭 하나 있었다. 그건 좀처럼 아파서 누워 본 일이 없는 선봉이가 병이 날 때였다. 잘해야 1년에 한 번쯤, 선봉이가 앓던 병은 대체 무슨 형체도 모를 열병(熱病)이었다. 흔히 그건 여름이었다.
그렇잖아도 붉은 얼굴이 유체 벌겋게 달아가지고, 옅은 홑이불을 쓰고 방 아랫목에서 선봉이가 앓고 있을 때는 아내는 평시(平時)와는 완연히 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자기의 얼굴도 약간 붉어져 가지고는, — 이상한 일이나 선봉이가 병을 앓을 때에만 선봉이네 아내의 얼굴에는 화기(花氣)가 돋았다. — 마을 아는 집으로 돌아다니며 접시꽃 뿌리와 앵속각(罌粟殼·양귀비 열매의 껍질-편집자주)을 구해 오는 것이었다.
접시꽃 뿌리를 끓인 물을 사기대접으로 하나 그득히 들고 들어와서는 선봉이의 머리맡에 공손히 앉아서 곱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그의 손으로 선봉이의 아마를 고요히 짚으며 가만히 소근거리는 것이었다.
“좀 일어나서 잡수어 보시오. 예?”
손수 그릇을 들고 입에다가 마시어 주며,
“어찌서 그러시오? 예? 어찌서 그러라우?”
혼잣말처럼 물어보면서, 역시 양 볼을 붉혀 가지고 선봉이가 완쾌(完快)하여 일어나기까지는 그 옆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용, 우리들의 아내에 비겨 본다면 아내 이상의 성실이었다. 좀 자세히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일종의 의무(義務)와 같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봉이가 아주 낫으면 선봉이 아내의 얼굴에서도 붉은 도화(桃花)빛이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여전(如前)의 자태(狀態)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부 사이에 자녀는 어떻게 해 3남이나 둘 수 있는 것이었던지, — 그러나 이사(移徙)올 때 데불고 온 ‘큰놈’ 외에도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질마재에 와서 낳았다. 역시 자녀에게는 충실한 어머니였다.
선봉이네 내외에게는 대범(大凡) 아래와 같은 일화(逸話)가 있었다. — 간단히 말하면 선봉이는 선봉이네 아내의 본부(本夫)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본부는 딴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갑오년(甲午年)이라던가—을미년(乙未年)은 아닐 것이고, 아마 갑오년이라고 들은 것 같다. 시방 선봉이네 아내의 본부는 동학당(東學黨)이라던가 무어라던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하여간 좋지 못한 일단(一團)을 따라다녔었다고 한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한 20명쯤 지휘(指揮)했다는 말도 있다.
그게 공교롭게도, 그때 마침 청인(淸人)들과 합세(合勢)하여 동학을 토벌하러 나왔던 선봉이들의 분대(分隊)에게 잡힌 배 되어, 날만 밝으면 낭떠러지 아래에다 내세우고 총살(銃殺)의 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밤이었다.
한 명의 소부(少婦)가, 토벌대의 진지(陣地)를 찾아왔었다. 굳이 닫힌 입술가에는 굳은 결의가 보였었다.
다아 술에 떨어져서 자고, 홀로 깨어 있는 선봉이에게 소부는 엎드려 비는 것이었다.
“갑돌(甲乭)이의 목숨 구하여 주옵시오. 저를 대신 죽이시고 제 남편 갑돌이의 목숨을 구하여 주옵시오….”
청인들과 같이 얼근히 마신 술이 골수(骨髓)에 밴 선봉이의 눈에 먼저 보이는 건 범연치 않은 그의 미모(美貌)였다.
이렇게 해서 본부를 살린 선봉네는 선봉이를 따라서 질마재에까지 왔던 것이었다. 해마다 사노라면 나이는 또한 제대로 느는 것이어서, 나에게는 능금 두 개를 주던 때에는 벌써 30이 훨씬 지내었었고, 지금(至今)은 50이 넘은 연세(年歲)일텐데 불행히 연전(年前)에 작고(作故)하였다.
(출처=《신시대(新時代)》 1942년 8월호, p128~1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