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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인터뷰

서울 농대 전설 ‘샌드 페블즈’ 50년

“풋풋했던 스무 살 청년들이 일흔이 됐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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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과 다시 모여/ 시끌벅적 노래 연습/ 우리들의 50년은/ 한 곳만 보고 달린 세월’
⊙ “자기주장 내려놓고 서로 맞춰가며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만드는 것, 이게 밴드 음악이고 리더십 과정”
⊙ “3학년 되면 후배에게 물려주고 일상으로 돌아가 자기 인생 개척”
⊙ 밴드 1대 전설 장세권,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 1억원 쾌척
⊙ “샌드 페블즈 출신들이 사회에 나가 전부 훌륭한 리더가 되었어요”
⊙ 5대 전설 산울림 김창훈, “샌드 페블즈는 제 음악에 있어 자궁 같은, 고향 같아”
⊙ 샌드 페블즈 출신 서울대 교수 허진회 “밴드는 한 가족, 악기는 애인”
⊙ 50대 마재헌, “막내 멤버 뽑는 데 40명 지원… 보컬은 15대 1 치열해”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위치한 농업생명과학대학 내에 전설의 밴드 샌드 페블즈의 연습실이 있다. 모처럼 선후배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허진회(21대), 김창훈(5대), 장세권(1대), 마재헌(50대).
  짙푸른 하늘에 싱그런 교정/ 우리들의 웃음소리 통기타 소리/ 푸르름의 향기 우리들의 젊음/ 우리들의 사랑 노래/ 졸업하고 군대 가고/ 취직하고 장가가고/ 아이 낳고 이룬 가정/ 하루하루 바쁜 나날/ 우리들의 오십 년은/ 한 곳만 보고 달린 세월
  친구들과 다시 모여/ 시끌벅적 노래 연습/ 지나버린 시간 속에/ 떠오르는 그 노래들/ 우리들의 오십 년은/ 한 곳만 보고 달린 세월
 
  -샌드 페블즈의 50주년 기념 음반에 실린 노래 ‘우리들의 50년’ 중에서

 
  작가 권지예의 소설 제목처럼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하던 스무 살 무렵, 밴드 샌드 페블즈(Sand Pebbles)가 만들어졌다. 1972년이었다. 서울대 농과대학(현 농업생명과학대학) 밴드 샌드 페블즈는 보컬 주대명, 기타 장세권·김동만, 베이스 윤장배, 드럼 이남묵, 색소폰 장학상, 매니저 김병철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이후 50여 년을 이어왔다. 올해 대(代)수로 52대가 배출되었다.
 
  샌드 페블즈란 이름은 이남묵의 첫 제안, 나머지 멤버의 만장일치로 결정됐는데 스티브 매퀸과 캔디스 버겐이 주연한 영화 〈산 파블로〉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매료돼 따온 것이었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코로나19로 샌드 페블즈의 50주년 기념행사가 미뤄진 상황에서, 다행히도 50년 역사를 추억하는 앨범이 작년 12월 만들어졌다. 모두 11곡이 실렸는데 50대 새파란 막내부터 1대 전설의 노장들까지 참여해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시절을 원 없이 추억했다. 무엇보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나 어떡해’를 목이 터져라 다시 불렀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나 어떡해 나를 두고 떠나가면/ 그건 안 돼 정말 안 돼 가지 말아/ 누구 몰래 다짐했던 비밀이 있었나/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샌드 페블즈 5대 김창훈 작사·작곡 ‘나 어떡해’ 중에서

 

  서울 농대라고 해서 시골 벽촌이나 깡촌 출신이 입학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와 지방 명문고 출신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샌드 페블즈 역시 당대 유행하던 통기타와 포크 록, 그리고 묵직한 하드 록을 들려주던 밴드였다. 그 시절 대학 주변을 서성이던 이들이라면 서울 농대 하면 샌드 페블즈가 생각나고, 서울 농대생 김창완·창훈이 주축이 된 산울림을 생각해도 샌드 페블즈가 먼저 떠오른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기자는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위치한 농생대를 찾았다. 이곳 건물 지하 샌드 페블즈 연습실에서 1대 장세권(張世權·농기계 70학번), 5대 김창훈(金昌勳·식품공학 75학번), 21대 허진회(許進會·원예 91학번), 50대 마재헌(馬在憲·국어국문 22학번)씨를 만나 그룹 인터뷰를 가졌다. 현재 샌드 페블즈는 서울대 농생대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밴드가 아니다. 문턱을 없애버렸다. 서울대 학생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사라진 트로피
 
