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고유문화가 ‘빵빵한 나라’… 한국사·한국어 제대로 아는 사람을 귀화 시험 합격시켜야”
⊙ ‘노아의 방주’가 정박한 아라라트 출신 쿠르드족… 튀르키예 군경과 쿠르드 민병대 간 전쟁 보면서 성장
⊙ 몸 담았던 언론사가 에르도안의 언론 탄압 받아 체포 리스트에 오른 후 한국 귀화
⊙ “(튀르키예계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국인으로서 자부심 있죠”
⊙ “민족은 지정학적인 울타리 안에서 공동의 운명을 위해 달려가는, 같은 문화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
⊙ “다문화 정책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건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장치 마련이 핵심”
⊙ ‘노아의 방주’가 정박한 아라라트 출신 쿠르드족… 튀르키예 군경과 쿠르드 민병대 간 전쟁 보면서 성장
⊙ 몸 담았던 언론사가 에르도안의 언론 탄압 받아 체포 리스트에 오른 후 한국 귀화
⊙ “(튀르키예계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국인으로서 자부심 있죠”
⊙ “민족은 지정학적인 울타리 안에서 공동의 운명을 위해 달려가는, 같은 문화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
⊙ “다문화 정책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건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장치 마련이 핵심”
대한민국이 소멸하고 있다. 2023년 출산율은 0.72, 출생아 수는 22만9971명이다. 2024년 3월, 신입생 ‘0명’인 초등학교가 157개에 달한다. 근일 내에 중·고교에 이어 다수의 대학이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지구상 국가 소멸 1호 국가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탈출구는 있다. 전 세계인이 대한민국을 ‘매력 국가’로 본다는 사실이다. 공동체(共同體) 붕괴를 막으려면,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사람을 품어야 한다. 혈연(血緣)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대한민국의 생존 길이 열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났다. 알파고 시나씨. 1988년 튀르키예(터키) 태생으로, 소수(少數) 민족 쿠르드족 출신 남성. 대한민국으로 귀화(歸化)한 한국인. 16세 때 영재 유학생으로 한국에 입국한 이래 지금까지 정치학도, 언론인, 저술가, 코미디언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뛰어난 전문성을 보여준 사람.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한민국의 소멸을 막는 창조적 이민자의 샘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귀화 시험은 어려워야”
― 요새 굉장히 바쁘게 지내던데요.
“JTBC 〈톡파원 25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중입니다. 토크가 되는 사람이라고 제목이 ‘톡파원’입니다. 이 인터뷰하기 3일 전에 모로코에서 귀국했고, 이틀 후 이집트로 출장 갑니다.”
알파고 시나씨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있다. ‘1월생이니까 빠른 18년생’인데 그냥 일찍 보냈다고 한다. 그의 한국 문화 이해도는 ‘빠른 18년생’ 같은 ‘전문 용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정도다. 충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 석사 과정도 수료했는데 첫 귀화 시험에서 낙방, 두 번째 시도에서 어렵게 관문을 돌파했다. “귀화 시험은 어려워야 합니다. 한국이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잖아요. 고유문화가 ‘빵빵한 나라’니까, 한국의 역사와 배경을 제대로 알고 한국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을 합격시켜야 해요.”
― 고향은 어디입니까.
“아라라트산 바로 아래 으드르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표류하다 도착했다는 산이죠. 튀르키예의 제일 동쪽에 있어요. 남북으로 보면 딱 중간이고요.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등 4개국의 접경지대입니다.”
― 그럼 어렸을 때 4개국을 왔다 갔다 했나요? 국경 통행은 자유롭습니까.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튀르키예가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어서 아르메니아가 국경을 폐쇄했죠. 이란도 국경을 폐쇄해 제 고향에서 육로(陸路)로 갈 수 있는 나라는 아제르바이잔 말고는 없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
― 어린 시절에 알파고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제가 1988년생인데, 정말 힘든 소년 시절을 보냈죠. 1992년부터 쿠르드 노동자당(PKK)의 무장 독립운동이 엄청 격렬해졌거든요. PKK가 튀르키예 정부와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 내전(內戰) 비슷하게 소요 사태를 일으킨 건가요?
“대놓고 중앙정부랑 싸웠죠. 동네에서도 막 총 들고 왔다 갔다 하고, PKK하고 정부군 혹은 경찰 특수부대가 시가전(市街戰)도 벌였습니다.”
― 그럼 학교는 어떻게 다녔어요?
“오늘 학교에 오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가끔 안내 방송이 나왔어요. 진짜 ‘총알이 빗발치는’ 어린 시절을 보낸 거죠. 제가 아직도 악몽을 꿀 때 꼭 나오는 몇 장면이 있어요.”
― 뭡니까.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시고 어머니가 저하고 여동생을 데리고 외할머니댁으로 갔습니다. 이혼을 고려하셨을 만큼 사태가 심각했죠. 외가는 쿠르드 독립운동이 격하게 진행되던 동네였어요. 그 동네에 경찰 가족들이 살던 아파트 단지가 있었습니다. 4층짜리 건물이 한 4~5개 있는 그런 단지였죠. 할머니 집이 살짝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베란다에서 그 단지가 잘 보였습니다.”
― 실제 전투 상황이 있었나요?
“경찰하고 군대는 탱크, 장갑차를 끌고 동네에 들어왔고 동네 아이들은 거기다 돌을 던지고…. 골목골목에 PKK 병력이 숨어 있다가 바주카포로 그 아파트 단지를 쐈습니다. 그 아파트 거주민은 다 경찰 가족이니까, 경찰을 지치게 만들려고 그랬겠죠.”
마침 베란다에 나가 있던 알파고 소년은 실제로 포탄이 날아가서 맞는 걸 봤다. 아침 시간이었다.
“갑자기 아파트에서 아줌마들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피를 흘리며 울고…. 어린 나이에 본 광경이라 잊히지 않습니다.”
― 그때 사망자도 나왔습니까.
“네, 나왔어요. 1993~1995년 이때가 쿠르드 문제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은 시절입니다.”
유엔의 추정에 의하면, 쿠르드족과 이라크 및 튀르키예 간에 무력 충돌이 본격화된 1984년부터 10년간 쿠르드인 4만 명(튀르키예 내무부 발표는 1만 명)이 희생되었다.
“사망자 중에는 민간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 80~90% 정도는 민간인이 아닐까 합니다.”
“고등학교 정원사가 한국전 참전용사”
이즈미르에 있는 야만라르 과학영재고등학교는 전국 석차 300등 이내만 갈 수 있는 학교다. 알파고의 석차는 전국 431등. 학교의 배려로 입학할 수 있었다. 교육 환경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도시에서 이 정도 성적을 거뒀다면 충분하다며 입학허가서를 보내준 것이다. 동네에서는 플래카드가 붙고 난리가 났다. 이즈미르에는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생가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서(書)의 에페소스가 이즈미르의 일부다. 이 유서 깊은 도시에 자리한 영재고 동창이 역시 한국으로 귀화한 한준(튀르키예 이름 카디르 아이한)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다. 공공외교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학자다.
