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情死는커녕 情事도 못해… 조선 사람의 同心情事는 못 믿어
⊙ 우리는 이 시련을 피 속까지 살 속까지 스며들도록 철저히 받자
⊙ 우리는 이 시련을 피 속까지 살 속까지 스며들도록 철저히 받자
《나도향 전집》(주종연·김상내·유남옥 엮음)은 1988년 집문당에서 상하 2권으로 출간됐다. 전체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스무 살에 문단에 나와 짧은 생애를 글로 완전 연소시켰다고 할까.
《월간조선》 7월호가 소개하는 〈경솔(輕率)〉과 〈생명을 실감(實感)하자〉,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단편소설을 번역한 〈추억(追憶)〉은 집문당판(版) 전집(全集)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이다.
〈경솔〉은 시인 김억(金億)이 발행한 잡지 《가면》 1926년 1월호에 실렸다. 1926년은 도향이 죽던 해다. 〈생명을 실감하자〉는 도향이 죽은 후 1928년 1월 일본 동경에서 창간된 《반도산업(半島産業)》에 실렸다. 이 잡지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이 편집·발행 겸 인쇄인이다. 동경 유학 시절, 나도향이 폐병으로 피를 쏟을 때 하숙방에서 함께 기거한 이가 바로 이태준. 이 두 개의 작품은 고(故) 하동호(河東鎬)씨가 1975년 발굴했음을 밝혀둔다.
모파상의 소설을 번역한 〈추억〉은 일부만 나도향 전집에 실렸다. 앞 부분이 낙장(落張)된 채 의미가 안 통하던 것을 새롭게 복원했다. 또 전집에는 원작이 모파상임을 밝히지 않아 창작인 것처럼 오해를 샀다.
3개의 작품을 현대 맞춤법과 띄어쓰기로 고쳤으나 글맛을 위해 일부는 그대로 살렸고 행 갈이도 원문을 따르지 않았다. 또 〈추억〉의 일부 묘사 부분은 지면 사정으로 생략했다.
경솔(輕率)
사람이란 무엇이든지 단정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본시 어떠한 반동(反動)으로 그리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끔 매년에 단정해 버리는 일이 있어 뒤에 스스로 후회하는 일이 있다.
작년 여름 일이다. 한강에 보트놀이를 하러 N과 함께 간 일이 있었다. 그 보트놀이는 내가 한참 즐기던 것으로 거의 날마다 가게 되었던 것인데 마침 하선구락부(貸船俱樂部)에를 들어서자니까, 나와 동창관계가 있는 P라는 구락부 주무자가 남자의 맥고모(麥藁帽) 하나와 여자의 분홍 마른 신 하나를 새끼로 얽으면서 “오늘 아침에 정사(情死)났네” 하는 말을 하였다.
정사란 비참한 사실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라. 나는 당장에 그 정황을 자세히 묻는 동시에 속으로는 또 일종의 조소를 아니 느끼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 당자가 나이 젊은 사람이요, 또 상대자가 기생이었다는데 나는 속으로 단정하기를 ‘정사가 무슨 정사랴. 부모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면 세상을 속이려는 얕은 꾀지’ 하였다.
더구나 그들을 실어다 준 사공의 말이 그들이 강 건너 고요한 곳을 찾아가며 어디로 가면 어디로 가고, 이리로 가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까지 묻더라는 것과 빠져 죽었다는 바위 위에 두 사람의 신발 남은 것을 그 뒤 사공이 다시 그들을 태우러 갔다가 발견하고 비로소 정사(情死)로 인정은 하나 아직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종합하고, 또 톨스토이의 ‘산송장’을 생각할 때 더구나 아직 캐러멜을 먹는 것 같이 달짝지근한 사탕 맛에 취한 그들이 무슨 정사(情死)를 하였으랴 하였다.
그뿐 아니라 어떤 친구의 말마따나 정사(情事)도 하지 못하는 것, 약기만 한 조선 사람의 동심정사(同心情事)라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하겠다.
나의 말에 같이 갔던 N도 동감이었다. 우리들은 장담(壯談)하고 그 남자는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우리에게는 그 남녀가 죽음이라는 마지막 비참한 길을 빚은 것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김은 고사하고 얕은 꾀로 세상을 속이려는 그들을 비웃었다. 오히려 괘씸하였다.
그날 저녁 신문에 그 사실이 보도되었다. 신문지는 비상한 동정을 그 두 사람에게 붙였다. 신문에 다소의 경험이 있는 나는 그 기사를 또 한번 조소하였다. 나는 그 신문기사가 너무 과장적임에 분개하고 스스로 신문지와 경쟁까지 하리라 하였다.
‘그 남녀는 언제든지 죽지 않고 있다가 발견될 때가 있을 터이라’고 굳세게 단언하였다.
‘시체는 떴네.’
나는 눈이 뚱그레졌다. 그것은 나의 눈이 뚱그레진 것이 아니라 나의 양심의 눈이 커진 것이다.
과연 둘의 시체는 떠올라왔다. 살았다고 단언하고 조소하고 괘씸히 여기던 두 청춘남녀의 애달픈 사랑의 승리는 나의 눈앞에 지긋지긋한 죽음으로 나타나서 영원히 말이 없으나, 나의 마음은 그들이 꾸짖는 것 같이 부끄러웠다.
살아 있는 사람이면 사과할 여지나 있겠으나 이것은 사과받을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 아까운 두 영(靈)을 생각할 때면 속으로 부끄럽다.
인생의 가장 큰 사실인 죽음을 그렇게 경솔(輕率)히 판단한 허물은 영원히 나의 양심의 가책(呵責)으로 남아 있어 가끔가끔 교훈을 준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가끔 단정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 버릇이 있을 적이면 나는 그 두 영(靈)을 생각한다.
(출처=《假面》 3호 1926년 1월호)
생명을 실감(實感)하자(수필)
사흘을 굶지 못한 사람이 어찌 자기 목구멍에 달려 있는 목숨이 귀한 줄을 알 수가 있으랴!
사람은 입으로는 목숨이 귀한 것 같이 말을 하면서 참으로 뼈와 피에 사무쳐 들도록 자기의 목숨이 귀한 것을 느끼지를 못하는 일이 많다. 그것을 알려면 죽을 뻔하여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밥도 굶어봐야 할 것이다.