  허진회 서울대 농생대 교수가 샌드 페블즈의 역대 수상 트로피 몇 개를 가져와 기자 앞에 들이밀었다. 제11회 〈MBC 대학가요제〉 입선(1987년)과 제16회 동상(1992년) 트로피였다.
 
  ― 제1회 대상 트로피가 안 보이네요.
 
  허진회 “그게… 사라졌어요.”
 
  김창훈 “그때 대상 트로피가 농과대학 학장실에 있었는데….”
 
  허 “그런가요?”
 
  김 “그때 내 기억엔 학장실에 기증했어요.”
 
  장세권 “그때 학장님이…. 휴~ 벌써 은퇴하시고 돌아가시지 않으셨을까. (트로피) 인수·인계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허 “수소문해서 찾아보겠습니다.”
 
  허진회 교수는 샌드 페블즈 21대 베이시스트다. 샌드 페블즈 출신 최초 모교 교수이자 이 밴드의 지도교수이다. 또 ‘샌드 페블즈 동문회(Alumni)’ 회장도 맡고 있다. 선배들 챙겨야지 후배들 다독여야지 할 일도 많은데 갑자기 대상 트로피를 찾아야 하는 과업까지 짊어지게 됐다. 얼핏 보니 허 교수 이마에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샌드 페블즈의 시작
 
  서울대 농대 2학년생이 된 주대명(보컬, 농화학 70학번), 장세권 두 사람은 새내기 후배 환영식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바이 바이 러브’를 열심히 부르며 장기자랑을 준비하던 차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바로 윤장배(베이스, 축산 69학번)였다. 기숙사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노래를 들은 윤장배가 같이 하자고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듀엣은 트리오가 됐다. 고교 시절 그룹사운드를 경험했던 윤장배는 두 사람에게 함께 그룹사운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처음 두 사람은 거부했다. 시끄러운 소리, 퇴폐적인 이미지 등 그룹사운드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윤장배는 집요했다. 매일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 설득했다. 그 열의와 새로운 음악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침내 함께 그룹사운드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3명만으로는 밴드를 구성할 수 없었다.
 
  이에 멤버 모집 공고를 냈고 기타의 김동만(농교육 70학번), 드럼의 이남묵(식품공학 70학번)이 합류하며 밴드의 골격이 갖춰졌다. 마지막으로 서울고에서 취주악대장을 지냈던 정학상(색소폰, 축산 70학번)이 가입해 마침내 6명의 창단 멤버가 완성됐다. 여기에 매니저 김병철(축산 69학번)까지 가세했다.
 
  그러나 정작 그룹사운드를 구성하기는 했지만 악기도 없었고, 연습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부득이 저녁마다 기숙사 방에 모여서 연습을 했다. 일렉기타 대신 통기타를 쓰고 드럼이 없어 책상을 두드리는 식이었지만 항상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각자의 악기는 자신이 구입할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앰프 등 장비 구입은 회원 각자가 일부 부담하고 경복, 중앙, 경동, 서울고 동문회 등과 대학학생회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남묵이 드럼을 사 온 날, 멤버들은 구상이 현실이 됨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밴드 처음 결성할 때 어렵던 시절 떠올라 1억원 쾌척”
 
샌드 페블즈 1대 기타리스트 장세권씨가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 1억원을 내놓았다. 오른쪽 사진은 1987년, 92년 〈MBC 대학가요제〉 수상 트로피.
  1대 샌드 페블즈의 전설인 ㈜경우시스테크 장세권 회장은 몇 해 전 밴드 후배들을 위해 1억원이란 거액을 장학금으로 내놨다. 무슨 연유로 이 큰돈을 쾌척했을까. 장 회장의 말이다.
 