“한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질랜드로 갔는데 제가 꼬셨죠. 한국으로 오라고.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문과, 이과가 있었는데 한준 교수는 문과, 저는 이과였습니다.”
― 왜 한국을 선택했습니까.
“9·11 이후에 서양에서는 무슬림에게 배타적인 문화가 생겨서 동양으로 유학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에서 활동하는 튀르키예 사업가들의 협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장학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협회 입장에서는 많은 튀르키예 학생이 동양에서 좀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때 제 기하학 선생님이 한국행을 권했습니다. ‘제자 하나가 지금 한국에 갔는데 거기서 잘하고 있다. 2년 전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의 발전상과 호의를 보지 않았느냐.’ 그래서 한국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마침 우리 고등학교 정원사가 한국전 참전용사셨어요.”
“한국의 성장 가능성 보고 결심”
어머니 친구의 아버지 중에도 한국전 참전 상이용사가 있었던 생각이 났다. 그분이 전쟁 때문에 갔던 한국과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가 같은 나라라니? 교과서와 TV 속 한국의 이미지가 서로 따로 놀다 하나로 합쳐질 무렵, 기하학 선생님이 결정타를 날렸다.
“야, 너 모르지? 그 삼성하고 횬다이(현대), LG가 다 한국 기업이야.”
― 그래서 결심했습니까.
“네.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가 이 정도로 발전했다면, 발전 속도만 유지해도 한 20년 후에는 IT 기술 쪽에서 세계 최강이 될 것 같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하자. 한국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보고 결심한 겁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추억도 있다. 붉은 악마가 태극기와 튀르키예 국기를 같이 올려준 경기를 생중계로 봤다. “월드컵에서 두 나라 국기가 함께 올라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더군다나 튀르키예 국기가 태극기보다 더 크게 나왔어요. ‘짝사랑이 아니었구나, 한국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감동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이 그랬죠.”
각국 장교들과 공부하다 국제정치학에 흥미 느껴
알파고는 충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왜 대전으로 간 것일까?
“이스탄불기술대학교와 카이스트가 자매학교였어요. 그래서 카이스트가 있는 대전으로 온 겁니다. 카이스트는 영어로 가르치니까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먼저 2004년에 어학당에 등록했죠.”
대전에는 한남대와 배재대에만 어학당이 있었다. 카이스트와 가깝다는 이유로 알파고는 한남대를 택했다. 여기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이 일어난다.
“대전 자운대(紫雲臺)에서 각국 장교들이 교육받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자체 어학당이 없으니까 다들 한남대로 온 거예요. 그러고 어학 교육이 끝나 각국 사관학교로 돌아갔는데, 그분들과 수업 들은 그 자체가 국제 정치의 축소판이었습니다.”
―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를 들어, 미군하고 베네수엘라 군인들 사이에선 긴장 관계가 느껴졌습니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그 보이지 않는 균형 게임이 눈에 보이니까 그 자체가 정말 재미있었죠. 그리고 한국어로 공부하는 문과 공부가 저를 매혹했습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가 그랬습니다.”
― 그래서 충남대 정외과로 간 겁니까.
“국립대니까요. 정치외교학 학사로 들어가겠다고 충남대를 찾아가 시험을 봤습니다. 또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처음 신청 지역인 대전을 벗어날 수 없었죠. 장학금 취지 중에 ‘지역전문가 양성’도 있었으니까요.”
충남대에선 홍보대사로 뽑혀 화보도 찍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에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석사 과정 수료는 했지만, 아직 논문을 못 내 학위는 따지 못했다. 대학원 시절 기자로 취직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알파고가 보는 5·16
― 미완의 석사 논문 주제가 한국 정치였죠?
“네. 비교정치학입니다. 튀르키예에서는 1960년 5월 27일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1년 뒤 한국에서 5·16이 일어났죠. 튀르키예에서 쿠데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혁명정부가 19년을 갔고, 튀르키예에선 2년 만에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이양했는가? 이 질문을 중심으로 양 쿠데타의 본질을 비교하고 싶었습니다.”
― 아주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5·16은 박정희(朴正熙) + 알파죠. 김종필(金鍾泌)도 있고, 다른 장군들도 많이 동참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그 당시에 ‘나라가 이대로 가면 안 되는데’라고 걱정한 엘리트 군인들의 합작품입니다. 그 당시 해외 유학 경험이 가장 많은 집단이 군인들이었어요. 미군이 엘리트 장교들을 미국으로 보내서 6개월짜리, 1년짜리 코스에 넣었죠. 1952년에 박정희 대령도 6개월 동안 포병 교육과정을 다녀왔습니다.”
1961년 당시, 외무부 직원보다 군인들 유학 비율이 더 높았다. 미국식 합리주의에 익숙해진 군인들 시각으로는 전근대적(前近代的) 사상과 의사소통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정관계 관행이 불합리하게 보였을 것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일각에서는 알파고가 5·16을 미화한다고 합니다. 저는 5·16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고 발생한 이유를 설명하는 겁니다. 5·16이 일어난 이유는 그 당시에 군인들이 보기에 관료들이 나라를 관리하면 대한민국이 북한에 먹힐 것 같다, 그리고 경제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쿠데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 그럼 왜 튀르키예와 달리 19년을 갔습니까.
“5·16 주체 세력이 당시 현존하던 어느 정치 세력과도 연결점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정권을 잡고 난 다음에는 소신대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거죠. 튀르키예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인민공화당이라는 정당과 연결돼 있었어요. 정권을 잡았지만, 자꾸 그 정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2년 만에 물러났죠.”
튀르키예에서 ‘사귀자’는 말은 실례
2010년은 알파고 시나씨가 서울대에 입학한 해다. 6월 압둘라 귈 튀르키예 대통령이 방한(訪韓)하자 대사관은 한국 정치를 잘 아는 알파고에게 통역을 맡겼다. 대통령의 통역은 문화원 원장이 했고, 그는 대통령을 수행한 튀르키예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다. 이때 그를 눈여겨본 지한 통신사(Cihan Haber Ajansı)가 그에게 한국 통신원을 제안했다. 이후 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정식 특파원이 됐다. 기자로 일하는 6년 동안 알파고는 한국, 북한, 아시아 등의 소식을 전하며 G20 정상회의, 핵안보 정상회의 같은 굵직한 국제적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 터키에서 유명해진 기사가 있습니까.
“연평도 르포입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연평도에 갔어요.”
결혼은 한국 여성과 했다. 2014년이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유엔난민기구에서 인턴십을 한 윤예림씨다. 결혼 후 책을 7권이나 펴낸 저술가다.
