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경의 컬처토크 ⑫ ‘이건희 시대’에 대한 애수 : 월간조선

1995년, 기자 연수를 위해 짐꾸러미를 들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공항 밖 시내 초입에 서 있는 대형 광고판의 삼성 카메라 광고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국 내에서 보는 삼성과 외국에서 보는 삼성에 대한 이미지는 달랐다. 마치 오지에서 가족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살 곳을 찾으러 월세 아파트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더 놀랐던 것은 어느 집이든 마이크로웨이브는 거의 다 삼성 제품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지 부동산 중개인은 삼성 제품을 ‘쌤성’이라고 발음했는데, ‘쌤성’이 한국 제품인지, 일본 제품인지 헷갈려하면서도 제품에 대한 신뢰도는 으뜸으로 쳤다.

이런 경험은 그 이후 죽 이어졌다. 2002년 월드컵 예선경기 취재차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의 상위 1%에 속하는 부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의 목에는 삼성 휴대폰이 목걸이처럼 걸려 있었다. 당시 카메라가 장착돼 한국돈 100만원을 넘는 삼성 휴대폰은 중국 신흥 부자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must have item)’이었다. 얼마 전 동유럽을 여행할 때도 어김없이 삼성 제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유로 커뮤니티에 포함되지 않은 체코의 시골에도 삼성 컴퓨터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체코의 시골에서 만난 삼성 제품은 사실 경이롭기까지 했다.

내가 눈으로 본 실제 상황만 종합해 봐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는 몰라도 삼성이라는 회사의 전자제품을 아는 세계인이 훨씬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말 미국 경제지 《포브스》 발표에 따르면 삼성은 전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브랜드 9위(브랜드 가치 295억 달러, 약 31조원)에 자리매김됐는데, 한국 기업이 이런 위상을 차지한 것은 자랑스러운 결과임이 분명하다. 삼성은 그래서 기업브랜드가 아니라 국가브랜드라는 말이 나온다.

세계적으로 국가의 지명도를 앞선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분단된 휴전국이라는 불안정한 체제 속에서 이런 기업이 나온다는 것은 정부로 봐서도 사실 고마운 존재임이 분명할 것이다.

삼성의 기업문화 지침

1993년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선언을 통해 삼성의 체질을 개혁했다.

이런 삼성이 요즘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룹 재편 작업을 통해 3세 경영 승계가 사실상 마무리돼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의 3세 경영 체제에 대한 관심은 사실 1996년 장남인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3자 배정을 통해 삼성그룹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 1999년 이건희 회장이 폐암 수술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 왔다. 큰 수술을 받은 이후 이건희 회장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해외 체류 기간이 길어지고 있으며, 가끔씩 TV 뉴스에 비치는 모습도 나날이 거동이 편치 않아 보인다.

이 회장의 쇠약한 모습과 장성해 이제 3세대 경영자로 부각되고 있는 세 자녀의 모습이 겹치면서 또 한 거인의 시대가 끝나 가고 있다는 애상에 젖게 된다.

이 회장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가 전세계 갑부 몇 위에 드는 재벌 회장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평생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이 일을 업을 삼아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경영자적 철학이 확고한 이 회장은 늘 달라 보였다. 영웅이 없는 이 시대에 그만큼 한마디 말로 사회적 어젠다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대의 흐름을 짚어 가며 삼성의 수장으로서 한 말들은 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넓은 세상을 보고 공부한 끝에 내놓는 촌철살인의 화두는 사회적 성공을 고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자극이 되기도 했다. 그의 어록을 책으로 펴낸 출판사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영향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의 말에 힘이 실리는 것은 바로 실천력 때문이다. 그는 화두대로 삼성을 바꾸고 키워 갔다.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의 삼성은 한국의 재벌 중 한 곳이었을 뿐 글로벌한 범주로의 확장은 꿈도 못 꾸는 사이즈였다. 이 회장이 선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아 키운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중공업 등 계열사들은 세계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1세대 삼성그룹의 중심인 삼성물산은 창업주 이병철 선대 회장이 세운 회사이다. 2세대 삼성그룹의 중심은 삼성전자와 반도체이다. 이 사업은 이 회장이 부회장이던 시절인 1974년 한국반도체를 자신의 사재로 인수하면서 시작한 기업으로 오늘의 삼성을 이끈 주역이다. ‘100배 이상 키울 수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겠다’던 이병철 선대 회장의 소망을 그 이상 이룬 것이다. 오늘날의 삼성을 키워 낸 이 회장이 2세 경영인 중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지나친 칭송이 아닐 것이다.