  “밴드를 처음 결성할 때 악기를 마련하려고 기숙사비 아껴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죄다 팔던 시절이 떠올랐어요. 대학 졸업 후 조그맣게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회사가 우여곡절 끝에 이젠 순항을 해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하하, 큰맘 먹고 하하.”
 
  허진회 교수는 여기에 의미를 더 부여했다.
 
  “서울대 전체를 통틀어도 동아리를 위해 이런 장학금 내지 발전기금을 쾌척한 사례는 거의 없거든요.”
 
  막내 50대 마재헌씨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샌드 페블즈가 낳은 프로 뮤지션으로 선후배들에게 ‘음악감독’으로 불리는 김창훈씨도 한마디 보탰다.
 
  “솔직히 대학 동아리에 큰돈 내봐도 빛이 안 나요. 글자 그대로 쾌척한 건데 그게 샌드 페블즈를 지탱케 하는 힘인 것이죠.”
 
  장 회장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이어 말했다.
 
  “밴드를 처음 만들 때 2대 후배를 뽑아 악기 넘겨주고 잘되길 바라는 정도였지 이게 5년을 갈지 10년을 갈지 알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50년을 이어왔어요. 50년!”
 
  순간 장 회장의 눈에서 마치 강렬한 기타 사운드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도 선후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계승되니 참 기특하기도 하고 참 신기하기도 하고 참….”
 
  그는 ‘참…’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저 음악이 좋았을 뿐인데…”
 
  ― 장학금 1억원은 주로 어떻게 쓰나요.
 
  허 교수가 말을 받았다.
 
  “악기 개인 레슨은 물론 후배들이 록 페스티벌에 나가는 데도 지원하고 있어요. 평소 듣고 보고 싶은 밴드 연주를 접하고, 무대 매너를 배우고… 뭐랄까 성취감을 얻는달까? 또 선배님들 모셔다가 강연도 듣고….”
 
  허 교수의 말을 듣던 장 회장이 묵직한 이야기를 꺼냈다.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같이 합주(合奏)하고, 사운드를 맞춥니다. 모두 자기 잘난 것을 내세우면 음악이 안 되잖아요. 자기주장 내려놓고 서로 맞춰가며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만드는 것, 이게 밴드 음악이잖아요. 이런 과정이 리더십 과정 아니겠어요?”
 
  장 회장은 “그래서 장학금 명목도 ‘리더십 장학금’으로 이름 붙였다”고 했다.
 
  음악은 하모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자기 성질 죽이고 균형을 유지해야 음악이 완성된다. 장 회장의 말이다.
 
  “재학 중에는 우리가 사회에 나가 뭐가 될지 몰랐고, 큰 무언가가 되고픈 비전도 없었어요. 그저 음악이 좋았을 뿐인데, 그런데 샌드 페블즈 출신들이 사회에 나가 전부 훌륭한 리더가 되었어요. 지나고 보니까….”
 
  사람마다 성공의 관점이 달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세속적인 관점으로 교수, 박사, 공직자, 사업가, 검사 등등 수없이 많단다. 서울대 출신이니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당연함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나고 보니까 우리 동문들이 전부 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거예요. 심지어 밴드 7대 구성원 전원이 박사야, 박사!”
 
  과거 서울대 농대는 수원 상록캠퍼스에 있었다. (2003년 관악캠퍼스로 모두 이전했다.) 충분한 문화생활 여건이 부족했던 수원캠퍼스에서 매일 저녁 연습에 몰두하며 실력 함양과 동시에 가족과도 같은 돈독한 유대감을 쌓았다고 한다. 허 교수의 말이다.
 
  “당시 대학생 그룹사운드는 매우 생소하던 시절이었잖아요. 그런데도 수원 농과대학에서의 샌드 페블즈 공연은 1200석 규모의 강당을 꽉 채울 정도로 최고 인기 이벤트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3학년 올라가면 무대 떠나는 전통
 
  허 교수가 1대 선배들 이야기를 덧붙였다.
 
