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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추적

루벤스 作 〈한복 입은 남자〉로 본 神話의 탄생과 소멸

임진왜란 때 유럽으로 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 그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나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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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국내 언론에 의해 이탈리아 알비 마을 코레아 姓氏들의 시조로 탄생
⊙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素描 작품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은 안토니오 코레아
⊙ 1983년 크리스티 경매장서 당시 소묘 거래 사상 최고액인 32만4000파운드에 경매
⊙ 임진왜란 발발 400주기 무렵 그를 소재로 한 《베니스의 개성상인》 등 소설, 뮤지컬 나오며 신화화
⊙ 곽차섭 교수 2004년 저서 통해 “코레아 성씨 시조 가능성 희박하나 루벤스 소묘의 모델은 안토니오
    코레아” 주장
⊙ 미술사학자 노성두 2015년 10월, “루벤스 소묘 주인공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도 조선인일
    가능성도 희박하다” 주장
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 1600년대 유럽 미술계의 거장이자 서양미술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루벤스가 그린 이 소묘의 모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훗날 이탈리아로 팔려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코레아’라는 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만 짐작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오 코레아란 인물은 뮤지컬로, 소설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그의 생애가 그만큼 드라마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이탈리아 상인에게 팔려 로마까지 간 조선인 청년(혹은 소년)이다. 문헌 기록상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인물이다.
 
  안토니오 코레아의 로마 입성을 기록한 책은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 일주기》다. 카를레티는 피렌체의 유명한 상인 집안 출신으로 1636년 62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사망하는데 《나의 세계 일주기》는 그가 죽은 지 65년이 지난 후인 1701년에 간행됐다. 1606년에 원고 작성이 끝났지만 처음 간행하기 전까지는 여러 번 필사를 거쳤다고 한다. 이 책은 카를레티가 임진왜란 발발(1592년) 후인 1597년 6월부터 1599년 12월까지 일본 나가사키, 마카오 등을 항해하던 도중 생긴 일들을 기록했다.
 
  2부 6장, 총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감안하면 이 책은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부분을 상대적으로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코레아란 나라는 모두 9개 주로 나뉘어 있으며, 일본군은 그 나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남녀를 잡아다 헐값에 노예로 팔았는데 나도 다섯 사람을 산 후 인도 고아까지 데리고 가서 자유인으로 풀어 줬다. … 그중 한 사람을 플로렌스까지 데려왔는데 지금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살고 있다.〉
 
  이게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내용의 거의 전부다. 하지만 이 짧은 기록은 훗날 이탈리아 알비 마을에 사는 코레아 성씨, 1600년대 바로크 미술의 거장(巨匠)으로 불리는 루벤스의 소묘(素描・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 등과 결합하면서 신화를 만든다.
 
 
  안토니오 코레아와 루벤스의 만남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한국일보》 1979년 10월 7일자 〈이탈리아 코레아 씨들의 마을: 뿌리는 한국인이었다〉 제하 기사였다. 당시 《한국일보》 파리주재 특파원이었던 김성우(金聖佑) 기자가 쓴 이 르포 기사는 이탈리아 남부 알비라는 마을에 코레아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었다.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 일주기》에서 소개한 안토니오 코레아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카를레티를 따라서 로마까지 왔다는 등의 고증과 함께 코레아 성을 가진 알비 마을 주민들의 자신들 시조가 비(非) 유럽계 인물이었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했다.
 
  하지만 알비 마을에 안토니오 코레아를 시조로 삼는 코레아 씨 집성촌이 있다는 것은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이탈리아에 코레아(Corea)라는 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알비 마을에 사는 코레아 성씨들은 로마 제국 이전 그리스 등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게 정설이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안토니오 코레아와 이탈리아에 사는 코레아 성씨들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내 한 방송사가 임진왜란 발발 400주기를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도 한국인의 혈청과 이탈리아 코레아 씨의 혈청을 비교한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이 프로그램은 400여 년 전 유럽으로 간 한국인의 뿌리가 유럽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탈리아 코레아 성씨들에게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다.
 