조선은 부잣집 철모르는 자식처럼 배고픈 줄을 몰랐었다. 죽을 뻔한 일을 그리 많이 당해 보지 못하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집안이 거덜이 났다. 철모르는 자식은 그래도 ‘설마 밥 못 먹으랴?’ 하고 믿었다. 그러나 파산은 사실로 당하였다. 밥이 그의 입에 안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의 아들들아! 너희들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밥이 남은 줄 알고 꿈을 꾸고 있는 자가 많다. 오늘 저녁이 없을 것들이 과대망상에 취하여 가로 뛰고 세로 뛰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생명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그것을 실감하여 전 자아가 목구멍에 달린 것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 자의 장래는 비누로부터 남은 방울과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암담(暗澹)한 공동으로 물러가는 파멸(破滅)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황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 덩어리로 산다. 예수의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大意)는 말은 자연주의를 거쳐 현실폭로의 비애를 맛본 현대인에게는 거짓말이다. 착실한 현실에 꿈을 깬 사람에게는 잠꼬대만도 못하다.
조선 사람은 대체로 생명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또는 실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원간(不遠間) 그 시련을 받아 — 아니라, 벌써 받는 중이나 — 그것이 민족적 생존의 가장 의미 있고 가장 큰 경험을 이룰 줄 안다. 우리는 이 자기가 내버리고 잊어버리고도 거기에 끌리어 다니던 생명을 스스로 찾아내서 거기에 그것을 알며 또는 실감(實感)한 후에 비로소 참 생명이 있는 생활이 시작될 줄로 믿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시련의 과정에 있다. 속일 수 없는 것은 일의 순서와 도정이다. 우리는 이 시련을 피 속까지 살 속까지 스며들도록 받자. 철저하게 받자. 그래서 그만한 새 힘을 얻자. 조금도 비관할 것은 없다.
나는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조선의 흙을 모른다. 조선의 흙의 빛이 누른지 검은지를 모른다. 그 냄새 또한 모른다. 어떠한 냄새가 있는지 모른다. 더구나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은 더욱 모른다.
나는 조선의 산을 모른다. 어느 산에는 무슨 돌이 있고, 무슨 광물이 나고, 무슨 삼림이 있고 무슨 특산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을 더구나 숫자로 계산해서는 더욱 모른다.
나는 조선의 들을 모른다. 동해와 남해와 서해의 명물 특산을 모른다.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등에서 나는 것도 모르고 그 수세와 본질은 더욱 모른다. 통계상으로는 더욱 장님이다.
나는 조선을 모르는 셈이다. 조선인으로 조선을 모르면 부끄럽지 않고 무엇이냐? 그것이 나에 그친다면 그만큼 다행한 일이 없다. 그러나 아마 온 조선 사람이 거의 그러한 것 같다. 우리는 어서 조선을 알아야 하겠다.
어떤 일본인이 한번은 나에게 이야기하기를 조선 금강산(金剛山)에는 금이 묻혔는데 그것만 파면 2000만 인구가 70년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 사람아, 금강산에 금이 묻힌 것이나 알아두자. 딴 사람은 벌써 눈이 빨개서 들여다보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 남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도 없다. 조선의 산천이 자랑거리냐?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랑거리다. 조선의 역사가 자랑거리냐? 우리는 바이블을 잠깐 뒤져보자!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한 말이 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들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나니라’ 하였다. 그렇다. 지나간 과거에 우리는 우리의 자긍(自矜)을 붙일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재능이랴. 그것도 자랑이 될 것 같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의 노력이다. 재생(再生)의 낙원은 노력하는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거대한 투기를 꿈꾸는 사람보다도 하루갈이 밭을 가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알갱이의 벼알을 타작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랑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출처=《半島産業》 1928년 1월호)
추억(追憶)
보-펜산(모파상) 작(作)
나빈(羅彬) 역(譯)
젊었을 때의 그윽한 추억도, 최초 서광(曙光)의 애무(愛撫)도 그대로 그립게 내 머릿속에 다시 살아오는가?
그것은 모두 은혜롭게 유쾌하고 도취를 결인(結引)한 생애의 한 시(時)다.
여기에 지나간 옛 봄에 그리운 추억을 보기 좋게 써보려 한다.
제군(諸君)이여! 나의 오랜 벗이여, 동포여! 너희들의 생활은 화려한 승리와 기꺼운 웃음뿐이었다. 너희들은 환락의 그 시대를 추억하는 예가 있는가? 기억하고 있는가?
너희들은 파리의 주위를 방황하던 그날… 새로이 살아난 신록의 삼림(森林) 속을 산책하던 그날… 어디까지든지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세-인 하반(河畔)의 조그만 요릿집에서 푸른 공기에 취했으며 그러고는 또 야비하고도 달콤한 연애의 모험에 빠졌을 때 그날 일을 너희는 기억하는가?
나는 이와 같은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 한다.
그것도 생각하면 20년 전 일이다. 지금은 벌써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다.… 그래서 그 일도 지금에는 나의 생활의 닳은 끝(端)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인생의 꾸부러지는 산모롱이에서 보면… 아, 이 추악한 산모롱이에서 나는 기다란 길의 종국(終局)을 보고 있다. 그렇게까지 벌써 늙어버렸다.
그러나 그때에는 내가 아직 25세였다.
나는 파리에 있었다. 2관성(官省)에 고용되어 있어 1주일에 한번씩 오는 일요일이 나에게는 넘치는 듯한 행복에 가득한 특별한 제일(祭日)과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신통한 것도 없었다. 그때는 1주일에 한 번씩밖에 오지 않는 일요일이 아까워서 못 견뎌 했다. 아, 얼마나 즐거운 날이었던가. 그때의 일요일을 지금 하루라도 가질 수가 있었으면 육법(六法)을 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날 아침 나는 그렇게 자유스러운 새장을 벗어난 새와 같이 활활(活活) 한 기분인 것은 우리 같은 고용된 이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아침 일찍이 차로 속에서 벗어 나왔다. 활활 하고 휴식 가득한 고요하고 독립적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선 창엽호로 가까이 갔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일기(日氣)였다.