  “멤버가 매니저 포함해서 6명이었어요. 지금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기업 CEO를 하셨던 분이 계시고 대학교수, 중앙정부 고위 공직자, 또 대학(고려대) 총장을 역임할 만큼 쟁쟁합니다. 1대 선배들이 길을 잘 닦으셔서 오늘의 샌드 페블즈가 있지 않나 싶어요.”
 
  샌드 페블즈는 2학년 재학 시 1년만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통이 있다. 아무리 사운드에 물이 올라도 3학년에 올라가면 모든 악기를 2학년에게 미련 없이 물려주고 무대를 떠나야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음악을 좋아하니까 계속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을 텐데….
 
  “항상 갈등이죠. 기량도 후배들보다 낫죠, 대부분은. 하지만 연주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기꺼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그냥 뒷바라지만 한다는 게 우리 전통입니다. 이게 1대부터의 원칙이에요.”
 
  장 회장의 말에 다른 후배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 좋아 밴드를 만들었지만 우리가 또 대부분 뮤지션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빠지는 걸 경계했죠. 너무 프로페셔널로 나가면 인생길이 바뀌지 않겠어요? 그걸 억누르고 자제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서로 다른 길을 개척하려 했지요. 그러나 음악의 열정은 지금도 ‘심장’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러더니 장 회장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기 있는 천재들(김창훈을 비롯해 김창완·이수만)이 음악 하는 거야 당연한데… 그것도 아니면서 괜히 어설프게 자기 전공 때려치우고… 프로 뮤지션으로 나서는 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죠.”
 
  식물발달 유전학이 전공인 허진회 교수는 미국 UC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농생대학 교무부학장을 맡고 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그의 심장 한쪽을 불로 지폈던 강렬한 메탈 사운드의 열망을 그때도, 지금도 억누르기 어렵다고 고백했다.
 
  “아직까지도, 지금도 무대 갈망 같은 게 있어요. 기회가 있으면 서고 싶죠. 아이언 메이든, 메탈리카, 그들보다 사운드가 조금 약한 스콜피온스, 본 조비 같은 밴드를 좋아했고 헤비메탈의 고전인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 노래들을 즐겨 연주했는데 그때 취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 이후에도 음악을 했나요?
 
  “샌드 페블즈 동문회가 결성되어 있습니다. 샌드 페블즈를 구성한 각 대수끼리도 음악 취향이 다르니까 ‘헤쳐 모여’를 해서 ‘나는 좀 더 헤비메탈 쪽을 하고 싶다’는 선후배끼리 모이기도 하고….”
 
 
  저 새벽별처럼 워우 워우 예예…
 
샌드 페블즈 창립 50주년 기념 앨범 커버.
  허 교수 또한 이번 50주년 앨범 제작에 참여했다. 6번째 트랙의 곡 ‘새벽별’의 작사·작곡은 물론 베이스 연주까지 맡았다. 또 50년 만에 다시 부른 ‘나 어떡해’에도 기꺼이 참여했다. 그가 만든 ‘새벽별’의 노랫말은 이렇다.
 
  캄캄한 밤하늘에/ 홀로 외로이 반짝이는/ 저 새벽별처럼 워우 워우 예예
  저 멀리 달빛도 없이/ 두렵고 외롭지는 않니/ 내 맘 알겠니 워우 워우 예예
  추억 속 이별은 슬프기만 해/ 아련한 네 미소에 눈물만 나/ 멈춰진 발걸음과 싸늘한 바람소리/ 눈을 들어 차가운 새벽하늘을 봐
  -
  샌드 페블즈 50주년 기념 앨범에 실린 ‘새벽별’(작사·작곡 허진회·THE ELYN)

 
  5대 샌드 페블즈 ‘김창훈 감독’이 50대 마재헌에게 이렇게 물었다.
 
  “후배님은 우리가 몇십 년을 이어온 동력(動力)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막내는 거침없이 말을 받았다.
 
  “서울대 내에 과마다 밴드가 하나쯤은 있을 정도로 밴드가 붐인데, 그중에서도 샌드 페블즈는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구조 때문이라 생각을 하거든요.”
 
  ― 구조라….
 