  어쨌든 《한국일보》의 이 기사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79년 당시로서도 지리적으로 결코 가깝게 느낄 수 없었던 유럽에 400여 년 전에 끌려간 한국인의 후예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것은 민족적 자긍심까지 느끼게 하는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후속 보도들이 이어졌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존재가 더 큰 주목을 받게 된 때는 김성우 기자의 보도가 있은 지 4년여가 흐른 1983년 11월 말이었다. 그해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루벤스가 그린 소묘 작품 한 점이 경매에서 낙찰됐다. 루벤스의 소묘 작품 제목은 〈한복 입은 남자〉로 미국 게티박물관이 당시 소묘 그림으로서는 사상 최고 경매가인 32만4000파운드에 낙찰 받았다.
 
  소묘 작품 사상 최고 경매가도 주목을 받았지만 국내 언론은 〈한복 입은 남자〉라는 작품 명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경매 소식을 전하는 《경향신문》 1983년 12월 1일자의 기사 제목은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은 임란(壬亂) 때 조선인’이다. 다음은 그 기사 발췌문이다.
 
  〈… 3억8000만원 상당에 경매된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한국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인 최석우 신부에 의하면 당시 이태리인으로 수사(修士) 수업 전 세계 일주에 나섰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 조선인 포로 5명을 사서 세례를 주고 데려갔다고 한다.
 
  1598년 일본을 떠난 카를레티는 마카오를 거쳐 인도 고아에 도착, 4명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고 그중 1명만을 1606년 이태리 플로렌스로 데려갔다. 이 소년은 그 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그곳 교회에 교무로 종사하며 이태리에서 일생을 마쳤다. ….〉
 
  이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카를레티가 수사 수업을 받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수사가 아닌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사가들이 임의로 수사라는 직분을 갖다 붙였을 개연성이 높다. 카를레티의 《나의 세계 일주기》 어디에도 그런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의 오류
 
노성두 박사는 〈한복 입은 남자〉가 그림의 위와 아래가 잘려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그림은 제단화를 참고로 복원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인이 착용하고 있다는 방건과 철릭은 조선 복식이 아니라는 게 노 박사의 주장이다.
  카를레티가 가톨릭 수사 또는 신부라는 오해는 왜 생겼을까.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에 따르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이 한국 학자들에게 최초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구치(山口正之)가 1932년에 쓴 한 논문이 그의 이름을 처음 언급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야마구치의 이 논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한 조선인 포로들이 뒤에 귀국해 조선 땅에 가톨릭의 씨앗을 뿌렸을 가능성에 주목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논문에서 야마구치는 아무런 근거도 내놓지 않고 카를레티를 승려(僧侶)라고 했는데 훗날 한국 사학자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카를레티를 ‘신부’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곽 교수의 주장이다. 곽 교수는 이로 인해 훗날 카를레티와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사실 왜곡이 발생하게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어쩌면 이 같은 사실의 오류들이 연속되며 안토니오 코레아를 둘러싼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토니오 코레아가 교회에 교무로 종사했다는 내용도 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나의 세계 일주기》에 없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카를레티가 밝힌 내용은 ‘안토니오가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가 뒤에 교회 교무로 시무했다는 사실 역시 교회 사가들의 상상력이 덧씌워진 결과물인 것이다.
 
  같은 해 《중앙일보》 12월 2일자 기사도 비슷한 시각으로, 〈한복 입은 남자〉의 경매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도 카를레티의 신분을 가톨릭 수사로 소개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한복 입은 남자〉의 탄생 경로다. 사진에 나타난 그림 속의 남자는 상당히 ‘한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림의 한복 자체는 차라리 우리에게 낯익지 않지만 ‘남자’의 기품과 태도는 한국적인 데가 있다. 시골 선비풍이다. 복식 전문가들은 그 그림의 한복이 조선조 초기에 흔히 있었던 철릭(天翼)이라고 한다.
 
  머리에 쓴 모자도 인상적이다. 그건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쓰던 충정관 같기도 하고 사방관 같기도 하다. … 그 한국인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납치된 뒤 가톨릭 수사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에게 노예로 팔려갔던 한국인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있다. …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근 4백년 전 유럽에 있었던 ‘기구한 한국인’의 운명을 생각게 한다.〉
 
  이렇게 당대 미술계의 거장 루벤스와 ‘기구한 한국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한 지점에서 만난다.
 