동네 집들 위에는 새파란 하늘이 걸려 있었고 햇볕은 아름답게 번뜩이고 제비들은 기껍게 날개를 치며 날아다니었다. 나는 얼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마음은 다만 삼림을 산책하며 나뭇잎의 그윽한 향을 마시고 싶은 희망으로 찼다. 그것은 내가 풀과 나무 사이에서 생육(生育)한 시골 사람인 까닭이다. (이하 중략)
나는 선교(船橋)에서 배가 떠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쪽 편의 제2철교 밑을 아주 적게 한 편의 연기를 토하고 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아주 크게 더욱 크게 점점 그것이 커다래졌다.
그러는 동안 배는 언덕에 닿았고 나는 배에 올랐다. 청명한 일요일을 향락하는 사람들로 배는 가득 찼다. 남 보기가 좋게 농후한 화장과 □□(판독 불가능-편집자주)하게 번뜩이는 번과 발그스름한 둥근 얼굴이 떼를 지어 섰다.
나는 선두(船頭)의 자리를 점하고 항구와 제방과 나무와 집과 다리가 점점 뒤로 달아나는 것을 서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내 물을 색한(塞限·가장자리에서 막고 있는-편집자주)하고 있는 폰 주주의 커다란 잔교(棧橋)가 보였다. 그것은 파리의 끝이다. 거기서부터 교외다. 그러면 두 줄기의 고교(孤橋) 배후로부터 세인하(河)는 넓은 폭을 벌려 사람들의 가슴을 풀어지게 하고 아주 시원한 기분을 일으킨다.
그런 동안에 또 어느 틈에 삼림 아래로 흘러, 전야(田野)의 중앙을 꿰뚫고, 나무들의 번성한 소구(小丘)의 기슭을 따라 야원(野原)을 지나서 점점 아름답고 온화하게 되어 휴정(休靜)하여진다.
그런즉 선원이 “밤 돈” 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다음에는 “세 불” 조금 더 가면 “센 그루”가 된다.
겨우 “센 그루”에 배가 닿았을 때 나는 육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조그만 시가(市街)를 통해 삼림(森林)으로 가는 도로를 걸어갔다.
나는 파리로 가는지, 그 조그마한 삼림으로 가는지를 틀리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근처 지도를 가지고 걸어갔다.
나무 그늘까지 왔을 때 가장 간단하고 속히 갈 수 있는 길을 알기 위해 나는 안내기를 펴보았다. 그래서 그쯤 해서 베르사유에 도착될 모양이었다.
밤에 거기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먹을 모양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또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한가슴 잔뜩 신아(新芽)와 수액(樹液)의 상쾌한 향기가 가득한 달콤한 공기를 마시면서 신록의 밑으로 걸어갔다.
쓸데없는 고서(古書)류의 일이라든가 관청 일이라든가 장관의 일이라든가 동료라든가 소송이라든가 이 모든 일은 다 잊어버리고 다만 미래의 전혀 미지인 세계로부터 무엇인지 이렇게 마음을 녹이는 듯한 행복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그리면서 자근자근 걸어가고 있었다.
(이하 중략)
나는 꼭 혼자 산보하기에 매우 심심함을 깨닫고 있었음으로 풀이 높다랗게 나 있는 가운데로 몸을 던져 뒹굴어보려 했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婦人)이 양산을 함부로 휘두르고 남자가 속옷을 하나도 안 입은 채로 웃옷은 팔에 걸은 채 매우 슬픈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른 그들에게로 가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빠른 걸음으로 내게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무엇에 분(憤)이 난 듯이 그렇지 않으면 비상(非常) 피곤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말씀 잠깐 여쭤볼게요. 여기를 어디라 하나요? 남편이 어디든지 다 안다고 고집을 세우더니 그만 길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여봅쇼. 이대로 똑바로 가면 센 그루로 나오고, 반대되는 길로 가면 베르사유가 나옵니다.”
그런즉, 그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참을 수 없이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무엇이요? 베르사유의 반대되는 길을 우리가 지금 걷고 있어요? 어쩌면 우리들은 마침 베르사유에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요!”
“그렇습니까. 나도 그렇게 하려 했는데.”
그런즉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그러세요? 어쩌면 그래요! 어쩌면 그래요, 남자들은 어쩌면 그래요! 여자만 보면 밀쳐버리는 태도도 맘대로 휘둘러서 못난이를 만드니까요. 이야말로….”
그 여자는 생기 있고 아직 나이 젊고 밤빛 머리털을 가진 미인이었다. 입술 뒤에 있는지 없는지 보일락말락 한 엷은 수염이 있다.
남편이란 자는 이마의 땀을 씻고 있었다. 생각건대 그들은 파리의 중류계급의 가정임이 틀림없었다. 남자는 매우 피곤하고 낙담하여 기막혀하듯 했다. 그러곤, “그러나 여보… 그것은 당신이…” 하고 입속으로 자기 부인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가로막듯, “내가? 무엇을 내가 그랬어요? 아, 이번에는 나로구려? 언제든지 고집만 부리고 아무 말도 없이 미리 정하지도 않고 나온 것이 나예요? 길을 너무 잘 안다고 장한 소리를 하더니 산허리 위를 바른편으로 자꾸 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나였어? 그리고 또 있지? 카슈-책임을 갖겠다 하고….”
이때 남편은 미친 듯이 이상한 기다랗게 부르짖는 소리를 하므로 그 여자는 말을 끊어버렸다.
그 부르짖는 소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입에 낼 수도 없다. 다만 찍찍찍 하는 소리와 같을 뿐이다.
젊은 여자도 거기에 조금도 놀란 빛이 없고 성내는 일도 없이 말을 계속했다.
“아뇨…. 세상에는 당신과 같이… 무엇이든지 안다, 안다 하고 그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요! 그리고 작년 하볼행 기차를 잘못 알고 됨프행 기차를 타고 간 것도 나지요, 네? 여보! 그리고 루도룬 씨를 마르틸 시에 산다고 주저 없이 단언한 것도 내가 그랬지…. 또 있지요! 세레스트가 도적놈이라고 믿지 않으려 한 것도 내가 그랬지요?”
그리고 그 여자는 또 무슨 말을 계속할 듯이 전신을 분노로 떨면서 의외의 모든 저주하는 말소리로 돌발적으로 보통 생활에 숨겨 있던 모든 불만과 분노로 그 남편의 행위와 사상과 태도의 노력과는.(문장이 끊어짐-편집자주)
“또다시 길을 잃거나 이런 쓸쓸한 삼림 속에서 밤을 새지 않으면 안 될 위험은 당하기 싫으니까요.”