  “1년 활동을 하다가 때가 되면 후배들에게 우리 역할을 넘겨주고, 우리는 그 안에서 팀을 짜서 공연할 수 있고, 다른 밴드를 계속하면서도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자 구조…. 또 밴드를 잠깐 쉬다가 돌아와도 반겨주는 그런 공간이 샌드 페블즈입니다.”
 
  ― 샌드 페블즈를 주변의 친구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어요?
 
  “입소문이 난 것도 있고요, 농생대 내에서 제일 잘하는 밴드고, 최근 음·미대 쪽에서 개최하는 페스티벌에 나가 대상을 수상해 부상으로 100만원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수원캠퍼스의 엄청난 음악장이들’
 
이수만(뒷줄 왼쪽 두 번째)과 김창완(뒷줄 가운데), 그리고 샌드 페블즈 OB 멤버들. 이수만·김창완 사이에 이남묵(1대). 앞줄 왼쪽부터 주대명(1대), 정학상(1대), 장세권(1대).
  ― 이번에 52대 멤버를 뽑았다던데 경쟁률이 어땠어요?
 
  “전체적으로 한 6명 뽑는 데 40명 정도 지원했으니까 옛날에 비해서는 조금 많아진 수치라고 듣기는 했고요, 보컬은 치열해 15대 1 정도고, 기타는 2명 뽑는 데 한 10명씩은 왔고….”
 
  ― 멤버를 정하는 데 청탁 같은 거 없어요?
 
  “그런 건 없고요, 하하하.”
 
  ―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농기계 71학번)이 샌드 페블즈에 지원했다가 오디션에서 떨어졌다는 세간의 농담이 있던데 진실이 뭡니까.
 
  장세권 회장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건 아니고요, 아니 이수만씨가 관심은 있었죠. 근데 그는 이미 통기타 가수로 데뷔한 상태여서 록 밴드를 한다는 게 좀 안 맞았죠. 통기타 가수로 나서지 않았으면 아마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당시 샌드 페블즈 2~4대들과 수원캠퍼스에서 같이 다니며 교류는 계속 있었죠. 이수만씨는 고교 1년 후배인데다 과 후배거든요. 완전히 직계 후배죠. 물론 서로 휴학하고 군대 가고 그러면서 학교에서 같이 다닌 기간은 짧았지만, 바로 뒤에 산울림의 김창완(잠사학과 71학번)이 또 들어왔었고, 그때는 서로 추구하는 바가 뭔지도 몰랐어요. 또 대학 시절 얌전했던 ‘김 감독’(김창훈)이 샌드 페블즈에 들어와 정말 기뻤지요.”
 
  이 대목에서 장 회장은 한 번 숨을 몰아쉰 뒤 덧붙였다.
 
  “나중 생각해보니 당시 수원캠퍼스에 엄청난 음악장이들이 있었던 거예요. 이수만, 김창완, 김창훈, 샌드 페블즈… 1970~80년대 대중음악사에 이만한 인재풀이 어디 있나요?”
 
 
  산울림과 샌드 페블즈
 
  ―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은 샌드 페블즈에 가입한 겁니까, 안 한 겁니까.
 
  “그는 보통 사람들하고 완전히 다른 뭐가 있었죠.”
 
  ― 록 음악을 지향했다는 측면에선 산울림이나 샌드 페블즈나 엇비슷할 것 같긴 한데….
 
  “세부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차이가 엄청 있는 게요, 저희 때는 창작곡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100% 카피 밴드였습니다. 당시 즐겨 연주하던 밴드가 C.C.R.인데 굉장했지요. 완전 통기타에서 포크 록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소리가 멋있게 들렸었죠. 그러다가 1971년에 지미 핸드릭스가 나와서 징징거리면서 ‘와… 저런 소리도 또 멋있구나’ 했는데 이쪽 형제들(산울림)은 완전히 창작곡으로 나왔지 않습니까?
 
  종(種)이 좀 다른 거죠, 우리하고는…. 샌드 페블즈를 전국적으로 알린 ‘나 어떡해’도 ‘김 감독’이 창작한 걸로 대상 받은 거니까… 정말 대단한 뮤지션이라 볼 수 있지요.”
 
  산울림은 곡들을 대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형제들이 직접 만들었다.
 