  물론 루벤스가 그린 소묘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시 화가이면서 숭의여전 교수였던 김정(金正)의 〈루벤스의 한국인상 소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대표적이다. 다음은 김 교수의 논문을 소개한 《조선일보》 1984년 12월 4일자 기사 중 일부다.
 
  〈지난해 12월 국내에 소개됐던 루벤스의 소묘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팔려간 노예가 아니고 경기도 서해안의 이름 없는 한 청년이 스스로 외국 상선을 타고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루벤스와 상면했으리라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 김씨는 논문에서 소묘의 모델이 입은 복장으로 보아 노예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철릭이나 방건은 노예 처지에는 착용키 어렵다는 것. 더욱이 노예나 팔려 나가는 신분으로 이 그림의 모델이 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한복 입은 청년은 중부지방, 즉 경기도 백령도, 웅진, 장연, 장산곶 등 서해안 출신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
 
  김정 교수의 이 논문은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훗날 그 논문은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주기도 한다.
 
 
  신화의 탄생
 
유럽의 상인이었던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 일주기》. 카를레티는 이 책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끌려갔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자신이 로마로 데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김정 교수 같은 이의 반론도 있었지만 1983년 말 크리스티 경매 후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은 한 몸으로 묶여 회자된다. 거기에 알비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덧붙여지면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인물의 실존과 그의 행적을 둘러싼 상상력의 결합은 결국 ‘없는 사실’까지 새롭게 만들어 가며 신성한 이야기들을 잉태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한 ‘기구한 운명의’ 조선인이 4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뒤 그의 조국에서 신화(神話)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 정점이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을 맞았던 1992년이었다.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1979년의 《한국일보》 보도 후 12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카를레티를 종교인으로 소개한다든지, 안토니오 코레아를 천주교 교무에 종사한 사람으로 소개한다든지 하는 오류들은 조금도 수정되지 않고 통용되고 있었다. 물론 1965년 진단학회가 발행한 《한국사》에서 이상백(李相伯) 전(前) 서울대 교수가 주장한 안토니오 코레아가 남원 출신이라든지, 소년이었다든지 하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도 사실화해 통용되고 있었다.
 
  그해 국내 매체들은 안토니오 코레아와 알비 집성촌에 대한 보도를 이어 나갔다.
 
  임진왜란 400주기를 맞아 안토니오 코레아를 제일 먼저 주목한 곳은 1979년 알비 마을의 코레아 씨들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들이라는 보도를 했던 《한국일보》였다. 1992년 4월20일자로 씌어진 이 기사의 요지는 79년의 보도와 대동소이했다. 알비 마을의 코레아 씨들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들이라는 내용이었다.
 
  부산대 곽차섭 교수에 따르면 이해에는 안토니오 코레아의 삶을 소재로 한 뮤지컬(〈불멸의 피리〉・박용구 작)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 절정은 92년 11월 초에 있었던 문화부의 안토니오 코레아 후손 초청 행사다. 다음은 이 행사를 보도한 《연합뉴스》 92년 11월 2일자 내용 중 일부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려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한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 씨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탈리아의 한국문화협회 회장 안토니오 코레아(51) 씨와 코레아 집성촌인 알비시(市)의 두란테 주세포(45) 시장이 문화부의 초청으로 3일 내한한다.
 
  한국국제교류재단 후원으로 10일까지 7박8일간 한국을 방문하게 될 안토니오 코레아 씨는 지난 86년 한국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어 그들의 조상을 찾아줄 것과 최소한 모국을 한 번 방문하게 해 달라고 호소, 이번에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두란테 주세포 알비시장은 지난 89년 알비시의 코레아 광장에 안토니오 코레아와 이탈리아 부인의 만남을 기념하는 ‘평화의 만남 기념비’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바 있다.
 
  이번 초청은 임란 400주년을 맞아 문화부가 ‘우리 조상의 뿌리 찾기’를 위해 지난 5월 장경호(張慶浩) 문화재연구소장을 현지에 파견, 알비 마을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한 데 따른 것이다.
 