나는 공경스럽게 몸을 굽혔다. 그런즉 그 여자는 내 팔목을 잡고 자기의 모든 일과 자기의 생활 모든 일과 가정의 모든 일, 장사의 모든 일을 시작해 웬만해서는 끝이 날 듯하지 않는 말을 했다. 그들은 센라살 시에서 장갑 장사를 했다.
그 여자의 남편은 그 곁을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칠 새 없이 때때 찍…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나중에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 없도록 몸을 파묻고, 그리고 그 신비적(神秘的)인 심처(深處)를 탐급(探及)한 듯이 보였다.
그리고 때때 기다랗고 예리한 조자(調子·톤)로 찍… 하고 부르짖었다. 나는 이 이상한 부르짖는 소리가 꼭 무슨 신경병으로 인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젊은 여자는 갑자기 내게 돌연 목소리 톤이 변한 채 말했다.
“여보세요. 만일 수고가 되지 않으시거든 어떻게 저하고 같이 가주실 수는 없는지요?”
이제는 우리들 시험(試驗)과 결혼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질매(叱罵)했다.
남편은 더듬더듬 아내를 극력 만류하려 애썼다.
“아니, 그러나 여보…. 그 그 그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양반 앞에서… 응…, 우스운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야…. 자… 그만둬… 이 양반에게는 조금도 재미있는 일이 아니야… 응? 그만둬요….”
그리고 슬픈 듯한 눈으로 풀이 무성한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으로 달아나 누구에든지 안 보였으면 바라듯이.
“왜 당신은 그런 소리를 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즉 그는 허둥지둥 기가 막힌 듯이
“이것은 나의 보이지 않게 된 귀여운 개요”라고 대답했다.
“무엇이요? 당신이 없이 한 개요?”(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한 마리 개요?-편집자주)
“예, 그렇소. 벌써 그런 지 1년이나 됩니다만 그놈(개를 말함)은 벌써 상점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바깥에 나간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삼림으로 산보하러 저기로 몰고 가주려고 항상 생각을 했어요.
그놈은 풀을 본 일도 없고 풀잎도 알지 못해요. 그리고 나중에는 미친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지독하게 짖으면서 삼림으로 달아난 뒤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이러한 추측을 할 수가 있지요. 즉 그놈은 철도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놈의 정기(正氣)가 되게 한 것이 틀림없지요. 아무리 불러도 도로(徒勞)였습니다.… 얼마를 지낼지라도 돌아오지 않아요. 그놈은 삼림 속에서 굶어 죽은 것이 틀림없어요.”
그런즉 젊은 여자는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설명했다.
“틀렸소! 한번 목도리를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아요! 우선 당신처럼 생긴 사람이 기른다는 것이 되지 않을 일이지요.”
그러자 남자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보! 그것은 당신이…”라고. 그 여자는 벌떡 서서 가만히 남편 눈을 들여다보며 당장에 그것을 뜯어버릴 듯한 어조로 수(數)를 알 수 없는 저주와 질매를 연발했다.
그동안 해가 아주 저물어버렸다. 석양에 시골을 덮고 있던 저녁 안개는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밤에 재이는 삼림을 싸고 돌아가는 쾌미(快美)하고 이상한 양기(凉氣)를 띠게 하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시상(詩想)이 끓어 올라왔다.
그런즉 돌연 젊은 남자는 우뚝 서서 급하게 체중을 탐색하면서,
“야! 큰일 났다! 큰일 날 일을….”
그 여자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어떻게 했어?”
“아니! 지금까지 팔뚝에 걸었던 옷이… 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갑을 잃어버린 걸! 돈이 들어 있는데!”
그런즉 그 여자는 또다시 비상(非常)히 화가 나서 눈이 빠질 듯한 회멸(灰滅)의 언사로,
“무엇? 또 이 모양일세. 왜 그렇게 정신이 없소? 왜 이렇게 못났소! 이런 허수아비하고 같이 살 수가 있나? 자, 자 어서 가서 찾아가지고 와요! 자! 애를 써서… 찾을 때까지 찾아보고 오세요! 나는 이 양반과 베르사유로 가서 기다릴 테니 나는 삼림 속에서 자기는 싫어요.”
그런즉 남편은 조용하게
“아, 다녀올 터이니, 찾아올 터이야. 그러나 어디서 만날까?”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남자는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듯한 눈을 사면으로 돌리면서 정성을 다해 땅위로 몸을 수그린 채 오던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쉴새없이 그 찍-하는 소리를 거푸 내면서 멀리 가버렸다.
그의 몸양이 아주 없어지기까지 웬만큼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림자가 보이고 그것이 점점 엷어지고 그리고 나중에는 저쪽 길 끝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의 그림자까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아직 안 된 것은 찍찍이 오래오래 밤 어둠이 점점 깊어질수록 예리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나는 행복으로 찼다. 쾌활한 보조로 박모(薄暮)의 정적에 잠기면서 나의 팔에 몸을 안기고 있는 알지 못하는 부인과 같이 걸어갔다. 나는 될 수 있는 데까지 고상(高尙)하고 염려(艶麗)하게 울리는 말소리를 들었으나 □□□다.(판독이 안 됨-편집자주) 그래서 도취(陶醉)한 중에도 조금은 오뇌(懊惱)하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갑자기 큰길이 나왔다. 오른쪽에 조그마한 골목이 보였는데, 아주 작은 동네였다. 한 남자가 지나가길래 “이 동네는 무슨 동네요?” 하고 물어본즉, “브지발이요” 했다.
나는 의심스러워 오히려 “뭐요? 브지발요?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즉, 그 남자는 괴아(怪訝)한 얼굴로 “참으로 그런데요”라 했다.
그런즉 그 여자는 광인처럼 웃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차를 빌려 베르사유로 가려는데 그 여자는,
“아니 그렇게 할 것이 없지요. 우스운 일이에요. 나는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관계치 않아요. 조금도 걱정은 없어요. 우리 남편은 그대로 내버려둬도 아무 일도 없어요. 자기가 좋을 대로 할 테니까. 내게는 이렇게 두세 시간일지라도 기를 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시내의 어느 카페에 들어가 특별히 조그마한 방을 빌리기로 정했다. 그 여자는 조금 술에 취해 엷게 불그레해졌다. 나는 참으로 마음이 상쾌해져서 노래를 부르고 떠들기도 하고 모든 광대를 연(演)했다. …그 여자도 지지 않고 날뛰고 모든 유쾌를 지었다. …모든 쾌락 가운데서 가장 좋은 행위까지도….