이 회장의 어록과 발자취를 보면, 그는 일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갖추게 하는 데 어떤 기업주보다 많은 노력을 들였다. 이런 삼성문화 속에 사원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에너지를 응집시켰고, 전통을 만들어 갔다. 또 ‘문화적 기업’이라는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심어 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계적 기업이 된 것은 이런 문화적 가치가 더해지면서 최고의 기술력과, 흠결 없이 마무리한 디자인의 수려한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회장의 어록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계기는 아마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때부터였을 것이다. 삼성회장 취임 5주년을 맞은 그는 “변하는 것이 일류로 가는 기초이다. 앞으로 5년이면 회장 취임 10년인데, 10년 해서 안 된다면 내가 그만두겠다. 자기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누라하고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고 지시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 말은 삼성 내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고는 돌아와 같은 해 ‘삼성헌법’을 직접 공표했다. ‘헌법’이라는 말로 삼성이 존속하는 한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기업문화 지침서를 세운 것이다. 그 전까지 삼성은 기술과 인재와 자율경영 3원칙을 기업이념으로 표방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세계 일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4개 항목으로 구성된 ‘삼성헌법’에 담긴 메시지는 구속적이라기보다는 교훈에 가까운 내용들이었다. 첫째는 조직원 간의 인간미를 강조했다. 그는 상사는 직장의 부모가 돼야 하기 때문에 잘못은 반드시 고쳐 주고 희로애락을 같이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도덕성 회복 문제이다. 도덕은 인간의 기본적 양심이며, 과자 한 봉지를 팔아도 ‘잘 먹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야 도덕적이며, 이 마음에서 좋은 물건이 생산되는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는 예의범절 회복 문제였다. 예의가 바르면 주변이 유쾌해지며 본인과 주위, 회사도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네 번째는 국제 상거래에서의 에티켓 준수를 꼽았다. 그는 인간미와 도덕성이 결여된 조직은 결코 일류기업이 될 수 없다며,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조직이라야 영원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 회장의 신념이 삼성을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삼성헌법’의 4개 항목은 지금까지도 삼성맨이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럼 삼성은 이걸 다 지켰느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어느 조직에든 이런 문화가 적용된다면 일할 맛 나는 곳이 될 것 같다.

기업의 미래 영속성이 중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

조직문화에 대한 그의 지시 중 또 다른 유명한 말들이 있다. 우선 ‘뒷다리론’이다. 개인과 집단이기주의로 잘나가는 사람을 잡지 말라는 것이다.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은 조직원 중 20%이며, 나머지 80%는 묻어 가는 사람이니 뒷다리라도 잡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또 ‘메기론’도 유명한 말이다. 메기와 함께 있는 미꾸라지가 살기 위해 더 튼튼해지듯 적절한 자극과 위기의식이 회사의 성장을 유도한다는 이야기다.

이 밖에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부자 옆에 줄을 서라. 산삼밭에 가야 산삼을 캘 수 있다.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하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돼 있다. ▲자꾸 막히는 것은 우선멈춤 신호이다. 멈춘 다음 정비하고 출발하라. ▲들어온 떡만 먹으려 하지 말라. 떡이 없을 땐 나가서 떡을 만들라. ▲깨진 독에 물 붓지 말라. 새는 구멍을 막은 다음 물을 부어라. ▲검약에 앞장서라. 약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검약이다. ▲장사꾼이 되지 마라. 경영자가 되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부정보다 더 파렴치한 것이 사람을 망치는 일이다. ▲부지런해라. 부지런의 절반은 복을 보장한다. ▲자기 스스로 변해야 한다. 절대 남이 바꿔 주지 않는다. ▲우연은 없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지켜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런 화두와 함께 그는 경영자로서 단호한 모습도 보였다.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제품 불량률이 12%에 이르자 그는 전국 대리점에 있는 제품을 모두 수거하고 동일 제품을 산 고객들에게 무상 교환해 주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2000명이 넘는 임직원을 모아 놓은 상태에서 팩스, 휴대폰, 무선전화기 등 당시 시가 500억원어치의 전자제품을 부수고 태워 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임직원들이 심기일전해 국내 4위이던 시장점유율을 1위로 끌어올렸다. 그의 결단이 직원들의 마음은 물론 소비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인 것이다.

이제 이 회장은 그룹을 재편하며 자신의 마지막 숙제를 풀고 있는 것 같다. 기업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기업의 미래 영속성이다. 그래선지 후계구도를 놓고 고심하는 흔적이 포착된다. 몇 해 전부터 두 딸을 전면에 내세우며 남매 간 경영자적 능력에 경쟁을 붙이는 모습도 이런 고심의 일단이 아닐까 한다.

이미 차기 후계자로 자리를 잡은 장남 이재용 부회장과 ‘리틀 이건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이 회장의 기질을 닮은 차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은밀한 신경전은 오래전부터 눈길을 끌어 왔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경영승계의 큰 그림은 이병철 초대회장이 3남 이건희 회장에게 전권을 물려주던 방식과는 달리 세 자녀들의 능력과 특성에 따른 분할승계가 될 것 같은 모습이다. 물론 장남 중심의 승계가 이뤄질 것은 분명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능력 있는 두 딸 역시 그룹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 분담을 찾아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승계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각자 역할을 분담한 자녀들의 후속적 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성을 삼성답게 이어 가는 ‘기업문화’의 계승과 발전일 것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사업 성공의 요체로 운(運), 근(根), 둔(鈍) 세 가지를 꼽았다. 이건희 회장은 ‘운’을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힘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운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남모를 고뇌와 노력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근’이란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한 끈기와 집념을, ‘둔’이란 기본에 충실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으로 풀이했다. 이 세 가지 정신에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더해 오늘의 삼성을 이룬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삼성의 3세대 후계구도보다는 그의 자녀들이 이 정신적 유산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갈지가 더 궁금하다. 그 경영정신이 바로 기업을 지키고 키워 내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마지막 임무로 ‘포스트 이건희’를 준비하기 위해 만든 그룹 미래전략실과 함께 3세대 삼성 경영의 안정화를 뒷받침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자녀에게 어떤 과업을 맡기느냐를 놓고 많은 고심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이 회장은 후계구도와 관련해 국민 대다수가 삼성이 더 성장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GE, 듀폰, 엑슨모빌처럼 100년을 넘기는 장수기업이 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먼 훗날 국민들이 바라보는 삼성 속에 ‘이건희’라는 거인에 대한 추억이 아름다울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이 크기 때문에 삼성가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불미스런 사건에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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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경의 컬처토크 ⑫ ‘이건희 시대’에 대한 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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