  장 소장에 따르면 강원도 산간 같은 느낌을 주는 알비 마을에는 약 400여 세대 중 22세대가 코레아 성(姓)을 갖고 있으며, 안토니오 코레아의 조상이 묻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린 교회터가 있다.
 
  알비 마을 주민들은 마을 사람들의 장지로도 사용돼 온 이 교회 터를 발굴, 유골을 과학적으로 조사하면 자신들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고 있다.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코레아’가 조선인으로 알려진 것은 17세기 피렌체 메디치가의 여행가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여행기에서 비롯된다. ….〉
 
  안토니오 코레아 후손의 방한(訪韓) 소식은 중앙 일간지 등 주요 언론이 소개한다. 방한 기간 중 이탈리아 한국문화협회장인 안토니오 코레아 씨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한국을 ‘조국’이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다음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번 기회에 조국의 문화재와 발전상은 물론 옛 문헌을 뒤져 왜적에게 납치된 뒤 노예로 팔려가 이역만리에서 고생한 조상의 뿌리를 찾아보고 싶다. 이를 위해서 알비시와 한국의 유대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
 
  “이분(안토니오 코레아)이 어떻게 해서 로마에서 700km나 떨어진 알비 마을로 옮겨갔는지에 대한 문헌 근거는 없다.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그분의 고향이 전북 남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같은 사실은 (자신이) 지난 79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당시 현지의 한국어 신문에서 김성우라는 기자를 통해서 알게 됐다. 당시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몰랐던 때인 만큼 낯설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자랑스럽다.”
 
  ‘어렸을 때부터 그분의 고향이 전북 남원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말과 ‘당시(79년 이전)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몰랐던 때’라는 말의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언론들의 관심은 그가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믿음뿐이었던 것 같다.
 
 
 
소설로 상상의 날개를 달다

 
  해를 넘기며 1993년에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소재로 한 소설도 나왔다. 오세영 작(作)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83년 12월 1일자 신문들은 일제히 그림 한 장을 외신으로 전하고 있었다.
 
  플란더즈 화풍으로 잘 알려진 거장 루벤스(1577~1640)의 〈한복 입은 남자〉라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400년 전의 서양화가가 조선옷을 입고 있는 한국 사람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다니! 그 당시 유럽에 조선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나는, 피렌체에 살고 있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라는 이탈리아인이 일본 나가사키에서 노예로 사 간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조선인이 지금도 남부 이탈리아 알비 지방에서 코레아라는 성을 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선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림 속의 남자는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노예로 팔려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던 안토니오 코레아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방인인 안토니오 코레아는 이탈리아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살아갔을까. …
 
  그 사람이 정말 안토니오 코레아라면 어떻게 해서 먼 이국땅에서 자수성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조선에서는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은 더해 가기만 했다. 생김새로 보아 경기도 서해안 지방 사람 같다는 추측(조선일보 1984. 11. 23)만이 유일한 실마리였다. ….〉
 
  이 소설은 93년과 94년을 이어 가며 2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 코레아를 기억하려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정설화하고 말았다. 책머리에 쓴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카를레티의 여행기와 김정 교수의 안토니오 코레아가 경기도 서해안 지방 출신이라는 주장이 소설의 주요 얼개가 된 것이다. 소설가 정준의 《안토니오 꼬레아》도 뒤이어 출간됐지만 《베니스의 개성상인》만한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스테디셀러인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2002년에, 정준의 《안토니오 꼬레아》는 한-이태리 수교 130주년을 맞아 지난해 재출간되기도 했다.
 
  두 소설이 출간된 비슷한 시기인 1993년 9월 30일에는 MBC가 특집 다큐멘터리로 〈안토니오 꼬레아〉를 방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코레아 성을 가진 알비 마을 태생의 두 여대생 리포터가 안토니오 코레아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남원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카를레티가 일주했던 나가사키, 마카오, 인도의 고아, 알비 마을 등을 입체 취재했다. 당시로는 90분에 걸친 대작이었던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연출을 맡았던 정수웅 감독과 알비 마을 사람의 혈청을 비교, 분석해 민족적 유사성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전체 흐름에서 그 같은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일로 처리한다. 오히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사람들에게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알비 마을 코레아 성씨들의 시조일 가능성이 높다는 잔상이 더 많이 남게 방송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비 마을 사람과 지금 한국인이 ‘민족적 유사성이 없다’는 조사 결과는 묻혀진 이야기가 돼 버렸을 뿐이다. 상상과 사실이 결합해 만든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신화’가 더욱 공고화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400주기의 열풍이 한참 지난 후인 2002년 6월 한 중앙일간지에 실린 〈꼬레아 마을〉이라는 제목의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칼럼의 일부를 소개한다.
 