“그때 대학원 조교였죠. 한 학기 동안 관찰하고 바로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튀르키예에서는, 특히 그의 고향에서는 “사귀자”라는 말을 실례로 생각한다. ‘진지하지 않다’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문화 충돌이 있었지만 만날 때마다 “언제 결혼해요?”라고 물으니 1년 만에 답을 주었다. 그러나 바로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양가(兩家) 가족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인·장모는 우회적으로 공략했다. 연재하던 칼럼의 주제를 ‘국제결혼에서 나올 수 있는 위기 극복하기’ ‘국제결혼의 올바른 방향’ 등으로 잡았다. 인터넷 검색을 할 예비 장인·장모를 안심시키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민족국가’를 만들지 못한 쿠르드족
튀르키예에 있는 부모님은 장남이 외국인이랑 결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특히 알파고의 부친은 쿠르드족 마인드였다. 친척들과 결혼하라고 했다.
― 쿠르드족은 친척끼리 결혼하는 게 일반적인 문화인가요?
“장남이 친척이랑 결혼해야 가문을 끌고 갈 수가 있습니다. 장손과 종부가 다 그 집안 사람이어야 장남으로서 자기 가문을 다스리기가 쉬워요. 가부장적인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겁니다. 가족의 단합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데,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한국으로 오라고 했죠. 아버지가 예림씨를 만나고 바로 허락해주셨습니다.”
― 쿠르드족 문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이란, 시리아, 이라크에 흩어져 살고 있죠? 인구도 3500만~4000만.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좀 무리가 있지만, 독립 국가로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입니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쿠르드족도 예전에 나라들을 만들었었죠. 근데 그 나라가 쿠르드 민족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쿠르드 민족이 주된 나라였지 그 안에는 또 다양한 민족들이 존재했고, 또 쿠르드족의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쿠르드 사람들이 예전에는 나라를 만들었지만, 쿠르드 사람들만 사는 나라, 민족국가를 만든 적은 없습니다. 이걸 한국에서 설명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왜냐? 한국인들은 통일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민족국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민족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익 쿠르드 좌익 쿠르드
― 쿠르드족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살라딘(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죠? 아이유브 왕조의 창건자이자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세력의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한 이슬람의 지도자.
“고향 선배예요. 그분의 후손 부족이 제가 태어난 곳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살고 있죠. 살라딘은 쿠르드족의 민족적 영웅일 뿐 아니라 이슬람권 최고의 영웅입니다. 다른 아랍 나라 사람들이 쿠르드 사람들을 너무 예뻐하죠. ‘너희 살라딘 덕분에 우리가 십자군한테 이겼다’고요.”
― 그러면 튀르키예에 사는 쿠르드족들은 쿠르드족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正體性)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PKK 쪽 사람들이죠.”
― 그럼 이라크나 아제르바이잔 이런 데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과는 동질성이 있습니까.
“이라크 안에 있는 우익 쿠르드 사람들이 나라를 만들자고 하죠. 지정학(地政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튀르키예에 있는 쿠르드족은 수니파예요. 그래서 튀르키예 사람들과 결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러다 보니 튀르키예 안에 있는 우익 계열 쿠르드 사람들은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이 있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오스만 제국 정신으로 다민족(多民族) 국가를 부활시켜야지 뭐 하러 싸우나?’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PKK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좀 받아들이다 보니까 종교적 색채가 다소 약합니다. 종교적 동질성을 고려하지 않고 민족적인 요소만 강조하면서 독립을 원하는 거죠.”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사정은 또 다르다.
“이라크에서는 왜 이런 논리가 작동하지 않느냐? 이라크 북쪽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수니파, 이라크 국민 대다수는 시아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 쿠르드 사람들은 이라크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같이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안 섞였으니까요. 이처럼 조화롭게 살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에 있는 쿠르드 사람들의 경우 독립운동이 성공한 겁니다.”
사실상 준독립국 얻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
1991년 걸프 전쟁 발발 시 쿠르드족 주민들은 사담 후세인에게 대항하는 시위를 했다. 미국과 영국군이 이라크 북부로 비행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지역을 보호했다. 이 결과, 후세인 정부의 영향력이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 시기 자치구로서 독자적인 깃발, 독자적인 통화를 만들었다. 2004년 9월에 2800명 규모의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며 2008년 12월까지 평화 유지 및 재건사업을 펼친 지역이 바로 이곳 쿠르드 자치구, 이라크령(領) 쿠르디스탄이다.
“사실상의 준(準)독립국이죠. 이라크 사람도 쿠르드 지역에 들어가려면 허가증을 받아야 합니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거주할 수는 없어요.”
튀르키예에는 약 2000만 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튀르키예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이들에게도 독립 의지가 있을까?
“튀르키예 안에 있는 쿠르드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PKK 지지자들과 우익들. 후자는 인민민주당이었다가 지금은 녹색당으로 당명을 바꿨어요. PKK와 싸우지 말고, 협상하면서 PKK의 무장 활동을 마무리시키자고 하는 정당입니다. 지금 현재 국회에 의석이 있죠.”
― 그럼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민족주의를 내건 유일 합법 정당인 녹색당에만 투표합니까.
“아뇨. 절반은 녹색당을 찍고 나머지 반은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을 찍습니다.”
쿠르드족에게는 고유 언어가 있다. 페르시아어와 70% 정도 겹치기에 이란과 혈연적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란이 시아파를 택하며 이란의 한 부족이었던 수니파 쿠르드족은 산악지대에 주로 거주하며 민족적·종교적·동질성을 유지했다.
― 튀르키예에서 한때는 쿠르드족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고 ‘산악지대의 튀르키예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그건 1980년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의 작품인데 오래 안 갔습니다. 너무나 군인적인 생각이었으니까요. 쿠르드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쿠르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해서 ‘쿠르드족’이라는 말 자체를 없앤 겁니다. 그럼 쿠르드족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뭐냐?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튀르키예족이다’ 정부가 이런 입장이니까 모든 언론사가 그 단어를 써야 했죠.”
― 지금은 이 단어를 안 씁니까.
“그렇죠. 쿠데타 정부가 1988년까지 갔다가 1989년에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 세력이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1993년 무렵부터는 이 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에르도안 지지자는 종교 때문”
― 아까 쿠르드족 절반 정도가 현 집권당인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에 투표한다고 했는데 선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에르도안은 처음에 서민을 위한 정치를 내걸고 총리도 하고 대통령도 했는데 집권 과정이 길어지면서 권위주의 정부로 그러니까 독재 정부화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에르도안을 쿠르드족 반이 좋아하고 반이 싫어합니다. 우익 쿠르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신실(信實)해요. 그런데 에르도안이 종교적인 발언을 하니까 드디어 종교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고 반색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이슬람 원리주의 말씀을 하는 분이 계시는데, 튀르키예는 원리주의적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세속주의(世俗主義)에서 살짝 종교색이 있는 민주정으로 가는 거지 완전히 종교적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예요. 지금도 누드비치가 있고 매춘(賣春)이 합법입니다. 그런데 에르도안이 이슬람의 기본 정신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튀르키예 문화에 좀 더 많이 집어넣자고 해서 초반에는 인기가 높았죠.”