  김창완이 만든 산울림 히트곡으론 ‘아니 벌써’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찻잔’ ‘청춘’ ‘안녕’ 등이 떠오르고, 김창훈이 만든 히트곡으론 ‘회상’ ‘독백’ ‘산할아버지’ 등이 있다.
 
 
  전설의 시작 ‘나 어떡해’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로 대상을 차지한 6대 샌드 페블즈. 왼쪽부터 최광석, 이영득, 여병섭, 김영국, 김민수.
  대학생들의 창작곡 경연 대회였던 1977년 9월 3일 문화체육관에서 펼쳐진 제1회 〈MBC 대학가요제〉로 돌아가보자. ‘김 감독’이 작사·작곡하고 6대 멤버들이 연주한 ‘나 어떡해’가 대상을 차지하며 샌드 페블즈는 이후 50년간 전설이 되었다.
 
  ‘나 어떡해’는 참신하고 파격적인 곡 구성과 함께 떠나는 님을 그리는 전통적 애환을 담은 가사로 지금까지도 7080세대를 대표하는 명곡이다. 5대 샌드 페블즈에서 베이스를 쳤던 ‘김 감독’은 6대 후배들의 매니저를 맡았다. 그의 말이다.
 
  “대학 3학년에 올라가면서 2학년들이 현역이 되었고 하여튼 자의 반 타의 반 6대들의 매니저가 되었어요. 당시에 〈대학가요제〉를 개최한다는 TV 광고가 나오고 난리가 났었죠. 우연히 그걸 보고서 후배들에게 나가겠느냐 물었더니 다들 나가겠다는 거예요.
 
  근데 창작곡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고 해서 제가 쓴 곡으로 여름 내내 연습했죠. 중간중간에 형들이 오셔서 편곡 방향을 모니터도 해주시고 조언도 해주셨죠. 당시에는 무슨 상을 탄다는 개념보다 경연(競演)에 참가한다는 데 의미를 뒀어요.”
 
서울대 농대 수원캠퍼스 시절의 샌드 페블즈 연습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있었다. 혹시나 장려상을 받게 된다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당시 사회자는 서울 농대 선배인 이수만. 그가 발표한 장려상 수상자 명단에 샌드 페블즈라는 이름은 없었다. 분명 기대는 안 했지만, 기대를 영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단다. ‘김 감독’의 말이다.
 
  “장려상이 발표되고 ‘이젠 틀렸다’고 주섬주섬 악기를 챙겨 나가려는데, 사회자가 이수만 선배셨잖아요.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어떤 떨림이 있으시더라고요.”
 
  ―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목소리 속에 떨림이, 굉장한 설렘과 흥분된… 약간의 그런 게 있더라고요. 그걸 감지했지요. 이건 뭐 도저히 비현실적이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바로 그때 우릴 호명(呼名)하는데 아주, 참, 그때 그 희열과 환희는 평생 잊히지 않죠.”
 
  ― 샌드 페블즈와 산울림은 어떤 관계인가요.
 
  “실질적인 관계는… 제가 산울림이면서 샌드 페블즈이기에 대중이 간혹 혼란스러운 부분이 좀 없지 않아 있겠죠.”
 
 
  “샌드 페블즈가 산울림의 마중물 역할”
 
작년 12월 9일 서울 마포구 ‘벨로주 홍대’에서 샌드 페블즈 창립 50주년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공연을 가졌다. 1대 멤버들이 모처럼 모여 연주하는 장면이다. 왼쪽부터 1대 윤장배, 정학상, 주대명, 장세권, 이영득(6대).
  ― 같은 뿌리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허진회 교수가 말을 받았다.
 
  “김 감독님(김창훈)이 산울림과 샌드 페블즈의 핵심 교집합으로 자리하시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농생대를 배경으로 하는 두 개의 큰 밴드….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의 큰 공집합하에 자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집합’ ‘공집합’이란 단어 속에 당대를 같이했던 스무 살의 음악적 열정이 서울 농대와 수원캠퍼스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를 빛나게 만들었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리라. 가만히 듣고 있던 ‘김 감독’이 말을 이었다.
 