  〈… 이 시기에 조선 청년 중 한 명이 이태리로 팔려 가는데, 이 청년은 곧 노예 신분을 벗었고 거장 루벤스를 초청해 초상화를 그릴 정도의 부를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태리 남동쪽 바리 부근에 터를 잡고 성도 아예 꼬레아로 바꿨는데, 꼬레아 마을로 불리는 알비시에는 지금도 300여 명의 꼬레아 씨가 거주하고 로마에도 꼬레아 씨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이 칼럼 작성자는 아마 상상과 사실이 결합한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은 밝혀지지만
 
  MBC 다큐멘터리 〈안토니오 꼬레아〉에서 연출자인 정수웅 감독과 알비 마을 사람들의 혈청검사 결과 등 주요 논거들을 밝히며 알비 마을의 코레아 성씨들이 임진왜란 때 끌려간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고 주장하고 나선 이는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다. 그동안 저널리즘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신화를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곽 교수는 2004년에 《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라는 책을 펴냈다. 시집 판형 정도의 작은 크기의 본문 121쪽인 이 책은 각주만 87개가 붙은 거의 논문에 가까운 형태다. 그만큼 이 책을 쓰기 위해 곽 교수가 수많은 자료를 섭렵했다는 방증이다. 곽 교수는 이 책에서 알비 마을 코레아 성씨들의 조상이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증거로 스페인의 코레아 씨들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알비 마을은 1505년부터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데 스페인에도 코레아라는 성씨가 존재하므로 스페인의 코레아 씨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유럽의 ‘쿠리아(Curia)’라는 성씨가 우여곡절 끝에 개명해 코레아 씨가 됐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2000년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살고 있는 코레아 씨와 쿠리아 씨의 분포도가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이 책에서 안토니오 코레아와 관련한 이야기들의 신화화와 관련해 이런 견해를 내놓는다.
 
  〈박용구의 뮤지컬이나 오세영·정준의 소설, 그리고 정수웅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알비의 코레아 씨들이 안토니오의 후손이라는 믿음(혹은 그랬으면 하는 강력한 희망) 위에서 줄거리를 전개하고 있다. 카를레티의 기록이나 루벤스의 그림은 단지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보조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 작품은 이처럼 사실 입증보다는 믿음을 앞세우다 보니 사실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하지만 상상력의 발휘는 예술이나 문학 작품만이 갖는 독특한 성격이기 때문에, 때로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작품의 완결성이나 수준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술과 문학작품을 통하여 사실의 정확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안토니오에서 알비의 코레아 씨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정형이 확립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수웅의 다큐멘터리에서 보듯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보다는 거꾸로 그것을 부인하는 증거만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비 코레아 씨들의 시조 안토니오’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이제 신화화의 단계로까지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

 
노성두 박사는 “루벤스 소묘의 모델이 조선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곽 교수의 이 책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루벤스가 그린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였음을 입증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곽 교수 이전까지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이탈리아로 간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사실을 과학적 논거를 동원해 밝힌 이는 사실상 없다. 대부분이 〈한복 입은 남자〉라는 그림의 제목을 보고 여기에 짐작과 희망을 섞어서 그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단정했을 뿐이었다.
 