― 종교 때문에 에르도안을 지지한다고요?
“네. 케말 파샤 이후 세속주의로 가려고 하다 보니까, 약간의 종교 탄압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일 많이 피해를 봤던 지역이 쿠르드족 거주지였어요. 그러다 에르도안이 집권하고 쿠르드족에 대한 문화적 탄압을 없애버렸죠. 예를 들면 국가 예산으로 쿠르드어 방송국도 만들고 쿠르드어도 쓸 수 있게끔 공식적으로 지정하고요.”
― 그럼 그전까지는 언어를 못 쓰게 했습니까.
“길거리에서 말하는 걸 금지했죠. 그걸 에르도안이 완화한 겁니다. 에르도안은 쿠르드어 인쇄물도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절반 정도의 쿠르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겁니다. 삶이 더 개선될 거라고 희망하는 거죠. 그러니까 단순히 칼로 무 베듯이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본사가 언론 탄압 받자 한국 귀화
에르도안 정부와 알파고의 생애는 악연으로 얽혀 있다. 한국으로 귀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2013년 지한 통신사의 모(母) 회사인 자만(Zaman)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비리를 보도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자만의 편집국장을 체포했다. 민간인과 야당 기자들이 언론 탄압을 멈추라며 시위를 벌였고, 진압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이 난무했다. 자만과 지한의 기자들은 에르도안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계속 내보내는 한편으로 시위도 이어갔다. 2016년 에르도안 정부는 자만을 ‘물리적으로 접수’했다.
당시 알파고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만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시위대가 경찰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있던 시간에 튀르키예 방송에선 일제히 드라마만 방영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언론사가 없다. 자만은 정부에 가장 비판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큰 언론사인데 자만까지 이렇게 된다면 누구도 에르도안 정부를 제대로 감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특히 앞으로 있을 선거 결과 발표는 더욱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지한통신의 기자들은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한국 특파원이던 알파고 역시 반(反)정부 기자로 체포 리스트에 올랐다. 알파고는 한 번의 탈락 끝에 2018년 귀화 시험에 합격해 한국인이 되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튀르키예의 체포 위협도 사라졌다.
― 본사가 극심한 언론 탄압을 받은 직접적 이유는 뭡니까.
“2013년 말부터 몇 가지 국제적인 문제를 우리 언론사가 폭로했죠. 제일 큰 문제는, 미국이 이란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데 에르도안은 그걸 뚫고 이란 원유를 대리(代理) 수출해줬습니다. 사실은 제가 일했던 언론사는 보수 성향이었어요. 같은 진영에서 문제 제기를 하니까 지지자 사이에서 여론도 바뀌고 일이 커진 겁니다. 언론사를 완전히 없애버린 거예요. 건물도 제3자에게 매각하고 생중계 차들도 한 대도 남김없이 다 팔았습니다.”
지방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도
본사에서는 빨리 대사관에 자진 출두해 자수하고 귀국하라고 했다.
“근데 가면 체포당하니까 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제 일종의 정치적 망명 비슷하게 일단 배우자 비자로 바꾸고 바로 귀화 신청을 한 겁니다.”
국적(國籍) 변경을 실감한 건 여권이 나왔을 때다. 출국할 때, 민방위훈련 받으러 갈 때는 처음부터 여권을 펴서 보여주며 입장한다. ‘줄 잘못 선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이런 에피소드를 개그의 소재로 쓰기도 한다.
“2016년에 불발 쿠데타가 일어나고 언론사가 없어지고 직장이 사라지니까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한동안 너무 힘들었죠. 글도 쓰고 육체노동도 하고, 아랍 사람 의료 통역 등 다양한 일을 했어요. 어떤 친구가 ‘지방에서 노동 일자리가 났는데 사람이 필요하다, 일당이 10만원이다’라고 해서 바로 간 적도 있죠.”
생계를 위해 스탠딩 코미디 무대를 기획하기도 했다. 대학로 소극장을 빌려 공연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개그콘서트〉 〈대한외국인〉 등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고 최근에는 유튜브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 앞으로 꿈꾸는 미래가 있다면요?
“제 최초의 직업이 기자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개인 채널도 보도 위주로 끌고 가지만 중간중간에 코미디 영상들을 넣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언론 활동도 열심히 하고, 코미디도 열심히 할 계획입니다.”
《세계 독립의 역사》라는 책 저술
― 튀르키예계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저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 고향 아라라트산이 쿠르드족과 아제르바이잔족, 시아파·수니파가 섞여서 사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 노하우를 배우게 됐어요.”
― 튀르키예계 한국인 이런 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어쨌거나 쿠르드족이고 튀르키예 국적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입장에서 8·15 광복절 이럴 때 느끼는 특별한 감회 같은 게 있습니까?
“저는 2019년에 《세계 독립의 역사》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민족주의의 출발을 흥선대원군 때로 보고 우리 독립까지의 약 100년을 탐구했습니다. 그 100년 사이에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미국 독립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까지 200년을 바탕에 깔고, 한반도의 100년을 병행해서 기술했어요. 미국과 프랑스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한국에서는? 민족주의, 조직, 종교, 젊은이들이 이제 독립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라면 한국의 독립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살폈습니다. 그 책을 내고 뿌듯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증명한 느낌이었거든요.”
― 민족이란, 국가란, 국민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민족이라는 것은 지정학적인 울타리 안에서 공동의 운명을 위해 달려가는, 같은 문화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죠. 지금 한국은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데 제가 볼 때 이제 다문화(多文化) 사회로 가야 하느냐 마느냐는 이미 한참 지난 질문이고, 어떻게 하면 다문화 사회로 우리가 연착륙(軟着陸)할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한 질문 같아요. 예를 들면 유럽도 경제 발전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죠. 그런데 다문화 정책을 유럽과 비교하면 답이 없습니다.”
“다문화 정책의 핵심은 인프라”
― 핵심은 무엇입니까.
“인프라입니다. 유럽은 그동안 인프라 수준에 맞게끔 이민자를 받았어요. 그 사람들이 나름 그 인프라 속에서 제대로 동화(同化)가 됐는데 1990년대 이후로는 소련 붕괴, 유고슬라비아 분열 등 국제적으로 좀 뒤집혔잖아요. 다문화 정책이 결정적으로 깨진 건 시리아 내전 때문입니다. 인프라가 수용할 수 없는 규모로 난민이나 이민을 받으면 혼란은 불가피합니다. 인프라를 제대로 깔면 문제가 없어요. 근데 인프라를 안 깔면 천사(天使)들을 데리고 와도 문제가 일어납니다.”