그래서 이야기는 이것뿐이오.
이것이 나의 최초의 간통(姦通)한 기억이요!⊙
(출처=《신민공론(新民公論)》 1922년 12월호)
《월간조선》 7월호가 소개하는 〈경솔(輕率)〉과 〈생명을 실감(實感)하자〉,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단편소설을 번역한 〈추억(追憶)〉은 집문당판(版) 전집(全集)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이다.
〈경솔〉은 시인 김억(金億)이 발행한 잡지 《가면》 1926년 1월호에 실렸다. 1926년은 도향이 죽던 해다. 〈생명을 실감하자〉는 도향이 죽은 후 1928년 1월 일본 동경에서 창간된 《반도산업(半島産業)》에 실렸다. 이 잡지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이 편집·발행 겸 인쇄인이다. 동경 유학 시절, 나도향이 폐병으로 피를 쏟을 때 하숙방에서 함께 기거한 이가 바로 이태준. 이 두 개의 작품은 고(故) 하동호(河東鎬)씨가 1975년 발굴했음을 밝혀둔다.
모파상의 소설을 번역한 〈추억〉은 일부만 나도향 전집에 실렸다. 앞 부분이 낙장(落張)된 채 의미가 안 통하던 것을 새롭게 복원했다. 또 전집에는 원작이 모파상임을 밝히지 않아 창작인 것처럼 오해를 샀다.
3개의 작품을 현대 맞춤법과 띄어쓰기로 고쳤으나 글맛을 위해 일부는 그대로 살렸고 행 갈이도 원문을 따르지 않았다. 또 〈추억〉의 일부 묘사 부분은 지면 사정으로 생략했다.
경솔(輕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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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간행된 《나도향 전집》. |
작년 여름 일이다. 한강에 보트놀이를 하러 N과 함께 간 일이 있었다. 그 보트놀이는 내가 한참 즐기던 것으로 거의 날마다 가게 되었던 것인데 마침 하선구락부(貸船俱樂部)에를 들어서자니까, 나와 동창관계가 있는 P라는 구락부 주무자가 남자의 맥고모(麥藁帽) 하나와 여자의 분홍 마른 신 하나를 새끼로 얽으면서 “오늘 아침에 정사(情死)났네” 하는 말을 하였다.
정사란 비참한 사실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라. 나는 당장에 그 정황을 자세히 묻는 동시에 속으로는 또 일종의 조소를 아니 느끼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 당자가 나이 젊은 사람이요, 또 상대자가 기생이었다는데 나는 속으로 단정하기를 ‘정사가 무슨 정사랴. 부모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면 세상을 속이려는 얕은 꾀지’ 하였다.
더구나 그들을 실어다 준 사공의 말이 그들이 강 건너 고요한 곳을 찾아가며 어디로 가면 어디로 가고, 이리로 가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까지 묻더라는 것과 빠져 죽었다는 바위 위에 두 사람의 신발 남은 것을 그 뒤 사공이 다시 그들을 태우러 갔다가 발견하고 비로소 정사(情死)로 인정은 하나 아직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종합하고, 또 톨스토이의 ‘산송장’을 생각할 때 더구나 아직 캐러멜을 먹는 것 같이 달짝지근한 사탕 맛에 취한 그들이 무슨 정사(情死)를 하였으랴 하였다.
그뿐 아니라 어떤 친구의 말마따나 정사(情事)도 하지 못하는 것, 약기만 한 조선 사람의 동심정사(同心情事)라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하겠다.
나의 말에 같이 갔던 N도 동감이었다. 우리들은 장담(壯談)하고 그 남자는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우리에게는 그 남녀가 죽음이라는 마지막 비참한 길을 빚은 것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김은 고사하고 얕은 꾀로 세상을 속이려는 그들을 비웃었다. 오히려 괘씸하였다.
그날 저녁 신문에 그 사실이 보도되었다. 신문지는 비상한 동정을 그 두 사람에게 붙였다. 신문에 다소의 경험이 있는 나는 그 기사를 또 한번 조소하였다. 나는 그 신문기사가 너무 과장적임에 분개하고 스스로 신문지와 경쟁까지 하리라 하였다.
‘그 남녀는 언제든지 죽지 않고 있다가 발견될 때가 있을 터이라’고 굳세게 단언하였다.
‘시체는 떴네.’
나는 눈이 뚱그레졌다. 그것은 나의 눈이 뚱그레진 것이 아니라 나의 양심의 눈이 커진 것이다.
과연 둘의 시체는 떠올라왔다. 살았다고 단언하고 조소하고 괘씸히 여기던 두 청춘남녀의 애달픈 사랑의 승리는 나의 눈앞에 지긋지긋한 죽음으로 나타나서 영원히 말이 없으나, 나의 마음은 그들이 꾸짖는 것 같이 부끄러웠다.
살아 있는 사람이면 사과할 여지나 있겠으나 이것은 사과받을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 아까운 두 영(靈)을 생각할 때면 속으로 부끄럽다.
인생의 가장 큰 사실인 죽음을 그렇게 경솔(輕率)히 판단한 허물은 영원히 나의 양심의 가책(呵責)으로 남아 있어 가끔가끔 교훈을 준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가끔 단정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 버릇이 있을 적이면 나는 그 두 영(靈)을 생각한다.
(출처=《假面》 3호 1926년 1월호)
생명을 실감(實感)하자(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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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희 감독이 1966년 영화화한 나도향의 〈물레방아〉. |
사람은 입으로는 목숨이 귀한 것 같이 말을 하면서 참으로 뼈와 피에 사무쳐 들도록 자기의 목숨이 귀한 것을 느끼지를 못하는 일이 많다. 그것을 알려면 죽을 뻔하여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밥도 굶어봐야 할 것이다.