  곽 교수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양 미술사학계의 사료와 한국, 이탈리아, 일본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물 등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을 통해 곽 교수는 루벤스의 소묘 속 인물이 한국인이라고 믿게 됐다고 한다. 우선 그림속 사내가 쓰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 계층이 평상시 쓰던 방건(方巾)의 일종인 관모(冠帽)라는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은 조선 시대의 철릭인데 이 복장은 조선시대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구별 없이 널리 애용되던 옷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곽 교수는 그 철릭의 모양새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유행하던 종류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림의 모델이 된 사내의 얼굴에 대해 서양학자들은 몽골리안 계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여기에서 곽 교수는 코가 낮지 않고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점으로 보아 남방계 아시아인은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조선인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할 만한 이유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곽 교수는 그림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증거로 그림을 그린 루벤스와 안토니오 코레아의 로마 체류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안토니오가 카를레티와 함께 1606년 7월 피렌체로 간 얼마 후부터 로마에서 살았고, 루벤스가 1605년 11월~1608년 10월 로마를 방문했다는 기록 등을 근거로 루벤스가 1606년 7월 중순경에서 1608년 10월 사이 로마에서 안토니오를 만나 그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곽 교수의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가 세상에 나온 이후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 임진왜란 때 조선 땅을 떠나 유럽으로 간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것은 정설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술사학자인 노성두 박사가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도,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올해 벌어진 일이다.
 
  노 박사는 독서신문인 《책과삶》에 기고하는 연재물 ‘노성두의 그림읽기’ 10월, 11월호를 통해 “현재 LA 게티미술관에 있는 루벤스의 한 뼘 반짜리 초상 소묘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의의 역사는 꽤 길고 깊지만, 조선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 박사는 “곽 교수가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증거로 방건을 쓰고 있다, 상투를 틀었다, 철릭을 입었다는 세 가지 주장을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데 상투는 결론을 내리기 애매해 논외로 치더라도 방건과 철릭에 대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다음은 노 박사의 설명이다.
 
  “곽 교수가 게티 소묘를 관찰하면서 중요한 디테일을 놓친 것 같습니다. 우선 방건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게티 소묘에는 상하좌우에 테두리 선이 있는데 루벤스는 소묘를 제작하면서 테두리 선을 일절 그린 적이 없어요. 추측하건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원작 소묘를 잘라낸 흔적을 감추고 온전한 작품처럼 보일 요량으로 업자나 컬렉터가 나중에 덧그렸을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런데 그림의 디테일을 보면 루벤스가 그린 선들이 상하의 테두리선을 넘어 종이 끝까지 뻗어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걸 곽 교수가 놓친 것 같습니다. 루벤스가 예외적으로 테두리 선을 두른 종이에다 소묘를 그려야 했다면 관모의 세로 올을 나타내는 수직선들이 테두리 수평선을 결코 침범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묘의 하단부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소묘 선들이 하단부 테두리 선 바깥으로 연장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훼손되기 이전의 온전한 상태의 루벤스 소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제가 소묘의 잘려 나간 부분을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복원해 봤더니 위가 넓고 원통형의 관모는 끝부분이 둥글게 마감되어 있어서 조선 방건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조선의 방건은 네모난 형태에 각이 져 있고 납작하게 접을 수 있는데 머리에 썼을 때는 접히는 부분의 수직선이 뚜렷이 나타나는 게 특징인데 게티 소묘에서는 둥글게 나타나고 있잖아요?”
 
  —방건이 닳아서 그렇게 둥근 모양으로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곽 교수도 여러 해에 걸쳐 방건을 사용해서 둥근 모양은 각진 부분이 완화된 결과로 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방건은 애당초 사각형의 틀을 네 개 잇대어 만드는데 오래 사용했다고 해서 각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억지죠. 제가 보기에는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 방건을 쓰고 있다는 곽 교수의 주장은 작품의 상단과 하단이 잘려 나간 사실을 모르고 관모의 형태와 크기를 착각한 결과예요.”
 
  —철릭은요.
 
  “게티 소묘의 철릭은 조선 철릭이 아닙니다. 조선 철릭은 길이가 짧아서 무릎뼈 아래까지 올라오고, 목에 짧은 동정을 대는 게 특징입니다. 그런데 게티 소묘의 주인공이 입은 철릭은 동정이 없고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졌습니다. 게다가 깃은 넓은데 이 같은 복식은 중국식 철릭의 특징입니다.”
 
 
  논쟁은 벌어졌지만…
 
곽차섭 교수는 추측으로만 떠돌던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이 임진왜란 당시 끌려갔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사실을 국내외 여러 자료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밝혀냈다.
  —루벤스 소묘의 모델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증거로 곽 교수는 두 사람이 1607년에서 1608년 사이 로마에서 조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는데요.
 