  “샌드 페블즈는 제 음악에 있어 자궁 같은, 고향 같은 역할을 했어요.
 
  우리 삼 형제가 만든 곡들 중에 세상에 가장 먼저 알려진 곡이 ‘나 어떡해’잖아요. 어떤 순서적으로나 원인(原因) 관계로 봤을 때 샌드 페블즈가 산울림을 낳았다고 할 수 있죠.”
 
  그는 ‘낳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말하자면 샌드 페블즈가 산울림의 마중물 역할을 한 거죠.”
 
  그는 지금도 분주하다. 작년 9월부터 산울림 50주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산울림 창립 50주년이 되는 2027년까지 밴드와 멤버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 50곡’을 후배 뮤지션과 리메이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김창훈의 솔로 곡 ‘손’을 재해석한 인디밴드 오월오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디오스 오디오, 갤럭시 익스프레스, 크랙샷, 롤링쿼츠, 디핵, 솔루션스, 유다빈밴드, 허클베리핀, 사뮈 등이 50주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향후 로맨틱펀치, 원슈타인 등 한국 음악시장을 대표하는 이들이 이 위대한 여정(旅程)에 함께할 예정이다.
 
  감회가 새로운지 ‘김 감독’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샌드 페블즈는 제 음악의 고향이고 음악의 어머니죠. 샌드 페블즈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여학생이 멤버의 절반 넘어
 
  2003년 관악캠퍼스로 농생대가 이전한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전에는 2학년 재학생들이 주축이 돼 활동했으나 이제는 신입생인 1학년이 당대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학부제 전환 이후 신입생 감소에 따라 멤버 수급이 어렵게 되어 타 단과대 학생들의 참여도 많아지고 있다. 여학생 멤버도 절반이 넘는다. 과거엔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다. 현재 샌드 페블즈 51대와 52대 멤버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허진회 교수는 “여학생의 경우 과거엔 키보드 정도의 악기에만 국한되었는데 지금은 보컬, 기타, 드럼까지 확대되었다”며 “음악 취향도 많이 변해 외국의 고전 하드 록보다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음악을 주로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 스무 살 초반의 50대 분위기는 어떤가요? 어떤 음악을 주로 연주하고 공연하나요?
 
  마재헌씨가 조금 신이 난 모습을 띠며 말을 받았다.
 
  “인디밴드 붐이 요즘 불고 있어 그들의 음악을 많이 커버하고요, 허 교수님같이 헤비메탈 음악을 좋아하는 이도 있어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고요.
 
  최근에 공연 준비하며 밴드 실리카겔과 메탈리카 곡을 커버해 한번 들고 가서 본 조비 노래랑 연결해서 공연한 경우도 있고요.”
 
  ― 실리카겔? 아십니까? 들어보셨어요?
 
  허 교수가 “요즘 인디밴드들 잘 모른다”, 장 회장 또한 “못 들어봤다”고 하자 막내 재헌씨는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리카겔… 요새 대세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김 감독’이 정리했다.
 
  “얼터너티브 음악을 하는 이들이죠. 뉴웨이브에다가 굉장히 모던한 록인… 2년 전부터 좀 움직임이 있다가 아마 작년에 팍 떴을 겁니다. 요즘 인디밴드 중에서 탑이라고 봐야지.”
 
 
  ‘50주년 기념 음반’
 
작년 12월 9일 샌드 페블즈 창립 50주년 기념 앨범 발매를 축하하는 공연을 가진 후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 작곡도 하나요? ‘김 감독’처럼.
 
  마재헌씨는 “저희 50대에 작곡에 관심 있는 이가 몇 명 있어서 50주년 기념 앨범 만들 때도 참여했다”고 말했다.
 
  50대 보컬 이석주와 기타리스트 마재헌이 함께 만든 ‘답장이 없는 너’의 노랫말은 이렇다.
 