조선은 부잣집 철모르는 자식처럼 배고픈 줄을 몰랐었다. 죽을 뻔한 일을 그리 많이 당해 보지 못하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집안이 거덜이 났다. 철모르는 자식은 그래도 ‘설마 밥 못 먹으랴?’ 하고 믿었다. 그러나 파산은 사실로 당하였다. 밥이 그의 입에 안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의 아들들아! 너희들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밥이 남은 줄 알고 꿈을 꾸고 있는 자가 많다. 오늘 저녁이 없을 것들이 과대망상에 취하여 가로 뛰고 세로 뛰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생명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그것을 실감하여 전 자아가 목구멍에 달린 것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 자의 장래는 비누로부터 남은 방울과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암담(暗澹)한 공동으로 물러가는 파멸(破滅)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황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 덩어리로 산다. 예수의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大意)는 말은 자연주의를 거쳐 현실폭로의 비애를 맛본 현대인에게는 거짓말이다. 착실한 현실에 꿈을 깬 사람에게는 잠꼬대만도 못하다.
조선 사람은 대체로 생명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또는 실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원간(不遠間) 그 시련을 받아 — 아니라, 벌써 받는 중이나 — 그것이 민족적 생존의 가장 의미 있고 가장 큰 경험을 이룰 줄 안다. 우리는 이 자기가 내버리고 잊어버리고도 거기에 끌리어 다니던 생명을 스스로 찾아내서 거기에 그것을 알며 또는 실감(實感)한 후에 비로소 참 생명이 있는 생활이 시작될 줄로 믿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시련의 과정에 있다. 속일 수 없는 것은 일의 순서와 도정이다. 우리는 이 시련을 피 속까지 살 속까지 스며들도록 받자. 철저하게 받자. 그래서 그만한 새 힘을 얻자. 조금도 비관할 것은 없다.
나는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조선의 흙을 모른다. 조선의 흙의 빛이 누른지 검은지를 모른다. 그 냄새 또한 모른다. 어떠한 냄새가 있는지 모른다. 더구나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은 더욱 모른다.
나는 조선의 산을 모른다. 어느 산에는 무슨 돌이 있고, 무슨 광물이 나고, 무슨 삼림이 있고 무슨 특산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을 더구나 숫자로 계산해서는 더욱 모른다.
나는 조선의 들을 모른다. 동해와 남해와 서해의 명물 특산을 모른다.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등에서 나는 것도 모르고 그 수세와 본질은 더욱 모른다. 통계상으로는 더욱 장님이다.
나는 조선을 모르는 셈이다. 조선인으로 조선을 모르면 부끄럽지 않고 무엇이냐? 그것이 나에 그친다면 그만큼 다행한 일이 없다. 그러나 아마 온 조선 사람이 거의 그러한 것 같다. 우리는 어서 조선을 알아야 하겠다.
어떤 일본인이 한번은 나에게 이야기하기를 조선 금강산(金剛山)에는 금이 묻혔는데 그것만 파면 2000만 인구가 70년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 사람아, 금강산에 금이 묻힌 것이나 알아두자. 딴 사람은 벌써 눈이 빨개서 들여다보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 남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도 없다. 조선의 산천이 자랑거리냐?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랑거리다. 조선의 역사가 자랑거리냐? 우리는 바이블을 잠깐 뒤져보자!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한 말이 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들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나니라’ 하였다. 그렇다. 지나간 과거에 우리는 우리의 자긍(自矜)을 붙일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재능이랴. 그것도 자랑이 될 것 같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의 노력이다. 재생(再生)의 낙원은 노력하는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거대한 투기를 꿈꾸는 사람보다도 하루갈이 밭을 가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알갱이의 벼알을 타작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랑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출처=《半島産業》 1928년 1월호)
추억(追憶)
보-펜산(모파상) 작(作)
나빈(羅彬) 역(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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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공론(新民公論)》 1922년 12월호에 실린 나도향의 〈추억〉 첫 장. 이 소설은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썼다. |
그것은 모두 은혜롭게 유쾌하고 도취를 결인(結引)한 생애의 한 시(時)다.
여기에 지나간 옛 봄에 그리운 추억을 보기 좋게 써보려 한다.
제군(諸君)이여! 나의 오랜 벗이여, 동포여! 너희들의 생활은 화려한 승리와 기꺼운 웃음뿐이었다. 너희들은 환락의 그 시대를 추억하는 예가 있는가? 기억하고 있는가?
너희들은 파리의 주위를 방황하던 그날… 새로이 살아난 신록의 삼림(森林) 속을 산책하던 그날… 어디까지든지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세-인 하반(河畔)의 조그만 요릿집에서 푸른 공기에 취했으며 그러고는 또 야비하고도 달콤한 연애의 모험에 빠졌을 때 그날 일을 너희는 기억하는가?
나는 이와 같은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 한다.
그것도 생각하면 20년 전 일이다. 지금은 벌써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다.… 그래서 그 일도 지금에는 나의 생활의 닳은 끝(端)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인생의 꾸부러지는 산모롱이에서 보면… 아, 이 추악한 산모롱이에서 나는 기다란 길의 종국(終局)을 보고 있다. 그렇게까지 벌써 늙어버렸다.
그러나 그때에는 내가 아직 25세였다.
나는 파리에 있었다. 2관성(官省)에 고용되어 있어 1주일에 한번씩 오는 일요일이 나에게는 넘치는 듯한 행복에 가득한 특별한 제일(祭日)과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신통한 것도 없었다. 그때는 1주일에 한 번씩밖에 오지 않는 일요일이 아까워서 못 견뎌 했다. 아, 얼마나 즐거운 날이었던가. 그때의 일요일을 지금 하루라도 가질 수가 있었으면 육법(六法)을 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날 아침 나는 그렇게 자유스러운 새장을 벗어난 새와 같이 활활(活活) 한 기분인 것은 우리 같은 고용된 이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아침 일찍이 차로 속에서 벗어 나왔다. 활활 하고 휴식 가득한 고요하고 독립적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선 창엽호로 가까이 갔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일기(日氣)였다.
동네 집들 위에는 새파란 하늘이 걸려 있었고 햇볕은 아름답게 번뜩이고 제비들은 기껍게 날개를 치며 날아다니었다. 나는 얼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마음은 다만 삼림을 산책하며 나뭇잎의 그윽한 향을 마시고 싶은 희망으로 찼다. 그것은 내가 풀과 나무 사이에서 생육(生育)한 시골 사람인 까닭이다. (이하 중략)
나는 선교(船橋)에서 배가 떠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쪽 편의 제2철교 밑을 아주 적게 한 편의 연기를 토하고 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아주 크게 더욱 크게 점점 그것이 커다래졌다.