― 대한민국의 소멸을 막기 위해 어떤 인프라를 깔아야 됩니까.
“다문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죠. 프랑스가 지금 제일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나라잖아요.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은 하지 않은 짓을 했어요. 이민자들을 한 지역에만 모아놓은 겁니다. 사실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하게끔 잘게 나눠서 스며들게 해야 하는데, 다 모아놓으면 이 사람들이 거기서 어떻게 프랑스 문화를 익히고 프랑스 사회에 정착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뒤집으면 일본이나 미국에 코리아타운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것 만들지 말고 좀 더 잘게 분화해서 그 사람들이 미국 사회, 일본 사회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진정한 이민 정책이죠. 물론 미국에 있는 코리아타운은 일종의 관광지 비슷한 거점이니까,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이민자 거주지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무엇을 개선해야 합니까.
“우리 한국은 지금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얘기 없이 ‘이민자를 받자, 말자’ 이 얘기만 합니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지금 인프라가 있느냐 없느냐?’ ‘이 인프라로 몇 명을 받을 수 있느냐?’ 이 얘기를 먼저 해야죠. 그러니까 ‘그분들이 와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기여하면서 세금도 내고 건강하고 건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핵심인데 그 후의 얘기를 그것도 너무나 미화하거나 악화하면서 얘기하니까 문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런 한국인이 늘어난다면 대한민국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번영하고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만났다. 알파고 시나씨. 1988년 튀르키예(터키) 태생으로, 소수(少數) 민족 쿠르드족 출신 남성. 대한민국으로 귀화(歸化)한 한국인. 16세 때 영재 유학생으로 한국에 입국한 이래 지금까지 정치학도, 언론인, 저술가, 코미디언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뛰어난 전문성을 보여준 사람.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한민국의 소멸을 막는 창조적 이민자의 샘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귀화 시험은 어려워야”
― 요새 굉장히 바쁘게 지내던데요.
“JTBC 〈톡파원 25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중입니다. 토크가 되는 사람이라고 제목이 ‘톡파원’입니다. 이 인터뷰하기 3일 전에 모로코에서 귀국했고, 이틀 후 이집트로 출장 갑니다.”
알파고 시나씨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있다. ‘1월생이니까 빠른 18년생’인데 그냥 일찍 보냈다고 한다. 그의 한국 문화 이해도는 ‘빠른 18년생’ 같은 ‘전문 용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정도다. 충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 석사 과정도 수료했는데 첫 귀화 시험에서 낙방, 두 번째 시도에서 어렵게 관문을 돌파했다. “귀화 시험은 어려워야 합니다. 한국이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잖아요. 고유문화가 ‘빵빵한 나라’니까, 한국의 역사와 배경을 제대로 알고 한국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을 합격시켜야 해요.”
― 고향은 어디입니까.
“아라라트산 바로 아래 으드르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표류하다 도착했다는 산이죠. 튀르키예의 제일 동쪽에 있어요. 남북으로 보면 딱 중간이고요.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등 4개국의 접경지대입니다.”
― 그럼 어렸을 때 4개국을 왔다 갔다 했나요? 국경 통행은 자유롭습니까.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튀르키예가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어서 아르메니아가 국경을 폐쇄했죠. 이란도 국경을 폐쇄해 제 고향에서 육로(陸路)로 갈 수 있는 나라는 아제르바이잔 말고는 없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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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앞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끝이 알파고) |
“제가 1988년생인데, 정말 힘든 소년 시절을 보냈죠. 1992년부터 쿠르드 노동자당(PKK)의 무장 독립운동이 엄청 격렬해졌거든요. PKK가 튀르키예 정부와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 내전(內戰) 비슷하게 소요 사태를 일으킨 건가요?
“대놓고 중앙정부랑 싸웠죠. 동네에서도 막 총 들고 왔다 갔다 하고, PKK하고 정부군 혹은 경찰 특수부대가 시가전(市街戰)도 벌였습니다.”
― 그럼 학교는 어떻게 다녔어요?
“오늘 학교에 오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가끔 안내 방송이 나왔어요. 진짜 ‘총알이 빗발치는’ 어린 시절을 보낸 거죠. 제가 아직도 악몽을 꿀 때 꼭 나오는 몇 장면이 있어요.”
― 뭡니까.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시고 어머니가 저하고 여동생을 데리고 외할머니댁으로 갔습니다. 이혼을 고려하셨을 만큼 사태가 심각했죠. 외가는 쿠르드 독립운동이 격하게 진행되던 동네였어요. 그 동네에 경찰 가족들이 살던 아파트 단지가 있었습니다. 4층짜리 건물이 한 4~5개 있는 그런 단지였죠. 할머니 집이 살짝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베란다에서 그 단지가 잘 보였습니다.”
― 실제 전투 상황이 있었나요?
“경찰하고 군대는 탱크, 장갑차를 끌고 동네에 들어왔고 동네 아이들은 거기다 돌을 던지고…. 골목골목에 PKK 병력이 숨어 있다가 바주카포로 그 아파트 단지를 쐈습니다. 그 아파트 거주민은 다 경찰 가족이니까, 경찰을 지치게 만들려고 그랬겠죠.”
마침 베란다에 나가 있던 알파고 소년은 실제로 포탄이 날아가서 맞는 걸 봤다. 아침 시간이었다.
“갑자기 아파트에서 아줌마들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피를 흘리며 울고…. 어린 나이에 본 광경이라 잊히지 않습니다.”
― 그때 사망자도 나왔습니까.
“네, 나왔어요. 1993~1995년 이때가 쿠르드 문제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은 시절입니다.”
유엔의 추정에 의하면, 쿠르드족과 이라크 및 튀르키예 간에 무력 충돌이 본격화된 1984년부터 10년간 쿠르드인 4만 명(튀르키예 내무부 발표는 1만 명)이 희생되었다.
“사망자 중에는 민간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 80~90% 정도는 민간인이 아닐까 합니다.”
“고등학교 정원사가 한국전 참전용사”
이즈미르에 있는 야만라르 과학영재고등학교는 전국 석차 300등 이내만 갈 수 있는 학교다. 알파고의 석차는 전국 431등. 학교의 배려로 입학할 수 있었다. 교육 환경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도시에서 이 정도 성적을 거뒀다면 충분하다며 입학허가서를 보내준 것이다. 동네에서는 플래카드가 붙고 난리가 났다. 이즈미르에는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생가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서(書)의 에페소스가 이즈미르의 일부다. 이 유서 깊은 도시에 자리한 영재고 동창이 역시 한국으로 귀화한 한준(튀르키예 이름 카디르 아이한)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다. 공공외교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학자다.
“한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질랜드로 갔는데 제가 꼬셨죠. 한국으로 오라고.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문과, 이과가 있었는데 한준 교수는 문과, 저는 이과였습니다.”