  “저는 근거가 미약하다고 봅니다. 루벤스는 1606년 말 발리첼라 제단화 계약서에 서명하고 1607년 9월에 완성한 후 납품하려 했지만 거부당합니다. 제단화의 구성이 너무 단단해서 성화를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는 것과 제단부에 내려비치는 빛 때문에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죠. 루벤스는 다시 작업을 하는데 이때 어머니의 천식이 심해졌다는 형의 전갈을 받고 1608년 10월 제단화 공개도 못 보고 서둘러 로마를 떠나 고향 안트베르펜으로 갑니다.
 
  늑막염을 앓고 있어 건강이 안 좋고 경제사정도 어려웠던 그가 발리첼라 제단화에 대한 수령을 거부당한 후 재작업으로 분주한 가운데 잠시 한눈을 팔면서 당시로서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중국인은 제쳐놓고 유럽 전체에 겨우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조선인을 굳이 수소문해 안토니오를 찾아내 의관정제해서 초상소묘의 모델을 서 달라고 요청하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모델료를 지불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추론입니다. 루벤스가 이 소묘를 그린 시점을 1607~1608년으로 추정하는 것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소묘의 제작 시점을 1617년경으로 보는 학계의 일반적 견해와도 충돌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현재 게티미술관 측에서는 곽 교수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서 소묘의 주인공을 ‘조선 남자’라고 보는 반면 제작 시점이 10년 정도 앞당겨져야 한다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성두 박사의 이런 주장에 대해 곽차섭 교수는 “아직은 학술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보여서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면서 “노 박사는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것이 조선 방건과 철릭이 아니기 때문에 제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방건과 철릭이 어디 것인지를 밝혀야 하고 혹시 그것이 중국의 것이라면 그 시대 그와 유사한 모자와 옷을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곽 교수는 “그러한 증거가 없다면 여전히 제 견해는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라면서 “책에서도 밝혔듯이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제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있고 이번 논쟁이 건설적인 학문적 논쟁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곽차섭 교수는 2004년에 쓴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를 통해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들이 이탈리아 알비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통설을 반박하는 한편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각종 증거들을 제시했다.
  2004년에 곽차섭 교수의 《조선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라는 저술이 나왔고 지금은 루벤스 소묘 속 주인공을 놓고 두 학자 간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포털사이트 〈두산백과〉에서는 지금도 코레아 성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 이탈리아 남단 카탄차로시(市) 34km 떨어진 알비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한국계(系) 성씨.
 
  그 시조는 정유재란 때 끌려가 노예로 팔린 조선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해 진단학회의 《한국사》 제4권 〈근세 후기편〉은 〈세계를 일주하고 있던 이탈리아 전도사(사실은 무역상인) 카를레티는 일본에서 조선인 포로 5명을 노예로 사서 세례를 받게 한 뒤, 그중 1명을 1606년 피렌체로 데려가니, 이 소년은 그 뒤 로마에 정주(定住), 그곳에서 교회 일에 종사하여 안토니오 코레아로 불리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안토니오 코레아를 이탈리아로 데려간 카를레티도 1606년에 발행된 그의 여행기 《라조나멘티》에서 피렌체에 도착한 카를레티는 안토니오에게 ‘코레아’라는 성을 주고 곧 석방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후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여인과 결혼하여 조선의 지형과 기후가 비슷한 알비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탈리아 코레아 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코레아 마을로도 불리는 알비시에는 300여 명의 코레아 씨가 거주하고, 그 인근의 카탄차로·타베르나·마지사노·체르바·셀리아·세르잘헤·시메리크리키 등지에도 흩어져 살고 있으며, 로마에도 20명 이상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20여 명이 미국에 이민 갔고, 1950년경부터 40여 명이 미국·캐나다·라틴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하여, 이탈리아 코레아 씨는 아메리카 대륙에도 퍼져 있다. 알비시의 코레아 광장에는 태극 등의 한국적인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안토니오 코레아가 매장된 산타마리아 지하 묘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역시 한 번 만들어진 신화는 사실이든 허위든 내용의 보탬은 있어도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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