그러는 동안 배는 언덕에 닿았고 나는 배에 올랐다. 청명한 일요일을 향락하는 사람들로 배는 가득 찼다. 남 보기가 좋게 농후한 화장과 □□(판독 불가능-편집자주)하게 번뜩이는 번과 발그스름한 둥근 얼굴이 떼를 지어 섰다.
나는 선두(船頭)의 자리를 점하고 항구와 제방과 나무와 집과 다리가 점점 뒤로 달아나는 것을 서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내 물을 색한(塞限·가장자리에서 막고 있는-편집자주)하고 있는 폰 주주의 커다란 잔교(棧橋)가 보였다. 그것은 파리의 끝이다. 거기서부터 교외다. 그러면 두 줄기의 고교(孤橋) 배후로부터 세인하(河)는 넓은 폭을 벌려 사람들의 가슴을 풀어지게 하고 아주 시원한 기분을 일으킨다.
그런 동안에 또 어느 틈에 삼림 아래로 흘러, 전야(田野)의 중앙을 꿰뚫고, 나무들의 번성한 소구(小丘)의 기슭을 따라 야원(野原)을 지나서 점점 아름답고 온화하게 되어 휴정(休靜)하여진다.
그런즉 선원이 “밤 돈” 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다음에는 “세 불” 조금 더 가면 “센 그루”가 된다.
겨우 “센 그루”에 배가 닿았을 때 나는 육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조그만 시가(市街)를 통해 삼림(森林)으로 가는 도로를 걸어갔다.
나는 파리로 가는지, 그 조그마한 삼림으로 가는지를 틀리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근처 지도를 가지고 걸어갔다.
나무 그늘까지 왔을 때 가장 간단하고 속히 갈 수 있는 길을 알기 위해 나는 안내기를 펴보았다. 그래서 그쯤 해서 베르사유에 도착될 모양이었다.
밤에 거기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먹을 모양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또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한가슴 잔뜩 신아(新芽)와 수액(樹液)의 상쾌한 향기가 가득한 달콤한 공기를 마시면서 신록의 밑으로 걸어갔다.
쓸데없는 고서(古書)류의 일이라든가 관청 일이라든가 장관의 일이라든가 동료라든가 소송이라든가 이 모든 일은 다 잊어버리고 다만 미래의 전혀 미지인 세계로부터 무엇인지 이렇게 마음을 녹이는 듯한 행복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그리면서 자근자근 걸어가고 있었다.
(이하 중략)
나는 꼭 혼자 산보하기에 매우 심심함을 깨닫고 있었음으로 풀이 높다랗게 나 있는 가운데로 몸을 던져 뒹굴어보려 했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婦人)이 양산을 함부로 휘두르고 남자가 속옷을 하나도 안 입은 채로 웃옷은 팔에 걸은 채 매우 슬픈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른 그들에게로 가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빠른 걸음으로 내게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무엇에 분(憤)이 난 듯이 그렇지 않으면 비상(非常) 피곤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말씀 잠깐 여쭤볼게요. 여기를 어디라 하나요? 남편이 어디든지 다 안다고 고집을 세우더니 그만 길을 잃어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여봅쇼. 이대로 똑바로 가면 센 그루로 나오고, 반대되는 길로 가면 베르사유가 나옵니다.”
그런즉, 그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참을 수 없이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무엇이요? 베르사유의 반대되는 길을 우리가 지금 걷고 있어요? 어쩌면 우리들은 마침 베르사유에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요!”
“그렇습니까. 나도 그렇게 하려 했는데.”
그런즉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그러세요? 어쩌면 그래요! 어쩌면 그래요, 남자들은 어쩌면 그래요! 여자만 보면 밀쳐버리는 태도도 맘대로 휘둘러서 못난이를 만드니까요. 이야말로….”
그 여자는 생기 있고 아직 나이 젊고 밤빛 머리털을 가진 미인이었다. 입술 뒤에 있는지 없는지 보일락말락 한 엷은 수염이 있다.
남편이란 자는 이마의 땀을 씻고 있었다. 생각건대 그들은 파리의 중류계급의 가정임이 틀림없었다. 남자는 매우 피곤하고 낙담하여 기막혀하듯 했다. 그러곤, “그러나 여보… 그것은 당신이…” 하고 입속으로 자기 부인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가로막듯, “내가? 무엇을 내가 그랬어요? 아, 이번에는 나로구려? 언제든지 고집만 부리고 아무 말도 없이 미리 정하지도 않고 나온 것이 나예요? 길을 너무 잘 안다고 장한 소리를 하더니 산허리 위를 바른편으로 자꾸 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나였어? 그리고 또 있지? 카슈-책임을 갖겠다 하고….”
이때 남편은 미친 듯이 이상한 기다랗게 부르짖는 소리를 하므로 그 여자는 말을 끊어버렸다.
그 부르짖는 소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입에 낼 수도 없다. 다만 찍찍찍 하는 소리와 같을 뿐이다.
젊은 여자도 거기에 조금도 놀란 빛이 없고 성내는 일도 없이 말을 계속했다.
“아뇨…. 세상에는 당신과 같이… 무엇이든지 안다, 안다 하고 그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요! 그리고 작년 하볼행 기차를 잘못 알고 됨프행 기차를 타고 간 것도 나지요, 네? 여보! 그리고 루도룬 씨를 마르틸 시에 산다고 주저 없이 단언한 것도 내가 그랬지…. 또 있지요! 세레스트가 도적놈이라고 믿지 않으려 한 것도 내가 그랬지요?”
그리고 그 여자는 또 무슨 말을 계속할 듯이 전신을 분노로 떨면서 의외의 모든 저주하는 말소리로 돌발적으로 보통 생활에 숨겨 있던 모든 불만과 분노로 그 남편의 행위와 사상과 태도의 노력과는.(문장이 끊어짐-편집자주)
“또다시 길을 잃거나 이런 쓸쓸한 삼림 속에서 밤을 새지 않으면 안 될 위험은 당하기 싫으니까요.”
나는 공경스럽게 몸을 굽혔다. 그런즉 그 여자는 내 팔목을 잡고 자기의 모든 일과 자기의 생활 모든 일과 가정의 모든 일, 장사의 모든 일을 시작해 웬만해서는 끝이 날 듯하지 않는 말을 했다. 그들은 센라살 시에서 장갑 장사를 했다.