  어지러이 들뜬 마음이 정처 없이 걷는 발길이/ 어딜 갈지 모르네. 나의 눈을 적시네.
  소중히 담았던 마음이 고민하며 썼던 문장이/ 저 위로 흩어지네. 눈물은 서럽게 떨어지네.
  마음은 다신 안 오고 평소처럼 지내봐도/ 옥상엔 흩날리는 담배연기만
  사실, 네게 말을 하고 싶었어/ 답장 없는 너, 난 슬픔에 젖어/ 주고받은 그 새벽의 잘 자란 말마저
  잊어야 하나 봐. 이 밤을 채웠던/ 우리 지난 말풍선들만 어루만지네.
 
  -작사 이석주, 작곡 이석주·마재헌의 ‘답장이 없는 너’ 중에서

 
  ― 공연 때 전설의 선배들이 불렀던 ‘나 어떡해’도 같이 부르나요?
 
  마재헌씨는 “당연하다”며 “합주할 때, 공연할 때 레퍼토리 중 하나다. 산울림 곡도 커버한다”고 귀띔했다.
 

  ― 샌드 페블즈 50주년 기념 앨범은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됐나요.
 
  ‘김 감독’의 말이다.
 
  “지금부터 7년 전, 그러니까 (1대) 형님들 뵌 게 2017년 겨울인데요, 몇 년 지나면 50주년이 되겠다 싶어 제 머릿속에 있던 걸 형님들 좀 모시고 의견을 나눴지요. ‘우리 50주년은 또 다른 50주년을 기약하는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해’라고 생각했지요.
 
  형님들에게 의견을 여쭈니 한결같이 찬성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제가 헌정곡을 써서….”
 
 
  ‘야, 이거 정말 100년 갈지 모르겠다’
 
  장 회장이 덧붙였다.
 
  “그게 2018년 1월 1일이었어요. ‘김 감독’이 ‘나 샌드 페블즈야’라는 노랫말하고 기타 코드를 제게 줬어요. 냅킨 같은 화장지에다 써서….”
 
  김창훈이 작사·작곡한 1대 선배들을 위한 위대한 헌정곡 ‘나 샌드 페블즈야’는 이런 노랫말을 담고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너는 없고/ 목청껏 불러봐도 찾지 못해/ 콘셉트 연습실 생각이 나/ 그제야 떠오르는 우리의 모습
  장배야 세권이는 어디 있냐/ 남묵아 학상이는 잘 있더냐/ 늘보 대명이가 또 지각이네/ 풋풋했던 칠십 년대 우리의 모습/(중략)
  스무 살 청년들 일흔이 됐네/ 지나온 오십 년 후회는 없어/ 그래도 마음이 공허해지는 건/ 덧없는 인생 아쉬운 시간
 
  -‘나 샌드 페블즈야’ 노랫말 중에서

 
  ― 50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50년 후 샌드 페블즈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장세권 회장의 말이다.
 
  “그 시절, 우리는 음악을 잘하든 못하든 최선을 다했고 이후 취직하고 애 키우고 사업한다고 뛰어다녔는데 후배들이 오히려 샌드 페블즈에 살을 붙이고 의미를 붙여서 신기하고 놀랄 뿐입니다. ‘야, 이거 정말 100년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샌드 페블즈의 가훈’
 
서울대 농생대에 위치한 샌드 페블즈 연습실 벽에 붙어 있는 ‘가훈’.
  허진회 교수는 “샌드 페블즈에는 가훈(家訓)도 있다”며 소개했다.
 
  ‘매니저는 왕이다. 우리는 가족이다. 시간은 금이다. 악기는 애인이다. 할 일은 제때 한다. 연습실은 성전이다.’
 
  허 교수의 말이다.
 
  “샌드 페블즈가 한 가족이고 음악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어진다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학창 시절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샌드 페블즈가 떠오를 겁니다. 그러면 50년 후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50대 마재헌씨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제대로 음악을 하며 데뷔라든가, 그런 밴드 활동을 하고 싶어요. 현재 멤버들이 군대에 가거나 하는 계획이 잡혀 있지만 전역 후에 그런 쪽(프로 무대)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허 교수가 “50대에서 유명 아티스트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니 ‘김 감독’은 “마재헌 후배님이 특별한 연주력, 창의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각별하더라”고 격려했다.
 
  ― 잘 끌어주셔야겠네요.
 
  김창훈 감독은 “하하하. 네, 그래야지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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