― 왜 한국을 선택했습니까.
“9·11 이후에 서양에서는 무슬림에게 배타적인 문화가 생겨서 동양으로 유학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에서 활동하는 튀르키예 사업가들의 협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장학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협회 입장에서는 많은 튀르키예 학생이 동양에서 좀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때 제 기하학 선생님이 한국행을 권했습니다. ‘제자 하나가 지금 한국에 갔는데 거기서 잘하고 있다. 2년 전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의 발전상과 호의를 보지 않았느냐.’ 그래서 한국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마침 우리 고등학교 정원사가 한국전 참전용사셨어요.”
“한국의 성장 가능성 보고 결심”
어머니 친구의 아버지 중에도 한국전 참전 상이용사가 있었던 생각이 났다. 그분이 전쟁 때문에 갔던 한국과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가 같은 나라라니? 교과서와 TV 속 한국의 이미지가 서로 따로 놀다 하나로 합쳐질 무렵, 기하학 선생님이 결정타를 날렸다.
“야, 너 모르지? 그 삼성하고 횬다이(현대), LG가 다 한국 기업이야.”
― 그래서 결심했습니까.
“네.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가 이 정도로 발전했다면, 발전 속도만 유지해도 한 20년 후에는 IT 기술 쪽에서 세계 최강이 될 것 같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하자. 한국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보고 결심한 겁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추억도 있다. 붉은 악마가 태극기와 튀르키예 국기를 같이 올려준 경기를 생중계로 봤다. “월드컵에서 두 나라 국기가 함께 올라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더군다나 튀르키예 국기가 태극기보다 더 크게 나왔어요. ‘짝사랑이 아니었구나, 한국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감동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이 그랬죠.”
각국 장교들과 공부하다 국제정치학에 흥미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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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씨는 충남대 재학 시절 서예동아리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 튀르키예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
“이스탄불기술대학교와 카이스트가 자매학교였어요. 그래서 카이스트가 있는 대전으로 온 겁니다. 카이스트는 영어로 가르치니까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먼저 2004년에 어학당에 등록했죠.”
대전에는 한남대와 배재대에만 어학당이 있었다. 카이스트와 가깝다는 이유로 알파고는 한남대를 택했다. 여기서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이 일어난다.
“대전 자운대(紫雲臺)에서 각국 장교들이 교육받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자체 어학당이 없으니까 다들 한남대로 온 거예요. 그러고 어학 교육이 끝나 각국 사관학교로 돌아갔는데, 그분들과 수업 들은 그 자체가 국제 정치의 축소판이었습니다.”
―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를 들어, 미군하고 베네수엘라 군인들 사이에선 긴장 관계가 느껴졌습니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그 보이지 않는 균형 게임이 눈에 보이니까 그 자체가 정말 재미있었죠. 그리고 한국어로 공부하는 문과 공부가 저를 매혹했습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가 그랬습니다.”
― 그래서 충남대 정외과로 간 겁니까.
“국립대니까요. 정치외교학 학사로 들어가겠다고 충남대를 찾아가 시험을 봤습니다. 또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처음 신청 지역인 대전을 벗어날 수 없었죠. 장학금 취지 중에 ‘지역전문가 양성’도 있었으니까요.”
충남대에선 홍보대사로 뽑혀 화보도 찍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에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석사 과정 수료는 했지만, 아직 논문을 못 내 학위는 따지 못했다. 대학원 시절 기자로 취직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알파고가 보는 5·16
― 미완의 석사 논문 주제가 한국 정치였죠?
“네. 비교정치학입니다. 튀르키예에서는 1960년 5월 27일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1년 뒤 한국에서 5·16이 일어났죠. 튀르키예에서 쿠데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혁명정부가 19년을 갔고, 튀르키예에선 2년 만에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이양했는가? 이 질문을 중심으로 양 쿠데타의 본질을 비교하고 싶었습니다.”
― 아주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5·16은 박정희(朴正熙) + 알파죠. 김종필(金鍾泌)도 있고, 다른 장군들도 많이 동참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그 당시에 ‘나라가 이대로 가면 안 되는데’라고 걱정한 엘리트 군인들의 합작품입니다. 그 당시 해외 유학 경험이 가장 많은 집단이 군인들이었어요. 미군이 엘리트 장교들을 미국으로 보내서 6개월짜리, 1년짜리 코스에 넣었죠. 1952년에 박정희 대령도 6개월 동안 포병 교육과정을 다녀왔습니다.”
1961년 당시, 외무부 직원보다 군인들 유학 비율이 더 높았다. 미국식 합리주의에 익숙해진 군인들 시각으로는 전근대적(前近代的) 사상과 의사소통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정관계 관행이 불합리하게 보였을 것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일각에서는 알파고가 5·16을 미화한다고 합니다. 저는 5·16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고 발생한 이유를 설명하는 겁니다. 5·16이 일어난 이유는 그 당시에 군인들이 보기에 관료들이 나라를 관리하면 대한민국이 북한에 먹힐 것 같다, 그리고 경제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쿠데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 그럼 왜 튀르키예와 달리 19년을 갔습니까.
“5·16 주체 세력이 당시 현존하던 어느 정치 세력과도 연결점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정권을 잡고 난 다음에는 소신대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거죠. 튀르키예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인민공화당이라는 정당과 연결돼 있었어요. 정권을 잡았지만, 자꾸 그 정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2년 만에 물러났죠.”
튀르키예에서 ‘사귀자’는 말은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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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씨는 연평도 사건이 터졌을 때 지한 통신사 기자로 직접 연평도로 들어가 르포 기사를 썼다. |
― 터키에서 유명해진 기사가 있습니까.
“연평도 르포입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연평도에 갔어요.”
결혼은 한국 여성과 했다. 2014년이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유엔난민기구에서 인턴십을 한 윤예림씨다. 결혼 후 책을 7권이나 펴낸 저술가다.
“그때 대학원 조교였죠. 한 학기 동안 관찰하고 바로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튀르키예에서는, 특히 그의 고향에서는 “사귀자”라는 말을 실례로 생각한다. ‘진지하지 않다’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문화 충돌이 있었지만 만날 때마다 “언제 결혼해요?”라고 물으니 1년 만에 답을 주었다. 그러나 바로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양가(兩家) 가족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장인·장모는 우회적으로 공략했다. 연재하던 칼럼의 주제를 ‘국제결혼에서 나올 수 있는 위기 극복하기’ ‘국제결혼의 올바른 방향’ 등으로 잡았다. 인터넷 검색을 할 예비 장인·장모를 안심시키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민족국가’를 만들지 못한 쿠르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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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은 튀르키예(터키),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지에 나뉘어 살고 있다. 이미지=조선DB |
― 쿠르드족은 친척끼리 결혼하는 게 일반적인 문화인가요?