그 여자의 남편은 그 곁을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칠 새 없이 때때 찍…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나중에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 없도록 몸을 파묻고, 그리고 그 신비적(神秘的)인 심처(深處)를 탐급(探及)한 듯이 보였다.
그리고 때때 기다랗고 예리한 조자(調子·톤)로 찍… 하고 부르짖었다. 나는 이 이상한 부르짖는 소리가 꼭 무슨 신경병으로 인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젊은 여자는 갑자기 내게 돌연 목소리 톤이 변한 채 말했다.
“여보세요. 만일 수고가 되지 않으시거든 어떻게 저하고 같이 가주실 수는 없는지요?”
이제는 우리들 시험(試驗)과 결혼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질매(叱罵)했다.
남편은 더듬더듬 아내를 극력 만류하려 애썼다.
“아니, 그러나 여보…. 그 그 그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양반 앞에서… 응…, 우스운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야…. 자… 그만둬… 이 양반에게는 조금도 재미있는 일이 아니야… 응? 그만둬요….”
그리고 슬픈 듯한 눈으로 풀이 무성한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으로 달아나 누구에든지 안 보였으면 바라듯이.
“왜 당신은 그런 소리를 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즉 그는 허둥지둥 기가 막힌 듯이
“이것은 나의 보이지 않게 된 귀여운 개요”라고 대답했다.
“무엇이요? 당신이 없이 한 개요?”(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한 마리 개요?-편집자주)
“예, 그렇소. 벌써 그런 지 1년이나 됩니다만 그놈(개를 말함)은 벌써 상점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바깥에 나간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삼림으로 산보하러 저기로 몰고 가주려고 항상 생각을 했어요.
그놈은 풀을 본 일도 없고 풀잎도 알지 못해요. 그리고 나중에는 미친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지독하게 짖으면서 삼림으로 달아난 뒤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이러한 추측을 할 수가 있지요. 즉 그놈은 철도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놈의 정기(正氣)가 되게 한 것이 틀림없지요. 아무리 불러도 도로(徒勞)였습니다.… 얼마를 지낼지라도 돌아오지 않아요. 그놈은 삼림 속에서 굶어 죽은 것이 틀림없어요.”
그런즉 젊은 여자는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설명했다.
“틀렸소! 한번 목도리를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아요! 우선 당신처럼 생긴 사람이 기른다는 것이 되지 않을 일이지요.”
그러자 남자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보! 그것은 당신이…”라고. 그 여자는 벌떡 서서 가만히 남편 눈을 들여다보며 당장에 그것을 뜯어버릴 듯한 어조로 수(數)를 알 수 없는 저주와 질매를 연발했다.
그동안 해가 아주 저물어버렸다. 석양에 시골을 덮고 있던 저녁 안개는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밤에 재이는 삼림을 싸고 돌아가는 쾌미(快美)하고 이상한 양기(凉氣)를 띠게 하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시상(詩想)이 끓어 올라왔다.
그런즉 돌연 젊은 남자는 우뚝 서서 급하게 체중을 탐색하면서,
“야! 큰일 났다! 큰일 날 일을….”
그 여자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어떻게 했어?”
“아니! 지금까지 팔뚝에 걸었던 옷이… 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갑을 잃어버린 걸! 돈이 들어 있는데!”
그런즉 그 여자는 또다시 비상(非常)히 화가 나서 눈이 빠질 듯한 회멸(灰滅)의 언사로,
“무엇? 또 이 모양일세. 왜 그렇게 정신이 없소? 왜 이렇게 못났소! 이런 허수아비하고 같이 살 수가 있나? 자, 자 어서 가서 찾아가지고 와요! 자! 애를 써서… 찾을 때까지 찾아보고 오세요! 나는 이 양반과 베르사유로 가서 기다릴 테니 나는 삼림 속에서 자기는 싫어요.”
그런즉 남편은 조용하게
“아, 다녀올 터이니, 찾아올 터이야. 그러나 어디서 만날까?”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남자는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듯한 눈을 사면으로 돌리면서 정성을 다해 땅위로 몸을 수그린 채 오던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쉴새없이 그 찍-하는 소리를 거푸 내면서 멀리 가버렸다.
그의 몸양이 아주 없어지기까지 웬만큼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림자가 보이고 그것이 점점 엷어지고 그리고 나중에는 저쪽 길 끝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의 그림자까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아직 안 된 것은 찍찍이 오래오래 밤 어둠이 점점 깊어질수록 예리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나는 행복으로 찼다. 쾌활한 보조로 박모(薄暮)의 정적에 잠기면서 나의 팔에 몸을 안기고 있는 알지 못하는 부인과 같이 걸어갔다. 나는 될 수 있는 데까지 고상(高尙)하고 염려(艶麗)하게 울리는 말소리를 들었으나 □□□다.(판독이 안 됨-편집자주) 그래서 도취(陶醉)한 중에도 조금은 오뇌(懊惱)하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갑자기 큰길이 나왔다. 오른쪽에 조그마한 골목이 보였는데, 아주 작은 동네였다. 한 남자가 지나가길래 “이 동네는 무슨 동네요?” 하고 물어본즉, “브지발이요” 했다.
나는 의심스러워 오히려 “뭐요? 브지발요?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즉, 그 남자는 괴아(怪訝)한 얼굴로 “참으로 그런데요”라 했다.
그런즉 그 여자는 광인처럼 웃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차를 빌려 베르사유로 가려는데 그 여자는,
“아니 그렇게 할 것이 없지요. 우스운 일이에요. 나는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관계치 않아요. 조금도 걱정은 없어요. 우리 남편은 그대로 내버려둬도 아무 일도 없어요. 자기가 좋을 대로 할 테니까. 내게는 이렇게 두세 시간일지라도 기를 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시내의 어느 카페에 들어가 특별히 조그마한 방을 빌리기로 정했다. 그 여자는 조금 술에 취해 엷게 불그레해졌다. 나는 참으로 마음이 상쾌해져서 노래를 부르고 떠들기도 하고 모든 광대를 연(演)했다. …그 여자도 지지 않고 날뛰고 모든 유쾌를 지었다. …모든 쾌락 가운데서 가장 좋은 행위까지도….
그래서 이야기는 이것뿐이오.
이것이 나의 최초의 간통(姦通)한 기억이요!⊙
(출처=《신민공론(新民公論)》 1922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