“장남이 친척이랑 결혼해야 가문을 끌고 갈 수가 있습니다. 장손과 종부가 다 그 집안 사람이어야 장남으로서 자기 가문을 다스리기가 쉬워요. 가부장적인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겁니다. 가족의 단합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데,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한국으로 오라고 했죠. 아버지가 예림씨를 만나고 바로 허락해주셨습니다.”
― 쿠르드족 문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이란, 시리아, 이라크에 흩어져 살고 있죠? 인구도 3500만~4000만.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좀 무리가 있지만, 독립 국가로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입니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쿠르드족도 예전에 나라들을 만들었었죠. 근데 그 나라가 쿠르드 민족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쿠르드 민족이 주된 나라였지 그 안에는 또 다양한 민족들이 존재했고, 또 쿠르드족의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쿠르드 사람들이 예전에는 나라를 만들었지만, 쿠르드 사람들만 사는 나라, 민족국가를 만든 적은 없습니다. 이걸 한국에서 설명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왜냐? 한국인들은 통일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민족국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민족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익 쿠르드 좌익 쿠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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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7일 레바논 베이루트 도심에서 시위대가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KRG)의 분리·독립 투표를 지지하는 집회를 갖고 쿠르드족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사진= AP/연합뉴스 |
“고향 선배예요. 그분의 후손 부족이 제가 태어난 곳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살고 있죠. 살라딘은 쿠르드족의 민족적 영웅일 뿐 아니라 이슬람권 최고의 영웅입니다. 다른 아랍 나라 사람들이 쿠르드 사람들을 너무 예뻐하죠. ‘너희 살라딘 덕분에 우리가 십자군한테 이겼다’고요.”
― 그러면 튀르키예에 사는 쿠르드족들은 쿠르드족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正體性)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PKK 쪽 사람들이죠.”
― 그럼 이라크나 아제르바이잔 이런 데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과는 동질성이 있습니까.
“이라크 안에 있는 우익 쿠르드 사람들이 나라를 만들자고 하죠. 지정학(地政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튀르키예에 있는 쿠르드족은 수니파예요. 그래서 튀르키예 사람들과 결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러다 보니 튀르키예 안에 있는 우익 계열 쿠르드 사람들은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이 있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오스만 제국 정신으로 다민족(多民族) 국가를 부활시켜야지 뭐 하러 싸우나?’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PKK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좀 받아들이다 보니까 종교적 색채가 다소 약합니다. 종교적 동질성을 고려하지 않고 민족적인 요소만 강조하면서 독립을 원하는 거죠.”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사정은 또 다르다.
“이라크에서는 왜 이런 논리가 작동하지 않느냐? 이라크 북쪽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수니파, 이라크 국민 대다수는 시아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 쿠르드 사람들은 이라크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같이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안 섞였으니까요. 이처럼 조화롭게 살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에 있는 쿠르드 사람들의 경우 독립운동이 성공한 겁니다.”
사실상 준독립국 얻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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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시나씨는 중동 정세나 문화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한다. |
“사실상의 준(準)독립국이죠. 이라크 사람도 쿠르드 지역에 들어가려면 허가증을 받아야 합니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거주할 수는 없어요.”
튀르키예에는 약 2000만 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튀르키예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이들에게도 독립 의지가 있을까?
“튀르키예 안에 있는 쿠르드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PKK 지지자들과 우익들. 후자는 인민민주당이었다가 지금은 녹색당으로 당명을 바꿨어요. PKK와 싸우지 말고, 협상하면서 PKK의 무장 활동을 마무리시키자고 하는 정당입니다. 지금 현재 국회에 의석이 있죠.”
― 그럼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민족주의를 내건 유일 합법 정당인 녹색당에만 투표합니까.
“아뇨. 절반은 녹색당을 찍고 나머지 반은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을 찍습니다.”
쿠르드족에게는 고유 언어가 있다. 페르시아어와 70% 정도 겹치기에 이란과 혈연적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란이 시아파를 택하며 이란의 한 부족이었던 수니파 쿠르드족은 산악지대에 주로 거주하며 민족적·종교적·동질성을 유지했다.
― 튀르키예에서 한때는 쿠르드족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고 ‘산악지대의 튀르키예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그건 1980년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의 작품인데 오래 안 갔습니다. 너무나 군인적인 생각이었으니까요. 쿠르드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쿠르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해서 ‘쿠르드족’이라는 말 자체를 없앤 겁니다. 그럼 쿠르드족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뭐냐?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튀르키예족이다’ 정부가 이런 입장이니까 모든 언론사가 그 단어를 써야 했죠.”
― 지금은 이 단어를 안 씁니까.
“그렇죠. 쿠데타 정부가 1988년까지 갔다가 1989년에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 세력이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1993년 무렵부터는 이 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에르도안 지지자는 종교 때문”
― 아까 쿠르드족 절반 정도가 현 집권당인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에 투표한다고 했는데 선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에르도안은 처음에 서민을 위한 정치를 내걸고 총리도 하고 대통령도 했는데 집권 과정이 길어지면서 권위주의 정부로 그러니까 독재 정부화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에르도안을 쿠르드족 반이 좋아하고 반이 싫어합니다. 우익 쿠르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신실(信實)해요. 그런데 에르도안이 종교적인 발언을 하니까 드디어 종교 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고 반색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이슬람 원리주의 말씀을 하는 분이 계시는데, 튀르키예는 원리주의적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세속주의(世俗主義)에서 살짝 종교색이 있는 민주정으로 가는 거지 완전히 종교적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예요. 지금도 누드비치가 있고 매춘(賣春)이 합법입니다. 그런데 에르도안이 이슬람의 기본 정신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튀르키예 문화에 좀 더 많이 집어넣자고 해서 초반에는 인기가 높았죠.”
― 종교 때문에 에르도안을 지지한다고요?
“네. 케말 파샤 이후 세속주의로 가려고 하다 보니까, 약간의 종교 탄압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일 많이 피해를 봤던 지역이 쿠르드족 거주지였어요. 그러다 에르도안이 집권하고 쿠르드족에 대한 문화적 탄압을 없애버렸죠. 예를 들면 국가 예산으로 쿠르드어 방송국도 만들고 쿠르드어도 쓸 수 있게끔 공식적으로 지정하고요.”
― 그럼 그전까지는 언어를 못 쓰게 했습니까.
“길거리에서 말하는 걸 금지했죠. 그걸 에르도안이 완화한 겁니다. 에르도안은 쿠르드어 인쇄물도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절반 정도의 쿠르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겁니다. 삶이 더 개선될 거라고 희망하는 거죠. 그러니까 단순히 칼로 무 베듯이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본사가 언론 탄압 받자 한국 귀화
에르도안 정부와 알파고의 생애는 악연으로 얽혀 있다. 한국으로 귀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 2013년 지한 통신사의 모(母) 회사인 자만(Zaman)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비리를 보도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자만의 편집국장을 체포했다. 민간인과 야당 기자들이 언론 탄압을 멈추라며 시위를 벌였고, 진압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이 난무했다. 자만과 지한의 기자들은 에르도안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계속 내보내는 한편으로 시위도 이어갔다. 2016년 에르도안 정부는 자만을 ‘물리적으로 접수’했다.
당시 알파고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만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시위대가 경찰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있던 시간에 튀르키예 방송에선 일제히 드라마만 방영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언론사가 없다. 자만은 정부에 가장 비판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큰 언론사인데 자만까지 이렇게 된다면 누구도 에르도안 정부를 제대로 감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특히 앞으로 있을 선거 결과 발표는 더욱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지한통신의 기자들은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한국 특파원이던 알파고 역시 반(反)정부 기자로 체포 리스트에 올랐다. 알파고는 한 번의 탈락 끝에 2018년 귀화 시험에 합격해 한국인이 되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튀르키예의 체포 위협도 사라졌다.
― 본사가 극심한 언론 탄압을 받은 직접적 이유는 뭡니까.
“2013년 말부터 몇 가지 국제적인 문제를 우리 언론사가 폭로했죠. 제일 큰 문제는, 미국이 이란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데 에르도안은 그걸 뚫고 이란 원유를 대리(代理) 수출해줬습니다. 사실은 제가 일했던 언론사는 보수 성향이었어요. 같은 진영에서 문제 제기를 하니까 지지자 사이에서 여론도 바뀌고 일이 커진 겁니다. 언론사를 완전히 없애버린 거예요. 건물도 제3자에게 매각하고 생중계 차들도 한 대도 남김없이 다 팔았습니다.”
지방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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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시나씨는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정기적인 공연을 하고 있다. |
“근데 가면 체포당하니까 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제 일종의 정치적 망명 비슷하게 일단 배우자 비자로 바꾸고 바로 귀화 신청을 한 겁니다.”
국적(國籍) 변경을 실감한 건 여권이 나왔을 때다. 출국할 때, 민방위훈련 받으러 갈 때는 처음부터 여권을 펴서 보여주며 입장한다. ‘줄 잘못 선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이런 에피소드를 개그의 소재로 쓰기도 한다.
“2016년에 불발 쿠데타가 일어나고 언론사가 없어지고 직장이 사라지니까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한동안 너무 힘들었죠. 글도 쓰고 육체노동도 하고, 아랍 사람 의료 통역 등 다양한 일을 했어요. 어떤 친구가 ‘지방에서 노동 일자리가 났는데 사람이 필요하다, 일당이 10만원이다’라고 해서 바로 간 적도 있죠.”
생계를 위해 스탠딩 코미디 무대를 기획하기도 했다. 대학로 소극장을 빌려 공연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개그콘서트〉 〈대한외국인〉 등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고 최근에는 유튜브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 앞으로 꿈꾸는 미래가 있다면요?
“제 최초의 직업이 기자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개인 채널도 보도 위주로 끌고 가지만 중간중간에 코미디 영상들을 넣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언론 활동도 열심히 하고, 코미디도 열심히 할 계획입니다.”
《세계 독립의 역사》라는 책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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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는 《세계 독립의 역사》 《있는 그대로 튀르키예》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등의 책을 펴냈다. |
“아니요. 그냥 저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 고향 아라라트산이 쿠르드족과 아제르바이잔족, 시아파·수니파가 섞여서 사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 노하우를 배우게 됐어요.”
― 튀르키예계 한국인 이런 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어쨌거나 쿠르드족이고 튀르키예 국적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입장에서 8·15 광복절 이럴 때 느끼는 특별한 감회 같은 게 있습니까?
“저는 2019년에 《세계 독립의 역사》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민족주의의 출발을 흥선대원군 때로 보고 우리 독립까지의 약 100년을 탐구했습니다. 그 100년 사이에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미국 독립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까지 200년을 바탕에 깔고, 한반도의 100년을 병행해서 기술했어요. 미국과 프랑스에서 민족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한국에서는? 민족주의, 조직, 종교, 젊은이들이 이제 독립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라면 한국의 독립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살폈습니다. 그 책을 내고 뿌듯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증명한 느낌이었거든요.”
― 민족이란, 국가란, 국민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민족이라는 것은 지정학적인 울타리 안에서 공동의 운명을 위해 달려가는, 같은 문화와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죠. 지금 한국은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데 제가 볼 때 이제 다문화(多文化) 사회로 가야 하느냐 마느냐는 이미 한참 지난 질문이고, 어떻게 하면 다문화 사회로 우리가 연착륙(軟着陸)할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한 질문 같아요. 예를 들면 유럽도 경제 발전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죠. 그런데 다문화 정책을 유럽과 비교하면 답이 없습니다.”
“다문화 정책의 핵심은 인프라”
― 핵심은 무엇입니까.
“인프라입니다. 유럽은 그동안 인프라 수준에 맞게끔 이민자를 받았어요. 그 사람들이 나름 그 인프라 속에서 제대로 동화(同化)가 됐는데 1990년대 이후로는 소련 붕괴, 유고슬라비아 분열 등 국제적으로 좀 뒤집혔잖아요. 다문화 정책이 결정적으로 깨진 건 시리아 내전 때문입니다. 인프라가 수용할 수 없는 규모로 난민이나 이민을 받으면 혼란은 불가피합니다. 인프라를 제대로 깔면 문제가 없어요. 근데 인프라를 안 깔면 천사(天使)들을 데리고 와도 문제가 일어납니다.”
― 대한민국의 소멸을 막기 위해 어떤 인프라를 깔아야 됩니까.
“다문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죠. 프랑스가 지금 제일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나라잖아요.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은 하지 않은 짓을 했어요. 이민자들을 한 지역에만 모아놓은 겁니다. 사실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하게끔 잘게 나눠서 스며들게 해야 하는데, 다 모아놓으면 이 사람들이 거기서 어떻게 프랑스 문화를 익히고 프랑스 사회에 정착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뒤집으면 일본이나 미국에 코리아타운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것 만들지 말고 좀 더 잘게 분화해서 그 사람들이 미국 사회, 일본 사회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진정한 이민 정책이죠. 물론 미국에 있는 코리아타운은 일종의 관광지 비슷한 거점이니까,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이민자 거주지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무엇을 개선해야 합니까.
“우리 한국은 지금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얘기 없이 ‘이민자를 받자, 말자’ 이 얘기만 합니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지금 인프라가 있느냐 없느냐?’ ‘이 인프라로 몇 명을 받을 수 있느냐?’ 이 얘기를 먼저 해야죠. 그러니까 ‘그분들이 와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기여하면서 세금도 내고 건강하고 건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핵심인데 그 후의 얘기를 그것도 너무나 미화하거나 악화하면서 얘기하니까 문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런 한국인이 늘어난다면 대한민국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번영하고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